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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는다는 것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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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재호 신부님께 창세기 강의를 들으며 받았던 그 감정을 이어가고자 무작정 신부님이 옮기신 책을 샀던 것이 딱 1년 전이었다. 그 뒤로 ‘계속 읽어야지, 읽어야 하는데’라고만 생각하고 선뜻 책장을 펴보지 못했었다. 아마도 ‘믿음’이라는 단어 자체가 주는 무게감과 그러한 ‘믿음’을 실제 생활에서 얼마나 깊이 체화하고 있는지에 대한 생각이 많았던 것도 한 이유가 됐을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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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재호 신부님께 창세기 강의를 들으며 받았던 그 감정을 이어가고자 무작정 신부님이 옮기신 책을 샀던 것이 딱 1년 전이었다. 그 뒤로 ‘계속 읽어야지, 읽어야 하는데’라고만 생각하고 선뜻 책장을 펴보지 못했었다.

 아마도 ‘믿음’이라는 단어 자체가 주는 무게감과 그러한 ‘믿음’을 실제 생활에서 얼마나 깊이 체화하고 있는지에 대한 생각이 많았던 것도 한 이유가 됐을 것이다. 말로는 ‘믿고 있다’, ‘진심으로 믿는다’, ‘그 믿음의 대단함을 느낀다’라고 하고 있지만, 실제 생활에서 그 믿음에 걸맞은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인지, 과연 나의 일상에서의 말이나 행동이 과연 믿음의 행위인지 생각이 많아지고 있다.

 예수님께서 라자로의 동생인 마르타에게 하신 말씀은 “너는 이것을 믿느냐?”는 질문을 다시 나에게로 돌려본다. 나는 예수님을 믿고 있는지, 그 믿음에 기반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아마도 신앙생활이 깊어질수록 저 질문의 깊이는 더욱 깊어질 것이고, 그 깊어짐을 바탕으로 나의 삶과 행동과 말에서 변화가 생겼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분 안에 머무른다고 말하는 사람은 자기도 그리스도께서 살아가신 것처럼 그렇게 살아가야 합니다.”(1요한 2, 6)라는 요한 1서 말씀을 다시금 떠올리며 복음서에 나오는 믿음을 인물들의 삶의 통해 천천히 나의 ‘믿음’에 대한 묵상을 해본다.

■ 요한 복음서에 담긴 믿음의 여정
 예수는 여러 표징과 담화를 통해서 사람들의 믿음이 성장하기를 바란다. 모든 사람의 마음 깊숙한 곳에 잠재된 생명과 기쁨에 대한 갈망이 떠오르기를 원하는 것이다.

 믿음은 한 순간에 어떤 확신의 경지로 올라간 상태가 아니라 하나의 역동적인 움직임, 곧 ‘오는 것’이다. (…) 또한 믿음은 ‘보는 것’이다. 이는 그 안을 ‘들여다보기’ 시작하는 것을 의미한다. 자신의 삶을 성찰하고 그 안에서 예수를 통해 벌어지는 사건들을 바라보는 것이 곧 믿음이다.

 진정한 신앙인이란 자신의 여정에서 다른 무엇을 요구하지 않고 오직 예수의 말씀만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은 말씀이 지닌 힘을 확신하다.

 “성령에 힘입지 않고서는 아무도 ‘예수님은 주님이시다.’ 할 수 없습니다.” (1코린 12,3)

■ 세례자 요한
 이 세상에 오신 말씀 또한 그 속삭임을 경청하려는 이들에게만 자신의 목소리를 들려준다. 그는 결코 세상이 자신을 알아봐야 한다고 강요하지 않는다.

 참된 믿음은 계속해서 또 다른 믿음을 낳는다. 시간적으로 무척 멀리 떨어져 있더라도, 그 믿음이 스며들고 접촉한 모든 곳에서 또 다른 믿음을 잉태시킨다.

 세례자 요한을 통해 우리는, 믿음과 겸손이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는 것을 배운다. 실제로, 요한이 그리스도에 대한 자신의 믿음을 고백해 가는 과정이 바로 겸손의 길이었다.

 요한이 보여 준 겸손은 자신이 받은 사명을 결코 회피하지 않는 것이었으며, 받은 사명을 철저히 수행하도록 재촉하는 힘이었다. 또한 그의 겸손은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된 사람으로서 자신이 누구인지를 정확하게 아는 것이었다. 자신을 정확히 알지 못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우상으로 세우거나, 자신(ego) 안에서 숭배해야 할 神을 찾게 된다. 그리하여 스스로를 전능한 자로, 마침내 불멸의 존재로 믿게 되는 것이다.

■ 카나의 혼인 잔치와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가 중재할 수 있었던 것은 예수에 대한 굳은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 우리에게 마리아가 가르치고 있는 것이 바로 다른 이에 대한 관심 어린 시선과 하느님에 대한 신뢰다.

 메시아는 거창하지 않은 방식으로 오며, 인격적이고 직접적이면서도 감추어진 관계를 통해 자기 자신을 알린다. 그러므로 표징은 그것을 경험한 사람 모두에게 힘을 발휘하는 것이 아니라, 좀 더 깊은 차원에서 그 표징을 바라본 이들에게만 효력을 지닌다. 바로 여기서 교회의 믿음이 시작된다.

 예수가 카나를 떠날 때, 어머니와 형제들과 제자들이 함께 있었다. 이는 표징이 일치를 낳았고, 주님을 중심으로 한 작은 공동체, 즉 교회의 핵심 공동체를 탄생시켰음을 의미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교회는 마리아처럼 겸허하면서도 주의 깊은 관심을 가지고 인류가 겪는 상황을 따뜻한 마음으로 함께 나누어야 한다.

■ 니코데모
 니코데모는 예수를 만나겠다는 결심을 실행에 옮기면서 자기가 지니고 있던 확신의 벽을 스스로 무너뜨린다. 이런 니코데모에게서 우리는 예수와의 만남을 통해 자기 자신을 개방하는 진정한 한 종교인의 모습을 보게 된다.

 하느님의 아들이 세상의 구원을 위해 파견되었다는 것과 세상 구원의 역사가 처음부터 하느님의 사랑에서 출발하고 있음도 함께 일깨워 주고 있다.

 하느님의 영은 인간의 마음속에 들어가 그를 새롭게 다시 태어나게 할 수 있다.

 빛은 하느님과 인간에 대한 진리를 비추어 주고, 인간의 의지와 양심 안에 존재하는 어둠의 세력을 없애 준다. 그리고 인간은 오직 이 빛의 능력을 통해 정화되고 자각함으로써 하느님 뜻에 따라 행동할 수 있게 된다.

 하느님 말씀을 매일 접함으로써 우리는 하느님께 가까이 다가설 수 있다. 그것이 시련의 밤 한가운데에서도 우리의 일상을 하느님의 시선 아래에 둘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 사마리아 여인
 인간이 하느님의 신비를 이해할 수 없다 하더라도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당신 자신에 대해 관심을 갖게 하시고, 더 나아가 당신을 향한 갈망을 키워 주시며 그 갈망을 통해 마침내 그 신비를 온전히 깨달을 수 있도록 끈기 있게 교육하신다는 점을 보여 준다.

 자기 자신을 계시하는 예수에 대한 사마리아 여인의 열린 태도가 그녀는 모든 면에서, 심지어 그녀의 가장 깊숙한 내면까지도 충실한 삶으로 이끄는 것이다.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성령에 따라 살아가며 하느님을 경배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참된 예배는 하느님을 계시하는 진리의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샘솟을 때만 가능하다. 그분께서 우리 안에 현존하시고 머무시는 것으로부터 참된 예배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 신앙은 ‘바로 그때’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모든 장벽이 무너지고 진실한 예배자들이 영과 진리 안에서 하느님 아버지께 예배를 드리는 그 순간 말이다.

 하느님께서는 선물을 주시면서 우리에게 무언가를 요구하시지 않고, 오히려 무언가를 요구하시면서 그 안에 선물을 담아 주신다. (…) 그렇다면 우리는 하느님에게 무언가를 청하기 위해 그분께 내어 드리는가, 아니면 그분께 내어 드리기 위하여 무언가를 청하는가?

 예수는 우리의 목마름을 해소하기 위해 우리 삶의 문을 두드린다. 나의 목마름을 풀어 주기 위해 먼저 나를 애타게 찾으시고 만나러 오시는 하느님 앞에서 우리는 놀라지 않을 수 없다.

■ 태어나면서부터 눈먼 사람
 어두움 속에서, 반대와 적대감 속에서 믿음을 간직한다는 것은 자신의 온 삶을 다해 밤의 한가운데에 하나의 빛을 밝히는 것을 의미한다. (…) 빛으로 새롭게 태어난 사람은 또한 그 자신이 빛이 되는 것이다.

 사람들 사이의 관계성과 애정, 편한 삶으로의 유혹, 그리고 거기에서 오는 이익이 거대하다 할지라도 그것이 진리의 빛을 흐리게 하거나 일어난 사건의 진실을 바꿀 수는 없다.

 시련의 시간을 거치면서 그는 자신이 처음 만났던 그 빛을 기억 속에 새겨 넣을 수 있었고, 이제는 그 빛으로 나아가겠다는 자유로운 결정과 선택으로 자신 안에 그 빛을 더욱 키워 내고 있는 것이다. (…) 시련의 순간이 우리와 하느님의 연결 고리, 교회와의 결속 관계를 침몰시키고 파괴하는 거대한 암초가 될 수도 있겠지만, 동시에 우리가 지닌 믿음과 신앙의 삶을 더욱 새롭고 풍요롭게 만들어 줄 고통으로 가득 찬 자궁이 될 수도 있지 않겠는가?

■ 라자로의 소생
 우리가 죄를 지었음에도 지옥의 깊은 심연에 빠지지 않고, 그곳에서 나올 수 있도록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사랑하시는 아들을 내어 주신 것이다.

 예수 안에 머무를 때 죽음을 경험하고도 생명을 잃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 너는 이것을 믿느냐? (…) 이 질문이야말로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근간인 것이다.

 고뇌에 찬 진지함 속에 그리스도교적 희망이 담겨 있다. 그 희망은 곧 믿음 안에서 인간은 죽음을 넘어설 것이라고 예수가 마르타와 마리아에게 전한 말에 토대를 둔다. 죽음은 더 이상 마지막이 아니며 충만한 완성을 향해 거쳐가는 단계일 분이다. 죽음은 삶을 빼앗아갈 수 없으며 오히려 그 사람을 새로운 차원으로 변화하도록 이끈다. 우리 안의 일부가 아니라 우리의 인격 전체가 무덤에서 부패되지 않고 구원을 받는 것이다.

■ 예수가 사랑한 제자
 세상 창조의 첫 순간에 하느님께서 빛을 만드시고 물과 땅을 갈라놓으셨듯이, 그렇게 이제 예수는 자신의 어머니를, 파스카 신비의 역동성 안에 들어오기를 희망하는 모든 제자의 어머니로 세워 놓고 있다. 또한 십자가 아래에 서 있던 그 제자를, 사람이 되신 말씀을 처음으로 자신에 품에 받아들였던 그 여인의 아들로 새롭게 만들어 주고 있다.

 그는 그곳에서 단순히 ‘보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보고 믿는다’. (…) 그가 예수를 보지 않고도 믿는 경지에 이르게 되었음을 분명하게 가리켜 준다.

 우리 역시 이 ‘아직’이라는 단계에서 살아가고 있다. 이 단계는 믿음의 여정에서 겸손으로 이해되는 인내를 우리에게 요구한다. 이 여정이 영적으로 매우 빨리 진전되고 있다 하더라도, 모든 것이 여전히 그림자 속에 불완전한 모습으로 남아 있음을, 더 나아가 그 그림자를 결정적으로 밝게 비쳐 줄 빛을 하느님께 끊임없이 간청해야만 하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예수는 믿음의 삶이 지니고 있는 근본적인 측면을 드러내 보여 준다. 그것은 우리 존재의 바탕을 이루고 있는 가장 기본적인 진리가 바로 예수 안에서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사실이다. (…) 우리도 예수의 사랑을 받는 사람들이다. 예수야말로 우리가 존재할 수 있게 해 주고, 우리의 모든 삶을 지탱해 주는 존재이다. (…) 예수는 우리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최상의 진리다. 그리고 우리는 예수 안에서 단 한 순간도 멈추지 않고 자신을 기르고 키워 내야만 한다.

■ 마리아 막달레나
 마리아 막달레나는 십자가 곁에 서 있었고, 무덤에 서 있었다. 그렇게 ‘머물렀고’, ‘견디었으며’,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이다. 마리아 막달레나의 이야기 전체가 인내와 용기, 사랑에 따른 결단으로 예수 곁에 머무르고 있음을 말해 주고 있다.

 예수는 마리아에게 자신을 붙들지 말라고 명시적으로 밝히고, 자기 형제들에게 가서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라고 명한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종착점이 아니라 항상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신앙은 올바른 행실에 대한 상급이 아니라 사랑이신 하느님께서 무상으로 주시는 선물이다.

 예수가 묻는다. “누구를 찾느냐?” 우리가 찾는 것이 무엇인지를 묻는 것은 과연 어떤 것이 우리 삶에 의미가 있는지를 묻는 것이다. 묻는 것은 믿음의 여정에 반드시 거쳐야 할 단계다.

 예수는 우리 각자의 이름을 부르며 우리가 우리 자신의 “회칠한 무덤”에서 나오기를 원한다. 결코 위로받지 못할 것만 같은 우리의 눈물에 대한 응답이다. 그의 부름은 우리가 생명을 누릴 수 있도록 우리에게 주어진 선물이다. (…) 이것이 하느님께서 항상 하셨던 선택 방식이다. (…) 무엇보다도 그 부르심에 지체 없이 응답해야 한다.

 신앙은 예수가 바로 하느님임을 믿는 것이다. 그가 항상 살아 있으며, 오늘날에도 성사와 말씀, 사랑이 실천을 통해 우리 삶 속에 활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믿는 것이 바로 신앙이다.

 우리가 복음서를 읽는 이유는 예수를 통해 변화되고, 복음서 안에서 예수를 만나기 위함이다.

■ ‘쌍둥이’라 불린 토마스
 우리 눈에 고집에 세고 완고하게 보이는 사람들조차도, 또 그 안에서 주님을 끝까지 거부할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까지도 주님을 절대로 포기하지 않으신다. 이것이 우리 인생을 위한, 우리 신앙을 위한 가장 크고 아름다운 보증이다.

 토마스는 신중하게 믿으려는 사람이었고, 그러기 위해 보증과 확신을 요구하는 사람이었다. 실제로 그는 자신 앞에 나타난 부활한 예수가 자신의 기준과 원칙에 어울리고 부합하자, 곧바로 자신의 불신을 거두고 예수를 믿는다.

 믿는 이들의 첫째 임무는 예수를 ‘주님’이자 ‘하느님’으로 받아들여야만 한다는 것이다. 둘째 임무는 그가 받아들인 믿음의 대상과 깊은 인격적 관계를 맺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참다운 신앙은 십자가 위에서 죽고 다시 부활하신 분의 삶에 기쁜 마음으로 동참하는 것이라 말할 수 있다.

 토마스가 보여 준 성숙한 신앙고백이 개인의 내면적인 고백이 아니라, 이미 제자들 공동체의 신앙고백이었음을 반드시 기억할 필요가 있다. 예수 그리스도가 참 사람이요, 참 하느님이란 그의 고백은 토마스 개인의 것이 아니라, 이미 교회 공동체의 고백이었던 것이다.

 신앙의 여정에서 제외되어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마음속 깊이 참된 선의와 진실함을 가지고 있는 한, 모두가 그 여정에 초대된 것이다.

 예수는 모든 사람에게 각자에게 맞는 방식으로 자신을 드러낸다. (…) 우리 모두는 주님의 현존 앞에서 자기 자신을 열어 보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 있다. 분명한 사실은 우리 각자에게 맞는 방식과 그 시간을 주님께서 잘 알고 계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