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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무위(無爲)'와 '유위(有爲)'의 이분법적 접근을 통해 제자백가 사상을 돌아보고 있다. 공자의 중용사상을 중심에 놓고 무위쪽으로 한발 더 나아간 것이 맹자 사상이고, 거기서 한발 더 나아가면 노자의 철학이 나온다. 무위로 향할수록 인간과 자연을 선으로 보고 자연스러움을 중시한다. 그리고 반대 방향인 유위쪽으로 한발 더 나아간 곳에 순자의 사상이 있고, 거기서 한발을 더 나아가면 한비자의 철학이 나온다. 유위로 향할수록 인간과 자연을 악으로 보고 개조하거나 통제하려고 한다. 이 책의 구성과 핵심내용을 요약하면 이렇게 된다.
이러한 접근법은 장자의 철학사상에 근거를 두고 있다. 무위와 유위를 나누고, 자연과 인간을 나누고, 이상과 현실을 나누는 이분법에 기초해 제자백가 사상이 지향하는 바가 철학적으로 어디에 가까운지를 살핀다. 제자백가의 사상은 다양한 스펙트럼을 보이고 있는데, 유위와 무위라는 잣대를 기준으로 하면 어느 정도 위치에 있는지 자리매김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은 '장자의 눈으로 본 제자백가 사상'이라고 명명할 수도 있겠다.
저자는 무위와 유위가 중국대륙에서 발생하게 된 역사적 고찰을 하면서 제자백가 사상을 하나씩 돌아본다. 먼저 무위적 요소와 유위적 요소가 균형을 이루는 공자의 사상부터 돌아본다. 공자 사상의 핵심인 인은 무위를 지향하고 있지만, 다른 한축인 예는 유위의 사상인데 이 둘이 중용사상에 바탕을 두고 서로 균형을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또 공자는 무위를 대변하는 요순을 칭송하지만, 유위의 상징인 주나라의 예법도 중시한다고 지적한다.
맹자는 공자에 비해 무위 쪽으로, 자연 쪽으로, 이상주의 쪽으로 한 걸음 더 나간 인물로 평가된다. 군주에게도 직설하고, 역성혁명을 옹호하며, 성선설에 기초한 왕도정치를 주장해 공자에 비해 이상주의 쪽으로 한 걸음 이동했다는 것이다. 조선시대 참된 선비들이 맹자의 생각을 실천하려는 분들이다. 반면 순자는 성악설에 기초한 예치사상을 주장하는데 이는 유위쪽으로 한 걸음 나아간 것이다. 유위는 적극적 현실개혁을 주장한다. 맹자에서 무위쪽으로 더 나아가면 노자의 사상이고, 반대쪽 대척점에는 한비자의 법가사상이 자리잡고 있다고 설명한다.
여기까지는 큰 무리없이 이해가 된다. 중요한 것은 장자의 사상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무위와 유위의 스펙트럼에서 본다면 노자에서 한 걸음 더 무위쪽으로 간 것으로 평가하는 것이 올바른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장자 연구가인 저자는 마지막 3개의 장에서 장자의 사상을 그만의 시각에서 고찰한다. 제자백가 사상이 세상의 다양한 측면을 자신의 의지가 담긴 특별한 프레임에서 보고 있다면, 장자는 이들처럼 하나의 시각에서 텍스트를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사유에 대한 사유를 메타사상 측면에서 보여준다는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라는 텍스트를 제자백가 사상가들처럼 다양하게 해석하는 것이 무의미한 것은 아니지만, 세상이라는 텍스트 자체는 인간의 해석과 무관하게 ‘있는 그대로 자연으로 얽혀서 서로 거래하며 유전(流轉)하는 세계’라는 것이다. 좀 어렵지만 제물론에 나오는 장주의 '나비의 꿈'을 생각해 보면서 그 의미를 유추해 보려고 노력해 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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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의 춘추전국시대는 서양의 고대희랍과 비슷한 면이 많다. 과거의 질서와 가치관이 흔들리면서 한편으로는 급격한 혼란과 한편으로는 새로운 사상이 출현하는 시기이다. 서양의 르네상스는 중세를 ‘암흑의 시대’로 규정하면서 고대희랍의 인본주의 정신을 이어받으며 근대의 문을 열게 된다. 유럽의 근대는 앞만 보고 달리는 직선적인 노력이 아니라 과거를 소환해 다시 태어남(르네상스)으로 탄생한 것이다. 근대 유럽 이상으로 급격한 물질적 성장과 가치관의 혼란을 겪고 있는 우리에게도 ‘다시 태어남’이 필요하지 않을까? 그리고 그 ‘다시 태어남’은 춘추전국시대를 소환함으로 가능하지 않을까? 이런 관점에서 춘추전국시대의 여러 사상에 대한 ‘다시 읽기’, ‘다시 쓰기’는 단순한 반복이 아닌 다시 태어나기 위한 몸부림일 것이다.
‘장자, 제자백가를 소요하다’는 이런 의미에서 훌륭한 ‘다시 쓰기’이자 실험으로 보인다. 장자의 눈으로 주요 제자백가를 일람하면서 ‘서하’와 ‘동이’라는 눈에 보이는 틀과 ‘유위’와 ‘무위’라는 눈에 보이지 않는 틀을 겹쳐서 배치한 관점은 앞으로의 춘추전국시대 ‘다시 읽기’, ‘다시 쓰기’에 하나의 초석이 될 것 같다. 그동안 이 시대의 사상에 대해 많은 번역서와 참고 서적이 있었지만, 번역서의 경우 단순 번역에 그치거나 참고 서적의 경우 그 책에서 다루는 한 사상의 우위를 보여주기 위해 다른 사상을 비판하고 폄하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 책에서 제시하는 이런 거시적인 관점은 ‘나무만 보고 숲은 보지 못하는’ 상황에서 한번쯤 숲을 조망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하지만 이 관점은 완성된 틀이 아니라 새로운 출발점이다. 저자의 관점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수도 있고 저자와 다른 또 다른 거시적인 배치의 관점을 제시할 수도 있고 또는 저자의 관점을 따라 미시적인 읽기와 쓰기를 할 수도 있다. 예를 들자면 이 책은 이런 흥밋거리를 던져준다. 저자가 제시한 ‘유위’와 ‘무위’의 틀에 의하면 노자와 한비자는 가장 먼 거리에 있다. 그런데 알다시피 한비자는 ‘유로’, ‘해로’편에서 노자를 받아들이며 재해석한다. 가장 먼 것이 가장 가까운 것인가? 유위와 무위는 서로 이어진 것인가? 유위, 무위는 직선으로 멀어지는 것이 아니라 원처럼 서로 멀어지면 다시 만나는 관계인가? 독자에게 이런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것만으로도 이 책은 충분히 평가받을 만 하리라. 다만 대부분이 인용이 1차 저작이 아니라 2차 저작에서 인용된 점, 그리고 니체의 ‘권력의지’를 한비자의 주장과 같은 것이라 인용한 점(차라리 니체를 언급하지 않는 것이 좋았으리라. 니체와 한비자의 관계는 그것만으로도 한 권의 책 이상의 분량이 될 내용이다.) 등이 옥의 티로 보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