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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보현의 「데리다 입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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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사상사에 크나큰 족적을 남긴 한 인물에 대해서 고작 ‘입문서’를 통해 알 수 있다고 믿는 것처럼 오만한 태도도 없다. 아무리 심혈을 기울인다고 하더라도 번역은 오역을 낳고, 압축은 참 의미를 뭉개기 마련이다. 맥락에서 괴리된 진리는 레이저프린터로 인쇄한 잭슨 폴락과 같다. 그렇기에 그 어떤 고난이 예상되더라도, 쉽게 풀어 쓴 입문서 보다는 가급적 해당 사상가의 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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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사상사에 크나큰 족적을 남긴 한 인물에 대해서 고작 ‘입문서’를 통해 알 수 있다고 믿는 것처럼 오만한 태도도 없다. 아무리 심혈을 기울인다고 하더라도 번역은 오역을 낳고, 압축은 참 의미를 뭉개기 마련이다. 맥락에서 괴리된 진리는 레이저프린터로 인쇄한 잭슨 폴락과 같다. 그렇기에 그 어떤 고난이 예상되더라도, 쉽게 풀어 쓴 입문서 보다는 가급적 해당 사상가의 원문 전체를 번역한 책을 읽으려 했다. 그러나 미셸 푸코와 장 보드리야르는 나를 무참히 좌절시켰고, 나의 자존감을 바닥까지 끌어내렸다. 그래서 현실과 타협한 결과 중 하나가 김보현의 「데리다 입문」이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빈번하기 짝이 없는 ‘해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데리다라는 큰 산을 넘어야만 했다. 다양한 미술 분석의 틀 중에서도 어딘지 모르게 날 선 ‘해체’에 마음이 끌린 것이다. 내가 세상의 수 많은 관념들을 보며 품었던 의문들을 데리다의 해체가 해결해주거나 적어도 공감해 줄 수 있을 것으로 여겨졌다. 결과적으로 김보현의 「데리다 입문」은 좋은 선택이었다.


이 책은 저자의 문학적인 팬레터로 시작한다. 동시대 한국이라는 시공간의 맥락에서 왜 우리가 데리다를 논해야 하는지, 저자는 왜 데리다에게 관심을 갖게 되었는지를 감정적인 어조로 설명한다. 이 과정에서 저자가 글 맛을 살리기 위해 부던히 노력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진다. 또한 굳이 일반적인 학술서적의 공식들을 답습하려는 노력을 기울이지는 않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저자가 데리다와의 인연을 설명하고 그에게 끌렸던 과정을 묘사하는 장면은 가히 팬레터라는 표현이 과하지 않다. 이러한 개성있는 도입은 이 책을 특별하게 만들며, 독자로 하여금 ‘그래, 나도 이 잘생긴 유대인 출신 학자의 사상이 궁금한데?’라는 호기심을 자극하는데 성공한다.


저자는 언어로 표현을 시도하는 것 조차 모욕이 될 정도로 생동하며 다차원적인 데리다의 ‘해체’와 ‘차연’에 대해 다각도로 풀어서 반복적으로 설명한다. 그와 동시에 그에 상응하는 노력을 기울여 데리다에 대한 세간의 오해와 오역들을 바로 잡는다. 그래서「데리다 입문」이라는 제목의 대안을 모색한다면, 아마도 「데리다 변호」가 채택될 것 같다.


책은 데리다에 대한 관심의 필요성을 일깨우며, 데리다에게 영향을 미친 사상가들을 살펴보고(절대 계보학적인 추적은 아니다), 핵심 개념인 차연과 해체의 복잡성을 설명한다. 끝으로 데리다의 글쓰기 전략의 특성과 미학적/실용적 가치를 논한 뒤, 「맑스의 유령들」에서 나타난 데리다 해체의 실질적 양상을 조망한다. 이러한 구성은 입문서로서 기본에 충실하면서도, 모호할 수 밖에 없는 데리다의 핵심 개념들을 반복적으로 일깨워주며, 적용의 실례로까지 나아갈 수 있는 가이드가 되어 주기에 부족함이 없다.


데리다의 해체란 무엇인가? 이 책의 300~301페이지가 가장 간결히 드러내 주고 있는 듯 하다.


데리다 해체적 사유는 미래에 도래할(arrivant) 타자를 위해 작금의 사태를 철저하게 조사하는 문제제기이다. 동시에 문제제기는 데리다 자신이, 혹은 우리가 기다리는 도래할 타자를 방어(problema)하기 위한 것이다. 이 말은 ‘차이(언어)’의 대폭력을 ‘차연(언어)’의 미소한 폭력으로 막는 데리다 자신의 해체 전략을 함축한다. 그러나 문제제기와 방어는 여전히 유령성(글)의 딱딱한 갑옥(비고유성/헛것)으로, 즉 ‘차연(비고유성/유령성/언어)’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유성을 감추는 ‘면구와 투구의 효과’에 데리다의 해체적 사유가 개입되면, 유령의 허구성이 드러나는 동시에, ‘도래할 타자’를 위한 해체적 사유를 방어할 수 있다. (…) 데리다의 문제제기는 기존에 나 있는 ‘구멍(모순, 불의, 아포리아)’에 다시 ‘구멍(해체)’을 냄으로써, 보다 나은 사유(체제와 현실)를 유도하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이 구멍(trou) 없이는 아무것도 발견(trouver)할 수 없음을 데리다는 이미 초기부터 여러번 강조한 바 있다.


– 김보현(2011), 「데리다 입문」, pp. 300~301.


데리다의 빙글빙글 회전하는 그 어떤 말들보다도, 견고한 진리에 문제제기 하는 태도가 마음에 든다. 모두가 절대적인 것으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던 신, 서구, 남성, 이성, 태양, 존재 등과 같은 모든 관념을 부당한 이원구조와 허구로 간주하고 해체의 칼날을 들이대 구멍을 남길 수 있었던 전복성이 매력적이다. 모든 것을 의심할 수 있었지만, 정작 자신이 딛고 선 견고한 대지만은 의심할 수 없었던 인류에게 그 대지마저 의심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기에 경탄할 수 밖에 없으며, 치밀한 해체를 위해 그보다 더 치밀한 작가적 읽기(a writerly reading)를 토대로 실험적 쓰기를 시도하여 문학적 경지에 까지 올랐다는 점에서 탄복 할 만하다.


이 책은 좋은 입문서이지만 너무나 옹호 일변도라는 점에서는 한편으로 그 편향성이 우려되기도 한다. 물론 내가 아직 작가의 논리에 토를 달 정도의 지식이 전혀 없으므로 현재로서는 그냥 우려만 할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데리다가 앞선 철학의 대부들과 이중적인 태도를 취했듯, 독자들도 이 책의 가르침에 대해서 이중적인 태도를 취할 필요가 있음은 명백하다. 그것이 데리다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태도일 것이다.

YES마니아 : 플래티넘 s*****s 2017.10.31. 신고 공감 5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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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리다 앓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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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데리다에 대한 애정을 숨기지 않는다. 누군가를 좋아하면 그 사람이 오해 받는 것이 싫은 건 당연하다. 저자는 오해 받는 데리다를 적극 변호한다. 그래서 저자는 서문에서 자신 있게 이 책은 ‘있는 그대로의 데리다’ 를 소개하며, ‘공평한 데리다 읽기’ 라고 선언한다.   나는 이 책이 데리다에 대한 오해를 해소하지 못했다거나, 불공평한 데리다 소개라고 말하고 싶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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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데리다에 대한 애정을 숨기지 않는다. 누군가를 좋아하면 그 사람이 오해 받는 것이 싫은 건 당연하다. 저자는 오해 받는 데리다를 적극 변호한다. 그래서 저자는 서문에서 자신 있게 이 책은 ‘있는 그대로의 데리다’ 를 소개하며, ‘공평한 데리다 읽기’ 라고 선언한다.

 

나는 이 책이 데리다에 대한 오해를 해소하지 못했다거나, 불공평한 데리다 소개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문제는 여기에 있다. ‘있는 그대로의 데리다’ 와 ‘공평한 데리다 읽기’

 

어떤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 수 있다는 주장, 왜곡 없이 텍스트의 의미를 읽어낼 수 있다는 주장. 나는 여기서 현상학과 해석학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후설, 하이데거, 가다머로 이어지는 현상학과 해석학은 데리다의 주적 아니었나? 데리다를 설명하기 위해 적의 전략과 무기를 이용하겠다는 것인가?

 

이 전략과 무기는 무엇인가? 바로 이원구조와 변증법이다. 저자는 데리다의 사유가 이원구조와 변증법을 극복한다고 주장하지만 정작 저자 자신이 이원구조 속에 함몰되어 있다. 마치 ‘있는 그대로의 데리다’ 가 정말 있는 것처럼 자신은 ‘참 데리다’ 를 설명하는 사람이고, 다른 학자들은 ‘거짓 데리다’ 를 이야기하고 있다는 생각. 이것이 이원구조이지 무엇이겠는가?

 

1장에 저자와 데리다가 만나 나눈 대화가 나오는데 개인적으로 매우 흥미로운 부분이 있다. 저자는 데리다가 숫자 4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기 때문에 데리다의 저서 4권을 번역하겠다는 의지를 데리다에게 밝힌다. 그러자 데리다는 요즘에는 7에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자 저자는 당황해서 이유를 묻는다. 데리다는 “그냥 난 늘 숫자학에 관심이 많아서” 라고 대답한다. 저자는 자세하고 구체적인 설명을 기대하지만 데리다는 더 이상 이 주제를 언급하지 않는다.

 

이 사소해 보이는 대화 속에 바로 이원구조가 들어있다. 저자는 ‘참 데리다’ 는 ‘숫자 4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는 데리다’ 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숫자 7이 들어오면서 저자가 만들어 낸 동일한 데리다 형상에 금이 갔다. 저자에게는 ‘숫자 7에 의미를 부여하는 데리다’ 는 ‘거짓 데리다’ 였던 것이다. 여기에 당황한 저자는 논리적인 설명을 요구하지만 데리다는 “그냥” 이라고 답한다.

 

동일성, 고유성, 전체성, 통일성, 총체성, 불변성, 이런 개념들과 사유야 말로 데리다가 극복해야 했던 대상들 아니었는가? 그렇다면 데리다와 데리다의 텍스트도 역시 다양한 관점과 해석에 열려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저자의 데리다 해석만이 ‘참 데리다’ 의 모습이고, 다른 사람들의 해석은 ‘거짓 데리다’ 라고 주장하는 건 어떤 이유 때문일까?

 

애정의 대상을 나만이 가장 잘 이해하고 있다는 환상 때문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