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충적세 문명의 저자 김유동입니다.
그간 '충적세 문명'에 대해 나온 리뷰나 서평을 올립니다.
중병 앓고 있는 문명… 구원은 어디에 (오미환 선임기자)
한국일보 생활/문화 23면 15세기 인도양 지배하던 중국, 해외진출 금지한 까닭(최원형 기자)
인류 1만년 문명사 풀이(이석우 편집위원)
편집국장) 2011년 11월 14일 교수신문
기사 내용중 아도르노와 현대사상(문학과지성사 1997)은 아도르노
사상(문예출판사 1993)으로 정정함.
'제3의눈'; 낯익은 주제 그러나 독특한 접근 …
'빔의 문명 전환' 제안
(서평) '문명에 대한 비극적 사유, 그 너머에는'(아직 인터넷 문서는 없음)
창작과비평 2012년 봄호 안재원 교수(서울대)
황해문화 2012년 봄호 2012.02.24 박 설 호 교수(한신대)
(서평) 구원의 관점이 아니다
오늘의 문예비평 2012년 봄호 윤인로 2012.02.10
2011년 12월 31일
인문학자의 눈으로 읽어낸 인류문명사 1만년(임홍배, 서울대 교수; 책 뒷표지)
김유동 교수의 '충적세 문명'은 한국 근대학문의 역사에서 전례를 찾아보기 힘든 역작이자 대작이다. 우선 인류문명의 기원에서부터 지금 우리가 사는 21세기 후기자본주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문명사의 궤적을 한눈으로 꿰뚫는 혜안이 돋보인다. 아울러 문명의 발생동인과 주요 문화권의 내적 구조를 입체적으로 조감하는 한편, 각 문화권의 고유한 가치관을 문명사의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오늘의 시각에서 재조명하고, 나아가서 엄정한 역사의식과 치열한 현실인식을 바탕으로 동서양 문화의 비교를 시도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단지 문명사의 백과전서적 재구성에 머물지 않고, 근대 이래 섣부른 발전사관의 미망에 사로잡혀 있는 우리의 의식과 무의식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신선한 충격을 선사한다. 인류문명사 1만년을 종횡으로 가로지르는 이 지적 모험은 요컨대 소유와 지배의 전일적 체제가 ‘악마의 맷돌’처럼 작동하는 자본의 시대를 과연 어떻게 견디고 넘어설 것인가 하는 치열한 문제의식으로 일관하고 있다. 김유동 교수가 십수년 동안 지리산 자락에서 유폐에 가까운 은거생활을 하며 반야심경과 '도덕경'에서부터 '백년의 고독'에 이르기까지 동서고금 최량의 지적 자산을 섭렵하여 일구어낸 이 풍성한 결실은 과거와 현재의 대화, 문명들 사이의 대화를 통해 일찍이 플라톤이 최고의 사유형식으로 실천했던 대화적 해석학의 전범을 보여주며, 문학?역사?철학?정치경제학?인문지리?자연지리를 아우르는 통합적 사유는 현대학문의 기능적 분화 속에서 좌표를 상실한 총체적 사유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고 있다.
<충적세 문명>에 붙이는 저자의 글
목차
*<충적세 문명>에 대한 리뷰와 서평을 써주신 분들에 대한 짧은 감사말과 블로그 글을 쓰게 된 경위
* 안재원 교수의 <문명에 대한 비극적 사유, 그 너머에는>애 대한 저자의 자기변명
* 박설호 교수의 서평에 대한 저자의 자기변명
* 윤인로의 <구원의 관점이 아니다>에 대한 저자의 반론
* 비교문화구조학적 방법에 대한 여론(餘論)
* 간주곡 선택과 구성 원리
참고를 위해 실은 저자의 지난 논문(벤야민, 하버마스, 니체, 루카치를 다룬 <아도르노와 현대사상>, 문학과지성사 1997에 실려 있음) 알라딘에는 논문들 원문이 게제되어 있음.
* <루카치 문학관의 총체적 이해와 올바른 수용을 위하여>
* <루카치냐 아도르노냐>
* <벤야민과 아도르노; 발터 벤야민의 새로운 천사>
<충적세 문명>에 대한 리뷰와 서평을 써주신 분들에 대한 짧은 감사말과 블로그 글을 쓰게 된 경위
인터넷 매체에 글을 쓰게 된 직접적 계기는, <충적세 문명>에 대해 ‘총체적 부정’의 판결을 내리는 파(破)님의 글을 알라딘에서 발견하게 되면서 저자로서 반론을 내놓지 않을 수 없다는 결단이었다. <구원적 관점이 아니다>에 대한 저자의 반론을 올리기에 앞서, 그동안 <충적세 문명>에 대한 리뷰와 서평을 써주신 분들에 대한 감사 인사와 짧은 코멘트를 하는 것이 예의라 여겨진다.
2011년 10월 하순 신간 소개를 하는 주말판에 대부분의 신문이 주목할 신간으로 <충적세 문명>을 선정하고, 특히 한국일보와 한겨레신문, 서울신문은 리뷰기사를 실어주었다. 일주일에 수백권씩 쏟아져 들어오는 신간들과 그에 대한 보도자료를 살핀 후 신문에 소개할 책들을 골라내어 촌평을 하는 것은 그것만으로도 대단한 분량의 업무로 여겨지는데, 기껏 며칠밖에 주어지지 않는 짧은 시간에 부피와 밀도를 지닌 책을 소화한 후 리뷰까지 써준 오미환 선임기자(한국), 최원형 기자(한겨례), 이석우 편집위원(서울)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그리고 책에 대한 자신의 이해와 저자의 답변서를 바탕으로 인터뷰 기사를 실어준 최익현 편집국장(교수신문에서 가끔 탁월한 통찰력과 필력을 보여주는 서평들을 발견했지만 정보에 어두운 나로서 그 사람 이름이 최익현인 것은 처음 알았다)에 대해서는 특별히 감사한다. “책의 구상과 탈고, 그리고 출간하기까지 전 과정에서 가장 어려웠던 것은 무엇이었습니까?”라는 최익현 국장의 질문에 대해, “글쓰기는 자기 삶의 방편이었지만, 노출기피적인 은둔 생활이 ‘노출’될 때 어떻게 하나라는 두려움이죠”라고 답변했는데. 그 두려움은 인터뷰에 대한 부담보다도 지금 상황에 대한 불안이었나 보다.
신문사의 리뷰가 책과 독자를 연결시켜 주는 선별작업과 클로즈업 기능이라면, 학계의 서평은 다를 것이다. 학자의 서평은 편한 마음으로 남의 글을 구경한 후 독후감을 쓰는 것이 아니라 서평자의 명예를 걸고 평가를 내리는 것이며, 그 평가에는 부담이 따른다. 서평자의 평가는 허공에 대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평가의 대상이 된 또 다른 주체를 향한 것이기 때문이다. 세상에 책을 내놓은 이 주체는 얌전히 해부대 위에 올려져 분석되고 평가를 받지만, 해부대에서 내려오면 그 진단서를 살피게 된다. 저자도 내려진 진단에 대해 자신의 입장을 밝힐 수 있는 주체이기 때문에 서평자의 진단은 서평자 자신도 드러나는 부담스런 일인 것이다. 이런 면에서 꼼꼼히 읽고 서평을 해준 세 분 선생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학자의 서평에 대해 저자의 입장을 개진하는 것은 예의며 의무로 여겨져 자기변명의 글을 쓰게 되었다.
안재원 교수의 <문명에 대한 비극적 사유, 그 너머에는>에 대한 저자의 자기변명
<창작과 비평>의 서평을, 서양 고전 문헌학을 전공한 안재원 서울대 교수가 쓴다는 얘기를 들은 후, 문명 전체를 연구의 카테고리로 설정한 저자로서 서양 고대와 중세도 당연히 건드릴 수밖에 없었는데, 관련 전공자가 어떻게 평가할지 긴장된 기대를 했다. 다른 글들은 인터넷 문서로 올라와 있어 링크가 가능하나 안재원 교수의 글은 그렇지 않아 발췌 소개한다. 서평은 이렇게 시작한다.
책을 읽는 내내 후회했다. 제목만 보고 덜컥 서평을 맡겠다고 한 것 말이다. 아닌 게 아니라, 책은 일단 양적인 면에서도 큰 산이었고, 내용면에서도 큰 바다였다. 허나 약속은 약속인지라 책을 항해하던 중에 들었던 몇 단상으로 서평을 대신하고자 한다.
저자 김유동(金裕東) 교수의 이름은 들어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를 만난 적도, 그의 책을 읽은 적도 없다. <충적세문명;1만년 인간문화의 비교문화구조학적 성찰>이 나에겐 처음이다. 그의 한없는 독서와 끝없는 사유에 경의를 표한다. 우선 ‘한없는 독서에’에 대해 말하자. 분과학문의 고유성과 전문성이라는 틀에 갇혀 ‘전공 폐쇄장애’를 앓고 있는 요즘의 인문학자들이 걸었던 길과는 다른 노정에서 찾아낸 새로운 이야기들이, 그의 글 읽기가 어떠했고, 어떠한지를 보여주는 흔적이, 이 책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도대체 어떤 담대한 도전의식을 가졌기에 동양과 서양의 고전은 물론 심지어 아메리카 인디언의 이야기까지 한곳에 모아 삭히고 있을까? 저 뚝심의 실체는 무엇일까? 그게 무언지 자못 궁금했다.
궁금함은 자연스럽게 저자의 ‘끝없는 사유’로 옮겨갔다. [...]
서사구조는 복잡하나 논지는 간명한 편이다. 가끔은 그들 사이에 있는 간극을 메우며 따라가는 것이 어렵기는 해도 말이다. 따라서 책은, 이야기가 넘치지만 메시지는 간결한 편이다. 문명이란 지배와 소유의 구조를 연장하고 확장하기 위한 장치(apparatus)고, 이 장치는 자연(natura)에 어긋난 인위에 불과하다는 게 그 요지이다. 그러나 이러한 비판과 물음이 명쾌한 답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아쉬움을 남긴다.
물론 혁명을 기대한 것은 아니다. 애당초 정치혁명이 일어난다 해서 자연과의 어긋남에서 탄생한 문명의 비극적 구조 자체가 해소되는 것도 아니기에. 저자가 책의 바탕에 깔려있는 비극적 사유를, 아니 더 나아가 묵시적인(apocalyptic) 세계관을 더 끝까지 밀고나가 인류문명에 원래 처음부터 설정되어 있는 비극적 구조를 예리하게 해부해주기를 나는 기대했다. 아직 우리에게는, 그러니까 한국어로 저술된 서적들에는 묵시적인 세계관에서 세계를 바라보는, 삶과 세상 전체를 묵직한 필체로 그려낸 이야기가 없기 때문이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본다. 하지만 아쉽게도 저자는 딱 거기에서 사유를 멈춰버리고 말았다. ‘거기’란 저자가 마지막에 소개하는 카프카(F. Kafka)의 <법 앞에서>다. [...]
‘법 앞에서 멈춘다’고 하면서 전개한 안재원 교수의 ‘법’ 이야기는 감(感)이 잘 안 잡히는데, 내가 쓴 ‘법’은 제도로서의 실정법이 아니라 법도나 법칙의 ‘법’(마누법전의 ‘법’도 여기에 더 가깝다고 본다)을 염두에 둔 것으로 ‘법’이란 ‘전체’나 진리 같은 것을 표시하는 또 다른 기호였다는 변명은 하고 싶다.
동양문명에 대한 서평자의 얘기에 대해 내가 할 수 있는 변명은 동양문명을 대안으로 제시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안교수가 “사실, 책은 문명에 대한 ‘묵시’적인 비판서는 아니고, 문명을 바라보는 시선의 ‘전환’을 촉구하는 교양서에 가깝다”고 지적한 바로 그대로 근대인의 무의식을 지배하는 ‘서구중심주의’를 뒤엎는 척도로서 동양을 사용한 것뿐이다. 사실 나는 ‘대안’이라는 용어는 좋아하지 않는다. 무수한 톱니바퀴가 맞물려 돌아가는 거대한 시스템 안에서 학자가 할 수 있는 역할이 무엇일까에 대해서는 회의적이지만 대안이나 ‘실천’의 문제에 대해 굳이 발언한다면, ‘인식은 총체적이지만 실천은 확실한 것부터 한발 한발’이다. 근본주의자(래디칼리스트의 어원은 뿌리root이다. 실천을 전제로 한 경우 뿌리부터 구조적으로 바꾸자는 입장에서 래디칼리스트는 보통 급진주의로 번역되지만, 인위적인 실천 자체를 뿌리부터 성찰하려들 경우 래디칼리즘은 근본주의가 될 것이다)에게 중요한 것은 ‘기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