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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블로그에 가끔 실리는 박노자 선생의 불교 관련 글을 읽었다. 박노자 선생님이 불교 관련 책을 썼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마침 책이 나왔다. 박노자 선생은 원시 불교, 아함경이나 빠알리어 경전에 나온 부처님의 말씀에 기대어 오늘날 한국 불교를 비판하고 있다. 왜 원시불교에 기댈까? 부처님의 원래 말씀에 가깝기 때문이다. 아함경이나 빠알리어 경전은 부처님의 원래 말씀에 가깝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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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자님의 책은 항상 읽은 한국인의 신경을 거슬리게 한다.(?) 우리나라에서 태어나 우리나라 교육을 받고 자라난 사람들에게서는 찾기 힘든 '외부인의 눈'을 가지고 한국 사회를 신랄하게 비판하기 때문이다. 그의 신랄함이 거슬리면서도 내 안의 '가식'이 슬그머니 꼬리내고 있음을 느낀다.
언젠가 인터뷰에서 자신은 '조계종에 등록한 신자'는 아니지만 불교신자라고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나도 이른바 '전국구 신자'라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다.
이 책은 박노자라는 불교신자가 찾은 '부처의 모습'에 관한 책이다. 덤으로 초기불교 모습에서 많이 멀어지고 있는 현재 한국불교 (특히 다수인 조계종)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 곁들어져 있다. 기독교 신자들이 예수님의 진정한 모습을 찾고 싶어하는 것처럼 불교신자들도 역사에, 지역에, 물들지 않은 진정한 모습의 석가모니 부처님을 찾고 싶어한다.
예전의 한국불교신자들은 오직 중국(한문)을 통해서만 석가모니 부처님을 만날수 있었다. 그러나 글로벌 시대를 맞이하여 요즘에는 직접 팔리어나 산스크리트어, 심지어 영어를 통해 부처님을 만날 수 있다. 그래서 이름도 부처님과 붓다라는 이름을 같이 쓰고 있다. 이 상황에서 한국의 불교는 어떤 방향으로 가야할까?
얼마 전에 불교 TV에서 원효사상에 대한 버스웰 특강을 시청하였는데 민족주의와 국가주의로 포장된 우리나라 불교역사를 참신한 외부인의 시각으로 들어서 매우 기뻤었다. 박노자님의 이 책도 그 강의와 맥락을 같이해서 인도 초기 불교, 동북아 불교에 대한 역사적 언급이 참신하다.
책을 읽다보면 저자에 대해 여러가지 감정이 교차한다. 러시아 출신의 귀화 한국인인 저자가 일반적인 한국인보다 한국고대사에 박식하다(전공)는 점에서 왠지 박탈감과 함께 자괴감을 느낀다. 또한 저자가 '우리'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 왠지 당혹감을 느낀다. 나 스스로 이성적으로는 다문화주의자라고 생각하지만 아직도 무의적으로는 '한국인'의 범주를 혈연에 의지하는 자신을 발견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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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박노자라는 이름이 내 눈을 붙잡았다. 최근에는 한국 고대사가 그 대상이더니 이번에는 뭘 또 씹으시려고 그러시나... 제목을 보아 하니 불교가 씹힐 차례?
진작부터 우리나라 불교를 호국 불교라고 배워 왔기에 별 생각 없었다. 그런데 박노자 같은 근본주의자가 정리해 놓은 글을 보니 제정신이 돌아온 듯하다. 167쪽에 나오는 코끼리 이야기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자신에게 독화살을 쏜 사냥꾼을 용서하고 상아까지 준 코끼리 왕은 죽으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내가 다음 생애에 부처가 된다면 맨 먼저 그대의 삼독을 빼줄 것입니다.” 이것이 초기 불교 정신이라면 어느 누가 ‘당연히’ 살생할 수 있다고 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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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를 죽인 부처/ 박노자/ 인물과 사상사 러시아에서 귀화하여 새롭게 한국인이 된 사람 박노자. 좀 더 알고자 인터넷으로 검색하니 놀라운 사실…지난 4.11 총선에 진보신당 비례대표 6번으로 출마했단다.. 마침내 현실정치에 뛰어 들었나 보다. 개인적인 생각으로인데 계속 학자로 남아 한국사회에 대한 날 선 비판을 멈추지 말아 거시적으로 건전한 사회의 확립을 위한 행보를 내내 해주었으면 싶다. 이명박에게 이용당해 국무총리까지 했으나 이젠 별 볼 일 없게 된 정운찬을 봐라. 여당이든 야당이든 현실정치에는 발 담그지 말고 박노자 표 담론을 지속시켜주길 바랄 뿐이다. 범어로 ‘깨달은 자’인 ‘붓다’가 우리나라에선 ‘부처’로 불리는데 오늘날 한국불교의 암울한 현실을 파헤쳐 날카롭게 비판한다. 마침 최근 부처님 오신 날을 앞두고 조계종 고위 스님들의 도박사건, 술집출입과 성매매 파문으로 일반 재가불자의 도덕성보다 못한 일부 스님이 자리보전하고 있는 현실 앞에서 박노자의 이 책은 아주 점잖은 비판이리라. 이 비판은 건강해야 할 한국불교를 위한 값진 보약이 될 것이다. 이 책의 성격은 머리말에서부터 잘 들어 난다. <입시 경쟁이라는 지옥에서 고통받는 대한민국의 아들딸들을 ‘악업을 지은 결과’라 외면하면서, 고액 과외를 받아 ‘무사 통과’한 강남 자녀들에게는 ‘선업을 잘 쌓은 결과’라며 박수를 보내야 하는가?> <어떤 보상도 받을 수 없고, 반대로 어쩌면 처벌받을 수도 있는 행동에 동참하며 우리는 욕심에서 멀어지는 법을 배우고, ‘남’을 나 자신보다 앞에 두며 타인을 더 생각하는 법을 배운다. 바로 여기서 자아와 타자의 경계선이 지워지고, 우리 ‘자아’가 궁극적으로 망상일 뿐이라는 점을 이해하게 된다> 박노자는 이름하여 ‘해방불교를 위하여!’라고 하는데 아뿔사…최근 대통령을 위시하여 일부 작자들은 종북타령과 국가관으로 한몫 보려는데 행여 박노자도 그런 모함에 빠지지 않을까 걱정된다. 책은 일반적인 불교에 대해, 특히 한국특유의 非 불교적인 현상 몇 가지를 신랄하게 꼬집는다. 또 각 장마다 정리 삼아 도법스님에게 질문하여 도법스님의 답변 형식의 글을 싣는다. 즉 대담형식인데 어떤 장에서는 전혀 부합되지 않는 답변이 있어 맥이 흐트러지기도 하나 3장의 대담에서 도법스님은 명쾌한 답변을 준다. -복을 바라는 기복이 문제인데 기복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福이라는 자체에서 문제가 있는 것이다. 복에 대한 이해와 인식이 고쳐져야 한다 건강, 재물, 행운 등 물질적인 것을 가지고 부처님은 복이라고 애기하지 않았다. 복이란 지혜와 자비가 되어야 한다. 이런 복을 위해 깊게 풍부하게 충실하게 빈다면 문제되지 않는다.- 4장 계율에 관한 장에서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주제로 한국불교를 비판한다. 문제의식이 없어서이기도, 시사에 밝은 편이라 자부함에도 분명 뭔가 부족한 내 탓이다. 병역을 거부한 재가불자가 있었다는 사실도 몰랐고 원광법사의 세속오계, 서산 대사와 사명 대사의 승병 활동을 자랑스런 우리 역사의 부분으로만 보았지 계율과 배치되는 것으로는 전혀 생각하지 못한 부분이다. 한국 불교의 살생유택론 이라든가 호국불교론은 불교의 세계관과 정신, 전통으로 볼 때 뭔가 문제가 있다고 도법스님도 밝히고 있다. 5장에서 박노자는 신격화된 불상에 대해 신랄히 비판한다. 거대 사찰과 손이 큰 시주들이 초대형 불사로 서로 힘을 과시하고 신도들을 끌어 모으는 광경을 어렵지 않게 본다. 애초 만해 한용운은 부처님의 그림이나 조각을 숭배하는 것에 반대했으나 불교미술품이 신행을 위해 쓰이는 자체는 불가피한 것으로 이해한 만큼 불교미술품을 우상화하는 것은 올바르지 않다. 그러함에도 한국 불교는 초대형 불사가 여전히 개인 시주와 사찰의 권위를 세우는 중요한 방법으로 통하는 현실을 꼬집는다. 7장에서는 국가의 폭력에 무기력한 불교를 탓한다. 해방 이후 불교계의 권위자라는 권상로. 그는 승려로서 일제시대에 “천황이 바로 부처님이시다” “전쟁은 바로 불교적 실천이다” “우리 제국이 바로 부처님의 나라다. 우리 제국을 위해 멸사봉공하는 것이 바로 보살행이다” 라는 발언을 했다고 한다. 비구니 스님이 칼빈 소총을 즐겁게 잡고 사격훈련을 하고 불교의 살아있는 것을 죽이지 말라는 계율을 분명히 위반한 남자 승려의 입대에 대해 결코 파계라고 부르지 않고, 군사주의적 광기가 가라앉았음에도 불교에 훈습된 군사주의 그 자체는 그대로 건재해 있다는 것이다. 박노자. 외모나 외형이 중요하지 않음은 알지만 1973년생, 만 39세의 나이로 특히 외국인의 입장에서 한국사회에 대한 비평도 그렇고, 불교라는 특정부문에서도 이런 글을 쓴다는 사실이 경이롭다. 러시아 태생으로 아주 객관적인 입장이 장점으로, 신선하면서고 독특한 諸 비평을 서술할진대 비평을 위한 기본바탕으로서 상식을 뛰어넘어 박식한 지적 능력에 감탄을 금치 못한다. 아침에 어느 절에 가면 익숙한 장면을 본다. 검은 색의 벤츠, 배기량은 잘 모르나 한 눈에 봐도 제법 대형이다. 승복 입은 젊은 이가 열심히 닦고 있다. 하루 이틀을 본 것이 아니니 저 고급스런 벤츠는 어느 분이 이용하는 승용차일까 그럴 리는 없을 것이다 하면서도 만약 이 절의 주지스님이 이용하는 차량이라면 그는 스님이 아니라 돌중, 땡초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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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한국불교가 과연 붓다의 불교인가? 조사(祖師)의 불교인가를 생각하게 하는 책이다.
언제 붓다가 그렇게 애기했는가?
지금의 비구와 비구니는 생각을 해 봐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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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10여년 만에 다시 읽었다. 제목에 나왔지만 '붓다'는 빨리어 그대로 읽은 발음이고 '부처'는 한역된 발음이다. 즉, 현재의 불교가 원래 부처님 말씀을 왜곡했다고 비판했다. 그리고 '해방'된 재가자 중심의 새로운 불교가 나와야 한다고 말한다.
비판은 특히 불교와 국가의 '야합'(?)에 집중된다. 불교에서 계율은 깨달음으로 가는 중요한 징검다리다. 계율의 첫번째는 살아있는 것을 죽이지 않는 것이다. 여기는 아힘사 즉 비폭력도 포함된다. 하지만, 한국 불교는 '호국불교'라는 미명하에 폭력과 전쟁을 옹호한다. 이는 국가에 기대 자신들의 교세를 유지하기 위한 방편 아닌 방편이다. 물론 부처님 당시에도 이 '불상생'이라는 계율은 완벽하게 지킨 것은 아니지만, 오늘날처럼 노골적으로 국가 폭력을 옹하지는 않았다.
이외에도 자본과의 야합을 비로산 현실 문제에 눈감기(그러면서도 '보시'라는 이름 하에 봉사활동을 더 강화하는 모순) 등의 문제도 지적한다. 이외에도 수행방법으로서 '간화선'이 가진 엘리트주의, 종단 내의 비민주성 등의 문제를 지적한다.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한 방법으로 저자는 초기불교의 정신으로 돌아가자고 말한다. 현재 빨리어 경전이 거의 다 한글로 번역되어 가고 있다지만, 여전히 그 경전이 100% 부처님 말씀이라는 보장은 없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중국화된 불교가 아닌 불교 원형, 부처님 말씀의 원형을 조금 더 있는 그대로 접할 수 있다.
가장 큰 문제는 개인의 '무명'을 깨고 깨달음을 얻으려는 노력과 사회적 '무명'을 이분화하는 자기 모순이 아닌가 싶다. 사실, 이런 비판은 최근 유행하는 초기불교 수행법인 '위빠사나' 수행을 비판하는 시각과도 일치한다. 즉, 불교수행이 사회적 문제에 눈 감은 채 자기 계발 수준으로 전락하는 것 아닌가, 라는 비판이다.
날카로운 책이다. 하지만, 저자의 생각이 얼마나 한국 불교에 통할 지 모르겠다. 한국 불교는 그 뛰어나다는 원효를 포함해 천 년 이상 국가와 타협(타협이라는 말이 적당할 지 모르겠다. 국가가 이 말을 들으면 아니 우리는 불교와 협상을 한 적 없는 데. 단지 지시했고 그들은 따랐을 뿐이라고 말하지 않을까)하며 생존했기 때문이다.
혹, 방편으로서 타협이라도 새로운 형태의 타협이 필요한 것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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