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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고리 펙은 한 시대의 명우이다. 어제 저녁 늦은 시간대에 그가 주연한 명작(그는 나왔다 하면 주연이었고 대체로 작품 선정도 좋았거나, 그가 나오는데 도대체 명작이 안 될 수가 없으므로 이런 소개는 참으로 불필요하긴 하겠으나) 모 채널(내가 모 채널이라고 하면 대개 '더 무비'를 가리킴ㅋ)<백경>을 틀어주는 걸 잠시 봤다(일 때문에 제대로는 못 봄). 내가 아주 어렸을 때는 이게 흑백인 줄 알았는데, 후반부에 톤이 바다 한복판에서 아주 어두워지는 시퀀스가 죽 이어지므로 그렇게 착각할 만도 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이 점은 내가 4, 5 년 전에 쓴 어느 리뷰에서 언급했을 것임). 그 영화는 1950년대 초반에 제작되었으나 엄연히 컬러 포맷이라는 점 다시 강조한다.
당연한 소리지만 그레고리 펙은 서부극에도 참 자주 나왔다. 열등감으로 가득한 촌뜨기 깔따구 같은 놈이 괜히 말도 안 되는 시비를 걸다 열나게 줘 터지는 장면은 어느 영화에도 곧잘 등장하는데 예를 들면 <거대한 서부> 같은 게 그것이다. 웃기는 건 그 터지는 상대역으로 무려 찰튼 헤스턴이 등장하는데 이후 <벤허>에서 더없이 고결한 주인공 역을 맡고서는 절대 이런 배역으로 그를 만날 수 없었지만(상상이 안 됨), 그 사람도 잘 보면 반항기라든가 삐딱한 기질, 개성이 저 말론 브란도 같은 이보다 더한 분위기다. 여튼 무려 찰튼 헤스턴을 깔따구 포스트에 놓고 X신을 만들 수 있으려면 뭐 이 그레고리 펙 정도나 되어야 가능하지 않겠는가.
철없는 애들은, 맥주맛도 모르면서.. 가 아니고 총잡이로 사는 삶의 고달픈 맛도 모르면서 언제나 떠돌이 무법자에게 열광하며 어떻게 하면 나도 그런 므찐 남자가 될 수 있냐며 막 가르쳐 달라고 앵긴다. 이런 설정은 서부극에서 셀 수도 없이 많은데 <황야의 7인>에서 (이름이 갑자기 생각 안 나서 지금 IMDb 가서 찾아보고 옴. 시간에 쫓기니 생각이 더 안 나네 젠장) 호르스트 부크홀츠가 맡은 치코 역이 그랬으며, 내가 지난달에 리뷰한 <와일드 빌>에서 그 자식도 속으로는 빌한테 뻑간 상태로 막 부러워하며, 겉으로만 복수니 뭐니 하는 핑계로 껄떡거리다가 기어이 큰 사고를 친 것이다. 어디 그뿐인가? 줄리아노 젬마가 주연한 <황야의 분노>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 영화에서는 반대로, 마치 <잭 리처>에서 제 주제도 모르는 젊은 불량배들이 리처에게 개기다 병신이 되는 것처럼, 링고(펙 扮)는 이런 얼뜨기들을 손 봐 주다 오히려 살인자로 몰려 쫓기는 신세가 되는데, 사실 <잭 리처>에서도 배경에 어떤 늙은이가 있었던 것처럼 체제는 대개 뻬어난 총잡이를 사회 불안 요소로 여겨 이런 누명과 핑계를 동원하여 서서히 제거해 나가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어디 서부극에서 이런 얘기 빼고 또 할 게 있던가. 여기서 일종의 클랜 에너미가 되어 쫓기는 링고의 모습도 다른 원형들에서 많이 접하던 것이며, 더 이상 말하면 스포일러지만 마치 제시 제임스의 최후처럼 별 같잖은 놈의 객기 때문에 그는 결국....
제시 제임스나 영거 형제처럼 무법자들에게 어떤 역사의 맥락이나 집단 전체의 한을 투영하면 영웅 서사시 하나를 만드는 건 사실 일도 아니다. 이 영화에서 링고를 그런 윤색된 존재로 봐야 할지, 아니면 뛰어난 개인이 비겁자들의 어처구니없는 음모에 개죽음을 한 비극으로 봐야 할지는 물론 개개인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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