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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꽃샘 추위가 기승을 부린다. 올해 겨울은 유난히 추웠다. 이제 좀 따스해지려나 했더니, 한차례 비가 내리고 강한 바람과 함께 꽃샘 추위가 몰려왔다. 잠시 따스함을 누려서인지 이번 추위는 유난히 추워보인다. 봄이 오기 위한 몸부림이라고 생각된다. 봄의 길목에서 오랜만에 한 권의 시집을 읽었다. 올해 [미당문학상 수상집]이다.
한때는 월간이나 계간으로 출간되는 문예지들을 꼬박 읽고, 그곳에서 있는 시들을 깊이 있게 읽었던 적이 있었다. 특히 그중에서 수상작들을 더 주목해서 읽었던 기억이 난다. 문예지마다 각종 상들이 있었고, 그 상에 수상한 시들이 실려 있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문예지를 손에 놓고, 시도 별로 읽지 않았떤 기억이 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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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회 미당문학상 수상작 수상시인 박상순
무궁무진한 떨림, 무궁무진한 포옹 그럼, 수요일에 오세요. 여기서 함께해요. 목요일부턴 안 와요. 올 수 없어요. 그러니까, 수요일에 나랑 해요. 꼭, 그러니까 수요일에 여기서… 무궁무진한 봄, 무궁무진한 밤, 무궁무진한 고양이, 무궁무진한 개구리, 무궁무진한 고양이들이 사뿐히 밟고 오는 무궁무진한 안개, 무궁무진한 설렘, 무궁무진한 개구리들이 몰고 오는 무궁무진한 울렁임, 무궁무진한 바닷가를 물들이는 무궁무진한 노을, 깊은 밤의 무궁무진한 여백, 무궁무진한 눈빛, 무궁무진한 내 가슴속의 달빛, 무궁무진한 당신의 파도, 무궁무진한 내 입술, 무궁무진한 떨림, 무궁무진한 포옹. 월요일 밤에, 그녀가 그에게 말했다. 그러나 다음 날, 화요일 저녁, 그의 멀쩡한 지붕이 무너지고, 그이 할머니가 쓰러지고,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땅속에서 벌떡 일어나시고, 아버지는 죽은 오징어가 되시고, 어머니는 갑자기 포도밭이 되시고, 그의 구두는 바윗돌로 변하고, 그의 발목이 부러지고, 그의 손목이 부러지고, 어깨가 무너지고, 갈비뼈가 무너지고, 심장이 멈추고, 목뼈가 부러졌다. 그녀의 무궁무진한 목소리를 가슴에 품고, 그는 죽고 말았다. 아니라고 해야 할까. 아니라고 말해야 할까. 월요일의 그녀 또한 차라리 없었다고 써야 할까. 그 무궁무진한 절망, 그 무궁무진한 안개, 무궁무진한 떨림, 무궁무진한 포옹 … 박상순 p12~p13 일상적 감정과 정서가 녹아 있는 남녀의 안타까운 결말이지만 늘 그러하듯이 남녀가 설레는 마음은 진심어린 사랑시가 아닐까 이 두 페이지를 벗어나지 못하고 이른 저녁잠에서 깨어나 다시 읽고 다시 읽고 또 읽고......, 남성의 ‘에로스적’ 욕망과 여성의 ‘방어기제’는 우리들의 자화상이 아닐까 ‘에로스’라는 진실함에 남자로써 동감이 가며 상대 여자의 ‘방어기제’에 대한 여자의 답에 죽을 것 같은 사랑의 슬픔을 느낀다. 마광수 교수의 소설과 세사르 바예호 시가 새롭게 교차한다. 기괴하지만 인간의 숨겨진 욕망을 표현한 성적인 작품이지만 묘한 매력이 있다. 이 시는 욕망의 표현은 늘 변태적이고 끝이 보이는 에로스라는 말에 ‘탄원서’라도 되는 듯 우리들에게 보내는 것 같다. 수십 번 읽다 보면 최근 다시 느껴 보는 세사르 바예호의 시들로 아방가르드가 진정 무엇인가를 다른 시각으로 다가온다. 무궁무진한 떨림, 시로 인해 다른 시들은 눈에 들어오지 않아 한동안 버겁게 느껴졌다. 이 시 한편으로 내가 잃어버린, 숨겨진 아니 감추려고, 남에게 들키지 않으려 애쓰던 순수한 욕망을 이처럼 아름답게 표현할 수 있는지......, 요즘 같은 시대, 미래에 대한 불안과 공포스런 시절로 기억될 지금, 우리들 마음속에 무엇으로 가득 차 있을까 온갖 낙서와 커다란 짙은 페인팅으로 지워지지 않게 마음속이 채워져 빈 공간을 찾기가 어렵지만 시 한편으로 마음 속 빈 공간이 이처럼 또렷하게 찾아낼 수 있는 느낌이다. 어떤 언어적 표현으로 새겨질까? 라는 고민 속에 다시 한 번 더 읽어 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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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고 먼 미래'에는 미래를 알려주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무언가를 묻고 대답을 듣습니다. 농부의 아들은 커서 농부가 되고, 농부의 딸은 다른 농부의 아내가 된다는 예언이지요. 화자는 그들의 대화를 들으며 지금까지와 똑같이 살게 된다는 것에 적잖이 실망합니다. 나아질 것 없는 미래라. 굳이 똑같은 걸 묻고 같은 대답을 들은들 기분이 좋아질까요. 그러다 문득 뛰어가 묻습니다. 오백 년이 지나면 무언가 달라지는지를요. 대답을 들은 그녀의 얼굴이 밝아집니다. 멀고 먼 미래에서나마 달라지는 게 있다는 사실에 그렇게 기뻐합니다. 이 시를 읽고 마음이 가라앉았습니다. 현실에서는 작은 것이 변하는 데도 너무나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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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린 시절부터 책 읽는 것을 좋아했지만 추리소설이나 자기개발서 위주로 읽어왔다. 그래서 이번에 선택한 책이 바로 '무궁무진한 떨림, 무궁무진한 포옹' 있다.
박상순- 무궁무진한 떨림, 무궁무진한 포옹 그럼, 수요일에 오세요. 여기에 함께해요 이 시는 처음에는 화자가 상대와 만날 것을 기다리며 설레하고 있다.
이근화-세상의 중심에 서서 도서관을 세웠습니다. 사람들이 원하지 않는 책을 날마다 주워 와서 번호를 매기고 뜯긴 책장을 붙였습니다. 나란히 꽂았습니다. 사람마다 도서관에 대한 생각이 다르겠지만, 어린 시절에는 주말에 오기 전 금요일에 중앙도서관에 들려서 책을 최대한 많이 빌려오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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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시를 참 좋아한다. 잘 쓰지는 못하지만 시가 주는 무궁무진한떨림과 무궁무진한포옹을 격하게 애정한다. 그래서 대학도 국어국문과를 갔던거 같다. 나름 소녀감성 문학소녀였었지. 근데 나이를 하나 하나 먹어가면서 시따위가 뭘 해줄 수 있는데?하는 삐딱한마음과 함께 시와 점점 나는 멀어지고 있었다. 이별을 고하진 않았지만 시보다는 쉽게 읽히는 에세이나 소설을 더 많이 챙겨보게 되었다.
다산책방에서 나온 제17회 미당문학상수상작품집을 만나게 되면서 아~나 정말 시를 좋아했던 사람이었구나~다시금 시를 사랑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박상순님의 시와 대표작들 그리고 김상혁 김안 김현 이근화 이민하 이영주 이제네 조연호 10인의 시인들의 시와 대표시들을 읽어보니 너무 너무 좋은거다. 소설은 긴호흡을 가지고 읽어야하고 에세이는 글쓴이와 나와 정서가 안맞으면 잘 안보게 되는 그런 단점이 있는데 시는 오롯이 한 편 한 편이 하나의 단편영화같은 느낌이었다. 전업주부이다보니 긴 호흡으로 시집을 읽지 못하고 시간 날때마다 짬짬히 들여다보는데도 시 한 편 한 편 각각의 이야기들의 울림이 너무 커서 내가 시의 바다에 풍덩 빠져드는 느낌이었다.
시집을 보다가 울컥 하기도 하고 공감도 하고 그렇게 시에 대한 내 사랑을 다시 찾았다. 소설은 길게 말하고 계속 말하지만 내 마음을 송곳처럼 찔러대는 날카로움은 좀 부족하다. 에세이는 읽으면서 공감되고 힐링되고 마음도 정돈되고 차분해지고 좋은 점도 많지만 어떤 에세이는 내가 납득할 수 없는 부분을 이야기 할때도 있다. 그래서 한번 읽고 그냥 던져버리는 에세이도 있다. 시는 내가 미처 깨닫지 못한 세상의 부분들을 끄집어 내서 이야기 해주고 어느 순간 깨달음을 준다. 또 내가 공감하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한 시지만 완전히 시랑스러운 부분이 있다.
무궁무진한떨림,무궁무진한포옹은 내가 자주 펼쳐보고 또 들여다볼 시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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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첫번째로 읽고 서평을 쓰는 시집이다. 그 동안 시집은 읽지 않았다. 그 이유는 어려워서 이다. 어떻게 써야 되는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렇지만 한번 도전해 봤다. 제목인 '무궁무진한 떨림, 무궁무진한 포옹' 시를 소개해본다. 뭔가 무서운 시였다. 죽음을 앞둔 사람인 것 같다. 여기서 '무궁무진' 은 현재의 느낌을 받았다. 죽음을 앞둔 사람에게는 한순간 한순간이 소중할 것이다. 봄, 밤, 고양이, 개구리, 노을 등도 평소에 느끼지 못했는데 죽음을 앞두니깐 그것이 무궁무진하게 느끼고 있는 것 같다. 특히 제목과 시 마지막에 나온 무궁무진한 포옹은.... 이제 '자연으로 돌아감'을 뜻하는 것 같다. 자연 속으로 안기는 느낌을 받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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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당문학상 수상작인 [무궁무진한 떨림, 무궁무진한 포옹]이 수록되어 있으며 수상한 박상순 시인님을 포함하여 10명의 작가의 시가 수록된 시선집이다. 작년부터 계속 다양한 책을 접하면서 장르를 넓혀가고 있는 노력을 하고 있지만 아직도 나에게는 어려운 장르이다. 아무래도 시만이 가지고 있는 압축적이면서도 은유적인 수준 높은 표현들이 있는데, 시를 감상했다는 표현도 차마 할 수 없는 내가 이렇다 저렇다 말하는 것이 너무 하찮게 느껴지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그래서 몇 번이고 다시 읽어 봤다. 몇 차례 읽어보고 책 맨 뒤쪽에 있는 심사평도 읽어보면서 느낀 점은 역시 내가 느끼고 싶은 대로 생각하고 싶은 대로 해도 되는구나라는 점이었다. 이 시집 안에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들이 적나라하게 표현되어 있어 자연스럽게 연상되었다. 짧다면 짧고 비교적 길다면 긴 시들이 수록되어 있는데 한편, 한편을 읽으며 직간접적인 표현들에 내 마음대로 조금 더 살을 보태어 머릿속으로 그려보며 안타까워하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하고 슬퍼 하기도 했다. 여러 가지 감정을 느끼다가 문뜩 훗날의 학생들이 내가 학교에서 윤동주 시인의 시를 배우며 이 시대에 어떤 일이 있었고 또 이 시에 어떤 단어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이다. 이런 해석 본과 함께 공부하게 될까? 하는 생각도 들어 왠지 재밌어졌다. 시 읽기에 이렇게 조금 가까워지나 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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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멈춘 자리에서 피어나는 타자의 얼굴 - 박상순 외, 『무궁무진한 떨림, 무궁무진한 포옹』 제17회 미당문학상 수상작품집인 『무궁무진한 떨림, 무궁무진한 포옹』(다산책방, 2018)을 읽으면서, 시가 참 길어졌다는 점을 새삼 느낀다. 시가 길어진 현상이야 어제오늘 일어난 일이 아니지만, 이 작품집에 실린 모든 시들이 상당한 길이로 쓰였다는 사실은 자못 의미심장한 일이라고 할 만하다. 시인들은 왜 시를 길게 쓰는 것일까? 하고 싶은 말이 많은 걸까? 말이 많다고 의미가 정확히 드러나는 건 아니다. 의미 전달이 목적이라면 효율적으로 언어를 사용하는 게 더 나을 수도 있다. 시인들은 그렇다면 의미의 바깥으로 나아가기 위해 언어를 많이 사용하는 것일까? 언어로 의미를 전달하던 시대는 이미 지났다. 의미는 언어에서 또 다른 언어로 이어지는 틈에서 생기는 흔적일 뿐이다. 의미의 흔적들에 관심을 기울이는 시인들이 많아지는 문단 현황을 고려하면, 시가 길어지는 현상은 의미를 잃은 시대 상황을 그 밑바탕에 깔고 진행되는 듯도 하다.
미당문학상 수상작인 「무궁무진한 떨림, 무궁무진한 포옹」에서 박상순 시인은 ‘무궁무진’이라는 시어를 반복하고 있다. ‘무궁무진’은 ‘다함이 없다’는 의미이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하면 ‘무한’이 지닌 맥락과 같다. 무한은 인간이성의 바깥을 전제로 이루어지는 개념이다. 인간이성으로는 포섭할 수 없는 대상을 우리는 무한의 영역으로 내몬다. 시 제목으로 쓰인 ‘떨림’이나 ‘포옹’은 이성보다는 감각과 어울리는 시어들이다. 감각은 이성으로 통제되지 않는 흔적을 가리킨다. 이성의 통제를 받는 감성에 비한다면 감각은 이성의 바깥에서 자유롭게 움직인다. 이를테면 우리 몸에서 펼쳐지는 무한한 떨림을 생각해 보라. 사랑에 들떠 온몸을 떠는 연인들이 과연 그 떨림이라는 감각을 통제할 수 있을까? 무한한 사랑에 빠진 연인들이 상대로 하여 느끼는 희열을 통제할 수 있을까 무궁무진한 봄, 무궁무진한 밤, 무궁무진한 고양이, 무궁무진한 개구리, 무궁무진한 고양이들이 사뿐히 밟고 오는 무궁무진한 안개, 무궁무진한 설렘, 무궁무진한 개구리들이 몰고 오는 무궁무진한 울렁임, 무궁무진한 바닷가를 물들이는 무궁무진한 노을, 깊은 밤의 무궁무진한 여백, 무궁무진한 눈빛, 무궁무진한 내 가슴속의 달빛, 무궁무진한 당신의 파도, 무궁무진한 내 입술, 무궁무진한 떨림, 무궁무진한 포옹. - 박상순, 「무궁무진한 떨림, 무궁무진한 포옹」 2연 월요일 밤에 그녀가 그에게 말한다. “그럼, 수요일에 오세요. 여기서 함께 해요.”(1연) 수용일이 되면 그는 그녀와 무궁무진한 세계로 빠져들 수 있다. 목요일부터는 안 된다. 오직 수요일에만 된다. 그리고 그녀는 월요일에 그에게 그 말을 했다. 그러나 화요일에 예기치 못한 상황이 발생한다. “그녀의 무궁무진한 목소리를 가슴에 품고, 그는 죽고 말았다.”(3연) 화요일에 죽은 그는 당연히 수요일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녀와 누릴 무궁무진한 사랑 또한 이루어질 수 없게 되었다. 묘한 건, 그가 “그녀의 무궁무진한 목소리를 가슴에” 품고 죽었다는 대목에 있다. 무궁무진한 세계는 우리가 사는 이 생(生)에 갇혀 있지 않다. 시인은 무궁무진한 세계에서 생을 건너뛰는 죽음을 본다. 그는 죽었어도 그녀의 무궁무진한 목소리를 살아있다. 무궁무진한 세계에서는 의미 역시 무궁무진하다. 무궁무진한 의미는 하나로 환원될 수 없는 의미를 가리킨다. 말 그대로 의미의 흔적들이다.
흔적들이 뚜렷한 의미 없이 흘러 다니는 곳이 무궁무진한 세계이다. 이 세계에서 시간은 과연 어떻게 흐를까? 월요일에서 화요일로, 그리고 수요일로 흐를까? 그래서 화요일에 죽은 그는 수요일에 나타날 수 없는 것일까? 무궁무진한 시간에는 선조적인 흐름이 없다. 무궁무진한 세계는 시간이 없는 세계이다. 아니, 다양한 시간들이 혼재하는 세계라고 보는 게 정확하겠다. 이로 보면 월요일은 화요일 다음에 오고 화요일은 수요일 다음에 온다. 월요일 다음이 수요일이라고 말해도 상관없다. 무슨 소리냐고? 무궁무진한 세계에서 시간은 뒤죽박죽 흘러간다는 얘기다.
아비가 아들이 되고 아들이 아비가 되는 세상이 이곳에서는 자연스레 펼쳐진다. 그러니 화요일에 죽은 그가 수요일에 그녀와 만날 수 없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땅속에서 벌떡 일어나시고,”(3연)라고 시인은 또한 쓰고 있지 않은가? 아버지는 죽은 오징어가 되고, 어머니는 갑자기 포도밭이 된다. 당연히 화요일에 죽은 그도 수요일에 그녀와 만나 무궁무진한 사랑을 즐긴다. 의미를 놓으면 새로운 세계가 보인다. 박상순이 이야기하는 무궁무진한 세계는 어찌 보면 이러한 의미를 내려놓고 즐겁게 ‘사랑하는’ 연인들의 상상에서 비롯되는지도 모르겠다. 사랑에 빠진 연인들에게 앞으로만 흘러가는 시간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그들에게 시간은 어딘가로 흘러갔다고 멈추고는 다시 어딘가로 흘러가는 이미지일 뿐이다.
시간이 뒤바뀌는 무궁무진한 세계는 신용목의 「그림자 섬」에서도 나타난다. ‘그림자 섬’은 말 그대로 그림자가 지배하는 세계이다. 낮에는 나를 따라 낮게 끌려다니던 그림자가 “밤이 되자, 나를 커다란 보자기에 싸서/ 들고 간다.” 밤은 무의식의 지배를 받는다. 그림자는 그러니까 무의식이 지배하는 세계의 권력자에 해당되는 셈이다. 그림자를 하나의 의미로 묶을 수는 없다. 어느 생에서 그림자는 “내가 절벽으로 밀어버린 연인”이기도 했고, 또 어느 생에서는 “몸을 잃고 흘러 다니는 물”이기도 했다. 무의식은 부드러운 물로 감싸여 있다. “손을 저어도 느껴지지 않는 어둠의 살”은 무의식이 만들어낸 꿈의 세계의 다르지 않다. 꿈을 꾸는 존재는 지금 물속을 떠다닌다. 물속은 생명이 잉태된 자궁이 아닌가. 하긴 의식 이전에 무의식이 있고, 이성 이전에 감각이 있다. 물처럼 부드럽게 우리 몸을 쓰다듬는 그 태초의 감각. 물속에 빠져도 낮은 낮이고 밤은 밤인데, 사람은 왜 시체일까? 잠속에 빠져서 꿈은 시체의 삶일까? 꿈속에 빠져서 어둠 속에서도 모두가 색깔을 가지고 있는 것이 신비로웠다. 만지지 않는데도 느낌이 남아 있다는 것이, 죽은 후에도 이름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아름다웠다. 삶은 시체의 꿈일까? 불을 켜듯 누군가 그의 이름을 부르고…… - 신용목, 「그림자 섬」 부분 물속에서 사람은 왜 시체로 변하는 것일까? 시체는 죽은 사람이다. 죽은 사람이 꿈을 꾼다. 그럼 꿈은 꾸는 시체는 죽은 것일까, 죽지 않은 것일까? 꿈속에서 생과 죽음을 구분하는 게 과연 가능할까? 어둠 속에서도 시인은 사물들이 지닌 색깔을 본다. “만지지 않는데도 느낌이 남아” 있는 이 상황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꿈속에서 죽은 이는 죽었지만 죽지 않았다. 그는 어둠 속에서도 색을 보고, 만지지 않은 사물을 온몸으로 느낀다. 감각이다. 감각이 살아있는 이 사람을 어떻게 죽은 자로 치부할 수 있겠는가? “죽은 후에도 이름을 가지고 있다는 건 //아름다웠다.”는 시인의 진술은 바로 이 문맥에 걸려 있다. 죽은 자가 남긴 이름은 누군가가 부르는 이름이다. 죽은 자는 이름으로 누군가의 가슴에 남아 있다. 흔적이다. 이름은 죽은 자가 남긴 흔적이다. 죽은 자의 이름=흔적은 그렇게 살아남은 사람의 무의식에 새겨진다.
무의식을 불러내는 일은 그러므로 죽어서 이름을 남긴 자를 불러내는 일과 다르지 않다. 누군가 그의 이름을 부르면 저 깊은 곳에서 그의 대답이 들려온다. 그는 내 밖에 있는 게 아니라 내 안에 있다. 그림자는 내 안에 있는 또 다른 존재가 아닌가? 무의식을 지배하는 그림자가 죽은 자가 되어 ‘나’를 부른다. 내가 그를 부르는 소리는 곧 그가 나를 부르는 소리이다. 그 소리에 내가 대답한다. 그런데, 이상하다. 소리는 들리는데, 내가 내뱉는 소리가 아닌 것만 같다. 저 먼 곳으로부터 흔적처럼 소리가 들려온다. “미처 물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목소리처럼” 시인은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를 듣는다. 경계에서 들려오는 소리이다.
의식도 아니고, 그렇다고 무의식도 아닌 세계에서 소리가 들려온다. 그 소리에서 시인은 빗방울이 지닌 신비로운 얼굴을 느낀다. 시간이 문득 사라진 자리에서 소리가, 얼굴이 피어난다. 무궁무진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얼굴들이라고 표현하면 어떨까? 소리로 빚어진 그 얼굴에서 시인은 무한을 본다. 우리가 어찌할 수 없는 타자의 얼굴, 그림자. 의미의 바깥으로 하염없이 도망치는 언어들. 그리고 그림자의 입에서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언어들. 그 언어들로 시인은 시를 쓴다. 타자들이 내뱉은 언어들로 구성된 이런 시들을 우리는 어떻게 읽어야 할까? 무궁무진하게 읽어야 한다고 말하면 말장난으로 들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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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이 되면 설렌다. 3월이면, 추운 날씨도 점점 누그러질 것이고, 벚꽃이 필 것 같은 기운이 솟는다. 아직 따뜻한 봄이 오지는 않았지만, 마음만은 봄이 된 것 같았다. <무궁무진한 떨림, 무궁무진한 포옹>은 제목만 보고 만나게 되었다. 지금 내 마음의 상태인 것 같았기 때문이다. 무궁무진한 떨림과 따뜻한 포옹으로 3월을 시작하고 싶었다.
하지만 시를 펼친 순간 반전이었다. 1~2연까지는 남녀의 애틋하고 풋풋한 사랑의 감정이 무궁무진한 일상 단어들의 나열로 밝고 경쾌했다. 하지만 3연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이야기들의 나열로 그의 죽음을 노래했고, 무궁무진한 절망을 이야기한다. 앞이 경쾌하고 밝았기 때문에 3연의 절망과 슬픔은 더 슬프게 다가왔다. '월요일의 그녀 또한 차라리 없었다고 써야 할까.'라는 시구가 죽음으로 사랑도 그 어떤 것도 모두 사라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무궁무진한 떨림, 무궁무진한 포옹은 제17회 미당문학상을 받은 박상순님의 수상작이다. 이 외에도 9편의 시가 더 들어있다. 그의 시를 처음 접했을 때에는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조금 어려웠다. 제목은 아름답고 서정적인데, 전체적으로 일상적인 단어들의 나열이 많았고, 죽음, 고독감과 같은 어두운 느낌이 많이 들었다. 박상순 님의 시를 읽고 이런 느낌을 받은 기억이 있는데... 하고 스쳤던 시인이 한 분 있었다. 바로 세사르 바예호였다. 페루가 사랑하는 시인, 제목은 숫자로 가득했고, 슬픔과 고통을 속을 삭혀야 했던 그 시인이 떠올랐다. 봄으로 들떴던 마음을 잠시 추스릴 수 있는 시 10편이었다. 나에게 박상순 시인은 그의 시를 만든 무궁무진한 사연들이 무궁무진하게 궁금해지는 사람이었다. 수상작 이외에도 수상후보작 9명의 시들도 함께 묶여있었다. 김상혁, 김안, 김현, 신용목, 이근화, 이민하, 이영주, 이제니, 조연호 님의 6편씩 시를 함께 묶으면서 비록 수상은 하지 못했지만 작가들의 시를 만날 수 있어서 독자로서 너무 좋았다. 비록 떳떳하지 않은, 비겁한 삶을 산 미당이지만, 그의 시는 미워할 수가 없다. 아름다운 언어들을 잘 구사하였기에 지금도 미당문학공모전을 기리고 있다고 생각한다. 수상자까지 10명의 시인들 또한 외국어가 판치는 대한민국 사회에 한국말의 아름다움을 잘 보여주었다. 특히 일상의 언어들로 기독교 사상, 상징 등의 다양한 사상들을 잘 융합한 모습들을 엿볼 수 있었다. 비록 책을 피기 전과 후의 반전은 있었지만, 시를 감상하기 전의 설렘, 반전, 슬픔, 승화 등등 다양한 감정들이 내 마음 속에 시 한 편을 그려내는 것 같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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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회 미당문학상 수상작을 포함해 최종 후보에 오른 다른 아홉 명의 시인들이 쓴 시들을 엮은 시집 '무궁무진한 떨림, 무궁무진한 포옹'. 미당문학상이나 요즘의 현대시에 대해 전혀 모르는 상태로 읽은 책이라 그런지 작은 판형에 빼곡히 들어찬 시집은 생각보다 더 낯설게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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