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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를 통해 보는 문화적 통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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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디지털시대를 맞이하여 각종 인터넷 , 트윗, 페이스북등의  인터넷이 급속도로 퍼지는 동시에 인터넷 사용언어에 따른 언어파괴 현상에 붉은 신호등이 켜졌다. 과연 이런 언어의 파괴현상은 올바른 것일까? 예를 들면 흠좀무 : 흠 이게 사실이라면 좀 무섭군요’, ‘솔까말 : 솔직히 까놓고 말해서’, ‘듣보잡 : 듣도 보도 못한 잡 것’. ‘지못미 : 지켜주지 못해 미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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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디지털시대를 맞이하여 각종 인터넷 , 트윗, 페이스북등의  인터넷이 급속도로 퍼지는 동시에 인터넷 사용언어에 따른 언어파괴 현상에 붉은 신호등이 켜졌다. 과연 이런 언어의 파괴현상은 올바른 것일까? 예를 들면 흠좀무 : 흠 이게 사실이라면 좀 무섭군요’, ‘솔까말 : 솔직히 까놓고 말해서’, ‘듣보잡 : 듣도 보도 못한 잡 것’. ‘지못미 : 지켜주지 못해 미안해’, ‘먹튀 : 먹고 튀다’, ‘엄친아 : 엄마 친구 아들’. 이것들은 최근에 생긴 신조어이다. 이런 신조어들의 특징은 경제적이며, 구어체 중심이라는 것이다. 인터넷 신조어들이 경제적인 이유는 말보다, 타자로 치는 것이 시간이 더 오래 걸리기 때문에 빠른 의사 전달을 위해서 자연스럽게 생긴 현상일 것이다.따라서 이것들은 어느 정도 현대 사회를 반영하고 있다. 현대 사회에서 자주 벌어지는 현상과 그에 대한 인터넷 세대의 반응에서부터 이런 언어들이 발생하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 특정 시기의 특정 방언을 보면 그 지역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는지를 알 수 있다. 인터넷 신조어도 인터넷 문화라는 새로운 문화 속에서,그 문화를 향유하는사람들의 생생한 가치문화를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한편으로는 단순한 언어 파괴 현상으로도 볼 수 있지만 한 편으로는 창조적 언어 문화로 볼 수도 있는 것이다. 이렇듯 언어는 시대의 문화와 정신 그리고 사고방식을 그대로 반영한다. < 그곳은 소, 와인 , 바다 모두 빨갛다> 이 책의 제목에서 느껴지는 이질감은 아마도 소와 와인, 바다가 가지고 있는 색깔이 모두 빨갛다고 표현한 것이었다. 이 책의 핵심을 그대로 보여주는 제목이기도 한데 과거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에서 호메로스의 상상에 의한 일리아스의 존재가 실존한 나라였다는 것이 밝혀지자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는 어구 " 검은 와인빛 바다"에 대한 표현이 이후 언어학자 글래드스턴에 의해 논란의 중심이 된다. 또한 호메로스가  와인에 비유하여 색깔을 묘사하는 대상이 바다와 소 였다. 그럼 호메로스는 색맹일까?

더 나아가 글래드스턴은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에서 나타나는 색깔묘사의 기괴함은 호메로스 개인의 특별한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지적한다. 호메로스의 색깔묘사에 문제가 있었다면 그 당시 사람들은 물론 다음세대들도 그의 작품을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것이다.결국 글래드스턴은 색깔인지 능력이 계발되기 시작한 단계였으며 그 당시 빨간색은 이미 인지된 상태였다. 호메로스가 프리즘을 통해 분산되어 나오는 유채색에 대해선 그토록 입을 다물고 있는 반면 빛과 어둠에 대해서는 그토록 생생하고 시적으로 묘사하는 이유가 바로 발달하지 않은 색깔인식능력 때문이라는 결론이다. 그러나 글래드스턴의 이러한 결론은 문화의 힘을 과소평가한 결론이다. 원주민들의 색깔인지능력을 테스트해본 결과, 어후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 색깔을 보지 못하는 것은 아닌 것으로 밝혀졌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색깔의 차이를 구분할 수 있음에도 그것을 다른 이름으로 부르지 않았던 것이다. 글래드스턴은 호메로스가 '파랑의 가장 완벽한 예' 라고 할 수 있는 남쪽하늘을 어떻게 인식하지 못했는지 납득하지 못했고, 가이거는 고대 문헌에서 하늘을 파랗다고 묘사하지 않는 사실을 놀라워 했으며, 리버스는 원주민들이 하늘을 검다고 한 것을 해명하지 못했다. 색깔 스펙트럼에서 가장 강렬한 색깔부터 인간이 감지하기 시작했다는 마그너스의 주장은 전혀 근거가 없다는 것 또한 밝혀졌다. 고대인들도 우리처럼 색깔을 선명하게 볼 수 있었으며 색깔어휘의 차이는 생물학적 진화를 반영한 것이 아니라 순전히 문화적 진화를 반영한 것임을 20세기가 들어서야 밝혀지게  된다.

 

이러한 색깔논쟁은 언어의 개념을 차지하기 위한 자연과 문화의 끝없이 지속된 전쟁의 승패를 가르는 가장 이상적인 테스트 지표가 되었다. 다른 방식으로 표현하자면, 좁은 색깔띠는 언어가 인류의 본성에 얼마나 깊이 뿌리박혀 있는지, 또는 언어의 차이가 얼마나 표면적인지 알아내기 위한 리트머스 시험지가 된 것이다.-35p

 

수십 년 동안의 연구자료는 색깔개념이 일차적으로 문화에 의해 결정된다는 주장을 , 또는 자연에 의해 결정된다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가 되었다. 문화와 자연 모두 적절한 수준에서 색깔개념에 영향을 미치며, 어느 쪽도 완전한 헤게모니를 누리지 못한다. 결국 자연의 제약과 문화적 요인의 균형에서 언어는 발생하는 것이다. 1858년 글래드서턴, 1869년 가이거, 1878년 마그너스, 1903년 리버스는 문화를 보지 못했고 1933년 레너드 블룸필드, 1953년 레이는 자연을 보지 못했다. 1969년 벌린과 케이 역시 문화를 제대로 보지 못했다. 이 모든 과정을 거쳐 이제 선명한 언어로 보는 문화에 대한 시각을 갖게 된 것이다.

 

오늘 날 지배적인 언어학적  관점에 따르면 언어는 본능이기 때문에 인류의 언어는 모두 똑같다고 한다. 노엄 촘스키 역시 화성인의 눈으로 지구인의 언어를 관찰해보면 모두 똑같아 보일 것이라는 유명한 주장을 했다. 그의 이론이 설명하듯 모든 언어의 깊은 곳에는 보편적인 문법이 작동하며, 똑같은 기저가 존재하며, 구성의 복잡성도 같다. 따라서 언어에서 연구할 만한 가치가 있는 유일한 측면은 언어가 인간의 본성을 표현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곳은 소, 와인, 바다가 모두 빨갛다] 저자 기 도이처는  언어, 문화, 자연을 이어주는 가장 중요한 연결고리를 수십년동안 연구해 왔던 학자들의 자료를 바탕으로 그들의 연관관계를 찾아내는데 성공하였다. 문화라는 것은 우리 일상의 모든 것을 대표한다. 최근 보여주고 있는 인터넷 파생언어 또한 우리의 일상을 대표하는 문화의 한 현상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 같다.이렇듯 언어는 시대의 문화와 정신 그리고 사고방식을 그대로 반영한다. 언어를 통해 보는 문화 , 무척 흥미로운 통찰이다.



YES마니아 : 골드 k********2 2012.01.19. 신고 공감 10 댓글 7
리뷰 총점 종이책
언어는 문화다. 그렇다면 우리 문화의 현주소는?
"언어는 문화다. 그렇다면 우리 문화의 현주소는?" 내용보기
흥미로운 책이다. 딴에는 '언어'를 다룬 책치고는 참 재밌기까지 하다. 그런데 생뚱맞게도 '언어'에 관한 책이면서 이 책의 내용은 거의 대부분 '색깔'에 대해, 그것도 '색깔'을 어떻게 부르고, 어떻게 구분하는지에 대해 장황하게 늘어놓았다. 거기에 오타까지 수두룩하고...그렇다고 속절없이 리뷰까지 장황할 필요는 없을 테다. 단도직입적으로다가 이 책을 한 마디로 소개하자면, '
"언어는 문화다. 그렇다면 우리 문화의 현주소는?" 내용보기

  흥미로운 책이다. 딴에는 '언어'를 다룬 책치고는 참 재밌기까지 하다. 그런데 생뚱맞게도 '언어'에 관한 책이면서 이 책의 내용은 거의 대부분 '색깔'에 대해, 그것도 '색깔'을 어떻게 부르고, 어떻게 구분하는지에 대해 장황하게 늘어놓았다. 거기에 오타까지 수두룩하고...그렇다고 속절없이 리뷰까지 장황할 필요는 없을 테다. 단도직입적으로다가 이 책을 한 마디로 소개하자면, '언어'가 지닌 속성을 파악하면 그 시대, 또는 그 사회의 '문화'에 대해 이해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파서 이토록 주절거리고, 그 가운데 '색깔'을 파고 들었다.

 

  이렇게 글쓴이는 '언어'가 '진화생물학적' 관점에서 영향을 받아 발달해왔다는 일반적인 언어학자들의 견해와는 달리, '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시종 '색깔 타령'을 늘어놓았고, 뒤침이(번역자)는 글쓴이가 '색깔'에 대해 '했던 얘기 또 하고, 다시 한' 바람에 뒤치고 또 뒤치다 오타를 수두룩하게 써놓은 모양이다. 인문학적인 내용을 다룬 책이라면 이런 오타를 줄이는 것이 관건이었을 텐데도 그렇지 못한 듯 싶어 살짝 실망하였으나, 인문학적인 내용을 담은 책치고는 상당히 술술 읽히는 유려한 문체인데도, 속절없이 오타투성이가 된 까닭을 짐작해보니 '연역적인 서술'로 증명한 때문이라고 밖에 생각이 들지 않는다.

 

  글쓴이는 앞서 이야기한, <언어가 문화에 영향을 크게 받았다>는 주장을 하기 위해 수도 없이 많은 사례를 앞에 늘어놓는 방법을 썼다. 이런 서술방식은 무턱대고 결론부터 내리고 뒤에 수습하는 경향이 강한 '귀납적 서술' 방식의 오류를 최소로 줄일 수 있다는 점에서 큰 장점을 찾을 수 있다. 그렇지만 '읽는이(독자)'는 글쓴이의 주장이 무엇인지, 다시 말해, 결론이 무엇인지 알아내기 위해 끝까지 읽어낼 수밖에 없다. 정작 문제는 결론에 앞서 수많은 원인과 사례를 들었다는 점이다.

 

  이런 식이니 원래 주장하려고 했던 <언어가 진화론적인 과정으로 발달하였다기보다는 문화에 영향을 더 크게 받았다>는 결론에 이르기도 전에 '색깔'에 대한 이야기만 주야장천 읽다가 지쳐버릴 수도 있고, 아예 처음부터 이 책의 내용이 '색깔 논쟁'이었나 하는 오해를 하기 십상일 테다. 그렇기에 이 책은 대중적인 책이라고 보기엔 얼마간 모자른 듯 싶다. 이렇게 '연역적인 결론'을 내린 책들은 대부분 대학논문에서나 쓰이는 방법이고, 해당분야가 아닌 문외한은 이해하기 어려운 전문적인 내용을 다룬 책들에서 자주 쓰는 서술 방식이기 때문이다. 이 책이 상당히 말랑말랑한 문체로 비교적 쉽게 읽히는데도 내용 파악이 한 눈에 쏙쏙 들어오지 않는 까닭이다.

 

  물론 한 눈에 쏙쏙 파악되지 않는 원인으로는 오타가 수두룩하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다. 일일이 오타가 난 부분만 따로 뽑아놓으려다가 헤아리기도 귀찮을 만큼 그 수가 많아지자 갖다 버리고 말았다. 전체 내용을 오해할 만한 오타가 아니라 사소한 오타가 대다수였기에 내용을 읽어내는 데에는 큰 불편이 없으니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기 때문이다. 또 언제가부터는 오타를 일일이 꼽아 헤아리는 내 모습을 보면서 쪼잔해진다는 느낌을 받은 뒤부터는 오타를 발견해도 그냥 넘어가는 일이 많아졌다. 하릴없이 강박증만 심해진다는 느낌도 들었고...

 

  온누리에 수많은 '언어'들이 있지만 우리에게는 좀 더 특별하게 접근이 가능할 것이다. 다름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유래가 없을 정도로 탁월하고 과학적인 '문자체계' <한글>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세계적으로 널리 쓰이는 문자도 아니고, 한국어도 널리 쓰이는 언어가 아니기 때문에 현재 '언어학'이 유럽문자 중심적으로 발전한 것을 단박에 뒤집어엎을 정도는 아닌 것이 현실이다. 또 '언어학'을 다룬 책들이 대부분 서구중심적인 관점에서 쓰여졌기 때문에, 그들이 '한국어'나 '한글'을 연구내용에 포함한 것도 찾아보기 힘든 실정이다. 이 책에서도 '한국어'와 '한글'에 대한 언급이 잠깐 나오지만, 본격적으로 '한국어와 한글'을 연구하여서 내논 결과가 아니라 뒤침이가 '일본어'라고 언급된 내용을 '한국어'라고 빗대어 표현한 것이라 짐작된다. 이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글쓴이가 '문화'를 강조하며 뒷받침 설명을 하였는데, 일본의 문화를 소개하는 부분은 찾아볼 수 있어도 한국의 문화를 소개하는 부분은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홀대받는 우리의 말과 글이지만, 앞으로는 달라질 거라고 생각한다. 이 책에서도 언급하고 있듯이 서구인들이 쓰는 말은 '문명어'이고 다른 나라 사람들이 쓰는 말은 '미개어'라고 잘못 인식하고 있는 점을 글쓴이가 유독 강조하면서 서술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언어조차 '진화생물학적 관점'에서 '미개어'에서 '문명어'로 발전해 갈 것이라고 잘못 인식한 점을 지적한 셈이다. 그리고 나아가 언어는 문화의 영향을 더 크게 받아 발달해 왔다는 점을 증명하였기 때문이다. 물론 이렇게 본다면 '문화의 역량'이 큰 쪽에서 작은 쪽으로 영향을 줄 것이라는 점을 간과할 수 없을 게다. 아직까지도 서구문화의 역량이 세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여전히 쓰는 사람이 적고, 쓰는 지역이 좁은 '한국어와 한글'은 문화적 역량도 작을 따름이고 널리 쓰이기 어려울 테다.

 

  그러나 '한류열풍'이라는 현상을 볼 때, 한국어와 한글이 가진 역량이 미약하기만 하다고 볼 수는 없다고 본다. 미약하나마 한국을 알리는 통로로 작용하고, '바보라도 하루면 배운다'는 한글의 장점이 톡톡히 살아나 보다 더 많이, 더 널리 퍼지는 것은 시간 문제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물론 '스물네 글자의 기적'만 바라서는 택도 없는 꿈일 테다. '한국어와 한글'로 즐길 수 있는 풍요로운 문학적 소산(이를 테면, 이 책에서 언급한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와 <오디세이아>와 같은 수작 말이다)과 향유할 수 있는 문화와 전통을 갖추어야 가능한 일일 테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에게 과연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부끄럽지 않는 문화유산을 지니고 있는지 다시금 되돌아 보았다. 아직은 '아니올시다'라는 결론에 다다르자 아쉬움이 앞선다. 한글이 <훈민정음>이란 이름을 달고 태어난지 600여 년이지만, 우리가 스스로 자유자재로 마음껏 쓴 지는 불과 100여 년 남짓이기 때문이다. 얼마전에 종영한 모 드라마에서도 잘 그려놓았지만, 참으로 잘 만든 글자를 우리 스스로 가치를 알지 못하고 내팽개쳤다가 나라를 잃는 아픔을 겪고서야 비로소 소중함을 깨달았으니 말이다. 어디 이뿐인가? 버젓이 우리 말, 우리 글이 있는데도 남의 나라 말과 글을 배워야만 출세하는 사회구조로 만들어놓는 어리석은 짓거리를 멈출 줄 모르니 어디 쉽사리 '자랑스런 문화유산'을 지녔다고 내놓을 수 있느냔 말이다. 반만 년의 유구한 역사를 지녔다고 알리기조차 부끄럼이 앞선다.

 

  다시 한 번 이 책의 내용을 정리하면, 언어는 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우리의 문화를 더욱 갈고 닦기 위해서는 언어부터 잘 다루어야 할 것이다. 외국어의 홍수 속에서 사는 우리들의 자화상을 보면서 우리의 문화는 어떤 모습일지 점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비록 이 책은 <언어는 문화다>라는 내용 밖에 없는 책이지만, 이 책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남다를 수밖에 없다고 본다. 문화에 큰 영향을 끼치는 인자 가운데 언어가 차지한 자리가 크다면 우리의 문화를 더 아름답게 갈고 닦기 위해서는 적어도 외국어 교육에 유독 열을 올리는 문제와 거리를 뒤덮은 외국어 간판, 또 세계를 홀린 '한류'에 물들어버린 외국어 일색에 대해 문제의식을 갖고, 하루 빨리 대책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오백 년 간이나 숨죽여 지내온 '한글'을 100년 남짓도 제대로 써먹지 못하고 또 다시 말려 죽여 버려야 속이 시원하다면 괜찮겠지만 말이다.



YES마니아 : 로얄 z******8 2012.01.31. 신고 공감 3 댓글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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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밌는 언어학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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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참 특이하다. <그곳은 소, 와인, 바다가 모두 빨갛다> 그리고 부제가 언어로 보는 문화(Through The Language Glass, why the world looks different in other languges)이다. 부제가 이 책의 원래 성격을 잘 말해주지만 이 책을 읽다보면 한글 제목 <그곳은 소, 와인, 바다가 모두 빨갛다>가 더 사실적으로 다가온다. 이 제목은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에 나온 글래드스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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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참 특이하다. <그곳은 소, 와인, 바다가 모두 빨갛다> 그리고 부제가 언어로 보는 문화(Through The Language Glass, why the world looks different in other languges)이다. 부제가 이 책의 원래 성격을 잘 말해주지만 이 책을 읽다보면 한글 제목 <그곳은 소, 와인, 바다가 모두 빨갛다>가 더 사실적으로 다가온다. 이 제목은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에 나온 글래드스턴의 색깔연구에 바탕을 두고 있다. 표지와 목차와 내용을 대충 훓어보니 언어학적인 냄새가 풍기던데 막상 책장을 열어 읽어보니 언어학에 대해서 박학다식한 사람이 자신의 풍부한 지식을 잘 버무려 알기쉽게 이야기해주는 친절한 안내서와 같았다. 언어학적으로 보면 이 책은 현대언어학의 태두라고 할 수 있는 촘스키의 보편문법의 반대점에 서있는 주장을 담고 있다. 즉, 언어라는 것은 태어날 때부터 생래적으로 그 문법체계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고 문화에 따라서 그 의미와 문법과 언어가 달라질 수 있다는 주장이다. 소 쉬르가 말하는 랑그와 빠롤이 사회문화적 맥락에 따라 많은 영향을 받는 다는 주장이다.

 

이 저자의 주장은 영국의 총리까지 올랐으며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에 심취하여 상당한 량의 해설서를 저술한 그 시대의 석학 윌리엄 글래드스턴의 <호메로스와 당시 시대의 연구>의 색깔연구에서부터 출발한다. 글래드스턴은 이 책을 저술하면서 그 시대의 특성을 설명하였다. 그중에서 가장 큰 논쟁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급진적인 주장은 바로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에 나타난 색깔에 관한 내용이였다. 그의 주장은 많은 반대자들에 의해 무시당했으나 글래드스턴의 색깔연구는 상당히 깊은 학식에 바탕을 둔 주장이라 쉽게 꺾이지 않았고 후에 가이거와 마그너스와 같은 사람들에게 계승되었다. 글래드스턴의 그의 책에서 주장한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에 나타난 색깔에 관햔 연구의 결론은 이렇다.

 

1. 우리의 직관에 바춰볼때 본질적으로 다른 여러 색깔을 같은 단오로 지칭한다.

2. 근본적으로 일치하지 않는 여러 색깔형용사를 이용해 같은 대상을 묘사한다.

3. 우리가 색깔묘사가 등장할 것이라 기대하는 부분에서 색깔묘사가 거의 없거나, 아예 나오지 않는다.

4. 색깔의 가장 원시적인 형태인 검정과 하얗이 다른 색깔에 비해 과도하게 많이 나타난다.

5. 호메로스가 사용한 색깔묘사어휘는 지극히 적다.

 

따라서 글래드스턴은 이 문제에 대해 고대인과 현대인의 색깔에 관한 인지 능력이 달랐다는 주장으로 결론을 내린다. 즉 호메로스 시대의 사람들이 인지할 수 있는 색깔은 검정과 하얗이 거의 전부라고 할 수 있으며, 즉 흑백의 영역을 넘어서 프리즘을 통해 분산된 유채색의 세계로는 나아가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러한 결론에 대해 10년후 가어어는 좀더 발전된 연구를 통해 글래스턴의 색깔연구에 대해 검증을 하면서도 새로운 의미심장한 질문은 던지는데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아가는 부분이 바로 2부 렌즈로서의 언어이다. 가어어가 던진 의미심장한 질문은 다음과 같다.

 

"우리와 똑같이 색깔을 인식할 수 있으면서도 그것을 언어학적으로만 구분하지 못하는 것은 가능할까?"

 

저자 기 도이처는 언어가 자연 개념의 꼬리표(저자의 표현을 빌리자면)이기도 하지만 문화의 반영이라는 것이다. 즉 히브리어에 손과 팔을 하나의 개념으로 다루어 무두 '야드'라고 표현한 것은 손과 팔을 구분하지 않는 히브리적 문화의 반영이라는 것이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하여 "언어는 본능이므로 결과적으로 모든 인류의 언어가 같다"라는 노엄 촘스키와 그의 학파들의 주장을 뒤집는 결과를 도출하려고 했다. 문화를 본능의 결과가 아닌 학습을 통해 여러 세대를 거쳐 전해진 사회적 관습으로 볼 때 그 전달매개는 '언어'임에 틀림없다. 그래서 언어는 '문화'속에 준재할 수 밖에 없고, 살고있는 문화가 다르다면 그 언어 또한 다르다는 것을 인정할 수 밖에 없다. 어찌보면 너무나도 자명한 이치이지만 때로는 이러한 자명하다고 생각되어지는 저자의 언어와 문화에 대한 생각은 다른 한편으로 노엄 촘스키가 말한 보편문법처럼 인간이 지닌 생래적인 획득에 있다는 것 또한 틀리지 않을 것이다.

 

나는 저자의 언어와 문화의 상관관계를 부정하지 않지만 노엄 촘스키의 구조적인 언어가 이미 인간에게 내재되어 있다는 것이 좀더 가깝게 느껴진다. 이 책은 어려운 내용이지만 비교적 경쾌하고 재밌게 읽어진다. 이것은 저자의 뛰어난 실력과 입담에서 비롯된 것임에 틀림이 없다. 언어에 대해서 최근의 동향을 이토록 흥미롭게 써낸 자자의 유쾌한 지식에 박수를 보내면서 언어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일독이 유익하리라 생각한다.

 

이 책의 곳곳에서 오타가 발견된다. 몇군데 발견한 것은 이렇다.

 

p.55 하양 => 하얗

p.68 42살 => 32살

p.81 개채 => 개체



YES마니아 : 골드 f****1 2012.01.31. 신고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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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은 소 와인 바다가 모두 빨갛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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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참 특이하다. 소, 와인, 바다가 모두 빨갛다니. 소는 누런 색의 황소이거나 하얀색 바탕에 검은 점이 있는 젖소가 일반적이니 빨간 소는 생각할 수 없다. 와인은 붉은색의 적포도주가 일반적이며, 바다는 푸른색이라는 것이 우리의 상식이다. 도대체 이 제목은 누가 정한 것인지, 그 의미는 무엇인지. 이 궁금증을 가지고 첫 페이지를 열어 본다.이 특이한 제목은 호메로스의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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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참 특이하다. 소, 와인, 바다가 모두 빨갛다니. 소는 누런 색의 황소이거나 하얀색 바탕에 검은 점이 있는 젖소가 일반적이니 빨간 소는 생각할 수 없다. 와인은 붉은색의 적포도주가 일반적이며, 바다는 푸른색이라는 것이 우리의 상식이다. 도대체 이 제목은 누가 정한 것인지, 그 의미는 무엇인지. 이 궁금증을 가지고 첫 페이지를 열어 본다.


이 특이한 제목은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오디세이>를 연구한 윌리엄 글래드스턴(Willian Ewart Gladstone, 1809~1898)의 책에서 인용되었다. 글래드스턴은 호메로스의 책들을 연구하면서 하나의 의문점을 가진다. 바로 색깔의 표현이다. 호메로스의 작품을 읽어보진 않았지만(저자의 문제제기로 인해 곧 읽어보려고 생각중이다) <일리아스>와 <오디세이> 전체에서 ‘검은 와인 빛 바다(wine-dark sea)'라는 표현이 많이 인용되고 있으며, 그 밖에 꿀을 초록색으로 표현했다든지, 소를 와인처럼 보인다고 표현하는 등 현대인이 보기에 색깔의 표현이 정상적이지 않다는 점에 문제를 제기한다. 그동안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 호메로스가 시적허용을 즐겼다는 주장도 있었으나 저자는 이에 동의하지 않는다.


저자는 이 문제에 대해 고대인과 현대인의 색깔에 대한 인지 능력이 달랐다는 주장으로 결론을 내린다. 즉 호메로스 시대의 사람들이 인지할 수 있는 색깔은 검정과 하양이 거의 전부라고 할 수 있으며, 즉 흑백의 영역을 넘어서 프리즘을 통해 분산된 유채색의 세계로는 나아가지 않았다(p.60)는 것이다. 따라서 현대인의 입장에서 호메로스의 작품을 볼 때 색깔을 언급하는 부분이 애매모호하고 일관성이 없게 느끼는 것은 바로 이 점 때문이다. 다시말해 ‘발달하지 않는 색깔인식능력’ 때문에 호메로스의 작품에서는 검정과 하양이라는 색깔이 가장 많이 등장하고 있으며. 또한 ‘바이올렛’이나 ‘와인’이라는 색깔 어휘는 특정한 색깔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흑백의 세계에서 짙음의 정도를 나타낸다는 것이다.


이 색깔에 대한 이야기가 첫 장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이유는 이 책의 주제와 관련이 있다. 즉 우리가 쓰고 있는 언어와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의 문화가 어떤 관계에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제기이다. 더 나아가 좀더 구체적으로 표현하면 ‘언어가 다르면 그 말을 쓰는 사람의 생각도 달라지지 않을까?’라는 문제로 정의할 수 있다. 오늘날 대부분의 언어학자들은 언어는 유전자에 코딩되어 있는 본능과 같기 때문에 ‘아니’라는 답변을 할 것이다. 모든 언어에 보편적인 문법이 있고, 똑같은 기저가 존재하며, 구성의 복잡성도 같다는 주장이 대부분 언어학자들의 주장이다(p.18). 하지만 저자는 이 주장에 대해 반론을 제기한다. 문화의 차이가 심오한 방식으로 언어에 반영된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언어, 문화, 생각을 이어주는 가장 중요한 연결고리를 찾아내고자 했다. 언어에 가장 많은 영향을 미치는 것이 바로 그 시대와 지역에 축적되어 있는 문화와 사람들의 생각들이라는 것이다.


이 논리를 펼치기 위해 언어를 ‘거울’과 ‘렌즈’의 두가지 관점에서 살펴본다. 이 책의 원서 제목은 <Through the Language Glass>이다. 훨씬 더 직관적인 한글제목 덕에 책의 좀더 쉽게 다가갈 수 있었다. 제목을 보면서 가지는 의문점들이 책의 서문을 지나 첫 장의 내용에서 바로 풀어주었기 때문에 그 이후의 내용들을 좀더 쉽게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새해 들어 교회 성가대에서 ‘구노(Charles Gounod)’의 <성세실리아를 위한 장엄미사(Messe Solennelle de Sainte Cecile)>를 라틴어 원어로 부르기 위해 연습하고 있다. 그러면서 라틴어를 공부해 봐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차에 이 언어학에 관한 재미있는 책을 읽게 되어 그동안 별로 관심이 없었던(관심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조차 인지를 할 수 없었던) ‘언어’에 대해 최소한의 예의를 갖추게 되었다. 이 책을 통해 아는지 모르는지 조차 몰랐던 완벽한 무지의 상태에서 언어에 영역으로 첫발을 내딛게 되었으니 아직은 저자의 주장에 대해 올고 그름을 판단하기 힘들다는 점에서 아쉬울 뿐이다.


k******1 2012.01.31.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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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심스럽게 얘기할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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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호등에서 '가시오'를 의미하는 색깔은 초록색이다. 영어로는 green light라고 한다. 그런데 우리말로 하면 '파란불'이라고 흔히 이야기한다. '초록불'이라는 말을 쓰기도 하지만 귀에 익숙한 것은 '파란불'이다. 한 가지 더 이야기해 보자. 분명 청개구리라고 부르는 개구리는 초록색이다. '샛'초록색이라고 해도 될만큼 완벽한 초록색이고 영어로도 green frog이라고 한다. 그런데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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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호등에서 '가시오'를 의미하는 색깔은 초록색이다. 영어로는 green light라고 한다. 그런데 우리말로 하면 '파란불'이라고 흔히 이야기한다. '초록불'이라는 말을 쓰기도 하지만 귀에 익숙한 것은 '파란불'이다. 한 가지 더 이야기해 보자. 분명 청개구리라고 부르는 개구리는 초록색이다. '샛'초록색이라고 해도 될만큼 완벽한 초록색이고 영어로도 green frog이라고 한다. 그런데 왜 하필 '청개구리'라는 이름이 붙었을까? 어딘가에 진짜 새파란 아니 푸르딩딩한 개구리라도 있었던 것일까?

 

처음에 색깔 이야기가 계속 나오길래 이 책 <그곳은 ~ 빨갛다>를 읽으면 혹시 이런 오래된 궁금증도 해결이 될까 살짝 기대를 했었다. 물론 green light와 green frog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나라 사람이 쓴 책이지만 말이다. 하지만 엄연히 이 책은 색깔에 대한 책은 아니다. 언어와 문화의 상관관계를 새롭게 조명하고자 하는 책이다. 이 책에서는 '문화'가 언어에 반영된다는 당연해 보이기도 하지만 모호한 주장을 명료화하려고 한다. 더불어 그 옛날 폐기된 '생각은 언어의 영향을 받는다'라는 주장을 조심스럽게 다시 꺼내놓으려고 한다.

 

그럼 왜 색깔이 책의 전면에 나왔을까? 서론의 언급에서처럼 색깔을 구분하는 문제는 전혀 추상적이지도 않고 특별히 가설을 세울 필요도 없는 차원이 낮은 인식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가장 직관적인 것 중 하나인 색깔'언어'조차 문화를 반영한다는 사실을 입증한다면, 그리고 색깔 구분이라는 직관적인 행동에 있어서도 '언어'의 영향이 엄연히 존재함을 확인한다면, 언어와 문화에 대한 저자의 의견에 힘을 실을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색깔처럼 일상적인 영역에서 언어의 역할을 고찰한다면 어느 문화에도 적용할 수 있으므로 주장의 보편성을 확보할 수 있으며, 흥미를 끌 수 있는 효과도 얻을 수 있다.

 

일상적인 영역을 연구 재료로 가지고 오는 경우 언어와의 상관 관계는 어렵지 않게 도출할 수 있으되, 이를 인과 관계로 발전시키려면 다각적인 검토가 필요하다. 섣부른 평등주의에 매몰된 듯 '모든 언어는 같은 복잡성을 지닌다'라는 주장을 근거가 아닌 믿음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던 이전의 언어학자처럼 논리의 비약에 빠져 잘못된 결론에 도달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꽤나 꼼꼼하게 '오류의 덫'을 피하기 위해 노력한다. 딱 부러지는 결론을 내지는 못하지만 대신에 책에서 언급된 정도까지는 누구나 받아들일 수 있을만큼 탄탄한 주장을 내 놓는다.

 

들어본 듯한 소재를 끌어다가 분석을 하는 것과 더불어 이 책은 기발한 전개로 표지만큼이나 읽는 사람을 집중시킨다. 예를 들어 지리중심적 좌표의 세계관을 설명하기 위해 오스트레일리아의 구구이미티르 지방 원주민을 끌어들이면서 오래된 속설 중의 하나인 "'캥거루'는 'I don't know'의 원주민어이다"라는 말을 등장시켜, 실은 '캥거루'가 구구이미티르 족의 말에서 가져온 표현(실제 캥거루를 가리키는 말)인 것을 밝히는 식이다. 또한 오래된 질문인 '초록불'과 '파란불'에 대해서도 일본에서도 green light를 파란색으로 표현하며, 심지어 색깔 도한 다른 나라와 다소 다르게 정의되어 있음을 알려주어 해결의 실마리 또한 제공한다.

0****2 2012.01.31.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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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쪽 볼에 묻은 빵 부스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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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수많은 유명 철학가들은 ‘언어가 그 언어를 사용하는 나라의 특징을 반영한다’는 주장을 했고, 대중의 눈에도 그럴듯하게 들린다. 그러나 저자는 이것이 막연한 개인적인 경험과 편견을 담은 주장은 아닌지 돌아본다. 노엄촘스키를 비롯한 수많은 주류학자들이 주장하는 ‘모든 언어의 기저는 동일해서 같은 방식으로 작동하고 똑같은 복잡성을 갖는다’는 직관을 거스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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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까지 수많은 유명 철학가들은 ‘언어가 그 언어를 사용하는 나라의 특징을 반영한다’는 주장을 했고, 대중의 눈에도 그럴듯하게 들린다. 그러나 저자는 이것이 막연한 개인적인 경험과 편견을 담은 주장은 아닌지 돌아본다. 노엄촘스키를 비롯한 수많은 주류학자들이 주장하는 ‘모든 언어의 기저는 동일해서 같은 방식으로 작동하고 똑같은 복잡성을 갖는다’는 직관을 거스르는 것으로 연구는 시작되었다.

  이 책에서 접근하는 문화는 표면적인 관습이나 사고방식의 일반적인 개념보다 훨씬 더 광범위하게 인류학의 관점에서 인간에 의해 이룩된 모든 것이 그 범주에 포함된다. 너무나 일상적이고 친숙해서 자연스럽게 타고난 것으로 생각되는 인식들이 사실은 문화적 특성임을 문화와 자연의 대결이라는 흥미로운 비유를 통해 알려준다.

  언어는 학습되는데 있어 자연과 문화가 함께 작용하는데 점차 문화의 개념들이 더 많은 영역을 점령한다고 한다. 그중에서도 오랜 논쟁의 역사를 거치면서 문화인지, 자연의 명령인지, 본능인지 정체성이 불분명한 ‘색깔개념’이 있다.

  이 모든 것은 1858년 영국의 훌륭한 정치인 윌리엄 글래드스턴에 의해 시작되었다. 그는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오딧세이에 깊은 감명을 받고 오랜 연구를 통해 <호메로스와 당시 시대연구>를 출간하였다. 책에 호메로스 시대 사람들의 색깔인식의 기괴함에 대해 언급했는데, 이는 총천연색의 색인식이 아닌 흑백의 세상에 빨강만 가미된 상태라는 것이다. 호메로스의 시에는 빛의 움직임에는 민감하게 묘사하면서 유독 색에 대한 내용이 적고, ‘검은 와인빛 바다’ ‘소가 와인처럼 보인다’는 기괴한 표현이 있다는 것이다. 이 놀라운 발견을 당시의 학자들은 시적허용이거나 호메로스가 색맹일수 있다거나 세세하게 텍스트를 분석한다고 일축하며 비웃었다는 것이다. 이후 고대문헌을 통해 과거인류의 색깔인식 방식이 지금과 달랐다는 것을 밝혀내고, 이에 대한 수많은 논쟁과 증명이 다양한 인물들을 통해 오랜 시간을 거쳐 진행되고, 수정되었다. 진화이론이 발달하던 시기에는 후천적 획득형질이 유전된다는 라마르크의 진화론과 다윈의 자연선택설이 공존하면서 색깔인식이 진화된 획득형질이라는 주장에 힘이 실리기도 했다. 철학적, 과학적 입장에 따라 무수한 논쟁이 오가고 색의 인식과 색깔어휘에 대한 설명이 자연과 문화를 넘나들었다.

  색인식에 관한 문제는 거의 20년간 답보상태로 있다가 인류학의 갈릴레오라 칭송받는 정신과 의사 리버스에 의해 전환을 맞는다. 그는 색깔인식과 색깔어휘 사이의 연관을 찾고, 시각적 차이를 인식하는 능력이 언어에서 그 차이를 표현하는 능력과 관련 있는가를 연구했다. 결론은 색깔을 구분하는 능력과 색깔어휘의 차이는 진화가 아닌 문화적 관습에 따른 것이라는 것이다. 아이들은 색어휘를 배우는데 어려움을 겪는다고 한다. 하물며 알록달록한 색의 장난감을 갖고 놀지 못하고, 색이 의사소통에서 중요치 않은 문화에서 자란 아이들은 어떨까?

  저자는 지금의 우리를 미개인으로 보는 미래의 사람들이 그들의 세상에서 표현되는 어떤 언어가 없고 한정된 언어로 표현하는 것에 놀라워 하는 것과 같은 이치라며 비유하는 데는 감탄이 절로 나왔다.

  1969년 브렌트 벌린과 폴케이가 두가지 놀라운 사실이 들어있는 <기본색깔용어>를 출간했다. 색깔 스펙트럼을 구분하는 특정방식이 있고, 모든 언어가 예측할 수 있는 순서에 따라 색이름을 획득한다는 것이다. 이 책의 자극으로 수많은 후속 연구가 이루어졌으나 벌린과 케이의 주장에 상반되는 결과가 드러난다. 절대적이지 않은 예외성이 있고, 일부 색깔언어들이 예측할 수 있는 방식으로 작동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결국 색깔개념이 문화에 의해서도, 자연에 의해서도 결정된다는 것이다.

  “문화는 제약속에서 자유를 누린다”

라는 명제를 통해 저자는 답을 모색한다. 진화와 관련되어 인간에서 정서적 각성과 흥분을 일으키는 색이 빨간색이라 먼저 이름을 얻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다음으로 발달한 노랑과 초록은 문화적 측면이다. 초목의 색에서 익은 것과 익지 않은 것을 구분하고 말로 전달할 필요에 따라 언어가 발달했다는 것이다. 자연에서 물체로는 지극히 드물고 문화적으로도 중요치 않은 파랑색은 이름을 붙일 필요성이 없었다는 것이다. 지금도 파랑색 어휘가 없거나 초록과 혼용하는 언어가 많다고 한다. 저자는 결국 어떤 측면에서는 글래드스턴의 처음 분석에서 한걸음도 나아가지 못했다며, 인류의 색깔개념을 밝고 어두움에서 색조체계로 이동시킨 글래드스턴의 통찰에 감탄한다.

  자연의 경계 안에서 문화는 다양하게 분할하는데, 분할한 문화 속에서 각 개념은 언어를 통해 반영된다는 것이다. 노랑, 초록, 파랑을 한 가지 색으로 칭하는 언어도 있는데 이는 색깔보다 밝음에 일차적 강조점을 둔다고 한다. 친족용어도 문화마다 많은 차이를 보인다. 저자는 브라질 인디언말과 영어의 차이를 들었는데, 우리말과 영어의 차이를 보더라도 아저씨, 삼촌, 고모, 이모, 아줌마로 세분화된 우리말이 uncle, aunt로 통칭되는 것이 얼마나 낯설고 이상한가. 문화의 자유는 문법영역에서 더 다양하게 나타나는데, 언어마다 다른 어순의 차이도 한 부분을 차지했다.

  대중은 원시인들이 미개인이기 때문에 언어도 미개할 것으로 생각한다. 그것은 일반적으로 원시인에 대한 정보를 여러 매체를 통해 얻으면서 생기는 선입견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다른 언어권 사람에게 최대한 이해하기 쉽게 말하는 것이고, 번역된 문장도 단순하게 해놓아서 생긴 인식이란 것이다. 반면에 언어학자들은 모든 언어는 똑같이 복잡하다고 주장하는데 이 역시 타당치 않다고 한다. 학술논문이라면 사실에 기반한 주장을 펼치고 근거를 뒷받침해야하는데 복잡성의 원칙은 주장만 펼칠 뿐 근거가 없다고 일갈한다. 외국인들이 언어를 습득할 때 느끼는 어려움을 측정해보면 습득의 난이도는 학습자의 모국어에 크게 좌우되는 것을 알 수 있을 뿐 외국어 학습의 어려움으로 언어의 복잡성을 측정하고 보편화할 수 없다는 것이다. 저자는 어떤 두 언어의 복잡성을 비교할 수 있는 객관적이고 체계적인 측정은 불가능하고, 만들어 낼 수도 없다고 주장한다. 언어 사용자수로 사회의 크기를 나누어 언어의 복잡성에 관한 연관을 살펴보면, 사회구조의 복잡성과 어휘구조의 복잡성은 반비례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렇게 저자는 문법과 언어의 복잡성에 관한 탐구를 하고 기존의 보편성과 복잡성에 관한 주장을 반박하고 문화는 문화적 진화의 산물이고 언어의 복잡성은 화자의 문화를 반영한다는 문화주의적 관점을 지지한다.

  다음으로 현재 학계에서 완전히 배척당하고 있는 ‘언어상대주의’의 기본개념 중 언어가 생각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측면이 의미 있음을 밝히면서 모국어가 생각에 미치는 영향을 살핀다. 1800년대 빌헬름 폰 훔볼트가 주장한 내용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에드워드 사피어는 모국어가 세상을 인식하는 방식을 결정하고, 다양한 언어를 바탕으로 진행되는 우리의 사고과정은 은하계의 한 부분을 차지하는 성운에 불과하다는 놀라운 생각을 한다. 그러나 점차 잘못된 형이상학으로 빠져 ‘언어상대주의’를 내세우며 스스로 언어가 생각의 감옥이라는 망상으로 들어가는 과오를 범한다.

  문화가 언어와 인식의 차이를 만드는 것은 구구이미티르족의 언어에서 증명되었다. 공간정보를 전달할 때 우리는 자기중심적 좌표를 통해 이야기하고, 자기중심적 좌표가 인간마음의 보편적 특성이라 주장되어져 왔다. 그러나 구구이미티르족은 공간정보를 전달할 때 반드시 지리적 좌표체계를 사용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언제나 동서남북의 기준좌표를 예민하게 인식하고 있을 것이다. 우리는 저장하지 않은 공간정보를 구구이미티르 화자는 마음속에 등록하고 있음으로서 같은 현실을 다르게 인식하고 기억한다는 것이다. 마주보는 방의 내부구조와 사물의 위치를 자기중심좌표를 기준으로 똑같이 배치했을 때, 구구이미티르족은 모든 것이 뒤집힌 방으로 인식한다는 것이다. 어릴적 부터 지리적 좌표체계를 기억하는 인지적습관이 언어를 통해 이루어지면 별다른 노력 없이도 인식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저자는 구구이미티르어를 통해 보편적인 공간언어와 공간사고라 여겨왔던 개념 없이도 언어가 완벽하게 작동할 수 있고, 언어가 생각에 영향을 미치는 방식의 가장 놀라운 사례를 제공한다고 말한다.

  젠더가 붙은 언어를 통해서도 언어가 사고에 미치는 영향을 확인할 수 있었다. 사물에 대한 젠더가 사람이름의 성과 일치할 때 훨씬 더 잘 기억한다는 것이다. 젠더를 구분하는 모국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젠더체계는 연상의 감옥이 될 수도 있지만, 그것이 꼭 나쁜것만은 아니라고 저자는 말한다. 시인은 젠더를 통해 훨씬 풍부한 감정과 은유를 전달할 수 있는데, 젠더가 없는 언어로 번역될 경우 원작의 의미를 제대로 살릴 수 없고, 외국어학습자에게는 악몽일지라도 불규칙한 문법은 세상을 더 생기 넘치게 한다는 저자의 말에 공감이 간다.

  저자는 일본의 교통신호등이 현재 터키색으로 바뀌었는데, 이는 초록과 파랑을 혼용하다가 현실에 맞춰 이름을 바꾸지 않고, 이름에 맞춰 신호등색을 바꾸었다는데 놀라워한다. 우리도 근대화에 일본의 영향을 받아서 인지, 아니면 같은 동양권이어서인지 ‘파란신호등, 푸른신호등, 파란불’이라고 칭한다. 나도 초등학교 입학 후 교통신호를 배울 때 왜 초록신호등이라고 하지 않는지 정말 이상하게 생각했던 기억이 나는데, 점차 문화적 관습에 길들여져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음이 새삼스럽다.

  언어가 제시하는 색깔개념으로 인해 세상의 색깔을 경험하는 방식이 달라지는 것은 아닐까라는 저자의 물음에 예전 크레파스에 붙여졌던 이름인 ‘살색’이 생각났다. 살색은 흰색도 검정색도 될 수 있는데, 우리나라 사람들의 피부색으로 한정해서 살구빛색을 살색으로 칭함으로서 차별의 인식이 문화 속에서 저절로 습관화 되니 말이다. 저자는 서양인이라 생각지 못한 영역인데, 높임말이 있는 언어의 특성이 문화와 사고방식에 미치는 영향은 어떨까. 태도나 행동적 측면에서도 높임말이 없는 언어와 어떤 차이를 보일까 궁금하기도 했다. 

  처음 ‘마음을 비추는 거울로서의 언어’를 통해 자연스러운 것으로 여겼던 생각들은 우리 문화 속에서 익숙해진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두 번째 ‘세상을 인식하는 렌즈로서의 언어’에서 언어의 사용이 사고에 영향을 미치고, 특정한 표현을 반복적으로 사용해서 습관화됨을 알 수 있었다.

  책을 통해 매우 낯설고 새로운 주제나 분야를 접할 때 어려움과 지루함을 넘어 관심과 흥미의 세계로 이끄는 것은 온전히 저자의 몫이다. 이 책의 저자 기 도이처는 수많은 참고자료와 적절한 비유를 통해 기존학계에 넓고 단단하게 자리 잡고 있는 언어인식에 관한 통념의 오류를 지적하고, 새로운 문제를 인식하고, 견해를 펼쳐나가는데 있어 대단히 탁월하다. 쉽고 분명한 말로 독자를 설득하고 재미있는 비유와 실험으로 증명하면서 끊임없이 사고하도록 자극한다. 바로 이 책의 주제인 언어와 문화와 생각의 관계에 관해서 말이다.

 

r****g 2012.01.31.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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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메로스는 색맹이 아니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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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지난 2011년은 대한민국이 창건된 이래로 언어철학이 가장 많이 회자된 한 해 였다고 감히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이러한 혁혁한 공로를 세운 존재는 한 권의 책이 아니라 의외로 한 편의 드라마였다. 소설을 원작으로 했다지만 드라마로 제작되어(역시 텍스트보다는 이미지의 힘이 보다 강력한 모양이다) 더욱 회자된 <뿌리 깊은 나무>가 그 주인공이다. 야심차게 한글창제를 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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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지난 2011년은 대한민국이 창건된 이래로 언어철학이 가장 많이 회자된 한 해 였다고 감히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이러한 혁혁한 공로를 세운 존재는 한 권의 책이 아니라 의외로 한 편의 드라마였다. 소설을 원작으로 했다지만 드라마로 제작되어(역시 텍스트보다는 이미지의 힘이 보다 강력한 모양이다) 더욱 회자된 <뿌리 깊은 나무>가 그 주인공이다. 야심차게 한글창제를 밀어붙인 세종과 집현전 학사들의 노고, 이에 대립하는 기득권 계층인 유림 세력들 간의 치열한 언쟁과 물밑의 헤게모니 다툼이 볼만했던 드라마였다. 나아가 세종의 대척점에 선 극중 인물인 정기준의 입을 빌려 ‘한 언어를 알고 쓰는 것이 곧 힘’임을 강조하는 바람에 전 국민이 한글을 구사한다는 평범한 사실에 새삼 자부심을 가지는 계기도 되었다.

지난 연말, 우리가 드라마를 통해 언어를 정치철학화 하여 오늘날 대한민국의 어지러운 세태를 반추하는 한 편의 풍자극을 목격했다면, 여기 이 한 권의 책은 그야말로 순전한 언어철학 논쟁을 담고 있다. 하지만 학계의 이 논쟁은 과연 순수하기만 한 것일까?

 

2. 저자 기 도이처는 자신의 책을 자연nature과 문화culture의 논쟁 한 복판에 위치시킨다. 곧 인간의 언어문법은 타고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촘스키로 대변되는 생득주의자들과, 문법이란 효율적인 커뮤니케이션을 위해 구축된 문화적 진화의 산물이라고 주장하는 문화주의자들(저자는 후자의 입장이다)의 논쟁을 대비시키는 것이다.

이 논쟁은 현재 서구학계를 관통하는 본성nature과 양육nurture의 논쟁, 혹은 유전 대 환경 논쟁과 다름이 아니다. 이 대립상은 기실 중세의 유명론과 실재론 논쟁을 거쳐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유명론은 경험세계인 아래로부터 출발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방법론을 따른 것이고, 실재론은 이데아라는 이상의 세계에서, 즉 위로부터 출발하는 플라톤의 방법론이니까. 그렇기에 이 싸움은 촘스키와 도이처의 일대일 싸움이 아니라 양대 학파의 싸움이며 역사를 가로질러 왔던 오래된 논쟁의 현재진행형인 것이다.

어찌되었든 이 책은 색깔논쟁으로부터 시작한다. 저자가 색깔에 이처럼 몰두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 지점이 바로 인간의 언어획득이 타고나는 것이냐, 아니면 문화의 산물이냐로 갈라지는 양대 학파의 첨예한 전쟁터라고 저자는 보기 때문이다. “문화는 이 요새를 함락하기 위해 지난 150년간 끊임없이 공격해고, 자연은 양보하지 않기 위해 끝끝내 버텨왔다. 이 난공불락의 요새는 바로 색깔개념이다.”(33)

저자가 보기에 이 ‘색깔 요새’만 무너지면 촘스키 또한 함락당하고 마는 것이다. 그렇다고 생득진영에서 일방적으로 당하고 있지마는 않을터, 촘스키 측의 반격이 기대된다. 어쩌면 문화주의자들이 색깔의 요새를 정복했노라고 환호하는 순간에 생득학파에서는 또 다른 성을 축조한 채 반격을 시도하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문외한인 우리는 그저 프리미어 리그 축구를 관전하듯이 양 학파의 전술을 지켜보며 치밀함에 감탄하기만 하면 된다.

 

3. 우선 색깔에 대한 저자의 결론은 이렇다. 그리스의 위대한 시인 호메로스가 소와 와인가 바다가 몽땅 빨갛다라고 말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색맹이라서가 아니요, 고대인들의 색깔인식이 오늘날의 우리 눈과 달라서도 아니며, 어디까지나 색깔을 나타내는 어휘가 오늘날 우리와 말하는 방식과 다를 뿐이라는 것이다.

저자의 부연설명은 계속된다. 호주 원주민인 구구이미티르인들이 사물의 위치를 인식하는 방식은 우리처럼 자기중심좌표가 아니라 그네들만의 독특한 지리적좌표라는 설명은 흥미롭다. 이에 대해 스티븐 핑커같은 이는 “언어는 화자들이 특정한 좌표체계로 생각한다는 사실을 단순히 반영하는 것 일뿐”이라며 공간적 사고가 공간언어를 결정하지, 거꾸로 공간언어가 공간적 사고를 결정하지는 않는다고 주장한다. 반면에 저자는 공간언어가 환경의 영향이 아니라 “문화적 선택의 결과”(273)라며 우리가 그러한 공간 언어를 구사하는 문화 속에서 자랐기 때문이라고 간명하게 정리한다. 도이처의 말은, 내가 속한 이 문화권이 당대 ‘최고’이거나 ‘절대’가 아니라는 도발적 지적이다. 이 주장으로 나는 객관화되므로 견뎌낼 내공만 충분하다면 그의 이야기들은 충격적이지만 신선하다.

또한 남녀의 젠더, 즉 성구별을 가진 언어들, 예컨대 스페인어나 독일어, 불어가 영어 혹은 한국어로 번역될 때 그 미묘한 뉘앙스 혹은 농밀한 내용은 온전히 전달되지 않는다는 언급에서는 절망스럽기 그지 없었다. 성구별 없는 공평무사한 언어를 가진 우리 한국인은 변덕스런 젠더체계 언어를 구사하는 그네들의 시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말인가? 도이처의 말을 따라가다보면 언어의 차이가 문화의 차이를 만들어낸다는 주장에 공감하지 않을 수가 없다. 하지만 못내 껄끄러운 이 마음은 왜일까?

 

4. 이 책에서 정작 내가 주목하는 것은 양대 학파가 설파하는 주장의 핵심이 아니다. 그 주장들의 사회적 파장이다. 도이처의 반대진영에는 하버드의 진화심리학자 스티븐 핑커가 있다. 그의 유명한 책 <빈 서판Blank Slate)>은 라틴어 '타불라 라사(tabula rasa)'를 영어로 의역해놓은 것이다. 이 말은 오래 전 영국의 경험론자 존 로크가 이미 했던 것으로, 모든 인간은 백지상태로 태어나며 따라서 경험과 양육으로 사회적 인간이 만들어진다고 설명하는 유명한 명제인 것이다. 그러나 이 주장은 단순한 철학적 명제에 그치지 않았다. 이를 믿게 된 많은 이들은 태어나면서부터 고착된 신분질서를 받아들여야만 했던 중세사회의 구조에 의혹을 제기하게 된 것이다. 나아가 경험론 철학은 하나의 사회적 동력이 되면서 중세의 신분질서를 요동치게 만들었고 프랑스 시민혁명이나 영국의 산업혁명을 태동하게 만든 사상의 힘으로 작동하게 된다.

나는 촘스키의 보편문법이론을, 그 옳고 그름을 떠나서 몹시도 좋아했다. 왜냐하면 그의 이론대로라면 세계를 제패한 앵글로색슨의 언어나 지금은 점점 사라져가고 있는 타갈로그어나 그 본질에 있어서는 매 한가지이기 때문이다. 우리 인간은 모두 동일한 언어기제를 타고났다는 그의 이론처럼 공평하고 정의로운 가설이 또 어디 있는가 말이다.

불과 수 십여년 전, 우리는 사람과 사람의 높낮이를 매기고 민족과 민족을 편가르게 한 사회진화론과 우생학에 의해 숱한 사람들이 전장에서 또한 가스실에서 죽어간 것을 목격했다. 그런데 촘스키의 이론대로라면 우리는 태생적으로 동등한 인간이다. 우열이 없고 그래서 차별이 있을 수 없다. 그가 미국을 비롯한 전 세계의 불평등과 부조리함에 맞서서 반전반핵 운동가로 나서는 이유는 아마도 그의 학문적 결론과 다를 바가 없어 보인다.

하지만 도이처의 주장대로라면 문화상대주의는 더욱 기승을 부릴 것이고 우월한 문화와 열등한 문화가 있다는 주장에 힘이 실릴 것만 같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서부터 출발한 인류의 이 해묵은 논쟁은 그러나 정답이 가려지지 않은 채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다. 그렇기에 이 논쟁을 진실을 가리기 위한 전투로 몰아가기 보다는 방법론의 차이로 설명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 아, 그리고 이 책, 참고문헌을 싣지 않아서 각주 처리된 책을 찾아보려고 해도 당췌 원제를 알 수 없으니 학문적 가치로는 꽝이다. 번역문은 대체로 유려하지만 간혹 어색한 문장이 출몰하기도 한다. 주로 조사의 배치가 잘못된 것들인데 아무래도 편집부에서 놓친 것 같다. 가령 “구구이미티르 대화에서 일반적인(일반적으로?) 사용하는 단어...”(271) “도시에서 살 때는 실내애서(에서?) 상당히 많은...”(272), 핑커의 주장을 요약한 다음 문장이 “핑커의 사실이(주장이?) 궤변이라고 몰아붙이기는...”(273)

YES마니아 : 로얄 e*****n 2012.01.30. 신고 공감 0 댓글 0
리뷰 총점 종이책
원시 언어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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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조선인 2세인 서경식 교수는 <언어의 감옥에서>에서 자신은 명백히 조선인이지만 사용하는 언어는 일본어 이고, 모국어인 한국어는 그 자신의 모어가 되지 못했기 때문에 그 자신을 '언어'라는 감옥에 갇힌 '수인'이라고 일컫었다. 그는 일본어를 모어로 하여 일본 사회에서 사는 재일조선인은 자신의 정체성마저 일본어를 통해 형성할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고백했다. 언어에는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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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조선인 2세인 서경식 교수는 <언어의 감옥에서>에서 자신은 명백히 조선인이지만 사용하는 언어는 일본어 이고, 모국어인 한국어는 그 자신의 모어가 되지 못했기 때문에 그 자신을 '언어'라는 감옥에 갇힌 '수인'이라고 일컫었다. 그는 일본어를 모어로 하여 일본 사회에서 사는 재일조선인은 자신의 정체성마저 일본어를 통해 형성할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고백했다. 언어에는 그 말을 쓰는 사람들의 특성과 생활방식, 또 그 나라를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실마리가 있다는 프란시스 베이컨의 주장이 맞다면 서경식 교수를 더이상 조선인, 혹은 한국인 이라고 볼 수 없는 것이 아닐까. 일본어를 모어로 사용하고 있는 서경식 교수를 일본인이라고 보는 것이 마땅한 일 아닐까. 때문에 서경식 교수는 그 자신을 '언어라는 감옥의 수인'이라고 일컫은 것이다.

 

이 책의 작가, 기 도이처는 언어학 교수로 언어를 통해 문화를 해석하는 작업을 시도했다. 물론 이 작업을 그가 최초로 시도했거나 한 것은 아니지만, 그 자신은 이 작업을 통해 '언어는 본능이므로 결과적으로 모든 인류의 언어가 같다'는 노엄 촘스키를 비롯한 많은 언어학자들의 주장을 뒤집는 결과를 도출해 내고자 했다. 그러나 나는 모든 언어가 같다는 언어학자들의 주장이 오히려 얼토당토 않은 주장으로 생각되었기에, 이 책을 읽기 시작한 처음부터 어리둥절 할 수 밖에 없었다. 더구나 이 책에서 말하는 문화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예술적 문화가 아닌, 출생으로 인해 선천적으로 주어진 환경 속의 생활 습관, 사고 방식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먼저, 노엄 촘스키를 비롯한 오늘날의 주류 언어학자들은 어떠한 근거로 인류의 모든 언어가 같다라는 주장을 펼치고 있는가 알아야 했다. 그들의 주장을 살펴보자면, 언어는 본능이므로 그 근본적 토대는 인간의 유전자에 이미 새겨져 있고, 발화되는 형태나 음가는 다를지라도 언어의 근본적 구성과 복잡성은 같다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모국어는 인간의 사고에 일정정도 영향을 미친다하더라도, 그 영향은 무시될 수 있을 정도로 미미하며 결국 인류는 모두 똑같은 방식으로 생각한다 라고 보았다. 그러한가, 진정 그러한가. 그렇다면 서경식 교수를 비롯한 세계곳곳의 난민들은 자신의 정체성에 그렇게 고민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 아닐까. 사용하는 언어가 모국어는 아닐지라도 그 자신의 정체성은 언어와는 무관하게 늘 고유한 것일테니까.

문화를 본능의 결과가 아닌 학습을 통해 여러 새대를 거쳐 전해진 사회적 관습으로 볼 때, 그 전달매개는 '언어'가 될 것이다. 때문에 언어는 '문화'속에 존재할 수 밖에 없고, 살고 있는 토양, 환경, 풍속, 역사, 믿음, 지식, 예술, 도덕, 법률 등에 의해 인간의 문화가 다르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언어 또한 문화에 따라 달라질 수 밖에 없다고 본다. 그렇다고 한다면 사용하는 언어가 다르면 그 말의 사용자의 생각 또한 다르다는 것은 너무도 자명한 일이라 생각된다. 전문가가 아닌 내가 볼때 이토록 자명한 일을 이렇게 복잡하고, 산만하게 증명하는 과정이 왜 필요했는지가 책을 읽는 내내 나는 궁금했다.

 

모든 언어의 복잡성을 비교하는 일은 마치 문화의 우월성을 비교하는 것과 같게 생각되어 거부감이 들었고, 미개인, 원시문화를 운운하며 그 자신들의 비교우위를 증명하고자 하는 용틀임으로 보여 지루했다. 언어가 왜 복잡해야 하는가, 오히려 발달되고 고도화된 사회일 수록 더 편리하고 간단한 사용을 위해 단순화되어서는 안되는 것인가 하는 생각에 이르자, 단순한 언어는 결국 인간의 감정 전달을 간소화 하고 그는 결국 비인간화의 지름길이 될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또한 모국어는 기타 다른 문화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사고에 큰 영향을 미치며, 시대적 시점에서는 원시 문화가 없듯이 원시 언어란 없다라는 것이 또한가지의 결론이며, 사용하는 인구수와 관계없이 인류의 모든 언어는 그 고유성이 보존되어야 하고, 유지되어야 한다. 이는 각기 다른 문화를 존중해야 하는 이유와 같다.

어쨌든 언어의 특성은 그 나라의 민족성을 그대로 반영한다는 지은이의 주장은 내게는 너무도 당연한 것이며, 따라서 철학적 사고 또한 분명히 언어에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하는 나로서는 이 책을 읽으므로서 생각이 바뀌었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다만, 이 책을 통해 서경식 교수의 <언어의 감옥에서>를 새롭게 생각해 볼 수 있었고, 그가 말하는 '수인'의 의미를 되새길 수 있었다.

a*****0 2012.01.27.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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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은 소, 와인, 바다가 모두 빨갛다_기 도이처//윤영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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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과 바다의 색깔이 파랗게 보인건 어느날, 언제부터 였나요?   이 책을 읽던 도중에 다섯살 난 조카에서 "하늘이 무슨 색이야?"하고 물어볼 수 있던 기회가 있었다.  녀석은 내 질문에 잠시 생각하더니 처음에는 "검은색!"하고 대답했다.  내가 "검은색?"하고 되묻자, 다시 생각하더니 "하늘색!"하고 대답하는 것이다.  그 "검은색"이라는 대답에 난 조용히 혼자 웃었지만, 다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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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과 바다의 색깔이 파랗게 보인건 어느날, 언제부터 였나요?

 

이 책을 읽던 도중에 다섯살 난 조카에서 "하늘이 무슨 색이야?"하고 물어볼 수 있던 기회가 있었다.

 녀석은 내 질문에 잠시 생각하더니 처음에는 "검은색!"하고 대답했다.

 내가 "검은색?"하고 되묻자, 다시 생각하더니 "하늘색!"하고 대답하는 것이다.

 그 "검은색"이라는 대답에 난 조용히 혼자 웃었지만, 다른 가족들은 "지금이 밤이라 하늘이 검으니까 검은 색이라고 했나보다."하며 넘어갔다.

 물론, 밤이라 그럴 수도 있었겠지만 다른 사람((5세 이상)에게 물어봤을 때는 망설임 없이 "파란색", 혹은 "하늘색"이란 대답을 들을 수 있었음은(밤이든, 낮이든, 날이 흐리든) 어떻게 된 일일까?

 

마치 홀로 음모를 꾸미는 듯한 작은 스릴을 맛보며 그 맛으로 책을 더 즐거이 읽을 수 있었다.

 (작은 방해들이 있었지만.)

 

공학 전공자인 나의 소양으로 본격적으로 보이는 언어학 연구에 대한 이 책은 조금 많이 어려울 것 같았다. 그리고 책을 펴서 실제로 읽기까지 이 책이 이정도로 깊은 이야기를 담고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내가 이 책을 이렇게 빨리, 그것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호메로스와, 무지개, 미개인의 덕이다.

 

책 속에서 저자는 끈덕지게 어떤 질문들을 계속 되뇌이고 다시 되뇌인다.

 예를 들면 호메로스가 일리아드 오디세이에서 표현한 소, 와인, 바다의 빨강이 어떤 이유에서 빨갛게 되었는가 하는 문제라든가, 문화와 자연의 세력다툼 이야기라든가, 언어와 사고의 관계 등의 질문 말이다.

 

결국에 이 책에서 저자가 이야기 하고자 하는 것은 "제약 속의 자유"라는 말로 정리가 된다.

 "제약 속의 자유"란 간단히 말하면 "문화는 자유롭게 스펙트럼을 분할할 수 있지만, 그러한 자유는 자연이 부여한 느슨한 한계 속에서만 허용된다는 것이다."라는 말로 풀어 낼 수 있다.

 (자연이 너무 느슨해져 많은 부분을 문화와 과학에 내어준 감이 없지 않지만 말이다.)

 그리고 언어 역시 문화와 필연적으로 연관되어 문화가 부여한 허용과 제약 속에서 발달하고 사라진다는 이야기 이기도 했다.

 

저자는 이런 결론을 이해시키기 위해 '고대인들의 색깔 인식이 현대인들만큼 세부적이지 못했다' 라든가 '미개인들의 언어는 단순하다' 라든가 '호메로스가 색맹이다' 라든가 '문화가 민족집단 사이의 정신적 차이를 설명하는 유일한 요인이다'라든가 하는 혹 할만한 이야기들을 꺼내서 "정말?"하고 혹하게 만들어놓고서는 그 주장들을 반박하는 증거를 대면서 "그렇지만은 않아"하는 증명들을 보여주었던 것이었다.

 

그런 장치들 덕분에 몇번이나  "오, 그렇군!"했다가 "에, 역시 그렇지?" 했다가 하면서 더 잘 이해하고 문제를 인식할 수 있었던 것은 분명 사실이다.

결국 언어 때문에 같은 현실을 달리 인식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증명해내며 자연과 문화와 언어가 만들어내는 다양성의 측면을 일깨워주는 것이다.(내가 바로 이해했다면)

 

또 다른 이야기로 근거도 없는 이야기가 어떤 사람의 추측성 발언에서 시작해 마치 증명된 사실이 되어 오랜시간 학계를 지배했다는 이야기에는 남의 말 흉내내기, 아는척하기, 시치미떼기가 어떤 관행처럼 되어버린 씁쓸한 학계의 뒷모습을 엿보게도 했고, 새로운 길로 향하는 문을 열기를 망설이는 그들의 안일함에 실망도 했다.

 그래서야 어찌 학문의 발전을 도모하는 위치에 있는 권위자들이라고 할 수 있겠나.

 

 충격적이었던 것은 유명한 니체의 말이라는 "언어의 감옥에서 벗어나 생각하고자 한다면 생각하는 것을 멈춰야 한다."라는 말이  "언어적 속박을 벗어나 생각하고자 하는 순간 생각은 거기서 멈춘다."의 오역이라는 부분이었다.

 문화에 따라 사용하는 언어에 내재된 의미나 상황이 달라질 수 있기에 그 차이에서 엄청난 "오해"가 생기기도 한다는 것이다.

 

결국 서구 유럽에서 말하던 언어의 보편성이 전혀 보편적이지 않으며 되려 가장 보편적인 언어의 특성이 우리가 "미개인"이라고 부르는 이들의 사라져가는 언어 속에 들어있을 것이라는 말은 절로 고개를 끄덕여지게 만들었다.

 강력한 언어들에 밀려 사멸해가는 언어들이 새삼 안타깝게 느껴진다.

 

영어가 필수가 된 우리 한국 사회를 봐도 이제는 한글을 배우기도 전에 ABC를 배우고 국어 문법보다 먼저 영어문법을 익히는 현실을 보며 어찌 남이야기 같을 수 있을까.

 

이런 결론은 결국 저자의 의도와는 다른 "오해"일지 모르겠지만, 이 책을 읽는 내내 한글과 비교하고 떠올리며 읽었고 마지막까지 한글을 걱정할 수 밖에 없게 된 것은 당연한 결과 이기도 하다.

 감상을 적을 때 가장 안타까운 것이 내 언어적 소양과 기술이 아주 형편없다는 점이다.

 문장의 구조도 단어의 선택도 내용의 기술도 모두 허술하게만 보여 늘 불안하다.

 

하지만 우리 한글은 우수하다.

 그리고 특별하다.

 이 책을 통해 얻은 결론은 엉뚱하게도 우리말 우리글 한글에대한 애착을 가져야겠다는 것이었다.

 감상에 적으려고 메모해두었던 내용들을 제쳐두고 이렇게 적기로 한다.

 

어떤 이들은 "고리타분하게 언어를 연구할 필요가 어디있나?"하고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우리들의 모국어는 정말 중요하다.

 왜 일제가 우리의 말과 글을 말살하려 했던가를 떠올려보라.

 우리의 말이 없다면 우리가 보고, 느끼고, 배운 것을 정확하게 표현하고 후대에 전할 길이 막혀버리고 만다.

 그러다보면 그들의 언어와 문화에 휩쓸려 우리의 정체성을 잃게 될 것이라는 것은 명백한 결과이며 우려해야만 하는 이유가 된다.

 

우리의 소중한 경험과 마음을 "오해"없이 바르게 전하기 위해 우리의 말을 배우고 익히고 소중히 해야겠다.

 

 

문자 전통이 있는 언어와 없는 언어 사이에 상당한 차이가 있는 이유는 매우 분명하다. 문자가 없는 사회에서 어휘의 수는 상당히 제한적이다. '수동적인 어휘'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예컨데 어떤 어휘를 능동적으로 사용하지 않으면 기억에서 멀어질 것이고, 그렇게 사람들이 그 어휘를 자주 쓰지 않으면 다음 세대는 그 어휘를 아예 들을 수 없고, 그래서 결국 영원히 사라지고 말 것이다. _ 163p

 

모국어는 이미 인식된 사실을 재현하기 위한 도구일 뿐만 아니라 이전에 인식하지 못했던 진실을 발견해내는 데 상당히 많은 역할을 하는 도구이다. 언어는 생각의 기관을 형성한다. 따라서 문법규칙과 사고방식의 규칙 사이의 면밀한 관계가 존재한다. 사고가 언어에 의존한다는 일반적인 말이 아니라 자신들이 사용하는 언어에 일정 정도 의존한다. _ 196-197p

 

 



c*********p 2011.12.11.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