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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은 번역가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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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원 진학을 고민하던 때가 있었다. 기술도 재주도 할 줄 아는 일도 없거나 많지 않고 애매한 재능으로 하던 일들도 남들 하는 만큼 겨우 하거나 그마저도 못한 아마추어 수준의 삶을 살다 보니 이래서는 안되겠다는 위기의식과 그로 인한 배움과 앎에 대한 욕구 때문이었다. 남들보다 많이 알고 싶었고, 그걸로 먹고 사는 지식노동자가 되고 싶었다. 많은 돈은 못 벌더라도 지금의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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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원 진학을 고민하던 때가 있었다. 기술도 재주도 할 줄 아는 일도 없거나 많지 않고 애매한 재능으로 하던 일들도 남들 하는 만큼 겨우 하거나 그마저도 못한 아마추어 수준의 삶을 살다 보니 이래서는 안되겠다는 위기의식과 그로 인한 배움과 앎에 대한 욕구 때문이었다. 남들보다 많이 알고 싶었고, 그걸로 먹고 사는 지식노동자가 되고 싶었다. 많은 돈은 못 벌더라도 지금의 나에게는 최소한의 자기 앞가림을 하는 일이 중요했다. 그리고 돈 좀 못 벌면 어떤가. 남들보다 좀 더 아는 걸로 잘난 척 할 수 있는데.


지금은 대학원 진학을 포기했다. 학부 전공 지식도 부족하고 연구와 논문 작성 부담도 컸다. 하워드 S. 베커의 <학자의 글쓰기>를 읽은 건 이 때문이다. 굳이 논문을 쓰지 않더라도 논문 쓰는 법을 알아두면 글을 쓰거나 논문을 읽을 때 도움이 되리란 생각에서였다.


잘 읽히는 책은 아니었다. 조야한 번역과 과도한 역주 때문이다.


역자서문을 보면 이 책은 1996년 고려대 대학원 가을학기 사회통계학 수업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학생들이 번역해놓은 챕터를 토대로 역자가 여러 차례 재번역 작업을 했고, 그 결과물이 1999년 출간된 <사회과학자의 글쓰기>라고 한다. 원서 2판에서는 역자가 현재 재직 중인 대학의 학생이 독자 입장에서 번역을 점검해주었다 한다. 말하자면 여러 사람이 번역과정에 참여했다는 것이다.


번역 과정에서 역자의 실제 참여 지분에 대한 의심은 둘째 치고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번역에 참여했는데도 이런 수준의 결과물이 나왔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우리말과 영어는 문장구조가 다르다. 때문에 번역 과정에서 우리말 구조에 맞게 새로 쓰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런데 이 책의 역자는 전문번역가가 아니라 그런지 영문구조의 문장을 우리말로 그대로 옮긴 것으로 번역 작업을 마무리했다. 그러다 보니 우리말 문장을 읽으면서도 자연스럽게 원문이 상상이 되어 글 읽는 속도도 떨어지고 의미 전달도 불분명해졌다. 대학교수들이 번역한 교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경우인데, 출판사나 편집자 차원에서라도 책 만들 때 유념해두면 좋겠다. 외국어를 구사하는 것과 번역을 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라는 것을. 전문번역가가 괜히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미국의 사회과학계와 우리나라의 사회과학계 사이에는 분명 다른 점이 있을 것이다. 역자는 그 부분을 본문 아래 역주를 통해 설명한다.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미국과 우리나라 학계 사이의 차이, 우리나라 학계의 현실을 정말 열심히 설명한다. 그래서 역주가 과도하게 많다. 어떤 페이지는 본문보다 길다. 내가 지금 읽는 책이 번역서인지 인용서인지 헷갈릴 정도다. 영화 DVD나 블루레이에 부록으로 실리는 감독과 배우의 코멘터리를 보는 느낌이다. 영화를 보는 누구도 처음 보는 영화를 코멘터리와 함께 보지는 않는다. 코멘터리는 영화 본편을 다 보고 난 이후, 그 영화가 정말 좋았을 때 보는 것이다. 그러나 책의 각주는? 대부분 본문을 읽으면서 같이 본다. 그렇기에 각주는 본문을 읽는 데 방해가 되지 않으면서 본문의 이해를 도울 정도의 적당한 분량을 지켜야 한다. 이 책에서의 역주는 그야말로 미쳐 날뛴다. 역자라기 보단 공동저자로 봐야 할 정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 본문의 가르침이 가진 가치는 변하지 않는다. 일단 초고를 작성할 것, 작성한 초고는 얼마든지 고쳐 쓸 수 있으니 한 번에 잘 쓰려고 하지 말 것, 글을 쓰면서 연구 방향을 생각할 것, 어려운 표현을 쓰지 말 것, 기존의 연구를 참고할 것, 참고문헌의 목록에는 상세한 페이지까지 기술할 것 등, 논문작성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글쓰기에도 적용할만한 내용들이다. 다른 글쓰기 책에서도 반복적으로 다루는 내용들이지만 미국 사회과학계를 배경으로 하는 글쓰기 책은 국내에 유통되는 책 가운데 유일하지 않을까.


실제 논문을 쓰는 과정은 담기지 않았다. 때문에 논문의 양식, 참고문헌 표기 방식 같은 내용도 없다. 논문쓰기의 실제 사례를 담지 않았으니 ‘앎’의 지식을 ‘행함’의 실용지식으로 바꾸어준다는 ‘빨간 실 글쓰기’는 그냥 표지에만 등장하는 광고 문구 정도로 생각하는 편이 좋다. 이에 대해 역자는 서문에서 초판 출간 이후 독자 반응이 ‘빨간 펜’ 퇴고의 중요성만을 이야기할 뿐 ‘빨간 실’ 글쓰기에 대한 언급이 없었다며 역자의 주된 의도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다고 아쉬워했는데 글쎄… 역자가 굳이 원저에 의도를 갖고 번역하는 게 옳은 일인가 싶기도 하고, 애초에 본문에는 ‘빨간 실’ 이라는 말 자체가 안 나오던데…

s****z 2019.06.09. 신고 공감 3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