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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특히 미술에는 관심을 두고 있지만
미술사 속의 여성 예술가들을 잘 또는 깊이 있게 알지 못하는 일반인들을 위한 책이라고 할 수 있겠다. 대체로
미술사 속의 여성 예술가들의 이름이 많이 알려져 있지 않기 때문에 이 책이 거의 모든 독자들에게 그 예술가들에 대한 입문서로서의 역할을 담당하겠다
싶다.
이 책에는 이름이 상당히 알려진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로부터 시작해서 수전 오말리까지 열 다섯 명의 예술가가
등장한다. 그들의 등장 순서는 태어난 해의 순이며 글쓴이의 거주 위치에서 접근하기 쉬운-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작품을 찾아볼 수 있거나 자료가 더 많이 남아있다고 할 수 있는- 예술가들을 자주 등장시킨다. 이들 중 이름이라도 들어본 예술가는
여섯 명. 아래 그림은 화가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했는데 오래 전에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보고 오래
그 앞에 서 있던 기억이 남는 그림이다. 이제는 라비유귀아르라는 이름을 잊지 않겠지.
이
책 한 권에서 열다섯 명의 인물을 다루기 때문에 각각의 인물 별로 조금 더 깊이 들어갔으면 하는 아쉬움이 군데군데 남기는 한다. 그래도 이 정도만이라도 여성 예술가들의 삶과 작품 세계를 이해하고 그들의 작품을 보게 된다면 이전의 감상과는
다른 관점에서 감상하게 되리라는 생각이 든다. 젠틸레스키만 하더라도 그리 자세히 알지는 못했는데 책을
통해서 결혼 생활에 대해서 알게 되었고 ‘수산나와 장로들’이라는
작품이 젠틸레스키가 불행한 일을 당하기 전에 만들어졌음을 인지하게 된 점 등을 그런 관점의 변화를 예측하는 예시로 들 수 있다. 이 책을 시작으로 개별 여성 예술가들이 주인공이 되는 책을 더 찾아볼 마음이 생겼다.
각
예술가들의 이야기에는 그들이 감당해야했던 차별이 빠질 수가 없어서 자연스럽게 페미니즘 시각이 드러난다. 젠틸레스키나
라비유귀아르의 사례에서 보듯 여성이 뛰어난 실력을 보이면 여성의 자질과 노력에 의한 것이라고 받아들이지 않고 그 여성을 지원한 남성(성적인 것을 포함)의 영향력에 기반했다고 힐난한 일 등을 반박하는
내용 등이 그런 부분이 될 것이다. 불행히도 그와 같은 일들은 예나 지금이나 크게 다를 바 없이 벌어지고
있다. 아래 사진은 버지니아 울프의 언니였던 바네사 벨의 작품과 그에 대한 내용 설명인데 설명을 확대해서
읽으면 가슴이 찢어지는 느낌을 받게 되지 않을까?
책은 쉽게 읽히는데 원문이나 번역 모두 그런 편한 접근성을 제공했다고 추정한다.
책을 쓴 목적과 글쓴이가 설정한 대상 독자층을 감안하면 쉽게 읽힌다는 점은 분명히 장점으로 작용한다.
마지막으로 책이 이렇게 만들어졌더라면 하는 점을 남긴다.
첫째, 왜 이 사람들을 선정했는지 글쓴이의 시각을 정리해서 보여주었다면 전체 내용을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을 읽고 작품을 들여다보는
자체만으로도 의미가 있겠지만 미술사 속에서 외면 받고 구축된 이들을 알리는 게 이 책을 쓴 의도 중 하나라고 한다면 글쓴이의 시각이 제공되어야
할 이유는 충분하리라 본다. (나는 조지아 오키프, 마리
로랑생, 케테 콜비츠 등이 안 들어간 사유가 궁금하다.)
둘째, 각 예술가 별로 시각 이미지가 제공되는 작품의 수가 적은 것도 아쉽다. 각각 3~5편 정도의 작품만이 소개되는데 여러 인물을 다루다 보니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 이해가지 않는 바는 아니지만
아쉽다. 셋째, 표지 디자인은 너무 클리셰적이다. 핑크를 여성의 색으로 내세우는 것은, 그 자체가 남성이 은연 중에 여성에게 입힌 한계를 받아들인다는 의미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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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의 서술 방식이 다소 유치한 면이 있으나 의미있는 좋은 책이라고 생각한다 정말 조금 글솜씨에 아쉬움이 남는데 뭐 어쩔 수 없지-
* 역사가들은 레이스터르가 독립적인 삶 대신 한 사람의 아내가 된 것에 대해 마치 그녀가 몰레나르와 함께하면서 예술적 부분을 일부러 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못마땅해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당시에는 페스트가 창궐하던 때였고, 그다음에는 구애와 결혼이 있었고, 새로운 도시로의 이주가 있었으며, 첫 아이를 임신했다. 그리고 세상에, 아이가 무려 다섯이었다!. 우리 아이들 둘이(둘인데도!) 어렸을 때, 나는 6년 동안 글쓰기를 거의 중단해야 했다. 미술에 쏟을 신경과 시간, 어린 아이들에게 쏟을 신경과 시간을 함께 감당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 다섯 아이를 두었던 레이스터르에게는 더더욱 불가능했던 것이 아닐까? 임신과 출산, 갓난아기와 어린아이들, 가사와 남편의 작업실, 어쩌면 그녀의 작업실 등등, 게다가 차마 상상조차 하기 힘든 상실과 지독한 슬픔도 있었다. 그렇다, 내가 지금껏 읽은 레이스터르에 관한 수많은 글 어디에서도 단 한번도 언급되지 않았던 자식들의 죽음을 헤아릴 필요가 있지 않을까. 결혼을 하고 가족을 이루면서 그녀의 작품 활동이 갑자기 중단된 것에 경악해야 할까? 그런 예술적 손실에 슬퍼해야 하는 게 마땅하지 않느냐고 묻는다면 당연히 슬프다. 하지만 충격적이냐고? 아니, 오히려 그 상황에서 레이스터르가 어떻게 더 작품 활동을 계속할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그녀는 계속 전진해 나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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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읽는 서양미술사는 대체로 남성 후원자와 남성 화가 사이에서 벌어진 일들을 남성 미술사가가 요약한 결과물이다. 여기서 여성의 이름은 아주 제한적으로 등장한다. 브리짓 퀸(Bridget Quinn)의 ‘여성 예술가론’은 H. W. 잰슨(Janson)의 기념비적 「서양미술사(History of Art)」에서 단 16명의 여성만 등장한다는 새삼스러운 사실에 대한 충격으로 시작되었다. 이 책은 잰슨에서 언급된 16명 중 2명을 포함한 15명의 여성 예술가들을 다룬다. 이러한 선정은 저자의 취미를 반영하겠지만, 기존의 규범화된 미술사에서 다루지 않았던 이들을 조명하겠다는 의도도 보여준다. 이 15명 중에서 내가 알고 있던 이름은 단 3명 뿐이었다. 나름대로 3년째 미술책만 읽고 있는 사람으로서는 충격적인 성적표가 아닐 수 없다. 물론 선정된 예술가들이 ‘여성 미술사’를 대표하는 인물들이 아니라는 것은 알지만, 그렇다 해도 이렇게 훌륭한 예술가들을 몰랐었다는 자책감이 덜어지지는 않는다. 그들의 이름을 듣기 위해서는 기존 미술책에서 벗어난, 오로지 그들만을 다룬 별도의 텍스트 속으로 들어가야만 하는 구조에서 우리는 여전히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 책에서 15명의 이름은 각 장의 제목이 된다. 한 사람 한 사람, 삶과 예술을 들여다 보지만 절대로 가치중립적인 전기는 아니다. 저자는 예술가들의 삶과 작품 이야기 속에서 자신의 학습배경, 성장과정, 주관적 감상, 사회적 관계 등을 연계하며 적극적으로 개입한다. 페미니스트로서, 미술사가로서, 작가로서, 세 아이의 어머니로서, 아내로서의 정체성은 이 책의 기획과 전개 과정에 있어서 본질적인 요소였음이 드러난다. 저자는 동지애와 전우애로 자신이 서술한 예술가들과 긴밀하게 결속되었다. 그러한 저자의 진정성에 의하여 이 책은 무미건조한 전기 묶음에서 벗어나 생명력을 얻었고, 우리에게 읽는 즐거움을 선사한다. 많은 개입은 그만큼 많은 반대를 불러오기 마련이다. 나는 대체로 예술가들의 지난했던 삶을 묘사하는 방식과, 작품의 의미를 발견하는 논리에 동조를 보냈지만 지나친 ‘여자들끼리 만만세’ 식 서술은 거슬렸다. 페미니스트로서 ‘여성성’에 대한 저자의 입장은 대체로 그것의 실재를 인정하고 지지하는 쪽이다. 여성이 세상을 보고 표현하는 방식에서 특유의 창조력과 온건한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다고 믿는다. 이는 비슷한 경험을 공유한 여성으로서 응당 가질 수 있는 비평적 견해이다. 하지만 마리 드니즈 빌레르(Marie-Denise Villers)의 <샤를로트 뒤발 도녜의 초상(1801)>이 아름다운 까닭이 두 여성의 완벽한 연대감의 순간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귀결은 ‘여자들끼리’의 지나친 신화화로 느껴진다. 유딧 레이스터르(Judith Leyster)의 마무리 단락에서 모두 여성으로 구성된 미술계를 상상하는 장면도 치기어린 설정 같다. 버네사 벨(Vanessa Bell)의 <스터드랜드 해변(1912)>에서 “아이들이 가득하고 여성들이 정착한” 이상향을 떠올리는 것도 억압적 프레임과 이분법에만 초점을 맞춘 결과로 보인다. 이런 사소한 불만들은 내가 향유하고 있는 알량한 젠더 권력에서 비롯된 것일 수 있다. 여성을 위한 목소리가 더 온건해지기를 바라는 교묘한 술책일 수도 있다. 존경하는 존 러스킨(John Ruskin)을 희화화한 것에 대한 반발심일 가능성은 조금 더 크다. 그런 가능성들을 인정하더라도 나는 위대한 여성 예술가들만이 지니는 차별적 조건이 존재한다는 이분법과 페미니즘적 신화화에 반대한다. 남성들이 그간 부당한 권력을 누려왔다는 이유만으로, 남성에 대한 반대와 대척을 통해 여성 예술가들의 가치를 설명하려는 시도는 적절하지 않으며 오히려 실패할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합리적인 제도를 통해 기회의 불평등을 극복하고, 여성 미술가들이 그동안 누리지 못했던 공정한 평가를 온전히 돌려주는 것이다. 이 작업은 편가르기를 하지 않아도 충분히 달성할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두 눈을 부릅뜨고, 우리 주변에 늘 존재했지만 상대적으로 간과되었던 여성 예술가들을 찾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 「우리의 이름을 기억하라」를 통해 알게 된 이름들로부터, 나도 시작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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