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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사회" 이후 한병철 교수님 저작에 완전 반해서 한국에 번역 출간하고 있는 책을 구입, 소장, 읽으며 따라오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선뜻 구입하지 못하고 망설였던 이유는 '정원'이 소재이기 때문이다. 여느 현대 청년들처럼 나는 땅에서 멀리 있고 꽃을 알지 못하는 자다. 저자가 병환에 계신 아버지를 뵈러 한국에 들렀을 때 서울에는 땅이 없고 초록이 없다고 말하며 겨우 인왕산에 올라 꽃을 보는 상황이 나오는데 바로 그런 곳에 살고 있는 나이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딸'을 만나듯 정원에 머물며 다양한 꽃들을 돌보고 관찰하며 자세히 묘사하는 장면이 나올 때마다 약간 정신을 놓고 읽었음을 고백한다. 직접 만져보지 않고는 알기 어려운 세계다.
책은 아름답게도 곳곳에 식물도감 속 세밀화처럼 언급하고 있는 꽃 그림을 학명과 함께 보여주고 있다. 선물로 엽서도 한 장 넣어주었는데 나는 'Hydrangeaceae- 나무수국' 엽서를 받았다. 야생 범의귓과 꽃들은 바위에 자라곤 한다고 읽은 듯한데 잘 기억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사진을 찾아보니 화려하고 아름답다. 저자가 노발리스 같은 낭만주의자 시를 인용하며 '푸른 색'에 대해 길게 언급하고 있어서 인상 깊었다. 베르메르의 '진주귀고리를 한 소녀'를 소재로 한 동명의 영화에서 색을 만들어내는 장면을 이 책에서 묘사하기도 한다. 색채의 역사에서 파란색은 다른 색에 비해 역사가 짧으며 독특한 지위를 가지고 있다고 다른 책들에서 읽었다. 그 색이 불러 일으키는 독특한 정서는 성모 마리아를 연상 시키는 고귀하고 희귀한 역사에서 오는 것일 수도 있다. 나는 꽃을 알지 못하지만 푸른 색을 띤 아네모네를 묘사한 부분이 인상 깊었다. 시 속에서 묘사한 아네모네 모습에서 연약한 듯 보이지만 강인한 힘이 느껴졌다.
저자는 자신의 정원을 가꾸며 생각하고 느낀 단상들을 글로 써내려갔다. 책 뒷부분은 봄-여름-가을로 넘어가면서 정원이 어떻게 변화하는지 날짜 순으로 묘사하고 있지만, 인상 깊게도 책 앞부분에서 정원으로서는 마치 죽어 있는 듯 보일 수 있는 '겨울' 정원 모습을 의도적으로 자세히 그리고 있다. 저자는 특별히 겨울 정원을 사랑한다고 말한다. 거기서 생명의 가능성을 보기 때문이다. 고통 속에서 자라나는 생명을 보며 경이를 느낀다. 어렵게 피는 꽃에서 특별한 아름다움을 느낀다.
저자에게 정원은 타자를 만나는 곳이다. 식물들은 자기 시간과 의지와 힘을 가지고 피어나고 시든다. 제목에서부터 '땅'을 넣었으니 저자의 전작에서 자주 등장하던 하이데거가 여기에도 등장하리라는 예견을 책 읽기 전부터 할 수 있었다. 저자는 하이데거의 입을 빌어 인간(시공간적으로 유한, 물질적 존재)은 땅과 가까이 지내야 한다고 주장한다. 땅에서 자란 식물들이 보이는 아름다움과 숭고함이 인간을 구원한다.
독일어로 철학을 하는 저자는 어려서부터 가톨릭 신자였다고 한다. 어렸을 때 수녀님은 저자 남매에게 아름다운 꽃을 선물해주곤 했단다. 정원에 '아름다움의 구원'이 있다면 거기에서 우리는 필연적으로 신적인 것을 찾아낼 수 있을 테다. 진선미성이 연결되어 있음을 아래와 같은 부분에서 발견하며 공감했다. 어떤 철학 부류에서는 그러한 생각을 오래 전에 폐기했지만,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역사적으로 오랜 체험들을 통해 인간 집단 무의식에 근원적으로 자리 잡고 있는 그런 오랜 생각과 느낌이 있다. 자연을 깊이 아는 사람일 수록 신의 창조를 믿는다고 했다.
식물도감 같은 세밀화와 더불어 책은 내내 아름답다. 독일어와 시, 음악이 가진 아름다움을 다룬다. 최근 물리적 시간이 여유로워 기회 닿는 대로 클래식 공연에 가서 실제로 연주하는 모습을 보고 듣는데, 이 경험이 종교적 체험과 매우 유사하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영혼과 가장 가까운 감각이라는 귀로 비언어적 음악을 들으며 말로 표현할 수 없이 존재를 압도하는 '현현'을 경험한다. 음악을 들으며 영혼 이전에 물리적으로 눈물이 흐르거나 소름 돋는 그 기분에 몹시 공감했다.
석사 때 실러의 "미적 교육 편지"를 바탕으로 학위논문을 정리하려고 공부를 했기 때문에 번역하신 안인희 선생님 이름을 보며 혼자 반가워했다. 실러 당대 사상가들이 공유하고 있던 계몽주의적이면서도 낭만주의로 넘어가던 시기 특유 정서를 실러의 위 문장이 잘 함축하고 있다고 생각해서 가져와봤다. 저자가 '정원'이라는 소재를 통해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이기도 했을 테다. 투명한 디지털 시대에 현대인이 잃어버린 아름다움과 숭고함의 이상을 땅(과 식물)을 가까이하며 되찾기를 바라는 안타깝고 간절한 마음이 전해져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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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의 예찬 (Lob der Erde)》 : 정원으로의 여행 한병철 지음 | 안인희 옮김 | [김영사]
‘철학자-정원사의 신학, 행복한 경험의 시론’ : 땅-정원-꽃에 대한 사랑 고백
니체와 하이데거, 푸코와 베냐민을 이야기하고, 아름다움과 에로스에 대해, 신자유주의의 폐해와 인간의 소외의 문제, 고전과 현대문학을 넘나들며 우리가 사는 세계를 진단하던 재독철학자 한병철이 이번에는 정원사가 되었다. 언젠가 ‘매일 정원 일을 하기로’ 마음먹은 저자는 3년 동안 땅을 일구며 자신만의 비밀 정원을 가꾸어나갔다. 《땅의 예찬》은 저자가 정원을 가꾸면서 경험한 땅에 관한 명상이다. 철학, 미학, 문학을 이야기하던 철학자가 정원사로서 자신의 내밀한 생각을 고백한 기록이기도 하다. 나는 이 책을 땅-정원-꽃을 키워드로 하여 읽어보고자 했다.
땅: 구원의 관문
철학자에게 땅은 무엇인가? 그에게 땅이 예찬의 대상이 되는 이유는 땅이 ‘행복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그는 자신의 다른 저서에서 지적했던 신자유주의의 영향, 특히 디지털화를 다시 소환한다. ‘디지털 digital’은 ‘손가락’을 의미하는 ‘디기투스 digitus'에서 온 말(75)이다. 하나, 둘 셀 수 있는 것, 헤아리기에 기반한다. 그러므로 ‘디지털화’는 모든 대상을 정량화하여 ‘비교가능하게’ 만든다(29). 저자에 따르면 땅과 관련하여 고려할 때, ‘디지털화’는 ‘완전한 땅을 사라지게’(28) 하여 인간을 땅으로부터 분리시킨다. 그 결과 우리는 조상이 지니던 ‘땅에 대한 섬세한 감성을 잃고, 땅이 무엇인지 더는 알지 못하는’(31) 존재가 되어버렸다.
하지만 저자는 땅이야말로 인류가 디지털화에 저항하고 우리의 감각과 기억을 되돌려줄 수 있는 대상이라고 본다. 곧 철학자에게 땅은 ‘예술가, 놀이하는 여인, 유혹하는 여인이면서 감사의 감정을 일으키는 존재’(182)이기에, 그에게 땅은 ‘행복의 원천’이다. 여기에서 구원에 관해 저자가 인용한 하이데거의 한 마디는 의미심장하다. “구원이란 위험에서 구해낸다는 뜻만이 아니다. 무언가를 풀어주어 본래의 본질로 되돌린다는 뜻이다.”(32) 그러므로 정원사가 된 철학자에게 땅은 본래의 본질로 되돌아갈 수 있는 ‘구원의 관문’이 된다. 저자가 자신만의 정원을 가꾸며 한국에서 많은 식물의 씨앗을 가져와 심고 키운 일 역시 병든 아버지가 존재하는 고향, 자신의 본질에 되돌아가고자 하는 자연적인 행위일 것이다. 이렇게 철학자가 땅을 만나고, 땅과 연결되는 공간이 바로 정원이다.
정원: 사랑을 배우는 공간
정원사가 된 저자에게 정원이란 장소는 ‘감각성과 물질성이 넉넉한’ 공간(22)이다. 다양한 관목과 꽃을 돌보면서 삶과 죽음, 소멸과 부활을 마주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또 정원은 노동을 통하지만 오히려 ‘삶의 고난에서 벗어나 원기를 얻는’(79) 공간이다. 책의 정황으로 볼 때, 저자가 겪는 삶의 고난은 머나먼 한국에서 소멸해가는 아버지와 관련이 있을 테다. 그래서였을까. 저자는 책의 서두에서부터 기호학자, 문학이론가였던 롤랑 바르트의 《밝은 방》을 떠올린다. 이 책은 바르트의 어머니가 사망한 직후, 다섯 살이던 어머니가 겨울 정원에 서 있는 한 장의 사진으로부터 시작된 애도의 노래다. 사진을 통해 사랑하는 존재의 부재를 인식하며, 떠나간 사람에 대한 사랑을 고통스럽게 확인한다. 바르트가 어머니의 사진을 ‘끌어안고 숭배’하듯, 정원사도 병상에 있는 아버지 곁에서 머물며 산에서, 길에서 만난 꽃들을 신령들께 제물로 바치고, 온 마음을 다해 감사의 기도를 드린다.
철학자가 정원일을 하면서 배우는 것은 단연코 ‘사랑하기’이다. 정원에서의 시간은 ‘타자의 시간’(23)이며, ‘사랑을 담은 인식’이야말로 꽃을 구원한다(25). 나아가 ‘꽃에 물주기는 꽃들과 함께 머무는 것’(76)을 배우는 일이다. 정원일은 단순한 일이 아니라 ‘명상이며, 정적 속에 머무는 일’(175)이기도 하다. 정원사는 대지를 ‘체험’하며 땅과 만난다. 저자에 따르면 현대인의 신은 ‘돈’이다. 흔히 ‘물신’이라 부르는 이 상징적 존재는 땅, 아름다움, 선을 완전히 파묻어버렸다. 반면 정원사-철학자에게 정원은 디지털화로 잊힌 현실을 되찾게 해주고, 경험과 기억의 언어가 머무는 곳, 나아가 신을 발견하는 공간이다. 그러므로 정원사가 정원에서 배우는 ‘사랑하기’는 원자화되고 소외된 인류가 대지(땅)와의 관계를 새로 맺는 일, 단절된 연대의 부활을 의미할 것이다.
꽃: 그늘에서 피는 꽃과 늦둥이 꽃에 대한 애착
철학자-정원사인 저자는 정원이 ‘신을 믿게 만든 성스러운 장소’(128)라고 말한다. 그는 정원을 가꾸기 시작하면서 겨울에도 꽃을 볼 수 있기를 바랐다. 겨울꽃을 심고, 겨우내 동백꽃에는 천으로 감싸주며 돌보았다. 책을 읽으며 알게 된 것은 저자가 겨울꽃, 특히 그늘을 좋아하는 꽃과 느릿느릿 조심스럽게 피어나는 ‘늦둥이’ 꽃을 좋아한다는 점이다. 그늘을 좋아하는 꽃은 이른바 ‘그늘식물’인데, 저자는 수국과 옥잠화를 여러 번 언급한다. 그가 이 꽃들에 대한 사랑을 고백하는 이유는 이들이 그늘을 환하게 밝히는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밝은 빛’이란 의미를 지니는 저자의 이름을 떠올리며, 그가 수국을 특히 닮았단 생각을 했다.
‘늦둥이 꽃’은 옥잠화처럼 계절에 ‘늦게’ 개화하는 꽃을 가리킨다. 죽음과 탄생의 멜랑콜리가 뒤섞이는 낙엽 쌓인 정원에서 대부분의 꽃들이 시든 후 두 번째로 개화하는 이런 꽃들에 저자는 무엇보다 애착을 보인다. 이들은 겨울 한복판에 ‘두 번째 봄’을 정원에 불러들이는 존재들이다. 수국을 비롯하여 옥잠화는 함께 있는 다른 존재들을 압도하며 몰아내거나 무성하게 자라지 않는다. 기꺼이 낯선 타자들과 함께하며 제 존재를 스스로 밝히는 존재이기에, 저자는 수국과 옥잠화를 기꺼이 사랑한다. 저자에게 정원이란 공간이 신을 믿게 만든 성스러운 장소가 되는 까닭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겨울꽃들은 숭고하다 못해 신적이다. 그들은 내 정원에서 신을 체험하게 하”기 때문이다(126). 그러므로 저자에게 꽃(특히 겨울꽃)은 신의 현현(顯現)인 셈이다. 《땅의 예찬》이 정원사의 ‘신앙고백’이자 철학자의 ‘신학’이 되는 이유다. 하지만 무엇보다 저자는 이 책에서 꽃과 정원의 존재, 그리고 땅에 대한 사랑을 이야기한다.
철학자-정원사인 저자는 이 책에서 우리가 ‘땅으로 되돌아가, 땅과의 관계를 회복하여, 땅과 연결되기’를 희망한다. 저자에 따르면 이 ‘희망하기’가 바로 정원사의 시간방식(180)이다. 정원사는 새로 심은 씨앗이 내년에 싹을 내고 꽃이 피기를 희망하며 기다린다. 이 희망은 정적 속에 머물며 기다리는 가운데 미래의 시간, 타자의 시간에 머문다. 그렇기에 저자는 “내 땅의 찬가는 다가오는 땅을 향한 것”(180)이라고 단언한다. 책을 읽으며 문득 우리 자신의 모습을 되돌아본다. 많은 이들이 땅을 투기의 대상으로만 바라본다. 우리는 땅을 착취하고 경외심을 거둠으로써 땅으로부터 떨어져 나오게 되었다. 자연과의 교감이나 연결고리가 끊어진 존재가 되어버렸다. 그러므로 이 책에서 저자는 대지에 대한 감성, 상상력의 언어를 잃은 현대인들을 위해 그가 정원일을 통해 배운 아름다움과 경험한 것들을 땅에 대한 사랑의 찬가로 노래하는 것이다.
[책 속으로] [1] "오늘날 우리는 땅에 대한 섬세한 감성을 모두 잃어버렸다. 땅이 무엇인지 더는 알지 못한다." (31)
[2] "땅으로 돌아가기란 행복으로 돌아가기가 된다. 땅은 행복의 원천이다." (32)
[3] "우리가 땅에서 떨어져나간 것의 쓰라린 대가가 어쩌면 죽음의 운명인지도 모른다." (67)
[4] "디지털 문화는 인간을 작은 손가락 존재로 축소시킨다. 디지털 문화는 헤아리는 손가락에 기반을 둔다. 하지만 역사는 이야기다. 역사는 헤아리지 않는다. 헤아리는 것은 역사 이후의 범주다." (75)
[5] "오늘날 헤아릴 수 없는 것은 모조리 존재하기를 멈춘다. 하지만 존재는 이야기이지 헤아리기가 아니다. 헤아리기에는 역사이자 기억인 언어가 없다." (76) [6] "꽃에 물주기는 꽃들과 함께 머무는 일이다." (76)
[7] "땅의 낯섦, 다름, 그 독자적 생명에 나는 자주 놀라곤 했다. 육체노동을 하면서 비로소 나는 땅에 내밀히 알게 되었다. (...) 정원에서 나는 삶의 고난에서 벗어나 원기를 얻는다." (79)
[8] "그늘을 환하게 밝히는 것은 수국이다. 수국은 도취시키는 꽃이니 나는 그것을 사랑한다." (106)
[9] "겨울꽃들은 숭고하다 못해 신적이다. 그들은 내 정원에서 신을 체험하게 하는 것" (126)
[10] "우리는 고요함과 침묵을 잊었다. 나의 정원은 고요함의 장소. 정원에서 나는 고요함을 만든다." (146)
[11] "땅은 아름답다, 아니 거의 마법을 지녔다. 우리는 땅을 보호해야 한다. (...) 아름다움은 우리에게 보호라는 의무를 지운다. 나는 그것을 배웠고 경험했다." (18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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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출간 당시 읽었으나 땅에서 아주 먼 도시 한가운데 삶을 살던 때라 일상과의 접점이 어려웠다. 아주 오래 전이라 할 수도 없는데 지금 돌이켜보는 그 시절이 아주 낯설게 느껴진다. 그때와 판이하게 달라진 사고와 정서의 거리가 합산된 모양이다. 저자의 사적인 이야기들과 이사벨라 그레이서의 일러스트들이 이제야 마음 깊이 다가온다.
“아름다운 것은 우리에게 그것을 보호할 의무, 아니 명령을 내린다. (...) 땅을 보호하는 것은 인류의 절박한 과제이자 의무이다. 그것이 아름다운 것, 뛰어난 것이니 말이다.”
적요한 ‘환경의 날’을 맞아 원망은 접고 자신을 살펴보았다. 늘 하던 것 말고 새롭게 하는 일이 늘지 않는다는 것이 괴로웠다. 믿음을 가져본 적 없는 유형의 인간이라 아름다운 모든 것, 땅을 보호하는 것을 과제이자 의무라 느끼진 못한다. 하지만 그저 약삭빠른 계산만으로도 인간이 살아가기 적합한 환경을 망치는 일을 중단하자는 의견은 더 이상은 간명해질 수도 없는 일이자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일이다. 그런데 왜……. 정신과 존재의 의지처가 있어 흔들리지 않는 종교를 가진, 신심이 돈독한 분들이 자주 부럽다.
“그 고통이 내게, 오늘날 잘 조율된 디지털 세계에서 점점 더 잃어가고 있는 현실감, 몸의 느낌을 되돌려준다. 정원에는 감각성과 물질성이 넉넉하다.”
바삭한 땅이 오는 비에 젖는 순간의 향기를 좋아한다. 오래 물을 못 만난 존재처럼 빗물이 반갑다. 모든 풍경에 고루 내리는 비를 보자면 소독한 물만을 틀어 마시고 씻고 사는 처지가 서러워지기도 한다. 따돌림을 당한 기분이 드는데 생각해보면 스스로 택한 고립이라 뭐라 하소연할 데도 없다. 정원의 모든 것들은 빛나고 나는 시선만을 함께 한다. 참 외로운 참여의 시간이다.
“오늘날 헤아릴 수 없는 것은 모조리 존재하기를 멈춘다. 하지만 존재는 이야기지 헤아리기가 아니다. 헤아리기에는 역사이자 기억인 언어가 없다.”
‘측량’할 수 없는 많은 ‘정성적’ 존재들을 엉뚱한 기준들을 만들어 측량을 함으로써 인간이 만든 표준들은 그 대상에 대해 아무런 이야기를 들려주지도 않고 오해와 피해를 부른다. 잠시 그 대상이 인간이 아니었을 뿐 곧 인간은 자신들에게도 측량의 잣대를 들이대기 시작했다. 인간은 각종 점수로 분류되었고 각자의 고유하고 본원적인 이야기들을 잃어버렸다. 너무 익숙해져서 이제는 이의를 제기하는 이들도 드물다.
“오늘날 우리는 오직 에고[나 자신]에만 열중해 있다. 누구나 큰 소리로 누군가가 되고자 하고, (...) 다른 사람과는 달라지고자 한다. 그런 점에서 그들은 모두 같다. 나는 이름 없는 사람들이 그립다.”
이름이란 애초엔 그런 용도가 아니었을 것이다. 상대를 더 잘 기억하고자 애써 마련한 방법이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생겨난 이름들은 원래의 목적에서 벗어나 괴랄한 욕망을 표현하기 시작했다. 잘 찾아 읽지도 않는 뉴스보도들이지만 매일 누군가의 이름들을 들먹이며 어떻게든 사람들을 갈라치기하려는 집요함에 치가 떨린다. 인간이 모른다고 인간의 먹이와 즐거움이 되지 않는다고 ‘잡초weed’라고 뭉뚱그려진 아름다운 각각의 생명체들처럼. 모두가 한데 어울려 자연스럽고 무성하게 자라난 그런 정원이 좋다.
“장미는 뒤로 물러선 자세다. 장미의 화려함의 비밀이 거기 있다. 장미는 장미한다. 장미한다rosen가 장미를 위한 동사다.”
장미는 언제나 장미했을 뿐. 지루한 취향이라 많은 놀림을 오래 받았어도 여전히 장미를 황홀하게 바라본다. 뿌리가 깊은 나무와 덩굴에서 피어올라 장미한 장미들은 여름밤의 한가운데서도 지극히 홀리는 향을 전한다.
여름.
그리고 장미.
“나는 정원에 한 조각 어린 시절을 두고 있다. 작살나무는 아침 여명에 반짝이는 보랏빛 진주들을 매달았다. 땅은 아름답다. 아니 거의 마법을 지녔다. 우리는 땅을 보호해야 한다. 보호하는 태도로 대하고, 잔인하게 착취하는 대신 찬양해야 한다. 아름다움은 우리에게 보호하라는 의무를 지운다. 나는 그것을 배웠고 경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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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비평서, 철학 책 저자로만 알고 있었던 베를린 예술대학 한병철 교수. 정원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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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땅에 대한 경외심을 모조리 잃었다. - 책 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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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중에 나는 자연을 얼마나 생각할까? 자연은 과연 내 삶에서 많은 부분을 차지할까? 정원의 시간은 타자의 시간이다. 정원은 내가 멋대로 할 수 없는 저만의 시간을 갖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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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련이 꽃 피는 모네의 그림을 볼 때면 그의 정원에 머물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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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변한 이유 ‘한병철’이라는 이름은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 쯤은 들어본 이름일 것입니다. 저자는 피로사회란 책을 시작으로 에로스의 종말, 시간의 향기 등 우리 사회를 각기 다른 영역에서 분석하는 책을 저술하였습니다. 이 책들의 특징은 날카로움이었습니다. 매스를 든 의사처럼 우리 사회의 각 부분을 해체한 뒤, 무엇이 문제인지 정확하게 분석하였습니다. 그 속에서 우리가 알고 있었지만 말로 표현하지 못하고 있던 것을 표현하는 명쾌함을 느꼈고, 이는 많은 판매량으로 이어졌습니다. 저도 저자의 날카로움을 좋아했고, 다양한 책을 소장하고 있습니다. 이런 배경 속에서 저자의 신간에 대한 기대가 컸습니다. 이번에는 어떤 칼로 사회의 어떤 부분을 해체할까? 이런 기대 속에서 책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 책은 이전의 책과 결이 다른 책이었습니다. 그는 이번에는 날카로운 칼 대신 정원사의 호미를 들었습니다. 이전의 책에서 그는 사회의 각 부분을 하나하나 해체했다면, 이번 책에서는 사회의 새로운 가치를 심어주었습니다. “시간을 두고 꽃을 사랑하는 법을 배웠다.” 이런 그의 변화가 처음에는 낯설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변한 이유를 금방 알 수 있었습니다. 저자는 사랑하는 방법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를 바꿔가는 것은 날카로운 시선을 통한 분석이 아닌 오랜 기다림을 통한 사랑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책 후반부에 있는 정원사의 일기 속에서 이런 그의 사랑이 자세히 드러납니다. 한 꽃의 죽음의 슬퍼하고, 한 꽃의 탄생에 기뻐하는 그의 모습 속에서 이전에 알고 있던 모습은 모두 사라지게 됩니다. “하이데거, 그는 마음이 땅에 붙어 있었다.” “하지만 존재는 이야기지 헤아리기가 아니다. 헤아리기에는 역사이자 기억인 언어가 없다.” 그가 변한 이유는 우리 사회를 헤아리지 않고, 그 속에서 이야기를 직접 찾아가기 위함이라 생각합니다. 화분에 피어나는 새싹과 함께 이 책을 천천히 읽는 시간을 가져보는 것을 추천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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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리틀 포레스트>에서는 주인공이 고향에서 농작물을 직접 키워 음식을 지어 먹으며 계절을 지낸다. 예능 <효리네 민박>에서는 제주도에 내려가 살며 여유로운 날들을 보낸다. 이제는 '자연'스러움의 콘텐츠들이 미디어 속에서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한병철의 저서 『땅의 예찬』도 3년간 자연으로 돌아가 정원을 가꾸었던 한 철학자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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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 다니던 회사의 부장님은 텃밭을 가꾸셨다. 주말마다 근교의 작은 농장을 가꾼 것과 동시에, 회사 옥상에서도 고추, 상추, 꽃 등 작은 모종을 심고 아침 점심마다 틈틈이 들여다보고 하셨다. 그와 같은 행동은 계절과 날씨와는 무관했다. 그때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겨울은 모든 식물과 동물들이 움츠려드는 계절일 뿐만 아니라, 겨울에 무엇이 난다고는 생각도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열심히 물을 주고 영양분을 주셨다. 그리고 놀랍게도 매번 새로운 꽃을 피운 화분을 사무실로 옮겨 분위기를 밝게 만들어주셨다. 사계절이 무색할 정도로 꽃은 자라났다. 그 이후로 나는 함부로 자연에 대해 재단하지 않기로 했다. <땅의 예찬>의 저자 한병철도 책을 통해 놀라움을 전달한다. 3년동안 정원을 열심히 가꾸면서 그속에서 많은 것을 발견하고 느낀다. 원래 저자인 한병철은 독일에서 주목받는 철학자다. 소생의 기운조차 느낄 수 없는 베를린의 차가운 겨울에서 땅을 가꾸고 싶은 마음이 움텄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바로 실행에 옮긴다. <땅의 예찬>은 종합 인문서 같은 느낌이다. 정원에서 피어나는 다양한 꽃을 설명한 실용서 같기도 하고, 철학자의 사유하는 삶이 묻어나는 철학적 에세이로 변하기도 한다. 때론 클래식과 고전을 풀어 이야기하는 인문 교양서가 되기도 한다. 이 복합적인 요소의 근원은 바로 땅이다. 저자 한병철은 땅을 일구면서 삶과 죽음, 과거와 미래, 사람과 사랑에 대해 이야기한다. 땅에 자신의 생각을 심고 계절을 돌아 새로운 깨달음으로 싹트길 기다린다. 기다림조차 그에게는 좀처럼 만날 수 없었던 경험이다. 저자의 옛날 모습처럼 나도 요즘 전자기기에 지쳐 있다. 하루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업무시간에는 늘 컴퓨터 모니터를 봐야하고, 틈틈이 폰으로 SNS를 한다. 집으로 돌아오면 다시 컴퓨터로 시간을 보내다가 잠이 든다. 그러던 어느 순간 눈이 아파오고 두통이 왔다. 그나마 덜 보는 주말이면 사그라드는 했지만, 평일이 되면 또 다시 증상이 반복되곤 했다. 비록 저자처럼 당장 땅을 가꿀 순 없지만, 자연으로 눈을 돌리고 싶어졌다. 그리고 그러기 시작했다. 이동하는 동안이라도 최대한 전자기기를 멀리하고 자연을 보려고 노력한다. 새싹이 움트는 자연을 보기 위해 천천히 고개를 들어 눈을 돌리곤 한다. 아직은 미숙하지만 언젠가 정원에 나의 잡념을 심고 새로운 감정을 거둬보고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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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책으로 만난 저자, 한병철의 책. 반갑다. 문학과 지성사에서만 봤던 책들을 김영사에서 만날 줄이야!
3년간 몸소 경험한 삶으로 만나게 되어 더욱 반갑다.
땅의 예찬! 겉표지부터 흙의 느낌이다.
종이계의 흙이랄까. 그런 감촉이다.
이 책을 읽고 드는 생각, "누림과 향유는 다르다."
<간략 리뷰>
인간이 땅 위에서 빨리 움직일수록 땅은 그만큼 줄어든다.
지상의 거리를 극복할 때마다 인간과 땅 사이의 거리를 커져간다.
그리하여 인간은 땅에 대해 소원해진다.
... 현대적 기술은 인간의 삶을 땅에서 소외시킨다."
시간의 향기 p.46 중
기술로 인한 땅에 대한 소원해짐을 예리하게 짚어낸 그는 직접 손수 3년간 정원을 가꾸었다.
그리고 보살폈다. 마음
아파하고 향유하며 사랑 가운데서..
그리고 사랑하기에 허용하는 '존중'과 '보호할 수 있음'을 볼 수 있다.
있는 그대로의 시간,
즉 식물 각 저마다의 시간을 자연스러움으로 여기는 존재에 대한 사랑을 볼 수 있다.
저자는 "내 정원은 어떻게 해선지 내가 신을 믿게 만들었다.
내게서 신의 존재는 이제 믿음의 문제가 아니라 확실성이고 증거이다.
신이 계시고, 그래서 내가 있다(p.128)."라며 신께 기도를 올린다.
https://blog.naver.com/young-taek/221237822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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