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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통사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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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 관련 책을 읽을 때 언제나 시원하게 해결되지는 못하는 궁금함이, 국명의 유래가 과연 무엇이냐는 점이었습니다. 이 사항에 대해, 그저 고유명사이던 것이(초기 한자의 상당수가 그저 현지명의 표기를 위해 고안되었죠) 굳었을 뿐이라는 편한 주장으로 해결하려는 이들도 있지만, 그렇게 단순한 문제는 물론 아니겠습니다. 자치통감 정도 되는 책을 읽어야 이 문제에 대한 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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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 관련 책을 읽을 때 언제나 시원하게 해결되지는 못하는 궁금함이, 국명의 유래가 과연 무엇이냐는 점이었습니다. 이 사항에 대해, 그저 고유명사이던 것이(초기 한자의 상당수가 그저 현지명의 표기를 위해 고안되었죠) 굳었을 뿐이라는 편한 주장으로 해결하려는 이들도 있지만, 그렇게 단순한 문제는 물론 아니겠습니다. 자치통감 정도 되는 책을 읽어야 이 문제에 대한 명쾌한 해명, 아니면 실마리라도 잡을 수 있을까 했는데, 역시 무리이긴 합니다. 아직 국내 학자들의 논문 중에는 이 문제만을 중점으로 다룬 아티클이 없습니다.

조광윤이 처음 시씨, 곽씨의 조정에서 벼슬을 할 때부터 연고가 있던 땅이긴 했으나, 송(宋)이란 국명은 그 외에도 (사후적으로나마) 깊은 의미를 가집니다. 송은 일단 商, 즉 殷나라 왕실의 족친이 세운 나라입니다. 중원에서도 손 꼽히는 명망을 지녔고, 魯國과 더불어 가장 중화민족의 색채를 잘 보전한 국가 기풍을 지니고 있었다 합니다. 그래서 남송이 국가 숙원 사업으로 생각해 오던 게, "삼경 팔릉"의 수복이었죠. 여기서 삼경에 귀덕, 즉 상구(商丘)가 들어가는 것이, 바로 춘추 시대 송나라 도읍인 땅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북송의 공식 수도는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카이펑, 즉 변경인데도 말입니다.

곽위나 그의 양자 시 세종만 해도, 중국 문화에 깊숙히 동화된 유목민족의 색채를 채 지우지 못한 인물들이었습니다. 당장 시 세종은, 곽위의 가문에 입적된, 성(姓)이 다른 양자였죠. 그러나 조광윤은 하북성에서 오래 터잡고 살아온 한족(漢族) 조홍은의 아들이었고(이 사람의 이름 끝자가 묘하게도 殷입니다. 물론 우연의 일치일 뿐이겠지만요), 따라서 자신의 주군과 상관들과는 달리, 일종의 인종적 정통성(?)까지도 주장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하겠습니다.

물론 그가 천자의 지위에 오르는 데에 고작 이 요소가 결정적 구실을 한 것은 아닙니다. 그보다는 그가 유능한 군사 지휘관이었고(이게 제일 중요하죠), 부수적 요인으로 이런 출신 인사들치고는 대인관계, 부하들 사이에서의 인망 등 정치술이 대단히 뛰어났다는 장점이 있었습니다. 정치.. 라고 하면 대뜸 부정적 뉘앙스가 풍기지만, 이 사람은 진정 "술수나 책략에 기반하지 않은", 우리가 흔히 "저 사람 진짜 인격자다" 라는 소리를 잘 듣게 처신한 사람이었던 듯합니다. "정직이 최상의 책략'이라는 서양 속담도 있지만, 조광윤이야말로 구질구질한 속임수를 쓰지 않고 선 굵은 처세를 보이면서도, 결정적 국면에서 손해 보는 수를 두지 않는 대인다운 풍모로, 난세에 지쳐가던 대륙의 민심을 최종적으로 획득한 승자라고 봐야 하겠습니다.

이상하게도 이런 빼어난 조상이 활약을 하면, 그 몇 대 뒤로는 꼭 무능한 후손이 줄을 이어 보위를 차지합니다. 사실 조광윤의 직계 후손은 황위에 오르지 못하고, 그의 동생 2대 조광의가 등극한 후 그의 자손들이 북송의 대통을 이어가는데요. 이 과정에도 소위  촉영부성이라는 성어로 대변되는 루머가 나돌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명확한 근거를 가진 주장은 아닙니다. 굳이 그런 무리를 하지 않더라도, 어차피 시 세종의 어린 아들로는 국가 체제의 유지가 어렵다는 판단 하에 진교의 쿠데타로 선양을 받은 게 조광윤 자신이니, 자신의 어린 아들에게 황제위를 계승시키기도 그리 큰 명분이 있었던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아직 중화적 시스템이 제 자리를 채 찾지 못한 상황에서, 관록과 군사 운용 능력을 겸한 인사가 최고위를 지켜야 했음은 당연한 시대적 요청이라 판단되더군요.

바로 앞선 시기에, 매국노 석경당- 사실 그는 돌궐 사타 족 출신이었다는 점에서 이렇게 비난하기는 다소 어색한 점이 있지만, 인간적으로 저열하고 악질적인 배신자였다는 사실에야 변함이 없습니다- 이 거란에 칭신한 사실에서도 알 수 있듯, 이 시기는 정세의 향방이 어디로 튈 지 알 수 없는 위기의 시대였습니다. 조광윤과 그의 동생 태종 조광의는 그런 점에서, 시스템을 안정시키고 거의 수백 년 만에 순도 높은 중화적 시스템을 복권시키고, 대륙 거의 전부를 통일한 왕조의 기반을 다졌다는 점에서(당나라도 안사의 난 이후로는 거의 이름뿐인 중앙집권 체제였으므로, 송나라가 이처럼 대륙 전반에 대해 실질적인 지배권을 행사한 건 대단히 특기할 만한 일입니다), 높은 평가를 받아 마땅합니다.

조갑제닷컴에서 나온 정순태 기자의 저서 <송의 눈물>에서는, 유목민족에게 상시로 약탈당하다시피한 이 제국의 허약한 체질과 운명에 대해 크게 개탄하고 있습니다. 그 책 뿐 아니라 우리가 중등교육과정에서 배우기로도, 주변국에 대해 제국으로서의 위신도 세우지 못하고, 하다못해 약한 서하에게도 납폐를 바쳐야했던 한심한 모습으로 묘사되죠.그러나 이는 사실과 다릅니다. 제가 읽고 있는, "중국사학회 편"으로 저자명의가 나와 있는 이 책은, 북송, 남송의 역사적 의의에 대해 역사과학적으로 검증된 최신의 이론을 잘 반영하여, 이 조씨 황조의 나름 대체할 수 없는 비중과 유산에 대해서도 잘 서술하고 있습니다.

이 책이 커버하는 범위는 오대십국에서 원나라때까지입니다. 송이 고전한 건 북방 민족의 실력이 상승한 결과이지, 송이 이전 제국보다 실력이 퇴조해서가 아니라는 겁니다. 우리는 정강의 변 당시 휘종, 흠종 등의 처참한 무능, 그리고 이후 임안의 남송 시대를 맞이해서도 진회, 가사도 같은 권신을 두고 이뤄진 악평 때문에 이 제국을 무조건 폄하하는 경향이 있습니다(게다가 구법 신법파의 소모적 당쟁까지..).

그런데, 그렇게 허약하기만 했던 시스템이라면 임안에서 근 백 오십 년 세월을 버틸 수가 없었을 테고, 북송 시절 쩔쩔 매며 거액의 뇌물로 환심을 샀던 서하 역시, 칭기즈 칸 본인도 바로 멸망시킬 수 없었던 지역강국이었습니다. 호라즘처럼 페르시아, 중앙아 전체에서 위세를 떨친 나라도 칸의 호령 한 번에 바로 붕괴되기까지 한 사실과 비교하면, 서하의 분투, 그리고 남송의 선전은 놀라운 점이 있습니다. 위에 적은 가사도처럼 변설과 정치력에 비해 대국을 보는 실질적 역량이 부족했던 간신과는 달리, 진회 같은 자는 마치 명청 교체기 조선의 주화론자들처럼, 현실정치의 냉엄함을 꿰뚫고 사직과 민족의 앞날을 위해 굴신을 택했다는 점에서 재평가를 하는 입장도 있죠.

아무튼 이 3권은 중국 역사 발전의 허리에 해당하는 시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분명 중국의 역사는, 이전 역사의 단순 반복이 아니라(이념적으로 충의니 효니 하는 구태의연한 사상만 강조하다 보니 그런 착시를 부르는 것도 사실입니다), 내실을 따져 보면 뭔가 나아져도 나아지고, 유목민족의 건강한 기풍과 장강 이남의 경제 개발 등 이전 시기와는 비교할 수 없는 활력을 흡수하고 "진화"하고 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v*****7 2016.03.14.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