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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완서, 문학의 뿌리를 말하다』는 고 박완서 작가가 서울대학교 관악초청강연에서 강의했던 내용과 이어진 문답을 엮은 책이다. 박완서 작가의 작품세계에 관심이 있는 독자는 이 책을 앞에 두고 고민하게 된다. 이 책을 읽을 시간에 작가의 소설을 한편 더 읽어보는 편이 낫지 않을까? 작가가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고 그에 관해 어떠한 이야기를 풀어놓고 싶은지는 그의 작품 안에 고스란히 담겨있을텐데, 그 ‘글들에 관한 말을 글로 쓴’ 이 책을 읽어볼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많은 작품을 읽어보지는 못했지만, 박완서 작가의 팬이라고 자부하는 필자는 ‘박완서’라는 사람을 마치 내 옆에 있는 듯이, 강연장에 앉아 그의 목소리를 듣고 있는 것처럼 만나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이 책을 추천한다. 어느덧 타계한 지 9년이 흐른 박완서 작가를 그의 글로만 기억하는 독자는 거의 없을 것이다. ‘박완서 작가’하면 떠오르는 특유의 소박하고 정겨운 느낌은 그의 글뿐만 아니라 눈과 입이 크게 구부러지는 특유의 웃는 얼굴, 한복을 입고 찍은 사진들, 자연과 꽃을 항상 가까이했던 생전의 모습 등이 함께 어우러져 나온다. 그의 글들은 세상에 그대로 남아있지만, 우리는 세상을 떠난 그를 기억하고, 그리워한다. 우리가 그리워하는 그 사람은 남아있는 글들과 무관하지 않다. 당연히 이 책도 사람에 관한 글이자, 글에 관한 글이다.
필자는 ‘한국’에 관해 생각할 때면 자연스레 박완서 작가가 떠오른다. 이는 아마도 필자가 처음 읽은 작가의 소설이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였고, 손을 부들부들 떨며 마지막 50 페이지를 읽으면서 이 강렬함은 한국인이 아니면 결코 느끼지 못하리라는 생각을 했었기 때문인 것 같다. 그래서인지 이 책에서 ‘한국’에 관한 내용을 발견했을 때 참으로 기뻤다. 패널로 참여한 영어영문학과 민은경 교수는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저는 한때 모국어, 어머니, 고국, 이런 모든 것들로부터 도망치고 싶었고, 이런 것들의 무게에 질식해서 죽을 것 같았던 때가 있습니다. 도망치고 자유로워지고 싶었던 때가 있었던 거죠.”(p.85) 이 고백은 오늘날 필자를 포함한 많은 한국인 청년들의 마음, ‘헬조선’, ‘탈조선’을 외치며 어떻게든 그 정체성을 부정하고 벗어나보려는 마음을 대변한다. 하지만 박완서 작가는 이 도피가 결코 가능하지 않은 것임을, 그 한계를 받아들일 때 우리가 비로소 자유로워질 수 있음을 다음과 같은 애정 어린 말로 대신한다. “모국어야 너는 얼마나 작으냐? 작지만 얼마나 예쁘고 오묘한지 알기 때문에 더 이상 작아지는 건 차마 못보겠다. (......) 나는 모국어 안에서만 비로소 자유로울 수 있다. 그게 내 한계이자 정체성이다.”(p.85)
필자는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를 읽으면서 직접 경험하지 못했던 전쟁을 작가의 글로 체험했고, 『그 남자네 집』을 읽으면서 결코 온전히는 상상하지 못할 전후의 빈곤을 활자로나마 느꼈다. ‘한국적인 것’을 말하는 것이 상투적이고 촌스럽게 여겨지는 오늘날, ‘한’ 마저도 일제강점기의 산물이라던데 그렇다면 도대체 ‘한국적인 것’이란 무엇인지 그 내용물을 잃어버린 오늘날, 그래도 필자는 박완서 작가의 글을 읽으며 ‘이 언어적 아름다움은 한국인이 아니면 느끼지 못할 거야.’ ‘이 역사의 아픔은 한국인이 아니라면 결코 알지 못할 거야.’라는 위안에 잠기곤 한다. 마치 고향에 온 듯한 안정을 느끼곤 한다.
우리가 박완서 작가의 글에서 편안함을 느끼는 또다른 이유는, 박완서 작가의 글이 너무나도 소박하기 때문이다. 그의 글이 작고 미흡해서 소박하다는 뜻이 아니라, 너무나도 서민적이고 솔직해서 소박하다. 가난이라는 서민적 조건과 뒤따라오는 물리적 욕망을 고스란히 담아내면서도, 자신이 가진 작은 특권들-예를 들면 서울대-과 그에 딸려오는 권위의식을 애써 포장하려 하지 않는다. 박완서 작가가 박수근 화백을 주인공으로 하는 『나목』으로 작가의 삶을 걷기 시작한 것은 우연이 아니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박완서 작가의 소박한 글들은 박수근 화백의 그림을 꼭 닮아 있기 때문이다. 박완서 작가는 강연을 통해 박수근 화백과 함께 PX에서 근무했던 시절의 일화를 세세하게 알려준다.(pp.40-51) 오늘날 우리나라 문학계와 미술계의 거장이 하루하루 살아보겠다고 미군들에게 초상화를 팔며 고생하던 이야기를 듣노라면 눈물이 차오른다. 필자는 이 책을 읽으며 다시 한 번 고마움을 느꼈다. 모두가 피난 간 서울에 혼자 남아 달동네 언덕 위에서 지금 이 순간을 잊지 않고 글로 쓰리라 결심했던 그 소녀에게, 그리고 정말 잊지 않고 글로 써 준 박완서 작가에게 고마움을 느낀다.
마지막으로 박완서 작가의 페미니즘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박완서 작가를 아는 사람이라면 결코 모를 수 없는 사람이 바로 그의 어머니이다. 박완서는 이 책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저는 우리 엄마가 요새 세상에 태어나셨으면 글을 쓰셨을 거라고 생각합니다.”(pp.22-23) 박완서 작가의 어머니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작가의 재능이 어머니로부터 온 것임을 확신하게 된다. 박완서 작가는 어머니가 글을 못 쓴 만큼 많은 글을 세상에 남기고 갔다. 『그 남자네 집』에는 후대의 여성들이 전 세대의 여성들을 대변하고 위하는 태도가 드러나 있다. 양공주였던 춘희는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며 자신의 조카가 지금 양공주들이 한국의 경제성장에 얼마나 기여했는지 연구하고 있다고, 그래서 위안을 받는다고, 울먹이며 말한다.(pp.86-88) 작가의 페미니즘은 분노와 감정을 완전히 거세하지 않은 채, 하지만 그것이 중심이 되지 않은 채, 여성들을 연결한다. 서로 단절시키지 않고, 그들을 소통시켜 서로를 더욱 강하게 만든다. 페미니즘에 대한 논의가 참 활발한 요즘 우리가 다시 한 번 주목해야 하는 것이 박완서 작가의 글, 그리고 그 속의 페미니즘이 아닐까 싶다.
이 책을 읽으면서 필자가 아직 읽지 못한 박완서 작가의 많은 책들을 간접적으로 소개 받았다. 어서 빨리 그 작품들을 읽어보고 싶은 욕구가 솟구친다. 마지막 장을 덮었을 때 더 많은 책들을 읽고 싶게 하는 책이 좋은 책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은 바로 그런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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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밌습니다. 식민시기 상대적으로 유복했던 어린 시절에 대한 기억, 어머니에 대한 기억, 풋풋한 대학생 시절과 한국전쟁, 주부로서의 삶, 뒤늦게 창작욕이 터지기 시작한 이야기까지. 곁다리로 참 좁은 한국사회란 생각이 드는 문단과 주변 인물들과의 에피소드들. 이 책의 부제는 "문학의 뿌리를 말하다"이고, 그에 충실하게 그녀의 머리와 가슴을 채워온 인생사, 한국 사회사를 이야기합니다. 박완서 자서전이든 분석 책이든 많겠으나, 박완서가 자신의 "목소리"로 말한 책을 찾는다면, 상당히 유익하리라 생각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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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완서 선생님은 언제나 그립다. 더이상 그 촌철살인의 글을 볼 수 없음은 언제나 허전함으로 남는다. 이제 익숙해져야하는데도, 서점에서 마땅한 책이 없어 빈 손으로 돌아와야할때, 그 헌전함은 바다가 되고 산이 된다.
웃긴건...그런 그리움때문에 이 책을 선택한건 아니였고, 그저 얼마간의 적립포인트나 할인을 염두하고, 또 세일까지 하고 있어서 얼추 금액을 맞추기 위하여, 카트에 집어놓고 받아보았더니...일단 그 책의 얄팍함에 놀랐고, 담고 있는 내용의 얼개가 마땅치 않아 인상이 자연스럽게 찌푸려지게 되었다.
이래서, 작가 사후에 출간되는 것들에 대해서는 의심부터 해야하는건가?
강연과 토론의 내용은, 박완서 선생님의 글을 사랑해왔던 사람이면, 이미 익숙한 내용들의 반복이다. 그래서, 리뷰나 후기를 새로 쓰기에도 머쓱할 지경.
대신, 새로운 분노가 앞선다. 서울대학교는 자타가 공인하는 우리나라 최고의 교육 기관이고, 거기의 기초교육원에서 나온 책이면...일단 거기서 먼저 먹어준다. 즉, 신뢰를 하게 된다는 말이다. 하지만, 100페이지 조금 넘고, 그것도 대부분의 사진과 이런 저런 내용들을 짜집기한 것을 생각하면, 이 책을 받자마자 드는 생각은 "과연 사회 정의는 무엇인가?"하는 물음이다. 소책자로 무료배포해도 시원치 않을..혹은 어느 웹페이지에 실렸어도 무방할 정도의 컨텐츠를 책으로 묶어낸 작태를 보니, 날도 더운데 짜증이 밀려온다.
컨텐츠와 상관없이 이런 출판물을 보고....'과연 신뢰,라는 것을 도대체 어디서 찾아야하나'를 잠깐 고민하기도 했던 것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