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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평론가 고미숙박사님의 <동의보감, 몸과 우주 그리고 삶의 비전을 찾아서>를 책꽂이에 넣고서 참 오랫동안 묵혀두었습니다. 한의학의 본산이라 할 동의보감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를 두고 고민을 해볼 요량이었는데, 의학과는 기본틀이 다른 한의학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탓에 자칫 길을 잘 못 들어서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한때 한의학과 관련된 책들을 읽고 부정적으로 이해한 적도 있습니다만, 앎이 늘어가면서 점점 중도적 위치로 선회하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일단 책을 읽은 소감을 한 줄로 정리하면 종합의학서라고 할 <동의보감>을 인문학적 시각으로 해석한데 그치고 말았구나 싶습니다. 인트로(책을 읽으면서 처음 만나는 단어입니다. 재즈나 댄스음악의 도입부에 해당하는 부분으로 우리말로는 서주(序奏)라고 번역되는 단어를 동의보감이라는 고전을 해석하는 책에서 굳이 영어로 적은 것도 별로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의 모두에서 인용하고 있는 ‘신형장부도’를 프랑스 철학자 미셀 푸코가 쓴 <말과 사물>의 모두에서 인용하고 있는 벨라스케스의 그림 <시녀들>과 연결하는 것도 의서인 <동의보감>을 인문학적으로 접근하려는 저자의 의도가 읽히는 듯 합니다. 새로운 접근방식이라는 생각이 드는 한편 아무래도 한의학에 대한 기본적 학습이 충분하지 않을 것으로 보이는 저자가 전통의학이나 현대의학에 관한 글에서 읽은 지식들을 바탕으로 동의보감을 이해하기에는 한계가 있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직접 환자진료를 담당하는 요즘으로 치면 임상의가 있었는가 하면, 유의(儒醫) 즉 학문적 관심으로 의학을 공부한 유학자로서 요즘으로 치면 의학자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의서를 탐구하여 스스로 이치를 깨달아 의학적 조언을 해줄 수 있는 경지에 이른 유의는 돈을 받고 진료행위를 하지는 않았지만, 내의원에서 중요한 의학적 결정을 내리는 과정에 개입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런 이유로 동의보감에 담긴 내용을 살펴 이해하기에 이르렀다면 그 내용을 두고 충분히 논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닐 듯합니다. 게다가 저자는 한의과대학생의 도움으로 동의보감을 공부하기 시작했다고 고백하셨는데, 허준이 동의보감에 담은 한의학적 사상을 어디까지 이해하실 수 있었을까 싶기도 합니다.
에필로그에서 저자는 이 시대의 의학이 국가가 공인하는 전문가의 몫으로 폐쇄적이라고 비판하고 있습니다. 환자들은 자기가 왜, 어떻게 아픈지 알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요즈음처럼 질병에 관한 정보가 책이나 미디어, 심지어는 인터넷 공간을 통해서 넘쳐난 적은 없었습니다. 특히 비전문가들이 의학분야의 책을 읽고 피상적으로 파악한 내용을 정통한 정보인양 확산시키고 있는 것이 일반인의 건강을 위협할 지경에까지 이르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생명을 다루는 의학분야에 대하여 국가가 면허제도를 통해서 관리하고 있는 이유를 깊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전문가의 영역은 전문가에게 맡기고, 다만 자신과 관련되었을 때, 충분하게 설명을 들을 수 있으면 될 것입니다.
현대의학이 폐쇄적이고 기술적인 반면 한의학을 포함한 동양의학은 기술이나 제도에 의존하지 않고도 터득할 수 있어 보편적일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 이유는 <동의보감>이 술술 읽혀 별 거리낌없이 독파할 수 있었다는 점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선조께서 허준에게 명하신 의서편찬의 방향 가운데 세 번째, “궁벽한 고을에 치료할 의사와 약이 없어 요절하는 자가 많은데, 우리나라에서는 약재가 많이 산출되지만 사람들이 제대로 알지 못하니 종류별로 나누고 우리나라에서 부르는 명칭을 백성들이 쉽게 알 수 있도록 하라.(39쪽)”는 말씀을 새겨보면 <동의보감>이 대중을 위한 의학백과사전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전문가를 위한 깊이 있는 의학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학문은 시대에 따라서 발전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의보감>은 편찬 이래 중수했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것 같지 않습니다. 즉 죽은 의학서라는 것이지요. 박물관에 가야 할 옛날 의서에 목을 메고 있는 한의학계가 안타까울 뿐입니다.
단편적인 앎은 생각을 엉뚱한 방향으로 이끌어가기 마련입니다. 한 가지만 예로 들면, “시체를 해부해서는 아무 것도 배울게 없다. 해부학은 진정한 자연과 자연의 본질, 특징, 존재, 힘을 보여주지 못한다. … 참된 해부학은 … 살아 있는 인체이다.(28쪽)”라는 16세기 의학자 파라셀수스의 주장을 인용하고 있는데, 16세기 서양의학의 해부학적 기술은 아주 저급한 수준에 머물고 있었고, 게다가 파라셀수스는 “모든 독은 약이다, 다만 용량의 문제일 뿐이다.”라는 말로 유명한 약리학의 아버지라고 일컫는 분입니다. 해부학에 얼마나 관심을 가지고 있었을지 의문이라는 말씀입니다. <동의보감>을 새롭게 인식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라는 저의 기대가 지나쳤던 모양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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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미숙이 쓴 책 가운데 가장 좋은 책이라고 평가한다. 《동의보감》을 이런 식으로 리라이팅할 수 있다니 저자의 내공이 빈약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고 본다.
동양의학과 서양의학의 담론의 차이는 크게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먼저 '생명'에 대한 인식론의 차이다. 서양의학은 몸과 마음을 분리하는 심신이원론을 견지하지만 동양의학은 몸과 마음을 하나로 보는 심신일원론이다. 동양의학의 생명론은 한마디로 정(精), 기(氣), 신(神) 이론에 녹아 있다. 정은 생명의 기초를 이루는 물질적 토대이고, 기는 이 질료를 움직이는 에너지이며, 신은 정기의 흐름를 조절하는 역할이다. 정기신 가운데 가장 중요한 하나를 꼽자면 바로 기다. 기가 정과 신의 토대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운의 흐름과 분포가 사람을 만들고 존재를 틀지운다. 동양의학에서의 몸은 가르고 절개해서 보이는 해부학적 신체가 아니라 정기신이 접속하고 변이하는 자연체다. 그래서 고대 중국에서는 의도적으로 해부를 무시했다. "신神은 임금이고 혈血은 신하이고 기氣는 백성이니, 몸을 다스릴 줄 알면 나라를 다스릴 수 있다. 백성을 아끼면 나라가 편안해지듯이 기를 아끼면 몸이 온전하게 된다. 백성이 흩어지면 나라가 망하듯이 기가 고갈되면 사람은 죽는다. 죽은 사람은 살릴 수 없고 망한 나라는 보전할 수 없다.(내경편, 신형, 15쪽)"(44쪽)
"질병이란 특수한 고통과 결여의 상태가 아니라 생명이 태어나기 위해선 반드시 수반해야 할 필연적 조건이다. 기의 이합집산이 형과 질을 이루는데, 이형질을 갖추기 위해선 반드시 감내해야 하는 왜곡 혹은 편향현상이라고나 할까. 체질에 따라, 시공간적 조건에 따라 다 다르긴 하지만 모든 존재는 원초적으로 질병을 안고 태어날 수밖에 없다. 아니, 질병이 곧 존재의 표현형식이다."(128쪽)
질병은 사적 차원에서는 존재의 표현형식이지만 공적 차원에서는 역사적 투영이기도 하다. 즉 질병은 그 시대의 사회적 조건이나 일상의 배치를 고스란히 보여준다는 것이다. 저자는 연암 박지원이 민옹을 만나 우울증을 치유한 이야기 <민옹전>을 들어 동양의학의 치료법을 제대로 보여주고 있다. 여기서 동양의술은 흥미진진한 이야기이자 노래이고, 명의란 이야기와 노래에 생동감을 불어넣는 탁월한 연출가이다. 감수성이 예민한 사춘기 무렵 연암은 심한 우울증과 불면증을 앓았는데 민옹의 이야기를 듣고 민옹의 행동을 따라하다 병을 치료하게 된다.
"현대인은 워낙 약과 수술에 의존하다 보니 우울증 같은 마음의 병도 호르몬요법이나 뇌수술 따위로 해결하려 들지만 그건 결코 근본적 치유책이 될 수 없다. 상식적인 말이지만, 모든 질병은 일상의 흐름과 긴밀하게 연동되어 있다. 따라서 병을 치유하려면 궁극적으로 일상을 재배치하지 않고선 불가능하다. 우울증은 더더욱 그렇다. 사람들 속에 들어가 웃고 떠들고 먹고 자고 하다 보면 울체된 기운은 절로 '통하게'되어 있다."(95쪽)
마지막은 '감정'에 대한 인식론의 차이다. 서양의학에서는 감정을 뇌와 연결시키지만, 동양의학에서는 오장육부와 감정을 연결한다. 예컨대 화를 주관하는 것은 간이고, 기쁨을 주관하는 것은 심장이고, 생각을 주관하는 것은 비고, 슬픔을 주관하는 것은 폐이며, 공포를 주관하는 것은 신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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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준은 조선시대 명종, 선조, 광해군의 시대를 산 명의지만 그를 역사에 빛나는 이름으로 기억되게 한 것은 동의보감 덕분일 것이다. 선조는 임진왜란때 한양을 버리고 의주로 도망간 찌질한 임금 정도로 기억되고 있는데 그 선조가 궁벽한 고을에 의사와 약이 없어 요절하는 이가 많고, 백성들이 약재를 모르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우리나라에서 부르는 명칭으로 책을 써서 백성들이 쉽게 알 수 있도록 여러 의서를 모아 책을 편찬하도록 지시했다니 세종의 훈민정음 창제의 정신과도 통하는 업적이라고 생각된다. 어의였던 허준은 후에 선조의 죽음에 책임을 추궁당하여 귀양을 갔는데 그것이 오히려 집필의 여유를 주어 그가 이 보물같은 책을 완성하게 된 것이다.
동의보감은 전질이 25권에 목차만해도 백여쪽에 이르는 대작인데, 내경, 외형, 잡병, 탕액, 침구로 이루어지는 독창적인 분류와 병이 걸렸을 때 필요한 부분을 신속히 찾아서 도움받을 수 있도록 검색이 용이하게 저술되어, 중국에서까지 수십차례 간행될 정도였으니 허준이 중국의 남의, 북의에 필적하는 동의가 되고자 꿈꾼 바가 이루어졌다고 생각된다.
불행하게도 나는 동양철학적 사유의 기본 훈련이 되어 있지 않아 음양오행설과 오장육부의 관계에 대한 부분을 제대로 알기는 어려웠으나 난해한 부분은 일부 빠르게 지나가면서 전체적인 부분을 조망하고자 하며 읽기에는 큰 무리가 없었다. 이런 부분은 전문가가 아닌 일반 독자들로서는 모두 마찬가지의 입장이 아닐까 변명해본다. 저자는 동의보감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여러 텍스트들을 인용하였는데 공부란 무엇인가 다시 생각해보게 하였고 공부의 성과를 이렇게 또 다른 책이라는 결실로 맺어내는 저자의 힘에 감탄하고 또 부럽다.
우리가 바라는 건강이란 단순히 아프지 않은 정상적, 평균적 상태가 아니라 자신의 생로병사를 이해하고 그 아픔을 통해서 이전보다 자신의 몸에 대해서 더 알게 되고 더 지혜롭게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생명의 탄생과 죽음을 하루에, 생로병사를 사계절에 비유하여, 사람의 몸과 우주의 조화를 다루었다는 점에서 단순한 의서를 넘어선 동양철학서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넘치는 것을 '태과', 부족한 것은 '불급'으로, 태과보다는 불급이 낫다고 하였으니 모든 것이 너무 과해서 문제인 우리시대를 반성하게 해준다. "동의 보감이 오늘, 우리에게 제시하는 최고의 비전은 ... 이 책을 통해 스스로 자기 병을 알아 스스로 치유해 가라고, 또 양생술을 통해 요절할 자는 장수하고 장수할 자는 신선이 되라고" 허준이 말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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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움의 근원은 자기 자신이다. 태어나면서 부터 두려움은 작동한다. 약간의 틈만 생기면 우리의 오감으로 순식간에 이기심과 사악함이 침투하여 온갖 망상에 사로잡혀 자기 자신을 묻어 뜯기 시작한다. 멈추면 비로소 보인다<혜민스님>의 질문 역시 내 마음을 다시보는 작업이다.그래서 동의보감은 우리의 몸과 마음의 작동원리를 봄,여름,가을,겨울의 자연의 소우주와 함께 동행한다. 동의보감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수명은 120세라고 한다.'인생은 환갑부터'라는 말일 허헌이 아니다.고령화 사회에 접어들어 이미 남녀의 평균수명은 80세를 넘어섰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주색의 쾌락에 빠져들다보니 50이 넘어서면서 급속도로 노화가 진행된다.양생술이 끊임없이 회자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양생술? 자기 욕망을 스스로 조율하는 '삶의 기술' 이다. 말하자면 소통의 지혜요 자기배려의 기술인것이다.
인간은 철저하게 자연과 연동된 사회적 동물이다. 건강을 의미하는 산스크리트어 '아로갸'는 '파괴되지 않은', '파편화되지 않은'것을 의미한다. 확대 해석하면 신체 내부의 활동이 원활하게 소통하는 것뿐만 아니라 신체와 세계와의 균형이 있는 소통에 단절이 없는 것을 말한다.그런데 과학이 발전할 수록 인간의 의식주의 발달은 철저히 파편화되고 파괴된 불통으로 자아와 단절된 인간의 지혜와 판단력이 운무雲霧화를 가속화 시키고 있다. 자기배려와 자시수련,자기치유의 양생술은 인간에게 더 더욱 강요시키고 있다.
아니 간절하게 양생술을 원한다. 그러나 태과太過와 불급不及사이에서 사람들의 헛된 욕망은 거침없이 자신을 파괴시킨다. 덜어내야하는 이치와 채워야하는 이치,덜어내야 하는 것이 채우는 것보다 훨씬 더 힘들기 때문이다. 다다익선의 최악이 곧 돈이다. 돈에 대한 욕망은 물론이려니와 몸에 좋은 것은 다 섭취하겠다는 발상도 양생에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
양생술의 대가 손진은 양생의 계명을 이렇게 설명한다. " 사람이 몸으로 일을 하면 온갖 병이 생기지 않는다.술을 취하게 마시지 않으면 모든 질병이 생기지 않는다. 밥을 먹고 나서는 100보를 걸으면서 손으로 배를 자주 문지른다..... 생각을 많이 하면 신神이 많이 상하고 희로애락이 심하면 기氣가 많이 상한다. 봄여름에는 덜 내보내고 가을겨울에는 성생활을 줄여야한다.([내경편] '신형' 27쪽). 여기서 보듯이 성욕과 술과 음식은 하나의 회로를 이루고 있다. 술은 기본적으로 화기로 이루어져 있으니 말할 나위도 없고,음식은 정을 만드는 필수적인 행위지만 그것도 과도해지면 생명의 정기를 오히려 손상시킨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가기도 전에 우리는 물질의 풍요로움에 취해서 살아가고 있다. 병을 불러오는 덕을 해치는 만고의 근원이 곧 식탐의 재앙이다. 술에 취하고 기름진 음식으로 배를 한껏 불린 다음 성생활을 하는 것은 오장이 모두 뒤집힌다. 술도 화기요,기름도 화기요, 성sex도 화기니 몸이 불구덩이에 들어가는 격이다.성인병이 잦고 비만환자가 늘어가면 당뇨환자가 급격히 늘어가고 침묵의 살인자 '암'이 늘어나는 이유이기도 하다.
지하철에서 성추행이 빈번하고 버스까지 추행이 범람하며 관음증과 성범죄는 지속적으로 더 늘어가고 있다. 그 이유는 우리가 학교,가정,사회에서의 성교육이 대개 금지이거나 방어 즉, 성욕을 공공연하게 드러내선 안 된다는 것, 어떻게 하면 성적 피해로부터 벗어날 것인가에 아주 피동적인 주문만 하기 때문이다.개별 주체들에게 무조건 참고 피하라는 게 전부다. 미셜 푸코가 지적해주듯이, 오늘날 성이 과도하게 중시되면서 동시에 은밀하게 유통하게 된 것은 근대 국가와 임상의학의 합작품이라고.
사랑과 성은 두 개의 표상으로 오락가락 한다. 멜로와 포르노 사이가 그것이다. 사랑에 대해서는 멜로적 낭만이,성에 대해서는 포르노적 쾌락이 지배한다. 멜로의 핵심은 순수와 불멸이다. 사랑은 순수하고 ,그래서 그 순수함은 영원히 지속되어야 한다. 이것이 멜로적 낭만의 공식구이다. 성욕은 결코 순수하지도,지속적이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 억압된 성욕을 배설하는 '홈파인 회로'가 바로 포르노다. 포르노는 '어둠의 자식'으로 출발했지만 이젠 더 이상 지하에서 웅크리고 있지 않는다. 자본이 고도화된 현대사회에서는 각종 대중문화의 외피를 입고 점차 지상을 활보하면서 사람들의 영혼과 일상을 잠식하고 있다. 에로스의 충만함을 만끽해야야는 사회인데도 정작 벌어지는 상황은 정반대다. 청춘은 '연애불감증'에 중년은 성에 대한 판타지를 좇기 바쁘다. 사랑과 성에 대한 이미지는 범람하는데 정작 그 주체들은 결핍과 갈증에 허덕이고 있는 셈이다.
이것만은 기억해두자.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목木과 화火기운을 가장 많이 쓰고 있다는 점을, 목은 나무가 흙을 뚫고 나오는 기운이고 화는 말 그대로 불이 타오르는 기운이다. 둘다 아래에서 위로 솟구치느니 기운이다. 불안과 분노는 모두 목기와 화기의 태과에서 유래한다. 그것이 자본의 무한증식과 결합하면 점입가경이 된다. 자본주의의 정치적 불안과 경제적 위기가 고스란히 반영되고 있지 않은가. 더 나아가 '부자되세요'. '열심히 하겠습니다' 는 말은 양생적을 볼때 치명적이다. '열심'이란 심장을 늘 덥힌다는 뜻이다. 심장이 늘 뜨거우면 수명이 줄어든다. 과거에는 부자는 기운이 막혀서 문제고 서민은 과도한 육체노동이 문제였는데,지금은 부자고 서민이고를 막론하고 감정은 태과요 신체는 불급이다. 기를 조절하기가 훨씬 더 어려워진 셈이다. 양생이란 철두철미한 자기배려의 기술이라는 점을 명심하자.
사람들은 번뇌의 원천이 돈이라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한다. 하는 척 할 뿐이다. 상대방의 도덕적 결함이나 오해에서 비롯된다고 여길 뿐이다. 돈에 들러붙어 있는 무겁고 탁한 기운을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기의 울체鬱滯에 빠져들게 되면 병이 온다. 마음의 순환을 이루기 위해서는 번뇌의 원천을 해소하지 않고서는 번뇌로 부터 자유로워 질 수 있는 길은 없다. 마음에 새겨진 소유의 흔적들을 지울 수 있어야 한다.
암과 우울증과 자아의식의 투쟁과정이 현대인들의 삶을 지배한다. 날조된 기억, 그것이 상처의 정의 이듯이 " 과거의 한 선분에 고착된 상태, 그것이 그 과거가 현재에도 작동하고 있는 상태. 정신분석학은 이를 트라우마라고 부르고, 불교는 업이라고 말한다. 슬픔이나 원한감정을 통해서 존재감을 느끼는 걸 약자요 노예라고 했다<니체> 진정 강자라면 슬픔이나 결핍 같은 부정적인 힘이 아니라 능동적인 가치에 의해 삶을 고양 시킬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칠정七精(기쁨,화냄, 걱정.근심, 생각,슬픔, 두려움.놀람.)을 자연스럽게 흘러가게 해야 한다. 다시말하면 삶을 있는 그대로 보아야 한다. 있는 그대로 본다는 건 과거와 미래를 철저히 '지금, 여기'의 관점에서 보는 것이다.
교육의 핵심은 생로병사의 마디를 헤쳐갈 수 있는 지혜를 터득하는 것이다. 예외 없는 법칙은 없다고 했다. 하지만 예외 없는 법칙이 딱! 하나 있다. 태과太過는 불급不及만 못하다! 우주를 지배하는 불변의 원리, 인간의 소우주르 지배하는 불변의 원리, 부처님의 귀가 큰 이유는 우리의 몸에 있는 오장육부와 잘 소통하는 의미가 담겨져 있다. 결국, 인간의 몸의 이치와 우주의 원리는 하나다.
인간인 나의 병病은 나의 모든 습성을 바꿀 수 있는 권리를 나에게 부여하였다<니체> 아파봐야 비로소 인생을 보게된다. 마음이 아프면 몸도 자연히 아프다. 집착과 욕심, 무지와 게으름은 환상의 커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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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인 고미숙을 알게된것은 아주 우연이었다.. YES24에서 이책 "동의보감, 몸과 우주 그리고 삶의 비전을 찾아서"의 발간을 기념하는 저자와의 만남의 자리가 기획되었고, 그즈음 저자와의 만남을 통해 저자의 애기를 직접 들음으로 저자가 그책을 집필할때의 생각을 제대로 아는것이, 책에 대한 이해도와 만족도를 월등히 상승시킴을 경험한 터라, 작가에 대한 사전지식도 없이 신청했는데, 덜컥 참석할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그래서 이왕에 저자와의 만남에 참석하기 위해서는 저자의 최근 저서를 읽고는 가야되겠다는 생각과 최소한 이책에 저자의 친필싸인이라도 받아야 겠다는 세속적인 생각에 구입을 하고 참석할 준비를 하다, 갑자기 생긴 회사의 일정으로 참석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 아마도 그런 기회가 있지않았으면, 이책의 제목인 '동의보감'이 주는 한의학서에 대한 버거움과 제목이 주는 과중한(?) 부담으로 인하여 구입은 생각도 하지 못할 책이었으니, 이것도 언뜻 인연이면 인연이라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작가와의 만남에 참석하지못한 아쉬움과 더불어 책을 읽기전 모르는 저자에 대해서 사전지식이 없이는 저자의 의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잘못된 독서를 할 가능성이 있음을, 독서의 편견으로 가지고 있는 나자신의 성격의 괴상함으로 인해, 저자에 대해 알아보게 되었고, 저자인 고미숙이 운영하고 있는 수유+너머 라는 인문학공부를 위한 공동체도 알게 되었다. 더불어 인문학에 대한 상당히 다량의 저서활동을 한 저자임을 알고서리, 의학서가 주는 부담감보다는 인문학에 대한 사유가 더 많은거라 생각하고 의학이라면 느끼게 되는 공포감을 극복하고 이책과 마주하게 되었다.
간간히 나오는 의학적인 용어와 동양철학의 근간이기도 한 음양오행에 근거를 둔 이책을 읽고나서는 다른 여타의 책과는 달리 리뷰를 쓸 자신이 없었다. 아니 자신이 없다기 보다는 용기가 없었다. 방대한 저자의 인문학에 대한 사유에 괜한 사족을 달아 질책이나 당하지 않을까 하는 겁이 났던게 가장 큰 이유였다. 책을 읽고나서 리뷰를 쓰지않으면 온전히 그책은 자신의 것이 되지 않는다는 어느 독서가의 말을 무시하고 라도, 책을 읽고나서 리뷰를 작성하지 않으면 마치 화장실에 가서 일을 다 처리하고 나오지 않은 것같은 찝찝함이 서가에 꽃여있는 이책을 볼때마다 부담감으로 다가와 마치 빛쟁이가 된 심정을 견디다 못해 공포감을 극복하고 리뷰를 쓰게 되었다.
우린 흔히 "동의 보감" 하면 허준을 생각하게 되고, 오래전 TV에서 인기리에 반영되었던 드라마 "허준"에 나오는 딱 그만큼의 앎이다. 이책에서 저자는 먼저 우리가 드라마를 통해 알고있는 허준과 실제 허준과의 상관성 없음을 먼저 밝혀, 우리 모두가 알고있는 허준의 허상을 깨뜨린다. 그의 경쟁자였던 양예수의 존재, 그리고 자신의 몸을 열게 해 사람의 몸속 구조를 직접 보게함으로 제자의 의학지식을 배가시켰던 스승 유의태, 그리고 나의 가슴을 들뜨게 했던 예진아씨와의 러브스토리도 완전한 허구임을 상기시켜, 허준에 대한 허상을 무너뜨리면서 애기를 풀어가기 시작한다. 다른건 다 허구인것을 인정한데도 예진아씨와의 러브스토리가 허구인것은 좋은 추억거리라고 기억하고 있던 것이, 추억이 아니라 꿈이었던 것으로 판명이 된것만큼 허무감이 드는것이 이책이 주는 가장 큰 폐해일듯 하다...ㅠ.ㅠ
이어 저자는 동의보감 집필의 배경과 드라마속 허준이 아니라 역사속의 허준의 존재, 그리고 동의보감이라는 막대한 의학적 저서가 조선시대와 그와 동시대의 중국과 다른나라의 의학기술에 미친 영향, 더불어 동의보감에 집필의 근거가 되는 사상적 배경등에 대해 역사적인 근거를 들어 자세히 기술하고 있다. 이는 우리가 드라마를 통해 잘못 인지되고 있는 동의보감과 허준에 대한 우리의 잘못된 지식을 바로잡기 위한 특별한 배려라 생각이 든다.
그리고 이어서 동의보감의 목차와 내경-외형-잡병-탕액-침구로 이어지는 전체적인 구성이 주는 의미의 세밀한 묘사를 통해 동의보감이 단순한 의학서가 아니라, 그시대의 사상적 배경인 유불선의 통합에 의한 시대를 반영하는 철학서이며 의학서임을 명백히 묘사한다. 그리고 나서 큰목차의 한편한편의 쓰여있는 수많은 의학적 지식중에 우리와 밀접한 부분을 예로 들어 설명함으로, 의학서가 가지고 있는 전문성이나 딱딱함을 벗어나, 한편의 애기를 읽는 것 같은 편안함을 주어, 의학서를 대하고 있음으로 인한 공포감에서 벗어나, 마치 한편의 드라마를 보는 듯한 편안함을 제공한다. 더불어 이제까지 다른책에서 보지못한 구어체의 문장으로 마치 옆에서 애기하는 듯한 친밀감을 독자에게 느끼게 함으로 음양오행으로 이어지는 동양철학이 갖는 난해함을 해소하게 만든다.
몸이 기운을 칭하는 정精, 기氣, 신神과 몸을 이루는 형形, 음양오행으로 요약될수 있는 음양의 조화와 목木, 화火, 토土, 금金, 수水 로 구성되는 오행의 원리로 기본으로 삼고, 과유불급(過猶不及)사자성어로 표현될수 있는 太過,不及 이 세가지의 논리로 동의보감을 처음부터 끝까지 풀어내고 있다. 하여 이세가지에 대한 이해만 선행이 되면 이책을 읽어내는데 결코 어렵지 않도록 일관된 논리로 꾸준히 풀어나가는 저자의 글쓰기는 자칫 어려울수 있는 의학서인 동의보감에 대한 이해도를 증진시킬뿐 아니라, 동의보감의 원본에도 도전하고픈 무모한 용기를 불러일으킬 만큼 독자를 향한 배려가 읽는내내 엿보였다. 아니 이는 저자의 배려라기 보다는 오랜 인문학에 대한 글쓰기와 저자의 꾸준한 필력이 뱉어내는 노련함이 이렇듯 읽기편한 동의보감을 탄생시킨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우리 몸에 병이 드는 것은 위에 나열한 세가지 논리가 정연하게 순환하지 않음이며, 어느 한 항목이 과해서 생기는 것이다. 그건 몸뿐만 아니라, 우리의 마음또한 마찬기지일터... "태과하는니 불급하는게 낫다" 는 저자의 귀에 못이 박힐만큼 반복되고 반복되는 지적은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네 인간의 풍요로움과 과함이 우리몸과 우리의 정신세계에 얼마나 잘못된 영향을 주고 있는지 돌아보게 한다, 또한 그러함으로 구성된 현대사회가 지속됨으로 인해 우리몸이 병들고, 우리사회가 병들어 가고있음을 독자 스스로 깨닫게 하여, 나 한사람이라도 그 흐름에서 그 잘못된 순환의 고리에서 벗어나야 함을 꾸준히 강조하고 또 강조하고 있다. 아마도 인문학과 의학서와의 결코 친근해 질수 없는 상관성을 뒤로하고, 10여년전 몸에 생긴 종양이 생활의 건전함(?)으로 인해 사라져 버린 저자의 체험적인 경험을 통해 병과 몸의 관계에 대한 의문을 "동의보감"이라는 이책을 통해, 그리고 부제인 "몸과 우주 그리고 삶의 비전을 찾아서"라는 부재처럼, 저자인 고미숙은 우리의 몸이 순환의 고리를 통해 우주의 일부가 되니, 그몸을 잘간수함이 우리가 몸담고 있는 우주를 잘 간수함이며, 그것이 우리의 삶의 비젼을 향하고 있음을 저자는 우리에게 애기하고 싶은지 모른다.
에필로그에서 밝인 저자의 고백이 아마도 꾸준히 글을 쓰고자 하는 저자의 또다른 고백이리라. 아니 저자의 고백이전에 이책을 읽는 모두에게 강권하는 내용이리라.정기신을 확보하고, 오행을 원활하게 순환하게 하고, 몸과 맘을 올곳이 붙잡을 수 있는 최고의 기술....바로 글쓰기....
" 글쓰기가 바로 그에 관한 최고의 기술에 해당한다. 글쓰기는 본디 지성의 정점이다. 삶과 세계를 언어로 구조화 할수 없다면 아직 지성의 주체가 아니다. 모든 사람이 지성인이 된 이시대에 가장 결락된 기술이기도 하다. 대학이 몰락하게 된 원인이기도 하고, 이런 차원에서 보더라도 최고의 전략이 될 수 있다. 자신의 몸과 삶의 언어로 조직할 수 있으려면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하다. 집중력이 곧 정기신의 확보다." - p 435 -
이책을 완전히 이해하기 위해선 사전 공부가 더 되어야 할듯 하다... 저자가 썻던 그전의 저서를 비롯하여 "아파야 산다" "거의 모든것의 역사"그리고 음양오행의 3종세트(저자가 말미에 추천한)등 예로 들었던 몇권의 책을 더 읽어본후,, 이책에 다시 도전해 봐야 할듯 하다. 그럼 좀 더 "동의 보감"에 더 가까이 다가갈수 있을듯.... 그런후에 동의보감(허준,동의보감)에 함 도전해 봐야 할듯.... 그 어렵게만 느껴진 한의학서인 동의보감을 읽어봐야 겠다는 용기를 갖게 된것이 이책이, 그리고 저자인 고미숙이 준 가장 큰선물일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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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의(名醫)의 대명사인 편작(扁鵲)이었지만 정작 그의 집안에서는 하수 취급을 받았다고 한다. 편작은 병이 극심하게 진행된 환자들을 치료하여 유명해졌기 때문이다. 그러면 편작보다 고수라고 한다면 불치병을 훨씬 더 많이 고쳤을 것이라고 단정할 수 있다. 하지만 정반대다. 편작의 작은 형은 병의 초기단계를 치료하는 아마추어 의사였다. 그리고 작은 형보다 더 고수인 큰 형은 병이 걸리기 전, 즉 미병(未病)단계에서 치료를 하여 굳이 의사라고 불리지 않았다.
고미숙의『동의보감』을 읽었다. 고미숙은 앎의 고수다. 앎의 고수가『동의보감』을 읽고 리라이팅을 했다는 것은 앎의 경계를 넘나드는 것이다. 비록 고전이라고 하더라도 자신과 무관한 고전이라면 여전히 탐구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하지만 고미숙은 그 경계에서『동의보감』을 놀라운 텍스트라고 말한다. 이 책에서 주목하는 것은 편작의 형들이 생각했던 것과 같은 맥락이다. 병을 고친다는 것은 미병단계, 초기단계이며 우리의 일상에서 치유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누구나 건강하게 살려고 한다. 쉽게 말하면 건강이란 병에 걸리지 않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우리의 정신(精神)은 어떤가? 마음은 건강해야지 하면서도 몸은 그대로다. 그런가하면 몸만 생각한 나머지 정신을 소홀히 한다. 몸과 마음이 따로따로다. 그러나 동양 사상에서 정신은 원래 하나였다. 정은 생명의 물질적 토대, 신은 물질을 움직이는 무형의 벡터였다. 정신 차려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정신은 생명 활동과 무관하지 않다.
『동의보감』을 편찬하는 취지를 살펴보면 ‘사람의 질병은 모두 섭생을 잘 조절하지 못한데서 생기는 것이니 수양이 최선이고 약은 그 다음이다.’라고 했다.『동의보감』은 단순히 질병과 처방을 다루는 임상서가 아니라 수양과 섭생을 우선으로 하는 양생서(養生書)였다. 그래서 저자는 내경(內徑)-외형(外形)-잡병(雜病)-탕액(湯液)-침구(鍼灸)로 이어지는 5편 106문 목 차는 다른 어떤 의서에서도 발견하기 어려운 분류학의 결정판이라고 했다.
이러한 분류에서 인간의 몸은 우주와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몸이 곧 우주이다. 「내경편」의 신형(身形)을 보면,
하늘의 형은 건(乾)에서 나오니, 태역(太易), 태초(太初), 태시(太始), 태소(太素)가 있다. 태역은 기가 아직 드러나지 않은 것이고, 태초는 기가 시작하는 것이며 태시는 형이 시작하는 것이고, 태소는 질이 시작되는 것이다.
신형은 몸의 형태라는 것인데 우주가 창조되는 순간부터 시작하고 있다. 우주는 기-형-질의 순서에 따라 구체화된다. 그리고 사람의 몸 역시 기를 바탕으로 해서 생명의 원천인 정·기·신이 만들어진다.
한편으로 기·형·질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질병도 함께 탄생한다. 즉,
형기가 갖추어진 다음에 아(痾)가 생긴다. 아란 채(瘵)이고, 채란 병(病)을 말하는 것으로 병이 이로부터 생기는 것이다. 사람은 태역으로부터 생기고 병은 태소로부터 생긴다.(「내경편」, 신형)
『동의보감』이 말하는 질병의 진행과정은 아-채-병이다. 저자의 설명에 따르면 아는 원초적 불균형을, 채는 스트레스와 과로에 가까운 피곤한 상태를, 병은 피로함이 심화되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질병은 특수한 고통과 결여의 상태가 아니라 생명이 태어나기 위해선 반드시 수반해야 할 필연적 조건이라는 것이다. 결국 병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병이 있음으로 해서 내가 살 수 있는 것’이다. 한 마디로 아파야 산다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양생을 할 수 있을까? 양생의 규칙을 몇 가지 살펴보면 먼저 태과불급 (太過不及)이 아니어야 한다. “기가 실하면 형도 실하고, 기가 허하면 형도 허한 것이 정상이다. 이것과 반대면 병이다.”(「잡병편」, 변증) 형과 기는 서로 어울러야 한다. 그런데 태과, 즉 넘치는 것인데 좋은 기운(정기)이 나쁜 기운(사기)가 된다. 불급, 즉 모자라는 것인데 정기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통즉불통(通則不痛)이다. 통하면 아프지 않다는 것이다. 여기서 통의 경계는 몸과 마음, 몸과 몸, 몸과 사회, 몸과 우주 등등 무궁무진하다.
수승화강(水昇火降)도 간과할 수 없다. 오장육부는 음양오행이자 사계이며 상생이자 상극이다. 오장육부에서 가장 핵심적인 것은 심장과 신장이다. 심장은 군주지관이며 오행으로는 화(火)다. 신장은 정을 저장하며 오행으로는 수(水)다. 자연계에서는 불은 올라가고 물은 내려간다. 하지만 우리 몸은 대대(待對)의 원리에 따라 그 반대의 운동이 일어나야 한다. 이것이 곧 수승화강이다. 만약 수승화강에 문제가 생긴다면 음허화동(陰虛火動)이 된다. 심장의 불이 제멋대로 망동하게 된다.
이렇듯 저자는『동의보감』을 재해석하면서 ‘몸과 우주 그리고 삶의 비전을 찾아서’라는 부제를 달았다. 몸과 우주는 앞서 말했듯 동양사상의 키워드다. 몸과 우주는 상생 혹은 상극으로 순환한다. 모든 것은 관계의 서사다. 그러면 삶의 비전은 뭘까? 그것은 바로 ‘내 몸은 나의 것이 아니다.’는 것, ‘내 안의 타자들을 긍정하는’ 것, ‘자기의 욕망을 스스로 조율하는 자기수련’이다. 병이 있다고 해서 치료에만 의존하는 것은 근본적인 치유책이 될 수 없다. 그보다는 새롭게 ‘호모 큐라스’가 되는 것이다. 한 번쯤 ‘자기 몸의 연구자’가 되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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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몸을 주제로 한 두 권의 책을 연속으로 읽었다. 한 권은 몸 즉 자연의 질서를 전면적으로 뒤흔든 앨러지성 비염이 몸을 철학적 탐구의 대상으로 삼게 했다는 한 페미니스트의 책(‘근대적 몸과 탈근대적 증상’)이고 한 권은 악성(惡性)은 아니지만 불편함에 있어서는 어떤 것에도 뒤지지 않는 종양 발생을 계기로 몸과 삶의 관계를 한의학적 시각으로 해명한 결과물(‘동의보감 몸과 우주 그리고 삶의 비전을 찾아서’)이다. 특기할 것은 전자가 몸에 대한 실용 차원의 지식을 다루지 않은 데 비해 후자는 실용적 지식과 형이상학적 지식을 포괄해 다루었다는 점이다. 나는 사람의 몸을 철학적 성찰의 대상으로 삼은 책으로부터도 내 징후(위장의 병적 변이: intestinal metaplasia of stomach) 해결의 단서를 얻을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다. 병원에서 정기적인 내시경을 통해 癌으로의 변이를 체크하라는 말을 할 뿐 약을 주지 않는 사정을 감안하면 ‘동의보감 몸과 우주 그리고 삶의 비전을 찾아서’ 읽기는 예외적이지도 이례적이지도 않다. ‘동의보감’은 아픈 사람이 스스로 자신을 치유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은 책이라고 한다. 의학의 외부인인 저자의 작업(‘동의보감 몸과 우주 그리고 삶의 비전을 찾아서’)을 불편한 눈으로 보아서는 안되는 대목인 것이다. 한의사는 아니지만 10년이 넘는 동의보감’ 공부의 내공을 자랑하는 저자는 멘토로서도 충분한 자질을 갖추었다고 믿는다. 우리나라의 한의서(韓醫書) 중 ‘동의보감’ 만큼 영향력이 큰 저서는 없는 듯 하다. 고전의 반열에 오른 카리스마와 국민 드라마 ‘허준’의 열기 등을 감안하면 큰 영향력이라는 말은 결코 허언이 아니다. 하지만 ‘동의보감’ 읽기와 활용의 내실은 그리 알차지 못하다. 쉽고 스타일리시한 문체를 무색하게 하는 방대한 분량(목차만 100 페이지에 이르는)과 현대적 의미로 새롭게 해석되어야 할 의미의 덩어리들이 ‘동의보감’ 접속에 장벽으로 작용하는 듯 보인다. 저자에 의하면 ‘동의보감’이 고전인 이유는 ‘황제내경’ 이후의 학설들을 수렴해 전혀 새로운 담론의 장을 열었기 때문이다.(56 페이지) ‘동의보감‘은 허준 선생 시대의 지혜와 철학이 스며들어 있는 의학서이자 자연철학적 저서이다. 현대의 기준으로 보면 곳곳에 비과학적 내용도 배치된 만큼 우리에게는 ’동의보감‘이 감추고 있는 철학적 원리와 지혜들을 발견하는 안목이 필요하다. 저자는 '동의보감’을 놀라운 텍스트라 말한다. 아직 ‘동의보감’에 제대로 접속하지 못한 입장에서 저자의 도움을 받아 ‘동의보감’을 간접 경험한 결과 나는 놀라운 텍스트라는 말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허준 선생이 당대에 자신을 능가하는 명의들을 제치고 최고의 의사라 불린 것은 ‘동의보감’이라는 체계적이고 방대한 의서를 편찬했기 때문이다. 허준 선생이 편찬한 ‘동의보감’은 뛰어난 글 솜씨를 바탕으로 기존의 의서들을 창의적으로 재배치한 노력의 결과이다. 허준 선생은 우주론을 통해 몸과 생명의 원리를 전면에 배치했을 정도로 독창적이었다. 허준 선생 당시의 의사들은 종합지식인이었고 삶의 연출가였고 멘토였다. 또한 민간의 지혜가 처방으로 적극 채택된 시대의 담지자였다. 물론 학문간 경계가 폐쇄적이고 영역간 소통의 효과가 별무한 데다가 과학의 시대인 현대에는 전설 같은 이야기이지만 연암(燕巖)이 앓았다는 우울증이나 내가 앓는 위장의 병적 변이(變異), 그리고 저자의 종양이 일상의 흐름과의 연계하에 치유되었거나 치유되고 있음을 생각하면 민간 차원의 지혜와 삶을 돌아보는 근원적 성찰의 힘을 믿는 것은 무모한 행동이 절대 아니다. 일상의 흐름과의 연계란 일상을 자연적 리듬에 맞게 배치하는 것을 뜻한다. 저자는 바다와 인간이 가진 염(鹽)과 광물질의 비율이 놀랄 만큼 비슷하고 우리 몸이 허용할 수 있는 원소의 양이 지각(地殼)에 존재하는 원소의 양과 직접적으로 비례하는 것 등을 들어 몸은 소우주라 말한다. 기호학적 논의를 굳이 끌어들이지 않더라도 질병 역시 하나의 신호이며 의미 즉 존재의 표현 방식임은 물론이다. 이때 필요한 것은 순응이다. 이는 결국 자연적 질서에 자신의 리듬을 맞추는 것이고 적응하는 것이다. 저자는 질병과 건강 사이의 다양한 스펙트럼을 의미하는 미병(未病)을 거론하며 병으로 진행되지 않도록 치료하거나 아프지 않은 건강 상태를 유지하기 위한 양생(養生)의 노력을 처방으로 제시한다. 한의학에서는 겉으로 병이 드러나지 않았지만 내부적으로 기혈의 흐름이 부조화된 상태를 미병이라 말한다. 한편 건강은 생명체와 환경의 끊임없는 상호작용인 적응의 과정에서 나타나는 일시적 균형이라는 지적은 진화론적 차원에서 기본적으로 정상적 몸의 상태는 없다는 지적과 연결되고 이는 진화론을 거시적으로만 대해온 사람들에게는 중요한 통찰을 제시한다. 결론적으로 이는 수행차원의 마음가짐이 필요함을 말해준다. 이런 문제의식은 (性과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양생(養生: 병에 걸리지 않도록 건강 관리를 잘해 오래 살기를 꾀함)의 도는 수행으로 이어진다는 저자의 견해와도 상통한다. 저자에 의하면 양생의 최고 경지는 에로스와 도(道)의 긴밀한 결합이다. 물론 양생술의 핵심은 자신의 기를 조절하는 주체가 되는 것이다.(158 페이지) 저자에 의하면 궁극적 순환은 마음의 순환이다. ‘동의보감 몸과 우주 그리고 삶의 비전을 찾아서’를 통해 나는 삶과 생명에는 나름의 길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동의보감‘이 속한 한의학은 서양의학과는 다른 지혜와 대처 방법이 있고 우리 몸에는 상생과 상극이라는 각개의 질서와 길이 있다. 특히 여성의 몸 여성의 지혜라는 장에서 거론된 태아 이야기는 놀랍다. 본문에 의하면 직접적인 것이든 유도(誘導)를 했든 낙태 및 출생을 결정하는 것은 결국 태아이다. 저자는 임신에서 해산까지를 모두 의술에 기대는 심리는 출산과 양육에서도 자식을 부모의 부속물로 대하는 사고방식으로 이어지며 이는 오이디푸스 가족 삼각형의 비극적 구조라 말한다. 별도의 대상으로 삼을 아이템이다. 이는 허준 선생과 저자가 일관되게 강조한 메시지와도 일치한다. 저자의 해설은 현란하고 내실(內實) 있는 횡단적 사유의 정점으로 보인다. 나는 좋은 책이란 다른 관련 서들을 찾아 읽도록 하는 책임을 오랜만에 느꼈다. 허준 선생은 “병을 만든 것도 그 병에 대해 가장 잘 아는 것도 그리고 그 병을 치유할 수 있는 것도 여러분 자신”이라는 말을 했다. 그리고 저자는 태과(太過: 매우 지나침)는 불급(不及: 일정한 수준이나 정도에 이르지 못함)보다 못하다는 말을 여러 차례 강조했다. 두 멘토의 말을 베이스로 둔 채 자연 질서에 대한 순응, 원활한 기혈순환, 절제, 익숙한 것들과의 결별을 기꺼이 감수하는 것 등을 염두에 두고 ’동의보감‘ 공부의 길에 접속해야겠다는 다짐을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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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평론가'라는 직업을 개척한 인문학자 고미숙씨의 최근 신간으로 고미숙씨를 초빙하여 공부모임에서 세미나를 진행했다(하지만 나는 개인 사정으로 참석하지 못해 절호의 기회를 놓쳤다는...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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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학책이라면 겁부터 난다. 내가 의사가 아닌 이상 어찌 의학책을 이해할 수 있으랴. 이런 생각은 단지 의학은 내 전공은 아니야로 끝나는 얘기가 아니다. 주식을 모른다고 해서 내 삶이 결정적으로 결여된다고 볼 수 없고, 부동산을 모른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그 대상이 의학이라면 얘기는 전혀 달라진다. 의학이 다루는 분야가 내 몸이기 때문이다. 의학을 모른다는 것은 내 몸을 모른다는 얘기이고, 내 몸을 모른다는 것은 나를 모른다는 것이다. 내가 나를 모른다. 그러면 어떻게 되나? 일단 몸이 괴롭다. 그리고 마음도 괴롭다. 괴롭다가 의사를 찾아가면 나는 완전히 의사의 사물이 된다. 동의보감은 위와 같은 문제의식에서 만들어졌다. 내가 나에 대해 주체적으로 알게 하기. 그 앎이 돈 많은 사람만 가질 수 있는 앎이 아니라, 누구나 가질 수 있는 앎이 되게 하기.
이 책은 동의보감이라는 오래 된 누구나 알고 있는 하지만 쉽게 접근할 수 없었던 고전을 일반 독자들도 쉽게 접근할 수 있게 다시 썼다. 만약 이 책이 동의보감에 나온 지식들을 나열하기만 했다면, 여전히 의학책은 어렵구나, 라는 편견을 강화할 수 밖에 없다. 이 책은 동의보감에 나온 의학지식들을 인문학과 만나게 한다. 그래서, 그 지식들이 가지고 있는 빛을 겉으로 드러나게 한다. 더 좋은 것은 지식이 지식으로 머물게 하지 않고, 그 지식들이 내 삶에 직접 적용되고, 내 삶을 바꾸는 계기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의학을 전공하지 않았는데도, 의학 서적을 보고 바로 내 삶에 적용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갖게 만드는 예를 오늘날에 찾아볼 수 있을까. 더구나, 그 의학서적이라는 것이 단순히 응급처방 수준의 간단한 의학 지식을 담아 놓은 책이 아니라, 당대의 의학 지식을 총 망라한 최고의 책이라면.
이 책을 통해 독자인 나는 단순히 의학 지식에 대해 조금 더 알았다는 만족에 그치지 않는다. 더 나아가 내가 내 몸을 조금 더 앎으로서 내 삶의 주체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또, 현대 의료지식이라는 것이 인간의 몸을 대상으로 만들고 나를 내 몸으로 부터 소외되어 있는 지 알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앎은 힘이다. 혹시 조금 아픈 사람은 무조건 병원으로 달려가기 전에, 이 책을 읽고 병이란 무엇일까, 치료란 무엇일까, 생각을 해 보고 가는 것도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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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정엄마는 젊은 시절부터 항상 아팠다. 삼십대에도 한동안 팔을 움직이지 못해 살림을 할 수 없었고, 진통제인 뇌신을 떨어트리지 않았다. 큰 병과 작은 병이 번갈아 찾아왔다. 환갑을 넘긴 지금은 만성통증에 시달리느라 한시도 편할 날이 없다. 상주하는 어지럼증이 난폭하게 굴 때면 토사곽란에 정신 줄을 놓기가 십상이다. 엄마는 비록 외할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기는 했지만 농사지어 먹고 살만한 땅이 있어서 큰고생하지 않고 자랐다. 결혼할 때까지 그다지 힘든 일 해 본적 없이 결혼하셨고 결혼 이후에 아이 넷 키우느라 정신없었지만 남들 이상도 이하도 아닌 가사노동이었다. 그런데 도대체 우리 엄마는 왜 그렇게 끔찍한 통증에 시달리는 것일까? 맏딸인 내가 안다고 하면 다 알 수도 있고, 알긴 뭘 아냐고 하면 모를 수도 있다. 스무 살에 시집와 스물한 살에 나를 낳으시고 이후로 28개월 간격으로 딸을 둘 더 낳고 아들을 얻었다. 그렇게 일남삼녀를 모두 키워 성가시켰다. 남부럽지 않게 키운 자식들이 제몫을 하며 잘 살고 있다. 그 과정에서 엄마는 육체적인 측면보다 정신적인 측면의 에너지 소모가 너무 많았다. 정신적인 에너지를 소모시키는 것이 동의보감에서 말하는 칠정이 아닌가 싶다. 칠정은 기쁨, 화냄, 걱정과 근심, 생각, 슬픔, 놀람과 두려움이라고 한다. 여자들의 질병이 특히 이 칠정에서 기인한 것이 많은데 그 원인을 ‘동의보감, 몸과 우주 그리고 삶의 비전을 찾아서’의 저자 고미숙 선생은 오디푸스의 삼각형에서 그 기원을 찾고 있다. 여자들의 시선이 지나치게 가족 안에 고착되어 있는 탓에 칠정이 나갈 통로를 찾지 못해 몸 안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것이다. 나도 알 고 있다. 우리 엄마 병의 팔 할은 자식을 잘 키우고 싶은 마음에서 왔다는 것을, 그게 잘못될까봐 전정 긍긍 하며 살아서 그렇다는 것을 말이다. 결국 우리 네 자식들은 엄마의 근심을 먹고 자랐다는 것을 말이다. 아마도 엄마가 더 어려운 환경이어서 장사를 하거나 무언가 일을 해야 할 형편이었다면 그 칠정을 밖으로 보낼 기회가 되어서 이렇게까지 몸과 마음이 병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엄마는 엄마 스스로 삶을 이끌만한 환경도 아니면서 내조라는 이름으로 엄마가 짊어져야 할 것은 또 많았다. 나는 만성통증에 시달리는 엄마에게 필요한 것은 굿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 굿이 무당의 제의로서 굿이라기보다는 칠정을 외부로 터줄 굿이다. 그런데 엄마는 너무 일찍 스스로를 할머니 범주에 넣어 버리고 더 이상 무언가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 엄마의 증세를 이 책에서 너무 정확하게 짚어낸다. 칠정이 막힌 현대인들은 갑자기 분노가 폭발하거나 아무런 이유 없이 불안에 시달린다고 말이다. 마음이 아프다. 니체는 슬픔이나 원한감정을 통해서 존재감을 느끼는 걸 약자의 노예라고 했다. 진정한 강자라면 슬픔이나 결핍 같은 부정적인 힘이 아니라 능동적인 가치에 의해 자신의 삶을 고양시킬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칠정을 자연스럽게 흘러가게 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삶을 있는 그대로 보아야 한다. 있는 그대로 본다는 건 과거와 미래를 철저히 지금, 여기의 관점에서 보는 것이다. 다시 말해 자기가 현재 서 있는 지점을 기준으로 시간을 재구성하는 것을 뜻한다 “과거는 무한한 가능성이 교차하고 있는 시간이다. 그 시간에서 어떤 것을 현행화 시키고 있는지는 전적으로 지금 나에게서 온다.” 268p 나는 칠정이 흘러갈 통로로 소설을 선택했다. 소설을 쓰면서 한바탕 굿을 하고 그 제의를 통해 성숙과 지혜를 추구한다. 물론 언제나 미완이다. 노력하며 사는 거다. ‘동의보감, 몸과 우주 그리고 삶의 비전을 찾아서’를 읽으며 많은 생각을 했다. 천천히 읽으며 생각하려 노력했다. 계절이 바뀌며 몸과 마음이 출렁이고 있었는데 도움이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