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성도님은 기호학책들 몇 권 기웃거렸던 나에게는 좀 부담이 되는 이름이다. 그의 책들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었다는 점도 그러려니와 그가 펴낸 책들이 절대 항간의 책들처럼 겉핥기식의 내용은 없었다는 점이다. 물론 로고스에서 뮈토스를 손에 쥐면서 느낀 것은 '소쉬르에 대해서 뭐 이렇게 쓸게 많을까'였다. 소쉬르는 언어학 개론서, 문학비평 개론서를 들추면 그 책의 반이상이 한 단원이상을 다루고 있는 현대 지성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사실 그에 대한 평가가 너무 고정되어 버려서 이제는 더 이상 다룰 것이 없는 언어학자로 대표된다. 언어학을 하는 사람들로서는 불만일 수 밖에 없다. 문학에 도용된 소쉬르는 이분법/랑그,빠롤/통시태,공시태 등의 좁은 소쉬르였기 때문이다. 그도 여기저기로 구전되면서 많이 윤색이 된 것도 사실이다. 그런 그에 대한 새로운 논의를 400페이지 넘게 진행했다는 사실 자체가 흥미로운 것이 었다.
이 책의 주된 내용을 몇가지로 요약하자면 첫번째, 소쉬르를 단순히 언어학자로 보는 것이 아니라 '인식론자', 다시 말해 당시대의 흐름을 정확히 짚어낸 사상가적 면모를 자세히 들추고 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소쉬르를 프로이드, 뒤르켐, 베르그송, 후설 등과 같은 반열에 올려 논한다. 우리가 탈근대를 논하면서 반드시 언급하는 이들은 19세기 역사주의와 실증주의와는 다른 인문학의 새로운 관점들을 제시했던 학자들로 유명하다. 소쉬르 역시 당시 팽배해있던 역사언어학, 비교언어학의 한계를 바로 직시하고 그 한계를 종합해 내었다는데 그 업적을 들 수 있다. 이러한 소쉬르의 업적은 당대의 사상가들의 탈근대의 맥락과 정확히 일치하고 있는 점들이다.
두번째, 소쉬르의 자의성이론에 대한 전개가 눈여겨 볼만하다. 소쉬르의 독특한 개념 중하나가 기호의 자의성인데 이 개념에 대해서는 벤베니스트와 같은 학자들은 기호의 자의성 개념을 반박하고 필연성을 강조한다. 이점에 대해 저자는 중립적인 입장에서 자의성 개념에 대한 자세한 설명과 소쉬르 이론과 반대적 입장을 "필연성"이라는 술어가 반드시 자의적이라는 말과 대립적인 것이 아님을 들어 오해의 씨앗이 있다고 이야기한다. 소쉬르의 자의성의 개념에 드리워졌던 구름을 걷어내고 그 개념에 대해 다시 이해할 수 있는 좋은 계기였다.
세번째, 소쉬르 다시 읽기에 대한 심도 깊은 해법을 제시하고 있다. 이점은 이 책의 가장 중요한 맥락인데 책 전체에 걸쳐, 소쉬르의 "원전"이라는 개념이 단지 세쉬에와 바이이의 통속본으로 고정되는 것에 대한 불만을 여기저기서 찾아볼 수 있다. 특히 소쉬르 이론에 대한 국내 학위논문,각종 학술잡지에 실린 논문에 대한 서지제시와 각국에서 출간된 다양한 소쉬르 관련 책들을 거의 완전하게 망라하고 있는 점은 그런 작자의 시각을 뒷바침 한다. 특히 네오소쉬리즘의 3대 명저(고델, 앵글러, 마우로의 저작들)를 읽고 소쉬르에 대한 종합적인 시각을 가질 것을 주장하는 점이 흥미롭고 필자의 짧은 독서량을 부끄럽게 했다.(그런데 이 책들은 어떻게 구하지?). 물론 이러이러한 책을 반드시 읽어야 함을 이야기한다는 것보다는 다양한 시각을 가져보라는 작자의 조언이라고 보면 좋을 듯하다.
현대의 인문학의 대부분은 소쉬르의 이론, 개념을 직간접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그만큼 소쉬르의 이론이 일반적으로 적용될 수 있으며 과학적인 엄밀성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항상 너무 가까이, 흔하게 볼 수 있는 것들에 대한 무관심과 오해는 학문의 적이라고 할 수 있다. 대상은 관점에 선행하여 미리 주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그와는 반대로 관점이 대상을 창조한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위의 소쉬르의 말대로 “로고스에서 뮈토스까지”라는 책은 소쉬르에 대한 너무 편한 관점들을 단절하고 인식론적인 재조명, 시각의 다양화를 중심으로 논지를 전개하고 있다. 마치 벽에 걸려 있는 장식품들을 꺼내서 깨끗이 청소하듯이 이 책은 낡은 소쉬르를 중심으로 이끌어내어 새로운 소쉬르로 다시 태어나게 한 것 같은 느낌을 주는 책이다. 언어학도들 뿐아니라 인문학도들이 꼭 한번 읽어본다면 소쉬르에 대한 좋은 길잡이가 될 것이다. [인상깊은구절] 국내의 언어학계는 물론, 우리나라 전체 인문/사회과학 영역에서 가장 결정적인 취약점을 지적하라면 필자는 주저 없이 인식론적 시각의 결여를 손꼽을 것이다. 우리는 서구에서 생산된 지식과 이론을, 서구중심의 종속된 학문구도 속에서 이루어진 분배구조에 따라 정신없이 수용하여 한국적 현상에 적용하는 일에만 골몰한 나머지, 정작 서구 이론 그 자체의 철학적 토대, 즉 방법론적/존재론적 위상과 토대에 대해서는 당연한 것으로 간주하고 비판의 ‘매수’를 사용하지 않았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사용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 같은 비판적 의식 자체가 결여되어 있다는 점에서 아예 우리에게는 사용할 ‘매스’도 없었다. 이 같은 인식론적 시각은 결코 소수의 과학 철학자들에게 전담시킬 수 없는 모든 학문의 전공자들이 구비하고 있어야 할 최소한의 학자적 자질과 감수성의 문제라고 필자는 판단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