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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딜 수 없네, 사랑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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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을 부른다. 낙엽이 짓밟혀 흔적조차 남지 않은 마른 길을 걸어갈 때. 마주 앉아 밥을 먹다가 말이 끊어질 때. 붉은 달이 뜬 걸 보면서 대수롭지 않다는 듯 오늘을 쉽게 넘기려 들 때. 타인에게는 결코 보여줄 수 없는 표정을 숨기느라 속이 타들어갈 때 고요히 이름을 불러본다. 두 음절의 단어를 뱉고 나면 바람이 불어와 젖은 마음들을 말려주고 떠난다. 불안은 잠시 수그러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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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름을 부른다. 낙엽이 짓밟혀 흔적조차 남지 않은 마른 길을 걸어갈 때. 마주 앉아 밥을 먹다가 말이 끊어질 때. 붉은 달이 뜬 걸 보면서 대수롭지 않다는 듯 오늘을 쉽게 넘기려 들 때. 타인에게는 결코 보여줄 수 없는 표정을 숨기느라 속이 타들어갈 때 고요히 이름을 불러본다. 두 음절의 단어를 뱉고 나면 바람이 불어와 젖은 마음들을 말려주고 떠난다. 불안은 잠시 수그러들고 고통의 얼굴을 외면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질 수 있다. 시간은 착실히 적립되어 달력을 찢어내는 일이 가장 귀찮은 일이 되곤 한다. 어떤 나무들은 벌거벗은 제 몸을 드러내고도 부끄러운 줄 모르는데 나는 딱딱한 가면을 쓰고도 눈을 맞추지 못하고 말을 더듬기만 할 뿐이다. 언어는 빈 공간으로 사라지고 이야기의 파장이 남는다. 무지개색으로도 나의 산 영혼을 위로하지 못하는 빛의 공허함이 번진다. 

  어깨에 들어차는 한기를 이기지 못한다. 한파 뒤에 찾아온 영상의 날씨에도 춥다는 착각에 빠져 산다. 춥지 않다. 이불 두 어채가 바닥에 깔려 있고 버튼을 누르면 온수가 쏟아져 나온다. 처음부터 그랬다는 듯 언제나 자신은 공평했다는 듯 태양은 자신의 열기를 우주 밖에서 쏘아 주고 있다. 빨래는 반나절만에 마르고 빛이 들어온 자리에 발바닥을 대고 있으면 따뜻하다. 추웠다. 그 겨울의 긴 날들은 수도가 터지고 얼지 않은 수도에서 길어온 물을 데워 씻었다. 남극의 펭귄들이 허들링을 하며 추위를 이기는 다큐를 보면서 이곳은 도대체 왜라는 의문이 들 만큼 그 방은 한기로 가득했다. 전기난로 불이 새어 나가지 않게 여름 이불로 창문들을 막았다. 붉은빛을 보고 문을 두드려 난로를 쓰고 있느냐는 주인의 방문을 받고 싶지 않았다. 새어 나갈 빛도 들어와야 할 빛들의 자리조차 마련할 수 없었던 겨울의 긴 시간들 때문에 지금 춥다. 

  소설가 정미경의 『당신의 아주 먼 섬』은 살아 있는 자들이 안고 가야 할 기억에 관한 질문과 대답을 담고 있는 소설이다. 바닷물이 쓸려 나가면 건너서 섬과 사이를 갈 수 있는 포도알을 뿌려 놓은 듯한 섬들이 모여 있는 그곳에서 기억들은 만난다. 지하철과 빌딩으로 들어찬 도심 속에서 수업이 시작됨과 동시에 잠이 드는 텅 빈 시간 속에서 도망친 지친 기억들은 섬에서 만난다. 말하고 싶지 않아도 떠들어야 하고 듣고 싶지 않아도 신중하게 듣고 있다는 포즈를 취해야 하는 작위의 공간에서 벗어난 그들의 이야기는 소금밭에서 풀어진다. 

   『당신의 아주 먼 섬』의 문장은 인물들의 상처받은 속내를 다독이느라 머뭇거리고 주저한다. 정미경은 그 자신이 소설과 인물을 만들어내는 자라도 그들을 대하는데 조심스럽다. 섬에서 살고 섬으로 도착한 자들의 사연을 쉽게 말하려 들지 않는다. 독자에게 충분히 호흡하고 생각할 시간을 벌어주기 위해 문장의 템포를 늦춘다. 느린 문장의 결을 더듬어 따라가면 현실의 시간은 밀려나고 우리가 살았던 겨울의 과거로 이주해 있다. 과거에서 만나는 이우와 정모, 판도의 기억은 어느새 섬 안쪽으로 들어와 있었다. 섬에서 마주한 그들은 서로의 표정을 살피고 식사를 챙기고 읽었으면 좋을 책들을 건네주는 것으로 과거를 보듬는다. 


"아니, 색깔이 아니라 빛. 투명하고 눈부시고 설레는."

"사랑했구나."

"사랑? ······사랑인 줄은 어떻게 알아?"

"글쎄, 어떻게 알까."

"한 번도 안 해봤어?"

"그럴 리야."

"아저씨, 사람은 죽으면 어디로 가는 걸까?"

파도 소리가 한소끔 지나갔다.

"죽는다는 건 영혼이 우주 저 멀리로 날아가는 거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닌 것 같아. 데칼코마니처럼 여전히 곁에 있는 것 같아. 나란히. 엄마 말처럼, 내가 정말 미친 건가?"


  이우의 시간은 태이와 함께 했던 과거의 시간에 묶여 있다. 현재를 사는 이우에게 밤은 불면을 이기지 못하고 바닷속으로 밀려 들어가고 싶은 어두움이다. 빛없는 밤을 견딜 수 없는 이우는 섬 안으로 들어와 미래의 자유와 꿈들을 유보하고 있다.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판도와 만나 밤바다의 파도 안에서 자신의 시간이 사라지길 바라고 있다. 태생이 불분명한 이우와 판도는 섬 안에서 존재의 불안을 나눠 가진다. 서커스에서 곡예를 배우다 버려진 판도는 이삐 할머니와 살게 된다. 누구라도 판도 앞에서는 비밀과 고민을 털어놓는다. 이우와 판도는 손바닥에 글씨를 쓰면서 언어와 온기를 주고받는다.

  소금 창고에 도서관을 짓겠다는 정모의 미래는 다가올 어둠으로 들어찰 것이다. 앞이 보이지 않을 것이라는 내일의 운명을 받아들이는 것. 천국이 도서관으로 이루어진 것이라는 보르헤스의 전언은 정모가 가질 수 있는 최대한의 빛이다. 막막하고 막연한 삶의 절망을 등 뒤로 섬으로 들어온 태원의 시간조차도 섬에서는 쉽게 밝아지지 않는다. 실패한 사랑의 흔적을 섬 안에서 발견하는 핏빛의 시간, 태원이 선택하는 미래를 섬은 조용히 덮는다. 

  '지나고 보니 아픈 것도 낙이고 힘든 것도 낙이'라는 이삐 할머니의 두서없는 소리를 듣고 이우는 울음을 터뜨린다. 엄마 앞에서조차 울지 못하고 병원을 돌면서 불면증을 약을 타 먹어야 했던 이우에게 이삐 할머니는 살아가는 것의 당위를 무심히 흘려준다. 정미경이 그려내는 인물들은 생의 불안을 온몸으로 껴안는다. 과거의 시간으로 촉발된 고통으로 그들의 오늘은 형편없음으로 쓰인다. 날짜는 지워지고 기억은 더욱 선명해진다. 견딜 수 없는 기억과 실패를 가진 그들이 선택하는 것은 사랑이다. 너덜너덜하고 얼룩이 잔뜩 묻어 있는 오래된 책 같은 사랑. 정미경이 마지막까지 쓰고자 했던 섬 안의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긴 책 『당신의 아주 먼 섬』. 문장 한 줄을 종이에 쓰고 빈 화면으로 옮기는 지난한 작업을 했을 소설가 정미경의 작업실에서 발견한 『당신의 아주 먼 섬』. 

  그 안에는 이제는 누구의 입에서도 말하지 않는 사랑을 손바닥 위에 쓰고 웃음 짓는 사람들이 있다. 기억에서 자유로워진 그들은 바다 위에 도서관을 짓고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춘다. 그 겨울의 방에서 빛을 모으고 싶었던 나는 견딜 수 없는 죽음의 고통을 사랑으로 바꾸고 떠난 정미경의 소설에서 이 생을 살아야 할 뜨거움을 받아 들었다. 이별하지 않고 이 별에서 사랑을 나누겠다. 이름을 부르고 함께 했던 아프고 힘든 순간들을 떠올리는 것으로 삶을 밀고 나가겠다고 쓴다. 



s*****m 2018.02.03. 신고 공감 4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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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아주 먼 섬 - 섬이 건네는 치유의 손길을 마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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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된 문장과 깊이 있는 사유로 독자들의 곁에 남아주었던 소설가 정미경의 마지막 장편소설 <당신의 아주 먼 섬>은 낯설고 먼 섬에서 우리가 볼 수 없었던 상처의 치유와 죽음의 새로운 이야기를 건넨다. 문장을 몇 번씩 곱씹으며 천천히 소화시켜야 하는 소설이 존재하는데, <당신의 아주 먼 섬>은 내면의 상처를 지닌 인물들의 세밀한 심리를 정미경 작가 특유의 깊이 있는 사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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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된 문장과 깊이 있는 사유로 독자들의 곁에 남아주었던 소설가 정미경의 마지막 장편소설 <당신의 아주 먼 섬>은 낯설고 먼 섬에서 우리가 볼 수 없었던 상처의 치유와 죽음의 새로운 이야기를 건넨다. 문장을 몇 번씩 곱씹으며 천천히 소화시켜야 하는 소설이 존재하는데, <당신의 아주 먼 섬>은 내면의 상처를 지닌 인물들의 세밀한 심리를 정미경 작가 특유의 깊이 있는 사유로 훌륭하게 풀어낸 작품이다. 
 
오래전 자신이 나고 자란 섬을 떠나 예술가로서 자신의 성공만을 좇는 연수는 고등학생 딸 이우와 사사건건 부딪친다. 불의의 사고로 친구 태이를 잃은 이우가 방황하자 연수는 섬에 귀향해 살고 있는 어린 시절의 친구 정모에게 이우를 부탁한다. 점차 시력을 잃어가며 삶에 대한 욕심도 잃어가는 중이었지만 마음을 정리하기 위해 내려온 섬의 소금 창고에서 묘한 기운을 느끼고, 소금 창고를 도서관으로 꾸밀 계획을 세우는 정모. 정모는 이우와 함께 도서관을 만들어가며 차츰 자신을 어지럽힌 과거와 자신이 제어할 수 없는 앞으로의 일들을 마주할 용기를 가진다. 이우 역시 정모와 말 못하는 섬 소년 판도와 생활하며 마음을 치유해간다. 그러나 수익성 없는 일에 인생을 낭비하는 정모가 못마땅한 섬의 유지 영도는 개관이 임박한 도서관을 원상 복구시킬 것을 요구한다.


정모는 도망칠 장소가 필요해서 자신이 나고 자란 섬에 내려왔고, 어린 시절 친구였던 연수의 딸 이우를 돌봐주면서 마음의 문을 열기 시작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엄마에게 따스한 정을 느껴보지 못한 이우에게도 섬에서의 삶은 자신을 있는 그대로 마주하게 했다. 섬은 도시에서 찢겨진 인간의 상처를 보듬어주는 치유의 장소가 되었다.


정모는 친구였던 태원에게 소금 창고를 빌린 후 도서관으로 만들어간다. 정모는 아주 먼 섬, 바람, 흰 구름을 두 눈으로 간절히 보고 싶었었지만 시력을 잃어가는 자신에게 불가해한 세계를 잊고 지낼 수 있는 일이 필요했다. 무언가로 채워질 공간을 발견하고 세상에서 하나뿐인 아름다운 도서관을 만들려는 정모의 의지는 확고했다. 정모는 태생지인 섬에서 두 눈을 잃기 전에 섬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완성하고 싶었던 것이리라.


"정모는 자신에게 두 번의 죽음이 남았다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감각의 죽음. 눈앞에 엄연히 존재하는 세상을 볼 수 없는. 그리고 생물학적인 죽음. 사실은 첫번째가 더 두려웠고, 첫 죽음의 뒤가 더 불가했다. 그러니까 일이라기보다는, 그 불가해한 세계를 잊고 지낼 수 있도록 해주는 일이 필요했다."
 
"책을 읽는다는 게. 우리 생의 일회성을 비웃어줄 수 있는 가장 멋진 방식이라고 생각하긴 해. 이 섬에 살면서 매사추세츠주의 호숫가를, 19세기 런던의 뒷골목을 거닐어볼 수 있다는 것, 하룻밤 새 벌레가 되어버린 남자의 생을 살아볼 수 있다는 것, 이 천 년 전의 시간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것. 이건 거의 기적이 아니겠니?"

 
<당신의 아주 먼 섬>에서 사랑하던 태이를 잃은 상실과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엄마로 인해 힘겨워하던 이우의 내피를 정미경 작가는 가까이에서 깊게 포착하여 독자에게 보여준다. 이우는 처음에 섬에 왔을때는 달아나고 싶었지만, 도시의 딱딱한 책상과 걸상 틈보다 섬에서의 시간이 빨리 흐르는 것을 알게 된다. 


"일등이 서른 명 모이면 거기서 누군가는 삼십등이 될 수밖에 없단 걸 엄마도 모르지 않았겠지. 다만 그게 자기 자식이 아니기를 바란 거지. 입학하고 한 달이 지났을 때 깨달았다. 자신보다 덜 똑똑한 애는 하나도 없었다. 그건 노력으로 바꿀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엄마도 그걸 깨달았으면 그런 식으로 들볶진 않았겠지. 적어도 태이는 그 문제로 자신을 학대하지 않았다. 그렇게 보였다. 그런 태이와 같이 있는 동안만은, 교실 의자에 앉는 순간 다른 사람의 두 배로 작용하는 중력으로부터 자유로워졌고 힘들여 갈비뼈를 들어올리지 않고도 숨을 쉴 수 있었다."


이우는 충격적인 태이와의 이별 후에 섬의 고요한 마음을 닮아가며 조금씩 마음을 충전한다. 이 책에서 이우가 섬들 사이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태이와의 추억을 생각하고 마음의 위안을 받는 모습이 따스하게 그려진다.


"넌 어때? 여전히 편도선은 자주 붓고, 여전히 파라락 소리가 나게 책장을 넘기고는 암담한 표정을 짓고, 여전히 쓰레기통을 쓰게리통이라고 해? 쓰게리통. 네 입에서 나오는 그 소리를 꼭 한 번만 더 듣고 싶다. 해가 지네. 오늘은 노을에 보랏빛이 살짝 섞였어. 색 바합이 매일 달라지지. 늘 여기, 네가 같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시간엔 또 그래. 저기, 섬과 섬 사이. 유난히 빛나는 한 점. 거기 어디쯤 네가 있는 듯하다."


<당신의 아주 먼 섬>에서 서커스 생활을 하다 이삐 할미가 주워온 말 못하는 섬 소년 판도가 상처 입은 자신을 완벽하게 차단하는 '배'에 대해 이야기하는 글이 인상적이다. 여태 살아오면서 제 인생에 의미 있는 일이 없었던 판도는 책 안의 세상을 들여다보며 자신이 느껴보지 못한 다양한 이야기들을 만난다. 판도에게 자신과 세상을 이해하는 통로였다. 판도는 책을 읽으면 세계가 얼마나 넓고 깊으며 알 수 없는 것들로 이루어진 곳인지 알 수 있었다.


"막 바깥의 사람들은 흔적도 남기지 않고 상처를 만들어놓곤 했다. 배는 판도의 고치였다. 눈을 감았다. 고치 안의 세계는 완벽했다."


"한 줄도 이해할 수 없는 책도 끝까지 읽었다. 그렇게 다 읽고 나면, 겨울 바다에 풍덩 뛰어들어 헤엄치고 나온 듯한 기이한 쾌감이 있었다. 소금 창고에서 서가 앞을 천천히 걸어다니는 것도 좋았다. 그곳은 책의 미로였다. 한 권을 읽다보면 다른 책으로 연결되곤 했다."


판도는 이우를 만나면서 '그녀의 하얀 팔이 내 지평선의 전부였다'고 이야기하며 이우의 솔직한 마음을 들어주는 친구가 되어준다. 이우는 판도에게 자신이 사랑했던 '태이'에 대해 이야기하며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상처를 드러낸다. 고름이 터져야 새살이 돋아나듯이 자신의 상처를 고백함으로써 마음의 새살도 자라나는 것이 아닐까? 무지개빛으로 염색하고 처음 섬을 나타났을때 이우는 무지개 같던 의미를 지닌 태이의 마음을 표현하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언제부턴가 이우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저는 모르겠지만 말소리는 낮아지고 느려졌다. 저 빽빽한 슬픔은 언제까지나 사라지지 않을 것처럼 느껴졌다. 판도의 가슴속에도 슬픔이 해무처럼 밀려들었다. 해가 진 지 오래인데 저녁은 좀체 밤에게 자리를 내어주질 않는다.
석양은 훅 불면 찢어질 듯 얇아진 채 섬들 위에 걸려 있다.
한기가 드는지 몸을 살짝 떨고는 혼잣말을 중얼거린다.
"옆에 아무도 없는 것 같아서, 나는 말 못하는 네가 좋아."


나이가 들면서 정모의 친구였던 태원은 놀랍도록 아버지를 닮아갔다. 냉동 창고 속 생선처럼 차갑고 무감각한 태원의 아버지 영도는 아들이 더 이기적이고 더 강해지기를 쉼없이 요구했다. 그런 아버지를 못 견디고 달아났던 태원이 돌아온 후 자신도 모르게 아버지를 닮아갔다. 정모는 도서관을 완성해가면서 행복을 알게 되었다. 이 섬이야말로 수 천년의 시간을 담은 도서관이였다. 


"어릴 땐 몰랐는데. 이 섬이 도서관이야. 시간의 도서관. 백 년 전이 바로 내 발아래 있고 천 년 전이 산자락에 남아 있어. 오천 년 전의 수메르 문자로부터 비롯된 책들이 깃들기엔 가장 적합한 곳이라는 생각이 새삼 드네."


<당신의 아주 먼 섬>에서 죽음을 표현하는 정미경 작가의 깊이 있는 단어들이 눈길을 끈다.  태원의 아버지 영도는 섬의 바닷가에서 죽음의 모습을 하고 나타난다. 태이의 죽음을 마주했던 이우는 또다시 죽음이라는 강렬한 순간을 목도한다. 부를 쌓기 위해 타고난 교활함을 활용하며 이기는 데 집요했던 영도는 유일하게 자신과만 불화하지 않았다. 영도는 죽음이라는 마지막 순간조차도 제 속의 부패를 부력 삼아 제 발목에 휘감겨 있던 미역 줄기처럼 자신의 과거가 떠올랐다.  


"누가 설명해주지 않아도 자명한 광경들이 있다. 살아 있는 것들 사이에서 숨쉬지 않는 것이 더 강렬히 존재하는 순간을 이우는 알고 있다. 이토록 흐릿한 새벽빛 아래서조차 그렇구나. 낮게 깔린 안개는 사람들의 발을 먹고 사람들은 허공에 슬쩍 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당신의 아주 먼 섬>에서 아들 셋을 바다에 묻고 판도를 만난 '이삐 할미'가 아들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이야기가 바다의 밀물과 썰물의 모습처럼 표현되어 인상적이다.


"여기선 그래. 터무니없는 죽음도 악다구니 같은 억센 슬픔의 순간이 지나가면 곧 일상이 돼. 밀물과 썰물을 받아들이듯, 받아들이는 거지. 슬픔이 살이 된다더니 아들 제낫날도 밥을 고봉으로 한 그릇 드시긴 하더라."


이우에게 정모가 인간의 마지막 생이 끝나는 죽음의 순간에 행복의 물질로 가득 채워진다는 이야기는 죽음이라는 상실 앞에서 남아 있는 인간에게 건네는 치유의 손길이 아니었을까? 인간의 삶의 시작과 끝은 그 누구도 알 수 없다. 하지만 죽음의 순간이 행복으로 가득찬다면 곁에 있는 소중한 이들이 커다란 눈에 차오르는 눈물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의 뇌는 죽음의 순간 행복의 물질로 가득 채워진다네. 제 죽음을 감지하면 뇌가 베타 엔돌핀이나 세로토닌 같은 쾌락 전달 물질을 엄청나게 내보낸다. 자신에게 주는 마지막 선물 같은 거지. 그 순간만은...... 말할 수 없이 기분이 좋아진다네. 그건, 죽음의 원인과는 상관없이 나타나는 현상이래."


정미경 작가는 타인의 고통에 대한 통각 신경이 없고 자신의 폭력성과 죄에 대해 한 번도 자책해 본 적이 없었던 영도와 같은 인물이 되지 말아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죽음의 순간, 생을 추억할 수 있는 소중한 이들이 떠오르는가, 아니면 마지막의 순간조차 차갑고 잔인한 기억만이 자리잡을 것인가를 알게 된다면 우리는 생을 아름답고 찬란하게 살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당신의 아주 먼 섬>은 정모, 이우, 판도라는 세 인물들이 섬이라는 공간을 통해 따스한 바람막이와 같은 삶의 온기를 만나는 순간들이 인상적이다. 정미경 작가는 인간의 죽음은 끝이 아니며 죽은 이의 삶이 전해주는 따뜻한 기억을 마주하고 상실을 치유하기를 희망하면서 이 작품을 집필하지 않았을까? 정미경 작가의 마지막 장편소설이 된 <당신의 아주 먼 섬>을 읽고, 고인이 된 정미경 작가가 행복한 환의의 순간을 기억하며 편히 잠들었기를 소망한다.


"죽는다는 건 영혼이 우주 저멀리로 날아가는 거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닌 것 같아. 데칼코마니처럼 여전히 곁에 있는 것 같아. 나란히."

YES마니아 : 로얄 s*****0 2018.02.28. 신고 공감 2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