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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가의 조숙한 천재
저자는 <추사 김정희>에서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 이하 ‘추사’)의 일생을 각 시기별로 나눠, 당대(當代)의 시류(時流)와 추사의 학문 및 예술세계를 하나하나 들려준다.
먼저, 추사는 명문가인 경주(慶州) 김씨(金氏) 출신으로, 영조의 사위인 월성위(月城尉) 김한신(金漢藎, 1720~1758)의 양자인 김이주(金 柱, 1730~1797)의 손자다. 동시에 아들이 없는 백부(伯父) 김노영(金魯永, 1747~1797)의 양자(養子)이기에, 왕가와 이어지는 종손(宗孫)이기도 하다. 뿐만 아니라 그가 여섯 살 때 쓴 <입춘첩>을 보고 북학파의 거두 초정(楚亭) 박제가(朴齊家, 1750~1815)가 제자로 삼기를 원했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추사는 “거만하고 고집스러운”[p. 174]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게다가 젊어서부터 청(淸)나라를 오가면 그곳의 명사(名士)들과 교류를 하다 보니 좋게 보면 국제적인 감각을, 나쁘게 보면 청(淸)나라 문화에 기울어진 모습도 드러냈던 것으로 보인다. 첫 연경행(燕京行)에서 돌아오기 전, 그가 읊었다는 이별시가 “나는 변방에서 태어나 참으로 비루해서[我生九夷眞可鄙] 중원 선비 사귐 맺음 너무도 부끄럽다[多?結交中原士]” [p. 78]라고 시작되는 것은 그 일면을 보여주는 예가 아닐까? 물론 추사만 이랬던 것은 아니었다. “한동안 우리 사회에서도 미국 갔단 온 지식인들이 말끝마다 “미국은 그렇지 않다”며 남을 면박 주며 잘난 체하곤 했는데, 그런 오만과 치기가 추사에게도 있었던 것이다. 알고 했든 모르고 했든 추사는 그런 식으로 남에게 상처를 많이 주었고, 간혹 그것이 심하여 사람들로부터 미움도 받았다”[p. 73]. 어쩌면 향토색이 짙은 예술을 낮게 평가하는 경향도 선진국의 물을 먹은 젊은 천재였기에 나온 것일지도 모른다. 그가 제자인 소치(小癡) 허련(許鍊, 1808~1893)에게 “겸재 정선, 현재 심사정 모두 그림으로 이름을 떨치고 있지만 그들의 화첩에 전하는 것은 한갓 안목만 혼란하게 할 뿐이니 결코 들춰보지 않도록 하게”[p. 230]라고 언급하면서 비친, 18세기의 진경 산수화[정선]와 남종 문인화[심사정]에 대한 평가도 그런 분위기가 엿보인다. 그가 제주로 귀양가는 길에 남긴, 향토색이 짙고 독자적인 서체를 추구한 원교(圓嶠) 이광사(李匡師, 1705~1777)나 창암(蒼巖) 이삼만(李三晩, 1770~1845)의 글씨에 대한 일화도 그렇다.
연경행(燕京行), 국제적인 안목(眼目)을 갖추다
추사가 국제적인 안목을 갖추게 된 계기는 연경행이었다. 1809년 친부(親父) 김노경(金魯敬, 1766~1837)이 동지사(冬至使) 겸 사은사(謝恩使)의 부사(副使)로 연경(燕京, 지금의 베이징)에 가게 되자 추사는 자제군관(子弟軍官)으로 따라가서 청(淸)나라의 대학자인 담계(覃溪) 옹방강(翁方綱, 1733~1818)과 운대(芸臺) 완원(阮元, 1764~1849) 등과 친교를 맺게 되었다. “추사는 옹방강과의 만남으로 보담재(寶覃齋)라는 당호를, 완원과의 만남으로 완당(阮堂)이라는 아호를 갖게” [pp. 67~68] 될 만큼, 그 두 사람은 추사의 평생 스승이 되었다. 이들과의 교류를 통해 추사는 <실사구시설(實事求是說)>을 지었는데, 여기는 그는 “학문하는 방도는 굳이 한(漢)나라, 송(宋)나라로 나눌 필요 없이, 심기(心氣)를 고르게 하고 널리 배우고 독실하게 실천하면서 의거하여 진리를 찾는 자세로 나아감이 옳다”[p. 107]고 단언했다. 즉, “한나라 유학은 훈고학이고 송나라 유학은 성리학이라 하여 그 정신과 방법이 다른 것처럼 이야기하지만 깊이 따져보면 다를 것이 없다는” [p. 107]는 내용의 한송불분론(漢宋不分論)을 주장했다. 이를 보면, 훗날 청(淸)나라 경학(經學)과 고증학(考證學)을 연구하던 후지쓰카 지카시[藤塚 隣, 1879~1948]가 추사를 “청조학 연구의 제일인자는 추사 김정희이다”[p. 45]라고 평한 것도 이상하지 않다.
제주 유배, 한 단계 성숙하기 위한 시련
1830년 생부인 김노경이 모함으로 유배되고, 이어 1840년에는 추사 본인도 모함을 받아 제주도 유배길에 오른다. 이 제주 유배는 추사의 인생과 글에서 매우 큰 변곡점으로 작용했다. 먼저, 환재(桓齋) 박규수(朴珪壽, 1807~1877)가 “완당의 글씨는 어려서부터 늙을 때까지 그 서법이 여러 차례 바뀌었다. 어렸을 적에는 오직 동기창(董其昌, 1555~1636) 에 뜻을 두었고, 중세에는 옹방강을 좇아 노닐면서 열심히 그의 글씨를 본받아 너무 기름지고 획이 두껍고 골기가 적다는 흠이 있었다. 그리고 나서 소동파(蘇東坡, 1037~1101)와 미불(米 , 1051~1107) 을 따르면서 더욱 굳세고 힘차지더니 (…) 드디어는 구양순(歐陽詢, 557~641)의 신수를 얻게 되었다. 만면에 바다를 건너갔다 돌아온 다음부터는 구속 받고 본뜨는 경향이 다시는 없게 되고 (…) 대가들의 장점을 모아서 스스로 일가를 이루게 되니 신(神)이 오는 듯, 기(氣)가 오는 듯, 바다의 조수가 밀려오는 듯했다.” [p. 346]라고 말했듯이 추사는 추사체를 완성했다. 그래서 마치 정(正)-반(反) ?합(合)의 과정을 밟는 것처럼, 추사체가 완성되는 과정을 보는 것도 이 책을 읽는 재미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한다.
뿐만 아니라 이 시기에 제자인 우선(藕船) 이상적(李尙迪, 1804~1865)에게 그려준 ‘세한도(歲寒圖)’는 추사가 추구한 예술의 경지인 ‘불계공졸(不計工拙; 잘되고 못되고가 가려지지 않는다)’을 이룬 문인화의 최고봉으로 꼽힌다. 동시에 이 ‘세한도’는 고졸한 풍경의 집 한 채와 그 좌우에서 대칭을 이루는 소나무와 잣나무의 그림만으로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추사의 글씨까지 하나로 봐야 하는, 학문과 예술의 일치를 드러내는 작품이기도 하다.
하나 더하자면, 제주 귀양이라는 시련은 추사를 한층 성숙하게 하는 계기가 된 것 같다. 8년 3개월의 제주 유배에서 풀려나 돌아가는 길에 해남 대둔사에서 자신이 쓴 현판을 떼어내고 이광사의 ‘대웅보전’ 현판을 다시 달라고 했다는 일화나 이삼만의 묘비문을 써주었다는 전설은 이를 보여주는 얘기들이다.
추사의 삶에는 제주도 해배(解配)이후 8년의 시간이 더 있다. 그 기간 중에는 북청으로의 유배도 있었지만, 그의 학문과 예술에 영향을 주는 큰 굴곡은 더 이상 없었다고 느꼈다. 아마도 추사가 <논어>에서 말하는 “마음 속으로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법도에서 벗어나지 않았다[從心所欲不踰矩]”의 경지에 이르렀기 때문이 아닐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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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체, 세한도, 금석학, 제주도
유배, 진흥왕 순수비, 우선 이상적.. 추사 김정희 하면 머리 속에 떠오르는 것 들이다. 그 외에도 사소한
것들이 더 있을 테지만 다른 것은 딱히 생각이 나지 않는다. 그저 역사시간에 배운 것에다 다른 책들을
읽어 알게 된 사실 한,두 가지가 첨가된 것이 내가 추사에 대해 알고 있는 전부인 셈이다. 아마 그래서 이 책이 출간되자마자 관심을 가졌던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더욱이
유홍준 교수가 쓴 평전이라니 믿고 읽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 것도 한몫 했다. 사실 추사에 대해서는
[완당평전]을 읽어 볼까 하는 생각도 오래 전부터 가지고
있었지만 3권이나 되는 바람에 선뜻 시작을 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몇 년 전 절판이라고 하여 어쩔 수
없다는 자기위안을 삼고 있던 터였다.
저자는 이 책에서 추사가 1786년 충남 예산에서 태어나 1856년 71세의 나이로 과천 과지초당에서 세상을 떠날 때까지 각 시기별로 나누어 추사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당시의 시류와 추사의 가족관계 그리고 그의 예술과 학문세계에 이르기까지 시시콜콜 우리에게 추사에 대해 들려준다. 시서화(詩書畵)에 대한
저자의 안목이 빛을 발한다. 이미 [안목], [명작순례], [국보순례]와
같은 유홍준의 미를 보는 눈 세트와 [화인열전]에서 작품에
대한 그의 안목을 확인하고, 또한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서 막힘 없이 이어지는 그의 글쓰기에 반 한지라, 600여쪽 가까운
책이지만 지루함 없이 읽어나갈 수 있었다.
김정희는 왕가의 사돈인 월성위 김한신의
후손이다. 훗날 판서를 지낸 김노경과 기계 유씨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월성위 종가에 아들이 없어 백부인
노영의 양자로 들어가 종손이 된다. 박제가를 스승으로 모시고 사사를 받던 그는 24세가 되던 해 사마시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고, 그 해 친부인 김노경이
동지사의 부사로 선임되어 연경에 가게 되자 자제군관으로 따라가면서 그의 예술혼과 학문을 동아시아에 꽃피우는 계기를 마련한다.
추사의 연경 행이 그의 삶과 예술에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는 조선후기 실학과 북학의 성립과정을 보면 알 수가 있다. 조선후기 실학은
유형원, 이익, 정약용으로 이어지는 경세치용, 이용후생의 대단히 실질적이고 현실적인 사상으로 중국과 관계없이 자발적으로 일어난 학문의 신경향이라고 한다. 조선의 학자들은 이런 사상적 기류가 청나라에서도 똑같이 일어나 고증학이란 이름으로 체계화 되었음을 뒤늦게 알게
되는데, 박제가는 이런 사상적 경향을 북학이라 했다. 이런
북학파의 선봉에는 홍대용과 박지원이 있었고, 그 뒤를 박제가를 비롯한 이덕무, 유득공, 이서구가 이어가고, 이것을
청나라와의 긴밀한 교류 속에서 더 높은 차원으로 완성한 사람이 추사 김정희이다. 추사가 말년까지 끊임없이
청나라 학자들과 교유관계를 이어갈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때 아버지를 따라 연경에 가 두 달 가량 머무르며 청나라의 대학자인 완원, 옹방강 등과 친교를 맺게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후 추사는 자신이 추구할 학예의
길이 경학과 더불어 고증학과 금석학에 있다는 확신아래 자기화 토착화 작업에 매진했다고 한다. 청나라
학자들과는 변함없이 서신교류를 통해 학문을 연마하는가 하면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 경주 무장사비, 진흥왕릉 등을 고증하기도 한다. 또한 그는 연경으로 가는 후학과
제자들에게는 청나라 선비들을 소개하여, 그들이 청나라의 앞선 문물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돕기도 했다. 이처럼 추사의 끊임없는 경학, 금석학, 고증학에 대한 연경학계와의 교류는 동아시아에 완당바람을 불러 일으키기도 했다.
그러나 호사다마라고나 할까? 추사가 45세가
되던 1830년 부친 김노경이 모함으로 유배되고, 3년후
해배 되었으나 1937년 72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이어 1840년에는 추사가 안동 김씨 세력의 모함을 받아 제주도
유배길에 오른다. 제주도 대정현에 위리안치 된 추사는 9년간
유배생활을 통하여 추사체를 완성시키고,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세한도를 그린다. 추사 나이 59세에 그린 세한도는 제자인 우선 이상적이 끊임없이
연경에서 구해온 책을 보내준 것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로 그려 준 것으로, 이상적은 이 그림을 가지고
연경으로 가 청나라 학자 16명의 제화시를 받았다고 한다.
추사는 유배된 지 9년만인 1849년 해배 되어 용산의 강상에 자리잡고 제자들을 가르치며
학문을 이어갔지만 2년만인 1851년 북청 유배길에 오른다. 이듬해 북청유배에서 풀리자 과천의 과지초당으로 돌아와 말년을 그곳에서 보내다 1856년 7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책을 읽으면서 나는 내가 추사에 대해
얼마나 무지했는지를 알게 된다. 저자는 책을 시작하기 전인 서장에서 조선시대 사대부의 지적 활동은 문사철(文史哲)을 전공필수로 하고 시서화(詩書畵)를 교양필수로 하였는데 추사는 이 모든 분야에서 A+라며, 그래서 세상에는 추사를 모르는 사람도 없지만 아는 사람도 없다는 말이 나왔다고 말한다. 비로소 그의 말을 실감한다. 저자는 또 일제 강점기에 조선북학파에
대해 연구한 후지쓰카 지카시 얘기를 책 곳곳에서 들려준다. 그가 있어 추사에 대한 자료와 연구가 이루어질
수 있어 고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두렵기까지 했다는 저자의 말에 공감이 간다.
서예, 경학, 금석학, 고증학, 시문은 물론 다도, 미술품 감상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추사의 일대기를 유홍준 교수의 글로 만났다는 감흥이 오래 지속될 것 같다. 더불어 별책부록으로 따라온 작품첩은 책상 위에서 심심할 때마다 나에게 자극을 줄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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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흥선대원군 관련 전시회에서 말로만 듣던 추사체를 처음 접했을 때 알 수 없는 분위기에 압도되었던 기억이 있다. 좀 더 상세히 알고 싶던 차에 마침 유홍준 선생님께서 관련 서적을 내셨다기에 바로 구입하였다. 서장의 '추사를 모르는 사람도 없지만 아는 사람도 없다'는 글귀는 딱 나를 두고 한 말 같다. 비록 사진이긴 하지만 하나 하나 그의 작품을 접하다보니 '서예'하면 떠오르는 기존의 정형된 이미지와는 다른 파격과 기운이 강하게 느껴졌다. 추사체의 특질은 '괴(怪)'라고 하는데, 어쩌면 당대에는 조롱을 받았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예를 들어 <소요암> 현판 탁본같은 것은 뭔가 좀 기괴하다. 하지만 틀에 박히지 않고 개성이 잘 드러나서 굉장히 매력적이다. 이런 좋은 작품과 내용을 만인에게 소개해 주신 저자께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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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홍준의 입담으로 되살려낸 조선 제일의 천재 추사 김정희에 대한 저자의 깊은 애정과 해박한 지식이 담긴 명저다.
사실 나는 이책의 이전 판인 『완당평전』을 소장하고 있다. 이 책은 저자가 1988년 성균관대 박사과정에 입학하면서 추사 김정희를 연구 주제로 삼아서 2002년 25년에 가까운 연구성과를 『완당평전』이라는 책에 모두 담아냈다. 사실 그때는 너무 많은 것을 담으려고 하는 바람에 오류도 지적을 받고, 그 후 새롭게 발견된 사실이나 작품들에 대한 내용이 미진해 다시 발간한 책이다. 2018년 저자가 추사를 본격적으로 만난지 30년이 된 시점에 발간한 책이다.
이 책을 완전히 서평하려면 사흘 밤낮을 글을 써도 모자를 것 같다.
내가 생각하는 조선의 4대 기재 율곡, 연암, 다산, 추사(시대순)에 대한 책은 내가 사학자였다면 꼭 써보고 싶은 주제였다. 물론 위 4명에 대한 책은 우리나라에 차고 넘치긴 하지만 말이다.
이 책은 이전의 완당평전에서 보여준 전문적·학술적인 이야기는 과감하게 덜어내 분량을 대폭 줄이고, 특유의 대중을 생각한 편안한 글과 유쾌한 입담을 더해 가벼운 대중서로 완전히 전환한 새로운 책이라 할만하다. 이 책 『추사 김정희』는 탄생부터 만년까지, 파란 많은 일대기를 중심으로 추사의 학문과 예술을 알기 쉽게 풀어놓은 역작이다.
이 책은 추사의 생애를 총 10개의 장으로 나누어 설명한다. 1장에서는 당대 최고의 명문으로 고조부가 영조의 사위이고, 12촌 고모는 정순왕후였던 경주김씨 한다리파 월성위 집안의 종손으로 태어나 신동으로 촉망받던 어린 시절이 그려진다. 2장에는 갓 생원시에 합격한 추사가 아버지를 따라 연경을 방문하여 옹방강, 완원 등 당대의 명사들과 교유하는 글로벌한 순간을 담았다. 추사는 이들과 평생 교유를 유지한다. 당시 콧대 높던 청의 학자들이 추사만은 인정했다. 3장은 추사가 연경에서 귀국한 이후부터 대과에 합격하기 직전까지의 내용으로 연경학계와의 끊임없는 교류를 통해 청나라 학문의 신사조였던 고증학, 금석학을 들여와 조선의 현실에 맞게 적용하는 과정을 이야기한다. 실제 천재성에 비해 추사는 대과를 비교적 늦게 급제한 편이다. 이 시절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 등 추사가 조선의 옛 비문을 발견하고 그것을 해석해내는 과정을 그린다. 4장과 5장에는 추사가 서른넷 비교적 늦은 나이에 대과에 급제하고 빼어난 기량으로 학문과 예술에서 국제적인 명성을 날리며 장안의 주역으로 서는 모습을 담았다. 천재이면서 명문가 자제였던 그는 이시기 오만으로 비칠 만큼 자신만만한 성격과 날카로운 독설로 미움을 사는 일이 많았고, 예술이나 학문 면에서도 중국의 것을 답습하거나 조금 변형하는 수준에 그쳤다. 그가 귀양가던 순간까지 원교 이광사의 해남사 대웅보전 현판을 떼어버리라고 한 것은 유명한 일화다. 추사가 인생관의 대반전을 이루고 자신만의 독특한 예술세계를 완성하는 계기가 된 것은 9년간의 제주도 유배였다. 그의 가문은 안동김씨와 세도를 다투던 명문으로 그의 아버지와 양자로 간 큰아버지 모두 판서를 지냈다. 윤상도 사건으로 그는 귀양을 간다. 6장 ‘세한도를 그리며’와 7장 ‘수선화를 노래하다’는 이때의 이야기로, 제주 유배지에 고립된 채(나는 이곳을 제주도 여행을 근 10년만에 다시 가면서 처음 가본 곳으로 할만큼 나 역시 추사를 좋아한다) 끊임없는 질병의 고통과 싸우던 추사의 외로운 나날을 그려낸다. 8장에서는 유배에서 풀려난 추사가 오늘날의 용산 근처에 새로운 터전을 마련하고 수많은 명작들을 쏟아내기 시작한 강상시절을 다룬다. 궁핍한 처지에도 독서와 서화로 유어예하던 추사에게 다시 불운이 닥친다. 오랜 벗 권돈인을 둘러싼 정쟁에 휘말려 차디찬 북청 땅으로 유배된 것이다. 9장에서는 북청 유배시절 벗들과 어울리고 제자들을 가르치고, 유적지를 답사하고 시와 글씨를 지으며 마음을 잃지 않았던 추사의 일상을 차분히 추적한다. 10장에는 유배에서 해배되어 과천의 한 초당으로 들어간 추사가 평범한 일상 속에서 관용의 미덕을 깨닫고 자신의 인생과 예술 모두를 원숙한 경지로 마무리해가는 과정이 담겼다. 이 때 남긴 글씨를 제주도 추사기념관에서 봤는데 정말 거의 신선의 경지였다.
추사 김정희는 현재 내 서가의 수천권의 책을 조금 정리하려고 하는데, 가장 먼저 책꽂이에 다시 꽂은 소장본 중 최고로 아끼는 10권 중 1권에 속하는 책일만큼 좋아하는 책이다. 이 리뷰는 추후에 더욱 자세하게 보충해서 쓸 생각이다.
며칠전 레오나르도 다빈치 책을 구입했지만 먼저 우리 인물, 우리 역사를 아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 책과 비교해서 다시 한 번 같이 볼 생각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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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목(眼目)』을
읽고 이 책을 읽어봐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추사 김정희가 그저 글씨로서만, <세한도>를 그리고 쓴 인물로서만 알려질 수는 없다는
게 유홍준의 평이었다. 이미 한참 전에 『완당 평전』이라는 추사에 대한 평전을 쓴 바 있는 유홍준이
추사에 대해 어떤 말을 덧붙이고 있는지 궁금했다. 유홍준은 『완당 평전』의
개정증보판이 아니라 『추사 김정희』를 새로 썼다고 했다. 그때에 비해 추사에 대해 알려진 것이 많고, 잘못 알려졌던 것이 밝혀진 것도 많아 『완당 평전』은 그 수명을 다한 책이라고 했다. 놀라웠다. 그리 오래 되지도 않은 인물(추사 김정희는 약 250년 전의 인물이다)이 세 권짜리 평전을 무용하게 만들 정도로 새로운 것들 것 나오고 있다니. 우리
문화가 그 동안 그처럼 누추했던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추사의 깊이와 넓이가 상당하다는 것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추사는 다방면의 천재였다. 글로도 인정받았고, 고증학의 대가이기도 했다. 당연히 글씨로는 역사상 4대 명필 중 하나로(유홍준은 그 중에서도 으뜸으로 치고 있다) 평가 받는다. 게다가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 청나라의 앞선 문물을 체험할 수 있었고, 그곳에서
스승을 만나고 벗들과 교유할 수 있었다. 정치적으로도 승승장구했다. 거칠
게 없었다. 그러던 그가 정쟁에 휘말려 제주도로 귀양가고서 비로서 추사체를 완성할 수 있었다. 비록 그런 일이 그에게는 너무나 부당한 일이었겠지만, 시련이 천재를
위인으로 만들어준 격이었다. 그러나 그가 단순한
천재는 아니었다. 스스로 ‘칠십 평생 벼루 열 개를 밑창
냈고, 붓 일천 자루를 몽당붓으로 만들었다’고 말할 정도로
천재성에 더해 지독한 노력을 한 인물이었다. 완벽주의자였던 것이다. 그래서
남에게도 그러한 것을 요구했고, 잘못되고 모자란 것을 그냥 넘어가지 못했던 것이다(그게 만년의 불행의 한 원인이 된 것으로 보이지만). 추사라는 인물에
대해서 다시 볼 수 밖에 없다. 그는 조선 최고의 국제주의자였다. 그저 중국과 일본에 그의 글씨가 훌륭하다는
것이 알려진 정도가 아니었다. 중국의 일류 문인과 예술가 들과 적극적으로 교류하면서 배우고 가르쳤다. 그 결과가 바로 그의 학문이었고, 그의 글씨였다. 유홍준은 ‘산은 높고 바다는 깊네(山崇海深)’를 이
책의 부제로 삼았는데, 그러한 경지는 물론 그의 천재성, 그의
부단한 노력, 만년의 고초 등이 어우러진 결과이지만, 조선의
좁은 울타리에 갇히지 않았던 결과이기도 하다. 이 책에서 가장 흥미 있는 것은, 유홍준의
소개에 따라 추사 글씨의 변천사를 보는 것이다. 기름졌던 젊은 시절의 글씨가 뼈대의 힘을 가지게 되는
과정을 보게 된다. 기괴함이 그저 멋들어짐에서 거충장스러움을 벗어던지고 정수(精髓)만을 남기면서 자연스레 그렇게 되어 가는 과정을 보게 된다. 바르게
쓴 한자도, 흘려 쓴 한자도, 예술 무늬 같은 한자가 서로
독립적이었다가 하나의 정신과 하나의 세계로 모여드는 것을 보게 된다. 개인적으로 이 책을 읽으며 추사의 글씨를 보다 ‘마음 심(心)’자를
쓴 글씨에 ‘헉’하는 느낌을 받았다(<우사가 연등을 밝히다>중, 269쪽). 큰 글씨도 아니고 단독으로 쓰인 글씨도 아니었다. 찍힌 점이 아래쪽 획에 받혀 떨어지지 않고 있었다. 마음이 그리
생긴 양 싶고, 어떤 마음도 표현하는 듯 싶다. <계산무진溪山無盡>의 높은
예술성과는 또 다른 감동을 받았다. 추사에 대해 무엇이 으뜸인지에 대해 여러 사람이 평했다지만, 내겐 여전히 추사는 글씨다. 추사의 글씨는 앞으로도
더 나올 거라고 한다. 여전히 그의 높이와 깊이가 가늠되고 있지 않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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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홍준 교수의 새책이 나왔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이후 유홍준 교수의 거의 모든 책을 샀기에 이번에도 별 망설임 없이 카트에 넣었다. 하지만 약간 고개를 갸웃하게 만든 것은 책의 제목이었다. 분명 <완당평전>을 읽었는데.. 또 추사 김정희라.. 뭔가 개정할 내용이 많았던 것일까 비전공자인 나에게 <화인열전>과 <완당평전>은 쉬운 책이 아니었다. 하지만 꼭 읽어보고 싶었던 것이 유교수님의 책이 아니면 만나기 힘든 사람들이 너무 많았기 때문에 읽어야했다. 어쨌든 몇 권의 책을 읽고 난 후 내용을 공유하고 싶었지만 아무도 그 책을 같이 읽어주지 않았다. 그때 내 눈에 띈 사람이 그림을 좋아하시던 시아버지였다. 가족들의 증언(?)에 따르면 아버님은 젊은 시절 한량(!)으로서 멋과 풍류를 아는 분이었는데, 나이가 들어 혼자 그림도 그리시고 그림을 좋아해서 많이 보러 다니셨다. 그래서 나는 냉큼 겁도 없이 <화인열전>과 <완당평전>을 내밀었다. "저는 다 읽었는데 아버님이 좋아하실 것 같아요"라며. 아버님이 화인열전은 읽으신 것 같은데 완당평전을 읽으셨는지는 모르겠다. 가끔 책에서 읽으셨다며 나에게 몇몇 작가의 그림에 대해 이야기하셨기 때문이다. 그렇게 몇년 후 돌아가시고, 나는 아버님의 책 더미 속에서 그 책을 다시 골라 가지고 왔다. 검색해보니 절판. 유교수님에게도 완당은 쉬운 상대가 아니었다. 박사과정에서 완당을 공부해보기로 결정한 그였지만 박사 논문을 쓸 수가 없었다고 한다. 자료가 너무 부실했기 때문에. 그렇게 그는 또 몇년의 시간을 보낸 후 완당평전을 펴냈다. 상도 많이 받았지만 오류에 대해 혹독한 비판도 많이 받았던 그. 책은 절판시키고 이후 쏟아진 김정희 관련 자료를 다시 모았다. 칠순을 앞두고 있던 그에게 완당은 여전한 숙제였고, 이 책 <추사 김정희>로 그 숙제를 해냈다. 이 책은 김정희의 전기이다. 이 책을 읽으면 추사라는 사람의 다양한 면을 발견할 수 있다. 그는 우선 겸손한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오만함에 가까웠고 까다롭기도 그지없다. 그도 그럴것이 아버지와 자신이 함께 높은 관직에 나아간 적도 있을 정도로 좋은 가문에 태어났으며 실력도 뛰어난 사람이었다. 그런 그에게 겸손함까지 바라는 것은 무리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천재라고 말하지는 않았다. 수많은 연습과 함께 많은 교류를 거쳐 자신의 글을 완성했다. 그리고 그는 다양한 분야에서 업적을 남겼다. 컴퓨터를 두드리면 툭툭 정보가 튀어나오는 시대가 아니었기에 많은 것을 보고 듣기 위해 인적네트워크를 이용해야 했고, 인적 네트워크의 깊이와 넓이를 두고 본다면 결코 "독단적인 인품"을 가진 사람으로 보긴 어렵다. 십년도 전에 읽은 책 내용이 거의 기억나지 않아 새 책을 읽는 듯한 기분으로 이 책을 읽었다. 추사, 완당, 세한도, 금석학. 이렇게 몇가지 단어로만 알기엔 그는 너무 큰 사람이었다. 전기의 형식에 어울리게 연령에 따라 책은 구분되어 있다. 열개의 장으로 나뉘어진 그의 인생은 참으로 굴곡이 심했다. 아버지와 함께 출세를 한 시대에서 나락으로 떨어진 시절까지. 옛날 사람들은 참 집요했구나 싶을 정도로 그를 공격하는 사람들은 지칠줄을 몰랐다. 한가지를 가지고 다시 꺼내고 다시 상소를 올리고 다시 죄를 묻고 귀향을 보내는 시절이 꽤 길었다. 그런 시절조차 교류를 간절히 원했고 배움을 포기하지 않았던 추사. 그래서 그는 위대한 인물로 존경받는 것 같다. 책 빨리 읽기를 취미이자 특기로 아는 내가 일주일에 걸쳐 천천히 이 책을 읽어냈다. 은수저 14권을 읽고 이 책을 읽고 한주에 두권 오는 잡지를 읽느라 5월엔 리뷰도 거의 올리지 못하고 읽고 치우려고 쌓았던 책더미도 그대로지만 어쩐지 뿌듯한 느낌이 든다. 추사의 인생을 속성으로 읽지 않고 충분히 생각하며 읽어냈다는 작은 기쁨이랄까. 비전공자라서, 책이 어려워서, 책이 두꺼워서. 이런 핑계를 대지 않았으면 좋겠다. 추사라는 사람을 한번쯤 알고 싶다면 꼭 일독을 권한다. 유홍준 교수의 숙제같은 책, <추사 김정희 : 산은 높고 바다는 깊네>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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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적 배우던 서예를 지난해 다시 시작하였다. 한문서예를 몇개월 배우다가 개인적인 사정으로 잠시 쉬고있다. 지금 당장은 글씨를 쓸 여유는 없으나 다행히도 책은 가까이 할 수 있어서, 가장 궁금했던 분, <추사 김정희>를 읽게되었다.
책을 읽다보니 그의 글씨도 물론 좋지만, 김정희라는 사람에 더 마음이 갔다. 그가 쓴 간찰들을 읽으며 너무 기발하고 재미있는 표현들에 절로 미소가 나왔다. 그가 세상을 바라보는 (때로는 예리하고 때로는 따뜻한)시선이 참으로 느껴지는 그런 문장들이었다. 제주 유배 후, 예전에 자신이 비판 했었던 이들을 만나 미안함을 표현하고자 한 대목을 읽을 때도 나는 빙그레 웃음이 났다. 그는 진실로 최고의 경지에 이르렀기 때문에 그리할 수 있었을 것이다. 사람이라서 완벽할 수 없지만 완벽하기 위해 한없이 노력하는 모습에서 미켈란젤로가 연상되기도했다. 함께 실린 많은 작품들은 페이지를 넘기기 싫을 정도로 시선을 한참 머물게했다. 당장 실제로 감상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정도로 호기심을 자극했다. 앞으로 기회가되면 실제로 작품과 마주하고싶다.
책을 닫고나니 문자향, 서권기 라는 단어가 가장 마음에 남는다. 내가 글씨를 다시쓰게되면 항상 마음에 지니고 싶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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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당 평전을 구입할려다가 이번에 이 책이 나온 것을 보고 구매했습니다. 완당평전은 3권으로 되어 있었는데 이 책은 한권으로 만들었군요. 별책으로 추사김정흐 대표 작품첩을 받았습니다. 책은 굉장히 고급스럽습니다. 종이질도 정말 좋아요.나의 문화답사기를 보고 있는 느낌이지만 그것보다 더 고급스럽네요. 창비에서 또 심혈을 기울여 만든 것 같아요. 잘 만들어진 책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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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대표적인 서예가로, 신라의 김생, 고려의 탄연, 조선의 안평대군과 함께 우리나라 4대 명필 중 한 분으로 꼽힌다. 그러나 추사는 글씨만 잘 쓴 서예가가 아니었다. 추사는 한 사람의 사대부로 당대의 문인이자 학자였으며 벼슬이 병조참판에 이른 분이다. 추사 김정희는 여러 분야에서 높은경지를 이루었지만 역시 그의 개성적인 글씨인 추사체로 역사적인 위인으로 존숭받고 있다. 또한 두 차례의 귀양 등 삶의 기복 속에서 자신의예술을 완성해가는 과정은 한 편의 대하드라마를 연상케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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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의 저자 유홍준선생이 쓴 책이라 아무 생각 안하고 내 곁에 두었다. 사란의 삶이 축적된 역사라든가 한 인물을 조명하는 전기는 다른 어떤것과 마찬가지로 흥미가 없으면 땡기지 않는 법이다. 이미 십여권의 책으로 우리나라뿐 아니라 일본과 북한의 산재해 있는 우리나라 문화재와 그와 관련된 이야기를 접한 분이고 이 책의 주인공인 추사 김정희는 초등학교 때부터 우리나라 역사와 글(서예)과 관련된 사안에 대해서 익히 많이 듣고, 잘 안다고-그게 뭘 아는지 모르겠지만-생각하는 옛 성현이라 할 수 있다. 추사 김정희의 일대기를 다룬 책이라 어렸을 때부터 그의 부모와 형제 등의 이야기부터 시작하고 그가 쓰고 그린 작품의 도록이 나오고... 그의 인간관계와 거친 조선의 정치 변혁 한 가운데 있었던 시절... 등으로 어느 인물의 평전과 다를 바 없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작자가 추사에 갖는 자부심과 추사에 대한 인물의 사랑이라 할 수 있다. 모르는 사람도 없지만 아는 사람도 없는 추사 김정희의 삶을 그려낸 이 책은 2002년 완당 평전으로 추사에 대해 책을 발행한 저자가 수정, 보완하여 새로이 출간한 책이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두다 알지만 모두가 모르는 추사의 작품에 대해 이 책에 실린 도록도 비켜가지 못한 것 같다. 일부에서 이 책에 실린 추사의 작품이 위작시비가 있다하여 폄훼되고 있다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