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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자! ('먹자'의 경상도 방언 아니다)... 묵자(墨子,BC470~BC391?)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1990년대 중반의 일이다. 그 당시 통일운동가였던 통일운동가 문익환 목사(영화배우이며 '혁신과통합'의 문성근 상임대표의 아버지)와 홍근수 목사, 한학자 기세춘 선생께서 <예수와 묵자>라는 책을 발간하셨는데, 그 내용의 진보성에 정신적 충격이 매우 컸다. 옥중에서 서신으로 의견을 주고 받은 토론을 정리한 책인데, 묵자의 사상과 예수님의 가르침이 쌍둥이처럼 엇비슷하다는 내용이었다. 묵자는 춘추전국시대 때 차별없는 사랑과 평화의 세상을 추구한 사상가로, 인간이란 모두가 다같이 하느님의 자손(천손)이라 생각하였으며, 자신을 대하듯 남을 대하라는 보편적 사랑의 원리를 주창한 분이다. 기 선생이 정리한 묵자의 하느님은 평화와 평등의 하느님이었으며 민중을 사랑하시는 생명과 정의의 하느님이었다(더보기 참조). 500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예수의 하느님과 거의 닮은 특성을 알 수 있다. 이 책은 묵자의 하느님에서 예수의 하느님 원형을 찾을 수 있다는 발칙함(?)과 당시 현실의 개신교를 비판하는 내용들 때문에 보수 개신교계의 강한 반발에 부딪혀 1년 만에 절판되었다고 한다. 2009년에 재출간 되었다고 하는데 관심 있는 분은 찾아 읽어볼만한 책이다.
이번에 읽은 책 <묵공 墨功>은 몇년전 유덕화와 안성기가 주인공으로 나왔던 한중일 합작영화 <묵공>의 원전이며, 일본에서는 만화로도 나와 꽤 인기가 있었던 모양이다. 묵가의 평등, 평화, 박애사상에 웬 전쟁? 이게 이 책의 핵심이다. 묵가의 사상은 약육강식의 춘추전국 시대에 약자를 보호한다는 개념을 국가 수준으로 적용한다. 그러다보니 힘 약한 나라의 편에 서서 철저히 성을 지키는 방어전쟁에 헌신적으로 뛰어들어 돕게 된다. 바둑에서 쓰이는 '묵수(墨守)'라는 표현이 여기에서 나온거라 한다. 묵가의 견고한 방어를 나타내는 '묵수'를 역으로 '묵공'이라 명명한 데에는 "보다 공격적인 지략을 사용하여 적극적으로 수비를 하는 것을 의미"할 수 도 있으나, 이는 '공격이 최선의 수비'라거나 '수비가 최선의 공격'이라는 역설적 표현으로 이해하면 되지 않을까? 난 그렇게 생각되어진다. 마치 용병처럼 전쟁에 참여하면서도 '비공(非攻)'과 '겸애'를 주장하고 있으니 묘한 일이긴 하나, 너무 어렵게 의미를 부여한다는 것은 머리 아픈 일이다.
기원전 5세기 중국 전국시대. 특이한 비공非攻(침략하지 아니함) 철학을 설파하고, 바야흐로 다른 나라로부터 침략당하는 나라들을 구원하며 그 성을 난공불락의 성으로 만들어내는 수수께끼에 휩싸인 묵자 교단. 그 교단의 뛰어난 인재 혁리가 지방의 한 소국을 방어하기 위해 유일하게 홀로 양성으로 파견된다. 다가오는 적군인 조나라 군대는 2만이 넘지만 양성의 군사는 수천 명에 지나지 않고, 우유부단한 성주는 색욕에 빠져 있으며 성 안의 수비 상황도 말할 수 없을 만큼 흐트러져 있다. 묵가의 지휘자 혁리는 오직 혼자만의 힘으로 이 성을 수호하고 백성들의 목숨을 지켜낼 수 있을까.(표지 뒷부분 줄거리)
주인공 혁리는 충실히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여 2만 대군을 막아내지만, 소설은 그의 헌신적 열정을 완성으로 그려내지 않는다. 인간사에 언제나 변수로 존재하는 이상과 현실의 괴리를 결말로 보여준다. 혁리가 생각했던 묵자는 어떤 프레임일까? "묵자가 존중해야 하는 것은 ‘임任’이어야 한다. 임이란 임협(任俠)이다. 남자란 자기를 죽여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되어야 하는 법(32쪽)"이니 '임'은 자신을 희생하여 남을 이롭게 하는 것이며, 자신에게 어렵고 고통스러운 일을 함으로써 남의 어려움을 해결하는 것이 되겠다. 이런 혁리를 진정 힘들게 하는 것은 인간의 질투와 증오, 탐욕이다. 성주의 아들(이 부분은 영화와 원전의 결말이 많이 다르네...)이 그러하고 묵가를 이끄는 리더(전양자)의 생각도 그러하다. 이 '임'은 모습을 바꿔 후한말의 태평도(太平道)와 오두미도(五斗米道)등 민중운동이 되었다고 하고, 약한 자를 돕고 강한 자를 누르며, 자기를 버리고 타인을 위해 진력하며, 죽더라도 신념을 꺽지 않는다는 '임'의 정신은 <수호지>나 <삼국지>안에 계속 살아남아 민중의 사랑을 받았다(143~144쪽)고 한다. 어쨌거나 소설은 마치 영화를 보는 듯이 간결하면서도 상상력을 펼치게 한다.
놀랍다. 2500년전에 자기애를 넘어선 겸애의 사상, 피지배계층의 이익을 대변하는 사상이 있었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다. 이 책에서 오늘을 짚어볼 수 있는 귀절이 하나 있었는데, "민심의 화합이야말로 어떤 수성설비보다 중요한 것(112쪽)"을 지적한 것이 그것이다. 우리 사회는 지금 갈등의 시대를 살고 있는게 아닌가 한다. 몇몇 똑똑하고 있는 자들의 오만은 민심의 이반과 함께 사회 전반의 불신을 낳았다. 해외 명문대를 나온 정치인은 코미디보다 더 웃기는 소송을 제기하여 정치 혐오감과 함께 도덕불감증을 선사하고 있다. 다 그들이 잘난지라 무소불위의 힘에 굴복하는 백성만 보이기 때문이리라 (그를 살려낸 정치인들... 이들에게서 썩은 내가 나는 듯 하다는 말도 소송감일까?). 배타와 물신의 시대에 진정으로 약자의 편에 설 수 있는 임협은 없는걸까?
○ 천하의 크고 작은 모든 나라는 모두 하느님의 고을이다. 사람은 어린이나 어른이나 귀하거나 천하거나 모두 똑같은 하느님의 백성이다. (今天下 無小大國 皆天之邑也. 人無幼長貴賤 皆天之臣也)
○ 하느님은 의를 바라고 불의를 미워한다. 그래서 천하 백성을 이끌고 의로움을 힘쓰면 곧 하느님이 바라는 것을 하는 것이다. 우리가 하느님이 바라는 의를 행하면 하느님도 우리가 바라는 것을 해주신다.(天欲義而惡不義. 然則率天下之百姓 以從事於義 則我乃爲天之所欲也. 我爲天之所欲 天亦爲我所欲.) ○ 하느님이 사람을 평등하게 사랑하고 이롭게 해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느님은 사람을 두루 보전하고 두루 평등하게 먹여주기 때문이다.(奚以知天兼而愛之 兼而利之也. 以其兼而有之 兼而食之也.) ○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것은 평등주의요, 하느님의 뜻을 거역하는 것은 차별주의다. 평등주의 정치는 의로운 정치요, 차별주의 정치는 폭력정치다.(順天之意者兼也 反天之意者別也. 兼之爲道也義正 別之爲道也力正.) ○ 하느님의 뜻은 큰 나라가 작은 나라를 공격하고 큰 가문이 작은 가문을 어지럽히고 강자가 약자를 겁탈하고 다수가 소수를 폭압하고 지혜로운 자가 어리석은 자를 속이고 귀한 자가 천한 자를 업신여기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天之意 不欲大國之攻小國也 大家之亂小家也 强之暴寡 詐之謀愚 貴之傲賤 此天之所不欲也.) ○ 하느님은 사람들에게 힘을 가진 자는 서로 도와주고 도리를 가진 자는 서로 가르쳐 인도하고 재물을 가진 자는 서로 나누어 주기를 바란다.(欲人之有力相營 有道相敎 有財相分也.) 주제와 조금 빗나가는 느낌이 있지만... <예수와 묵자>에 기선생님이 정리한 글 인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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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애설(타인을 자신처럼 사랑하는)과 비공론(공격하지 않는)에 근거한 묵가의 이념을 현실적으로 보여주는 이야기다. 영화로 촬영되어 상당한 호응을 얻은 작품이다. 참으로 의미 있는 주제를 가지고, 무한한 상상력을 발휘해 이야기를 이끌어 나가고 있다. 묵가에 대한 박학한 지식을 바탕으로 해서 그들의 사상을 전하고, 그들의 활동상을 섬세하게 그려 당위성을 획득해 나가고 있다. 양성이라는 조그만 성에서 조나라의 대군을 맞아 싸워야 하는 일이 생겨난다. 그런 가운데 양성 성주의 요청으로 송나라에 본부를 두고 있는 묵가(전투 집단이기도 하다)에서 한 인물이 파견된다. 그의 이름은 혁리다. 그는 너덜거리는 옷을 입고 혼자 양성으로 간다. 양성에서는 대장군, 부장, 그리고 성주의 아들이 마중을 나와 그가 혼자 온 것에 대해 못마땅해 한다. 군사들이 있어야 싸움을 하지 않겠느냐는 당연한 생각이다. 성주의 아들은 처음부터 묵가에 대해서 호감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나 혁리는 개의치 않는다. 그는 성주를 만나게 해달라고 한다. 성주 양계와 만난 혁리는 성주에게 다짐을 둔다. 싸움에 관한 전권을 맡겨 줄 것을 요구한다. 그리고 그것이 관철되지 않으면 싸움을 할 수 없다고 제언한다. 성주는 싸움에 이길 수 있는가라고 묻는다. 그러나 혁리는 내 목숨을 걸고 성을 사수하겠다고만 한다. 즉 자신이 죽을 때까지 성을 사수하겠다는 말이다. 그 후 혁리는 군사 조직을 정비하고 군율을 엄하게 한다. 전쟁이 될 시기를 예측하고 모든 준비를 그날에 맞춰 해나간다. 전쟁 시기를 예측하기 위해선 그가 조나라 군대가 지나올 것에 첩보를 띄워 놓은 것 외에 자신이 양성으로 올 때 그 길을 걸어오기도 한다. 마침내 조나라 군이 조그만 시골 성인 양성으로 공격해 온다. 그들의 숫자는 성에서 방어를 하는 자들보다 훨씬 많다. 그리고 정예화 된 병사들이다. 그런데 양성을 지키는 군사들은 부녀자들까지 동원하여 창을 들게 하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조나라 장수 항엄중은 성을 가볍게 여기고 정면 공격을 한다. 그러다 많은 무기를 준비한 성의 방어에 패퇴한다. 그리고 성의 공격이 쉽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두 가지 방법으로 인내를 가지고 공격을 한다. 고림법(토산을 쌓아 성과 같은 높이에서 공격하는 수법)과 혈공법(땅을 뚫어 성 밑으로 들어가 공격하는 방법)이 그들이다. 그런데 혁리는 그것을 미리 알고 더 높이 망대를 쌓고, 또 적이 들어오는 땅을 미리 예측하여 반대로 뚫고 들어가 땅 속에서 지키는 방법으로 그들을 물리친다. 항엄중은 이 두 공격에서도 실패를 하고 낙담을 한다. 성안에서는 혁리가 논공행상을 분명히 한다. 그것으로 사기를 돋우고, 적과의 싸움에 정진할 수 있도록 배려를 해나간다. 그런 와중에 자신의 재산이 자꾸 축소되는 것을 보는 성주 양계는 분통이 터진다. 혁리에 대한 신임도 엷어져 가게 된다. 그러나 전쟁의 정황 속에서 어쩔 수가 없이 혁리에게 모든 것을 맡기지 않을 수가 없게 된다. 그것이 원인이 되어 스스로 분을 삭이지 못하는 상황까지 이른다. 또한 아들 양적은 처음부터 혁리에게 호의적이지 않다. 그의 첩이 군사로 내몰리게 된 것을 분하게 여겨 혁리를 증오한다. 그러는 중에 위나라가 조나라를 공격한다는 소식이 오고, 조군은 철수를 해야 할 상황에 이른다. 그런 가운데 항엄중은 마지막 공격을 계획한다. 그 마지막 공격을 감행하기 전, 포로가 된 성안의 사람들을 성으로 돌려보내게 되고, 그 중에 양적의 첩인 우희도 있다. 그런데 성 중에 들어온 우희를 논공행상에서 내통 혐의로 처결된다. 그 사실이 양적의 큰 분노를 일으키게 되고 마지막 싸움에서 화살로 혁리를 쏘아 죽이게 된다. 혁리가 죽자 성의 병사들은 무기력하게 되고, 조군은 쉽게 성을 점령하게 된다. 이 부분은 영화와 다른 내용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영화는 혁리가 살아 성을 떠나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함께 싸운 민중들도 살아남은 자는 다른 살 곳을 찾아 떠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이 책에서는 그런 내용들이 없다. 조군이 성을 점령함으로 내용이 마무리 된다. 전국시대, 겸애와 비공의 사상을 가진 전쟁 기술을 가진 집단, 그들을 묵가라 칭한다. 그들은 진나라를 통해서 다른 나라를 공격하게 하면서 그들을 도우고, 천하가 통일 되었을 때 진나라를 통해서 묵가의 사상을 펼쳐나가려는 계획을 세웠다고 한다. 그런데 적장 진이 천하를 통일한 연후엔 묵가가 세상에서 사라졌다고 한다. 그 사실은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다. 그들에 의해 그들의 사상이 널리 펼쳐지면서 이루어져 나가야할 진나라가 어찌 보면 묵가들의 무덤이 되었다는 말일 것이다. 전쟁 중에 묵가들은 그들의 전쟁 기술과 싸움 능력을 통해 묵수(묵가가 공격보다는 지킴을 중심으로 하는 비공의 사상을 가지고 있음을 말한다.)를 목적으로 한다고 한다. 그런데 이 글의 제목은 ‘묵공’이다. 지킴이 아니라 공격의 의미를 가지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묵가들이 싸움 기술을 단순히 지킴으로 활용한 것이 아니라 공격용으로 사용했음을 작가는 제목에서 말하고자 한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작가는 이 글을 통해서 묵가들의 삶을 재구성해 보았다고 말한다. 사실이 아니라 있음직한 일을 상상력으로 그려 보았다고 한다. 물론 마음에 다가오는 내용은 있었을 것이고, 그것이 이 글을 쓰게 된 동기가 되지 않았나 생각은 된다. 그렇게 세력이 강성했던 묵가가 어느 날 갑자기 역사 속에서 사라져 기록으로 전해 오지 못한 것은 유가, 도가 등과도 관련이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묵가는 유가와 대립되는 내용이 많은 학문이다. 신을 믿고, 장례를 할 때는 간소하게 하는 것 등이 유가와 많이 다르다. 그들이 유가를 비판한 내용에 ‘신도 믿지 않으면서 무슨 제사는 그리 거창하게 하는 지’라는 말이 있다. 이율배반적인 유가의 학문, 제도를 꼬집는 말이다. 이런 내용들이 유가가 사상적 근간으로 자리 잡기 시작하는 한나라부터 사라져간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할 수 있을 듯하다. 이렇게 사장되어 있던 묵가를 다시 한 번 드러내 보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는 소설이다. 한 시기를 배경으로 명멸해 간 사상을 그리고 있는 소설로 이 책은 많은 것을 생각해 보게 한다. 위정자들이 자신의 입장을 우선적으로 바라보는 오늘의 정치 현실에서 나라의 기본엔 항상 백성이 있어야 하고, 그들의 삶이 보장되도록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해보도록 한다. 또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의 긍정적인 관계에서는 <겸애>를 마음을 지닐 수 있도록 하고, 부정적인 관계일지라도 <비공>의 실천을 가질 수 있도록 요구한다. 이 생각은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도 의미심장한 생각과 실천행위가 될 것이라 여겨진다. 이기과 공격이 주가 되어 있는 오늘의 사회에서 조화와 관용이 함께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 가는 첩경이 될 요소들이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묵가에 대한 생각을 해볼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그들의 싸움기술적인 요소만 제거 되면 참으로 세상을 넉넉하게 만들어 나가는 사상이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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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전국(戰國)시대를 풍미했던 <묵가(墨家)>였단다. 그런데 전국시대를 마치자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단다. 전국칠웅(戰國七雄)이라 불렸던 연, 조, 제, 위, 한, 초 그리고 진 가운데 묵가를 이루던 일파는 가장 약했던 진을 도와 마침내 통일을 이루어냈고, 진나라의 왕은 자신을 일컬어 <시(始)황제>라 부르며 통일국가 건설의 위엄을 스스로 나타내었다. 그런 진시황제가 탄압했던 것은 유가(儒家)들이었지, 묵가들이 아니었는데 싹 사라졌단다. 책을 불사르고(분서), 유학자들을 생매장 했다(갱유)했다는 이야기는 있어도 묵가들을 따로 미워해서 죽였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는데도 그들은 진나라 이후에 점차 시들해지더니 뒤이은 한나라 때는 싹 사라지고 말았다.
사마천이 썼다는 <사기> '진시황본기'에 '갱유'라는 낱말이 보이지 않고, 이를 <김태권의 한(漢)나라 이야기1권>에서는 진시황이 죽인 지식인들(제자백가)은 '유생'이라기보다는 '방술사(불로장생을 연구하던 지식인들)'로 보아야 한다고 하였다. 또 사마천은 <사기>에 '공자'에 대한 이야기는 방대하게 서술하였으나 '묵자'에 대한 이야기는 매우 짤막하게 서술되었을 뿐이란다. 모든 면에서 '유가'와 대립적이런 '묵가'의 사상을 이토록 소홀히 다루었다는 점도 매우 이례적이라 할 수 있다. 이래저래 '묵가'는 수수께끼스런 존재이다.
어쨌든 '묵자'의 사상을 크게 둘로 간략하면, <겸애>와 <비공>이다. 겸애란 두루두루 사랑하라는 뜻으로 '유가'에서 말하는 <별애>와 대립각을 세운다. 이를 테면, 묵가는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고, 자식이 부모에게 효도하듯 다른 이도 사랑하라고 이야기했다면, 유가는 다른 이보다는 부모를 더 애뜻하게 여겨야 하며, 제 자식에게 더 각별히 사랑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이야기했다. 또 유가는 제 나라에 충성을 다해야 한다고 이야기했다면, 묵가는 제 나라에 충성을 다하듯 다른 나라도 똑같이 여겨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그러면서 어찌 '인의도덕'을 이야기하면서 어찌 <차별>을 둘 수 있느냐며, '묵자'는 '공자'가 말하는 <별애>가 모순이라 비판하고 <겸애>를 강조하였다.
그런 뜻으로 보면 <비공>은 간단하다. 절대 공격하지 않겠다는 이야기다. 조금이라도 제 욕심을 채울 수 있다면 함부로 공격해서 자기 것으로 만들었던 '전국시대'에 <비공>을 주장했다는 것이 그저 놀랍기만 하지만, 유가도 어질고 의롭지 못한 전쟁은 반대하였으니 그닥 새삼스러울 것은 못 된다. 그러나 '묵자'는 이에 대해서도 '공자'를 비판한다. 그럼 어질고 의로운 명분이 서는 전쟁은 해도 된다는 말이냐? 태평할 때 한 사람이라도 죽이면 벌을 받고 나쁜 이라고 일컫으면서 전쟁할 때에는 수천 수만의 목숨을 앗아가는 일을 저지른 이에게 영웅이라는 칭호를 얹는 것이 말이나 되냐면서 호되게 비난했단다. 그래서 절대 <비공>을 강조하였다.
그렇다면 적이 쳐들어왔는 때에는 그냥 죽어야 하느냐, 는 반문을 듣는 것은 당연지사. 이에 '묵자'는 방어를 위한 전쟁은 옳게 보았단다. 절대 매복, 기습과 같은 방법으로 공격해오는 적을 효과적으로 섬멸할 수 있는 선제공격은 절대 금하였으나 튼튼한 성을 쌓고, 해자와 함정을 파놓으며, 수많은 병사와 공성병기로 공격해오는 적을 투석기와 연노와 같은 '대량살상무기'로 효율적으로 적을 죽이는 전쟁은 허락했던 것이다. 한마디로 선빵은 허락치 않지만 적이 먼저 공격하려 했을 때 그보다 더 빨리 '크로스펀치'를 날려 적의 공격을 무력화시키는 것은 허락한 셈이다. 그로 인해 적이 상처를 입거나 치명상을 얻어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는 논리인데, 결국 완벽한 <비공>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것이라는 점을 스스로 인정한 셈이다.
얼핏 들으면 묵자의 사상은 <모순덩어리>에 <비현실적>이고 <인간의 본성>에 어긋나는 '궤변'으로 치부하는 것으로 밖에 들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살았던 시대는 밥 먹는 것보다 더 많이 전쟁을 일삼던 때인 만큼 어느 정도의 모순은 있을 수밖에 없다고 봐야 제대로 보일 것이다. 천한 신분으로 태어난 '묵자'가 전쟁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하려는 '기득권 세력들(왕, 공, 사대부 이상의 계급들)'의 전쟁놀음에 찬성했을리 만무하지 않은가.
그래서 '묵자'는 철저한 수비형 전쟁을 옹호하며 어떠한 공격에도 '난공불락'한 요새를 건설하고 '기득권 세력들'의 이익에 철저히 반하는 일을 벌이면 전쟁도 자연스레 멈출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보아야 타당할 게다. 한마디로 네 놈들이 내 것을 탐하여 쳐들어왔으나 결코 호락호락 내어주지 않을 방법과 계책을 세워놓았다. 난 철저히 약자들의 편에 서서 네 놈들의 야욕을 채워주지 않을 뿐만 아니라 최후에는 네 놈과 같이 죽는 방법을 써서라도 네 놈들에게 쌀 한 톨의 이익도 주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쳐들어올 생각일랑 아서라, 라는 논리가 아니었을까 싶다.
그러기 위해서 '묵자'는 그 당시로써는 <최고의 기술을 지닌 '직인(직공)'>이 되어야 했고, 실제로 그랬다. 당시 최고의 병법가의 공성법을 하나하나 예를 보여주며 막아내었고, 마침내 그 병법가는 모든 공격의 격파법을 보여준 '묵자'를 암살하려 하였으나 그마저도 미리 계책을 간파하고 막아내었다는 일화는 '묵자'가 얼마다 뛰어난 <방어기술>을 지녔는지 일깨워주는 좋은 예다. 그리하여 '묵자'는 '묵수(墨守)'라 일컫게 되었단다. 그리고 실제로 '묵자'의 제자들이 수비하는 성을 함락시키기란 정말 어려운 일이었단다. 이 책에는 바로 그런 '묵수'의 수비방법이 어떠했는지를 잘 보여주는 한 편의 소설이다. 허구적인 소설의 형식을 띨 수밖에 없는 까닭은 그만큼 '묵가'의 기록이 별반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책 제목이 <묵공(墨攻)>이다. 이를 두고 추천하는 이는 글쓴이가 반어적 표현을 썼다고 풀이하였다. '최선의 수비는 최고의 공격'이라는 말도 있듯이 묵가 집단이 아무리 철저히 방어한다고 해도 모든 이를 다 살릴 수는 없는 법이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자신이 살기 위해 적을 죽이듯이 최고의 <묵수>는 <묵공>이 최선이라는 반어적 표현이 가능한 까닭이란다.
뭔가 알듯 말듯하다. 모든 이를 두루 사랑하라는 말에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기꺼이 자신을 희생한 그리스도의 삶을 닮은 듯도 하고, 적의 공격을 완전무결하게 무력화시키는 모습에서는 제갈공명의 신묘한 계책과 무엇이든 뚝딱 만들어냈던 맥가이버가 떠오르기도 하다. 어디 그뿐인가. 물밀듯이 쳐들어오는 적을 무찌르기 위해 아군에게 호령하는 모습을 통해서는 늠름한 장군을 연상시키고, 치밀한 계략으로 기득권 세력을 일거에 몰락시켜 정권을 차지하는 모습에서는 노련한 정치가를 떠올리게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백성들의 마음, 즉 민심을 단박에 제 것으로 만들어 제 뜻대로 일사분란하게 통제하는 모습을 통해서는 혁명가, 또는 사이비교주를 떠올리게 한다.
사이비교주라 일컬은 까닭은 진실과는 다른 사실, 이를 테면 우리 편이지만 '살인죄'를 저질러 사형에 처할 수밖에 없는 이를 성밖에서 처리하고 얼굴을 짓이겨놓고 적들을 정탐하다가 들켜 이 모양으로 만들었다, 적들은 그야말로 잔인무도한 놈들이다, 라는 '괴담'을 퍼뜨려 쳐들어오는 적에게 적개심을 불러 일으켜 전투에서 능력 이상의 힘을 발휘하게끔하게 만들었다. 사실을 교묘히 은폐하고 왜곡해서 제 뜻대로 일이 돌아가게 만드는 능수능란함에서 무서움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자신이 곧 진실요, 구원이다. 나를 믿고 따르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이런 말이 들리는 듯하다는 말이다.
어쨌든 이 책은 소설이다. 역사적 사실과 '묵자'에 대한 일반적인 사실을 바탕으로 쓴 소설이기에 마냥 '허구적'이라고 치부할 수는 없겠으나, 그렇다고 이 책에서 묘사한 <묵가 집단>의 모습과 주인공 '혁리'의 삶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 소설은 늘 '현실에서 있을 법한 일'을 그려내지만 이를 곧이 곧대로 믿어 의심치 않는 것도 어리석은 일이다. 그렇지만 약육강식의 시대에 '강자'의 편에 서기보다 '약자'의 편에 섰던 '묵가의 사상'이 요즘 주목받는 까닭을 곱씹어보면 씁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역사를 보더라도 '강자'가 희생하는 일은 드물고, 늘 '약자'가 희생양이 되어 '강자'들의 배를 불려주지 않았던가 말이다. 이대로 영원히 '약자'는 '강자'들의 먹잇감이 될 수밖에 없을까? '약자'와 '강자'가 함께 어울려 서로 존중하며 살 수는 없을까?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는대 강자들은 정녕 지렁이의 처지와 그 아픔을 생각하지 못하는 걸까? 이런 생각을 하며 이 책을 덮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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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5세기, 춘추전국시대의 한 사상가의 정신과 뜻이 예수그리스도의 박애정신과 유사하다는 점을 발견하고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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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공의 달인이며 묵수를 실천하는 혁리는 묵가의 뛰어난 수행자이다. 천하를 주유하며 곤경에 처한 나라나 힘없는 조그만 성을 강대국의 공격으로부터 막아내어 백성들에게 이로움을 주는 것이 혁리를 비롯한 묵가 수행자들의 주된 임무이다. 위기에 처한 나라와 성의 요청이 있으면 언제든지, 어떠한 보상도 받지 않고 그 요청을 기꺼이 수락하고 목숨을 바쳐 일한다. 이들에게 정치적 판도는 무의미하다. 그저 약자를 위해 싸울 뿐이다. 조그만 성, 양성으로 들어온 혁리. 그의 임무는 강대한 조나라로부터 양성을 지켜내는 것이다. 항상 그렇지만 묵가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이들은 약자들이다. 제대로 가추어 놓은 것 하나 없는 나약하기 이를 데 없는 자들이다. 이들이 다스리는 백성들의 목숨은 오로지 묵가에게 달려있다. 묵가가 책임져야할 성은, 적의 공격은 임박하였느나 이에 대비한 준비는 물론이고 식량과 물자에 대한 관리가 전혀 안되어 오직 하늘만 바라보며 운명에 맡길 뿐인 처지다. 이러한 때 묵가의 수비 전문가가 투입된다. 그가 할 일은 성안에 있는 모든 인력과 식량과 물자를 전쟁 준비에 투입하고 잘 활용하여 마침내는 성을 지켜내고 백성들을 구해내는 것이다. 성안의 모든 인력을 잘 조직하여 적재적소에 배치하고 식량 배급을 철저히 통제하여 전쟁이 끝날 때까지 모든 이들이 버티어내게 하는 것이 묵가의 임무이다. 또한 물자를 총동원하여 적의 공격을 막는데 최대한 활용하는 것이 묵가의 전문 분야이며 할 일이다. 반면 양성을 단숨에 무너뜨릴 수 있으리라 생각한 조나라의 장수 항엄중은 의외의 강력한 수비에 고전을 면치 못한다. 당연히 묵가가 수비를 진두지휘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 부하들을 숱하게 잃고 나서 잡아들인 포로로부터 정보를 입수한 후에야 성안에 묵가가 있어 그가 수비를 총지휘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후 오랫동안의 숱한 공격에도 양성은 끄떡도 없다. 지칠 대로 지친 조나라는 본국으로부터의 명령으로 철군을 앞두고 마지막 공격을 시도한다. 그런데 그동안 잘 버티던 양성이 갑자기 무너졌다. 이유를 알지 못한 채 조나라는 양성을 점령하였다. 그동안 성안에서 동분서주하며 잠시도 쉬지않고 수비를 지휘하던 혁리가 성주의 아들에 의해 죽임을 당한 것이다. 숨을 거두면서 “교과서대로 되지 않는구나”하고 혁리는 말한다. 허탈한 죽음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소설적 상황이다. 묵가의 수비책은 내부의 공격에는 허점을 보일망정 외부의 공격에는 무너지지 않을 정도로 탄탄하다는 것을 반증하여 보여주기 위한 설정일 것이다. 따라서 매우 중요한 장면이기도 하며 수비 혹은 전쟁의 마침표를 찍는 장면이며 묵가 사상의 방점을 찍는 장면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춘추전국시대 묵적의 후계자들인 묵가는 피통치자 계층의 민생 문제에 관심을 두었다. 공자가 통치자 계층의 도덕성에 관심을 가진 것과는 반대였는데, 굶는 이에게 자신의 먹을 것을 주고 헐벗은 자에게 자신의 옷을 주며 지친 사람을 대신하여 노동을 하는 등 힘든 이들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이들이 바로 묵가들의 실천사상이었다. 또한 묵가에서는 번잡한 예절, 무용한 장례의식 혹는 화려하고 사치스런 음악활동 등을 배척하였는데, 이또한 음악을 사랑하고 예의식을 중요시한 유가 사상과 배치되는 부분이었다. 이렇게 묵가는 권력층이 아닌 피지배층 일반 백성들의 삶에 깊숙히 파고들어 그들과 함께 생활하며 서민들의 생활고를 해결하고자 한 실천적 사상이었다. 영화 '묵공'을 보면 약자의 편에 서서 싸우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수비도 공격의 한 방편으로 본다면 앞서 말한 것처럼 일반 백성들의 생활 속에 깊숙히 파고든 묵가의 실천사상은 대단한 공력을 지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권력층들은 묵가가 백성들을 선동하는 불온한 사상이라고 매도하기도 하여 유가 만큼 빛을 보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이 소설은 영화 '묵공'의 원작으로서 묵가 사상이 현실에 어떻게 파고 들었는지 소설적 요소와 나레이션 요소를 이용하여 흥미진진하게 풀어나가고 있다. 공격하는 자와 수비하는 자의 치열한 대립 상황을 실감나게 그렸고, 당시에 사용된 공성 무기와 이에 맞서는 수비 무기를 세밀하게 잘 묘사하여 전쟁의 현실감을 더 하였으며 묵가의 뛰어난 수비술을 한층 돋보이게 하였다. 묵가사상을 배경으로 한 짧지만 강한 이야기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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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케미 켄이치 님의 <묵공>입니다.
사케미 켄이치. 그리 익숙한 작가분은 아닙니다. <묵공> 이전에 국내에 소개된 작품도 없었고요,
<묵공>도 사실 국내엔 소설보다는 만화나 유덕화, 안성기, 최시원, 판빙빙이 출연한 영화가 2006년에 개봉하면서 알려졌습니다.
<묵공>은 묵가의 철학을 담고있는 일종의 동양 철학서이자 비록 가공의 역사이긴 하지만 묵가의 역사를 전투를 통해서
담고 있는 역사소설이라고도 할 수 있는 작품입니다.
묵가. 묵가하면 일단 제자백가 중의 한 학파. 이정도의 굉장히 빈약한 지식만 있었는데요.
사실 묵가의 주요 가르침은 겸애(兼愛)입니다. 겸애란 사람들이 격의없이 서로 사랑하고 서로 이롭게 하는 것으로,
하늘의 뜻도 바로 겸애에 있다고 주장한 학파입니다. 작품 속에도 등장하지만 동양 철학 중에서도 예수의 가르침과 가장 비슷하면이 있으며
제자백가 중에서도 도가와 더불어 가장 종교적인 면이 강한 학파였다고 합니다.
또 하나 새로운 사실은 춘추전국시대 민간에 두루 퍼져있던 것은 공자의 유학사상이 아닌 묵가와 도가였다는 사실입니다.
묵가는 겸애라는 가르침처럼 마지막 수단이 아니면 성을 공격하는 것에 대해 반대했습니다.
춘추전국시대라는 시대가 여러 조그만 나라들이 패자가 되고자 서로간 끊임없는 동맹과 배신, 전쟁을 거듭하던 시기였기에
굉장히 이색적인 학파였습니다. 묵자의 가르침을 이어받은 묵자들도 침략해 들어오는 적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도움을 청하면 나라의 구분없이 반드시 그 요청을 받아들였다고 하는데요.
<묵공>은 조나라의 대군이 침범해오자 도움을 요청한 조그만 성의 성주와 백성들을 구하고자 묵자인 주인공 혁리가 고군분투하는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더불어 묵가의 사상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묵가의 사상을 그려내려고만 했다는 조금은 따분한 철학서가 될 수도 있었겠지만
실제(?!) 묵가의 사상을 이어받은 묵자들의 전투 장면을 함께 그려내면서 이러한 부분을 많이 보완하였고
무엇보다도 묵가의 가르침이 실제 어떻게 행해였는지를 보여줌으로써 그 묵가의 철학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 것 같습니다.
<묵공>은 굉장히 얇은 분량의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묵가의 사상과 철학, 그리고 소설로써의 재미까지 두루 갖춘 작품이네요.
앞으로 사케미 켄이치라는 작가분도 주목해봐야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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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백가 중 묵가만큼 신비로운 사상가도 없을 것이다. 진시황의 천하통일 후 불현듯 자취를 감추어서 그 신비로움은 더 한 것 같다. 대체로 겸애사상가로 사랑을 전파하였다고 전해지고, 묵수라는 말이 있듯이 나라를 꿋꿋하게 지켜냈다는 견고한 수비를 하는 뜻으로 쓰여지지만 정작 책의 제목인 묵공이란 말은 조금 의야해보였다. 영화로도 개봉했다고 하는데 개인적으로 영화를 못 보아서 그런지 책의 내용이 조금 더 실감나보였다.
“묵자와 그의 교단은 전투 집단이기도 했다. 묵가교단의 우수하고 강력한 군단은 밤낮으로 전투와 전술 연마에 힘썼으며, 또 묵자는 우수한 기술자이기도 했다. 그는 튼튼한 수레비녀장을 만들 줄도 알았고, 고한 손으로 만든 솔개를 하루 종일 날리기도 할 정도로 솜씨 좋은 장인이었던 것이다. 묵자와 그의 제자는 수많은 병기를 고안하고 제작하여 실전에 사용함으로써 더욱 효과적인 병기로 개량해 나갔다. 묵자 교단은 군사 기술자의 집단이기도 했는데, 그것도 전국시대 최고의 수준이었다. 그러나 묵자는 스스로 침략하는 일은 절대 하지 않았다. 그저 지킬 뿐이었다. 묵자 교단이 정예병과 우수한 병기를 쓰는 것은 성읍을 방어할 때뿐이었다. (26면)”고 묘사된 묵자교단은 신비로움이 더했다.
그중 혁리라는 묵가인이 조나라의 황엄중의 2만 대군을 막기 위해 양성으로 혼자 파견되는 것으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혁리는 “싸움은 작업이오, 잘 만드는 자가 잘 지키는 법이오.” 라는 말과 함께 수많은 의심의 눈초리에도 불구하고 꿋꿋이 전쟁준비를 하고 군율을 세우고 멋지게 성을 지켜낸다. 결과적으로는 음모에 빠져 성을 내주게 되지만 혼자서 2만대군을 막아낸 그의 전술은 놀라웠다.
비교적 적은 분량이어서 많은 내용을 담고 있지는 않으나. 흔치 않은 묵가의 이야기여서 더욱 흥미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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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시대 인간의 이기심과 욕망이 어울어져 살육이 넘쳐나던 시대에 묵자라는 사상이 존재했다는것에 신기하기도하고 호기심이 발동한다.
묵자의 사상가들은 '다른 사람의 몸 보기를 자기 몸같이 하고, 다른 사람의 집 보기를 자기 집같이 하고, 다른 나라 보기를 자기 나라같이 하는' 것 즉 천하의 사람이 서로 사랑하는 것이 사람들에게 요구 되고, 이것이 하늘의 뜻이라고 주장했다고한다.
소설속의 주인공 혁리라는 사람을 통해 투영되는 상상속의 묵자의 삶은 자신의 재능을 자신의 부귀를 위해 쓰지않고 남을위해 헌신하는 삶으로 보여주고 있다.
특히, 대부분 역사소설속에서는 볼 수 없었던 공성전의 세세한 부분을 묘사하는 부분은 눈을 뗄 수 없이 책속으로 빠져들게 한다. 실존자료가 미비한 묵자사상을 몇개의 단어를 통해 상상하여 광범위하게 나열하지 않고구체적인 1개의 전투를 1권에 투자하여 여태껏 읽지 못했던 또다른 재미를 선사하고 있다. 강력추천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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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자가 존중해야 하는 것은 '임任`이어야 한다. '임'은 자신을 희생하여 남을 이롭게 하는 것이며, 스스로에게 어렵고 고통스러운 일을 함으로써 남의 어려움을 해결해주는 것이다. 임이란 다름 아닌 임협任俠이다. 남자라면 자기를 죽여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되어야 하는 법이다. -서문 중에서- '묵공'은 묵자의 사상을 이어 받은 한 남자 혁리의 이야기를 그린 장편소설이다. 작가는 전국시대를 배경으로 성을 지키러 온 한 남자를 짧고 굵게 그리고 군더더기 없는 이야기와 표현을 써내려간다. 대의를 위해서라면 어떤 것에도 굴복하지 않고 자신의 모든 능력을 짜내 싸우는 혁리의 이야기는 꽤 인상적이다. 이 작품이 동명의 영화와 만화의 원작이라고는 하지만, 이 책 한 권을 읽는 시간이 훨씬 더 인상적일 것이라고 자신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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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은 우리와 너무 많은 이해 관계가 얽혀 있어 순수하게 좋아하긴 힘든 나라이지만, 중국의 역사 속에는 매력적인 소재들이 많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그 중 춘추 전국 시대는 끊임없이 격동하던 정세만큼이나 많은 이야깃거리를 내포하고 있다. 이 책 [묵공]은 그 춘추 전국 시대의 다양한 제자백가 사상 중 묵가 사상에 대한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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