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일지라는 작가의 이름하나로 선택한 책이였다. 기대 만큼 이 책은 큰 만족감을 주었다. 누가 책을 권해달라면 나는 기꺼이 이책을 귄해주고 싶다. 다른 소설에서는 느낄 수 없는 하일지만의 맛이있다. 이책은 원점회귀방식으로 읽을때 혼란스러움을 주기는 한다. 기분나쁜 검은새를 피해 들어간 엘리베이터에서 이상한 세계로 가게되고 거기에서 또 다른 삶을 살다 나온 주인공은 현세계 자신의 삶이 엉망진창이 된걸본다. 자신의 가족은 자신을 못알아보고 애인의 친구가 애인이 되어있는 혼란함 속에서 그는 모든이에게 버림받고 결국 그 자신이 ....(마지막은 책에서..) 하일지의 소설 새는 독특한 소재로 기발한 상상력으로 긴장감을 놓을 수 없게 만든다. 매일먹는 반찬은 질리듯이 뭔가 새로운 책을 읽어보고 싶다면 이책을 권하고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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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일지의 신작 <새>는 읽고 있으면 좀 어지러워지는 그런 소설이다. 왜 어지러운가? (사실 이건 그의 트레이드 마크이기는 하지만) 이번 작품에서도 스토리는 약간의 변주를 거쳐 끝없이 반복되고, 그의 작중 인물들은 전혀 다른 상황에서 똑같은 대사들을 주절거리며, 그것 때문에 역으로 상황이 동일해져 버리는 기법들을 쓰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건은 점점 의미를 잃어버리고 독자들은 끊임없이 기시감(旣視感)을 일으키게 된다.
이 기시감이란 것이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것인지 내게만 있는 것인지 모르겠으나, 그 찰나는 언뜻 내가 나를 되살고 있다는 느낌, 혹은 "반복에 지나지 않는 인생"의 뉘앙스를 주는 것이어서 별로 유쾌한 종류의 감정은 아니다. 하일지 소설의 중요한 코드 중 하나가 바로 이 "반복"이며, 이것은 작가의 말대로 "소설 문학의 오랜 율법"을 전복시키는 형식이 되고 있는 동시에 그 자체가 거대 자본주의 사회의 본질적 속성에 다름 아닌 것이다. 하일지 소설의 대부분의 인물이 일상으로부터의 탈주를 시도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A라는 이니셜로 표현되는 <새>의 주인공도 그런 의미에서 <경마장> 시리즈의 R, K들과 동궤에 놓인다. 그러나 <경마장에서 생긴 일>에서처럼 자신의 충동적 의지에 의한 탈주라기보다는 조작되고 기획되는 상황에 의해 점점 미궁에 빠지는 쪽이다. 작가는 이 작품에서 A라는 인물을 "까마귀와 비슷한 어떤 새"로 변신까지 시키고, "새가 된 A"가 도입부의 "새가 되기 이전의 A"를 쫓아다니는 장면으로 끝을 맺음으로써 소설 전체를 자기 분열적인 미궁으로 만들어 놓고 있다.
<경마장> 시리즈로부터, <새>에까지 이르면 작가 하일지에게 이 "미궁"이란 거의 하나의 강박관념이 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의 인물들 대부분은 영문도 모르는 채 의미를 알 수 없는 어떤 사건에 빠져들고, 그 속에서 고통을 (그리고 동시에 유희를) 겪으면서 점차 파멸로 치닫는다. R, K, A 모두가 지적이며 논리적인 사고를 갖고 있지만 그들이 논리에 기대면 기댈수록 의미는 증발하고 사건은 미궁 속으로 빠져드는 것이다.
이 "미궁"이야말로 "반복"-"의미 없음"과 함께 하일지가 현대를 바라보는 한 방식일는지도 모른다. "특히 오늘날 인간이 경험하고 있는 상황, 그들의 불안, 고뇌, 욕망, 좌절, 공포......"(작가의 말)등은 자아와 세계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분열되어 더 이상 세계를 이해할 수 없는 미립자(微粒子)가 되어 버린 현대인들에게는 피할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의 소설 속 개별자들은 그 누구보다 개성이 강한 인물들일 수도 있지만, 또 어떻게 보면 누군가에 의해 조작 당하고 있는 광대와 같은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 A가 반복해서 내뱉는 몽유의 언어들을 보라. 그는 비슷하지만 결코 동일하지는 않은 상황에서 똑같은 말을 중얼거리는데, 그 자신 그것들이 동어 반복임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막 뒤에 숨은 연희자에 의해 조종당하고 있는 꼭두각시 인형과 흡사하다.
A는 왜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일까? A가 몽롱하고 비현실적인 인물이기 때문일까? 그렇지 않다. 읽어보신 분들은 알겠지만, A는 어떤 소설의 인물보다 더없이 현실에 가까운 범인(凡人)이다. 멀쩡한 중년의 남자가 꼭두각시가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의 아이러니가 <새>를 읽는 독자에게 계속 불안함과 불편함을 던져 준다. "미궁 속에서 길 잃은 자의 초상"으로서의 A, 그가 그대로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초상이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결국,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세계는 명확한 의미의 그물망 속에서 움직이는 것이 결코 아니며, 우리는 세계를 전혀 해석해 내고 있지도 못할 뿐더러 이성의 잣대에 따라 살아가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하일지의 모든 작품들은 말해주고 있다. 그는 왜 이렇게 반복해서 줄기차게 "세계의 의미 없음"을 주장하고 있는 것일까. 아직도 전복시켜야 마땅한, "의미의 그물"을 포기하지 않고 있는 소설들이 많아서일까. 아니면, 그를 통해서 위로 받게 되는 어떤 종류의 독자들을 위해서일까(충분히 있을 법하지 않은가?).
어쨌든, 그가 이 작품을 통해서 극적으로 구현해 내고 있는 바대로(그의 소설들은 모두 더없이 극적이며, 동시에 지루하다), 우리는 A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지나간 인생과 현재의 모습을 회의적인 표정으로 되새겨 볼 기회를 갖게 된다. 조신 설화 - 꿈 - 성적 환상 - IMF - 노숙자들 - 이 시대의 가장 - 자아 분열 - 불신과 의혹. 이 숱한 코드들이 "검은 바닷가에 떠오른 검은 시체들을 향해 몰려드는 검은 새들"의 암울한 이미지와 함께 뇌관처럼 숨겨져 있는 이 이상야릇한 소설은, 요즘 한창 잘 나가고 있는 "당신"들은 읽으면 큰일날지도 모를, 그런 소설이다. [인상깊은구절] 바닷물이 왜 검은색이었나고요? 적탄장에 쌓여 있던 석탄이 물에 휩쓸려 들어갔기 때문이지요. 사십 년 전에도 정나진 사람들은 나무를 때지 않고 조개탄을 땠을 만큼 석탄이 흔했대요. 그야 어쨌든 바닷물이 빠져나갈 때쯤 해서는 검은 시체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대요. 그리고 어디서 날아왔는지 까마귀처럼 생긴 검은 새들이 몰려왔대요. 시체를 뜯어먹기 위해서 말이에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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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8.11.
증권회사에서 잘린 중년 남성 A는 어느 날 귀가길에 까마귀같지만 까마귀는 아닌 검은 새를 발견한다. 그리고 그 새는 이후 A를 집요하게 따라다닌다. 사실 A는 지금 사면초가의 상황에 처해 있다. 회사에서 잘린 일도 일이려니와 친구의 빚보증을 잘못 섰다가 퇴직금 전부를 날리게 생긴 것이다. 게다가 부산에 출장을 갔다가 부하 여직원 김지영과 관계를 맺었는데 그 여직원이 아이를 가지게 되었다. 그런 그가 구 도쿄빌딩의 엘리베이터를 탔다가 길을 잃으면서 소설은 급격하게 비현실적인 방향으로 선회하게 된다.
급하게 자신을 도와달라고 해서 만난 소녀는 술집에서 정충식을 만나 자신의 눈먼 동생을 데려와 달라고 부탁하고 술집에 도착하자 정충식인줄 알았으나 나중에 박은하임이 탄로난 여자가 A를 상무에게 끌고가고, 그곳에서 A는 다시 새로운 임무를 맡게 된다. 그 새로운 임무를 수행하려다가 A는 자신의 아이를 가진 김지영과 한 집을 쓰는 정희라는 아가씨를 만나게 되고 그녀와 공중전화부스에서 섹스를 하려다 실패한다. 물론 새로운 임무도 수행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만난 집사 하나가 A를 도련님이라 하며 기차에 태워 남천이라는 고장으로 데려가고 그곳에서 A는 A가 아닌 다른 인물로 대접받는다. 그러다 A의 정체를 아는 한 인물에 의해 A는 자신이 길을 잃었던 엘리베이터로 돌아오게 되고, 현실의 자신의 집을 찾아간다. 하지만 이미 현실 속에서 A는 A가 아닌 것으로 되어 있다. 자신의 자리에는 박은하에 의해 끌려갔던 곳에서 자신에게 임무를 부여했던 땅딸보가 버티고 있는 것이다.
허탈한 마음으로 찾아간 김지영은 자신을 몰라 보고 김지영의 친구 정희는 A를 자신의 애인이라고 우긴다. 그 집에서 빠져나온 A는 우연히 장님 소년을 만나고 그 소년과 함께 다시금 도쿄빌딩의 엘리베이터를 탔다가 과거에 자신에게 첫번째 부탁을 했던 소녀에게 그 동생을 인계한다. 소녀는 동생을 찾아다준 A와의 약속을 지켜 자신의 아빠를 죽인 엄마를 살해한 후 받게 된 보험금 삼억원을 은행에 예금한다.
하지만 그로부터 한 시간 후에 은행들은 모든 예금의 지불을 중지하고, 주변인들에게 물어본 결과 지금은 전시중이며 이미 이 전쟁을 오년을 끌어왔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그리고 이후 A는 검은 새가 되고 바로 자신 A를 바라보게 된다는 순환형의 이야기이다. A가 만난 새가 나중엔 A가 변하여 생긴 새라는 것, 그리고 소설의 첫 부분이 바로 소설의 마지막 부분과 시선이 시작되는 위치만 바뀌었을 뿐 같은 설정이라는 사실이 재미있다.
남미풍이 환상 소설에 가깝다고 해야 할까... 꼬불꼬불 미로 같은 소설의 줄거리를 따라가다보면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는 흐릿해지고, 옳고 그름은 불분명해지며, 결국엔 나와 나 아닌 것 사이의 구분조차 명쾌하게 이루어지지 않게 되는 것이다. 문학적 성취의 높고 낮음과는 상관없이 천편일률적인 소재와 문체와 내러티브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문단을 향한, 이 이단의 느낌 가득한 작가의 소설에 일단 의의를 두고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