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가 이 책을 누구에게 소개받았는지 잊었다. 그런데 이 책 내용들이 하나도 새로울 것도 없고, 다른 책들에서 많이 들었던 이야기들이었다. 내가 요근래 짧은 기간이었지만 관심을 갖고 읽었던 책들에서 많이 봐왔던 그 내용 그대로다. 그러니까 내가 열심히 감동하며 고개를 끄덕이며 읽었던 대부분의 이야기들은 이 저자 웬델 베리가 40년 전부터 힘주어 이야기하던 바로 그것들이었단다. 그 본래의 것을 이제서야 접한 것이다. 그래서인지, 아니면 번역자의 역량인지 읽기에 너무 부드러웠다. 정말 두분 모두에게 감사하다. 이제 내가 할 일은 저자가 이야기하던 그 방법대로 살아가면 되는 것일게다. 그런데 그게 그리 쉽지만은 않겠다. 물론 내가 손바닥만한 땅에다 내가 먹을 채소를 기르는 일은 자신있게 저자가 말하는 것처럼 제대로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내가 소비자의 입장에 설 때는 과연 내가 저자가 권하는 대로 할 수 있을까? 힘든 일일 것이다. 저자가 말하는 제대로 된 소비자가 할 수 있는 일은 어떤 것인가를 책의 제일 마지막에 정리해놓았다. 내가 잊었을 때 언제라도 찾아볼 수있게 옮겨적어놓아야겠다.
책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1부는 주로 이론에 관한 에세이들이다. 이 부분에서는 공부하는 맛이 난다. 그동안 단편적으로만 듣던 이야기들을 자세하게 들을 수도 있었고 미처 깨닫지 못했던 것들을 이해할 수 있게 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많이 놀란 것은 40년전 미국의 현상이 지금 우리나라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과 똑같다는 사실이다. 어디나 다 같은 것일까? 아니면 우리가 뒤늦게 뻔한 길을 또 저벅저벅 걸어가고 있는 것인가? 마음이 답답해지는 대목이 많았다. 이렇게 다 경험자가 다 이야기했는데도 빠질 것을 뻔히 알면서 구렁텅이로 걸어들어가고 있는 우리의 농촌 현실이 안타까웠다. 소제목들을 살짝 확인해보면, '살림을 되살리는 일', '집중의 어리석음', '농업 문제는 농업으로 풀자', '가족농을 옹호한다.', '판단은 농장에 맡기자', '농업과 에너지', '보존주의자와 농본주의자', '위생과 소농', '척도로서의 자연'과 같은 것들이 있다.
2부는 실제로 농부들을 만나서 그들의 삶을 들려주는 것이다. 멋진 사람들이 많았다. 우리 나라에도 이런 분들이 꽤 계시니까 크게 부러울 것은 없다만 농장의 단위가 아무리 작은 것처럼 표현해도 내가 보기엔 커보였다.
3부는 저자가 그동안 발표한 소설 중에서 먹거리에 관련된 부분을 발췌한 것들이다. 시골 농가의 부엌을 떠올리게 되고 거기에서 불이 피어오르고 파이가 구어지고 둘러앉아 먹는 장면들이 마구마구 상상속으로 떠오르면서 마음이 따뜻해진다. 먹거리라는 것을 매개로 그 푸근함이 전해져오는 글들이다. 굉장히 재미있는 발상의 책을 펴낸 것이다. 저자가 시인이며 소설가이고 문명비평가로서 발표하는 글들이 꽤 많은가본데 그 저작들 중에서 이렇게 뽑아내어 책을 편집해주니 그 읽는 맛이 새로웠다. 어떤 글은 원본 모두를 다 찾아 읽어보고싶어졌다.
안먹고 사는 사람은 없으니 누구라도 한번쯤 읽어보고 먹거리에 대해서 생각해보고 실천해야 하지않겠는가하는 생각을 해본다.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이지 않는가. |
|
모든 일의 근원을 생각함에 있어 직접 경험해보지 않으면 그 생각은 관념적일 수 밖에 없다는 함정이 있다. 그때문에 말을 조심해야 하고 함부로 아는 척 하지 말아야 하는데, 정신없이 오가는 수많은 말들 사이에 진정성이 느껴지는 단어들은 그닥 많지 않은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책을 읽는다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물론 독서는 간접경험이다라는 명제에 걸맞게 책을 읽음으로서 우리가 알지못했던 세계에 대한 체험이 생기는 일도 많지만, 이 역시 '간접적'이기에 조심스러운 것은 마찬가지이다. 타인이 가진 지식을 글을 통한 간접체험이라는 것은 언제나 조심스러우면서도 겸손을 잃지 않아야 한다는 부담을 가진다. 그런 부담은 개인적으로는 땅에 관한 글들을 읽을 때 가장 크게 느낀다. 땅에 대한 실제적 체험과 글을 통한 간접경험은 때로는 괴리감을 느낄 정도의 거리감을 느끼기도 한다. 사실 내가 땅에 대한 경험은 5년여의 주말농장 경험이라 이 역시도 매우 하찮은 경험이지만, 땅을 일구고 가꾸는, 생명을 길러내는 이들의 기록으로 그 위대함을 느끼는 것에 대하여 직접 호미질을 하다 느끼는 등과 허벅지의 통증은 '위대함을 느낌'을 입으로 말한다는 행위마저도 외람되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 통증만으로도 하루는 버겁고 며칠의 통증으로 몸이 적응하면 몸은 '스스로 움직여 땅을 일구고 생명을 기르는 노동'을 받아들인다. 때로 그 노동은 삶의 온전한 일부가 되지만, 때로는 그 고됨이 너무 버거워, 삶의 온전한 전부가 되기도 한다. 웬델 베리의 사상은 그 고통으로부터 시작한다. 물론 그가 직접 몸의 고통을 이야기하지는 않지만 기계보다는 가축을 사용하고, 변화속에서 점점 가까워지는 현대문물과 화학약품들을 거부하고, 자연과 땅의 감각을 몸으로 느끼는 그가 몸의 고통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다행이라면, 그 고통을 삶의 온전한 전부가 아니었다는 것일까? 온전한 일부와 나머지의 삶은 마음과 머리를 통한 고찰을 하였으니까 말이다. 당연 그 감각과 고찰은 몸을 통한 경험에서 시작한다. 왜 기계가 아닌 옛날의 방식으로 하는 농사가 필요한지, 땅을 온전하게 다루는 방법은 무엇인지, 기다림은 왜 필요하고 그 기다림은 어떻게 만들어가야 하는지, 그리고 옛날방식의 농촌생활은 수확은 적지만 그것이 사람을 굶게 만들 정도는 아니면서도 대량생산과 자본순환에 의지하는 현대농업보다 위기에 대처하여 뛰어난 완충력을 보여주는지 자신의 경험과 어릴적의 기억으로 설명한다. 그의 이야기는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자본 시스템이 농업을 자신들의 구조에 어떻게 집어넣는지, 시스템에 편입된 농부들의 삶은 어떻고 어떠한 방식으로 농업의 자체가 파괴되어가는지를 보여주며, 국가와 자본이 체제아래 만들어가는 사회시스템에 대한 비판을 이어나간다. 그것은 전체적인 관점에서도 이루어지지만, 먹거리를 먹음으로서 소비하는 개개인의 식습관과 행태에 대한 비판으로도 이어진다. 예를 들어, 대량재배를 통해 맹독성의 농약을 피할 수 없이 성장한 먹거리를 우리가 아무렇지 않게 섭취하는 일이 과연 옳은 일인가 하는 비판말이다. 읽다보면 리 호이나키가 말하는 자연에의 감각과 감성, 농촌사회의 어떤 고난함등이 떠오르고, 윤구병 선생님의 잡초는 없다라는 말도 떠오른다. 스콧 니어링의 땅을 일구며 실천하는 혁명적 삶 역시 생각하게 한다. 그리고, 수많은 사회운동을 하다가 결국 땅으로 귀의하던 수많은 사상가를 떠올리게 된다. 이 책은 그런 과정을 반대로 땅에서부터 시작하여 사회를 생각하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땅과 먹거리, 그리고 땅을 일구는 일을 통한 사회에의 고찰, 그것은 전적으로 관념적일 수가 없다. 온전한 경험을 통해 우리가 잊고 있는 삶의 중요한 근원과 사회순환의 근원성을 깨닫게 해 준다. 그것은 단순한 땅의 소중함이라기 보다는, 경험과 회고를 통해 우리가 무엇을 잃어버렸고 잃어버린 그 무엇은 과연 잃어버린 채 살아도 좋을 것인가 하는 고민을 던져주는 일이다. 개인적으로는 그렇게 잃어버린 것들 중 하나는 다양성이라고 생각한다. 획일화를 통한 경직이 우리를 위기의 순간 낭떠러지로 곤두박질 치게 만드는 것을 많이 보아왔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보여지는 다양성안에서는 적어도, 사람들이 곤두박질치고 당하며 비참해지는 모습을 볼 수가 없었다. 땅은, 땅을 통한 웬델 베리의 글은 내가 이제껏 가져왔던 생각들에 하나하나 확신을 심어주고 있었다. |
|
《욕망하는 식물》의 저자 마이클 폴란이 이 책의 서문을 썼다. 서문에서 그는, 자신이 농업에 관한 글을 쓰기 시작할 무렵(1980년대 말~1990년대)부터 웬델 베리의 저작을 면밀히, 열심히 읽었고 텃밭을 가꾸면서 가졌던 의문에 대한 실질적인 해답을 그의 글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그의 글은 언제나 절제되고 논리적이며 반듯하고 섬세하다”는 마이클 폴란의 서문대로 웬델 베리의 주장은 논리가 정연하면서도 차분하다. 대부분의 번역글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문체의 유려함도 뛰어나서, 책읽기의 즐거움을 한껏 누리게 해 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말에는 뒹굴거리며 읽기 쉬운 책에 손이 가다보니 이책을 잡고 있던 시간이 길어졌다.) 이 책은 3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 농사,는 건강한 농업을 주장하며 썼던 글들로 이루어져있고 2부 농부,는 건실한 농업을 실천하는 농부들을 만나보고 느꼈던 사례중심의 글이고 3부 먹거리,는 웬델 베리가 썼던 에세이나 소설중에서 건강한 먹거리을 나누는 가족들의 이야기를 모았다. 9단락으로 이루어져 있는 1부의 글들은, 대부분 아침에 출근준비 마치고 남는 자투리시간 20~ 30분 동안 한 단락씩 읽었고 밑줄 그은 부분이 가장 많았다.
3부에 실린 글들은, <윌튼네 사람들>을 떠오르게 했다. 어릴 적 일요일날이면 TV앞에 앉아 재미있게 봤던-정이 넘치던 <윌튼네 사람들>. 글의 시대적 배경이나 소농가를 이루고 사는 가족들의 이야기가 딱 그 모습이다.
웬델 베리가 이 책을 통해 전달하고자하는 내용 중 가장 크게 남는 것은, 땅의 건강성을 지켜야한다는 것이다. 화석연료 에너지의 등장으로 가능해진 농기계의 사용과 단일경작으로 인해 땅은 점점 침식되고 오염되어가고 있으며 땅의 숨구멍들이 점점 막히고 단단히 압축되어 더 이상 식물을 키워낼 수 없는 불모지가 되어간다.
이러한 땅을 건강하게 지켜내기 위해서는 가족농으로 이루어진 소규모 공동체들이 자연을 척도로 삼아 농사짓는 옛날 방식의 농업을 통해 자연의 안녕을 되찾고 더불어 인간의 안녕을 되찾아야 한다고 준엄하게 꾸짖는 것 같이 들렸다. 그렇다면. 농사 지을 땅 한뙈기 없는 나같은 사람- 직접 농사를 지을 수 없는 도시인들이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책임있게 먹어야 한다!는 것이 웬델 베리의 대답이다. 먹는다는 것은, 농업적인 행위의 출발점으로 씨를 뿌리고 싹이 트는 것으로 시작되는 먹거리 경제의 드라마를 마무리하는 일(298쪽)이며 산업화에 따라 생겨난 식품산업이 주는대로 먹는 사람은 먹는다는 게 농업적인 행위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으로 식품산업의 희생자(300쪽)일 뿐이라는 것이다. 책임있게 먹어야 한다는 것은, 흙에서, 씨앗으로, 꽃으로, 열매로 음식으로 찌꺼기로 다시 흙으로 돌아가는 에너지의 아름다운 순환을 알고 가장 가까이서 생산된 먹거리를 사고 직거래를 하며 음식을 직접 조리해 먹음으로써 음식의 품질을 스스로 관리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책임있게 먹는 것! 그것이 내가 실천할 수 있는 온 삶을 먹는 일이며 먹는 일을 정의롭게 하는 것이다. ***1부에서 3부까지의 글들 중 밑줄 그은 부분이 많았던 1부의 글들만 옮겨 적는다. <살림을 되살리는 일> 26 우리가 어떤 일을 할 때 사용하는 수단은 우리가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에 확실히 영향을 끼친다. 28 살림은 우리와 우리가 사는 장소와 세계를 보존 관계로 이어 줌으로써 생명을 지속시키는 모든 활동이다. 우리를 지속시켜 주는 생명의 그물망에 있는 모든 가닥이 서로 계속 이어져 있도록 해 주는 일이다. 그러니 산업농업의 가장 명백한 실패는 아마도 살림의 노력 없이 땅에게 생산만을 가요하려 한 시도의 결과인 듯하다. 농업을 과학이자 산업으로 재편하려 한 시도는 농업으로부터 유구한 살림의 전통을 축출해버렸다. 살림은 예로부터 농업에서 가장 핵심적인 요소였으며 늘 근본적인 가정적 연관성을 드러내 주고 땅과 그 생물을 이용할 때 복원을 위한 보살핌을 요구하는 요소였는데도 말이다. 30 건강한 흙은 생명으로 가득한 야생지다. 흙은 살아 있는 것들의 공동체이기도 하고 서식지이기도 하다. 농장의 가장과 가족과 동식물은 모두가 흙 공동체의 일원이다. 38 문화적인 움직임은 개별적인 것이어야만 존속될 수 있다. (단일화되고 획일화된 글로벌체계에서 벗어나 소규모 공동체로의 회귀만이 농업을 살릴 수 있다는 장 지글러나 노르베리 호지의 주장과 같은 맥락임을 알 수 있었던 대목) <집중의 어리석음> 40 공장식 축산은 가능한 한 좁은 공간에 가능한 한 많은 것을 우겨 넣는다는 목표를 갖고 있다. 동물공장은 가축을 가혹하게 다루는 방식을 경제적으로 미화해 버렸고, 그럼으로써 인간은 존중과 감사를 받아야 할 가축에게 오히려 큰 빚을 지고 말았다. 41 동물의 배설물은 적절히 분산되면 비옥함의 훌륭한 원천이 되지만, 집중되면 기껏해야 쓰레기고 최악의 경우 독이 된다. 개규모 단일경작이 농약에 대한 내성을 키운 병균의 온상이 되는 것과 매한가지로, 동물공장은 항생제에 대한 내성을 가진 병원균의 온상이 된다. 우리안에 감금된 동물들은 전적으로 곡물 사료에 의존해야만 한다. 더구나 이 곡물은 생태적 비용을 치르고 대규모 단일경작 방식으로 길러진 것이며, 때로는 아주 먼 곳에서 옮겨와야 하는 것이다. 43 결국 동물공장은 공중보건 문제, 토양과 물과 공기의 오염 문제, 인간 노동의 질 문제, 인간이 동물을 학대하는 문제, 농업의 적절한 질서화와 운영 문제, 먹거리 생산의 수명과 건강성 문제를 야기할 수 밖에 없다. 46 ‘지속가능’이라는 말은 ‘유기농’이라는 말처럼 하나의 라벨이 되어 가고 있다. 지금 우리의 농업은 대체로 생태적으로 지속가능하지 않으며, 그렇게 된 지 오래다. 지금 우리의 농업은 몹시 유독하다. 너무나도 화석연료에 의존한다. 흙과 땅의 생명력과 물을 무척이나 낭비한다. 우리의 경제생활을 둘러싸고 떠받쳐 주는 자연계의 건강을 마구 해친다. 길든 것과 야생을 가릴 것 없이 생물의 유전적 다양성을 해치기도 한다. <농업문제는 농업으로 풀자> 51 이제 농업은, 관련 분야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는 사람들에 따르면 더 이상 생활양식이 아니다. 살림도 아니고 심지어 농사도 아니다. ‘농산업’이라는 하나의 산업이다. 이 산업은 농장을 ‘공장’으로 보며, 농민이나 식물, 동물, 땅을 교체 가능한 부품이나 ‘생산단위’로 본다. 52 여기서는 산업농업과의 관련이 명백하고 심각한 문제 몇 가지를 드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듯 하다. 토양침식, 토양압축(중장비 사용이나 수분부족으로 땅이 단단해지는 것으로 빗물이 스며들기 힘들어 식물이 자라기 어려워진다), 땅과 물의 오염, 단일경작과 생태계 악화에 따른 병충해, 농촌 인국의 감소, 도시 환경의 악화가 그것이다. 62 먹거리를 장기간에 걸쳐 넉넉하게 확보하는 것은 건실한 농부의 건실한 작업의 결과이지 다른 게 아니다. 산업주의 경제학은 그런 사실은 무시하고서, 농장에서 부실한 작업을 하도록 부추겼다. 63 나는 실질적으로 생산의 질을 보장하는 유일한 방법은 생산자가 자신이 생산한 것을 기본적인 생존 수단으로 이용하며 사는 원칙에 있음을 점점 더 확신하게 된다. 이는 산업농업 때문에 너무 경시되어 사실상 사라지다시피 한 원칙이다. <가족농을 옹호한다> 65 여기서 ‘농사’를 짓는다는 것은 시장에 내다 팔 작물을 생산하는 것만이 아니라, 작물을 생산하는 동안에 해당 장소의 건강과 쓸모를 책임감 있게 지키는 것까지도 포함하는 뜻이다. 가족농은 그 가족이 적절히 돌보는 농장인 것이다. <판단은 농장에 맡기자> 87 지혜로운 농민의 목표는 지역의 특성에 맞게 농사를 적응시키는 일이다. 88 값싼 화석연료, 값싼 운송, 값싼 옥수수와 그 밖의 사료 곡물은 농업을 획일화로 몰고 간 주범으로 흔히 거론된다. <농업과 에너지> 97 전례 없는 사회 변화를 가능하게 하는 데 화석연료 에너지를 이용할 수 있었던 것은 화석연료가 ‘값싸기’때문이었다. 그런데 우리가 그것을 ‘값싸다’여길 수 있었던 것은 일종의 도덕적 무지 때문이었다. 그것을 이용할 수 있는 만큼 그것에 대한 ‘권리’가 있다고 여기는 무지함 말이다. 화석연료는 한때 아무리 풍부했다 하더라도 양적으로 한정되어 있고 재생가능하지 않으며, 특별히 한 세대에만 ‘속하는’게 명백히 아니다. 98 에너지는 강력한 사회적, 문화적 영향력이다. 우리가 사용하는 에너지의 종류와 양은 우리 삶의 종류와 질을 결정한다. 우리는 삶의 근간을 화석연료 에너지로 전환함에 따라 사회을 일종의 기술결정론에 종속시키고 말았으며, 동시에 산업화라는 새로운 방식과 가치에 따라 인구와 가치를 이동시켰다. 99 ‘푸드시스템’은 생산자와 소비자 사이에다 제조업자와 복잡한 유통구조화 음식 조리라는 중간 단계를 개입시켰다. 100 산업경제는 생산자와 소비자 사이의 핵심 연결고리를 늘이고 복잡하게 함으로써 성장하고 번영한다는 것이다. 101 태양에너지는 지금도 그러하듯 식물을 자라게 할 뿐만 아니라, 사람과 동물의 노동이라는 형태로 농장에 생산력을 제공하기도 했다. 이 에너지는 생물학적으로 얻어서 이용할 수 있는 것이며, 순환가능하다. 농민들은 공짜인 태양에너지를 포기하고 기계로 얻어내는 화석연료 에너지를 이용하기 위해 비싼 값을 치르도록 설득당하고 말았다. 104 태양에 기대는 옛날식 농업은 시간 지향적이었다. 무엇이든 때맞춰 하는 것이 미덕이었다. 그에 비해 산업농업은 공간 지향적이다. 산업농업의 미덕은 속도다. 105 화석연료 에너지에 의존하면서 낭비를 자초하다. 1. 태양에너지의 낭비 2. 인간의 에너지와 능력의 낭비 3. 동물 에너지의 낭비-동물스스로 풀을 뜯지 않아도 되면서 먹이공급을 초래 4. 토양과 토양건강의 낭비-토양 압축의 문제(기계화에 따른 문제들) <보존주의자와 농본주의자> 111 길든 것과 야생은 실은 서로 긴밀히 연관되어 있다. 그 두 세계에서 정말 낯선 것은 기업화된 산업주의다. 삶이 이루어지는 장소에 대한 애정도 없고 삶이 이용하는 물자에 대한 존중도 없는, 난민의 경제생활과도 같은 것이다. 116 농민은 인간의 경제가 자연과 만나는 접점에서 살고 일한다. 이 접점은 보존의 필요성이 가장 명백하고 시급한 장소이다. <위생과 소농> 128 식품의 세균 오염을 막기 위해 그토록 강력하고 값비싼 수단을 쓰는 가운데, 우리는 항생제나 방부제나 다양한 산업오염물질에 의한 오염가능성을 얼마나 높여 놓았는가? <척도로서의 자연> 135 자연을 척도로 삼는 일은 우리 자신과 세계, 경제와 생태, 인간이 길들인 것과 야생 사이의 화해를 도모하는 일이다. 지금껏 오랫동안 우리는 산업화가 가져다줄 천국 같은 곳에 다가가고 있다고 생각해 왔다. 그리고 그런 과업을 진척시키기 위해 제멋대로 자연을 이용하고 학대해도 된다고 생각해 왔다. 그런데 이제 우리는 폭력으로 에덴동산을 되살릴 수 있을 만큼 자신이 똑똑하지 않으며, 자연이 우리의 학대를 더 이상 용납하지 않는다는 압도적인 증거에 직면하고 있다. |
|
사실 리뷰하기에 버거운 책들이 많다. 그중 하나가 웬델 베리가 쓴 책일거다. 이 할아버지는 하는 일이 좀 여러개다. 농사를 짓는데 소설도 쓰고 시도 쓴다. 아 그리고 무슨 운동도(피지컬말고) 하신다. 저자소개에 물결 뒤에 년도가 없는 걸로 봐선 돌아가신 분은 아니다. 아직 같은 하늘아래 지금도 뭘 하고 계실거다. 이 바쁜 할아버지의 글들을 (싹 다는 아니고) 어떤 고마운 분이 여러가지 모아 놓아 '온 삶을 먹다' 를 엮었다. '집중의 어리석음'에 대한 글을 읽고, 그 글귀와 표현은 군데군데 잊어버렸지만 그 생각은 내 맘에 뿌리가 이미 길게 뻗쳤다. 이 세상을 하나의 기계부품로 살건지, 사람으로 살건지는 본인의 선택이지만 후자를 택해야겠다는 마음이 드신다면 남다른 생각과 절대적인 노력이 필요하겠다. (세상은 기계부품으로 살기를 적극권장하기에) 그리고 혹시나 저같이 남다른 생각이 어려우시다면 웬델베리의 글은 정말 도움이 될거다. 개인적으론 내 인생을 통틀어(그래봤자 27년이지만) 영향을 많이 준 책중 하나지 싶다. 이 미국 켄터키에 사시는 할아버지 이야기가 대구에 태어나 우익청년으로 살아온 날 관통한다는 것 자체가 흥미롭다만, 뭐 어쨋든. 인생의 굴레를 그대로 따라가는 어른으로 살아야 하는 강박(그것도 한국사회)에서 경종을 울려주신 고마운 분이기에 켄터키주가 있는 동쪽을 바라보고 절을 할 마음도 더러 있다. |
|
검약하게 자급자족하다 박용범 독서작가(2022)
우리가 먹고 있는 모든 먹을거리는 자연에서 얻는다. 공기로 숨을 쉬고 물을 마시고 온갖 동식물을 잡아먹고 산다. 결국 우리 몸속에는 온갖 것이 다 들어와서 살이 되고 피가 되어 움직인다.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자연이 함께 내 몸속에서 살고 있다. '좋은 삶'이란 건강한 농촌 공동체에서 적정 기술을 이용하여 지속 가능한 농업을 하며 이웃과 땅을 보살피고 살리며 건실한 먹을거리를 즐기는 삶이다. 하지만 21세기 한국의 농촌 공동체는 '좋은 삶'을 살아가기에는 너무나 병들어 있었다. 산업 농업, 삶의 산업화, 무지, 오만, 탐욕, 그리고 이웃과 자연에 대한 폭력이 넘쳐나는 그런 세계가 되고 말았다. 더 이상은 정이 보이지 않는 각박한 사회로 변질되어 가고 있는 중이다. 한국의 농업과 농촌 생활이 몰락해 가고 있다. 그렇다면 도시 사람들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책임 있게 먹어야 한다. 중요한 것은 농산물의 질과 건강이다. 먹거리 생산에 가능한 한 참여하자. 들이나 베란다에서 먹거리를 기른다. 음식을 직접 조리한다. 사야 할 먹거리의 원산지를 안 다음, 집에서 가장 가까이서 생산된 먹거리를 산다. 가능한 한 지역의 농부나 텃밭 주인이나 과수원 주인과 직거래를 한다. 먹는다는 건 씨를 뿌리고 싹이 트는 것으로 시작되는 먹거리 경제의 한 해 드라마를 마무리하는 것이다. 하지만 먹는 사람들 대부분은 그런 사실을 더 이상 인식하지 못한다. 그들은 먹거리를 농산물이라 생각할지는 몰라도 자신을 '소비자'라 생각하지는 않는다.
농장이 지속되어야 한다면, 즉 요즘 하는 말로 '지속 가능한' 것이 되어야 한다면 아무것도 버려서는 안 된다. 농업은 어떤 쓰레기도 만들어 내지 않으며, 흙에서 난 것은 모두 흙으로 돌아간다. 성장은 부식과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유기물의 분해 과정에서 우리는 잎에서 일어나는 생성 과정의 역逆을 보게 된다. 성장과 부식의 균형은 자연과 농업에서 지속성의 유일한 원리다. 이러한 순환은 탄생과 성장, 성숙, 죽음, 부식의 연속적이고 반복적인 과정으로 이루어져 있다. 자연이 짓는 농사의 주된 특성은 몇 마디로 요약할 수 있다. 어머니인 대지는 가축 없이는 절대 농사를 짓지 않는다. 언제나 다양한 작물을 기른다. 흙을 보호하고 침식을 막기 위해 몹시도 애를 쓴다. 식물의 찌꺼기와 동물의 배설물을 섞어 부식질로 만든다. 버리는 건 없다. 성장의 과정과 부식의 과정으로 균형을 이루도록 한다. 넉넉한 지력을 유지하기 위해 넉넉하게 공급해 준다. 빗물을 저장하기 위해 엄청난 관심을 쏟는다. 식물도 동물도 스스로 병을 이기도록 내버려 둔다.
자급자족의 생활 패턴을 구축하기가 쉽지는 않다. 농업적인 경제의 규모도 달성해야 하지만 그보다 우선 정신적인 개량이 필요하다. 소유에 대한 확고한 신념과 철학을 갖추어야만 자급자족의 농업이 가능하게 될 것이다. 뱃속을 똥 덩어리로 가득 채우고 지방 덩어리로 가득 찬 내장 속에 무엇을 또 더 채우려고 하는가. 우리의 농업 시스템 전체가 값싼 석유에 의존하고 있다. 농업은 생명산업이다. 농업이 숲이나 대초원 같은 자연을 본보기로 삼아야 한다. 먹거리에 관심이 있으면서 먹거리 생산에 관심이 없다는 건 명백한 부조리다. 도시에 사는 소비자는 자신이 농민이 아니므로 먹거리 생산에 무관심해도 좋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들은 누군가가 어딘가에서 어떤 식으로든 그들을 위해 땅을 일구어 농사를 지어야만 먹을 수 있다. 농민이 먹거리를 기르기보다는 사는 게 많은 쪽으로 유도될 경우, 그 농민은 생산자라기보다는 소비자가 되며, 농장의 수입의 상당 부분을 잃게 된다. 농민은 생산자이다. 자급자족의 기본적인 원칙하에 작은 규모의 농토에 다양한 작물을 심어 농산물을 생산하고자 해야 한다. 아주 적게 벌더라도 쓰는 돈이 그보다 더 적으면 충분히 생활해 나갈 수 있다. 검약한 생활을 실천하면서 현금 경제 못지않게 에너지 경제도 독립적 체계를 구축하라.
현대 농업의 농민들은 부채를 얻어야만 올라갈 수 있는 생존이라는 외길 사다리를 오르기 시작했다. 기계가 커질수록 더 많은 땅이 필요해졌고, 땅이 많아질수록 더 많은 기계가 필요해졌으며, 그럴수록 더 많은 땅이 요구되는 악순환이 계속되었다. 생존자는 기계와 담보와 이웃의 파산 덕분에 불확실하고 일시적인 성공을 종종 거두기도 했다. 그리하여 농장은 '공장'이 되었고, 공장에서는 속도와 효율과 수익성이 성과의 주된 기준이었다. 물론 그러한 기준들은 산업적인 것이지 농업적인 것은 아니다. 1930년대 말 우리 농업에서 흔했던 어려운 시절이었기에 자연이 거저 내어 주는 먹거리를 찾아 들과 숲을 다니다 보니 들고 날아야 할 게 많았다. 봄이면 푸성귀를, 여름이면 과일이나 딸기류를, 가을이면 견과류를 따러 다녔다. 따뜻한 철에는 낚시를 하고 추운 철에는 사냥을 했는데, 먹거리도 구하고 재미도 보기 위한 일이었다. 많은 농가의 산림은 작으면 탄탄했고, 사람들은 철마다 생기는 그런 기회를 아주 요긴하게 생각했다. 그런 농가들은 생산의 장소였는데, 적어도 그중 일부는 경제적으로 순이익을 올리며 살았다. 그들에게 '소비'라는 발상은 아주 낯설었다. 전형적인 자급자족의 생활로 검약하게 행복을 누리면서 살아갔다.
《온 삶을 먹다(웬델 베리 저)》에서 일부분 발췌하여 필사하면서 초서 독서법으로 공부한 내용에 개인적 의견을 덧붙인 서평입니다.
|
|
온 삶을 먹다 /저자 웬델 베리/출판 낮은산/발매 2011.10.15.
P153 아미시 농장은 농사는 땅의 생산력에도 농부의 능력에도 맞는 적정 규모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아울러 농업 문제의 적절한 해결은 확장이 아니라 관리의 다양성, 질서, 책임 있는 유지, 건실한 품성, 투자 및 경비에 대한 분별 있는 제한에 있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P298 먹거리에 관심이 있으면서 먹거리 생산에 관심이 없다는 건 명백한 부조리다. 먹는다는 건 씨를 뿌리고 싹이 트는 것으로 시작되는 먹거리 경제의 한 해 드라마를 마무리하는 일이다. 하지만 먹는 사람들 대부분은 그런 사실을 더 이상 인식하지 못한다. 그들은 먹거리를 농산물이라 생각할지는 몰라도, 자신을 '소비자'라 생각하지 않는다. 지금 살림을 되살리는 일은, 실제로는 지극히 복잡한데 단순화되어 버린 대상을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리는 일이다. 그러자면 생태계의 견강을, 농장을, 인간의 공동체를 농업의 궁극적인 기준으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대지 포함 최대 1,000평 정도로 텃밭 가든을 한정한다. 텃밭 정원을 만들려고 하는 이유를 확고히 해야 한다. 더 이상은 관리가 불가능한 면적이다. 가능하면 500~600평 정도가 무난하다. 최소 단위는 400평 정도다. 텃밭 가든에는 자연과 상식과 실용성의 한계 내에서 최대한 많은 종류와 종을 길러 숲을 만들어낸다.
농업이 계속 생산적이기 위해서는 땅을 보존하고, 땅의 비옥함과 생태적 건강성을 보존해야 한다. 즉, 땅을 건강하게 이용해야 한다. 그렇다면 또 하나의 요건은 땅을 건강하게 이용하기 위해서는 사람이 땅을 잘 알고, 땅을 잘 이용할 동기가 커야 하고, 땅을 잘 이용할 이유가 있어야 한다.
현대 농업은 대량생산과 자본순환에 의지한다. '농사'를 짓는다는 것은 시장에 내다 팔 작물을 생산하는 것만이 아니라, 작물을 생산하는 동안에 해당 장소의 건강과 쓸모를 책임감 잇게 지키는 것까지도 포함한다. 가족농은 그 가족이 적절히 돌보는 농장이다.
땅을 비옥하게 보존하고 그 땅 위에서 인간과 동물과 식물이 모두 생태적으로 건강하게 순환하며 살아가도록 농장을 돌보는 살림을 한다. 농부가 자신이 키운 가축으로 직접 농사지은 농작물을 기본적인 생산 수단으로 삼는 것만큼 먹거리의 건강한 질을 담보하는 것은 없다.
트랙터의 도래는 다른 무엇보다, 농업이 무상의 태양 에너지에 거의 전적으로 기대다가 이제는 돈이 드는 화석연료에 의존하는 상태로 변화함을 알리는 신호였다. 기계로 농사를 지으면 분명 땅과 가축에 대해 기계적인 생각을 하기 쉽다.
거의 전적으로 생산만을 강조하다 보니 작업 방식이 생태계와 인간 공동체에 내재된 농장의 분연과 성격에 의해 결정되는 게 아니라, 국가 또는 세계 경제와 이용 가능한 기술에 의해 결정되고 만다.
《온 삶을 먹다(웬델 베리 저)》에서 일부분 발췌하여 필사하면서 초서 독서법으로 공부한 내용에 개인적 의견을 덧붙인 서평입니다.
|
|
온 삶이 되는 진정한 농업의 이상을 찾아서 웬델베리의 이력은 특이하다. 그는 농부이자, 학자이며, 시인이다. 그는 5대째 농사를 짓는 미국인이다. 이러한 그가 생각하는 진정한 농업의 문제는 거대 농업자본을 생각하게 하는 미국의 다른 모습이다. 그는 농사란 무엇인가? 농부는 어떡해야 하는가? 먹거리의 문제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통해 산업농업의 문제를 짚어보고자 한다. 먼저 농사라는 질문을 통해 산업농업의 실패가 살림이라는 전적인 문제를 땅에게 오로지 생산만을 강요한 시도에서 찾고 있다. 우리가 생각하는 농업의 과학화라는 허울은 인간 중심의 단순성을 추구하게 되면서 자연이 가지고 있는 무한한 생산력을 상실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출발점은 결국 지역경제의 순환성을 상실함으로서 농업공동체의 파괴를 가져왔다. 동물공장이라는 표현과도 같이 현대 농업이 감금, 집중, 분리라는 원칙을 통해 생태적 재앙을 초래하게 되었다. 그러나 정부지원은 단기적 성과에 치중하다보니 이러한 결과에 더 집중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산업의 문제점은 건강하지 않은 먹거리를 만든다는 것과 쓰레기(부산물)을 만든다는 것, 대부분의 인류가 의존함으로서 보완시스템이 부족하게 되면서 어느 한 시스템이 문제가 되었을 경우 전체가 위협을 받는다는 결과를 만든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는 출발점은 토지의 문제, 균형의 문제, 다양성의 문제를 다루는 것에서 출발해야한다. 농업의 해결은 가족농의 복원을 통해 가능하고 웬델베리는 본다. 그는 가족과 농장의 관계를 복원함으로서 산업화가 가져온 노동의 천대를 극복하는데서부터 출발해야 한다고 말한다. 현대의 산업농업이 가져온 자연이 가지는 이상의 상실을 다시 살려야 하며, 가족농장이 현실적 대안이라고 생각한다. 농업지원정책도 주로 농업관료와 농기업에 치중되어 있는데 이러한 지원은 바른 농업을 살릴 수 없다는 것이다. 농업문제의 해결은 다른 경제파트와 농업부분을 균형을 맞추는 일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이것은 공공의 농산물생산 통제로서 가능하다. 농업생산물의 정당한 가치를 인정하고 제대로된 생산물을 만들 수 있게 정책을 입안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단순화된 농업생산이 아닌 지역경제와 연관된 농업을 농부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화석에너지의 사용으로 인한 농업생산 증대는 결국 넓고 평평한 땅 만을 유용하게 함으로서 많은 땅들을 황폐하게 만들었다. 농장과 태양의 관계가 약해졌고 기계가 농민을 대체함으로서 태양에너지, 동물에너지, 인간에너지, 토양의 낭비를 가져왔다. 보존에 대한 생각을 가지는 사람은 농업에 관심을 가져야 하며 건실한 농민과 연대함으로서 실질적인 회복의 삶을 만들어야 한다. 소수의 대규모 농업생산자에게 집중된 모습은 위생적이지 않으며 시민사회의 개입할 여지를 만들지 않는다. 농업의 척도는 생산성이 아닌 자연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이것은 자유를 만들며, 인권을 회복하는 민주주의를 만드는 일의 시작인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시도를 하는 농부의 사례를 통해 많은 모습을 보여주려 한다. - 다각화, 돌려짓기, 축분거름 이용, 콩과 식물 기르기를 통해 땅을 살림 - 말을 이용한 구식농법의 활용으로 에너지 절약과 생산비 절감을 이룸 - 말을 통한 산림관리의 예 - 황폐된 땅을 전통농법으로 살린 예 - 건강과 땅을 살리려 노력하는 예의 모습을 말해주고 있다. 마지막으로 먹거리의 예를 드는 데 스스로 여성의 일이라 관심을 안 가졌다고 고백하면서 먹거리의 정치학, 미학, 윤리학을 말한다. 그렇지만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먹는 즐거움이라고 말해준다. 마지막으로 소비자들이 좋은 먹거리를 먹기 위해 먹거리 생산에 참여할 것, 음식의 직접 조리, 원산지 확인, 산업화된 먹거리의 문제점 연구, 도시 농업하기, 음식의 관찰과 경험이 필요하다는 것을 권하고 있다. |
|
내용도 디자인도 멋진 책!
|
|
문득 엥겔계수가 불합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엥겔계수는 한 가정의 전체 소비지출 가운데 식료품 지출이 차지하는 비율을 의미한다. 그런데 여기에서 식료품 지출의 비율이 높을수록 하류층, 낮을수록 상류층으로 구분하는 것은 우리 삶에서 식료품, 즉 먹거리의 가치를 배제한 영악한 계산법이 아닐까? |
|
먹거리와 직접적으로 연관이 된 농업과 환경이 국가 정치와 문화의 주변부로 밀려나버린 이때, 그러니까 아무도 땅에 대해 별 관심이 없는 이때에, 웬델 베리의 에세이 모음집 <온 삶을 먹다>를 맛있게 읽는다.
‘대지의 청지기 웬델 베리의 먹거리, 농사, 땅에 대한 성찰’이라는 부제가 붙은 이 책은 성찰이라는 말의 무게가 고스란히 느껴지는 매우 중요한 이슈들을 독자에게 제시한다.
먹는 것 가지고 장난치는 사람들에 대한 기사를 방송을 통해 보면서 우리는 쉽게 분노한다. 뉴스에 나올 정도의 사기도 문제이지만, 더 큰 문제는 알면서도 ‘그렇게 따지면 먹을 게 없잖아’ 하며 그냥 먹는 게 쿨하다고 여기는 것 아닐까? 이를테면 햄버거에 들어간 쇠고기 패티가 어떻게 양육되고, 살육되어, 요리되어 햄버거 패티가 되는지, 우리는 관심을 가질 수 없다. 관심을 갖는 순간 먹을 수 없기 때문이다. 아니, 우리 사회는 알 필요가 없다고 얘기한다. 생산의 효율성만을 따지는 사회에서, 공장화된 농장과 공장화된 토지에서 대량 생산으로 만들어진 먹거리가 과연 우리 몸에 좋을 수 있는지 의구심을 가지지 않는다.
동물공장에 갇혀 키우게 되는 동물들은 뭘 먹을까? 너른 초원에서 풀을 뜯거나 하는 건 말도 안 되고, 대규모 단일경작 방식으로 길러진 곡물 사료에 의존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물론 저렴한 걸 먹일테니, 아주 끔직하게 먼 곳에서 옮겨 온 것일 것이다.
그리하여 웬델 베리는 농업에 대한 4가지 접근법을 제시한다. 첫째는 규모의 문제다. 산업농업처럼 규모를 키우려고만 할 때, 거기에서 만들어진 기술은 비민주적이고도 비인간적인 규모로 확대될 수 있다. 농토의 크기도 농적으로 매우 중요한 문제다. 농토가 너무 크면 효과적인 순환 방목을 하거나, 경작지 침식을 방지하기가 어려워진다. 그래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농토를 작게 유지하는 것이다. 웬델은 이 부분에 대하여 <가족농을 옹호한다>라는 장에서 상세히 설명한다.
둘째는 ‘균형’의 문제다. 관리가 생산을 따라갈 수 있도록 사람과 땅 사이의 적절한 비율을 구하는 문제다. 이는 물론 위의 규모의 문제와도 연관이 된다. 이 두 문제에 대한 적절한 해법을 찾는다면, 토양 침식이나 토양 압축 같은 문제도 풀릴 것이다. 더 나아가 각 농장과 농부는 식물과 동물 사이의 비율을 적절하게 맞춰야 한다. 식물과 동물이 균형을 이루어야 땅의 비옥함이 완벽한 순환을 유지하거나 완벽에 근접할 수 있다. 셋째는 ‘다양성’의 문제다. 자연과 상식과 실용성의 한계 내에서 최대한 많은 종류와 종을 길러야 한다. 넷째는 ‘질’의 문제다. 좋은 먹거리에서 비롯되는 우리 인간들의 신체의 건강뿐 아니라 경제, 문화, 정신의 건강까지 모두가 건강하기 위해서는 결국 농업이 건실해야 하는 것.
결국 위 4가지 접근법을 고려했을 때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지가 바로 가족농의 개념이다. (가족농이란 한 가족이 농사짓기 충분할 정도로 작으며, 고용한 사람으로부터 약간의 도움을 받을지언정 그 가족이 ‘직접’ 농사짓는 농장을 뜻한다) 가족농은 곧 건실한 농업과 동의어나 마찬가지인데, 그 이유는 ‘사람은 땅을 이용할 때 애정을 갖고서 대해야 하며, 그러자면 땅에 대한 친밀한 지식과 관심과 돌봄이 필요’ 한데, 가족농은 충분히 그 조건을 만족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건실한 농부가 꾸려 가는 작은 농장은 건실한 장인이 꾸려 가는 작은 작업장과 마찬가지로 일을 질적으로 우수하고 품격 있게 만들며,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일하는 사람도 나라도 위태로워진다는 점이다.
그렇게 좋은 가족농이, 그러나 최근 볼 수 없는 이유는 뭘까
여기서 우리는 문제의 핵심에 이르게 된다. 산업경제는 그 바깥에 있는 모든 이상이나 기준과 결별해 버렸다는 점이다.
물론 우리 사회가 산업적 가치를 최우선적으로 받아들여 나타난 폐해는 비단 농업에만 국한되지는 않는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우리나라의 7, 80년대의 고도의 산업화 정책으로 눈부신 경제 발전을 이룩했지만, 지금 우리는 그로 인한 엄청난 문화적, 정신적 곤궁을 겪고 있다는 것 아닐까 지금 우리 시대는 모든 걸 숫자로 말하고, 효율로 측정하고, 돈이 되는지의 여부로 생각을 평가한다. 걸핏하면 어떤 것의 물질적 가치를 환산하여 스스로의 성과를 자축하며, 농업과 같은 건 일찌감치 사양 산업이라 칭하며 기피 대상으로 삼기 바빴다.
1부 농업이 매우 이론적이었다면, 2부 농부는 실제로 모범적인 농업 살림을 하고 있는 농부들에 대한 이야기가 펼쳐져, 1부에서 언급한 이론이 실제화 되어 나타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3부 먹거리는 웬델 베리가 직접 쓴 소설 작품들에서 먹는 것과 관계된 부분을 보여주고 있어 더 흥미롭다. 정리하자면 이 책 <온 삶을 먹다>는 농업과 땅에 대한 이론적 고찰로 시작해서, 농사와 먹거리라고 하는 우리 생활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것들의 이상적인 생산과 소비에 대하여 그리고 있다. 쉽지 않은 책이지만 두고두고 봐야할 책이다. 물론 웬델이 주장하듯이 우리 모두가 자급자족할 수야 없겠지만, 그래도 최소한 그런 제대로된 농업을 하고 있는 지역 농장의 농산품을 이용하여, 제대로 알고 먹는 것만으로도 족하지 않을까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