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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담과 밀이 말하는 쾌락을 통하여 19세기를 읽는다.
"벤담과 밀이 말하는 쾌락을 통하여 19세기를 읽는다." 내용보기
요즘의 화두는 복지이다. 진보든 보수든 가리지 않고 모두들 보편적 복지를 내세운다. 마치 그것만이 자신들을 구원할 수 있는 전가의 보도인 양.. 그러나 복지에 대해서 생각하다 보면 우리는 언뜻 ‘최대다수의 최대 행복을’ 주장했던 공리주의자들을 떠 올린다. 학교 다닐 때, 사회시간에 얼핏 배운 서양철학을 떠올리면서 말이다. ‘인간사랑’에서 출간하는 반철학사는, 맨 처음 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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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의 화두는 복지이다. 진보든 보수든 가리지 않고 모두들 보편적 복지를 내세운다. 마치 그것만이 자신들을 구원할 수 있는 전가의 보도인 양.. 그러나 복지에 대해서 생각하다 보면 우리는 언뜻 최대다수의 최대 행복을주장했던 공리주의자들을 떠 올린다. 학교 다닐 때, 사회시간에 얼핏 배운 서양철학을 떠올리면서 말이다. ‘인간사랑에서 출간하는 반철학사는, 맨 처음 육체의 해방과 유물론을 다뤄 철학계 주류로부터 배척 받은 17세기 바로크의 자유사상가들을 시작으로, 계몽의 시대였던 18세기 급진적인 사상으로 백과전서파에게 철저하게 배척을 받았던 급진주의 사상가들에 이어, 이번에는 19세기 공리주의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주고 있다.

 

19세기 프랑스 철학은 독일의 관념주의 영향아래 있었다고 한다.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자본주의 그리고 아나키즘과 같은 사상들이 범람했던 그 시기를 대표하는 철학자로, 우리는 칸트와 헤겔, 그리고 마르크스 등을 꼽고 있다. 그러나 그들과는 달리 윌리엄 고드윈과 제레미 벤담 같은 유토피아적 자유주의자들과, 존 스튜어트 밀, 로버트 오언, 샤를 푸리에, 그리고 바쿠닌과 같은 비상투적 사회주의자들이라 불리는 이들에 의한 반철학사가 있었으니, 이들이 추구하는 것은 원칙적으로 사회적 행복주의였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제레미 벤담과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주의적 공리주의와 사회주의적 공리주의의 차이를 살펴봄으로써 그들이 추구하는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물론 저자는 아나키즘의 아버지라 불리는 윌리엄 고드윈이나, 환상적 공동체를 꿈꾸었고, 자유주의적 생산체제를 비판하며 생태주의적 접근으로 생태학을 창시한 샤를 푸리에, 그리고 절대자유주의적 사회주의자이자 혁명가였던 바쿠닌의 공리주의를 살펴보고 있기도 하다. 그렇지만 우리들은 공리주의 하면 흔히 떠 올리는 것이 벤담과 밀이 아닌가 싶다.

 

철학의 역사에서 공리주의의 창시자로 되어 있는 제레미 벤담은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에 유용한 것을 장려한다. 그가 말하는 유용성이란 쾌락들과 동일시된 목표에 도달하기 위한 수단이자 방법이며, 이 쾌락들의 합이 철학적 삶의 최종목표인 행복을 이룬다고 보고 있다. 그러기에 그는 최대 다수의 기쁨을 얻기 위해서는, 최소의 경제적 경비와 인적 수단으로 최대의 억압적이고 예방적인 효과를 산출하는 것을 목표로 한 [원형 교도소], 최소의 지성적 경비를 가지고 최대 다수의 행복에 유용한 것이 무엇인지를 배울 수 있는 [크레스토마티 학교]를 건립하려고 했을 것이다.

 

모든 쾌락을 선이라고 본 벤담은 좋은 쾌락과 나쁜 쾌락을 구별하는 것 자체를 죄악시 한다. 또한 국가경제에 대해서도 자유주의를 취할 때 국가는 부유해지고 최대다수가 행복해 질 수 있다고 보았다. 그렇기에 그가 프랑스 식민지들을 해방하라고 한 것은 인도주의적 이유 때문이 아니라, 그것을 유지하는데 비용이 너무 많이 들기 때문이었으며, 동성애자들에 대한 박해를 비난한 것은 그들을 옹호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느끼는 쾌락이 공동체의 행복을 증진 시키기 때문이었다. 이에 저자는 벤담이 주장하는 공리주의적 자유주의의 낙원은 단테의 지옥과 흡사 했을 것 이라고 말한다.

 

이에 반해 벤담의 추종자인 아버지에게서 어려서부터 공리주의에 입각한 교육을 받은 존 스튜어트 밀은, 사람들이 그에 대해 얘기할 때 공리주의 철학자로, 벤담의 제자이고, 정치적으로 자유주의자이며, 벤담의 정치경제학의 고전적 전통에 서있다고 말하지만, 저자는 전혀 아니라고 주장한다. 저자는 벤담과 밀의 쾌락주의가 어떻게 다른지를 설명하고 있다.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목표로 삼고, 도덕은 쾌락을 모색하고 불쾌를 피하는데 있으며, 또한 쾌락은 유용한 것과 동일시 될 수 있다는 것에서 둘의 의견 차이는 없다고 한다. 그러나 벤담은 양적 공리주의를 주장했다면, 밀은 질적 공리주의를 주장했다. 벤담이 게임이 주는 쾌락을 좋아했다면, 밀은 詩에서 얻는 쾌락을 더 좋아했다. 그래서 밀은 배부른 돼지이기 보다는 배고픈 인간인 것이 더 낫다고 단언한다. 그러기에 벤담의 쾌락은 자연적인데 반해, 밀의 쾌락은 문화적이라고 할 수가 있다.

 

벤담은 자기자신의 쾌락을 구하면 결국 타인들의 행복의 총합은 증가한다는 이기적 쾌락주의인데 반해, 밀은 다른 사람을 즐겁게 하면 그것이 자신에게 즐거움을 가져다 준다는 이타적 쾌락주의를 말하고 있다. 또한 벤담은 국가의 개입을 배척하고 시장의 신성함을 신뢰하는 자유주의적, 방임의 쾌락주의라면, 밀은 개인의 행복의 관점은 의지이며, 쾌락주의적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의지주의적, 사회주의적 쾌락주의를 주장한다.

 

다시 말해서 벤담은 공리주의에 대해 관념주의자로써 사유했지만, 밀은 현실주의자로써 사유했고, 벤담은 세계와 단절된 사상학파의 수장으로써 이론화 했지만, 밀은 있는 그대로의 인간을 근심하는 철학자로써 사유했다고 저자는 말한다.

 

이에 반하여 로버트 오언은 공리주의자이면서 진보주의자라는 생각이 들게 한다. 초기에 인간적이고 가족주의적인 자본주의자이기도 했던 오언이 뉴라나크에서 제조소 운영시 시행한 개혁조치들은, 부를 목표로 삼지 않고 최대 다수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 이었다. 그것은 작업여건을 개선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사회적 약자들인 노동자들과 아동들의 권익보호와 그에 대한 기반 마련이 기도 하였다. 그래서 자신의 사회주의를 공산주의 방향으로 전환하기 위하여 유토피아적 공동체를 탄생시키고자 하였으나 실패한다.

 

오언은 재산형성의 약탈적 메커니즘을 알고 있었던 사람이다. 그래서 그는 사적소유와 종교, 결혼제도를 무너뜨리자고 제안을 하기도 했다. 그는 공동체 행복의 선결조건으로 자아의 행복의 개인적인 실현을 권유하였으며, 개인은 공동체에 대해 대립적인 것이 아니라 공동체를 구성하는 부분들 중의 하나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오언은 집단의 행복을 원했다. 그렇지만 조화롭고 새로운 사회를 지향하는 오언식 공산주의는 생산수단의 집단적 점유라는 마르크스적 양식에 의하지 않았으며, 이성이라는 힘에 의한 보다 근원적 개혁을 이루는 방식을 취하였다. 그러나 여기에 필요한 것은 교육이었다. 그렇지만 19세기 당시에는 교육은 선택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19세기 공리주의자들의 서로 다른 듯 하면서도 같고, 같은 듯 하면서도 다른 주장들을 접하면서 나는 벤담 보다는 밀, 밀보다는 오언의 주장에 마음이 더 끌린다. 다시 말하여 관념적인 것보다는, 현실적인 것, 현실적인 것 중에서도 실천적인 대안이 있는 것에 마음이 간다는 증거이다. 19세기 프랑스의 반철학사, 그렇게 쉽게 머릿속에 들어오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계몽주의에 이어 관념주의 철학이 주류를 이루던 사회에서, 자신들의 철학을 삶을 통해 보여주었던 비주류 철학자들을 읽는다는 것이 어쩌면 19세기를 온전하게 이해하는 것 인지도 모른다. 19세기의 이해 없이는 근대와 현대를 올바로 이해할 수 없기에..



k*****1 2012.01.26. 신고 공감 9 댓글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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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공리주의 철학자들의 삶과 생각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공리주의 철학자들의 삶과 생각" 내용보기
개인적 행복과 사회적 행복, 어느 것이 먼저일까? 사회적으로 어떻게 행복해질 수 있을까? 다수를 위한 행복, 이 시대의 진정한 화두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점점 이기적으로 변하는 사회 속에서, 이웃과 함께하는 행복을 추구하는 공리주의자들의 주장과 이야기를 통해 우리 자신을 돌아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반철학사라는 큰 틀 속에 철학자들의 주장과 이야기를 펴낸 시리즈로 이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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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 행복과 사회적 행복, 어느 것이 먼저일까? 사회적으로 어떻게 행복해질 수 있을까? 다수를 위한 행복, 이 시대의 진정한 화두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점점 이기적으로 변하는 사회 속에서, 이웃과 함께하는 행복을 추구하는 공리주의자들의 주장과 이야기를 통해 우리 자신을 돌아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반철학사라는 큰 틀 속에 철학자들의 주장과 이야기를 펴낸 시리즈로 이번에는 공리주의 철학자들이다. 대부분 철학이라고 하면 고리타분하고, 머리가 아픈 학문이라고 인식한다. 대부분 진리에 대한 문제와 그렇게 큰 관심을 갖지 못할 주제에 대한 주장이나, 이들은 다수의 행복을 위한 생각을 말하는 철학자들이고, 이들도 우리와 비슷한 사람이기에 일상과 삶, 어쩌면 더 괴짜들이기에 더 재미있는 일들이 많이 숨어있다. 6명의 철학자들의 삶과 이론을 정리한 글이다.

 

윌리엄 고드윈, 아나키즘의 아버지라 불리는 사나이.

 개신교의 전통의 칼빈주의자 목사다. 절대자유주의 예언자와 평화주의 철학자의 길을 함께 걸었고, 가족은 괴팍한 부인(페미니스트)과 원칙주의 철학자 그리고 다섯 아이로 여러 가지 재미난 이야기를 만들었을 것 같다. 고찰은 철학적 공리주의 고드윈의 큰 지적 공적으로 인정받고 있다. 개인의 양심의 자유를 구속한다고 기독교를 비판한다. 하지만, 목사인 그는 훈계하고, 강론하고, 때로는 예언도 한다. 기본적으로 공동체 이익을 위해 자기 자신의 포기를 가르치는 엄격하고, 엄정하고, 까다로운 사람이다. 그의 사상은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으로 요약한다.

 

모든 것을 말로 하라고 하면서도 헐벗은 자가 과도하게 가진 자의 재산을 점유하는 것은 도덕적으로 적법하고 철학적으로도 옳다. 여운을 남긴다. 말로 점유를 할 수 없는 노릇이기에. 또 한 존재의 기치를 그 유용성에 따라 상대적으로 무게를 지니고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분명히 나의 의무는 집단의 행복에 기여하는 것이라고 명확히 한다. 공리주의는 결국 이타주의다.

 

공리주의하면 떠오르는 제레미 벤담.

그는 공리주의의 창시자이다. 사회를 약간 비딱한 시선 항상 위선이 모든 진실에도 불구하고 법이 된다는 것으로 바라본다. 다양한 작업을 하나, 결과를 잘 정리하지도, 마무리하지 못했기에 그렇게 빚을 보지 못했지만, 뒤몽(편집자)과 만남으로 체계적인 작품들이 된다. 뒤몽은 내가 제시하는 것은 전혀 나 자신의 저작이 아니요. 최대한 충실하게 벤담의 작품 임을 강조하지만, 그의 공로 역시 크다.

 

행동가로서 사유하고 사유자로서 행동한다. 유명한(?) 판놉티콘(원형교도소 또는 감시원), 크레스토마티 학교 등 다양한 아이디어를 만들어 내는 이 쾌락주의의 이론가는 수도승생활을 한다. 말과 행동의 일치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닌지 또 그가 남긴 소원도 좀 비범하다. 자신을 미라(오토아이콘)로 만들어 달라. 최대 다수의 기쁨을 생산할 기계를 제작하는 것이 그의 목표였다. 역시 좀 특이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사물은 단어 뒤에서 발견되며 어떤 단어도 형용된 사물과 분리되어 사용돼서는 안 된다고 본다. 단순하게 행복은 불행보다 더 좋다. 벤담은 계몽주의 시대의 철학의 형이상학적 낙천주의를 잇고 있다. 대체적으로 반 칸트적 성향을 보였다. 행동은 언제나 이익 충족을 목표로 삼는다. 행복은 쾌락들의 합이고, 쾌락은 인간의 판단력이 자신의 기억에 보조 받아 자신에게 쾌락으로 간주하게 하는 것이다. 모든 쾌락은 선이기에 추구되어야 한다. 명확한 쾌락을 측정하고자 쾌락측정기(도덕검온기)를 만들어 낸다. 하지만 쾌락의 추구에도 개인적인 신중이 필요하다. 공동체의 쾌락을 저해하는 것은 저해하고, 막고, 예방하고 처벌해야 한다. 조금은 획기적인 식민지해방, 동성애혐오반대 공리주의적 동물애호를 주장한다. 또한 마르크스는 틀렸지만 그의 적수들도 옳지도 않았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가 왜 자신의 연구결과를 자신에게는 적용하지 못했을까! 가난한 자들의 행복에 대한 염려는 벤담의 안중에 없다.

 

존 스튜어트 밀. 아버지의 잘못된 교육이 만들어 낸 인물.

아버지의 강압적인 교육으로 자라왔지만, 성장한 후 아버지의 실패(?)를 말하다. 철학자로써는 특이하게 인도회사에 직원으로 35년간 근무하였고, 공리주의자로 자부하기를 포기한 인물이다. 분석하는 습관은 감정을 메마르게 한다고 보았고, 행복이 모든 행동규칙과 인생목적의 기준이 된다고 주장했다. 연대적인 즐거움을 찾아서 세계를 위한 쾌락을 추구하라고 말한다.

 

부모의 꼭두각시 같은 모습에서 신경쇠약을 거치면서 그는 온건한 사회주의자로 변화한다. 그의 낭만주의 삶 그 속에 유부녀 해리엇을 사랑, 그리고 그녀의 남편과의 계약, 해리엇과 결혼 등 좀 특이한 사랑을 하고, 불륜을 행하지 않고, 그녀의 남편과 한 약속은 철저히 지킨다. 철학적 급진주의, 자유주의적 사회주의로 밀은 질을 추구하는 정교한 공리주의, 도덕은 쾌락을 모색하고 불쾌를 피하는 데 있다. 쾌락의 양보다는 쾌락의 질이 중요하다. 벤담은 양을 중시하는 기계적인 공리주의자로, 밀과 밴담은 여러모로 비교가 된다.

 

동물적인 쾌락보다는 인간적인 쾌락을, 쾌락의 질은 인간의 주관적 능력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보았고, 문화적 쾌락과 자연적 쾌락, 세련된 쾌락과 범속한 쾌락으로 구분하였다. 역사는 혁명이 불의를 무너뜨리기보다 휠씬 자주 더 많은 불의를 생산하는 것을 증명한다. 개인주의적 사회주의, 하지만 본질적으로 사회는 단일성을 원한다. 개인의 자유가 타자에게 해가 되지 않는 한도에서 개인이 완전히 자유롭기를 원한다. 진실을 오류와 동시에 공개함은 사회발전을, 결국 최대다수의 행복을 가속시킨다. 각자가 자신의 선택한 양식들에 따라 자신의 삶을 창안할 절대적 권리를 가진다는 것이다. 정의란 최대 다수의 최대 쾌락과 혼동되는 사회적 유용성이다. 국가의 의무, 분배, 실천하는 삶

 

로버트 오언. 공산주의적 소사회들의 창시자.

그는 특이하게 기업가이며 불가지론적이며 온건한 이신론을 옹호하고, 가족주의 자본주의자이며, 근대주의자이자, 자유주의자이다. 계층 간의 협력장치와 근원적인 개혁 그리고 인간적이고 가족주의적 자본주의를 제안한다. 현장에서, 제조소(공장)들에서 실험을 통해 얻은 결과들을 직접 눈으로 확인되는 성과와 함께 제시한다. 뉴라나크, 그 시대에서 드물게 사회사상가로 노동조건의 완화와 공동체 건설을 주장한다. 기성사회에 인간들을 개조하여 적응시키려 하지 말고 반대로 사회를 개선하자고, 인간들이 사회에서 좀 더 편한 느낌을 갖게 하고 합당한 자리를 발견하게 하자고 제안한다. 또한 사적 소유, 종교, 결혼제도를 무너뜨리고 노력하였다.

 

신을 세계를 조직하는 우월한 힘으로 보고, 종교들이 인간들과 세계에 부여하는 권력 때문에 종교들을 거부한다. 사랑은 욕망이 지속되는 만큼 지속되며, 욕망이란 건사해야 유지된다. 인간본성이 선하고, 인간들의 냉혹과 악, 비천함의 책임은 사회에 있다. 인류에게 진보적 행복을 주는가가 그의 고민거리였다. 교육에서 성격교육원(혁명적 학원), 책을 사용하지 않는 유아(2-10)교육, 국영교육 등에서 국가의 체계적 관리와 국가적인 항구적 고용(공무원?) 등 다양한 사회적 실천방안을 제시한다.

 

샤를 푸리에. 절대 웃지 않는 사람.

절대 웃지 않는 사람이 쓴 웃기는 글, 푸리에식 이상 사회 그리고 혁명. 좀 황당한 이론들과 개념들을 창안, 개념들의 생산과 개념적 인물들의 창조해나간다. 산업혁명의 세기에 길을 잃은 방종한 그노시스파의 한 사람으로, 신은 열정적 인력이요, 열정적인 인력은 신이다. 신이 없다고 단언하는 것은 우리 문명의 해체상태, 너무 오래 계속 된 이 상태의 희생자로 본다.

 

문명에서 진리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기 때문에, 하모니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하모니에서 우리가 즐겁게 살게 되면, 영혼들은 코스모스에서 기쁨을 체험할 것이다. 하모니는 자연의 구성요소들 사이에 균형을 복원시킬 것이다. 하모니가 실현된 장소 팡랑스테르(팡라쥬+모나스테르(수도원)에서 후각(화초), 미각(요리), 청각(음악)으로 어린이 교육, 오페라로 건강을 교육, 학습은 다양한 놀이기법을 도입을 주장한다.

 

일을 공동체 내에서의 자기개발과 조화의 요인으로 보았고, 일의 쾌락을 주장하였다. 여성의 특권욕의 확대는 모든 사회적 발전의 보편원리로, 특이하게 간통을 사실상 일시적인 일부다처로 보았다. 성에 대한 열정을 환상적 공동체의 마법이요, 열정들은 신의 의지에 따라 신에 의해 창조되는 것이기에 정당하다고 생각했다. 또한 복음서들이 예고하고 있는 것을 푸리에주의는 현실에서 실현하는 것이다. 가난은 문명에서 풍요 자체로부터 발생한다. 산업화된 부정성을 만들어냄으로써 생태학적 사상을 일으킨다. 민중을 행복으로 이끌어갈 사업들을 실현하기 위해 유용한 것만이 진리이고 정당하고 훌륭하다. 그는 2천년 간의 금욕주의적 도덕과 공모자 철학에 반기를 든 사람이다. 우리가 단 하나의 열정이라고 억누르려는 하는 것은 신에 대립하여 폭동과 적의의 행위를 범하는 것이 된다.

 

바쿠닌. 아나키스트 철학자 아니, 무정부주의자의 대표주자.

귀족으로 태어났으나, 민중의 마음으로 살다간 인물 젊었을 한때 헤겔에 심취하였으나, 여러 가지 삶에의 접근은 철학자의 단어들을 통해서가 아니라 혁명가의 행동들과 함께 가능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자본주의의 종말을 예언하고 현실보다 몽상에 휠씬 큰 관심과 함께 신세계의 가까운 도래를 예고하였다. 그의 사상을 과격 혁명주의로 보는 사람도 많다. 최고의 행복은 바리케이트 위에서 자유를 위해 투쟁하며 혁명을 위해 죽는 것이라고 외치는 다양한 믿음(무신론, 유물론, 사회주의, 연방주의, 절대자유주의, 니힐리즘, 페미니즘, 평등주의, 아나키즘)을 지닌 인물, 다른 공리주의 인물들과는 모든 혁명에는 폭력은 필요하다고 폭력의 필요성을 역설하나, 국가 관리적인 공산주의를 반대한 집산주의자이다. 제 삼자의 자유의 방해는 나의 자유를 속박하는 것으로 여기고, 타인을 존중한다. 그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 혁명가들의 우두머리로 군림한다. 신적 믿음에 대항하는 사탄적 이성과 믿음에 대립한 과학은 프랑스 대혁명 세기의 계몽주의 철학자들의 계획을 되살리는 계기로 여기며 과학적 유물론을 신봉한다.

 

사회주의 없는 자유는 특권이고 불의요, 자유 없는 사회주의는 노예상태이고 폭력이다. 국가 없는 공산주의를 신봉하고, 권력이 곧 적이다라고 외친다. 마르크스와 바쿠닌은 근원적인 양립불가했다. 특히 부르주아인 마르크스는 민중을 좋아하지 않는 반면 귀족인 바쿠닌은 민중을 갖은 미덕들로 치장한다. 사실상 사회적 행복주의의 현실은 주도자들의 대망의 수준에 이르지 못했다. 스스로 변화하여 강력한 철학적 투쟁을 통해 평화와 평온을, 요컨대 지혜를 정복하고자 희구한다.

 

이 책을 읽고.

이 책의 장점은 새로운 인물들을 만나는 것이고, 이미 알던 인물의 다른 모습을 잘 보여주는 것 아닌가 생각된다. 딱딱하기만 한 철학이 아니라 공리주의적 철학이라서, 다 같이 어떻게 행복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철학자들이기에, 조금은 쉽게 다가오고, 공감을 가지게 된다. 그리고 그들의 일상의 특징적인 면, 흔히, 말하는 한가지에 몰두하는 사람들이 겪는 일상생활의 어려움과 재미난 에피소드들이 제법 많이 있어 더 쉽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던 것 같다. 이런 글들이 프랑스에서 대중을 위한 철학강연이었다니, 부럽고, 배워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점점 다양한 프로그램이 성인들을 위한 교육과 교양으로 열리고 있으나, 아직 많이 부족하다는 생각을 한다. 건전한 시민들의 양성이야말로, 우리 사회가 발전되어 나가는 초석이 아닌가 한다. 우리들은 평생 배움을 통해 좀 더 나은 사회의 구성원으로 자신의 가정과 사회발전에 일익을 담당해야 할 것 같다.

 



p*******t 2012.01.13. 신고 공감 7 댓글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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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2] 자유주의(혹은 공리주의)인가? 사회주의인가?
"[12-02] 자유주의(혹은 공리주의)인가? 사회주의인가?" 내용보기
미셀 옹프레의 “반(反)철학사” 시리즈는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면서 한 시대를 대표했던 철학이 아니라 상대적으로 소외되었던 철학의 흐름을 재조명해보자는 의도로 쓰여졌다. 여기 19세기를 다루는 <사회적 행복주의> 또한 마찬가지로 19세기 철학을 이끌어간 큰 흐름이었던 독일의 관념주의 대신 자유주의 혹은 공리주의(功利主義)와 사회주의를 다루고 있다.   먼저 공리주의(功
"[12-02] 자유주의(혹은 공리주의)인가? 사회주의인가?" 내용보기

셀 옹프레의 ()철학사시리즈는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면서 한 시대를 대표했던 철학이 아니라 상대적으로 소외되었던 철학의 흐름을 재조명해보자는 의도로 쓰여졌다. 여기 19세기를 다루는사회적 행복주의또한 마찬가지로 19세기 철학을 이끌어간 큰 흐름이었던 독일의 관념주의 대신 자유주의 혹은 공리주의(功利主義)와 사회주의를 다루고 있다.

 

저 공리주의(功利主義)하면 우리는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으로 상징되는 제레미 벤담(Jeremy Bentham, 1748~1832)을 떠올린다. 하지만 엄밀하게 따지면 공리주의(功利主義) 철학은 고전경제학자로 분류되는 베르나르 드 망드빌(Bernard De Mandeville, 1670~1733)에서 비롯된다고 한다.1) 그렇다면 베르나르 드 망드빌이 무엇을 말했기에 그를 공리주의(功利主義) 철학의 시조라고 보는 것일까?

그는 자신의 저서꿀벌의 우화 또는 개인의 악덕이 공중의 선을 만든다>(이하꿀벌의 우화라고 한다.)에서 시장의 자유, 자연적 질서, 보이지 않는 손, 국가의 번영이 곧 지고선(至高善)이라는 사상, 인류행복의 유토피아적 목적론, 국가의 부는 이 국가의 부를 형성하는 개인들의 부를 만들어낸다2)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은 자본가 계층의 성장과 맞물려 도덕으로부터 부()를 상대적으로 자유롭게 만들고, 또 정당화시키는 역할을 하면서 동시에 공리주의(功利主義)의 성장에도 기여하였다. 다시 말하면, “공리주의(功利主義)는 결과주의론적 전제와 함께 이득과 이윤의 추구를 도덕적으로정당화하고 그 다음으로 생산자, 근로자, 노동자, 프롤레타리아에 불과해진 인간들의 존엄성에 대한 부정을 용인3)하였던 것이다. 마치 장 칼뱅(Jean Calvin, 1509~1564)의 예정설(豫定說)이 자본주의 기업가 정신을 뒷받침하는 정신적인 지주가 되었듯이.

 

시에 자본주의의 폐해가 드러나기 시작하면서, 러한 논리의 맞은편에서 철학자들은 그와 같은 의견들이 틀렸다고, 그리고 국가의 번영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국가를 구성하는 개체들의 번영을 확보할 필요가 있다고 가르친다. 사람들은 이 정교한 윤리적 요청을 담은 형태들의 차이에 상관없이 이들을 사회주의자들이라고 부른다.4)

그렇다면 이렇게 공리주의(功利主義)자의 반대편에 선 사회주의 철학자들은 누가 있을까? 로버트 오언(Robert Owen, 1771~1858)이나 샤를 푸리에(Charles Fourier, 1772~1837)와 같은 소위 공상적(空想的) 사회주의자들이 여기에 언급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겠지만, 저자는 뜻밖의 인물을 사회주의자에 포함시키고 있다. 바로 우리가 공리주의(功利主義)의 또 다른 기둥으로 여기는 고전경제학자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 1806~1873)이다.

 

저자의 파격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사회주의적 아나키즘을 대표하는 피에르 프루동(Pierre-Joseph Proudhon, 1809~1865)의 제자인 미하힐 바쿠닌(Mikhail Aleksandrovich Bakunin, 1814~1876)을 비상투적 사회주의자로 분류하면서도, 아나키즘의 아버지라고도 불리는 월리엄 고드윈(William Godwin, 1756~1836)은 유토피아적 자유주의자로 간주한다.

, 저자는 비록 월리엄 고드윈이 정부 부재(不在) 사유재산의 부정 따른 모든 재물의 공유화 등을 주장하여 아나키즘적 요소를 보여주지만, 언어가 구세계를 청산하고 새로운 세계를 산출하는 것을 마법적으로 실현할 능력을 소유하고 있다5)고 믿었다는 점에서 공상적(空想的) 요소를 부정할 수 없다고 본 것이다. 게다가 그는 정부의 안락사를 제안하며 부정적인 모든 것이 소멸하고 집단과 그 구성원들을 위한 평온의 상태가 도래하기를 희구(希求) 6)하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저자가 그에게 유토피아적이라는 수식어를 붙이는 것을 반대할 수만은 없다.

그렇기에 저자가 월리엄 고드윈을 유토피아적 자유주의자라고 주장했을 때, 한편으로는 당혹스러우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이해가 갈 수 밖에 없었다.

 

지만, 이러한 혼란은 아마도 우리가 꾸준히 의식적/무의식적으로 받아왔던 교육의 영향일 수도 있다. 그래서인지 저자는 친절하게 사회주의는 다양한 형태들을 취하여 우파 날개에서 좌파 날개까지, 중도적 형태를 거쳐 극좌까지 펼쳐진다. 예를 들어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자유주의적 사회주의개량적 사회주의까지 대변하고, 로버트 오언(Robert Owen)은 그의 공장들에서 온정주의적 사회주의, 나중에 그의 미국 공동체들에서 공산주의적 사회주의를 구현한다. 샤를 푸리에(Charles Fourier)낭만적이리만큼 서정적인 사회주의를 전개하며, 미하힐 바쿠닌(Mikhail Aleksandrovich Bakunin)절대자유주의적 사회주의를 이론화한다. 또한 생시몽의 사회주의적 사회주의’, 라므네의 기독교적 사회주의’, 피에르 르루의 인도주의적 사회주의’, 프루동(Pierre-Joseph Proudhon)공제조합 사회주의등을 꼽을 수 있다. 7)고 설명하여, 우리가 사회주의하면 흔히 떠올리는 소위 빨갱이혹은 좌파라는 고정관념을 깨부술 것을 요구한다.

 

력 혁명을 외치면서도 국가 관리적인 공산주의를 반대하여 사회주의 없는 자유는 특권이고 불의요, 자유 없는 사회주의는 노예상태이고 폭력이다 8)라고 외친 절대자유주의적 사회주의자미하힐 바쿠닌(Mikhail Aleksandrovich Bakunin)의 논리는 혁명의 순간이 지나면 오히려 그 수혜자로부터 탄압을 받는 아이러니를 지닌다. 반면, 인간을 신뢰하고 설득을 통해 사회의 개선이 가능하다고 본 로버트 오언(Robert Owen)은 온정적이지만 구세계를 유지하는 기둥인 사적(私的) 소유, 종교, 결혼 제도의 폐지를 통한 공산주의적인 사회주의의 가능성을 공동체 실험을 통해 보여주었다.

이 두 사람이 모두 저자에 의해 비상투적 사회주의자로 분류되었는데, 언뜩 보기에는 목적달성을 위한 수단/방법이 반대되기 때문에 서로 반대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민중에 대해 애정을 지니고 그들이 보다 나은 삶을 누릴 수 있도록 꾀했다는 점에서 이 책의 제목처럼 사회적 행복을 추구한다고 볼 수 있다.

 

록 우리가 절대적 빈곤을 벗어났다고 해도 아직까지 우리는 완전한 사회적 행복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 그렇기에 19세기의 사회적 맥락 속에서 제기되었던 문제들에 대한 철학적 해답은 현재의 사회적 맥락에 맞춰 재해석할 경우 여전히 유효하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이 책을 읽으면서 단순히 19세기 비주류 철학자들이 어떤 주장을 했는가에 대한 지식을 쌓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들이 제기한 문제를 우리의 현실에 맞게 고민하는 계기로 삼는다면 더 의미가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옥의 티

p. 27

사회주의는 다양한 형태들을 취하여 우파 날개에서 좌파 날개까지, 중도적 형태를 거쳐 극좌까지 펼쳐진다. ⇒ 사회주의는 다양한 형태들을 취하여 우익에서 좌익까지, 중도적 형태를 거쳐 극좌까지 펼쳐진다.

 

* 이 글은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은 책에 대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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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미셀 옹프레, <사회적 행복주의>, 남수인 옮김, (인간사랑, 2011), p. 21

2) 미셀 옹프레, 앞의 , p. 26

3) 미셀 옹프레, 앞의 , p. 21

4) 미셀 옹프레, 앞의 , p. 27

5) 미셀 옹프레, 앞의 , p. 60

6) 미셀 옹프레, 앞의 , p. 72

7) 미셀 옹프레, 앞의 , p. 27

8) 미셀 옹프레, 앞의 , p. 306

w******f 2012.01.30. 신고 공감 3 댓글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