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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번 카프카의 <일기>를 읽고 혼쭐이 났다. 일기만큼 그 사람을 잘 이해할 수 있는 게 또 있을까? 무엇보다 어렵게 쓰이지 않았다는 것과 어느 정도 관음증을 만족시켜준다는 점에서 일기를 읽는다는 건 만만찮은 재미와 흥미를 갖게 만든다. 그런데 카프카는 그것을 완전히 무산시켰다. 누가 어려운 작가 아니랄까봐. 그렇게 생각하니 왠지 모를 외로움이 느껴졌다. 카프카를 좋아하는 독자도 많다만 나는 좀처럼 좋아지질 않으니. 카프카의 일기에 혼쭐이 났다면 다시는 도전을 안 할 것 같은데 또 하고 말았다. 이번에도 또 도전을 하고 말았다. 이번엔 그가 직접 쓴 것이 아니고 그의 친구가 쓴 책이다. 이번엔 좀 쉽지 않을까 아니 읽히지 않을까 하는 기대.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먼저 읽은 것에 비하면 그나마 읽히긴 한데 나을 것은 없다. 그 알량한 읽힘도 책 자체가 좋아서라기 보단 그나마 읽어준 것이 있어 읽혔다고나 할까? 아, 이렇게 어려운 작가에, 이렇게 어려운 친구라니. 글쎄. 이 책을 규정하기를 ‘평전’이라고 했는데 글쓴이가 당대 카프카 못지않은 지식인이었으니 오죽 할까 싶기도 하지만 나는 왠지 평전이라고 하기엔 어딘가 모르게 좀 아니지 않나 싶기도 하다. 그러면 단번에 ‘네가 카프카를 알아?’ 타박과 오해를 받을 테니 입을 다물어야 할 것 같다. 물론 평전이 맡긴 맡을 것이다. 하지만 저자 개인으로 볼 때 카프카에 대한 (친구라도) 존경과 경의의 뜻으로 쓴 일종의 고급진 에세이 같은 것은 아니었을까? 글도 보면 앞에 나오는 전기에서 저자가 느끼고 봤던 일인칭 시점에서 카프카를 묘사하기도 했다. 평전은 그 보다 더 객관적이어야 하는 것 아닌가? 아무래도 저자 자신의 카프카에 대한 감정과 주관적 느낌이 들어갔다는 점에선 평전이라고 보기엔 다소 애매한 것 아니냐는 것이다. 하지만 또 전기 이후에 나오는 카프카의 신앙과 학설, 작품에 나타난 절망과 구원 등을 보면 저자가 얼마나 카프카의 문학을 학문적으로 잘 정립하려 했는지 그 애정과 열정을 느낄 수가 있다. 그런 것을 보면 평전은 평전일 것이다. 그 사람에 짐작이 아닌 직접 보고 느끼고 연구한 것을 쓴 것이니까. 책을 읽으려고 펼쳐든 순간 도대체 카프카가 저자에게 어떤 존재였기에 이런 글을 쓸 수 있단 말인가? 새삼 부럽기도 했다. 나에 대한 평전은 고사하고 내가 죽고 난 뒤 내가 어떠한 사람이었다고 글 한 줄이라도 남겨줄 사람이 나게 과연 있는가? 난 또 그러리만치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미치며 살아왔을까? 거기에 대해 나는 결코 긍정할 수가 없다. <일기>를 읽었을 땐 무조건 어렵다고만 느꼈고, 이 책 역시 어려운 건 사실이지만 저자로 인해 카프카를 객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난 이 책에 좀 더 좋은 점수를 주고 싶다. 사실 카프카에 대해선 단편적으로만 알고 있을 땐 시쳇말로 좀 찌질 하지는 않나 하는 생각을 해 보게 되는 것도 사실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평생 아버지를 어려워했고, 그렇게 많은 글을 썼음에도 늘 자신은 글을 조금밖에 못 썼다고 자책하며 살았다. 게다가 전업 작가가 된다는 건 아예 꿈도 꾸지 않았고 평생직장을 그만두지도 못했다. 게다가 결혼을 번복했으며 더구나 자기네 집을 돌봐주던 가정부와 결혼할 생각도 가졌었다. 이 모든 것을 종합해 볼 때 그는 한마디로 사회부적응자는 아닐까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이 책 읽어보면 이런 판단이 얼마나 섣부른 판단인지를 반성하게 만든다. 무엇보다 카프카는 지적인 사람이었다. 물론 그는 문학에 뜻이 있었음에도 법학 학위까지 받았고, 저자의 말에 따르면 조용하고 겸손하지만 어느 순간 농담도 잘하고 유쾌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또한 관용과 확고한 사람으로도 묘사되기도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저자 브로트가 언젠가 니체를 사기꾼이라며 비판하고 성토하는 자리에서 카프카는 그렇지 않다며 반박했고 그 후 브로트에게 먼저 다가가 말을 걸어줬다고 한다. 그리고 둘은 평생지기로 살았다. 카프카의 연애도 그렇다. 일개의 가정부와 결혼할 생각을 했었다면 그는 연애는 해 봤을까 싶기도 하겠지만 그는 확실히 연애를 할 줄 아는 사람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밀레나에게 그렇게나 많은 편지를 보냈을 리가 없지 않은가? 그는 누구에게나 사랑을 받았고 적대자가 없었다고 브로트는 말한다. 또한 그가 평생직장에 다녔던 건 밥벌이를 위한 직업과 글쓰기 예술은 날카롭게 서로 분리되어 있어야만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예를 들면 저널리즘이 표현하는 직업과 글쓰기의 ‘혼합’을 거부했다고. 그것을 브로트는 직업과 소명을 얻기 위한 투쟁으로 본 것이다. 그러니까 글 써서 돈을 못 벌 것이라는 판단 하에 직장을 병행했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글쓰기의 신성함을 유지하기 위해 직장을 다녔던 것이다. 뭐 이런 것만 보더라도 카프카가 얼마나 성실하고 선량하며 유쾌한 사람인지 짐작이간다. 그러므로 그의 사후 세간의 이목에 의해 덧씌워진 잘못된 이미지를 좀 벗겨낼 필요도 있어 보이고, 이 책은 그러기에 충분한 책이라고 생각한다. 브로트와 카프카가 친구가 된 후로 그 둘은 거의 매일 만났고 필요하면 하루에 두 번도 만났다고 한다. 과연 대단하다 싶다. 우린 아니 적어도 난 아무리 좋아하는 친구라도 거의 매일 만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그에 들이는 공력도 공력이지만 매일 만나면 아무리 좋아하는 친구더라도 좀 질리지 않을까? 그럴 수 있는 이면엔 서로 간에 무엇이 존재하는지 새삼 궁금하기도 하다. 이 책서도 카프카의 일기와 편지가 빠지지 않는다. 카프카는 작품도 작품이지만 이제 일기와 편지로 더 유명한 하지 않을까? 그의 시대나 요즘이나 편지를 주고받는 인간관계란 흔치 않아 보인다. 그런 점에서 부러운 것도 사실이고 꽤나 지적여 보이는 것도 사실이지만, 모든 것을 말 보단 글로써 풀어내려고 했던 카프카가 뭔지 모르게 짠하게 느껴지기도 하는 건 왜일까? 그건 하나의 깊은 확신이기도 하겠지만 말로써 풀어내지 못하는 그의 내적인 한계가 있어서는 아닐까? 그냥 네 멋대로 생각해 본다. 그래서도 그는 작가로 충실했던 거고. 참, 카프카에 대한 이미지 중 또 하나는 고독이라는 건데 이 책 그 이미지도 다소나마 걷힌 느낌이다. 이렇게 몰랐던 (또 알더라도 잘못 알고 있는)카프카를 알아가는 건 (작가들의 삶을 알아가는)나에겐 상당히 의미 있는 시간이다. 이 책 카프카에 대해 가장 직접으로 알 수 있는 책은 아닐까 한다. 카프카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복근에 힘을 뽝 주고 읽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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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츠 카프카를 알게 된 건 <변신>을 읽게 되면서였다. 아주 어린 시절에 한 번 읽었던 이 작품이 계속해서 이미지로 머리에 남아 있었고 다시 접하게 된 후 이젠 1년에 한 번씩은 읽는 책이 되었다. 프란츠 카프카를 이야기 할 때 빠지지 않는 것이 "이방인"의 모습이다. 어디에도 끼지 못하는 정체성의 혼란. 유대인이면서 독일 사회에서 살았던 사실과 작가이길 원했으면서도 직장을 놓지 않은 것 등은 카프카의 혼란스런 정체성을 잘 보여주는 일례이다. 하지만 이런 정보만으로는 카프카를 이해하기에 부족하다. <변신>이외의 단편(<변신>과 함께 묶여있는)들을 이해하기는 힘들었고 좀 더 제대로 카프카를 알고 싶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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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 책의 두께가 두께인만큼, 본격적으로 책을 펼치기 전에 구성을 찬찬히 들여다봐야 할 텐데요. 위에 사진에 첨부를 해 놓았듯이 카프카의 전기로 시작해서 카프카의 삶과 학설에 대해 파고드는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그러니까 어느정도 둘레를 만들고서는 아예 작정하고서 아래로 굴을 파는 모양새랄까요. 때문에, 어지간한 평전이나 전기를 능가하는 컨텐츠를 페이지로 차근차근 누적해갑니다. 대체적으로 연대기별로 구성되어 있고 따로 줄거리가 있는 서사집이 아니므로…. 3. 프란츠 전집이지만 <나의 카프카>의 경우 저자가 프란츠 카프카가 아닙니다. 막스 브로트, 라고 해요. 국내에 소개된 프란츠 카프카의 저서들과 산문집은 '브로트판'이라고 해서 일종의 편집본입니다. 위에 첨부하였듯, 카프카의 후원자이자 편집자였기도 하고요. 카프카가 작품 내용을 가장 먼저 나눈 좋은 친구였다고 하지요. 비틀즈가 비틀즈일 수 있었던 이유는 그 작은 동네에 4명의 천재들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친구였기 때문이라고 하잖아요. 그런 면에서 카프카는 물론, 현대의 독자들에게도 막스 브로트의 존재와 행적은 묵직하게 다가옵니다. 4. 흔히 카프카적이다…라고 한다면 혹자는 이런 얘기를 하기도 합니다. 카프카의 경우는 그의 전기에서 알 수 있다시피 근대의 대공황이라던가 혼란한 사건들을 겪기 전부터, 저작활동을 해왔거든요. 그럼에도 근대의 대공황이랄지, 그 침울한 분위기를 먼저 읽어낸 부분이 작품 속에 선명합니다. 즉, 카프카적이다, 라고 얘기한다면 문학이란 것이 미래의 분위기나 뉘앙스를 적확한 방향으로 읽어내는 독법을 나타낼 수도 있다는 거지요. 혹은 내러티브보다, 그러니까 사건의 흐름이라기보다 의식의 흐름으로 무언가를 짚어나가는 형식이랄까요. 그러니까 결과보다는 흐름자체가 중요한 작품들을 의미하는 것 정도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이런 부분은 해석도 판이하고 애초에 추상적으로밖에 구연되지 않는 부분이라 어딘가 형이상학적으로 느껴지지만 굳이 설명을 하려고 하지 않고, 감각하려고 하면 탁월한 구석도 있고요. 뭐랄까, 소설이나 문학이 당대의 분위기를 잘 담아내서 후대에 전달하는 역할도 하겠지만 무언가 대비로서의 문학, 예언이자 경고로서의 문학은 또 얼마나 어렵고 위대한 것일까… 5. 그러니까 카프카의 작품들은 결말로 수렴하는 것이 아니라 발산하는 형태의 작품들이 많습니다. 거기서 통렬함을 느끼기도 하고, 초월감을 맛볼 수 있기도 하고요. 실은 애초에 미완의 글이기도 하니까요. '프란츠 카프카'라고 하면 작금에 와서는 일종의 고유명사로 작용하는 것이므로…교양처럼 많은 사람들이 앞다투어 전집을 읽어본다면 소설은 물론 많은 장르와 매체들을 독해하는 데 있어서 지평을 큰 폭으로 넓힐 수 있을 것입니다. 특히, 솔 출판사의 카프카 전집은 대담한 용기를 내어 거의 완전한 원문을 보전하는 방식으로 책들을 펴내고 있고요. 많은 책들이 편집자의 시선으로 잘려나가고, 텍스트는 조각이 난 채로 독자들에게 예쁘게 주어지는데 그런 부분이 확실히 잘 팔리기도 하고 이해에 도움이 될 수도 있겠지만 너무나 당연스런 한계에 맞게되는 것이니까요. 그런면에서 다시 한번 응원과 감사를 드리며 프리뷰를 마칩니다. 주기적으로 찾아보고 사전처럼 들춰내며 탈탈 털고 또 털어도 계속 무언가를 털어낼 책입니다. 사전처럼 구비해두시길 권하고 싶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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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독 42/ 인문] 나의 카프카. 막스 브로트. 편영수 옮김. 솔출판사. 책 읽는 행위를 즐기지만, 고전은 두려운 존재였다. 어릴 적 읽었던 ‘데미안’은 우리말이지만 읽어낼 수 없어 좌절하게 했고, 그 후 처음부터 끝까지 온전하게 읽을 수 있었던 고전은 지난해 말 읽었던 카프카의 ‘변신’이 유일하다. 심오하고 오묘했지만 ‘나 같은 초보자도 읽을 수 있다’라는 용기 같은 게 생겼고, 그때 생긴 카프카에 관한 관심으로 무겁고 두꺼운 이 책에 관심 두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두께에 비교해 무겁거나 거창하지 않았다. 번역체 특유의 이해하기 어려운 문구가 거의 없기에 두께에 대한 부담감을 떨칠 수 있다면 ‘카프카에 대한 모든 것’이 담긴 이 책을 즐겁게 읽을 수 있다. 무엇보다도 내 안에 사랑이 없다면, 바로 내 안에 사랑이 없다는 것 때문에 내가 책임이 있다는 사실을 알 필요가 있다. 레프 톨스토이, 일기, 1896년 11월 (364) ‘나의 카프카’는 저자이자 친구인 막스 브로트가 바라보는 ‘친구’이자 ‘작가’로서의 ‘카프카’일 수 있고, 옮긴 이인 편영수 님이 바라보는 ‘카프카’일 수도 있고, 이 책에 등장하는 -편지를 주고받았던 수많은- 카프카 지인들이 기억하는 ‘카프카’일 수도 있다. 그리고 카프카의 작품을 연구하는 학자들이 분석해낸 ‘카프카’일 수도 있다. 많은 사람의 관계 속에서 재조명된 ‘나의 카프카’. 세상에 보여진 작품만으로 읽어낼 수 없는 인생과 사상, 삶을 대하는 방식들. 각자가 기억하고 있는 것들을 책 한 권으로 묶어냈다. 주고받은 편지로서 알 수 있는 그의 인생, 학자들의 연구로서 드러나는 여러 견해와 오해들, 카프카의 작품에서 읽을 수 있는 어떤 것들. 카프카의 모든 것을 담아낸 이 책은 어떤 한 문장으로 요약할 수가 없다. 비판적이며 비관적인 그의 작품에서 느껴지는 분위기로 사람을 판단할 수 없다. 그의 인생만으로 작품을 그려내기도 어렵다. 짧지만 치열하게 살다 간 한 사람과 그를 연구한 사람들의 모든 것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카프카는 톨스토이보다 총명에서, 논리에서 천 배 뛰어난 것처럼 보인다. 그 논리는 머리의 문제가 아니라, 인격 전체의 문제, 마음의 문제이다. (399) 단순한 친구 그 이상의 동반자였던 막스 브로트에 의해 치밀하게 연구되었고, 그 결과물로 ‘카프카’라는 사람을 돋보이게 만들어낸 ‘나의 카프카’는 원서에 대한 궁금증을 갖지 않아도 될 만큼 재미있었다. 아마도 번역의 힘일 것이다. 독일 현대 문학(카프카 문학) 전공자이며, 카프카와 관련된 여러 권의 책을 이미 출간한 바 있는 번역자 편영수 님의 노고를 느낄 수 있는 이 책. 막스 브로트가 아니었다면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고 해도 믿을 만큼 세상에 드러나지 않았던 사람. 선한 영향력을 믿고 평온한 가정을 꾸리기를 원했던 한 남자의 안타깝고 짧은 인생을 지켜보았다. 카프카의 작품이라곤 하나밖에 읽지 않은 내가 카프카 소설에 대한 비평을 제대로 읽어낼 수는 없었지만, 예술가 같고 성인 같은 한 사람의 마음과 그를 되새기려는 또 한 사람의 마음은 읽어낼 수 있었다. 그래서 오늘을 좀 더 치열하게 감사하며 살기로 다짐했다. 카프카는 애정과 정밀함을 갖고 개별적인 것, 눈에 띄지 않는 것의 근원까지 파고들었기 때문에 우리가 지금까지 결코 알아차리지 못했던, 기이하게 보이지만 오로지 진실한 사물들이 나타났다. 따라서 도덕적 책무, 삶이라는 사실, 여행, 예술작품, 정치 운동에 대한 그의 견해는 결코 기이하지 않고, 단지 아주 정확하고, 날카롭고, 올바르고 그 결과 일상의 언어와는 거리가 있다. 그리고 어쩌면 그 결과 꽤 자주 우리가 ‘실용적인 삶’이라고 부르는 것에는 쓸모가 없을지도 모른다. (78) 순수한 사람이 순수하지 않은 것에 손을 댈 수 없었다는 사실은 순수한 사람의 강점이기도 하고 약점이기도 하다. 강점인 이유는 자신과 절대자 사이의 간격을 철저하게 느끼는 것, 끝까지 느끼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간격은 그 자체가 부정적인 것, 약점이다. 따라서 순수한 사람의 강점은 그가 속임수를 써서 절대자와의 간격을 없애버리지 않겠다고 고집하는 것에서, 그가 자신의 약점을 천 배의 확대경을 통해 솔직하게 과장하는 것에서 표현될 수 있을 뿐이다. (...) 따라서 카프카의 작품에서는 강점과 약점이, 상승과 하강이 아주 특수한 방법으로 서로 스며든다. (191) 세상이 어떠하든 나는 원시적인 상태에 머무를 것이다. 나는 원시적인 상태를 세상의 판단에 따라 바꿀 생각이 없다. 이 말이 들리는 바로 그 순간에 전 존재 안에서 변신이 일어난다. 그 말이 발언될 때, 마치 동화에서처럼 백 년 동안 마술에 걸렸던 성이 열리고, 모든 것은 생명을 얻는다. 그렇게 존재는 온통 주목을 받는다. (247)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선을 위한 투쟁을 하려는 사상가로서 카프카 입장의 핵심, 최선이며 본질적인 것을 형성한다. (248) “인간은 자기 내면에 존재하는 파괴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지속적인 믿음 없이는 살 수 없다.” (...) “믿음은 자신 안에 있는 파괴할 수 없는 것을 해방하는 것, 혹은 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자신을 해방하는 것, 혹은 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파괴할 수 없게 존재하는 것, 혹은 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존재하는 것이다.” (378) “공동체에서 고립되지 마라.” (...) 카프카가 되풀이해서 자의든, 자신의 잘못이 아니든, 상황에 굴복하는 것이든 상관없이 공동체에서 고립된 인물을 묘사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인간이 더 이상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주변과 의사소통을 할 수 없는 상태에서 벌레로 변신하는 것이 그러한 설명할 수 없고 불행을 초래하는 상황이다. (4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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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카의 이름을 처음 알게 된 게 그의 단편소설 <변신>을 읽고 나서였습니다. 중학교때 읽었으니 벌써 4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네요. 그렇게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자고 일어났더니 벌레로 변한 자신의 모습을 그려낸 카프카의 <변신> 이란 소설을 처음 읽고는 어찌나 황당했던지 아직도 기억이 생생합니다. 하지만 이해하기가 어려워 한 번 읽고 말았던 기억이 납니다. 그 후 카프카에 대해 주변에서 워낙 천재 작가라고 떠들어대니 다시 한 번 읽어볼까 시도했지만 역시 이해하기가 힘들었습니다. 카프카는 어떤 삶을 살았기에 자신을 벌레로 표현했을까 궁금하기도 했지요. 그의 삶을 들여다보면 그 답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 읽게 된 책이었습니다. 이 책은 카프카의 유일한 친구였던 막스 브로트가 카프카의 삶과 그의 작품에 대해 말해주고 있습니다. 처음 변신을 읽었을 때 어둡단 느낌을 받았었는데 카프카가 아버지에게 인정을 받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고 나니 조금 이해가 됩니다. 카프카가 친구인 막스 브로트에게 자신이 직접 출판했던 작품들만 남기고 끝까지 마무리 짓지 못한 것은 불태워 없애 달라고 유언을 남겼는데 막스 브로트가 그 유언을 실행에 옮기지 않았다고 합니다. 브로트가 판단하기에 카프카의 유고가 그의 작품들 중에서 가장 좋은 작품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단편소설 작가라고 알고 있었는데 유고로 남긴 소설은 모두 장편소설이었다고 합니다. <실종자> <소송> <성> 막스 브로트 덕분에 카프카는 단편소설 작가가 아닌 장편소설 작가로 남게 된 것입니다. 이 책은 막스 브로트가 1937년에 쓴 <프란츠 카프카, 전기>, 1948년에 나온 <프란츠 카프카의 신앙과 학설>, 1959년의 <프란츠 카프카의 작품에 나타난 절망과 구원>을 모두 수록한 책입니다. 부록으로 프란츠 카프카에 대한 여러 친구들의 추억과 회상을 실었고, 카프카가 직접 그린 삽화도 소개 되어 있습니다. 여전히 카프카는 어렵지만 아버지와의 관계, 해피엔딩으로 끝나지 못했던 사랑 등 그의 삶을 친구의 글을 통해 알 수 있어서 다시 한 번 그의 소설을 읽는다면 옛날과는 느낌이 많이 다를 것 같습니다. 번역이 문제였던 건지, 아님 카프카의 친구인 막스 브로트의 글이 문제였는지는 모르겠지만 꽤 난해한 문장이 많아 쉽게 읽을 수가 없었습니다. 어쩌면 아둔한 저의 머리 탓일 수도...ㅠㅠ 카프카를 사랑하고 이해하고픈 사람이 읽으면 도움이 될 수도 있겠지만 저의 경우엔 카프카의 책을 더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사라졌다는 슬픈 사실...ㅠ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