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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은 지 벌써 일주일이 훌쩍 지났다. 그럼에도 리뷰를 어떻게 써야할지 몰라 갈팡질팡하고 있다. 그렇다고 다른 책을 읽는 것도 아니면서 말이다. 이 책은 몇 번이나 읽겠다고 잡았다 놓아버리기를 반복했는지 모른다. 그러다 우연찮게 읽기 시작했는데 이번에는 별 무리 없이 끝까지 읽을 수 있었다. 헌데 읽고 난 다음 무엇을 어떻게 써야 할지가 막막해진다. 흔히 조르바는 자유의 대명사처럼 불린다. 그것은 알겠는데, 그래서 그것이 어쨌다는 것인지에 생각이 미치면서 그대로 꽉 막혀버렸다.
이 작품은 저자인 카잔차키스의 자전적 소설이라고 한다. 원래 카잔차키스가 붙인 책 제목은 [알렉시스 조르바스의 성인전]이라고 했지만 번역과정에서 ‘조르바스’라는 이름이 ‘조르바’가 되었고, 그 후로는 ‘조르바’라는 이름으로 워낙 널리 알려져서 ‘조르바스’라는 이름조차 바로잡지 못했다고 한다. 그래서 이 책 역시 지금까지 국내에 번역된 책제목을 따라 그대로 [그리스인 조르바]로 출간하였다고 한다.
어떻게 보면 소설은 화자와 조르바 두 사람 사이의 이야기이다. 크레타 해안에서 일 년 가까이 같이 지내면서 조르바로 인해 화자가 성장한다는 이야기가 주 골격이다. 여기서 화자는 카잔차키스 자신의 분신이고, 조르바는 저자에게 삶과 죽음, 행복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준 실존인물 조르바스이다. 작품 속에서 화자는 35세의 젊은 지식인으로 책벌레이다. 붓다와 단테를 인생의 길동무로 삼는 그는 글을 통해 세상을 바꾸고자 한다. 크레타 섬에서 운영하는 갈탄광이 잘되면 모두가 함께 일하고, 모두가 함께 나누는 이상적인 공동체를 만들겠다는 꿈을 꾼다. 반면에 조르바는 평생 학교에는 가본 적도 없고, 예순 다섯이 되도록 육체노동자로 살아왔다. 지금의 행복을 중요시 여기며, 결코 무엇에도 속박되지 않은 자유인이기를 갈망하는 그는 삶의 자세 또한 치열하기만 하다.
주인과 고용인의 신분으로, 거의 배에 가까운 나이차이가 남에도 불구하고 화자와 조르바는 일방적인 관계가 아니다. 아니 오히려 더 끈끈하게 맺어진다. 화자는 길들여지지 않은 자유로운 영혼 조르바를 스승처럼 대한다. 매일 저녁이 되면 화자는 이 세상과 인간 영혼의 구석구석을 누비고 다닌 이 나그네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행복인 듯 그 시간을 기다린다. 아린아이 같은 순수함, 내면의 목소리에 따라 주저 없이 행동하는 결단력, 죽음 앞에서도 당당하게 맞서는 조르바를 보면서 화자는 조금씩 삶의 방식이 바뀐다. 그리고 삶에서 행복이 무엇인지를 느끼기 시작한다. ‘우리 두 사람은 말없이 난로에 둘러 앉아 꽤 오랜 시간을 보냈다. 행복은 소박하고 단순한 것이라는 사실을 나는 다시 한번 확신할 수 있었다. 말하자면 포도주 한 잔, 밤 한 톨, 별거 아닌 난롯불, 으르렁거리는 바다소리, 그런 것이면 충분했다. 그리고 이런 것이 행복이로구나 하고 깨닫기 위해서는 소박하고 단순한 마음만 있으면 되었다.’(152쪽)
조르바 역시 자신을 믿어주는 화자를 더없이 사랑하고 매사에 솔직하게 대한다. 때로는 방탕스러운 삶을 살아가는 듯 보이지만 조르바는 관습적이고, 무비판적인 삶을 거부하고 자신의 판단아래 적극적이고 치열한 삶을 산다. 그에게 인간은 곧 자유인이라는 말과 같은 것이다. 한 때 도자기를 만드는 일에 미쳤을 때 자신의 왼손 검지가 돌림판에 방해가 된다고 손도끼로 잘라버릴 정도로 그는 삶을 대하는 자세가 치열했다. 나중에 갈탄 채굴이 성공하면 공동체를 만들겠다고 말하는 화자에게 인간은 야수라며 읽는 책을 모두 불살라버리면 삶을 좀 더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의 경험을 들어 얘기한다. 그러면서도 조르바는 화자로 인해 마음의 평안과 사랑을 얻는다.
갈탄광이 파산을 하여 크레타 섬을 떠나 각기 제 갈 길을 가는 두 사람. 섬을 떠나기 전날 자신은 자유로운 몸이어서 조르바와 함께 갈지도 모르겠다고 화자는 말한다. 그러나 조르바는 ‘당신이 묶인 줄은 다른 사람들의 줄보다 좀 더 길어요. 그것뿐이오. 당신의 고귀한 줄은 깁니다. 당신이 마음대로 오고가니 자유롭다고 생각할지 모르죠. 하지만 당신은 그 줄을 잘라버리지 못해요!’(526쪽)라고 대꾸한다. 이는 다시 말해서 이성적이라고 생각하는 지식인들의 한계를 나타내는 말이 아닌가 싶다. 구체적인 삶 대신 추상적인 삶을 추구하는 소위 먹물들이 자유인이 되기 위해서는 지금 당장의 삶을 치열하게 살아야 한다는 뜻으로 읽힌다. 조르바의 말처럼 인간의 삶이란 것은 결국 죽음을 전제로 한 것이니까.
화자와 조르바, 두 사람은 영혼으로 연결되었다는 느낌이 든다. 크레타 섬을 떠난 화자는 조르바라는 사내의 전기를 쓰기 시작한다. 그 글이 완성된 날 화자는 조르바가 세상을 떠나면서 그가 가장 소중하게 여겼던 산투리를 화자에게 남겼다는 편지를 받는다. 화자가 조르바로부터 얻은 삶의 지혜를 소중하게 생각했듯, 조르바 역시 화자가 자신을 오래 기억해주기를 바란 것이다.
고전을 읽는다는 것이 항상 즐거운 일만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고전을 읽고서 삶의 방향이 바뀌거나 혹은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다고 하는데 나는 아직까지 그런 경험을 해보지 못했다. 이는 책을 읽으면서 제대로 읽지 못했거나 아니면 이해하지 못해서 일수도 있다. 그럼에도 가능한 꾸준하게 고전을 읽으려고 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화자가 조르바에게 배운 것처럼 ‘자유인’, ‘지금 이 순간’, 혹은 ‘죽음’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여지가 생기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의 여지가 삶의 지혜로 이어지고, 그러다보면 분명 나의 삶도 무언가 변화가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한 번 읽고서 이해한다는 것이 힘들다는 것, 그러기에 여러 번 읽어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솔직히 언제 다시 읽을지는 모르겠다. 한번이라도 꼭 읽어보겠다고 생각하는 고전은 아직도 너무나 많기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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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으면서 조르바의 말 한마디 한미디에 속이 뻥! 뚫리는 느낌을 받았다. 그런데 왜 내가 그런 느낌을 받았는지 구체적으로 남에게 설명하기란 어려울 것 같았다. 기껏해야 생각할 수 있는 건 ‘자유’뿐이니. 다행으로 책 뒤에 ‘작가의 말’, ‘작품해설’이 실려 있었는데, 이걸 읽고 서야 작품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었고(진가를 느꼈달까?!) 무엇이 내 속을 뚫어 줬는지 알 것 같았다. (난 아직 해설을 읽어야 작품을 폭 넓고 깊게 이해할 수 있는가보다~ 그러라고 해설이 있는 거겠지??ㅋㅋ) 언젠가 다시 꺼내볼 수 있게 내가 이 책을 통해 깨달은 삶의 지혜를 요약해보고 싶다.
조르바가 ‘보스’라고 부르는 무명의 화자인 ‘나’는 서른다섯 살이고, 그가 피레우스 항구에서 우연히 만나 갈탄 광산의 감독관으로 채용한 조르바는 그의 아버지뻘인 예순다섯이다. ~ 작가인 ‘나’는 그동안 책에 파묻혀 살던 관념적인 생활에서 잠시 벗어나 구체적인 생활의 여울 속으로 뛰어들고 싶었다. 이 과정에서 화자가 ‘뱃사람 신드바드’라고 부르는 알렉시스 조르바가 산파 역할을 한다.(p558) ~ 조르바는 학교 문턱에도 가 보지 못한 무식한 노동자였지만 온몸으로 세상 경험을 쌓은 인물이다. 그래서 그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는 ‘나’의 영혼을 뒤흔든다. ‘나’가 관념적인 지식인이라면 조르바는 어디까지나 지혜와 슬기의 소유자라고 할 수 있다(p.560)
1. 바로, 지금 여기 조르바는 마음이 상해서 목청을 돋우고 이렇게 외쳤다. “새 길을 걷고, 새 계획을 세우는 거요. 난 지나간 일은 기억하지 않고, 앞으로 다가올 일도 계획하지 않아요. 내게 중요한 것은 바로 오늘, 이 순간에 일어나는 일이오. 그래서 나는 스스로에게 이렇게 묻지요. ‘조르바, 지금 이 순간에 뭐 하고 있는가?’ ‘자고 있네.’ ‘그럼 잘 자게나!’ ‘ 조르바, 자네 지금 뭐하고 있는가?’ ‘일하고 있네.’ ‘그럼 일을 잘 하게.’ ‘조르바, 지금 뭐 하고 있는가?’ ‘여자를 포옹하는 중이라네.’ ‘그럼 열심히 포옹하게! 나머지 일은 깡그리 잊어버리는 거야. 지금 이 순간에는 자네랑 그 여자밖에는 아무것도 없으니까. 어서 서두르게!’”(p481)
조르바는 내세를 믿지 않는다 현세의 삶에 충실할 뿐이다. ‘카르페디엠’ 카잔차키스는 과거는 이미 지나가 버렸고 미래는 알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지금 여기’에서의 삶에 충실할 것을 부르짖는다고 한다. 삶은 일회적이기 때문에 더더욱 경외감을 갖고, 소중하고 값지게 여겨야 한다고 믿는다. 삶은 일회적이기에 오히려 살 만한 가치가 있는, 더 없이 소중한 것이라고 한다.(작품해설 인용) 왜 모르겠는가. 삶은 바로, 지금 여기에서 충실해야 하는 것이라고. 이론으로는 알고 있으나, 실천이 잘 안되고 머릿속에서만 떠다니던 말들이 조르바의 삶을 통해 눈앞에 한 편의 영화처럼 펼쳐졌다. 지금 여기에 충실한 삶! 말만 늘어놓지 않고 조르바의 삶이 증명하고 있는 삶!
2. 자유 나는 부끄러워서 입을 다물고 말았다. ‘진짜 사내란 바로 이런 거야.’ 나는 조르바의 고통-피가 따듯하고 뼈가 단단한 사나이, 슬플 때는 진짜 눈물을 뚝뚝 흘리고, 기쁠 때는 고운 형이상학의 체로 걸러 내느라 기쁨을 잡치는 법이 없는 그런 사내의 고통을 부러워하며 이렇게 생각했다. (p.443) 나로 말하자면, 나잇살을 먹으면 먹을수록 야수가 되어 갑디다. 포기 같은 건 안 해요. 난 이 넓은 세상을 깡그리 집어삼킬 생각이오.(p147) “한 때는 도자기를 만든 적도 있었소. 그 일에 거의 미쳐 있었죠. 진흙 한 덩이를 떡하니 올려 놓고 돌림판을 미친 듯이 돌리는 거요. ~ ‘뭐든지 다 만들겠어!’ 이렇게 중얼거리지. 분명히 말하지만, 이렇게 외친다는 건 진정한 인간이 된다는 거요. 자유 말이오! ~ 아 글쎄 그놈의 손가락이 돌림판에 방해가 되는 거요. ~ 그래서 어느 날 손도끼를 갖다가 그만....”
조르바는 나이, 건강 등 인간을 제한하는 조건을 초월한다. 한마디로 20대와 같은 마음으로 진정 자유롭게 살아간다. 또 자신의 감정 하나하나에 솔직하다. 난 그것도 일종의 자유라고 보는데, 보통의 인간은 슬픔과 기쁨을 체면을 따지느라 자제하고 감추는 때가 있지만 조르바는 그 감정에 충실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왼쪽 검지를 자르면서까지 찾으려고 했던 ‘자유’! 카찬차키스는 조르바를 통하여 인간이 의미 있게 살기 위해서는 기존의 질서나 사회적 규범을 따르는 대신,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한다. 내가 죽을때까지 조르바처럼 자유롭게 살아갈 순간이 있을까? 아마도 없을 것 같다. 그렇기에 조르바를 더 찬양하게 되는 걸까
3. 행동 조르바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온몸을 대지에 발을 딛고 있기 때문에 좀처럼 실수를 범하지 않는거야. 아프리카 원주민들이 뱀을 숭배하는 이유는, 뱀이 온몸을 땅에 대고서 대지의 비밀을 배로, 꼬리로, 고환으로, 대가리로 알아차리기 때문이거든. ~ 조르바도 이와 비슷하지 않은가. 우리처럼 먹물을 뒤집어쓴 사람들은 공중에 나는 새들처럼 골이 텅텅 비어있지(p.122) “행동! 행동! 그 밖에 다른 구원 따위는 없어. 태초에 행동이 있었노라, 그리고 종말에도 역시.”
카찬차키스에게 삶을 의미 있게 살아가는 방법 중 하나는 수동적인 태도로 삶을 고찰하고 관조하기 보다는 오히려 능동적으로 행동하는 것이다. 행동보다 언제나 생각이 앞서는 화자와 달리 조르바는 먼저 행동하고 나중에 생각하는 인물이다. 조르바에게 행동이 뒤따르지 않는 생각이란 허공에 맴도는 메아리처럼 공허할 뿐이다.(작품해설 인용)
4. 죽음 “인간이란게 도대체 뭐며, 왜 이 지구에 나타났으며, 어떻게 하면 쓸모 있는 존재가 되는지,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기 때문이오. 그런데 인간은 결코 쓸모 있는 존재가 될 수 없소. 내가 보기엔 모든게 똑같아요. 마누라가 있건 없건, 정직하건 정직하지 않건, 고관이건 문지기건 말이오. 다만 중요한 것은, 내가 죽었느냐 아니면 살아 있느냐 하는 것 뿐이오.”(p267) “보스양반, 이 모든 일에 무슨 의미가 있는 건지 어디 한번 들어 봅시다. 도대체 누가 창조했소? 누가 창조했건 왜 만들었을까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여기서 조르바의 목소리는 분노와 공포로 가득 찼다. “......왜 우리는 죽는 걸까요?”(p474) ‘한 줌의 흙이로구나.’ 조르바는 생각했다. ‘배고파할 줄도 알고, 웃을 줄도 알고, 포옹할 줄도 아는 흙덩이로다. 울 줄도 아는 흙 한 덩이. 그런데 지금은 어떻게 됐는가? 도대체 어느 놈이 우리를 이 땅에 데려다 놓고, 또 어느 놈이 우리를 이 땅에서 데려가는가?’(p.467)
죽음을 대면하는 것은 결국 삶을 어떻게 살 것인가의 문제로 돌아간다고 생각한다. 인간의 삶이 죽음을 향해 가기에 허무한 것이 아니라, 그렇기에 더 소중하다고. 지금 여기, 이 순간에 충실해야 한다고 말이다. 단, 집착은 버리고!
난 사춘기가 늦게 온 탓에 30대가 되어서야 ‘삶은 무엇인가’, ‘인간은 왜 사는가?’, ‘행복은 무엇인가’ 등의 질문을 떠올렸다. 내가 이 책이 정말 재밌었던 건, 해소되지 않았던 질문들과 그저 말로만 들어왔던 대답들이 조르바의 삶을 통해 명쾌하게 증명되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 작품은 카찬차키스의 자전적인 작품이라고 하니 더 말해 뭐할까. 카잔차키스는 조르바에 대하여 “자신에게 삶을 사랑하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해 준”사람이라고 밝혔다고 하는데, 이젠 나 또한 그러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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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익히 들어 유명한 그 책! 많은 이들이 읽고 자신의 변화를 경험했다는 그 책! 여러 작가들이 너무나도 감명 받고,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다는 그 책! 엄청난 책이다. 고전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나조차도 그래, 조르바라는 책이 있지 라고 할 정도면 정말 유명한 책이다. 하지만 문학 작품은 요즘 계속 꺼리는 중이라, 아마 일고십 도서가 아니였다면 언제 만났을 지 모르겠다.
기본적으로 문학은 내게 어렵다.
학창시절부터 문학 수업을 들으며, ‘읭? 그런
부분을 느낄 수 있어야 하는 거야?’ 혹은 ‘잉? 그렇게까지 전체를 조망하고 내용을 이해할 수 있어야 했던 거야?’라며
놀라기 마련이었다. 정말 아무 생각 없이 줄거리만 보던 독서 초보다.
그래서 이번에 읽게 되면서도 사실 큰 부담이었다. 내가 질문을 제시해야 하는 입장이니, 잘 못 잡아내면 어쩌나, 어떤 부분을 봐야 하나, 제대로 이해는 할 수 있을까 등등 고민에 걱정을 더했다. 아무래도
학창시절을 겪으며 문학 관련 책들을 읽으며 (문학 그 자체가 아니라)
문학에 정답이 있을거라고 생각했기에 그런 부담을 느끼고 있었다. 정답은 없고 온전히 내가
느낀 그대로라고 이야기는 하지만, 여전히 내게 문학은 어렵다. 이
책도 역자 해설을 읽으며, ‘아, 거기까지 생각할 수 있는
거구나!’ 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으니 난 10대때도 지금도
똑 같은 것 같다. 아직 내공이 쌓이지 않아서 그런건지, 아니면
문학에 대한 감이 없는 건지 ㅋㅋㅋ
읽는 동안은 참 재미있었다. 소설이라서
편하게 읽을 수 있었던 것 같다. 더 깊이 생각하지 못한 버릇이 있다는 게 문제긴 하지만 어쨌든 읽으면
읽을수록 왜 사람들이 조르바라는 사람에 빠져들어갔는지 알 수 있었다. 매력으로 무장하고 있다 못해 철철
넘치는 이 사람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보통 발췌하면서 중요하거나, 좀 더 생각해볼 문제, 글로 쓸 내용들에는 별 표시를 하는데 조르바의
대사는 온통 별 천지다. ㅋㅋ 그만큼 내가 생각해보고 내 것으로 만들 것들이 많은, 배울점이 많은 사람이었다. 초반에는 이런 허세남이 있나? 이렇게 거들먹거리는 사람은 정말 싫은데 했던 내 생각은 얼마 지나지 않아 화자처럼 ‘더 이야기 해줘요, 더!’를
남발하고 있게 되었다.
조르바의 삶에 대한 태도를 정리 해보았다. 먼저, 그는 일단 행동한다. 이것이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주기도 하고, 나 또한 크게 배워야 하는 점이다.
생각을 깊이 하고, 준비를 하고 난 후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 아니라 ‘내 안의 악마가 원하면’ 일단 행동으로 옮기고 보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데, 혹시나’ 등과 같은 전제 따위는 전혀 달지 않는다. 그건 그저 행동하지 않으려는
변명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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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참, 왜냐고 따져 묻지 않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거요? 그냥 물어본 거요! 그러고 싶은 마음이 들어서! (p.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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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 젊은이, 난 영원히 죽지 않을 것처럼 행동한다네. / (조르바) 전 언제 죽을지 모르는 사람처럼 살고 있는걸요. (p.70)
그는 그냥 그러고 싶은 마음이 들면 움직인다. 그러한 모습은 초지일관
나타난다. 망설이거나, 고민하지 않는다. 행동으로 옮겨야 한다는 생각이 들면 일단 움직이고 그 뒤로 생각이 따라온다.
그렇기에 그의 삶이 도덕적으로 존경 받을 만한 삶인 건 아니다. 하지만 엄청난 경험을 통해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몸소 체험해서 실천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동물적 감각, 오히려 본능을 따라 행동하며 더더욱 자신을 위해 움직이게 된 것이다. 이러한
모습은 현재에 충실하고자 하는 그의 생각에 기반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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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지나간 일은 기억하지 않고, 앞으로 다가올
일도 계획하지 않아요. 내게 중요한 것은 바로 오늘, 이
순간에 일어나는 일이오. (p.481)
두 번째 그의
태도는 현재에 충실하는 것이다. 하고 싶은 대로 한다는 것은 지금 이 순간이 가장 중요하므로 고민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당장 지금, 이 순간이 중요한데 무얼
고민할 필요가 있는가? ‘Now or never’ 이 가장 적합한 단어 같다. 거기에 더 해진 세 번째 태도가 내가 중심이라는 것이다. 사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어떻게 더 설명해야 할지 감이 오지 않는다. 읽으며 감탄했다. 이 세상에 오롯이 나 만이 존재하는 그 느낌. 내가 나여야만 하는
그 느낌을 조르바로부터 배울 수 있었다. 어쨌든 ‘나’는 ‘나’에서 시작해서
‘나’로 끝나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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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조르바를 믿는 이유는, 유일하게 내 마음대로
할 수 있고, 유일하게 내가 아는 존재이기 때문이오. 그
외의 존재들은 죄다 유령이오. 조르바는 이 눈으로 보고, 이
귀로 듣고, 이 내장으로 소화시키거든. 하지만 다시 말하건대, 나머지 사람들은 모조리 유령일 뿐이오. 내가 죽으면 모든 게 사라지는
거요. 조르바의 세계 전체가 무너져 내리는 거란 말이오.
(p.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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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지금 나 자신을 해방시키고, 한 인간으로
거듭 태어나는 중이오. (p.403)
네 번째 삶의
태도로 관찰한 것은 환경에 대한 그의 자세이다. 그의 세상에서 과거란 존재하지 않는다. 지금만 살고 있는 조르바에게는 당연할지도 모른다. 그의 세상은 매번
새로 태어나고 있으므로 당연한 것은 없다. 모든 것을 새롭게 받아들이고, 다른 눈으로 관찰하는 태도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실제로 감탄하면서도 실생활에서 내가 그런 눈을 가질 수는 없었다. 내가
더 조르바를 이해하거나 받아들이지 못해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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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르바는 모든 사물을 날마다 처음 보는 것처럼 대한다.
~ “이 무슨 기적이란 말이오?” (p.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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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선지자와 시인은 이와 같은 방식으로 모든 사물을 바라본다. (중략) 마치 태어나서 처음 바라보듯이 말이다. 아침마다 신세계가 그들의 눈 앞에 펼쳐진다. 아니, 그들은 신세계를 보는 것이 아니라 신세계를 창조하는 것이다. (p.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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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로움 그 자체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겐 시간이 없고, 시간이
있는 사람들은 신비로움 그 자체를 살지 못하는 거요. (p. 390)
그런 주변 환경을 보는 눈은 다섯 번째 삶의 태도인 박애주의와
연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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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언제쯤이면 우리가 눈을 떠서 사물을 보고, 또
언제쯤이면 두 팔을 벌려 우리 모두가 – 돌멩이, 꽃, 비, 사람들 말이오 – 서로를
안을 수 있을까요? (p.1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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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 만물에 영혼이 깃들어 있어요. (p.148)
사물을 이렇게 바라보는데 하물며 사람은 그렇지 않으리? 이는 그의
여성 편력과도 연관된다고 생각한다. 현대 시점에서 보면 여자의 적이 되고도 남을 조르바. 하지만 개인적으로 조르바만큼이나 여자를 열정적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비록 엄청난 많은 여성들을 만났지만 적어도 조르바는 한 사람을 만나는 그 순간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열정을
불태워 그들을 사랑하는 것이다. 논란이 될만한 내용이 있긴 하지만, 적어도
그 시대적 배경으로 본다면 다른 이들이 여자를 한낱 노리개 혹은 소유물로 여기는 것 이상으로 대했다고 난 확신한다. 오히려 조르바만이 더 인간적으로 대우했고, 조르바를 만나는 그 순간에는
그 존재 자체로 봐주는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그렇기에 여성들이 조르바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던 거
아닐까.
마지막으로, 조르바의 다른 이들에 대한 연민이다. 사업장에서도 조르바는 시종일관
퉁명스럽고괴팍하고, 권위적이다. 하지만 자신이 지켜주어야
할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든 지켜주려고 노력하고, 솔선수범하려고 했다.
그래서 먹물 가득 찬 화자의 계몽주의에 대해 일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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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던 그대로 조용히 살게 내버려 두쇼, 보스
양반. 괜히 그 사람들의 눈을 뜨게 하지 마쇼! (중략) 꿈꾸게 내버려 두란 말이오. (중략) 다만, 그 사람들이 눈을 떴을 때 당신이 더 좋은 세상을 보여 줄
수만 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지지. 그럴 수 있소? (p.120)
그는 화자의 생각으로 인해 고통스럽고, 힘들어질 사람들을 걱정하고
연민을 느낀 듯 하다. 그렇기에 좀 더 지배층에 가까운 화자에게 세상을 바꿔줄 수 있을지를 물어보는
것 아닐까? 단순히 계몽주의를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 준 다음에 그들을 꺼내주라는 것이다. 화자라면 함께 새로운 세계를 구축하고자
하는 마음이 컸던 거겠지만, 조르바 입장에서는 무지한 사람들이 어수선하게 길을 잃어 헤매는 것보다는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 줄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다.
책에서 지속적으로
화자는 ‘붓다’에 집중한다.
아니, 집착한다. 그의 작업도 결국 ‘붓다’와 관련된 글을 쓰는 것이다.
처음부터 왜 하필이면 ‘붓다’였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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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였을 때는 우물에 떨어질 뻔했지만, 나이가
들어서 나는 ‘영원’ 이라는 낱말에 떨어질 뻔했다. 그 밖에 ‘사람’, ‘희망’, ‘고국’, ‘신’이라는
낱말에 빠질 뻔하기도 했다. 해마다 그것들로부터 도망치며 조금씩 빗어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막상 앞으로 나아가지는 못했다. 다만 나는 한 낱말을 다른
낱말로 바꾸며 그것을 해방이라고 부를 뿐이었다. 가장 최근 이 년 동안은 꼬박 ‘붓다’라는 낱말 위에 둥둥 떠 있었다. 하지만 조르바 덕분에 그것이 내 마지막 우물, 최후의 낱말이 되었다. 마침내 나는 영원히 탈출하려 하고 있었다. (p.317)
하지만 화자는 ‘붓다’일
이유가 없었다. 그저 ‘무언가’가 필요했다. 맹목적으로 추구할 무언가가 필요했다. 그것이 조르바를 만나며 탈출했다고 한다. 하지만 내가 보기엔 ‘조르바학교’에 입학하여 ‘조르바’라는 단어로 바뀐 것뿐이리라. 마음의 위안을 위해 지속적으로 기댈
무언가를 추구하는 그의 모습에서 내가 보였다. 그것이 무엇이든 상관없으리라, 내가 그 안에서 마음의 평화를 찾을 수만 있다면. 혹은 치열하게
고민하며 생각할 수 있는 거라면. 그렇게 살아갈 하나의 이유가 되어 주기만 한다면. 거기서 벗어나야 하는가? 아니면 제대로 된 ‘무언가’를 찾아야만 하는가?
전혀 도덕적이거나, 존경받을 만한 위인이 아닌 조르바. 하지만 우리는 그를 열광하고
그에게 찬사를 보낸다. 그 이유는 현재의 우리의 삶과 너무나도 다른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리라. ‘자유’라는 단어 그 자체인 ‘조르바.’ 그런 그에게 우리는 열광하리라. 나 또한 내가 가지고 있지 않은, 혹은 내가 넘볼 수 없는 그의 모습에 매력을 느꼈다. 긍정적인 모든
태도를 배울 수 있길 바라지만, 적어도 행동으로 옮길 줄 아는 그의 모습을 따라할 수 있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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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인 조르바를 도서관에서 대여해서 봤다가 소장해서 두고두고 볼 책이라는 생각이 들어 구매했어요. 무기력할때 저에게 큰 힘이 되었죠. "나를 구하는 유일한 길은 다른 사람들을 구하려고 투쟁하는 것 뿐이다." 이 문장을 깊이 생각해 보니 인생을 살아가는데 답은 이것 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고민이 있다거나 걱정이 있다면 헤매지말고 이 문장을 생각하며 살아갈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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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에 알릴레오 보고 읽고 싶어서 구매했습니다 민음사에서 나온 책이 가격이 더 있지만 사봤어요 ㅎㅎ 조르바의 삶을 따라가고 싶어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나뉘던데 전 전자였어요.. 참 많은걸 느꼈고 읽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ㅎㅎ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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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나를 지도해주시던 선생님께 선물해드리고자 산 책이다. 문학과 지성사에서 원전 번역을 한 <그리스인 조르바>가 나올지 모르고 이것을 선물해드렸는데, 원전 번역이 나올 줄 알았으면 조금 기다릴 걸 그랬다.
내용은 이전에 리뷰에서 적었듯이, 자아를 찾아야 함을 말하고 "나"의 존재는 무엇인지를 끊임 없이 되묻는 책이다.
삶의 방향이 어느 곳으로 나아가야 하는지, 그리고 그 방향 끝에 있을 무수한 의미, 또한 그것을 잃고 떠돌아다닐 때에 잃어버릴 인간의 존엄성, 위엄을 알려주고 있으며 자유로운 삶과 그것에 구애받지 않는 당당한 태도와 생각으로 '영혼'있는 삶에 대해 카잔차키스는 끝 없이 독자들에게 묻고 있다.
내가 소중히 여기는 사람에게 선물해주는 책인데, 다음에는 누구에게 이 책을 사서 주게 될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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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기 전, 조르바가 자유로움의 표상으로 여겨진다는 걸 알았다. 왜일까? 조르바의 어떤점이 '자유로움'이라는 단어로 정의될 수 있었을까? 의문을 갖고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읽으면 읽을수록 더한 의문이 생겼다. 많은 사람들이 조르바에게서 엿본 자유로움은 무엇일까? 시대가 다르고, 성별이 다르고, 가치관이 달라서일까? 책을 덮자마자 든 생각은 조르바의 삶=제멋대로 사는 삶이었다. 세상의 기준이 아닌 자신만의 기준안에서 하고 싶은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않고 다하며 산 조르바 세상이 정해둔 도덕적 잣대와 규범으로 그를 평가하자면 사기꾼에 욕구불만 노인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지만, 그가 정한 기준안에서만은 그 누구보다 충실했던 것 같다. 그의 그런 모습이 화자(사람들)를 매료시켰던 걸까? 머릿속으로는 바라고 꿈꾸지만, 실제로는 행하지 못하는 자신의 소심함에 대조되는 조르바의 대담함과 실행력이 그를 자극하고, 즐겁게 만든 것 같다. 너무 달라서 서로에게 끌렸을까? 문학을 읽다보니, 작품이 씌여진 시대상을 아는게 정말 중요하다는 생각이든다. 만약 내가 중년남자였다면, 전쟁을 겪은 세대였다면, 작품 속 인물들을 좀 더 이해할 수 있었을까? 조르바와 나 사이의 간극은 좀처럼 좁혀질 수 없을 것 같다. 특히, 여성에 대한 그의 생각만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만의 가치를 추구하는데 있어서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행하는 그의 실행력만은 정말 본받고 싶다. ♧ 그래, 난 정말 뭔가 배운 바가 있소. 이제 사람들을 보며 이렇게 말하거든. '이 사람은 선량한 사람, 저 사람은 나쁜 사람. 그가 불가리아인인지 그리스인인지는 중요하지 않아. 내가 보기엔 모두 똑같은 사람이니까.' 이제 내가 던지는 질문은 말이오, 그가 좋은 사람이냐, 나쁜 사람이냐 하는 것뿐이오. 나이를 먹을수록, 내가 먹어 치운 밥그릇 수가 늘어날수록 그런 질문도 던지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듭디다. 아, 그 사람들이 착한 사람이건, 나쁜 사람이건 누가 상관한답니까? 난 그들 모두가 안쓰러울 뿐이오. (P.403~4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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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인 조르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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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읽는 이유는 무엇일까? 내용 자체가 재미있어서 읽는 경우도 있을 것이고, 현재 자신의 삶과는 다른 환경을 간접적으로 경험해볼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또한 소설 속 주인공의 삶에 대한 동경에서 그 글을 읽는 경우도 있는데 니코스 카잔차키스 작가의 책 그리스인 조르바는 이러한 이유로 읽게 된 경우다. 자유롭고 강렬한 삶을 산 주인공 조르바의 삶을 동경하게 된 것은 비단 나뿐만은 아닐 것이다. 이 책 추천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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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자는 소히 말하는 먹물로, 행동력은 0으로 수렴하며 앉아서 책을 집필하고 명상하는 것을 즐기는 인물이다. 화자가 우연히 만난 조르바라는 중장년의 남성은 계획적인 삶과는 무관한, 현실에만 충실한 삶을 사는 인물이다. 매우 대조적인 두 인물이 만나서 달성하려는 공동의 목표는 크레타섬에 들어가 갈탄을 채취하는 것인데, 화자는 목표지향적이지 않아서 딱히 갈탄이야기는 얼마 안나오고 화자가 조르바와 함께생활하면서 보고 느끼는 조르바 관찰기..같은 느낌으로 글이 전개된다. 조르바의 로맨스(?)에는 너무 공감이 안가서 과거 썰이나 성애애 대한 장면이 나오면 이아저씨 또 시작이네...하며 대충 넘겼다; 딱히 정이 안가는 캐릭터지만 그의 행동력과 정의감(?) 만큼은 미덕으로 생각되었다. 마을 과부를 집단 린치하고 살해하는 장면에서 섬마을 사람들의 미개함과 야만적임에 혀를 내두르며 화자의 쭈굴한 모습을 읽고있었는데 조르바만이 부당한 일에 정면으로 맞섰다. 마음이 시키는 대로, 생각의 흐름대로 자유로이 사는 조르바 아저씨는..현대인이자 유교걸이 이해하기엔 벅차고 불편했지만 1883년에 태어나 1957년에 돌아가신 작가의 시선에서 자유로운 영혼을 그린거겠거니.. 허허허허...독서모임 멤버 여러분, 책 선정을 제가 잘못한거 같아요.죄송합니다...라는 심심한 사과의 말을 전합니다.ㅠ 아, 이책을 읽고 좋았던건 세이지 차... 책 앞부분에 주변인들이 자꾸 세이지 차를 마시는 장면이 나와서 쿠팡을 찾아봤는데 어머나, 있네?ㅋㅋㅋㅋ 주문해서 마셔봤는데 은근 입맞에 맞았다. 그래..뭐, 이런거라도 책에서 하나 얻어가는거지 뭐..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