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대학과 학문
꽤나 심사숙고해서 사용해야 할 말이지만, 일상에서 너무도 아무 생각 없이 사용하는 말(대표적인 예가 문예창작학)이 있다. 그중 하나가 '학(學)'이 아닐까 싶다. 인문학, 사회과학, 자연과학 기타 등등. 독일어로 Wissenschaft. 이 단어는 근대 이전에도 있었겠지만, 현재 한국에서 ~~학은 철저히 근대적이다. 근대적 의미에서 '학'은 3가지 요건을 충족해야 한다, 고 박명규 교수님의 '사회사상사' 시간에서 배웠다. 3가지 요건은 다음과 같다.
1. 학문의 설립자 2. 학문 공동체 3. 방법론
각기 분과학문은 1번과 3번이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하다. 하지만 2번은 거의 일치한다. 바로 '대학'. 대학에서 학문은 터를 잡고 발전한다.
# 대학수, 대학생수의 증가가 인문학을 벼랑으로 몰다
따라서 대학에서 특정 분과학문이 없어지는 추세라면, 그 학문 자체의 위기라고 봐도 무방하다. 요즘 인문학이 그런 대접을 받는다. 국문과, 역사학과, 철학과 등 밥벌이 하기 힘들다는 학과가 다른 학과와 통합하거나 폐지한다는 소식이 자주 들린다.
이런 현실에서 '대학이 진리 추구라는 본연의 가치를 잊지 않아야 한다', '인문학만이 분과학문 체제를 극복할 수 있다', '물질 만능주의로 치닫고 있다' 등의 감상적일 뿐 그다지 도움 안 되는 멘트 남발은 무의미하다. 왜 이런 문제가 발생했는지 원인을 파악하고 대안을 내놓아야 한다.
『인문학의 미래』는 대학수, 대학생수(특히 대학원생을 졸업한 학생)의 증가가 인문학의 위기에 일조했다고 파악 - 물론 이는 부차적인 원인이고, 저자인 월터 카우프만은 사변가 유형만 성공할 수 있는 현재 사회의 구조가 본질적으로 잘못되었다고 지적한다 - 한다. 왜 그런고 하니. 전문화 시대가 도래하기 전인 20세기 초반에는 어떤 학문을 전공하든지 취직이 잘 됐고, 성공했다고 한다. 그때는 대학 수와 대학생 수가 워낙 적었고, 대학 졸업 자체가 특권이었다.
그러다 대학 수와 대학 졸업생 수가 비약적으로 증가했다. 대학원을 졸업해도 갈 데가 없다. 특히 인문학은 박사 출신이 갈 수 있는 곳이 대학뿐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정도로 타대학원에 비해 선택폭이 좁다. 아무리 학문이 '진리 추구'니 뭐니 해도 중국의 선승은 수행을 하기 위해 밭을 갈지 않았던가. 학자도 돈을 벌어야 한다.
# 인문학이 뜬다? 어딜 봐서?
1970년대 미국에서 출간한 책이지만, 40년 뒤 한국 상황에 기가 막히게 들어 맞는다. 어디선가 들었는데, 노령화나 저출산 저성장 고임금 고실업 등 사회의 거시적인 구조 변화는 한국이 미국에 비해 20년 일본에 비해 10년 정도 늦다고 한다. 월터 카우프만이 지적한 현상도 동일하다. 이 책이 한국에 번역된 것은 2011년이지만, 저자가 내린 진단 - 인문학으로 먹고 살기 힘들다 - 은 아무리 늦게 잡아도 1997(그놈의 IMF)년부터는 시작했다고 봐야 한다.
낮은 성적을 받은 학생이 철학, 역사학, 문학, 종교학, 인류학, 심리학, 사회학(내가 졸업한 학교에서 인류학과 심리학, 사회학은 사회과학대 소속이긴 했다)을 공부한다. 이들도 원래는 경영학과에 가고 싶었다. 원래 전공은 뒤로 하고 경영학을 복수전공하고 토익에 몰두한다. 3,000만 원에 비해서는 얻는 게 거의 없다고 해도 무방한 어학연수를 위해 한국을 떠난다. 졸업하고 취직한다.
그러다 스티브 잡스가 선불교에 심취했고 인문학을 강조했다고 한다, 『정의란 무엇인가』가 베스트셀러라고 한다, 하여 평소에는 가지 않는 서점에 들러 『정의란 무엇인가』를 산다. 재미 없는데, 뭐 100만 부가 팔렸다고 하네? 오랜만에 만난 대학 동기와 만나서 책 얘기를 한다. 나와 달리 전공 수업을 열심히 들었던 그 녀석 말로는 『정의란 무엇인가』가 고등학교 윤리 교과서만 제대로 읽었어도 더 이상 볼 필요가 없는 책이라고 한다. 괜히 책값이 아깝다.
그 친구는 대학원에서 지도 교수와 함께 열심히 연구를 한다. 미국 박사 출신인 자신의 선배도 한국에서 제대로 자리를 잡지 못하는 판에 국내 박사인 자신은 교수 자리는 꿈도 꾸지 않는다고 한다. 농담이라도 던져 본다. 그러면 너가 『정의란 무엇인가』와 같은 책을 써 보라고 말한다.
그래도 요즘 인문학이 대세 아니냐고 묻는다. 친구는 어디서 그딴 말을 듣고 왔느냐고 나무란다. 『정의란 무엇인가』 말고 많이 팔린 인문학 책이 어디 있으며, 여전히 철학과는 가고 싶어 가는 학과가 아니라 공부 못해 들어가는 곳이다. 출판계가 어찌나 척박한지 유교 연구자에게 꼭 필요한 도이힐러의 『한국 사회의 유교적 변환』을 구하지 못했다. 1쇄 내고 더 이상 안 찍으니까.
이것이 인문학의 현실이다.
# 그렇다면 무엇을 해야 하나?
『인문학의 미래』는 여러 가지를 건드린다. 인문학의 미래가 없다면, 인류 문명에도 미래가 없다고 단언하는 월터 카우프만은 대학도, 교수도, 학습법도 바꾸어야 한다고 말한다. 사실, 너무 원론적이고 당연한 말밖에 없어 따로 논평할 대목은 없다. 주석가가 아닌 창조적인 사상가가 되어라, 학생의 잠재력을 깨울 수 있는 교수법으로 강의 시간을 최대한 활용하라, 다른 분과학문과 연구도 활발하게 하라, 맞는 말이지만 쉽지는 않다.
서두에서 말한 것처럼, 대학에서 학문이 설 자리가 없다면 그 학문은 사회 어느 곳에서도 자리 잡지 못한다. 대학에서 인문학이 설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인문학이 대학에서 꼭 필요하다는 사실을 증명해야 한다. 이것은 전적으로 인문학자가 해야 할 몫이다.
그리고 대학의 구조를 고쳐야 한다. 지금처럼 많은 대학의 학부에 인문학 관련 학과를 남겨놓을 필요가 있을까. 학부에서 철학과, 역사학과 등을 폐지하더라도 교양 과정에서 반드시 수강해야 할 인문학 관련 강좌의 비율을 높이면 지금보다는 상황이 나아지리라 기대한다. 인문학을 전공으로 공부하기 싫어하는 학생은 학생대로 좋고, 살아 생전 인문학을 한 번도 접할 기회 없었던 학생은 꼭 들어야 해서 좋고, 인문학 박사 출신도 자신이 맡을 수 있는 수업이 많아져 좋을 것이다. 물론 이마저도 교수측과 학생, 그리고 대학 측의 이해가 다를 테니 결코 쉽게는 이뤄지지 않을 것이다.
끝.
어쨌든, 난 인문학이 그중에서도 종교학이 좋다. 호호.
* 덧. 월터 카우프만, 익숙하다 했는데, 내가 읽었던 청하판 니체 전집에 자주 등장하는 인물이더군.
* 본문 속 인상 깊은 대목
전문화 시대를 조롱거리로 만들고 인문학에서 우스꽝스러운 예들을 찾아내는 것은 그러한 시스템의 타당성을 설명하고 변호하는 것만큼이나 쉬운 일이다. 이 두 가지를 동시에 보여줄 수 있는 방법은 그러한 체제의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는 박사 학위 논문을 언급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인문학 박사 학위 논문의 제목 중에서 괴상한 것들만을 뽑아 종이 한 장을 채우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이다. 이런 예들은 전혀 부당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런 논문들은 학문에 기여한다고 여겨지며, 학생들은 논문을 씀으로써 학자와 교육자로 탈바꿈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체로 자신의 학위 논문과 비슷한 성격의 소논문들을 몇 편 더 써내는 사람을 두고, 우리는 학문의 발전에 기여한다고 말한다. 어떤 학생이 칸트 이후의 독일 철학에 관해서 두 권 분량은 됨직한 주제를 들고 찾아와 당신에게 지도를 요청한다고 가정해보자. 그런 경우라면 당신은 아마 한 권 분량이면 충분하다고 말하는 대신 좀 더 좁은 주제를 선택하라고 권할 것이다. 왜 그럴까?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그런 기획안은 포커스가 부족하거나, 설사 포커스가 명확하다 하더라도 상당히 오랜 시간을 연구에 매달려야 하기 때문이다. 논문은 가능한 한 빨리 대학원 과정을 끝마지고 독립적이 되기 위해서 1년 안에 통과해야 하는 하나의 필수과정이다. (중략) 아주 좁은 전공분야를 연구하는 교수들은 진행 중인 자신의 연구를 학생들에게 가르쳐야 한다고 점점 더 많이 주장하고 있으며, 자신과 관심을 공유하는 동료를 뽑으려고 한다. 그 결과 그들의 학생들은 아주 전문화된 식단만을 먹으며 성장하게 된다. 유수한 대학의 대부분 학과들은 자신과 견줄만 한 거머리 두뇌에 대한 전문가 집단은 어디에도 없다는 자부심에 근거해 자신의 탁월함을 주장해왔다. 이와 같은 영역을 공부하고 싶어 하거나 이와 비슷한 접근법을 추구하는 학생들에게 어마어마한 장학금이 주어지는 한, 그리고 교수들이 이런 관심을 가진 학생들에게 연구비를 지원하려 하는 한, 그리고 그러한 극단적인 전문가들에게 높은 보수를 제공하는 직장이 존재하는 한, 비전이나 자율성, 목적의식에 대한 논의는 어떤 설득력도 가질 수 없다. 학문에서도 돈이 위력을 가지기 때문이다.(307~311쪽) |
|
고등학교 때부터 음악을 공부하며 지낸 나에게 ‘인문학’이라는 단어는 생소한 것이었다. 그러던 어느 때 친구 집 침대 맡에 있는 ‘희망의 인문학’이란 책을 몇 장 읽으면서부터 인문학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또 몇 년이 흘러 다시 다른 공부의 길에 들어서게 되면서 20대에 인문학에 관심을 가지지 못했던 것이 후회스러웠다. 그래서 최근에는 철학, 문학, 역사에 대해 조금씩 알아가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러던 차에 <인문학의 미래>라는 책을 만났다. 1장에서는 인문학과 관련된 네 가지 유형의 마음가짐 - 통찰가 유형, 사변가 유형, 소크라테스 유형, 저널리스트 유형에 대해 서술하고 있으며, 오랜 시간 동안 우리 시대가 사변가와 저널리스트라는 두 가지 유형만 양산해 왔음을 이야기한다. 2장에서는 독서법, 특히 고전에 대한 독서법을 다루고 있다. 고전을 읽는 네 가지 주요한 방법을 구분하고 있는데 그 중 하나인 ‘변증법적 독서’를 길게 설명한다. 인문학에서는 읽는 법을 가르치는 것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는 개혁이 불가능함을 말하고 있다. 3장에서는 서평과 번역, 편집에 대해서 논의한다. 서평을 쓰는 사람들 또는 변역가, 편집자, 출판사 관계자들을 향한 날카로운 지적을 한다. 4장에서는 인문학의 한 분야인 종교에 관해 상세하게 다루고 있다. 인문학 연구의 핵심이 인류의 위대한 작품들을 보존하고 대안적인 목적에 대해 숙고하는 것이라면, 그리고 사람들을 보다 덜 맹목적으로 만들기 위한 시도라면, 비교 종교학은 인문학에서 핵심적인 자리를 차지해야 한다. 5장과 6장에서 비전을 어떻게 가르칠 수 있으며 전문화와 학제간 연구가 중요함을 이야기하고 있다 . 오늘날 인문학은 위기의 길을 걷고 있다. 대학에서조차 철학과는 냉대를 받고 있다는 현실이 그것을 말해 준다. 내가 문과 이과를 결정할 때는 ‘남자가 문과 가서 뭐하나’란 말은 있었지만 지금은 철학과 같은 인문학 전공등이 폐지 되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경쟁에서 이겨 성장하는 가치관이 대학사회에까지 장악해버렸기에 소위 경쟁력이 낮은 학과, 지원 학생이 적은 학과는 폐지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경쟁력만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시대정신, 성장만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시대정신이 인문학을 위기로 이끌고 있다. 또한 소위 강남 좌파 또는 아이비리그 리무진 좌파라 불리는, 인문학적으로 살지 않는 인문학자에게도 문제가 있다. 예로 미국의 양심이라 불리는 놈 촘스키 MIT교수는 귀족좌파라 불리면서 도마 위에 오르곤 했다. 입으로는 미국기업을 독재자로 몰아붙이면서 주식투자를 하며, 자본주의를 ‘거대한 재앙’으로 욕하면서 강연료와 인세 수입으로 호화주택과 별장을 사들인 상위 몇 %의 부자라는 것이다. 본인은 좌파라고 진보적이라고 말하면서 강남에 살면서 자녀들을 일류대학에 보내기 위해서 애쓰는 사람...말과 행위가 일치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나도 그와 같을지 모르겠다. 인문학은 인간 삶의 발자취에 대한 성찰이라고 한다. 문학과 철학, 역사, 미술, 음악, 종교...학문을 도구로 삼아 자신의 안녕만을 유지하며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생이 끝나는 날까지 순수하게 배우는 그것을 기쁨으로 삼으며 살아가고 싶다. 월터 카우프만의 <인문학의 미래>는 출판된 지 30년이 넘었기도 하고 또한 미국적인 풍토를 갖고 있지만 인문학 전체에 걸친 그의 폭 넓은 이해와 대학교육을 향한 비판들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익하고 좋은 책인 것 같다. 사족 1 이 책은 재생종이로 만든 책이다. 책 읽는 속도가 사는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는 나로서는 책을 구입할 때마다 나무가 없어진다는 생각에 자책감이 들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하고 그런데, 재생종이로 만들었다니...반갑다! |
|
[인문학의 미래] 죽은 인문학자의 살아있는 일침
프린스턴대 철학과 교수였던 월터 카우프만의 1977년 작, 생각보다 국내에 많이 알려져 있지 않았던 책으로 저자는 이미 고인이 되었다. 이 책 뿐 아니라 월터 카우프만의 저서는 대학 도서관들에 원서들은 제법 소장되어 있는 편이나 그 동안 번역된 게 손꼽을 정도다. <인문학의 미래>는 그의 30여년의 경험을 바탕으로 인문학과 인문학 교육에 외치는 쓴 소리다. 그러나 국립중앙도서관과 국회도서관, 각종 대학도서관을 비롯하여 이 책의 원서를 소장하는 곳이 거의 없으며 미리내에서 낸 번역서는 소장 도서관이 제법 많은데, 13년 전 이남재 교수가 번역한 이 번역서는 '수많은 오역과 낯 뜨거운 비문으로 가득한 번역'이라는 혹평을 들으며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그런 의미에서 이 죽은 인문학자의 명서를 제대로 된 번역으로 21세기에 살리고 알리겠다는 동녘과 이은정 교수의 의욕을 보고 새 번역본이 무척 궁금해졌다.
제목을 봤을 때 인문학의 위기에 대한 현상 진단과 대안에 대한 담론을 다룰 것이란 일반적 기대와 달리 <인문학의 미래>는 인간형의 고찰과 고등교육에서의 교수법, 독서와 출판에 대한 것까지 다루며 논의의 범위가 상당히 넓다는 점에서 특이하다. 이러한 접근과 기술이 가능한 것은 저자가 철학자이자 교수, 번역가, 서평가, 편집자, 시인 등 다양한 이력을 가졌기 때문이다. 또한 이 책을 통해 인문학의 위기가 시작되는 시점을 알 수 있다. 저자는 오늘날 인문대학이 겪는 시련이 세계 제 2차 대전을 기점으로 대학교육이 재편되면서부터라고 분석하는데 전후 수많은 대학이 생기고 교수가 부족해 60년대까지 박사 미 소지자도 쉽게 교수가 될 수 있던 것이 불과 십몇년 만에 미국만 매년 2000명 이상의 백수 인문학 박사를 내는 상황으로 전락했다는 사실에 다소 놀랐다. 68혁명에 대한 저자의 평가도 흥미로웠다.
첫 장 '네 가지 유형의 마음가짐'은 이 책의 논의 전반을 이해하는 데 있어 바탕이 되는 장으로 저자는 네 가지의 인간형을 제시한다. 기존의 이론과 시대의 상식을 뒤집는 새롭고 독특한 아이디어를 제시하는 통찰가형, 기존의 연구들과 자료들을 정리하고 계승하며 학파 중심적으로 활동하는 사변가형, 어떤 사상과 이론도 틀릴 가능성을 항상 염두하며 비판적 견지와 무지의 자각을 강조하는 소크라테스형, 시류를 중시하며 지금 당장 팔릴 것을 생산(연구·집필 등)에 집중하는 저널리스트형이다. 이 유형들이 어떤 건 무조건 좋고 어떤 건 무조건 나쁜 건 아니다. 월터 카우프만의 문제의식은 현재의 교육과 사회가 이러한 유형들이 모두 균형 있게 공존하지 못하고 사변가형과 저널리스트형 인간들만 주로 양산하고 있다는 것이다.
2장과 3장은 책에 관심이 많은 독자들이 특히 흥미를 가지며 주의 깊게 볼 부분이다. 전자는 독서방법론에 대해 후자는 서평·번역·편집에 대해 다루는 장이다. 2장에서 월터 카우프만은 인문사회과학의 핵심을 독서로 꼽으며, 대부분의 학생들이 잘 읽는 법에 대해 배우지 못하고, 교수들과 학자들은 각자의 극단적인 독서법을 고집하는 현실에 개탄한다. 그러면서 고전 독서법을 중심으로 성서해석적 독서, 독단론적 독서, 불가지론적 독서, 변증법적 독서 네 유형의 독서법을 설명하며 변증법적 독서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서평의 정치성과 번역과 편집에 있어 윤리와 주의할 점을 논하는 3장은 독자들을 각성시키는 '위험한 진실'인 동시에 이 작업에 얽혀 있는 인문학계에 대한 자조이기도 하다. 이러한 의견이 양심을 이끌어낼지는 모르겠지만 새겨 볼 고언임엔 분명하다.
월터 카우프만이 정의하는 인문학의 범위는 종교, 철학, 예술, 음악, 문학, 역사 여섯 분야이다. 4장과 5장은 교수법과 교육프로그램의 모색과 현재 교육 현실에 대한 비판과 방향잡기라면 마지막 장은 학제 간 연구로 마무리하며 인문학의 생존법에 대해 총정리하며 끝낸다. 고등교육에서 현저하게 소홀히 다뤄지는 종교 교육을 시작으로 철학과 문학 등 다양한 강의안들을 제시하는 4장을 읽으면서 프로그램 참고 뿐 아니라 양서 리스트를 얻어갈 수 있다. 5장과 6장은 지금까지 논의한 것을 정리하며 책 전체에서 인문학의 위기와 미래에 대해 가장 충실히 다루는 장이다. 월터 카우프만이 인문학의 생존을 위해 강조한 것은 통찰가형이나 소크라테스형도 많이 나올 수 있기 위한 교육의 개혁과 학제 간 연구를 통한 인문학의 가치 강화이다.
역자는 이 책의 주요 독자를 인문학자(대학 교수와 그 외 연구자들)로 규정하고 있는데, 그만큼 이 책이 일반인 독자를 대상으로 했다기에 다소 수준이 높고 저자의 비판 방향이 학계와 교육에 놓여 있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일반인에게 유리된 주제도 전혀 이해 못할 만큼 어려운 내용도 아니기에 충분히 즐길 수 있는 책이다. 한편 앞서 언급했듯 이번 동녘에서 출간된 <인문학의 미래>는 번역에 신경 썼음을 강조하였는데, 길고 복잡한 구조의 문장이 많은 걸 감안할 때 가독성에 꽤 신경쓴 듯 보인다. 또 본문에 언급된 출판물이 단행본·잡지·장편인지 논문·단편·미술작품인지 기호를 달리 해 구분한다거나 문맥에 따라 'Bible'을 성서와 성경으로 바꿔가며 번역하는(그래서 헷갈릴 수 있지만) 섬세함이 있다. 또 카우프만이 정리한 참고문헌을 일일이 대조에 국내 번역 여부를 써놓은 것도 독자를 위한 상당히 세심한 배려다.
<인문학의 미래> 출간 이후에도 인문학은 계속 벼랑 끝으로 내몰렸다. 인문학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는데, 월터 카우프만이 '자살'이라 표현했던 것처럼 이러한 위기에 인문학 스스로도 어느 정도 책임이 있지 않나 싶다. 아이러니한 것은 출판계 같은 경우 '인문학 열풍'이 불고 오히려 다른 분야에서 인문학적 가치를 강조하며 융합을 꾀하고 있다는 것이다. 반면 순수인문학 교양서들은 점점 가볍고 쉬워진다. 인문학을 사랑하지만(그래서 취미로는 더없이 환영이지만) 전공은 꺼리는 요즘 세태를 반영한 것일까. 출간한지 30여년이 넘은 이 죽은 학자의 외침이 이젠 무의미하고 추억 저편으로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현재에도 생생하게 살아있는 일침이 된다는 사실에 저자의 혜안에 탄복하면서도 몹시 씁쓸하고 아팠다.
몇 달 전 들었던 한 라디오 프로그램이 생각났다. 어느 유명 인사가 자신이 고등학교 때 이과를 선택한 이유는 그 시대엔 문과 가면 밥 굶는다는 말이 돌았기 때문이라 하였다. 그는 60년대 초반 생이었고 그들의 대학시절을 우리 세대는 참 낭만적이다 여겼다. 지금은 더 상황이 좋지 않다. 수능이 끝났고 수많은 문과 학생들이 전공 선택을 고민하는 때이다. 그들에게 진로에 대한 확실한 신념이 없으면 무난하게 경영학과를 가라 비겁한 조언을 던지는 기저는 채만식의 <레디메이드 인생>에서 자신의 아들을 인쇄소에 맡기는 P의 무력감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표류하고 있는 인문학, 그럼에도 인문학을 계속 가르쳐야 하고 인문학은 발전해야 하며 인문학의 희망을 보고 싶다 생각하는 독자들에게 <인문학의 미래> 일독을 권한다. |
|
泰山鳴動 鼠一匹 태산명동 서일필 태산이 요동쳤으나 나온 건 쥐 한마리 뿐이다.
이 책의 203쪽에 인용되어 있는 구절이다.
그 이전 언제 어디선지 본 듯한 구절인 것 같기도 하다. 요즘 내 머리속에 자주 들락거리고 있다. 작금의 내 처지일 수도 있고 나 자신이 애초에 鼠一匹이었을 지도 모를 일이다. 자존감은 창대하나 현실은 미미한 존재. 하긴 인간 대부분이 그러하다. '나'는 그러한 인간에 속하지 않길 원하지만 미미함자체가 현실. 그 미미함이 모여서 인간을 이루는 것이니 위안을 삼길.
구절을 머리속에서 자꾸 굴리다가 오묘한 반전을 발견했다.
아, 이럴 수가! 태산명동서일필( 泰山鳴動鼠一匹)이 아닌 서일필태산명동(鼠一匹泰山鳴動)이면? 엄청난 일 아닌가? 태산이 요동쳤으면 당연히 호랑이가 뛰쳐나와야 할 일이거늘 쥐 한마리라니. 구절에서 주어를 바꾸면 실로 대단한 일이 일어난 것이다. 쥐 한마리가 태산을 요동치게 만든 것이다. 이 쥐는 슈퍼쥐다. 호랑이와 동급인 것이다. 어느 고전에 나오는 말이며 누가 한 말인지는 모르겠으나 대단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문구. 점처럼 미미한 개체로서의 '나'이지만 통체( 統體)로서의 '인간'과 의미면에서 결코 차별적이지 않다는 것. 나의 쥐울음이 태산을 요동치게 할 수 있음을.
1977년에 출간된 책이다. 어떻게 인문학을 할것인가를 제시한다. 1977년 미국에서 이미 인문학이 위기를 겪고 있어서 갈 곳을 잃어가고 있었다. 동시에 작금의 인문학조차도 사변가들이 장악하고 있어서 역시 길을 잘못들고 있었다. 그것을 우려하며 어떻게 올바른 길을 찾아갈 것인가를 얘기한다. 인문학을 하는 교수, 학생과 우리같은 그저 책이난 읽는 일반인들까지 새겨들으며 길을 찾기를 바란다.
2016년 한국, 인문학이 끊임없이 대학에서 보따리를 싸고 있다. 나같은 무지랭이 공돌이도 인문학을 얘기 하고 있으나 정작 대학은 인문학을 길거리로 내몬다. 아니 대학이 아니라 사회가 그렇게 한다. 갈 곳을 잃은 인문학이 나같은 무지랭이를 집적거리는지도 모를 일이다. 엘니뇨 때문에 북극의 차가운 공기가 갈 곳을 잃고 중위도 지역으로 밀려 내려와서 이번 겨울 맹렬한 추위에 떨었다. 2000여년 전 아시아대륙북쪽지역에 번성하고 있던 유목연합세력 흉노가 쇠퇴하여 서쪽으로 밀려갔다. 로마제국이 멸망하고 유럽에 대 변화가 밀어 닥쳤다. 차가운 공기가 있어야 할 곳은 북극이었다. 그렇지 못하면 존재에 대변화, 존립에 대변화가 일어난다.
"만약 인문학을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 계속 가르친다면, 그것은자신의 관으로 들어가는 열쇠만을 쥐고 있는 것이다." "인문학은 인간적인 태도(humane attitude)와 인류(mankind)라는 두 가지점에서 진정으로 중요하다. 그런 점에서 인문학은 반드시 제대로 가르쳐야 한다. 물론 그렇게 되더라도 인류가 반드시 끝까지 살아남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하지만 만일 인문학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다면, 인류가 살아남을 가능성은 거의 희박하다."
저자가 우려하였다.
|
|
115p부터 이어지는 독서의 기술부분만 발췌해 읽었다. 나머지는 다음에 읽을 생각이다. 성서해석적 독서 - '우리는 모르지만 '그는 알고 있다' 주해는 전형적으로 처음에는 텍스트에 권위를 부여하고, 그 다음에는 그 안에 자신의 생각을 부여하고, 그 다음에는 그 생각에 다시 권위를 부여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 성직자들 사이에서 찾을 수 있다. ... 20c 세속주의자들 사이에서도 상당히 일반화되어있다. ... 그래서 이후에 이루어진 마르크스에 대한 연구는 기독교에 대한 키에르케골의 연구처럼 본질적으로 전혀 학문적이라 할 수 없었다. 독단론적 독서 - '우리는 알고 있지만 그는 모른다' 1. '그가 X에 대해 알았다면 그렇게 말하지 않았을 텐데' 유형 2. '그에게 우리처럼 뛰어난 기술이 있었다면 그렇게 말하지 않았을 텐데' 유형 3. '그는 완전히 형편없는 것은 아니고, 몇 가지 점은 우리 같은 부류에 근접해 있어' 유형 불가지론적 독서 - '우리는 알 수 없으니 진실에 관한 판단은 유보하자' 1. '골동품수집가' 유형 2. '미학적' 유형 3. '현미경적' 유형 세 유형 모두 저자가 가장 중요하게 여겼던 사항은 무시되어 버리며, 어떤 경우가 됐든 특별한 관련성이 있다고 생각되지도 않는다. 독서가는 다시 한 번 최고의 자리에 군림하며, 자기 자신이나 자신의 관점, 선입견을 위태롭게 만들려고 하지 않는다. 한 사람이 위 세 독서법을 모두 사용하기도 한다. 성서해석학적으로 성경을 읽고, 독단적으로 타종교의 경전을 읽으며, 골동품수집가의 마음으로 아리스토텔레스를 읽고, 미학적으로 키에르케고르를 읽으며, 현미경적으로 최근 철학자들과 시인을 읽는 것처럼. 변증법적 독서(저자의 대안적 독서법) - 저자나 우리나 모든 것을 알 수는 없지만 그래도 그와 우리는 이해력이 있어. 그러니 그와 우리는 공동의 탐구를 통해 몇 가지 오류를 넘어서 너라고 할 수 있는 텍스트의 목소리와 마주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는 거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