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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ius est parere, qui ad imperandum ius non habet! 20대 초반, 라틴어교재에서 본 내용 중 특별하지 않은 이 문장에 마음이 끌렸다. 이후로 나는 이 문장을 애지중지하며 사용했고, 책을 살 때마다 첫 장에 이 문장과 서명을 해놓았다.
“복종한다는 것은 명령하기 위한 법을 소유하지 않은 자에게 속한(eius) 것이다.”
이 문장에 무언가 특별한 사연이 있는 것도 아니다. 더욱이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이 문장에 특별한 의미가 부여된 것도 아니고, 내 삶에 있어서 획기적인 전환점을 만들어준 것도 아니다. 그냥 라틴어 공부를 위해 교재를 보면서 한 눈에 들어왔던 그런 문장일뿐이다.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한강작가의 작품들은 이미 오래전에 듣고 있어서 알고 있었다. 다만, 이번 수상을 기회로 ‘희랍어시간’이란 책은 처음 알았다. 한강 작가가 이슈되기도 했고, 그래서 한강이란 작가가 있구나 정도였기 때문이다.
당연히 ‘채식주의자’는 너무 유명했기에 익히 알고 있던 작품이지만, ‘희랍어시간’은 전혀 알지 못했던 작품이었다.
20대 초반에 전공 때문에 고대 그리스어(헬라어, 희랍어, 신학을 전공하거나 관련된 사람들은 대부분 ‘헬라어’라고 불렀다.)를 몇 년간 배웠기 때문에 궁금하기도 했고, 제목 자체에 반가움도 있었다. 어떤 내용일까?
노벨문학상이 발표되던 그 밤에 한강 작가의 ‘희랍어시간’을 주문했다. 책은 갑자기 예약 대기로 모두 바뀌면서 제때 출고되지 못했다. 한참을 기다려 한강 작가의 ‘희랍어시간’을 받아 들었다.
‘희랍어시간’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아주 상세한 묘사와 묘사가 이어지는 글이었다. 특히 한강 작가가 선택한 희랍어는 중간태 형태의 단어가 중심이다.
헬라어에는 능동태 수동태만 있는 것이 아니라, 중간태라는 것이 있다. 형태는 수동태와 비슷하게 변형되지만, 뜻은 중간태로 해석된다. 대표적인 중간태 변형은 ~ομαι 동사다. 중간태는 주어가 어떤 면에서 그 주어 자체에 관계하거나 또는 주어 자체에 속한 무엇에 대해 동작하는 것을 묘사한다. 예를 들면 αρχω(내가 지배하다)란 동사가 중간태가 되면, αρχομαι(내가 시작하다)란 뜻이 된다.
한강 작가의 ‘희랍어시간’ 초반에 나오는 단어는 διεψθαρθαι(손상되었습니다, is corrupted)다. 이 단어의 뜻이 ‘희랍어시간’ 전체에 흐르는 주인공 여성의 시각과 생각을 사로잡고 나가는 것처럼 보인다. 열입곱살에 만난 인연, 한국과 독일, 그리고 아들, 사설 희랍어 아카데미에서의 시간들, 주인공 여성의 눈으로 바라보는 다양한 노선들이 얽히고설켜서 사건의 실타래를 풀 듯이 이야기는 흘러간다. 가끔 희랍어의 기본 단어와 변형에 대해서도 기록이 되어 있지만, 한강 작가는 자신이 선택한 단어를 가지고 이야기를 이끌어 나간다. 어쩌면, 자신이 끌어나가고 싶은 이야기를 위해 희랍어 단어를 선택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국 독자(讀者)들에게는 다소 생소하고 생경한 표현의 작품처럼 보일 수 있다. 대화는 거의 없다. ‘희랍어시간’에는 주인공을 따라서 모든 동작에 대한 상세한 묘사가 이어지고, 심지어 그에 따른 생각까지도 묘사로 그려진다.
한국어에 ‘생경하다’란 말이 있다. 영어로 ‘It's strange’라고 표현되는 것보다 ‘생경하다’가 얼마나 더 정감이 가도록 느껴지는지, 어느 날 어떤 장관은 ‘생경하다’란 말을 사용해 그것이 화제가 되기도 했지만, 한강 작가의 ‘희랍어시간’은 생경한 표현으로 한국인 독자들에게는 매우 생경하게 느껴질 수 있겠다 싶다.
이 책을 읽으면서 들었던 첫 번째 생각은 “이 글을 영어나 프랑스어 등으로 옮기면, 외국인 독자들에게는 매우 신선하고, 그들의 감성에 충분히 깊게 호소할 수 있는 문장력이 되겠다”싶었다. 한글로 쓰인 ‘희랍어시간’보다 영어나 프랑스어로 쓰인 ‘희랍어시간’을 읽고 싶다는 충동이 느껴졌다. 심지어 그리스어로 쓰인 한강 작가의 ‘희랍어시간’은 어떤 느낌일까 싶은 호기심이 발동했다. 이것 또한 생경함의 연결 선상이 되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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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이 노벨상을 받던 날, 눈부신 햇살이 축복처럼 쏟아져 내렸다. 문단에서는 예측을 한 이들이 있었다지만, 대부분의 국민들은 예상치 못했다. 뉴스를 보던 남편이 나보다 먼저 알고 빅뉴스를 전해줬다. 소스라치듯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벼락처럼 거실로 뛰어나갔다. 내 두 눈과 두 귀로 확인하는 호사를 누렸다. 남편과 함께 한강이 내려주는 찬란한 빛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 한강 책 세트를 주문했다. 남편은 <소년이 온다>를 읽고 있을 때 나는 <희랍어 시간>를 집어 들었다. 난해하다는 반응이 있어 긴장을 했다. 어라, 첫 문장부터 아는 경구가 나와 반갑다. “우리 사이에 칼이 있었네.” 예상보다는 잘 읽혔다. 보통 소설처럼. 남 주인공이 “사진을 찍지 않는다.”는 문장을 읽다가 나는 멈칫거린다. 중요한 장면은 내 눈 속에, 내 감각 속에 간직해야 한다는 걸 생각해 본다. 그동안 순간을 살아 내지 못하고 유예하는 삶의 태도를, 톺아보며 여백 사이에 메모한다. ‘사진을 찍지 않으면 자세히 보고, 오래 보고, 깊게 보고, 오감으로 보면서 내 눈 속에 형상을 아로새긴다.’(아, 재독 하면서 남자 주인공이 사진을 찍지 않는 이유, 실명할 것을 예견하고 세상을 대하는 태도임을 알고 실소를 금할 수가 없었다.) 2장과 3장으로 넘어가면서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한다. 서서히 안개가 내려앉더니 어느 순간 30미터 앞도 볼 수 없는 지경으로 빠진다. 한글이라 글자는 눈에 들어오나 맥락이 부서져 버린다. 그(남주인공)인 줄 알고 한참 읽다 보면 그녀(여주인공)가 등장해 있고, 그녀라고 여기며 읽어나가다 보면 돌연히 그가 나타나기도 해, 뒤엉킨 실타래를 만지고 있는 듯하다. 화자(주인공) 이름이 없어서 더 어수선하다. 또 하나 결정적인 이유가 있다. 현실에서 과거, 과거에서 꿈, 대화를 나누는 사이사이에도 과거의 기억과 꿈이 혼재되어 있다. 정신 줄을 놓게 된다. 머리를 좌우로 흔들면서 다시 또, 글자에 눈을 고정시킨다. 마치 한자로 된 시를 읽을 때처럼 난감하다. 모르는 한자도 찾아야 하고 해석이 난해한 구절에서 멈출 수밖에 없다. 잠시 머뭇거리다가 안개가 자욱한 길을 운전할 때처럼, 눈을 지릅 뜨고 읽어 내려간다. 책이 두껍지 않음을 다행으로 여긴다. 속절없이 끝장을 보고야 말겠다는 당치 않은 신념이 생긴다. 드디어 191쪽을 읽고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니 ‘1판 31쇄’가 보인다. 역시 노벨상 작품이라 많은 사람이, 내가 산 것처럼 이 책을 샀구나! 노벨상이라는 어마어마한 상 덕분에 책이, 기염을 토해 낸 것이다. 내가 믿고 보는 이동진 평론가가 유튜브 ‘파이아키아’에서 <희랍어 시간>을 마지막까지 읽고 나면, 금은 보화보다 귀하고 값진 선물이 있다고 했다. 나는 어슴푸레하게 낀 안개 외 선물 따위 받은 게 없다. 오우, 선물을 받은 것이 있다. 은유와 비유 문장을 수도 없이 만났다. 마치 언어영역 수능 공부한 문제집에 빨간 펜으로 밑줄을 그은 것처럼, 나도 은유 문장들에 밑줄을 그었다. 뱀이 지나간 것처럼 구불구불한 밑줄 여백에 휘갈긴 메모도 남겨 놓았다. 왜 나는 선물을 못 받았을까? 책장을 한 장 한 장 넘겼다. 메모한 부분을 삼킬 듯이 빠르게 훑어보았다. 감이 오지 않았다. “점자처럼 읽은 자만이 선물을 받을 수 있다.”라고 이동진이 했던 말이 얼핏 떠 올랐다. 문학작품은 단계가 여러 겹이다. 겉 이야기, 속 이야기, 작가의 의도 등이 있다. 첫 번째 읽을 때는 사람으로 비유하자면, 외모(겉모습)와 말투 정도였다면 두 번째는 그가 취하는 태도가 보일 것이고 세 번째는 속마음도 알아차릴 수 있을 테니 ‘반복 독서’를 해보기로 한다. 두 번을 읽었을 때 그의 태도가 보였지만, 아직 그의 속마음을 알 수 없었다. 세 번째 책을 펼쳐 들었더니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처음 가는 길은 멀게 느껴지다, 두세 번 가면 가깝게 느껴지듯이 책도 그와 같았다. 40년 지기와 대화하듯 막힘이 없었다. 작가의 의도와 인물 간의 맥락 등 쾌청한 하늘을 다 보여줬다. 주인공 입장에 각각 감정이입이 되고보니, 그네처럼 감정이 치달아 오르내리기도 했다. <희랍어 시간>은 어려운 낱말이 많은 것도 아니고 문장이 난해한 것도 아니다. 다수가 어려워하는 까닭을 나름대로 알아내었다. 우리가 대화를 나눌 때 갖가지 생각이 뇌리를 스친다. 한강은 문득문득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생각들을, 대화 틈새에 배치한다. 뜬금없어 보이는 그것이 과거의 기억이기도 하고 꿈 내용일 때도 있다. 그러다 보니 이 책은 초집중을 하지 않으면 맥락을 놓칠 수밖에 없다. 책을 읽을 때는 온전히 몰입해서 읽어야 된다는 메시지를, 작가가 행간 곳곳에 심어 놓은 듯하다. "이 소설은 말을 잃어가는 한 여자와 침묵과 눈을 잃어가는 한 남자의 빛이 만나는 찰나의 이야기다." 여주인공 어머니가, 여주인공 임신 중에 장티푸스 약을 한 움큼씩 복용한 것이 화근이 된다. 여 주인공이 청각을 잃게 된다. 남주인공은 나이가 들어가면서 점차적으로 시력을 잃어 간다. 집안 내력으로 아버지가 그랬듯, 아들인 주인공도 머지않아 빛으로 세상을 볼 수 없게 된다. 빛을 잃어가는 남자와 소리를 잃어버린 여자의 만남이 자연스러운 사랑으로 이어질 수가 없는 구조다. 그 둘 사이에 장검이 놓여 있다. 그것을 극복할 여지가 없기도 하고 있기도 하다. 새해 벽두에 만난 <희랍어 시간>, 그 안에서 달포 정도를 그들과 함께 살고 있다. 책에 나온 문장들과 장면들이 수시로 나에게 말을 걸어온다. 나는 왜 이 책과 사랑에 빠졌을까? 반복 독서를 두 번도 아닌 세 번을 했다. 책 대부분을 필사까지 해 가면서 깊은 사랑에 빠진 이유가 무엇일까? 한강이 청각과 시각을 잃은 이들에게 감정이입을 할 수 있게 여러 겹으로 길을 내주었다. 그들의 입장에서 불편하게 사는 삶을 깊이 있게 들여다볼 수 있는 마음의 지도도 그려 놓았다. 내가 두 주인공의 마음과 목소리에 세세하게 귀 기울였던 것은 남편 때문이었다. 그들이 장애로 인해 겪는 어려움과 남편이 겪는 애로사항이 결코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이다. 남편 편마비로 살 게 된 지 어언 천일을 훨씬 넘어서고 있다. 살아 있는 것만으로 기적이라는 말은 더 이상 의미가 없다. “견딜 수 없이 떨리는 왼팔을 들어, 처음으로 그녀의 어깨를 안는다.” “투명한 테이프로 입이 틀어막힌 사람처럼 그녀의 입술이 굳어 있는 것을 그는 모른다 그녀가 잠들지 못한 것을 모른다. 간밤에 이 방에서도, 첫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서도 그녀가 잠들지 못하는 것을 모른다. 뜨거운 물과 아이의 거품비누로 오랫동안 샤워를 한 뒤, 식탁 앞에 앉아 희랍어 공책을 펼친 것을 모른다. 얼음 아래 수십 갈래 길을 더듬듯 죽은 희랍어 문자들을 적고, 견딜 수 없이 생생한 모국어 문장들을 끈질기게 이어 적은 것을 모른다.”(p.181) 사람 간 소통을 잘하는 비결이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상대와 소통을 잘 못하는 것은 윗글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과 맞닿아 있다. 남자 주인공은 여자의 상황에 대해서 너무 모른다. 초집중해서 책을 읽어야 책 내용 전체가 보이는 것처럼, 상대방이 전하고자 하는 것 또한 놓치지 않고 오감으로 느낄 줄 알아야 된다. 남편 속(마음과 몸)으로 들어가 보지 않았으니 나도 남편을 잘 모른다. 일상 생활하는 데 불편함을 덜어주는 것으로 할 일을 다했다고 생각하지 말자. 한 발짝만 더 나아가 보자. 이제 몸이 불편한 사람에게 감정이입과 공감대라는 무기를 장착했으니 남편 속으로 풍덩 들어가 보자. 마음과 마음이 맞닿을 수 있는 교두보를 놓아 보자. 텍스트는 책이다. 남편에게 한강 책은 조금 어려울 것이다. 그가 조*을 좋아하니 그분 책으로 물꼬를 터 보자. 우리나라 문학계에 혁명을 일으킨 대문호 한강, 그녀로부터 ‘승화’라는 강력한 메시지를 선물 받았다. 한강 작가를 알기 전과 후의 내가 달라졌음을 기록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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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출을 자제하라는 기상청의 예보 때문이었는지 햇살이 가만가만 퍼지는 이른 시간부터 거리는 무척이나 한산했습니다. 테라스 유리창에 의해 차단된 완전한 침묵. 밝음 속에 스며든 어둠처럼 침묵은 그렇게 한정없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소리가 사라진 정적의 공간 속으로 한가로운 햇살만 넘실대는 바깥 풍경을 나는 그렇게 한동안 넋을 놓고 바라보았습니다. 소리를 완전히 지운 듯한 비현실적인 풍경에서 눈을 뗀 나는 '올 여름은 또 얼마나 더울려고 벌써부터...' 하는 현실적인 걱정을 이끌어냈던 것입니다. 5월에 내려진 폭염주의보와 오존주의보 그리고 인적이 끊긴 보도. 늦잠을 자느라 아침을 걸렀지만 주말 휴일의 허기는 언제나 어렴풋한 느낌으로만 존재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쉬는 날이면 나는 마음의 이쪽 끝에서 저쪽 끝을 향해 하루에도 수십 번 달음박질치는 까닭에 육체의 허기는 잠시 잊혀지는 어떤 것이 되기 일쑤입니다.
며칠 전에 있었던 한강 작가의 맨부커상 수상 소식은 일견 기쁘면서도 씁쓸한 것이었습니다. 일면식도 없는 작가를 향해 내가 느꼈던 양가감정은 나로서도 그 까닭을 알 수 없는 묘한 일이었고, 그래서 다시 집어든 책이 <희랍어 시간>이었습니다. 책에는 시력을 잃어가는 남자와 말語을 잃은 여자가 등장합니다. 말하자면 희랍어 시간은 상실의 고통과 기억을 지닌 그들만의 공간인 셈이었습니다. 정교한 언어이지만 문법적 복잡성으로 인해 서서히 사라져간 언어, 더이상 언어로서의 최소한의 기능마저 상실한 희랍어는 소설 속 남녀 주인공과도 무척이나 닮아 있습니다.
남자는 희랍어 강사로 여자는 희랍어를 배우는 학생으로 만납니다. 대학이나 학원에 개설된 희랍어 강의가 아닌 일반인을 대상으로 하는 인문학 아카데미 중 하나였습니다. 과거와 멀어질수록 더욱 선명해지는 과거의 기억은 우리가 어떤 것을 잃음으로써 다른 새로운 것을 얻을 수 있다는 기본적인 통념과는 사뭇 배치되는 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한정된 시간을 흘려보냄으로써 원하지도 않았던 기억 한 줌을 손에 쥐었다는 건 이론상으로 맞지 않는 듯 보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가진 가장 약하고 연하고 쓸쓸한 것, 바로 우리의 생명을 언젠가 물질의 세계에 반납할 때, 어떤 대가도 우리에게 돌아오지 않을 거라고. 언젠가 그 순간이 나에게 찾아올 때, 내가 이끌고 온 모든 경험의 기억을 나는 결코 아름다웠다고만은 기억할 수 없을 것 같다고. 그렇게 남루한 맥락에서 나는 플라톤을 이해한다고 믿고 있는 것이라고. 그 역시 아름다운 것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거라고. 완전한 것은 영원히 없다는 사실을. 적어도 이 세상에는." (p.120~p.121)
십대 중반의 나이에 가족 전체가 독일로 떠났던 남자는 언어와 문화가 두 동강이 난 채 그곳에서 살다가 십수 년 만에 혼자 귀국하여 아카데미에서 희랍어를 가르치며 삽니다. 부계 유전에 따라 독일에서 그는 이미 마흔 이후에는 앞을 보지 못할 수도 있다는 의사의 진단을 받은 상태였습니다. 성치 않은 몸으로 귀국을 결심한 남자를 그의 어머니와 여동생은 떠나기 전부터 걱정했습니다. 남자는 독일에서의 청소년기를 지극히 외롭게 보냈습니다. 아시아계 이방인이라는 것에 더하여 그의 내성적인 성격이 만들어 낸 결과였습니다. 남자의 이야기는 청소년기에 그가 사귀었던 두 사람(그의 첫사랑이었던 농아 여인과 유일한 독일 친구이자 그를 사랑했던 요하임 그룬델-그는 이미 사망했다)과 여동생 란이에게 보내는 편지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잘 보이지 않으면 가장 먼저 소리가 잘 들릴 거라고 사람들은 생각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닙니다. 가장 먼저 감각되는 것은 시간입니다. 거대한 물질의 느리고 가혹한 흐름 같은 시간이 시시각각 내 몸을 통과하는 감각에 나는 서서히 압도됩니다." (p.39)
열입곱 살 때 처음 실어증을 앓았던 여자는 그때 우연히 배운 불어 단어로 인해 다시 말을 찾았던 경험이 있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출판사와 편집대행사에서 일했고, 대학과 예술고등학교에서 문학 강의를 했고, 시집 세 권을 냈고, 칼럼을 쓰며 문화잡지 창간 멤버로 활동했던 여자는 반년 전에 어머니를 여의고, 수년 전에 이혼했고, 소송 끝에 아홉 살 난 아들의 양육권마저 잃고, 아들을 못 만난 지 오 개월이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여자는 20년만에 다시 찾아온 실어증을 극복하기 위해 희랍어를 배웁니다. 어머니를 추모하며 늘 검정 옷을 입고, 아들이 없는 집에서의 불면의 밤을 두려워하여 온 몸이 땀으로 흠뻑 젖을 때까지 걷는 여자는 희랍어 수업에 나가는 것 외에는 딱히 하는 일이 없습니다.
어느 날 건물 안으로 날아든 박새를 내쫓으려다 남자는 계단에서 굴러 상처를 입고 안경마저 부서져 앞을 보지 못하게 됩니다. 여자는 그런 남자를 부축해 함께 병원엘 가고 남자의 집까지 데려다 줍니다. 남자는 여자에게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마치 독백을 하듯 가만가만 들려주고 여자는 앞을 보지 못하는 남자로 인해 오랫동안 굳어 있던 마음에 따스한 감각이 되살아납니다.
"눈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침묵이라면, 비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끝없이 긴 문장들인지도 모른다. 단어들이 보도블록에, 콘크리트 건물의 옥상에, 검은 웅덩이에 떨어진다. 튀어오른다." (p.174)
소설에 등장하는 말을 잃은 여자와, 시력을 상실해가는 남자와, 청각을 잃었던 남자의 첫사랑과, 일찍 세상을 떠난 사춘기 시절 남자의 독일인 친구는 모두 자신이 소유했던 무엇인가를 내어주고 끝내 다시 돌려받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작가는 어쩌면 삶을 영위하는 모든 사람들이 비록 각자가 소유하는 시간은 다를지라도 시간이라는 블랙홀에 결국 자신이 가졌던 모든 것을 내어줄 수 밖에 없는 것이 우리네 인생임을 아프게 말하려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소중한 것을, 소중하다고 막연히 생각했던 것을, 그리고 영원하리라고 생각했던 것들마저도 결국에는 시간의 소멸과 함께 어쩔 수 없이 내어줄 수밖에 없는 게 인생이라고 말입니다. 시력도, 청력도, 말語도 사람에 따라 임대 기간은 서로 다를지언정 얼굴도 모르는 주인으로부터 잠시 빌려 쓰고 있다는 점에서는 우리 모두가 같은 처지일 뿐입니다. 결국 우리는 세상이라는 임대하우스에 잠시 세 들어 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온전히 내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런게 있기나 할런지요. 곧 있으면 저녁 어스름이 내릴 시간입니다. 빛이 소멸하는 시간이지요. 애초에 내것은 아니었지만 왠지 섭섭해지는군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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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계속해서 한강의 소설들을 읽고 있다. 몇 해 전 맨부커상을 수상했다는 보도를 보았을 때, 그의 작품이 지닌 특징이 무엇일까 하는 궁금증이 들기도 했다. 그리고 까마득하게 잊었다가, 오래 전에 구입한 책들을 하나씩 읽고 있다. 그의 작품들을 읽으면서, 작가만의 독특한 특징들이 잘 드러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등장인물들이 대체로 상처를 지닌 인물들이라는 것, 그 상처를 드러내며 즐거리를 이끌어가는 원동력이 되는 것이라 여겨진다. 그리고 장을 나눠 서로 다른 인물들의 시점을 교차해서 보여주는 것도 또 하나의 두드러진 특징이다.
이 작품은 점점 시력을 잃어가는 남자와 말을 잃고 살아가는 여자가 주요 인물로 등장하고 있다. 이 작품에서 1인칭 화자인 ‘나’는 시력을 잃어가는 남자로, 가족들과 함께 독일로 이민을 갔다가 홀로 귀국하여 문화센터에서 희랍어 강사를 하는 인물이다. 독일에서 철학을 전공하면서 익힌 희랍어를 한국에 돌아와 문화센터에서 가르치며 살아가는 인물이다. 그리고 점점 말을 잃어가는 ‘그녀’는, 이혼을 하고 재판에서 패소를 하여 아들까지 전 남편에게 빼앗긴 상황으로 그려지고 있다. 문화센터의 강의실에서 만난 두 사람의 시점이 교차되면서, 그들이 처한 상황과 사연들이 상세히 소개되는 것이다.
그밖에도 여러 인물들이 등장하지만, 그들은 그저 두 사람의 조연 정도로 역할을 하고 있다. 여름휴가를 앞둔 어느 날 건물에 날아든 새를 내보내기 위해 벌어지는 사건으로 인해 남자의 안경이 깨어지면서, 그가 점점 시력을 잃어가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휴가철을 앞두고 텅빈 강의실을 찾았던 강사를 기다리다, 눈이 어두운 그를 도와 병원을 거쳐 남자의 집에까지 바래다주는 여자. 그렇게 그들은 강의실이 아닌 공간에서 마주치면서, 어렴풋하게 서로의 상황들을 이해하려고 하는 것이다.
작품에서는 두 인물의 사연과 내면의 감정들을 서술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래서 작품의 소개를 ‘침묵을 그려내는 단단하고 섬세한 이야기!’라고 표현한 것일까? 작가의 다른 작품에서도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특징이라 할 수 있는, 두 사람은 모두 과거의 상처를 안고 사는 인물들이라 할 수 있다. 그들이 서로의 상처를 품어주었던 것인지는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지만, 아마도 서로의 상처를 인지하는 것만으로 위안을 받았을 것이라 여겨진다. 단지 두 인물의 섬세한 내면을 잘 표현한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차니) * 개인의 독서 기록 공간인 포털사이트 다음의 "책과 더불어(與衆齋)“(https://cafe.daum.net/Allwithbooks)에도 올린 리뷰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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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 여자, 그, 그녀 그리고 나. 나의 주변 인물 'R', '요하임 그룬델' 그리고 '란' 1장(무제, 남자): 보르헤스 그리고 '서슬 퍼런' 칼 2장(침묵, 여자): '희랍어 시간' 3장(무제, 남자): 보르헤스의 문장 '세상은 환이고, 산다는 것은 꿈꾸는 것입니다', '그 꿈이 어떻게 이토록 생생한가. 피가 흐르고 뜨거운 눈물이 솟는가.' 4장(무제, 여자): 침묵 속에서, 어어, 우우, 분절되지 않은 음성, 처음 몇 개의 단어들 5장(목소리, 남자): R, 사랑 그리고 어리석음. 보이는 세계가 썰물처럼 밀려가 사라지는 동안, 우리의 침묵 역시 서서히 온전해졌을 겁니다. 6장(무제, 여자): '희랍어 시간' 7장(눈, 여자): 그렇게 간단하지 않아요. 8장(무제, 남자): 그러나 피가 흐르고 눈물이 솟는다. 9장(어스럼, 남자): 란, 그리고 아버지 10장(무제, 여자): 흑판에 씌어진 모국어 단어들이 육각 연필의 매끈한 표면에 으깨어져 있다. 11장(밤, 여자): 제논과 세슘137, 방사성 요오드131 12장(무제, 여자): 신과 인간과 혼 13장(무제, 남자): 점자 편지, 꿈 14장(얼굴, 남자): 요하임 그룬델 15장(무제, 여자): 몸이 없는 단어들 16장(어둠, 여자와 남자): 박새17장(어둠, 여자와 남자): 박새 18장(무제, 여자와 남자): 먼저 // 병원으로 // 가요 19장(어둠 속의 대화, 여자와 남자): 카타콤베 묘지, ..... 희랍어는 왜 배우는 건가요?20장(흑점, 여자와 남자): 어둠을 향해 두 눈을 뜬 채 그는 아직 그녀의 어깨를 안고 있다. 21장(심해의 숲, 남자): 우리 0장(무제, 여자): 나에게서 나에게로
나는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은다. / 혀끝으로 아랫입술을 축인다. / 가슴 앞에 모은 두 손이 조용히, 빠르게 뒤치럭거린다. / 두 눈꺼풀이 떨린다, 곤충들이 세차게 맞비비는 겹날개처럼. / 금세 다시 말라버린 입술을 연다. / 끈질기게, 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내쉰다. / 마침내 첫 음절을 발음하는 순간, 힘주어 눈을 감았다 뜬다. / 눈을 뜨면 모든 것이 사라져 있을 것을 각오하듯이. /
나는 의문했다. 소설의 주인공에게 고유명사로 인격을 부여하지 않고 ‘그’나 ‘그녀’의 3인칭 대명사나 ‘여자’와 ‘남자’의 보통명사로 일반화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1장부터 시작한 소설은 왜 0장으로 끝이 나는지. 1장부터 21장까지 일관되게 남자를 ‘나’로 지칭하더니 마지막 장인 0장에서는 왜 ‘그녀’가 ‘나’가 되었는지.
세상과 나 사이에 놓인 서슬 퍼런 ‘실명失明’의 위기에 처한 남자. 갑작스럽게 두 번째 실어失語를 경험한 여자. 첫 번째 실어失語는 희랍어의 중간태 문장처럼 수천 개의 바늘로 짠 것 같은 언어의 옷을 그녀 스스로 벗어 버리듯 말을 버린 것이었다면, 두 번째 실어失語는 - ‘그것’이 왜 다시 찾아왔는지보다는 - 모성애로 인해 바늘로 짜여진 그 옷을 다시 꺼내서 입어야 했다. 하지만 인간의 몸이 본능적으로 바늘에 찔리는 고통을 회피하듯 그녀의 몸은 말이 흘러나왔던 길에 새겨진 바늘 자국과 핏자국을 모두 지워버렸고, 여자는 그 자국들을 다시 찾아야만 했다.
앞이 보이지 않는 남자와 말을 할 수 없는 여자. 남자가 낭떠러지로 향해 걸어가고 있지만 그 위험을 알려줄 수 없는 여자. 낭떠러지를 향해 걷고 있는 여자의 위험을 볼 수 없는 남자. 백척간두百尺竿頭의 위태로움이 이보다 더할까. 그녀의 실어失語와 그의 실명失明이 만나지 않았다면, 박새로 인한 위태로움을 피할 수 있었을까. 고작 10센티미터가 조금 넘는 새의 퍼덕이는 소리에 겁을 먹고 휘청거려 안경알을 밟고, 깨어진 안경 유리 조각에 손바닥이 찔리는 상처를 입었을까.
하지만, 앞이 보이고, 말을 잃어버리지 않았다고 한들 삶에서 고통을 피할 수 있을까. 여자는 말을 잃지 않았던 시절에 모친상을 치르고 이혼을 당하고 아이의 양육권을 빼앗기는 고통을 당했다. 남자는 박새를 보고 놀랄 정도는 아닌 정도의 시력을 유지하고 있을 때 어리석은 말로 R에게 상처를 주었으며 그 상처는 자신의 왼쪽 뺨에도 고스란히 남아 있다.
작가는 마치 삶이 위태로운 것은 말을 할 수 없어서 또는 앞을 볼 수 없어서가 아니라 우리들의 어리석음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는 듯하다.
시력을 잃을 것이 두려웠던 남자는 ‘우리는 언젠가 함께 살게 될 것이고, 나는 눈이 멀 것이며 내가 보지 못하게 될 때 그때는 말이 필요할 것이기 때문에’ R에게 말을 해 보라고 했다. 남자의 처지에서는 참으로 현실적이고 절실하였을 물음이었을 테지만 R로서는 납득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자신이 사랑의 대상이 아니라 필요의 대상일 뿐이라고 충분히 오해할 수 있었을 것이고 그것이 이해할 수 없는 광기로 타올라 나무토막으로 남자의 얼굴을 내려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달은 남자는 ‘옛 여자’에게 보였던 그것을 더 이상 되풀이하지 않는다. 남자가 여자에게서 느끼는 침묵은 빛이 가득 고여 일렁이는 것 같았던 R의 것과는 전혀 다른, 얼음 밑에서 두드리다 굳어버린 손 같기도 하고 피투성이 몸 위로 쌓인 눈더미 같은 침묵이었지만 남자는 이번에는 말해 달라고 침묵을 깨 달라고 조르지 않았다.
남자와 여자는 빛도 소리도 없어 서로를 볼 수도 들을 수도 없는 곳에서 함께 누웠다. 소리와 빛을 느낄 수 없으니 심해처럼 느껴졌겠지만, 그들이 누워 있는 곳은 다름 아닌 남자 방의 ‘짙은 청색 매트리스 커버에 싸인 철제 싱글침대’ 위이다. 여자의 떨리는 검지손가락 끝으로 남자의 손바닥에 또박또박 글을 쓰듯, 어두운 곳에서 글을 쓸 때 윗문장과 아랫문장을 겹쳐쓰지 않으려고 가능한 한 넓게 간격을 두는 것처럼 문장과 문장 사이에 긴 사이를 두듯 그렇게 쉼표와 마침표 그리고 입맞춤으로 서로를 이해할 수 있다. 그리하여 희랍어 수업 시간에는 곤충들이 세차게 맞비비는 겹날개처럼 떨리는 눈꺼풀을 힘주어 감았다 뜨면서 눈을 뜨는 순간에는 다른 장소에 옮겨져 있기를 바랐던 여자는, 이제는 ‘눈을 뜨면 모든 것이 사라져 있을 것을 각오’하면서 힘주어 눈을 뜨려고 하고 있다. 그리고 결국 여자는 ‘나’가 된다.
‘편지나 고백, 회상이나 일기 등의 형식으로 나타나는 남자의 이야기는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남자는 말을 할 수 있으니까. 반면 이탤릭체로 적힌 그녀의 심리상태는 난해하다고 느껴질 때가 종종 있었다. 그녀는 말을 할 수 없어서일까’라고 처음엔 생각했었다.
내 생각은 틀렸다.
이탤릭체는 여자의 심리상태를 표현할 때만 쓰이지 않았고, 일상을 적은 것 같은 남자의 글들은 철학적 사유가 바탕이 되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는 문장들로 가득했다. 보르헤스의 불꽃과 화엄을 시작으로 하여 흑점, 카타콤베 묘지 등 너무나 생소한 상징이나 비유들은 책을 읽는 내내 책장을 넘기는 것을 머뭇거리게 하였고, 잊을 만하면 튀어나오는 희랍어 알파벳과 희랍어에 대칭되는 개념으로 사용된 듯한 ‘모국어’의 의미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대답도 찾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선득한 입술에 입을 맞출 때 섭씨 수천 도의 흑점들이 폭발하듯, 눈을 뜨면 모든 것이 사라져 있을 것을 각오하듯, 뭍으로 거세게 쓸려왔지만 두려워하지 않듯, 나는 그들로부터 ‘서슬 퍼런’ 칼날을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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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간열차의 유리창에 호호 입김을 불어가며 손가락으로 그림을 그려 본 적이 있을까요. 어둠이 내려앉은 차창 밖의 먼 풍경으로부터 나의 시선을 그렇게나마 가까이 두고자 했던 어설픈 행위. 뽀얗게 변한 유리창에 엉성하게 그려진 어떤 형체는 차라리 이별의 무게 혹은 그리움의 한계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시선이 멀어질수록 가슴속 빈자리도 커져가고 주체할 수 없는 슬픔이 휑하게 뚫린 가슴을 차곡차곡 채워갈 것임을 그 시절에도 나는 잘 알고 있었던 듯합니다. 그리하여 나는 멀어지려는 나의 시선을 필사적으로 붙잡기 위해 성에가 낀 유리창에 형체도 알 수 없는 그림을 그리거나, 문득 떠오르는 어떤 이름 석 자를 써보거나, 흩어지는 성에를 붙잡기 위해 반복하여 입김을 불어넣기도 했던 것입니다. 삶이 지루하다고 느끼는 사람은 이미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행복한 삶을 자신만 모르는 채 살고 있다는 것을 나는 그 시절에 깨달았는지도 모릅니다. "이십 년 만에 다시 온 침묵은 예전처럼 따스하지도, 농밀하지도, 밝지도 않다. 처음의 침묵이 출생 이전의 그것에 가까웠다면, 이번의 침묵은 마치 죽은 뒤의 것 같다. 예전에는 물속에서 어른어른한 물 밖의 세계를 바라보았다면, 이제는 딱딱한 벽과 땅을 타고 다니는 그림자가 되어 거대한 수조에 담긴 삶을 바깥에서 들여다보는 것 같다. 모든 언어가 낱낱이 들리고 읽히는데, 입술을 열어 소리를 낼 수 없다. 육체를 잃은 그림자처럼, 죽은 나무의 텅 빈 속처럼, 운석과 운석 사이의 어두운 공간처럼 차고 희박한 침묵이다." (p.19) 한강의 소설 <희랍어 시간>을 다시 읽는 동안 나는 야간열차에서의 어두운 기억을 하나하나 끄집어내어, 마치 전시 포로병의 소지품을 면밀히 검색하는 군 수사관의 시선으로 보고 또 보았던 것입니다. 과거의 기억 속에 내가 미처 몰랐던 어떤 큰 비밀이라도 숨겨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한강의 <희랍어 시간> 역시 소멸해가는 어떤 것에 대한 이야기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남들보다 유난히 소리에 민감했던 여자는 열일곱 살 겨울 무렵 갑작스레 말을 잃고 맙니다. 그렇게 말을 잃고 살아가던 여자의 말문을 다시 틔워 준 것은 낯선 외국어였던 한 개의 불어 단어였습니다. 시간이 흘러 이혼을 한 여자는 아홉 살 난 아이의 양육권마저 빼앗긴 채 다시 말을 잃고 무기력한 일상을 살아갑니다. 말을 다시 찾았던 과거의 기억에 기대어 그녀가 선택한 마지막 희망이 희랍어였습니다. "이따금 그녀는 자신이 사람이기보다 어떤 물질이라고, 움직이는 고체이거나 액체라고 느낀다. 따뜻한 밥을 먹을 때 그녀는 자신이 밥이라고 느낀다. 차가운 물로 세수를 할 때 그녀는 자신이 물이라고 느낀다. 동시에 자신이 결코 밥도 물도 아니라고, 그 어떤 존재와도 끝끝내 섞이지 않는 가혹하고 단단한 물질이라고 느낀다. 침묵의 얼음 속에서 그녀가 온 힘을 다해 건져내 들여다보는 것은 이주에 하룻밤 함께 지내는 것이 허락된 아이의 얼굴과, 연필을 쥐고 꾹꾹 눌러쓰는 죽은 희랍 단어들뿐이다." (p.59) 여자가 듣는 희랍어 강의의 강사 역시 서서히 시력을 잃어가는 한 남자입니다. 가족들을 모두 독일에 두고 십수 년 만에 혼자 한국에 입국하여 희랍어를 가르치고 있는 남자는 앞을 볼 수 없다는 마흔을 일이 년 앞두고 있습니다. 남자는 자신의 수강생 중 말을 하지도, 웃지도 않는 여자를 지켜보면서 여자의 침묵에 두려움을 느낍니다. 소설은 그렇게 목소리를 잃은 여자와 시력을 잃어가는 남자의 과거가 교차하면서 두 사람의 삶을 응시합니다. "심장과 심장을 맞댄 채, 여전히 그는 그녀를 모른다. 오래전 아이였을 때, 자신이 이 세계에 존재해도 되는지 알 수 없어 어스름이 내리는 마당을 내다보았던 것을 모른다. 바늘처럼 맨몸을 찌르던 말言들의 갑옷을 모른다. 그녀의 눈에 그의 눈이 비쳐 있고, 그 비친 눈에 그녀의 눈이, 그 눈에 다시 그의 눈이...... 그렇게 끝없이 비치고 있는 것을 모른다. 그것이 두려워, 이미 핏발이 맺힌 그녀의 입술이 굳게 악물려 있는 것을 모른다." (p.183) 우리가 잃어가는 게 비단 말語과 시력뿐이겠습니까. 다소의 시차는 존재하겠지만 언젠가 소멸하게 될 한시적인 현상계에서 살고 있는 우리는 영원히 존재하는 궁극적인 그 무엇에 새길, 혹은 영원에 약조하고픈 하나의 징표로 남길 만한 어떤 의미를 찾기 위해 각자에게 주어진 삶을 모두 소진하게 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것이 사랑이 됐든 연민이 됐든 말입니다. 작가는 우리 모두가 한시적인 현상계에 사는 여리디여린 존재임을 소설을 통해 일깨우고 있습니다. 야간열차의 유리창에 아주 잠깐 남아 있었던 나의 입김처럼 우리 모두는 기억하기도 어려운 찰나의 순간을 살다 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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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복하는 인간에 관한 이야기 <희랍어 시간>을 읽고 ![]() 이 소설을 읽어내는 일, 이 소설 속 남녀의 처지를 이해하는 일, 이 소설에 대한 리뷰를 쓰는 일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아요.(61쪽)" 희랍어 강사인 '그'와 수강생인 '그녀'의 수업을 청강하면서 짐작해볼 따름입니다. 그녀는 말을 잃었고, 그는 빛을 잃어가는 중입니다. 실어(失語)와 실명(失明) 상태에 처한 이들 사이에 칼 아니, '희랍어'가 있었던 것입니다. 고대 희랍어는 현재의 일상 대화에서 쓰이지 않는 죽은 말이자 빛바랜 언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 면에서 두 사람이 칼에 베이지 않도록 도와주는 칼자루로서 기능합니다. 공교롭게도 둘은 낯익은 모국어가 아닌 낯선 외국어로 '빛'을 발견한 경험이 있습니다. 십대에 그는 이국땅에서 독일어로 정체성을 재구축했고, 그녀 또한 모국에서 불어로 잃었던 말을 되찾은 것입니다. 어린 시절에 햇빛을 등지고 마당에 앉아 자음과 모음을 써가며 언어에 남다른 감각을 보인 그녀, 해를 올려다보기 좋아한 첫사랑과 달리 점점 시력을 잃게 만드는 유전병 탓에 그럴 엄두조차 내지 못한 그를 상상합니다. 누군가에게는 말과 빛의 존재가 크게 와닿지 않을 수도 있겠으나, 녹록지 않은 삶을 살아온 두 사람에게 말과 빛의 상실은 일종의 폭력처럼 여겨졌을지도 모릅니다. 사랑하는 이들과의 이별을 거듭하면서 거대한 파도처럼 밀려오는 공허함과 무기력감에 휩쓸리지 않으려 애쓰는 그를 그녀는 알지 못합니다. 점점 압도되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만들어진 억압된 공간을 상실의 시간으로 채우는 그녀를 그는 모릅니다. 희랍어 가운데 '수난을 겪다'와 '배워 깨닫다'라는 뜻을 가진 두 동사의 모양이 유사한 점에 착안하여 소크라테스는 이 두 가지 행위가 비슷하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의 말에 기대어 본다면, 각기 다르지만 소중한 무엇이 사라져서 견디기 힘든 생활을 하고 있지만, 이런 질곡의 세월이 곧 그와 그녀가 인생의 의미에 대해 깊이 생각하는 시간의 다른 이름은 아니었을까요.
동일한 장소에서 희랍어 시간을 공유하면서도 서로의 속사정까지는 나누지 않던 두 사람 앞에 어느 날 어디선가 새 한 마리가 날아옵니다. 그와 그녀는 건물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하는 새가 염려스러워 이렇게 읊조립니다. “거기 숨으면 안 돼. 밖으로 나가야지(145쪽).” “나와야지. 거기 있으면 안 돼(146쪽).” 재차 울리는 이들의 외침이 어쩌면 오랜 시간 침묵과 어둠 속에 갇혀 가까스로 버티고 있던 각자에게 건네고 싶었던 말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삐이삐이’하는 새 소리는 마치 ‘어어, 우우, 하는 분절되지 않은 음성’에서 인간과 소통할 수 있는 언어로 변화하여 그와 그녀를 일깨우는 소리처럼 들립니다. 이제 침대 양 끝에 앉아 그가 말하고, 그녀가 듣습니다. 그녀는 그가 들을 수 없는 목소리를 들려주려는 듯 조용한 움직임으로 그의 이야기에 응답합니다. 그와 그녀가 눈꺼풀과 입술을 여닫을 때마다 지난 시공간에서 서로가 겪었을 기쁨과 슬픔, 환희와 고통이 두 사람의 마음속에 그려집니다. 고대 희랍어에는 능동태와 수동태 말고 '주어에 재귀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행위를 표현(21쪽)'하는 '중간태'가 있다고 합니다. 여기서 ‘재귀(再歸)’라는 단어를 유심히 들여다보게 됩니다. ‘본래 있던 곳으로 다시 돌아가거나 돌아옴’, 이것을 우리 몸과 마음에 비추어본다면, ‘회복’의 의미로 볼 수도 있겠습니다. '그'라는 세계와 '그녀'라는 세계의 존재를 인식하고 두 세계를 연결하는 언어가 희랍어라고 생각합니다. 아직 그는 막 시작된 둘의 사랑이 중간태적임을 알지 못합니다. 그녀 역시 먼 길을 돌아왔지만 재귀 본능이 두 사람을 원래 있어야 할 자리인 서로의 곁으로 불러들였음을 모릅니다. 타인을 향한 사랑이 자신에게도 영향을 주고 있음을, 더불어 자기를 아끼는 행위가 상대를 위하는 일임을 깨닫게 되는 날이 머지 않아 찾아올 것입니다. 상처가 아물거나 고통이 해소되려면 그것을 감추거나 외면하기보단 드러내어 보살펴야 합니다. 저마다의 속도로 원래의 상태를 되찾기 마련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의 시력이 회복되고 그녀의 말길이 열릴 가능성은 낮아 보입니다. 그럼에도 이들의 만남이 조금씩 회복탄력성을 높이며 상대의 신체적 결핍을 채워주고 정서적 안정을 가져다 주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다음 수업에서는 또 다른 것들을 배우고 생각할 수 있기를 희망하며, 이상으로 1교시 희랍어 시간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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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작가의 소설을 어느덧 네 번째. 그녀의 작품을 읽을 때마다 감탄하면서도 많은 생각할 거리를 얻는다. 그런데도 한강 작가의 문체는 여전히 나에게 어렵다. 쉽게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많고, 어떤 문장은 몇 번이고 다시 읽어야 할 때도 있다. 그래도 작품이 전하는 메시지나 주제의식을 이해하는 데 큰 어려움은 없었는데, 이번 책 [희랍어 시간]은 달랐다. 정말 많이 어려웠다. '희랍어'라는 단어는 거의 등장하지 않는데도, 마치 '희랍어'를 읽은 듯한 느낌이었다. 솔직히 지금 이렇게 리뷰를 쓰면서도, 내가 제대로 이해한 게 맞나 싶다. 그럼에도 다른 사람들의 해석을 찾아보지 않는 건, 내 생각이 다른 이들의 해석으로 오염되는 게 싫어서이기도 하고, 어쩌면 마지막 남은 자존심 같은 거라고 스스로 다독여 본다. [희랍어 시간]은 남자와 여자가 만나는 이야기이다. '사랑이야기', 근데 단순히 만나는 것이 아니라 ‘기척’이 만나는 이야기라고 한다. ‘기척’? 사전을 찾아보니, "누가 있는 줄을 짐작하여 알 만한 소리나 기색"을 뜻하는데, 아마도 여자는 말을 잃었고 남자는 점점 보이지 않은 점 때문에 둘의 만남을 '기척'의 만남이라고 표현한 것이 아닐까 싶다. 그렇기에 여자는 말 대신 기색으로 표현해야 하고, 남자는 시각 대신 소리에 의지해야 한다. 그렇게 각자의 아픔을 안고 서로에게 조금씩 다가간다. 그리고 그 연결고리가 바로 ‘희랍어’다. 책을 덮고 나서 생각해보면, ‘희랍어의 시간’이란 결국 남자와 여자가 만나는 시간이다. 점점 사라져 가는 언어인 ‘희랍어’가 그들에게는 살아가는 이유이자 유일한 희망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마도 그랬을 거라고 생각한다. 이번 작품은 기존의 소설들보다 더 이해하기 어려웠다. [채식주의자] 를 읽을 때도 비슷한 감정을 느꼈지만, 이번에는 머릿속에 선명하게 그림이 그려지지 않았다. 몇 번이고 다시 읽어보면서도 완전히 이해했다고 말하기 어려웠다. 아직 내 수준이 작가의 언어를 ‘아름답다’고 온전히 느끼기에는 부족한 것 같다. 그래도 한강 작가는 나를 어렵게 만들어 줘서 좋은 것 같다. 계속 읽게 만들고 생각하게 만든다. 머릿속에 '상상'과 '그림'을 불어 넣어준다. 나에게 한강 작가의 매력은 바로 그런 점이다. 다음은 시집을 읽어볼 건데 계속 나에게 그런 자극을 주기를 기대해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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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의 책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읽어보겠다는 다짐을 한 사람처럼 요즘 그녀의 책을 열심히 읽고 있다. 보았던 책들은 천천히 음미하듯 다시 읽고, 처음 보는 책들은 설레는 마음으로 펼쳐보고 있다. 이번에 읽은 <희랍어 시간>은 ‘소설을 시로 쓴다면 바로 이런 책이 나오겠구나’라는 생각이 들 만큼 시의 아름다움과 운율이 느껴지는 책이다. 나는 앞으로 이 책을 두고두고 꺼내보게 될 것은 물론 오래오래 사랑하게 될 것 같다. <희랍어 시간>은 말을 잃어가는 한 여자의 침묵과 눈을 잃어가는 한 남자의 빛이 만나는 찰나의 이야기를 그린 소설이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말을 잃어가는 여자와 눈을 잃어가는 남자, 말을 하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두 사람은 어떻게 소통할까? 손바닥에, 서로의 몸에 글을 새기듯 한 자 한 자 꾹꾹 눌러 써야 할까? 말을 잃은 여자처럼 자신의 몸과 사물이 부딪쳐 내는 소리로 여기 존재하고 있음을 상대에게 확인시켜줘야 할까? 남자와 여자가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고 자신만의 방법으로 대화를 이어가는 장면은 탯줄로 이어진 자궁 안의 태아와 뱃속에 아기를 품고있는 엄마가 주고받는 대화처럼 숭고하고 아름답기까지 하다. ● 말을 잃어가는 여자 목소리가 작은 사람, 자신의 존재를 넓게 퍼뜨리고 싶지 않은 여자가 있다. 여자는 어머니를 여의었고, 이혼 후 아홉 살 난 아들의 양육권을 잃었고 말까지 잃어버렸다. 어떤 원인도 전조도 없이. 어느 날부터 자신의 혀와 손에서 하얗게 뽑아져나오는 거미줄 같은 문장들이 수치스럽고 토하고 비명을 지르고 싶을 만큼 고통스러웠다. 그리고 낯선 외국어, 고대 희랍어가 그녀의 오랜 침묵을 깨뜨린다. 이번에는 자신의 의지로 언어를 되찾고 싶다. * 마침내 그것이 온 것은 그녀가 막 열일곱 살이 되던 겨울이었다. 수천 개의 바늘로 짠 옷처럼 그녀를 가두며 찌르던 언어가 갑자기 사라졌다. 그녀는 분명히 두 귀로 언어를 들었지만, 드텁고 빽빽한 공기층 같은 침묵이 달팽이관과 두뇌 사이의 어딘가를 틀어막아주었다. -p.15 ● 눈을 잃어가는 남자 가족들을 독일에 두고 혼자 한국으로 돌아와 희랍어를 가르치는 남자는 점점 빛을 잃어가고 있다. 언제 두 눈을 잃게될지 모른다. 남자는 얼마 되지 않는 수강생 중 말을 하지도 웃지도 않는 여자를 주의 깊게 바라본다. 안경을 잃어버리고 어둠 속을 헤매던 남자를 집까지 바래다 준 여자. 둘은 침묵 속에서 더듬더듬 대화를 이어간다. 마치 아주 오랜 시간 동안 땅속에 묻혀있던 고대 유물의 흔적을 천천히 발견해나가는 과정처럼. 유물 위에 쌓인 흙과 모래를 조심스럽게 붓으로 쓸어 내리는 것처럼. 한강의 소설에는 눈이 자주 등장한다. 그녀의 글은 '눈'과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만져보면 차갑지만 바라보고 있으면 아름답고 따뜻하다. 햇빛에 녹아 없어져 버릴 것 같지만 녹은 눈은 물이 되고 다시 구름이 되고 언젠가 또 눈이 되어 다시 세상에 뿌려진다. 한강의 책을 읽고 나면 시간이 지남에 따라 흐릿해지지만 잊혀지지 않고 마음 한 구석에 남아있는 무언가가 있다. 그 무언가는 특유의 분위기 일수도 있고, 아름답다고 느꼈던 문장일 수도 있고, 또 견딜 수 없는 상처와 아픈 이야기 일수도 있다. * 그렇게 상상하며 사람들을 지켜보는 일이 지루해질 때쯤, 천천히 뒷산의 산책로를 오르기도 합니다. 연푸른 나무들은 한 덩어리로 일렁이고, 꽃들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색채로 번져 있습니다. 산기슭에 있는 작은 절의 대중방 마루에 앉아 나는 쉽니다. 무거운 안경을 벗어 들고, 경계가 완전히 허물어진 흐릿한 세계를 둘러봅니다. 잘 보이지 않으면 가장 먼저 소리가 잘 들릴 거라고 사람들은 생각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닙니다. 가장 먼저 감각되는 것은 시간입니다. 거대한 물질의 느리고 가혹한 흐름 같은 시간이 시시각각 내 몸을 통과하는 감각에 나는 서서히 압도됩니다. -p.39 * 눈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침묵이라면, 비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끝없이 긴 문장들인지도 모른다. 단어들이 보도블록에, 콘크리트 건물의 옥상에, 검은 웅덩이에 떨어진다. 튀어오른다. 검은 빗방울에 싸인 모국어 문장들. 둥글거나 반듯한 획들, 짧게 머무른 점들. 몸을 구부린 쉼표와 물음표. -p.175 * 가끔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나요. 우리 몸에 눈꺼풀 입술이 있다는 건. 그것들이 때로 밖에서 닫히거나, 안에서부터 단단히 걸어잠길 수 있다는 건. -p.16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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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한강 소설가 님의 소설책인데요. 한강 소설가님을 좋아하고 모든 책을 통달하면서 (제게는 여운만이 기억됩니다) 중간 때 정도에 읽었었는데, 소재와 감흥마저 한강 님께서 잘 표현하시기도 했었고 그래서 누군가 한강 작가님의 소설책 중 무엇을 추천할 것이냐 한다면은 top5에 들지 않을까 싶습니다. 읽어본다면 꼭 매료될 것 같다고 생각이 드는 소설이에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