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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과 인간의 미래/제이콥 브로노우스키/김영
폴란드에서 태어나 영국으로 이주한 저자는, 2차 대전 중에는 연합국의 무기 개발 업무에 종사였고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자폭탄의 위력을 확인하기 위해서 일본을 방문하여 핵무기의 끔찍한 재앙의 현장을 목도한 후, 핵무기를 비롯한 일체의 무기 개발과 관련한 연구에서 손을 떼었다. 하지만, 그 연구를 계속하고 있는 동료들에 대해서는 결코 비난의 화살을 돌리지 않았다. 그것은 자신과 그들은 신념이 다를 뿐이었으며 그들 또한 그들의 신념에 충실하였을 뿐이라고 말한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원폭의 재앙을 보고 얻은 깊은 성찰은 과학의 책임과 도덕성에 대한 깊은 물음으로 평생을 보내게 하였다. 과학이라는 차가운 학문을 예술과 문학, 나아가서 윤리학과도 융합하기 위한 다양한 시도를 한다. 그야말로 차가운 학문에 인간적인 온기를 불어넣는데 온 정열을 쏟았다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이러한 저자의 신념을 담은 19편의 에세이와 소논문을 집약해 놓은 것이다. 선불교의 깨달음과도 같은 혁기적 인식전환을 한 후에 쓴 글들이라 비장하고 일관된 신념이 모든 글들에 결결이 묻어있다. 과학과 예술, 문학의 조화, 인간과 동물의 언어세계, 진화에 관한 생기론자들의 입장을 박박하는 두 편의 논문과 히로시마의 참상을 확인한 후 과학자들의 책무와 도덕성에 대한 모색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과학과 문학, 예술, 철학과의 융합을 모색하고 따뜻하고 인간미가 느껴지는 과학을 만들기 위한 그의 한결같은 굳은 신념은 그가 보았던 핵무기가 가져온 인간 살육의 현장에서 보았던 충격이 얼마나 큰 것이었던가를 짐작할 수 있었다.
출간된 지 40여년이 지난 책임에도 불구하고 저자의 “과학의 인간성”을 회복하고자 하는 주장의 무게는 핵무기로 인한 위협이 날로 증가하는 오늘날 오히려 더 커졌다. 그가 추구했던 “인간미가 넘치는 과학”과 도덕성에 대한 물음 역시 시간이 흘러도 변할 수 없는 큰 가치 중의 한가지일 것이다.
저자가 글을 썼던 1960년대로부터 반세기가 흘러, 그의 미래였던 오늘의 과학적 현실이 저자가 추구했던 이상과 얼마나 근접했는지에 대한 분석이 없어 아쉬웠다.
한 달 정도를 투자해서 겨우 일독하였을 만큼 힘들고 어려운 책이었지만 충분한 값어치가 있는 책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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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과 예술에는 많은 공통분모가 있다고 합니다. 대표적으로 말하는 공통분모는 '창의력'이라고 합니다. 이 책의 저자 브로노우스키는 과학을 '정해진 규칙을 찾아내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다른 의견을 제시합니다. 그의 의견은 과학도 창의적으로 사고해야 하며 법칙도 단순하고 정해진 것만을 선택하는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브로노우스키의 생각에 대해 많은 것을 배우게 됩니다. 다만, 그 전에 알아두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생소한 과학지식, 난해한 과학철학
책을 읽으면서 생각해 본 것이 있다면 '전체적으로 내용을 이해하기 어렵다'였습니다. 이 책은 특정 개념을 설명하는 개념서가 아니라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에세이라서 특정 개념들을 설명할 때 어떤 과학적인 사실은 독자가 이미 알고 있는 듯 비유를 들며 특정한 개념이 나오면 아주 쉬운 말로 표현하지 않습니다.
특히 제가 제일 어렵다고 느낀 부분은 '휴머니즘과 지식의 성장' 부분입니다. 이 부분은 과학철학과 포퍼에 관한 내용이 나오면서 과학이론이 가져야 할 중요한 점들을 서술한 부분입니다. 이 부분에서는 포퍼의 논문에 대한 간단한 설명이 나오기는 하지만 이해하는 것이 그렇게 쉽지많은 않습니다. 이 말은 이 책은 어려우니까 읽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책의 가치를 제대로 얻으려면 과학사의 상식이라든가 일부 철학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이해를 하고 들어가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잘 모르는 부분에 대한 지적
이 책의 또다른 특징이 있다면 우리가 잘 몰랐던 부분에 대하여 알려준다는 겁니다. 물리학과 생물학을 모두 공부했던 브로노우스키는 '자연의 논리'부분에서 물리학이 기존의 결정론적 세계관에서 사용하던 방식을 포기하고 입자세계를 정확히 서술하기 위해서 통계적인 방식을 사용한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아마 물리학을 깊게 공부하지는 않은 사람들은 물리학이 통계적인 방법을 사용한다는 것을 사용하는지에 대해 몰랐을지도 모릅니다. 무엇보다 저도 몰랐던 이 통계적인 방법은 원래 생물학에서 사용되고 있었다는 점을 브로노우스키는 지적합니다. 이런 식으로 우리가 몰랐던 새로운 사실도 이 책은 알려주고 있습니다.
기존 상식에 대한 새로운 생각, 이 책의 가장 중요한 점
마지막으로 이 책의 특징이자 이 책을 읽는 가장 중요한 점을 알려드리자면 기존의 모두가 가졌던 방법, 사고 등에 대해서 새로운 길을 제시했다는 겁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앞에서 말했던 예술과 과학의 관계성입니다. 과학과 예술의 관계성에 대해서는 솔직히 말하면 원래부터 깊은 관계가 있었다는 점은 알고 있었지만, 이 책의 원어 초판이 1977년도에 발간되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지금 가지고 있는 이 생각도 브로노우스키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는 법은 없을 것 같습니다.
책 자체의 내용은 상당히 인상적입니다. 스스로 과학에 대해 잘 모른다고 생각하거나 미래에 과학 관련된 직업을 꿈꾸는 분이시라면 이 책을 읽을 것을 권장합니다. 단! 책을 읽기 전 알아두어야 할 것들을 알아두는 것은 필수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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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자, 희곡작가, 생물학자이자 과학사학자 등 광범위하고 다양한 분야에 관심과 정열을 기울인 저자가 과학과 철학이 인간적이어야 할 뿐만 아니라 인도적이어야 한다는 그의 신념에 따라 쓰여 진 에세이입니다.
저자인 제이콥 브로노우스키는 “ 나의 꿈은 20세기를 위한 일관된 철학을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훌륭한 철학뿐만 아니라 훌륭한 과학조차 인간애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나는 자연에 대한 이해의 궁극적 목표는 인간성에 대한 이해이며 자연 속에서의 인간 조건에 대한 이해라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듯이 과학과 인문학을 통합한 소위 “자연 철학”을 연구해 왔다고 합니다.
분명 과학의 발전은 우리의 삶을 비약적으로 편하고 윤택하게 만들어 준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황우석 박사의 사건으로 대표되는 생명공학분야에서의 윤리적인 문제, 일본 대지진으로 말미암아 불거진 핵과 방사능에 관한 문제 등 인간적인 삶을 위협하는 것도 사실입니다. 과연 어디까지 과학의 접근을 이해하고 허락해야 할지는 어려운 문제인 것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점이 이미 40여 년전에 쓰여 졌지만 지금까지도 가치있게 읽히는 이유인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칼 포퍼의 <과학적 발견의 논리>라는 책을 보고 그에 대해서부터 이야기를 풀어간 “휴머니즘과 지식의 성장”이라는 장이 가장 인상 깊게 보았습니다. 1930년대의 정치, 철학적인 분위기로부터 시작하여 생물종의 진화처럼 오류를 제거하는 선택 과정에 의해 보다 높은 형태로 움직이는 유기적인 성장인 지식의 성장의 결론을 이끌어내는 과정이 당대의 학자들의 주장을 인용하고 반박하는 것이 마치 잘 짜여진 한편의 교향곡을 듣는 것 같았습니다.
과연 과학으로 만들어져 과학으로 움직이는 현대의 미래는 어떨까? 이에 대하여는 비관론이 많이 보입니다. 영화 <터미네이터>를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핵전쟁으로 인한 지구 멸망이나 바이러스 또는 지구 온난화 등으로 인한 인류 멸망의 시나리오 등 많은 비관적인 전망이 나오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미 반세기전에 저자가 고민하고 연구했듯이 과학에 인간적인 철학을 융합할 수만 있다면 "장밋빛 미래"가 우리 앞에 펼쳐져 있을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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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이 책의 내용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알아보자.
미래의식, 창조의 과정, 예술과 과학, 상상력의 세계, 자연의 논리, 실험의 논리, 정신의 논리, 휴머니즘과 지식의 성장, 인간의 언어와 동물의 언어, 생물학적 구조에 있어서의 언어, 어디로 갈 것인가, 생물 철학을 향하여, 복잡한 진화에서의 새로운 개념들, 풍요의 시대를 위하여, 인간의 가치, 과학의 가치, 허용 한계의 원칙, 과학 제도의 폐지, 인간의 실현...
중, 고등학교 때 소설과 에세이의 차이점에 대해 배운 적이 있을 것이다. 소설은 허구를 바탕으로 쓴 글이며, 에세이는 어느 정도 사실에 기반하여 '가볍게' 쓴 글이라는 것이다. 가볍게... 으음, 가볍게...
우선 이 책은 '과학' + '인간' + '미래'라는 3대 헤비급 주제를 바탕으로 제이콥 브로노우스키라는 저자가 쓴 과학에 대한 '가벼운 에세이(?)'이다. 에세이라는 건, 개인적인 생각을 쓴 글이기 때문에 이해가 되지 않을 때에는 내가 이 사람보다 식견이 모자라다... 라거나, 혹은 내 생각은 이 사람 생각과 다른가보다... 하고 넘어가면 된다고 생각한다.
과학... 이라는 건 소위 '정확성'을 추구하는 학문이라고 본다. 하지만 이 저자, 혹은 여타 과학자들의 생각으로는 과학이 발전하는 원동력을 '불확실성'이라고 보았다. 어떤 이론이 나름 '확실하다.'라는 믿음을 바탕으로 구축되면, 그 이론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견해들이 등장하고, 그 이론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과학의 발전이 불가피하다. 이 과정에서 과학자들이 가져야 할 태도를 책의 표현을 빌어 말하자면 다음과 같다. '모든 사람에게 귀 기울이고 누구에게도 침묵을 강요하지 않는 것, 올바른 사람들을 칭찬하고 격려하는 것.' 과학은 마치 자연에 대한 모든 것을 안다는 듯한 태도를 비치지만, 그 안에는 '우리는 아직 자연에 대해 알아야 할 것이 많고, 이를 위해서는 누군가의 의견 하나도 놓쳐서는 안 된다.'라는 태도가 당연하게 뿌리박혀 있는 것이다. (이를 '민주적'이라고 표현해도 괜찮겠다.) 물론 '왜 알아야 하지?'라는 태도를 보인다면, '자연의 경이로움을 발견하기 위하여'라는 호기심 충족의 목적을 말할 수 있지만 '자연을 모를 때에 생기는 위험 부담을 줄이기 위해서'라는 대비 차원의 목적을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짧은 내 식견과는 달리, 과학이라는 학문을 추구하기 위한 태도로 이 책의 저자는 '감탄'이라는 태도도 경계하는 듯 하다. '감탄'이라는 감정은 자신이 하지 못하는 것을 남이 해냈을 때 드러나는 것이므로, 생활의 구석구석에 심어져있는 과학을 마치 전문적인 사람들만이 다룰 수 있고 우리와는 거리가 먼 것으로 보일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닥치고 정치'에서 이를 표현하는 아주 좋은 글을 봤다. '재수없을 수 있다.')
인간이 다른 동물들에 비하여 어떤 점이 우월하여 '과학'이라는 학문을 구축해낸걸까? 과학이라는 학문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우리의 머리 속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날까? 왜 천문학과 철학, 수학, 과학을 병행하다가 현대에 와서는 다른 분야가 되었을까? '과학'이라는 학문은 여태까지 우리가 배워야 할 정도로 가치가 있는 학문일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이 책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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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출간된 버트런드 러셀의『과학의 미래』(2011)와 함께 읽었다. 그는 앞의 책 <과학적 번식>이란 장에서 이렇게 말했다.「아즈텍의 태양 숭배가 매년 수천의 사람들에게 고통스런 죽음을 요구했던 것처럼, 새로운 과학적인 종교 또한 그 나름대로 신성한 희생자들의 홀로코스트를 요구할 것이다. 세계는 점점 더 암울해지고, 점점 더 무서워질 것이다. 기괴하게 도착된 본능들이 처음에는 어두운 구석에서 도사리다가, 점차 고위층에 있는 사람들을 덮칠 것이다.」또한 브로노우스키는 책에서《인간을 묻는다》의 구절을 인용하여 기계에 관해 언급했는데, 움베르토 에코는 이 기계를 이렇게 조롱한 바 있다.「당신이 사용하고 있는 프로그램에 <개체 삽입> 기능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고 하자. 그러나 걱정할 게 없다. 도움말을 작동시키면 다음과 같은 대답이 나타난다. <문서에 개체를 삽입하는 기능입니다.>」(『세상의 바보들에게 웃으면서 화내는 방법』, 1999) 과학의 무결점해 보이는 도덕성과 그 도덕성을 지닌 과학 나름의 역사적 전개 과정 속에서 과학은 스스로의 내적 발전을 이룩했다. 하지만 이러한 욕구에는 전혀 다른 형태 또한 존재하며 서로 교차하는 집단 또한 다름에 틀림없다 ㅡ「애초에 과학은 세계와 사랑에 빠진 사람들에게서 비롯되었다.」(버트런드 러셀, 앞의 책) 이런 측면에서 보자면, 우리는 자신에게 실재적 본성에 관한 질문을 계속 해야만 하는가 하는 의구심이 남는다(브로노우스키는 책에서, 러셀이 출발하는 철학의 단위는 <인간>이라 했다). 브로노우스키는 1)인간으로서의 의무만이 사회를 결합시키고 2)그럼에도 사회가 사회 내 인간에게 허용해야 하는 인간의 개인으로서 행동할 수 있는 자유를 보장해야 하기 때문에 가치의 개념은 심오하다고 보았다. 그러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배울 수 있다면 앞서 언급한 방향으로 전개되는 사고를 좇아야 한다고 했다. 우리가 과학의 시대에 살고 있다고 하는 것은 부분적으로(만) 맞는 말이다. 과학의 짧은 역사에서 <과학>이란 명제는 지식 있는 이들의 대상이었고 보통 사람들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러나 지금은 최첨단의 시대이며 이것을 모두가 향유하고 있다. 앞으로는 이런 지식들을 얻기에는 인간 수명이 너무 짧다는 말이 나올는지도 모르겠다. 러셀(을 자꾸 인용해서 미안하지만)은 과학이 예술보다 사회적으로 좀 더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우리에게 <자연을 조작할 수 있는 힘을 제공>하기 때문이라 했다. 기술로서의 과학이 지니는 실용적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리라. 물론 이는 인간 사회를 불가피하게 만들기도 한다. <불은 탄다(태운다>, 혹은 <공중에 떠 있는 물체는 떨어진다>와 같은 명제는 일반화를 대표한다. 과학은 본질적으로 단순하지만 오직 소수의 사람들만이 연구한다. 어쨌든 과학은 외롭지만 살아남았고(!) 또한 살아남을 것이다, 인간과 함께 말이다. 헉슬리의『멋진 신세계』나 오웰의『1984』가 걸작이 된 것은 과학이 존재하기 때문이 아닌가. 이미 오래 전에 만들어진 이 책이 앞으로도 유효할 이유는 충분해 보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