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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나이를 먹는 만큼, 더 나이드시고 병약해지시는 부모님... 누구나 어쩔 수 없이 맞닥뜨려야하는 인생의 한 부분이다. 또한 언젠가는 나에게 다가올 나의 현실이기도 하다. <웰다잉 다이어리>는 그 현실에 대해 가감없이 솔직하게 보여줌으로써 선배의 지침을 듣는 것 같기도 하고, 하소연을 나눌 수 있는 친구를 만난 것 같기도 하다. 잘 사는 것만큼, 잘 죽는 것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되었을 때, 정말 반가운 책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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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하는 죽음에서 맞이하는 죽음으로’라고 요약하고 있는 <웰 다잉 다이어리>는 부모에 관한 문제로 고민하는 사람들의 심리치료를 해온 재니스 스프링박사가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홀로된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까지 5년에 걸쳐 돌보면서 겪은 다양한 문제에서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 그리고 어떻게 해결했는지 진솔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도 ‘우아하게 늙어가기’와 ‘품위있게 죽기’에 관심이 많아 꼭 읽어보고 싶었습니다.
스프링박사는 어머니가 돌아가신 2000년 10월 21일에서부터 2005년 10월 7일 세상을 떠난 아버지의 장례를 마무리한 10월 16일까지의 기록으로 책을 구성하고 있습니다. 다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기 직전인 2005년 10월 3일에 쓴 글로 시작해서 2005년 10월 3일에 쓴 글로 마무리하고 있는 점이 특이하다고 하겠습니다.
우리 사회가 핵가족화하면서 어르신들의 노후를 돌보는 일이 대가족을 이루고 살던 옛날과는 여러면에서 힘들어졌습니다. 사회적으로도 뒷받침해줄 수 있는 체계가 세워져 있지 않으니 더욱 자녀들을 힘들게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모시고 사는 것도 쉽지 않고 그렇다고 요양시설에 모시는 것도 쉽지 않은데다가 요양시설에 모시는 것에 대하여도 사회적 체면을 중시하는 우리나라의 문화에서 결정이 쉽지 않은 일입니다.
자녀들이 일찍부터 독립해서 생활하고, 다양한 형태의 요양시설이 넉넉하게 있는 미국 사회에서도 최근에는 죽음을 앞두고 자녀와 같이 살기를 희망하는 부모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저자의 경우도 평소 아내의 도움으로 생활을 하던 아버지가 아내의 죽음을 계기로 딸에게 같이 살아줄 수 있냐고 의사를 타진하는 모습을 보면서 미국사회가 변하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자는 자신의 집에서 아버지를 모시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움이 많다고 판단하고 아버지의 요청을 거절하는데 그 대안으로 자신이 사는 근처의 요양원에 모시고 수시로 찾아 돌보기로 결정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꼭 기억하세요. 아버님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이따금 아버님을 찾아뵙는 거예요(38쪽)”라는 조언을 들었던 것이 계기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저자 역이 아버지를 요양원에 모시는 것이 마음편한 것만은 아닙니다. 저자가 상담하고 있는 사람들과의 상담을 통하여 저자가 느끼는 마음의 갈등이 전해지는 것 같습니다(52쪽).
저자가 아버지를 돌보는 과정에서 겪었던 문제들 가운데 저 나름대로 정리해둘 필요가 있다 싶은 점들을 정리해보겠습니다. 우선은 간병인을 정하는 문제입니다. 간병인 역시 교육을 받고 자걱을 갖춘다고는 하지만 역시 인간인지라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돌보는 분에게 가장 맞는 간병인을 고르는 일이 쉽지 않지만, 간병인과 의사소통을 함에 있어 진심을 다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간병인에 의하여 야기되는 노인학대문제는 어떻게 대응하는지에 대하여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197쪽)
요양시설을 고르는 것도 쉽지 않은 일 가운데 하나일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건강보험에서 지원하는 요양병원과 노인요양보험에서 지원하는 요양시설의 두 가지 형태가 있어 노인의 건강상태에 따라 다른 결정을 하게 된다는 알아야 하겠습니다. 특히 요양병원은 병원의 한 가지 형태로서 치료를 받음으로서 질병상태가 호전되거나 병의 진행이 개선될 가능성이 있는 경우에 입원하여 치료를 받는 병원이라고 하겠는데, 제가 근무하고 있는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서 전국의 요양병원의 시설과 서비스내용을 평가하여 등급을 매겨 발표하고 있는 정보를 활용하여 좋은 요양병원을 찾아보시면 되겠습니다.
저자가 아버지의 죽음을 어떻게 맞았는지 설명하는 부분에서는 참 많은 것을 느꼈습니다. 식사를 하지 못하는 아버지를 위하여 음식을 공급할 관을 위에 설치하는 문제를 가지고 의료진과 갈등을 빚는 과정에서 임상의로 일하고 있는 저자가 보이는 집착에 가까운 고집을 쉽게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아버지를 담당하고 있는 의료진에서는 적극적인 개입이 환자를 더욱 힘들게 할 수 있다는 점을 조언하고 있는데, 과거 환자의 생명을 조금이라도 연장하기 위하여 갖은 치료를 제공하던 분위기와는 사뭇 달라졌다고 하겠습니다. 환자의 삶의 질을 고려한 치료제공의 결정이 최근의 추세라는 것입니다. 느리게 사는 삶을 실천한 스콧 니어링의 경우 자신의 삶을 마무리할 때가 되었다고 판단하고 금식을 하면서 죽음을 맞았다고 합니다. 자신의 죽음에 대한 확고한 생각을 미리 정하여 자녀에게 남겨두는 것이 자녀의 고민을 덜어주는 길이 될 것입니다.
불필요한 연명치료를 하지 않도록 사전에 의사를 표시해두는 회생치료금지(Do Not Resuscitate; DNR)에 대하여 저도 긍정적으로 생각해왔습니다만, 이 용어에는 적극적인 치료를 거절하는 부모의 권리를 지킨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태만과 포기를 의미하고 자식이 살인자로 몰릴 수도 있다는 설명과 함께 자연사를 허용하라(Allow Natural Death; AND)라는 용어를 사용하자는 움직임이 제안되고 있다는 저자의 설명에 크게 동감하게 되었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끝으로 저자가 임종이 가까운 아버지에게 돌아가신 다음 일을 어찌하면 좋겠는가 하는 의논을 꺼내지 못하고 아버지의 눈치만 살피지만, 아버지는 이미 마음 속으로는 준비를 하고 있더라고 고백하는 부분도 눈여겨둘 부분이라 생각합니다.
5년이라는 시간은 결코 짧은 기간이 아닙니다. 이 기간동안 아버지를 돌보는 과정에서 저자가 겪은 타인 혹은 가족과의 갈등이 왜 생겼는지 등을 읽으면 독자들도 나름대로의 판단이 설 것으로 생각합니다. 제가 요양병원의 평가에 참여하면서, 우리들 모두 피할 수 없는, 언젠가는 신세를 져야 하는 요양병원의 수준을 향상시키는 일이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자주 듣습니다. 어쩌면 우리 세대는 평균기대여명이 100세를 넘어가는 세상을 살게 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노년을 어떻게 살아낼 것인가에 대하여 더 많은 고민을 해야 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런 고민을 하는 과정에서 많은 도움을 이 책에서 얻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 이 리뷰는 예스24에서 제공한 책을 읽고 작성된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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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나이 30대 중반. 지금껏 살아오면서 누군가를 하늘나라로 보내야했던 경험이 많지는 않다. 다행스럽게도. 하지만, '내가 또는 내 가까운 누군가가 운명한다'는 것은 언제든 불현듯 닥칠 수 있는 일이다. 아니, 너무나 자연스러운 섭리다. 이 책을 조심스럽게 집어든 이유도 사실은, 이렇게 불현듯 닥칠 수 있는 운명 또는 자연의 섭리를 두려워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막상 책을 펼쳐 찬찬히 읽어보니, '과연 내가 이런 책을 읽어낼 수 있을까' 했던 염려는 사라진다. 나이든 홀아버지를 요양원에 보낸 딸의 이야기가 잔잔하고 애잔하게, 때로는 죄책감과 서운함이 물씬한 채 묻어나온다. 딸이 느끼는 다양한 감정들과 감정을 일으키는 상황들도 매우 구체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아마 이 때문에 더욱 남 얘기처럼 들리지 않는 것이리라.
살다보니, 모든 것이 반드시 '이유'가 있어야만 한다는 법도 없는 것 같다. 우리가 이유없이 죽음을 맞듯이 말이다. 이 책을 반드시 읽을 수 밖에 없겠구나 하는 나의 다짐도, 이유를 설명하라면 멀뚱할 뿐이다.
두어 권 더 주문해서, "이 친구라면 이 책을 선물하는 나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거야." 싶은 사람들에게 배송해주었다. 아무에게나 선물하기에는 망설여지는 책이라, 그들이 나를 알고 내가 그들을 알고 있는 상황이 전제되어야 했다.
나는 그들에게 "그래, 이 책을 읽어보니 어땠어?"하고 묻지 않을 것이다. 삶이 어디, 이유 투성이던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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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니스는 갑작스런 어머니의 죽음을 슬퍼할 겨를도 없이 나이 들고 병약한 아버지를 보살펴야할 책임을 떠안게 된다. 그 동안은 어머니의 일이었을 모든 일이 딸 재니스의 몫이 된 것이다. 세계 어디를 가도 부모님을 요양기관에 모신다는 것은 자녀에게 죄책감을 불러오는 모양이다. 재니스 또한 마찬가지인데 그러나 어쩌겠는가. 재니스에게도 돌봐야 할 환자-재니스는 직업이 의사이다-와 가족이 있고, 자기만의 생활이 있는데 말이다. 아버지는 독립생할시설인 '서머우드'에서 그럭저럭 잘 적응하는 듯 하다. 때론 자기 말만 하는 인간적으로 정이 가지 않는 사람과 부대껴야 할 때도 있지만 그럼에도 뜻이맞는 친구들을 사귀기도 했다. 하지만 문제는 아버지는 하루가 다르게 늙어가고 있고- 넉달 전만해도 보조보행기구를 격렬하게 거부하다가 이제 그것이 없으면 움직일 수가 없고, 몇개월 전만해도 기저귀 착용을 당황스러워했지만 이제 그것이 없으면 더 당황스러워지는 상황들- 그것은 죽음이 다가온다는 이야기이다.
재니스는 아버지와의 5년간을 한 권의 책으로 쓰면서 솔직해지기 위해서 노력했다고 한다. 그 점은 책 속에서 여실히 드러나는데 아버지가 피섞인 소변을 보지만 응급실에서 저녁을 보내기 싫어서 그대로 서머우드에 남겨두고 온다던지, 아버지의 상태가 안좋은데도 간병인에게 맡겨둔채 집으로 친구들을 초대 한다던지, 아버지가 응급실에 가야하는 상황에서도 재니스는 시간을 벌어보고자 아버지에게 음식을 먹인 일이라던지 - 바로 그날 저녁 응급실에 실려간 아버지는 위로 음식물을 넘기지 못하기 때문에 관을 삽입해야 한다는 진단을 받게 되었다. - 그리고 호스피스 병동에 아버지를 두고 자신의 예약된 환자를 진료하러 갔다가 아버지의 임종 소식을 듣게 된 일. 이런 내용들은 솔직하다 못해 고해성사 수준이다. 그럼에도 재니스는 아버지를 위해 최선을 다한 것이고, 재니스가 아닌 그 누구라 하더라도 더 나은 상황을 만들지 못했을 것임을 모두가 알고 있다. 아버지는 늙었고 죽어가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이 책의 광고문구는 우아하게 늙어가는 방법을 알려주는 심오한 지혜가 담긴 책! 이라고 쓰여져 있다. 하지만 우아하게 늙어가는 방법이란 없다. 혼자서 양말을 신기가 힘들어 20분간 끙끙 거리고, 밤에 일어나 침대에 걸터앉아 소변병에 소변을 받고, 하지만 상황은 더 악화되어 기저귀를 차게 되는 것. 자신의 프라이버시는 깡그리 무시 당한채 간병인이 옷과 기저귀를 갈아입혀주는 것 - 재니스의 아버지는 간병인이 자신을 짐승처럼 대한다고 하소연했다 - 이 과연 우아하게 늙는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아마도 이 책의 공동저자 재니스의 의도는 우아하게 늙어가는 방법 보다는 다들 그렇게 늙어가고 있으니, 설령 당신의 부모님, 혹시 당신이 그렇게 된다 하더라도 너무 낙심하거나 슬퍼하지 말라는 메세지로 받아들여야 할 것 같다.
재니스가 자신의 경험을 솔직하게 책으로 써준 데에 진심으로 감사하지만 나는 이책을 부모님께는 보여드리지 못할 것 같다. 재니스의 감정에 깊이 공감은 하지만 그 감정을 부모님이 아시게 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실제로 나의 아버지는 연명치료를 받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나에게 언급한 적이 있다. 당시에는 전혀 와닿지 않는, 그냥 지나가는 말처럼 들렸던 그 말씀이 이 책을 읽고 난 지금은 무척이나 큰 짐으로 남았다. 내가 과연 아버지의 연명치료를 거부할 용기를 낼 수 있을 것인지 생각만해도 아득해 진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의 마지막을 읽으면서 재니스와 함께 울었다. '웰 다잉' (품위있는 죽음)이라는 것은 남아 있는 자녀의 죄책감을 덜어주기 위한 면죄부 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 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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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는 건 나니까, 내 의견을 물어봐 주겠니?"
『웰 다잉 다이어리』는 저자가 나이 든 아버지를 돌보면서 보낸 5년을 기억하며 쓴 에세이다. 때로는 푸른 목초지로 때로는 음산한 땅으로 안내하는, 죄책감에 짓눌리고 고통에 압도당하고 그러면서도 아버지를 사랑하는 딸의 목소리로 점점 시들어가는 아버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웰 다잉, 품위 있는 죽음을 준비하는 아버지의 하루하루를 일기형식으로 리얼하게 담은 이 책은 죽음과 관련된 여러 가지를 자신의 의지대로 미리미리 계획하고 준비함으로써 사랑하는 자녀들이 부담스럽고 끔찍한 결정을 내리지 않도록 배려하는 방법에 대해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다. 가까운 이의 죽음을 앞둔 이들에게 위로와 공감을 전하고, 자신의 죽음을 앞둔 이들이 고통과 무기력과 외로움을 덜 수 있도록 도와준다. <교보문고>
'죽음'이라는 것으로 대화를 나누기에는 어려움이 많다. 특히 가까운 사람의 죽음이라면 더욱 그럴 것이다. 입버릇처럼 '죽겠다', '죽겠네' 같은 말과는 차원이 다르다. 변화하지 않는 사실이지만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그리고 그 죽음을 두려워한다. 나도 그렇다.
책속 이야기는 일반적인(?) 한국인의 생각과 다르게 행동한다. 몸이 편찮은 아버지를 요양원에 맡기는 것이다. 집에서 모시는 것은 자신의 일에도 영향이 있고 집도 그렇게 휼륭한 안식처는 아니다.라고 생각해서 요양원에 모신다. 중요한 것은 요양원에 모시는 것과 집에서 같이 지내는 것 중에서 무엇이 중요하다고 따지는 이야기는 아니다.
'구구팔팔이삼사'는 99세까지 팔팔하게 살다 이틀 앓고 3일째 죽는 것이 행복한 인생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2일 앓고 3일째 죽는 것은 아니다. 점점 쇠약해지고 퇴보한다. 시력도 나빠지고 판단력, 감각 등이 떨어지면서 운전을 하지 못하게 되고 걷는 것도 힘들어진다. 먹는 것도 녹록지 않다. 죽을때까지 입으로 먹을 수 있으면 그것도 행복일수 있다. 관을 통해서 음식을 먹어야 하는 경우가 생길수 있다.
"어른들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만큼 고결하다면 그들의 건강한 아이들은 삶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p.93
웰다잉, 누구에게나 다가오는 죽음을 당하는 죽음이 아닌 맞이하는 죽음으로 받아들이자는 것이다. 다시금 현실에서 멀어진 죽음에 대한 이야기는 지금이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다가온다. 그리고 웰다잉의 방법은
- 자녀들이 노력을 하면 꼭 감사 표시를 해야 한다. - 죽음에 대해 바라는 바를 자녀들에게 아주 상세하게 이야기 해야 한다. - 지팡이나 보행 보조기를 사용한다고 해서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다. - 친구들과 가족에게 그들을 얼마나 사랑하며 얼마나 자랑스러워하는지 얘기해야 한다. - 오래된 상처를 치료하길 권한다. - 기저귀에 소변을 본다고 해서 비참해하지 마라. ...
이밖에도 여러가지가 나온다. 하지만 사람마다 각자의 개성이 있는만큼 꼭 따라야할 규칙 같은 것은 아니지만 자신의 변화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과 주변사람들과 돈독하게 지내는 것이다.
물론 쉽지 않은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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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순간부터 나의 죽음은 한없이 가벼워지고 님의 죽음은 한없이 무거워져 버렸다. 어릴 때는 정반대였다. 한밤중 귓가에 들려오는 부모님 울음소리는 나에게 그저 스쳐지나가는 가벼운 에피소드였다. 다음날 물으면 친지 어르신 중 어느 한 분이 별세하신 것이다. 비록 이름도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분이지만 부모님의 충혈된 눈과 눈물을 보면 나 또한 자연스레 슬퍼졌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였다. 아무런 상실감도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어린 시절의 나는 나의 죽음을 무겁게 생각했다. 마치 구름다리나 정글집 꼭대기에서 느끼는 그런 공포감 혹은 낭떠러지에서 떨어지는 경악의 감정이 바로 죽는 순간의 느낌이 아닐까 싶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내 죽음을 자조할 수 있는 지경에 이르렀다. 하지만 나이든 부모의 죽음은 함부로 입에 올릴 수 없는 그런 터부로 남았다. 솔직히 웰 다잉이 무엇인지 여전히 잘 모르겠고 생각만하면 괜스레 장중한 분위기가 연출된다. "어른들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만큼 고결하다면 그들의 건강한 아이들은 삶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하는데 요즘 들려오는 소식에 의하면 외려 정반대의 일이 벌어진다. 심리학자 에릭 에릭슨의 진단이 틀린 것일까. 왜일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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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죽음과 마주대할 때 과연 자유로운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 어느 누구도 피해갈 수 없고 그 누구도 예외란 없는 죽음의 법칙이라고나 해야할까? 가끔 죽음을 생각하지만 어쩐는 죽음은 나를 비켜가고 거리가 먼곳에 있을것만 같은 예감으로 우리는 살아가지 않을까한다. 저자가 아버지를 간병하면서 느끼는 수많은 고뇌 연민 .. 부모의 죽음과 연계된 일련의사건들을 일기형식으로 써서 더 가슴에 와닿았을지 모른다. 자기를 낳아주고 길러준 그 분에 대한 예의라서 마지막을 지켜드려야 하는가 하는 도의적인 책임과 아니면 지금 현재 나는 살아있고 행복하고 내가 할 일은 너무 많아서 도저히 옆을 지켜드릴 수 없는 불가피한 상황속에 느끼는 죄책감 또한 우리가 짚고 넘어가야 할부분이다.
저자가 말한 것처럼 아버지를 잃은 상실감을 생각해야 하나 아니면 아버지가 살아계시면 그 연민속 피로감은 어떻게할것인가? 살아있기를 바라지만 그 많은 뒷감당을 감내해야하는 고통을 받아들일것인가 하는 어떤 결정도 완벽할 수 없는 상황에 부딪힌 저자를 바라보면서 내 자신또한 안타까웠다. 내가 자식으로서 과연 그부분을 어느정도 통제하고 관리할 수있을까? 책을 읽으면서 많은 생각들이 미친 듯이 흘러갔다.
책을 읽는 내내 나는 과연 내 부모님이 이와같이 병들어서 힘든상황에 내가 하던 일들을 팽개치고 달려갈수있을까하는 의문이 많이 들었다. 갑자기 아프다는 아버지의 소리를 듣고 한걸음에 달려가 응급실로 데려가거나 병원에 연락해 예약을 하거나 아니면 끊임없는 요구에 과연 예스라고 항상 응할 수 있는 마음의 자세가 나에게는 있기나 한걸까? 수많은 질문들을 나에게 던지는 책이었다. 그렇치만 완벽한 대답을 할 수 없는 책이기도 했다. 마지막에 관을 통해 음식물을 넣을것인가 말것인가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는 저자는 지금을 사는 우리의 모습이기도 할 것이다. 부모님이 살아계시는한 최선을 다해 수명연장에 동의해야 할것인가 아니면 살아있는게 살아있는게 아닌 모습을 바라보며 할 도리를 다했다는 죄책감을 벗어나기 위해 아니면 주위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 아니면 부모님이 그것을 원하다는 생각으로 결정할것인가에 대한 많은 물음들이 다가왔다.
마지막으로 저자가 한말이 가슴을 때렸다. 부모의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 자기자신의 죽음과 대면할게 된다는 그말... 이건 앞으로 우리부모님이 맞이할 문제가 아니라 나 자신인 것을... 내가 어떤죽음을 맞이 할것인것가에 대한 진지한 논의가 필요할것같다. 내가 유한한 인생임을 다시한번 느끼면서나는 정말 오고 있을까 아니면 가고있을까.. 죽음에.. 생명이 있는 한 죽음은 피할수 없는 숙제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 숙제에 대해 미리 생각해 놓는다면 어떤 죽음을 맞이해야하는가는 답이 나와있지 않을까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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웰 다잉(품위있는 죽음)이란 과연 무엇일까? 인간의 수명이 점점 늘어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누구나 건강하게 살다고 깨끗한 죽음을 맞이하고 싶은 것이 많은 인간들의 바람일 것입니다. <웰 다잉 다이어리>는 임상심리전문가인 딸이 죽음을 맞이하는 아버지에 대한 하루하루 솔직하게 쓴 일기입니다.
5년전 주인공은 엄마의 죽음이후 아버지에 대한 책임, 그러면서도 나만의 공간에서 살고 싶은 이기적인 마음도 솔직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처음으로 같이 살고 싶다는 아버지의 부탁을 냉정하게 거절합니다. 그리고 아버지를 위해서 찾은 곳이 서머우드라는 요양원입니다. 나이드신 분들이 독립적인 공간에서 더이상 생활을 할 수 없을 때 찾게 되는 곳이 어쩌면 요양원인 셈입니다. 서머우드에서 아버지는 여러친구들을 만나게 되고 나름 잘 지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병색이 짙어져감에 따라 아버지에 대한 사랑이 커짐을 주인공은 깨닫게 됩니다. 아버지에 대한 딸의 사랑이 일기의 구절구절에서 느껴집니다. 그리고 임상심리전문가이므로 자신이 경험과 비슷한 상담... 죽음을 앞둔 부모를 두고 있는 자식들의 이야기, 그리고 12년 병간호를 하다가 어머니를 보냈지만 홀가분하다고 말하는 딸의 이야기...등등이 일기 사이사이 나옵니다.
마지막으로 아버지가 폐렴에 걸리고 음식을 삼키지 못하게 되고, 관을 삽입하는 결정을 하게 되었을 때...그저 연명치료를 해야 하느냐에 대한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됩니다. 어쩜 이는 우리 자신이 죽음의 문턱에 있을 때나 내 부모가 죽음의 문턱에 있을 때 생각하게 되는 것일 것입니다. 그저 삶에 어떤한 의미도 없이 그저 하루하루 목숨을 이어가는 것이 옳은 것일까? 생각해 보게 됩니다. 그래서 안락서라는 것이 아직은 살인처럼 받아들이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에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 생각하게 합니다. 그저 식물인간처럼 지내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고민하게 되지요. 내게 만약 이런 경우에 닥친다면 나는 과연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부모의 죽음을 받아드리지 못해서 그저 이기적인 선택을 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내 자식이 나를 놓지 못해서 그 끈을 붙들고 있는다면 나는 어떡하지? 책을 읽는동안 답을 내놓지 못했어요. 하지만 나의 죽음만큼은 웰 다잉(품위있는 죽음)였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봅니다.
내가 별다른 사고가 없다면 보통의 수명을 살겠지요. 그럴 때 어떡할지...우아하게 나이를 먹기 위해 준비를 해야 할 것입니다. <웰 다잉 다이어리>를 읽으면서 주인공과 아버지의 모습을 보면서 내 앞의 삶을 돌아보게 되었고, 올바르게 나이드는 수업을 받은 기분이랍니다. 마지막 구절이 와닿아서 적어봅니다. 유대인의 기도서인 마조르 한구절... '하루하루는 두루마리 종이와 같다. 그 위에 사람들이 당신에 대해 기억해 주길 원하는 것만 적어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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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십 년 동안 엄마는 가슴 통증에서 암의 공포, 그 밖에 이런저런 병에 시달리는 아버지를 돌보느라 자신의 고통은 안중 에도 없었다. 꼭 우직한 소 같았다. 세상이 제대로 돌아간다면, 오늘 엄마가 아버지의 죽음을 슬퍼해야 했을 것이다. 언젠가 엄마를 반강제로 병원에 모시고 갔다. 엄마는 평소 엄 마답지 않게 자꾸 자리에 누우면서도 만성 변비 때문에 아픈 것 이고, 약 몇 알만 먹으면 다 낫는다며 고집을 부렸다. 하지만 평 생 피워 온 담배가 결국 엄마를 쓰러뜨렸고, 그로부터 6주 뒤에 엄마는 세상을 떠났다. 우리 가족의 랍비인 스타인은 아버지의 가슴에 검은 리본을 달 아 주고 끝을 찢었다. 스타인은 아버지의 창백하고 주름진 얼굴 을 안쓰럽게 바라보며 말했다. "깊은 사랑이 있는 곳에 깊은 상실감도 있습니다. 누군가를 마 음을 다해 사랑했기 때문에 그 사람을 잃은 슬픔이 그처럼 큰 겁 니다." 부모님은 20대 후반에 약혼했다. 그때가 1944년이었다. [카사 블랑카]가 최고의 영화로 이름을 떨치고, 방송마다 빙 크로스비의 [아일 비 시잉 유 I'll Be Seeing You]를 틀어 대던 시절이 었다. 아버지가 육군에 있을 때 엄마는 기차를 타고 아버지 부대 로 가 주말을 보내고 왔다. 사랑이 있었기에 엄마는 용감할 수 있 었다. 그러다 아버지의 부대가 필리핀으로 이동했다. 전쟁이 끝 나고 나서 두 분은 결혼했다. 결혼 생활 54년 동안 아버지가 입원 했을 때 외엔 단 한 번도 두 분이 잠을 따로 잔 적이 없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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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도의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해야 되는지에 대한 관심이 여느 때보다도 높은 요즘이다. 이왕 사는 거 잘 살기 싫은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마는 그게 말처럼 쉽지가 않은지라 하루에도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책이 쏟아져 나오고 강연이 펼쳐진다. 그런 상황에서 이제는 잘 죽는 방법까지 고민해야 된다니 머리에서 김이 나려고도 한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삶과 죽음의 굴레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음을 우리는 익히 알고 있다. 아직은 젊으니까 머나먼 미래의 일일 거라며 생각하기를 꺼려하고 뒤로 미루는 이들이 대부분인데, 내가 언제 죽을 것인지를 정확히 예측할 수 있는 이가 과연 이 세상에 얼마나 되겠는가. 70-80년 혹은 그 이상의 시간을 이 땅에서 살아온 이들이 그렇지 않은 부류보다 죽음에 조금 더 가깝다는 게 일반적인 생각이지만, 호시탐탐 인간의 신체와 정신을 파고드는 질병과 사고 등을 감안한다면 세상을 떠남에 있어서 순서란 존재치 않는다. 특히 죽음은 타인의 이야기 아닌 내가 주체가 되어 치러야 할 것이라는 점에서 그에 대한 고민을 마냥 연기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비록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몸서리치고 불쾌하기 짝이 없을지라도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는 그 말을 좇아 이젠 잘 죽는 방법에 대해 고민을 해야만 한다. 저자는 타인의 아픔을 들어주고 공감하는 직업을 가졌다. 그런 그녀에게도 익숙하지 않은 것이 있었으니 바로 죽음이었다. 상대적으로 많은 이들의 죽음을 접해왔을 그녀지만, 제 부모의 죽음 앞에서 그녀는 초보자의 티를 벗지 못했다. 먼저 찾아온 것은 어머니의 죽음이었다. 평생 제 남편을 돌보느라 바빠 자신의 건강은 챙기지 못했던 어머니의 죽음은 뜻밖이었다. 아무런 준비도 할 수 없었고 이미 벌어진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그녀에게 허락된 전부였다. 그에 반해 이미 여든을 넘은 아버지의 죽음은 서서히 찾아왔다. 오래전부터 각종 질병에 시달려온 그녀의 아버지는 죽음이 하나의 ‘과정’임을 그녀에게 인식시켰다. 서서히 병들어가는 아버지, 하나둘씩 망가지는 그 모습은 자연스러운 노화였지만 기쁘게 받아들일 만한 일은 아니었다. 처음에는 그저 걸음이 조금 불편했던 사람이 어느 순간부터는 보조기 없이 걷지 못하고, 마침내 휠체어를 더욱 편해하며 온종일 앉아서, 누워서 지내야만 하는 상황이라면 어느 누가 이를 기뻐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그녀는 말했다. 제 아버지가 지금 당장 돌아가신다면 자신이 감당해야만 하는 슬픔이 혼란스럽지만, 만일 5년의 시간이 더 주어졌을 경우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더 바라보아야만 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로 힘겨울 것이라고. 이기적인 자녀의 발로라고 발끈하는 이들도 있겠지만, 아픔은 제 것이 아닌 다음에야 아무리 부모-자녀 관계일지라도 이토록 피상적으로 그려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아버지를 돌보는 것이 자녀라면 당연히 행해야 하는 의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오늘날에는 많은 이들이 요양원이나 기타 분리된 장소에 제 부모를 모시고는 한다. 그녀 역시 끝끝내 아버지와 주거지를 달리 하는 삶을 고수했다. 지나고 나면 모든 것이 후회되듯 임종의 순간을 지키지 못했다는 자책감과 함께 이는 평생 그녀를 괴롭힐 법한 일일수도 있었다. 특히 마지막 순간에 그녀가 내려야 했던 연명치료를 둘러싼 선택은, 제 소중한 가족을 보내주어야만 하는 무기력한 상황에서도 결국 선택으로부터 빗겨갈 수 없는 것이 인간임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죽음 앞에서 요란스럽게 이를 포장하거나 거부하는 것이 옳지 않다는 생각에 입각했을 때 그녀의 선택은 비난 받아야만 하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의사표현을 할 수 있을 때 적어도 한 번은 죽음을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어 보는 것이 인간의 존엄성을 마지막까지 유지시킬 수 있는 길일 것이다. 안타깝게도 죽음 앞에서 침묵하는 데에 익숙한 우리로서는 적절한 때를 놓치고는 죽음의 주체를 죽음으로부터 분리시키는 누를 범하고 있다. 아무렇지 않은 듯 했으나 자신의 죽음을 단 한 순간도 고민치 않은 적이 없었다는 저자 아버지의 고백처럼 죽음의 주체는 죽음을 다룰 수 있는 적절한 때를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왜 인간은 죽어야만 하는지 모르겠다는 나의 말에 죽음이야말로 삶을 완성시키는 열쇠와도 같단 응답을 했던 이가 있었다. 그는 만일 삶이 영원히 지속된다면 그 삶은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이라고 나에게 말했다. 시작이 의지에 의한 게 아니었던 것처럼 끝도 바라는 대로 맺어지지는 않겠지만, 충분히 준비한다면 죽음도 괜찮은 것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웰 다잉(well dying)도 삶의 엄연한 한 부분이 아닌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