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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숨 작가를 좋아한다. 솔직히 그의 책이 재미있는 거냐고 묻는 다면 글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책은 내가 평소에 좋아하는 류의 책이 아니다. 따뜻한 글을 좋아하는 내게 김숨 작가의 글은 굉장히 차갑고 너무도 이지적이라고 해야 하나. 너무도 무심하면서도 책을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심연속에 가라앉게 한다. 우리에게 글 속에서 표현하는 또는 그 속뜻을 생각하게 하고 더 깊은 무엇을 느끼게 하는 것 같다. 어떻게 보면 굉장히 어려움을 느끼게 하고 또 실제로 어려운 책이다. 그럼에도 나는 김숨 작가가 좋다. 무언가 이해하기 어려운 글을 써도 나는 김숨 작가의 글에 속절없이 빠져들게 된다.
이번 책 또한 그러했다. 처음에 책을 펴고 첫 장을 읽었을 때 이 책은 어떤 내용을 다루려 하는 것인가 고민에 빠질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첫 장을 읽기 시작했다. 그러기를 몇번. 나는 어떻게 전개되는 스토리를 기대했던가 보다. 하지만 김숨 작가가 내보인것은 스토리가 아닌 끝없이 반복되는 단 음절의 시처럼 그렇게 속삭이고 있었다.
노란 개를 버리러 가는 소년과 그 소년의 마음들을 자꾸 속삭이고 있었다. 노란 개를 버리러 간다고. 아빠의 택시 트렁크에 있는 노란 개를 버리러 가고 있다고. 택시에는 말 한 마디 건네지 않은 엄마, 밤을 새워 김밥을 싸고 매일 김밥을 싸며 배가 고프면 단무지를 씹어 먹던 엄마의 노란 입. 엄마가 입을 벌리면 엄마의 노란 혀가 마치 노란 개의 눈동자처럼 그렇게 번뜩였던 엄마와 택시를 타고 노란 개를 버리러 간다. 버리자던 노란 개는 보이지 않고 택시에는 밤의 손님이 마치 그림자처럼 앉아 있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탔는데도 택시는 빈 차라는 빨간 등을 켜고 달린다. 살고 있는 도시에서부터 멀리멀리로 노란 개를 버리러 그렇게 떠난다.
김숨 작가의 작품『노란 개를 버리러』는 독자에게 친절하지가 않다. 마치 악몽을 꾸는 것처럼 우리를 혼몽에 빠져들게 한다. 쉽게 설명해주지도 않고 끝없이 반복되는 단어들. 그리고 그 속에서 뜻하는 말 한 마디, 한 문장들이 우리의 가슴을 치는 것 같다. 우리는 노란 개를 버리러 떠나는 아빠와 말이 없는 엄마, 끝없이 의문에 차 있는 소년, 그리고 밤의 손님 옆 빈자리에 타고 그들과 함께 노란 개를 버리러 떠나는 여정을 함께 했다. 저기가 좋겠느냐고 물으면 저기는 아니라고, 더 멀리 가자고 소년의 말을 같이 읖조리며 자꾸만 자꾸만 더 멀리로 가고 있었다. 도대체 트렁크 속의 노란 개는 정말 존재하는지, 노란 개의 울음소리가 들리는게 진짜로 노란 개가 짖는 건지 의아해 하며 소년이 택시를 타며 만난 사람들. 열두 사람이었다가 혹은 열한 사람이었다가 어쩌면 아홉 사람이기도 했던 그 사람들과 함께 우리는 달렸다.
처음과 끝을 알수 없는 모호함. 노란 개를 버리러 가야 된다며 소년을 깨우는 아빠는 이 책의 처음이었다가 부분부분 노란 개를 버리러 가야 된다며 우리를 일깨우기도 하고, 혹은 마지막이기도 했다. 함께 있되 부재하는 사람들을 이야기하고, 곁에 없어도 함께 있는 것처럼 그렇게 우리를 혼몽속에 빠져들게 한다. 악몽을 꾸는 것처럼 우리를 불안하게 하고 우리를 저 깊은 심연의 바닷속으로 유인한다. 달콤한 목소리와 노래로 뱃사공들의 영혼을 빼앗았던 세이렌처럼.
내게 김숨 작가는 세이렌의 목소리와도 같다.
["나는 리뷰어다"이벤트 참여 리뷰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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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꿈을 꿀 때가 있다. 꿈속에서 우리는 신령스러운 존재가 된다. 남자는 여자가 되기도 하고, 여자는 남자가 되기도 한다. 능력이 뛰어난 선수가 되기도 하고, 출중한 외모를 소유하기도 한다. 많은 사람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어, 무엇 하나 부러울 것이 없는 존재가 되기도 한다. 초인적인 존재가 되기도 하고, 어떤 일이든 이루어낼 수 있는 지혜를 가지기도 한다. 이 책은 작가의 그러한 특성이 나타나 있는 듯하다. 언어를 통해 신비로운 감각의 세계를 마음껏 인지케 만들어 주고 있는 듯하다. 몽환적인 세계 속에 머물고 잇는 듯하다. 감각적이고 상징적이다. 내용이 선뜻 다가오지 않는 것은 그만큼 상상력이 확대되어 있기 때문이다. 추상적인 것을 언어를 통해서 객관화시켜 보여주려고 하다 보니 독자들에게 쉽게 다가들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감각과 느낌이 나의 글 읽음의 주된 요소가 되고 있다. 특별한 이야기를 읽고 있는 듯하다. 처음 읽을 때는 무슨 이야기인지 감이 오지 않았다. 한참을 읽어나가다 보니 각 개별적인 사건들의 나열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것이 관련성이 없어도 괜찮다는 마음이 되었다. 이야기가 ‘노란 개를 버린다.’는 한 가지에 초점이 맞춰져 다양한 이야기들의 묶음으로 전개되는 듯하다. 그러나 개를 버리려는 것에 대한 의미는 별로 없다. 개가 언제 있었느냐는 것도 분명치 않다. 개가 어디에 있는 것도 의미가 적다. 개를 지속적으로 버리겠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만이 문제다. 그것은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 듯하다. 노란 개의 실재를 통해 인생의 문제를 그려내려고 하고 있는 듯하다. 언제 시작되는 지도 모르고, 어떻게 살고 있는 지도, 언제 죽어갈 지도 모르는 존재, 노란 개의 실상이다. 그 노란 개의 삶이 인생들과 비교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볼 수 있다. 그것을 작가는 말하고 있다. 실로 느닷없이 자각하고, 갑자기 욕망하며, 별안간 산다고. 그리고 어느 순간 사라질 수 있다고. 이야기에 시간이 왔다 갔다 한다. 공간의 이동도 자유롭다. 인물들까지 변화가 심하다. 이런 이야기들이 혼재한 우리들의 의식을 그려내고 있는 듯하다. 우리의 의식은 한 곳에 머물지 않는다. 그처럼 우리들의 삶도 마찬가지다. 혼재하고 혼미한 우리들의 삶의 문제, 그것이 누런 개의 모습이 아닐까 생각해 보게 되었다. 이야기는 반복이 주된 표현 방법이다. 노인의 사설처럼 같은 이야기가 자꾸만 지속된다. 대표가 되는 이야기가 12 사람의 모호성이다. 열두 사람이 되어도 좋고, 그들이 9사람이 되어도 상관없다. 지속적으로 노란 개를 버리러 간다. 그 노란 개가 어디에서 왔는지도 모르고 어디로 가는 지도 불명확하다. 버려진다는 것에 의미를 두고서 자꾸만 버리려 하고 있다. 아버지와 아들의 대화를 통해서 지속적으로 이루어져 나가는 내용이다. 작품이 읽어나가는 자들에게 많은 인내를 요구한다. 답답한 상황들이 많이 전개된다. 내용이 ‘무엇이다’라고 명쾌하게 이야기할 수 없게 만든다. 단지 ‘듯하다’라는 형태로 추측할 수 있을 따름이다. 그리고 작가의 창작 의도를 생각하게 만든다. 왜 이런 무미건조한 글을 쓰고 있는가? 무엇을 나타내려고 하고 있는가? 그런 생각이 글 속에 나타난 상징성을 생각하게 만든다. 삶의 다양성과 그 실재의 애매성을 그려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명쾌한 것은 없다. 노랜 개가 검은 개가 되어도 상관이 없을 듯하다. 꿈과 같이 전개되는 영상들이 모호성을 띠면서 곳곳에 답답하게 고개를 들고 있다. 이야기의 연속성을 생각하다 보면 아무 것도 찾을 수 없다. 이야기의 편린이 주는 느낌, 그리고 가지고 있는 듯한 내면화된 의미 등을 생각해 보다 보면 아!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 따름이다. 답답하게 읽었다. 실존의 문제와 삶의 문제를 그려나가고 있는 소설인 듯하다. 허나 다시는 이런 책은 읽고 싶지 않다. 철학으로도 충분이 이런 문제들을 생각하고 있다. 문학에서 이와 같은 내용을 다루고 있다는 것은 언어의 장난처럼 여겨진다. 그러면서 독자들을 혼미하게 만드는 효과를 만들어 그것을 매력으로 그려내고 있는 듯하다. 읽으면서 내가 무엇을 하고 있나 하는 생각에 휩싸이기도 했다. 노란 개를 버리겠다는 한 가지 이야기를 토대로, 아이의 여행은 이루어지고 그로 인해 파생되는 많은 생활의 문제가 그려진다. 학교 사람들, 아는 사람들, 만난 사람들은 그가 살아가는데 스쳐지나가는 무의미한 존재일 따름이다. 꿈속의 존재들처럼 인지된다.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존재다. 그가 살아가고 있는 그 순간에 대한 요소만 문제가 될 따름이다. 인간의 근원적인 아픔인, 죽음에 대한 해답을 그려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노란 개를 버린다는 자체에 그런 의미를 담은 듯하다. 그래서 실존의 문제를 근원적으로 해명해 보고 있는 듯함을 느낀다. 사실 시적인 언어로, 매력적인 언어 전개를 해나가는 것이 이 글의 장점이다. 그러나 애매모호한 내용으로 독자들에게 당혹감을 느끼게 만드는 글임엔 틀림이 없다. 당혹감과 부정적인 긴장 등이 이 글의 매력이 아닐까 생각도 해본다. 읽고 나서도 내가 잘 읽었는지 판단이 서지 않는 글이다. 줄거리는 머리 속에 남아있지 않다. 노란 개를 버리고, 12 사람의 이야기만 지속적으로 뇌리에 머물 뿐이다. 답답한 마음으로 읽었다. 나는 재미를 많이 느끼지 못했다. 실험적인 작품으로 가치 있게 다가왔을 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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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부터 어렵다. 도대체 이게 뭐지? 뭘 이야기하고자 하는것이지? 한참을 이 생각에 사로잡혀 읽은 책이다. 소년의 등장도 엄마와 아빠, 그리고 밤의 손님의 등장 마저도 어려웠다. 택시를 타고 노란개를 버리러 떠나는 가족의 이야기에서 내면의 많은 것들을 포함하고 있다. 소년이 소년이 아니고... 아빠가 아빠가 아니다. 노란 개도 실제로 존재하는 것일까라는 의구심도 들었다.
해설에서 이야기하듯 유령 같은 소설이다. 시작을 지우고 삭제된 기억을 배경으로 드리움으로써 시작되는 아주 기이한 텍스트이다. 어딘지 모르게 비현실적이면서도 섬뜩한 소설 속 미로 공간 한가운데에 내던져진 자신을 발견할 수밖에 없다. 도대체 어찌된 사연인지 좀처럼 가늠할 수가 없다. 그저 어떤 정황이 별안간, 무심하게 주어지면서 소설이 시작 될 뿐이다.
소년이 깨어난 것은 그러나 아빠가 깨워서가 아니었다. 주전자가 내지르는 소리 때문이었다. 주전자는 물이 끓으면 호루라기를 다급하게 불어대는 것 같은 소리를 내질렀다. 그 소리는 늘 소년을 불안하게 했다. 벽에 박힌 못이라도 빼 귓속에 찔러넣고 싶을만큼. 깨나서야 아빠가 자신을 째우고 있음을 알았다. 깨어남에 대한 시각을 여러가지 각도에서 보는 듯했다. 소년이 잠들지 않으려고 애썼던 부분들도 그렇고...밤과 낮이 계속 변화되는 것도 그렇고...낯선 징조를 나타내고 있는 듯하다.
노란개가 실제 하는 것인지. 아님 내면의 무엇인지..흰개와 검은개의 등장 또한 그랬다. 노란 개를 왜 버리러 가는지는 끝내 알수가 없었지만 아버지에게 전세자금을 달라던 아들이 밤손님이 되어 아빠의 택시에서 자고 있고..사라진 아들을 남편을 찾는 사람들도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싶었다. 팔리지 않는 엄마의 김밥과 김밥집의 언급도 무언가를 자꾸 이야기 해주는 것은 아닌지 싶다.
어려운 소설 한권 읽어냈다는 것에 기쁘지만 너무 낯선 소설이라 생각된다. 인간의 생이라는 것이 반복해서 실패하는 삶이라는 소름 끼치는 사실을 기어이 기억해내고야 말게 하는 소설이다. 어렵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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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 개를 버리러
김숨 지음
문학동네
매일매일
미스터리물만 읽다가 모처럼 제대로 된 문학작품과 만나게 되었다. 며칠 전에 『82년생 김지영』을 읽고나서 수준있는 책도 읽을 수 있으리라는
착각을 품은 것이 오산이었나 보다. 이 책은 『투견』, 『간과 쓸개』, 『철』, 『나의 아름다운
죄인들』의 작가 김숨의 다섯 번째
장편소설이다. 그러나 아쉬운 점은 소년과
개가 나오는 따뜻한 로드 무비가 아니다. 작가 김숨은 "어긋남에 대한 예민한 자각"(문학평론가 강동호)에 대해서만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그런
김숨이 소년과 개에 대해 쓴다면, 아주 다른 이야기일 수밖에 없다.
작가는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일까? 아니 나로서는 이 소설을 읽으면서 작가 김숨이 전달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는 푸념보다는 작가가 써낸 소설이 무슨 소리인지 도통 모르겠다는 절망감을 느낀다. 그저 아들과 아버지가, 사람과 사람이 서로 제대로 소통이 되지 않고, 자기 이야기만 끝도없이 반복하고 있다는 곤란한 상황을 맞닥뜨릴 뿐이다. 내일 이사를 앞둔 상황에서 무슨 뜻인지도 모르는 책을 잡고 연 삼일을 씨름하고 있는 내가 그저 가엾을 뿐이다. 12년 전 3월에 이 집으로 이사와서 잘 살다가 드디어 내일 근처의 다른 아파트로 이사를 간다. 12년 전의 나는 그래도 40대 초반이었고, 그래서 젊고 에너지도 넘쳤던 반면 지금은 50대 중반이니 그만큼 체력도 딸리고 그저 멍해져서 무슨일부터 어떻게 처리해야할지 번뜩번뜩 떠오르지를 않는다.
한밤중에 주전자의 날카로운 물
끓는 소리에 깨어난 소년이, 소년에게 중요한 진실을 말하지 않는 아빠와 키우던 노란 개를 버리러 간다. 노란 개가 무엇을 말하는지도 모르겠고,
노란 개를 버리러 간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도 모르겠다. 노란 개는 병든 지 오래. 김밥을 말아 파는 엄마는 단무지를 하도 먹어 혀가 노랗게
변했다. 그 노란 혀가 노란 개의 눈동자처럼 입을 열 때마다 번뜩인다. 아빠는 택시 운전사인데, 아빠의 택시에는 잠이 들어서 좀처럼 깨어나지
않는 밤의 손님이 타고 있다.
2017.3.29.(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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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일 밤을 똑같은 꿈을 꾸었다. 하지만 꿈의 내용은 기억나지 않았다. 즐거운 것인지, 슬픈 것인지, 아픈 것인지도 모를 꿈을. 그러나 꿈을 꾼 것은 확실하다. 아마도 지독한 악몽을 꾸었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노란 개를 버리러』를 읽으면서 잠들었으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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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낯선 구조와 숨을 죄어오는 반복에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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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열두 사람이 잠들려고 할 때, 그 여자의 꿈속에서 만나기 위해 열두 사람이 꼭. 소년이 깨어나고 있었다. 꼭 열두 사람은 꼭 열두 사람이 아닐 수도 있었다. 일어나라. 소년이 깨어난 것은 그러나 아빠가 깨워서가 아니었다. 주전자가 내지르는 소리 때문이었다. 주전자는 물이 끓으면 호루라기를 다급히 불어대는 것 같은 소리를 내질렀다. 그 소리는 늘 소년을 불안하게 했다. 벽에 박힌 못이라도 빼 귓속에 찔러넣고 싶을 만큼. 깨나서야 소년은 아빠가 자신을 깨우고 있음을 알았다.(9쪽) 시작부터 모호함이 가득한 소설이었다. ‘꼭 열두 사람은 꼭 열두 사람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은 눈에 보인다고 전부 믿어서는 안 된다는, 눈은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는 이기적인 감각기관으로 신뢰할 만하지 않다는 글로 읽혔다. 자기 전 소년은 물이 끓고 있음을 알았을까. 물이 끓는 걸 알고 있다면 소년은 깊이 잠들지 못한, 가수면 상태였을 것이다. 소년은 주전자가 내지르는 소리 때문에 깼지만 아버지는 자신이 소년을 깨웠다고 생각했다. 내가 행한 일이라고 믿지만 실제론 별개의 행위일 수 있다. 아버지가 소년을 깨운 것은 노란 개를 버리러 가기 위해서였다. 소년은 “노란 개가 없는데, 노란 개를 어떻게 버려요?” 하고 물었다. 노란 개를 버리는 것은 노란 개가 존재해야 가능한 일이다. 존재하지 않는 것을 버리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소년의 물음에 아버지는 이미 노란 개를 택시에 실었다고 답했다. 아빠의 택시 빈 차 표시등엔 빨간불이 켜져 있었고 ‘밤의 손님’과 엄마가 타고 있었다. 택시 안에 존재해야 할 노란 개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아버지는 노란 개는 트렁크에 있다고 말했다. 소년은 아직 노란 개를 보지 못했다. 노란 개는 오직 아버지의 말 속에 존재했다. 택시엔 네 사람과 아버지의 말에 의하면 트렁크에 있다는 노란 개가 있지만 아버지는 빈 차 표시등에 들어온 빨간불을 끄지 않았다. 나는 이들이 한때 존재했으나 더 이상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들, 즉 유령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살아있으면 다 사람일까. 인간이라면 결코 할 수 없는 행동을 자행하며 살아가는 이들이 얼마나 많던가. 노란 개는 버려진 적이 있었고 사연은 알 수 없으나 돌아왔다. 엄마는 그 노란 개가 아니라고 했지만 말이다. 소년의 집이 가난하지 않았더라면, 불행하지 않았더라면 노란 개를 버리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 노란 개를 버리는 일은 소년네 경제 사정과 무관한 일일 지도 모른다. 일어나지 않은 일을 미리 예상하는 일은 어리석다. 소년은 아버지에게 노란 개를 꼭 버려야만 하는 거냐고 물었다. 아버지는 ‘처음부터 버려진 개’라고 말했다. 사실 ‘처음부터 버려진 개’라는 문장은 성립하지 않는 문장이다. 존재하기 전부터 버려지는 대상은 없다. 노인요양원에 머물렀던 노인은 아버지의 택시를 봤지만 간호사는 그 택시는 빈 택시였지만 할머니를 집까지 태워달 줄 빈 택시는 이 세상에 없다고 말한다.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다는 건 어불성설이지만 또 어불성설이 아니다. 삶에는 수많은 범주가 있기 때문이다. 지금 이 범주 안엔 존재하지 않지만 다른 범주에선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타인의 소유는 내가 아무리 갖고 싶어도 내 것이 아니기에 나에겐 존재하지 않는 것이고 타인에겐 존재하지 않지만 나에겐 존재할 수 있다. 노란 개를 버리는 일은 애초 불가능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이곳에는 없지만 저곳에는 존재하기에. 나는 지금껏 노란 개를 본 적이 없다. 잠에서 깬 소년은 아직 노란 개를 보지 못했다. 노란 개는 정말 존재하는 것일까. 소년은 아이인 것도 싫지만 어른이 되는 것도 싫었다. 어른이 된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려고 하면 아빠의 모습 밖에 떠오르지 않았다.(76쪽) 낮은 밤이 되고 소년은 자라면 어른이 된다. 잠을 자면 꿈을 꾸지만 잠에서 깨면 현실로 돌아온다. 거부한다고 해서 거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내가 숨을 쉬는 지금은 꿈일까, 현실일까. 몸이 어른이라고 해서 어른이라고 할 수 있을까. 우리는 이곳에서 저곳을 향해 달려가지만 저곳에 도착하면 이곳과 같다는 기시감이 들고 다시 저곳을 향해 달린다. 혹은 저곳에 도착했는데 일행이 낯선 사람으로 변해 당혹감을 느끼기도 한다. 이곳에서 저곳을 향해 달리는 것은 행복하기 위해서이다. 지금의 이곳은 먹고살기 어렵고 불안하기 때문이다. 불안해서 벗어나기 위해 버둥거리지만 100% 불안이 존재하지 않은 곳은 없다. 불안이 존재하지 않는 곳이 없으니 처음 존재했던 자리에 머무르는 것이 최선일까. 그런데 처음 자리는 어디일까. 진실은 무엇일까. 혼란을 끝낼 수 있는 자는 누구일까. 이 소설을 읽으면서 간절했던 것은 신화 속 ‘아리아드네의 실’이었다. 미로를 헤매는 느낌이었다. 반복되는 문장들로 인해 읽어도 읽어도 계속 그 자리를 읽고 있는 생각이 들었다. 끝이 짐작되면서도 멈추지 못하고 계속 읽었다. 반복된다고 해서 독서를 멈추면 나는 책을 읽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꼭 열한 사람은 깨어나지 않고 있었다. 어쩌면 꼭 열한 사람이 아닐지 모르는, 꼭 열 한 사람은. 일어나라. 일어나라. 소년이 깨어난 것은, 아빠가 깨워서가 아니었다. 주전자가 내지르는 소리 때문이었다. 주전자가 내지르는 소리 때문이었다. 잠을 깨울 만큼 시끄러운 그 소리가, 주전자가 내지르는 소리라는 걸 소년을 알았다. 주전자는 물이 끓으면 호루라기를 다급히 불어대는 것 같은 소리를 집이 떠나가도록 내질렀다. 그 소리는 늘 소년을 불안하게 했다. 김이라도 뭉쳐 귓속을 틀어막고 싶을 만큼. 깨나서야 소년은 아빠가 자신을 깨우고 있음을 알았다.(365쪽) 마지막 이야기가 시작되는 인용문이다. 언뜻 보면 처음 문장과 같아 보인다. 그러나 자세히 읽어보면 비슷하지만 조금 다르다. 처음 문장은 아주 낯설었는데 반복적으로 만나고 다시 마지막 문장으로 만나니 익숙해졌다. 언어의 반복 속에 드러난 건 삶에 관한 불편한 진실이었다. 너무 낯익어서 외면하고 싶은 진실! 스토리가 있는 소설이 아니었고 집중력이 필요한 소설이었고 카프카가 떠오른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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