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유령
(중략) 유령은 햄버거를 먹고, 음악을 듣고, 천천히
햄버거 하우스의 이층 계단을 내려와 신도시의 중심을 향해 걸어갔다 지하도를 지나, 횡단보도의 푸른 신호등을 지나, 이십사 시 불가마와 이십사 시 감자탕을 지나, 유령은 이 세계에서 저 세계로 이동중이었고… (중략)
백 년 동안의 고독
발견되지 않은 루트를 따라 고독이 발굴되었다. 얼음산을 오르던 자들의 시신은 놀라운 고독으로 가득했고, 고독의 외로움은 완벽하게 보존되었다. 시신들은 저마다 침묵하며 고독했으므로 죽은 자들의 흐느낌은 침엽수림을 돌아보며 어느덧 사라졌다. (중략)
시를 읽는 것은 두려운 일이었다. 입시를 거치며 머리 속 한 구석을 차지한 시를 읽는 방법이 잘못된 것을 인지하고 있었고 그것 외에 시를 읽는 방법을 몰랐기 때문이다. 시어를 해체하고 억지로 심상을 분류하는 입시형 해석이 시를 읽는 방법의 전부였다. 시를 보면서 이미지를 떠올린다던가 시구에 감동을 받기보다 시는 철저하게 해부되어야 했고 오래된 건물을 해체하고 재건축을 하는 것처럼 문제로 다시 만들어졌다. 그렇게 내 알량한 해석으로 시를 해부하고 해체해버릴까 봐 시를 점점 멀리했었다.
시는 가까이에 있지 않았다. 다른 문학작품들을 전공 수업 속에서, 생활 속에서 마주치게 되는 것과 달리 시는 스스로 찾지 않으면 마주치기 어려웠다. 시를 읽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스스로 찾지 않으면 마주칠 일이 없는 시를 읽는 것은 요원한 일이었다. 멀리 있던 시를 일상 속에서 마주 친 것은 지하철 역에서다. 안전선 밖에서 지하철을 기다리며 스크린 도어를 무심코 바라보다가 그곳에 쓰여진 시를 읽게 되었다. 입시를 지난 시간이 길어서인지, 시에서 공감을 느껴서인지 시를 해체하지 않고 곱씹어 읽게 되었다. 일상의 반복, 허무함 같은 것이 느껴졌는데 운이 좋게도 스크린 도어에 비친 퇴근 시간 내 모습이 시에 겹쳐져 보였다. 이미지를 떠 올리는 대신 내 모습이 시의 이미지가 되어 비춰졌다. 지하철 스크린 도어의 시를 읽고 나도 시를 시처럼 읽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2013년을 맞아 시집을 하나 구매했다. 새해가 되자 시집을 읽는 것에 도전하고 싶었고 시인과 만날 기회가 있어서 시집을 구매하게 됐다. 시집을 구매하면서 시인을 만나서 하고 싶은 질문들을 떠올렸다. 시를 해체하는 것 대신, 시를 시처럼 읽고 시인을 만나 내가 이해한 것을 확인 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아주 단순하게 “제가 이 시를 이렇게 이해했는데, 맞나요?” 라는 시의 정답을 물어보려고 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시를 찬찬히 곱씹으며 읽으면서 시의 정답 대신 눈을 감고 눈두덩이 위에 내 나름의 이미지를 떠올렸던 것 같다.
조동범 시인의 『카니발』은 죽음이라는 주제가 시집 전체를 관통하고 있다. 삶 옆의 죽음, 이름없는 죽음, 일상적인
죽음에 대한 무심함 등을 읽을 수 있었다. 신문 속에 등장하는 죽음에 대한 무관심, 죽음 자체에 대한 의식보다 죽음에 의한 변화에 대한 관심, 죽음에
대한 어쩔 줄 모르는 내 반응 등을 떠올리며 시를 볼 수 있었다. 이게 맞는 것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내 나름대로 이해하고, 내 경험으로 이미지를 떠올리며 내 안으로 가져와서 내 경험과 대입하며 시를 읽어보게
됐다. 공감, 이해, 감정의
아지랑이 같은 꿈틀거림을 느끼고는 시를 읽는 이유를 알게 된 것 같다.
시는 아직도 어렵다. 시어를, 주제를, 심상을 이해하기도 어렵고 감동을 느끼는 것은 더더욱 어려운 것 같다. 아직
시를 두려워하고 있고, 시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인 것 같다. 서사적인
언어의 연속성에 익숙해져 있고, 그런 글만 읽었기 때문에 또는 시적 감성이 없기 때문에라고 자책을 하면서도
시는 아직도 이해하고 싶고 감동을 느끼고 싶은 분야다. 시집을 읽으면서 전체를 이해하진 못했지만 시적
감성이 부족한 내게 감정의 아지랑이를 준 시가 몇 편 있었기 때문에 다음 시집을 읽을 수 있는 용기를 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