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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해 우리 학교에 신규 선생님 다섯 분이 발령 받아 왔다. 12학급에 신규 교사 5명은 상당이 높은 비율에 속한다. 신규 선생님 면면을 보면 놀라운 사실이 있다. 춘천, 서울, 전주, 인천, 진주교대 등 전국 각지에서 이곳 삼척까지 왔다. 익숙한 곳을 떠나 낯선 곳에 오다보니 숙소 잡을 걱정이 큰가 보다. 새학기를 준비하는 사흘동안 거의 모두 원룸이든 투룸이든 보증금에 월세든 전세든 뚝딱 숙소를 정했다고 한다. 신속한 결정에 또 놀랐다. 만약 나라면 어리벙벙해서 누군가에게 부탁을 했을터인데 요즘 젊은 사람들은 쉽게 정보를 찾아내고 정확하게 결정을 내린다. 그러면에서는 나이 오십줄에 들어선 나보다도 지혜롭고 어른스럽다.
후아유? 아마도 신규 선생님들이 가장 많이 들었거나 눈짓으로 무언의 질문을 받았던 것 중에 하나가 이 질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신규 선생님들이라 딸랑 교육지원청으로부터 받은 정보는 핸드폰 번호가 전부였다. 발령이 터졌을 당시 출장이었던 나를 대신해서 교장님께서 직접 손수 한 명 한 명 전화를 걸어 친절하게 다음 주에 있을 일정에 대해 안내해 주었을뿐만 아니라 각각의 특징과 신상을 대충 파악해서 나에게 알려주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궁금한 게 너무 많았다. 당장 어떤 학년을 맡겨야 할 지, 무슨 역할을 맡겨야 할 지 고민이 되었다. 첫 대면하는 당일 날 나뿐만 아니라 기존에 있던 교직원 모두 궁금하기는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렇다고 직접 꼬치꼬치 물어보는 것도 실례인지라 차차 알아가면 되겠지라고 생각을 하면서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프로그램 중에 다행히 '자신을 소개하는 시간' 이 있어 이번에는 커다란 이미지 카드를 펼쳐 놓고 자신과 연관된 사진 2~3장을 골라 설명하게끔 했다. 물론 참석한 모든 교직원들에게. 그래도 가장 집중이 되었던 시간은 신규 선생님들이 나와서 직접 소개하는 순간이 아니었을까 싶다. 자연스럽게 자신이 잘 하는 것, 가정 환경, 취미와 기호 등이 술술 터져 나왔다. 5분 내외의 짧은 시간이었지만 표정과 말투, 소개하는 내용에서 꽤 많은 정보를 취득할 수 있었다.
신규 선생님들 입장에서는 모든 것이 생소하고 어색했었을 것 같다.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학생이었고 또래들과 함께 지냈던 시간이 많았는데 갑자기 교장선생님부터 시작해서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과 근무하게 될 학교에서 어색한 만남을 가지니 뭐라고 얘기는 못하더라도 긴장감과 함께 온 몸의 근육이 경직되지 않았을까 싶다. 자리가 바뀌면 아무리 경험이 많은 사람일지라도 어색해 지는 것은 당연한 이치인 것 같다. 사실 나도 작년에 이곳에 처음 와서 새로운 분들을 만나면서 무척 긴장했던 기억이 있다. 20년 이상 학교 현장에서 근무했는데도 불구하고 근무 장소가 바뀔 때는 뭔가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는 것 같은 기분이다. 그렇다면 신규 선생님들은 더 이상 말해서 무엇하랴. 사흘 간 진행된 새학기 준비는 그야말로 문화 충격이었을 것이다. 자신들이 만나게 될 학생들을 상상하며 학교에 놓인 환경과 실정에 맞게 교육과정을 준비하기 위한 사흘 간의 모임이 몸은 와 있으나 아마도 정신은 혼돈 속에 머물지 않았나 싶다.
신규 선생님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 다시 고민하게 된다. 작년에도 이런 경험을 해 봤고 제작년에도 비슷한 경험을 해 봤지만 매년마다 새롭다. 아니 작년 기억이 나지 않는다. 새로운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과거의 경험만으로만 충분치 않다. 나는 이미 내가 근무하고 있는 학교에 익숙해 진 사람이고 새로 부임 받아 온 신규 선생님들은 모든 것이 새로운 사람이다. 그들이 잘 적응할 수 있도록 단지 곁에서 지켜보는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친절하되 적당히 거리를 둘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과도한 친절은 거부감이 느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뭔가 벽에 부딪쳐 도움을 요청해 올 때 그만큼만 가까이 다가가야지 무턱대고 다가가면 독이 될 수 있다.
다른 별에서 살다가 온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면 편할 것 같다. 그들이 향유해온 문화와 내가 살아온 문화는 현격히 차이가 난다. 다른 문화에서 살아온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면 그들의 행동과 사고방식을 좀 더 유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나의 입장에서는 다 아는 내용일지라도 그들에게는 생소할 수 있으므로 안내를 할 때에는 최대한 자세하게 하는 것도 잊지 말아야겠다.
"상대는 내가 자란 문화에서 자연스럽게 여기는 모든 것이 익숙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면..."
<후아유>는 결혼 이주민이 된 한국 여성의 자서전적 이야기다. 본인이 이주민이 되어보니 다문화 가족에 대한 편견이 얼마나 자연스럽게 우리 삶 속에 뿌리내리고 있었는지 실감하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서로가 상대방의 입장에서 이해하기 위해서는 저자처럼 서로 자리를 바꾸어보는 삶의 계기가 있어야 하는 것 같다. 백날 존중과 배려를 한다고 입버릇처럼 이야기한들 실효성은 떨어진다. 신규 선생님들을 이해해야 한다고 스스로에게 다짐을 하더라도 금방 잊혀질게 뻔하다. 만약 내가 어느 날 갑자기 발령이 나서 타시도에 가게 되어 근무하게 된다면 분명 그분들의 심정을 즉각 공감하게 될 터인데.... 결혼 이주민 여성에 관한 이야기인데 책을 읽으며 신규 선생님들, 멀리서 전입해 오신 선생님 생각이 났다. 교감으로써 그분들과 어떻게 생활해야 할 지 고민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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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있다면, 시즌2에서 나는 좀 덜 진지하고 덜 심각하면 좋겠다. 아직 오지 않은 일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지나간 일들을 곱씹지 말고, 실수할까 봐 겁내지 말고, 남 눈치 보지 말고, 좋아하는 것을 씩씩하게 하는 유쾌한 인물이면 좋겠다. 집단 속으로 숨지 말고, 스스로 홀로 서 있어도 불안하지 않은 개인이면 좋겠다. 주눅 들지 말고 세상 여러 사람들에게 말 건넬 수 있으면 좋겠다. 그래서 여러 결의 이야기가 나를 찾아오면 좋겠다. 내가 이야기로 살면 좋겠다. 그 이야기가 좋은 이야기라면 좋겠다. -p278~279 여기까지 읽고 났을 때 나는 책 제목을 다시 한 번 떠올렸던 거 같다. 후아유(Who are you). 미지의 인물에게 건넬 수 있는 이 질문이 책 제목이라는 걸 확인하자 그제서야 내가 누군지 오래도록 묻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나는 누굴까. 태어남은 결코 나의 선택이 아니었다. 세상에는 내가 선택할 수 없는 게 참으로 많았다. 대한민국이라는 나라, 나의 부모, 형제, 예민하고도 소심한 성격 등. 의지를 가지면 얼마든지 바꿀 수 있다고 했지만 그 말을 믿지 않게 된 지 꽤 오래다. 구슬땀을 쏟아도 결론이 허무함일 때가 잦다 보니 냉소적이 됐다. 그렇다면 지금 난 나를 포기했는가. 이 삶으로부터 빗겨날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수시로 하지만, 적어도 아직까지는 삶이 굴어가는 중이다. 내면에 거대한 상처가 나날이 곪고 있을지라도, 일단은 살아가고 있으며 앞으로도 살아가야 할 것이다. 비슷한 바람을 가진 저자의 삶은 나와는 사뭇 달랐다. 내게는 나를 궁금해할 계기랄 게 딱히 없었다. 쳇바퀴 돌 듯 다들 살아가는 반복적인 일상을 유독 나만 받아들이지 못하는 까닭을 알지 못해 내가 괴로워했던 것에 비한다면 저자의 삶은 축복이었다. 그는 영국 남자와 결혼해 가정을 이루었다. 한국과 영국을 오가며 생활했고, 현재는 영국에 정착했다. 한국에서 그는 모든 게 당연했다. 자신이 지닌 시선은 언제나 보편적이라는 강한 믿음을 지닌 채 살았다. 결혼 이후 두 아이를 낳으면서 그는 조금은 다른 처지에 놓였다. 이제는 곳곳에서 어렵잖게 들을 수 있는 단어, ‘다문화’가 그의 가정을 지칭하는 용어가 됐다. 나라는 다문화 가정을 지원한다며 애를 썼다. 적절한 지원 수준을 결정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던지 종종 설문조사에 응해야 했다. 문항은 길기도 했지만 묘한 뉘앙스를 품고 있었다. 응답을 하며 그는 자신이 하나의 관리 대상으로 여겨지고 있음을 느꼈다. 한국은 여러모로 문턱이 높았다. 단일민족 신화에 기댄 시간이 길어서일까. 유독 다름을 받아들임에 있어 그러했다. 일례로 학교에 입학하는 것만해도, 아이들이 특정한 학년에 입학할 자격을 지녔는지 끊임없이 검증했다. 복잡하기 짝이 없는 서류는 개개인의 몫으로 남았다. 아이가 교육을 받는 게 어찌 자격에 따라 이루어진단 말인가.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가 평가 끝에 주어지는 현실에 분개하는 이는 별로 없었다. 내 문제가 아닌 것이다. 아직 사회가 충분히 열리지 못한 탓이요, 어쩌면 이에 관심을 가지는 게 내 자신의 경쟁력을 낮추는 오지랖처럼 여겨지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영국의 모든 게 우월하다는 말은 옳지 않다. 적어도 저자가 경험한 영국 사회는 조금 덜 불편했던 것 같다. 아이는 정확히 제 나이에 해당하는 학년에 배치됐다. 영어를 모국어로 구사하지 않아 수업을 따라가는데 어려움을 겪는다면 얼마든지 도움을 얻을 수 있었다. 이는 피부색이, 인종이 다른 이들에게만 국한된 서비스가 결코 아니었다. 국적이 영국일지라도 타국에서 오래 거주해 영어를 어려워한다면 당연히 주어지는 권리였다. 시장이 중시되고, 극단주의가 퍼져나가는 분위기 속에서 그랬다. 잘 구축된 시스템은 생각보다 견고했다. 독서를 하며 흥미로운 이야기도 몇 접할 수 있었다. 최근 남북정상회담 이후 부쩍 친근감을 느끼게 된 북한이지만, 여전히 많은 이들에게 이 나라는 물리쳐야만 하는 적으로 여겨지고 있다. 대한민국에 존재하는 많은 탈북자들을 대하는 시선은 또 다르다. 목숨을 걸고 국경을 넘어온 그들의 삶은 한없이 비루하다. 우리는 한민족이므로 그들을 십시일반 도와주어야 한다. 현재의 외면이 훗날 통일을 방해하는 요인, 더 나아가 통일 이후 분열의 원인으로 작용할 수 있으므로 미리 손을 써야 한다는 식이다. 대한민국을 벗어나자 조금은 시선이 달라졌다. 집을 조금 수리해야 하는데 영국에서의 기다림은 기약이 없었다. 북한 이주자에게 도움을 요청했을 때 그는 마치 우리나라에서와 같은 경험을 할 수 있었다. 신속한 반응, 성실하기 짝이 없는 일처리. 언어에 묻어나는 억양의 차이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우리가 다름으로 인식하는 게 실은 극히 소소한 차이에 불과하다는 걸, 나와 다르다며 배척했던 많은 것들이 알고 보니 내 일부에 속할 수도 있다는 걸 이 이야기를 접하며 나는 깨달았다. 그렇다면 나는 누구인가. 한 때 우리나라에 거주하는 모든 이들은 민족 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타고 이 땅에 태어났다던데, 내가 인간의 형상을 하고 이 땅을 찾았을 땐 모두가 온몸으로 새겨 들어야 할 무언가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나를 붙들어 맬 견고한 잣대고 없어서일까. 한 자리에 머물면서도 마치 유랑하는 듯 불안하다. 단단한 땅을 딛고 선 두 발이 이따금 무너질 것만 같은 세상 위에 선 듯 흔들린다. 아무것도 묻지 않으면 이 위태로움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 지금 나에게 필요한 건 용기 같다. 내가 누군지를 살피는 용기, 어떠한 내가 되고픈지를 묻는 용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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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붙이고, 경계 짓고, 회피하는 다수로부터 나는 자유로운가? - 우리 안에 감춰진 시선에 관한 고백" 뒷 장에 쓰인 부제를 보고 이 책이 무슨 이야기를 할까 짐작하게 된다. 소수자에 대한 차별과 혐오를 고발하는 글? 자신도 모르게 저질러지는 잘못된 시선에 대한 반성. 그런 메시지를 읽어낼 수도 있지만, 이 책의 시선은 외부가 아닌 내부로 향하고 있다. 고발하거나 반성을 요구하기보다 저자가 살아온 삶을 잔잔한 이야기에 담겨 전해진다. 저자는 영국 남자인 토니와 국제결혼을 해서 다문화가정을 이루고 애린이와 린아 두 딸과 함께 지금은 영국에서 결혼이주 여성으로 살고 있다. 혹은 저자는 토니와 결혼을 해서 가정을 이루고 애린이 린아 두 딸과 함께 영국에서 살고 있다. 두 번째 문장도 충분할 텐데 우리는 보통 첫 번째 문장으로 누군가를 소개한다. 특별할 필요가 없는 사람과 사람의 만남을 특별하게 여기는 모습에서 우리가 소수자를 어떻게 인식하는가 돌아보게 된다. 이 책은 '제 이름이 아닌' 집단으로 불리는 소수자에 관한 책이다. 저자는 서울대학교 교육학과에서 공부한 후 다문화 청소년, 결혼이주 여성, 북한 출신 이주민 등 우리 사회의 소수자들을 돕는 활동을 했다. 또한 본인이 결혼한 지 얼마 안 되어 2년 동안 영국 생활을 했고 최근에 다시 영국에 가서 소수자로서 살고 있다. 조력자 혹은 관찰자로서의 경험과 스스로 소수자가 되어 지낸 경험을 통해 저자는 우리 사회가 '다름'을 어떻게 대하는지 또 '다르게' 여겨지는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다양한 이야기 속에 담아낸다. 한국에 거주하는 외국인 수는 계속 증가하고, 또한 '다문화'로 분류되는 국제결혼 가정의 수도 크게 증가했다. 어떤 다문화 가정의 경우 결혼을 통해 이주한 사람(주로 여성)과 그 자녀에 대한 도움이 필요하다. 이를 위한 노력이 계속되어 왔고 제도의 개선도 이루어졌다. 하지만 정작 본인은 이런 배려로 인해 더 힘들 수도 있다. 또한 다름에 대한 불친절로 상처받는 아이들도 많다. 이는 북한에서 내려온 탈북인에게도 적용된다. 언제나 도움을 받아야 하는 존재로 인식되는 데서 오는 불편함. 왠지 움츠려 들고 숨게 만드는 다른 사람의 시선(혹은 그런 시선이 존재한다는 의식)으로 인해 이들은 힘들어한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저자는 어떤 '집단'이 도움을 필요로 한다는 관점에서 도움을 필요로 하는 상황에 처한 '개인'으로의 전환이 필요하다 지적한다. 예를 들어 북에서 방금 내려온 이주민의 경우 사회적 배려가 필요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정착하고 나면 도움 없이 살 수 없는 것처럼 보는 주위의 시선이 오히려 나쁜 결과를 초래한다. 반면 탈북인이 남북 화해와 통일에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한다고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어깨에 지우는 짐도 부담이 된다. 다문화 가정이든 탈북인이든 집단으로서가 아니라 개인으로 대하기를 소수자들은 원하고 있다. 영국에서의 이주민으로서의 저자의 경험과 한국 내 탈북인의 경험을 비교한 네 편의 글은 이 책의 정점이다. 두 경험 사이에 차이는 없다. 우리 모두 언젠가는 소수자가 될 수 있고, 같은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그렇기에 존중이 필요하다. 어디에서 왔건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이전의 기억을 부정하라 요구할 수 없다. 탈북인 혹은 다문화라는 집단으로 불리지만 개개인 모두 각자의 이름이 있고 경험이 있다. "누구나 자기 이야기를 하고,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들을 수 있는 사회"가 된다면 소수자를 포함해 우리 모두 사이에 관계가 만들어진다고 저자는 말한다. 개인의 경험에서 출발하더라도 세상을 향한 더 큰 담론으로 나아갈 수 있다. 저자가 속했거나 오래 접한 다문화 가정과 탈북인을 넘어 모든 소수자에 대한 목소리를 낼 수도 있다. 하지만 저자는 추상적인 메시지를 제시하기보다 자신의 이야기에 머무르는 쪽을 택했다. 저자는 자신의 삶의 키워드가 '이야기'라 말한다. 이야기를 들려주고, 이야기를 들어주고, 이야기가 이야기를 만나 새로운 이야기가 태어날 때 설렘을 느낀다. 다문화 혹은 탈북인이라는 집단의 하나가 아닌 영국에서 만난 북한동포 K 씨 혹은 러시아에서 온 첼로 선생 A의 이야기를 만날 때 사람과 사람 간의 관계가 이루어지기 때문이리라. 이 책에서 나의 이야기도 발견했다. 한국에서 30년을 살고 미국에서 20년을 살았다. 이제는 완전히 적응이 되었을 법도 한데 아직도 한국 말이 편하고 한국 음식이 입에 맞는다. 2세로서 정체성에 대한 질문을 하던 큰 애는 동양인 친구가 하나도 없고, 역시 같은 과정을 거친 둘째는 친구의 대부분이 동양인이다. 오랜 시간이 지나고 어떻게 적응하더라도 소수자라는 의식이 없어지지 않기에, 이 책이 들려주는 이야기의 울림이 크다. 갈수록 다양해지고 글로벌 해지는 세상 속에서 우리 모두 다름을 대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이 책이 좋은 가이드가 되어줄 것이다. 특히 (기독교 서적은 아니지만) 이 책을 한국의 주류 개신교에 권하고 싶다. 한국인의 유별난 집단주의에 근본주의적 해석까지 더하여진 한국 교회만큼 폐쇄적인 곳이 없기 때문이다. 자신들이 그려놓은 좁디좁은 원에 들어오지 않는 모든 이들을 배척하는 사람들이 이 책을 통해 다름을 대하는 올바른 자세를 배웠으면 한다. A에 속하냐 B에 속하냐 나누려 할 때 이 둘을 아우르는 더 큰 C가 항상 있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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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가지 그림 이야기가 나온다. 키가 큰 아이, 중간인 아이, 작은 아이 세 명이 야구장 담장 밖에서 경기를 보려고 한다. 세 아이 모두 똑같은 크기의 나무 상자에 올라서 있다. 상자는 중간 키 아이에게 맞춰져 있다. 상자 없이도 담장 안을 볼 수 있었던 키 큰 아이는 상자 위에서 더 시원하게 경기를 보고, 중간 키 아이는 상자 위에서 더 시원하게 경기를 보게 되고, 키 작은 아이는 상자 위에 서도 담장 안을 볼 수 없다. 그래도 모두에게 똑같은 상자를 주었으니 이건 ‘평등’이다. 다음 그림은 키 큰 아이는 상자 없이 서 있고, 중간 키 아이는 상자 하나 위에, 키 작은 아이는 상자 두 개를 포갠 위에 서 있다. 키 큰 아이의 상자를 키 작은 아이에게 준 것이다. 그렇게 서 있으니 세 아이 키가 다 고만고만해서 셋 다 담장 안에서 하는 야구 경기를 볼 수 있게 되었다. ‘공평’이다. 세 번째 그림은 키가 제각각인 아이들이 모두 상자 없이도 경기를 구경할 수 있다. 야구장 안과 밖을 가르는 나무 담장을 없앴기 때문이다. 불공평한 원인을 제도적으로 바로잡았다.
우리 사회는 많은 담장이 있다. 안과 밖을 경계 짓는 담장의 힘은 세서 때로 개인을 압도한다. 개인은 드러나지 않고 담장의 안과 밖만 두드러지게 드러난다. 저자의 경우에는 그 담장이 ‘다문화’ ‘탈북’ ‘이주 여성’ 따위의 말로 다가온다. 그이의 이력이 작용했겠다.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 교육학과에서 공부했다. 우리나라에서 서울대학교를 나왔다는 것은 견고한 담장 안에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렇지만 영국 남자 토니와 결혼해서 애린이와 린아 두 딸을 낳아 가족을 이루었다. 스스로 담장 밖으로 나왔다. 그런 뒤 국가청소년위원회의 무지개청소년센터, 한국교육개발원 탈북청소년교육지원센터, 한양대학교 글로벌다문화연구원에서 다문화 청소년, 결혼이주 여성, 북한 출신 이주민들을 만나며, 이들의 자활을 돕는 활동가이자 연구자로 다양하고 재미있는 프로젝트를 함께 했다. 2016년에 영국으로 이주하면서 그동안 이주민을 위해서 했던 일들을 이주민으로서 다시 보게 되었다. 그러니 저자의 이야기가 곧 우리나라의 견고한 담장에 관한 이야기가 되었다.
“왜 한국 여자와 결혼하세요?” “나는 ‘한국’ 여자와 결혼하는 게 아니에요. 나는 ‘이’ 여자와 결혼하는 거예요.” (13쪽)
“다문화가 혼혈이라면, 혼혈이 아닌 일반 학생은 단문화 학생이라고 해야 되는 거 아니네요?” (80쪽)
나는 한 인간의 삶은 그가 어느 출신인지 상관없이 그 자체로 존중되어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104쪽)
결혼 이주 여성. 나는 이 말을 들으면 가슴속이 찌르르 저린다. 15년 전에 유모차를 밀면서 하염없이 길을 걷던 젊은 엄마가 생각나서 그렇다. 아직도 아픈 것을 보니 가만히 돌아보면서 ‘애쓴 거 다 안다’고 나를 위로해 줄 시간이 좀 더 필요한 것 같다. 문득 궁금해졌다. 한국으로 시집온 많은 여성들은 이 시간을 어떻게 보내는지. 곁에서 가만 손잡아 주며 애쓴다고 위로해 주는 사람들이 있기는 한 건지. (109쪽)
처음에는 제 이름이 아닌 것으로 불리는 사람들과 그 곁에 있는 이들을 위해 글을 쓴다고 생각했다. 그들을 한 무리로 보지 말고 한 사람 한 사람으로 대하자고 말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 주장 역시 어쩌면 주류 집단의 안락의자에 앉아 소수집단을 어떻게 봐주자고 말하는 마음 편한 훈수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저자는 자신의 이야기로 돌아섰다. “나를 다그치지 말고, 한국 사회를 야단치지 말고, 내 삶을 다시 돌아보기로 했다.” 자신의 삶뿐만 아니라 자신의 가족과 자신이 만난 사람들을 이야기한다. 그러고는 다시 자신에게로 눈을 돌려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 그이의 이야기에 공감할 수 있는 까닭은 거기에 있으리라. 담장을 이야기하면서 담장의 안과 밖에 있었던 그 자신의 진솔한 이야기. 그리하여 그이가 에필로그에서 밝힌 길동무는 새로운 자신에 대한 예고편이다. 전동 휠체어를 타는 아니타, 프랑스 출신이면서 레즈비언인 리사, 수녀였다가 쉰이 넘어서 공동체를 나온 수잔. 영국 성당의 작은 모임방에서 만난 세 명의 길동무와 함께하게 된 저자가 펼칠 ‘시즌2’ 이야기가 어떻게 나아갈지 궁금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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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을 한무리로 보지 말고 한 사람 한 사람으로 대하자고 말하다가 그주장 역시 어쩌면 내가 주류 집단이 안락의자에 앉아 소수 집단을 어떻게 봐주자고 말하는 마음 편한 훈수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프롤로그)
『후아유』는 자신이 다수에 속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면 반드시 곱씹어 봐야 할 정체성에 관한 고민을 담은 에세이다. 누군가의 이야기였다면 이렇게 흥미롭지 않았을 것이다. 어떤 삶이든 특별하지만 저자의 삶은 더욱 그렇다. 서울대학교에서 박사 학위까지 받았지만 영국 사람과 결혼하면서 영국에서 몇 년을 보냈던 결혼 이주 여성. 한국으로 돌아와 결혼 이주 여성과 다문화 청소년, 북한 출신 청소년들을 도왔던 연구자. 학교에서 스스로를 ‘다문화’라고 배우는 아이들을 키우는 엄마. 병을 앓고 있는 남편을 위해 영국에서의 삶을 다시 시작한 이주민. 이러한 그의 삶과 그가 만난 다양한 사람들의 스토리에는 담담하지만 치열한 성찰이 배어 있다.
저자는 2000년 9월에 앤서니 찰스 에드워드 뱅크스와 결혼을 하였다. 이름이 너무 길어서 토니라고 부른다. 토니는 대학 어학원에서 영어를 가르쳤고, 저자는 박사학위를 마치고 시간강사를 하고 있었는데, 학생들의 질문은 왜 한국여자와 결혼하느냐였다. 토니는 “나는 한국 여자와 결혼하는 게 아니에요. 나는 이 여자와 결혼하는 거예요.” 하니 학생들은 “아...” 감탄사를 길게 하였다.
아이가 자라서 자기가 어느 나라 사람이냐고 물어보면 “너는 유라시안이야”라고 대답을 준비하였다고 한다. 아시아인과 유럽인의 혼혈을 가리키는 말이지만 동양과 서양을 아우르는 가장 오래된 문명이자 지구에서 가장 넓은 대륙에 속한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한다.
저자는 외국 사람과 결혼하면서 아이들도 남편도 자신도 모두 이방인 같다는 생각을 하였던거 같다. 정부에서 다문화라고 하여 혜택도 많이 주고 있지만 아직도 다르게 보는 사람들의 시선들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는거 같다. 결혼 이주 여성. 나는 이 말을 들으면 가슴속이 찌르르 저린다. 15년 전에 유모차를 밀면서 하염없이 길을 걷던 젊은 엄마가 생각나서 그렇다. 아직도 아픈 것을 보니 가만히 돌아보면서 ‘애쓴거 다 안다’고 나를 위로해 줄 시간이 좀 더 필요한 것 같다. 문득 궁금해졌다. 한국으로 시집온 많은 여성들은 이 시간을 어떻게 보내는지. 곁에서 가만 손잡아 주며 애쓴다고 위로해 주는 사람들이 있기는 한 건지.p109
외국에 간 딸들에게 친구는 사귀었니 물으니 “여기 애들은 친절한데 친하지는 않아, 그래도 그걸 받아들이니까 마음은 편해.” 친하지 않아도 돼, 친절하기만 해도 고마운일이야. 라고 해준 저자의 마음이 짠했다.
신분증은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표시하는 것이다. 주민등록증이나 외국인등록증은 어떤 사람인지 표시하는 것이지만, 외국인은 주민이 아니다. 주민등록등본을 떼면 아이들하고 본인은 나와 있지만 외국인등록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나타나지 않고 에이리언 등록 카드를 발급 받는다.
저자는 영국으로 다시 이주하면서 자신이 낯선 사회에서 얼마나 고생했는지를 책에 쓰려다가 이렇게 마음을 다잡는다. “나를 다그치지 말고, 한국 사회를 야단치지 말고, 내 삶을 다시 돌아보기로 했다.” 한국 사회에서 자신이 이주민들을 위해 했던 일들을 이주민으로서 다시 보게 되었기 때문이다. 남이 아닌 나로 시작하는 이야기, 그의 글에서는 이런 힘이 느껴진다.
저자가 영국에 다시 정착하면서 만난 전동 휠체어를 타는 아니타, 프랑스 출신이면서 레즈비언인 리사, 수녀였다가 쉰이 넘어서 공동체를 나온 수잔이 등장한다. 그리고 한국 출신 결혼 이주 여성인 그는 다른 세 명을 ‘친구’라고 표현한다. 이들은 “Who are you?”라는 물음에서 사람들이 불러주는 내가 아닌 그 모든 포장지를 벗은 내가 누구인지를 스스로에게 묻는다.(에필로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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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처음 접하면서 눈에 들어 온 것은 지그시 두 눈을 감고 생각에 잠긴 한 여인이었다. 무엇을 생각하고 있을까? 담백하게 자신의 삶을 써내려간 글이었지만 읽는 중간중간 울컥울컥 감정이 목구멍까지 올라오는 경험을 하면서 작가인 이향규씨에게 말을 걸고 싶었다. 자신도 모르게 남으로부터 경계지어져 살아가는 많은 이주민들과 탈북민들의 삶을 그저 한 인간으로서 평범한 시선으로 바라봐야 한다는 그의 말이 나의 정신을 번쩍 들게 했다. 생김새와 국적, 언어라는 외피는 달라도 결국 사람으로서 느끼는 감정과 생각은 같다는 것을 오랫동안 잊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으며 잠시 부끄러워졌다. 지금도 어디선가 선의라는 이름으로 이주민이나 탈북민에게 경계짓고 있을 교육이나 정책들에 대해 앞으로 좀 더 민감해져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함께'라는 단어의 깊이를고민하게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