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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만 보는 바보들'로 이덕무와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려준 안소영님이 (리뷰: 나도 기억에 남는 친구가 되고 싶다 ‘책만 보는 바보’) 조선의 개혁을 이루고자 시도했지만 3일만에 좌절된 갑신정변의 주역 김옥균, 홍영식, 박영효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조선말기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과 고종의 개혁의지 그리고 일본과 청의 야심이 뒤섞여 무척 힘든 시절이었겠구나 싶었다. 도로가 발전하지 않았고, 음력을 사용하며 한편으로 보면 유유자적 자연과 더불어 사는 모습이지만 한편으로는 지금과 비교하면 가난하고 답답한 삶을 살았다는 생각이 든다. 상대적인 비교지만 그때는 그때대로 살만했겠지만 그건 있는 사람들 이야기고 책에 나오는대로 월급도 제대로 못 받고 일한다면 정말 열 받을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무엇보다 소통의 중요함을 다시 깨달았다. 김옥균의 회고에도 나오지만..
뒤표지 변화하는 세계 속에서 조선의 앞날을 뜨겁게 고민한 젊은 개혁가들의 꿈과 도전! 삼일천하로 끝난 갑신정변의 진짜 이야기를 밝힌다. 왜 그랬을까 안타까운 마음으로 책장을 펼친다.
1884년 12월 6일 김옥균과 홍영식을 비롯한 조선 청년들이 나라의 개혁을 위해 목숨을 걸고 일으킨 갑신정변의 마지막 날이었다. 시작부터 뭔가 비장함을 준다. 이미 결론을 알고 있지만 자세히는 몰랐기 때문에 궁금함이 더 한다. 작가의 상상과 역사가 뒤섞여 있겠지만 큰 틀은 변함이 없을 거라 생각한다.
연암 박지원이 지은 서울 가희방 재동에 손자인 우의정 박규수 대감이 젊은 친구들과 모여있다. 영의정을 지낸 홍순목 대감 아들 홍영식, 장원 급제한 홍문관 교리 김옥균, 박영교와 그의 동생 박영효. 박영효는 임금의 스승인 박규수 대감의 천거로 영혜옹주와 혼인하여 금릉위 혹은 부마라 불리는데 옹주마마가 사망하여 홀로 되었다. 해국도지와 지세의가 있는 방에서 중심이 되려는 세상에 대한 이야기가 한창이다. 새로운 소식을 듣고 새로운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하는 북촌 젊은 양반들. 해국도지 - 청나라 학자 위원이 서양 문물을 소개해 놓은 책으로 중심이라 자부하던 중국이 서양과 전쟁에서 여러 번 패한 뒤, 서양에 대해 잘 알아야 한다는 뼈저린 깨달음에서 썼다. "누구나 중심이 될 수 는 있지. 그리고 다들 중심이 되려 하는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어. 이런 때일수록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하네."
중인 역관 오경석은 동지사를 따라 중국에 다녀온 후 피곤도 잊고 박규수 대감을 찾고 (대감은 중국이나 조선이나, 나라의 앞날보다도 눈앞의 권력을 지키고 키우는 데만 골몰하는 세력들이 딱하다고 한탄한다) 의원 친구 유대치를 찾아가는데 일본은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데 조선 조정은 여전히 오랑캐의 섬이라 여기는 걸 답답해한다. 박규수 대감과 역관 오경석이 젊은 양반들의 생각을 틔워 주고 변화시켰으며, 유대치와 김옥균은 젊은이들의 가슴을 뜨겁게 하고 실제로 움직이게 했다. 총명하고 그림을 잘 그리는 왕비의 조카 민영익, 일본에 유학을 가는 유길준, 윤치호도 합류한다. (유길준은 후에 민영익의 수행원으로 미국에 다녀오고, 윤치호는 일본에서 영어를 배운다.)
1852년 임자년 생으로 올해 12살이 된 명복은 아버지의 계획으로 대궐로 들어와 스물여섯 번째 왕이 되었지만 아버지 대원군이 실권을 잡고 그냥 이름만 왕이 되었고, 외척의 폐해가 심해 권세 없고 믿을 만한 처가 민씨 집안에서 왕비를 뽑자 왕은 아버지가 싫어서 자신과 비슷하게 궐에 들어온 처지면서도 왕비와도 거리를 두는데, 왕비가 자신도 좋아하는 옛 왕조 이야기를 즐겨 읽자 뒤늦게 왕비의 학문과 지혜를 알아보고 책과 책임감과 막막함에 대해서 서로 터놓으며 부부이면서 벗이 된다. 궐에 들어온지 10년 만에 친정을 선포하지만 조정은 반대하고 대원군은 별장으로 가버린다.
나라의 발전을 위해 왕이 먼저 생각하고 연구하건만, 번번이 완고한 신하들에게 무시당하거나 반대에 부딪히고, 개혁을 원하는 왕의 생각에 반대하는 유생들의 상소문과 공격이 끊이지 않는다. 급기야 (첩에게서 태어난 형) 서형 이재선이 연루된 역모가 일어난다. 물론 그 뒤에는 대원군이 있었겠지만. 이재선의 역모 사건을 유배형으로 하고자 했으나 너무나 큰 사건이라 사형이 선포되자 사약을 내리고, 왕은 마음속에서 아버지도 지우고, 자신의 소심함도 버리고 과감하게 적극적으로 조선의 앞날만 바라보며 나아가리라 다짐한 후 김옥균에게 개인 자격으로 일본에 가서 조선의 개혁을 원하는지, 그렇다면 필요한 것를 지원해 줄 수 있는지 일본의 의중을 알아보라고 보낸다.
일본에 간 김옥균은 서양력을 쓰는 일본의 분주함을 느끼고 (하루 24시간, 60분, 60초) 유학 와 있던 유길준과 여러 차례 서양에 다녀온 경험을 책으로 쓰고, 신분에 관계없이 누구나 입학할 수 있는 학교 게이오기주쿠를 설립한 후쿠자와 유키치를 만난다. 후쿠자와는 김옥균의 방문 이유를 짐작하지만 조선은 일본이 중국으로 가는 통로이지 제도와 문물을 개혁하여 부강을 이루는 것까지는 바라지 않는다. 어쩔 수 없다. 다 자기의 입장에서 생각할 수 밖에 없는 문제니까. 김옥균은 일본 중국 그리고 조선, 세 나라가 힘을 모으고 친목을 이루자는 취지로 만든 단체인 '홍아회' 초대를 받아 일본의 마음을 알려고 한다. 그러나 오히려 개혁할 여지가 있냐고, 일본과 계약을 맺은 지가 언제인데 항구도 열지 않냐는 말을 듣는다. (강화도 조약은 엄연히 불평등조약이구만!!) 일본에 와 있는 서양 외교관들은 작은 나라 조선에 특별한 관심이 있지만 그건 아무도 차지하지 않았다는, 누구라도 차지할 수 있다는 사실 뿐이었다.
한편 조선에서는 밀린 군졸의 급료로 군사들의 폭동이 일어나고, 대원군은 겉으로는 화를 내면서도 그들을 지원하고 지휘권은 젊은 왕에서 대원군으로 넘어갔지만, 대원군은 청나라 배가 제물포로 들어오고 우징칭 막사에 갔다가 텐진으로 납치당하고, 조선은 청나라 군인들이 공격하고 일본과 청에 의해 누구도 알 수 없는 방향으로 간다. 중국 관리와 온 독일인 묄렌도르프 (중국명 목인덕, 중국개항장 세관 업무를 맡은 외교관)는 조선의 바다와 육지 어디건 물자를 마음대로 사고팔 수 있는 권리를 청나라 상인들에게 보장한다는 내용의 '조선상민수륙무역장정'을 체결하고, 왕비는 나라 밖이 정신없이 돌아가니 어느 한 편에 기대어 불필요한 혼란을 줄이자 생각하고 왕과 달리 청나라를 택한다.
텅 빈 국고, 당오전 발행에 대한 목 참판 (묄렌도르프), 민씨 관료와 김옥균의 말다툼이 벌어지고, 왕은 당오전은 만들되 김옥균에게 국채 모집 위임장을 주어 일본에 보내지만 빈손으로 돌아온다. 숙부 민겸호의 집이 불타자 자신의 지위도 두려워진 민영익은 미국과 유럽을 두루 방문하고 돌아오는 보빙사 (답례로써 외국을 방문하는 사절)로 다녀오는데, 환영은 받았지만 그들의 모습이 진기한 구경거리가 되었고, 세상은 온통 피부가 희고 힘센 서양인들의 것인걸 깨닫고 무례한 서양보다 전통을 알고 사대부 양반을 아는 청나라와 손 잡는게 낫겠다 생각한다.
청나라 상인의 횡포가 심해지고,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은 안남 (베트남)이 청나라와 불란서 사이에서 스스로 지킬 힘이 없어 휘둘림을 당한다 생각하고, 남의 일 같지 않다며 김옥균과 벗들이 원하는 조선의 자주독립을 두려워하는 청나라에 기댄 조정과 민씨 관료들을 이야기하며, 김옥균은 "때가 우리에게 오지 않는다면 우리가 나서서 때를 만들어야겠지"라고 말한다.
김옥균과 젊은이들이 조정을 뒤집고 권력을 잡으려 한다는 사실을 간파한 일본은 성공하든 실패하든 일본에 기회가 되고 이익도 가져오리라 판단하고 다케조에 공사에게 조선을 도우라고 한다. 김옥균은 같이 할 사람을 모으고 12월 4일 우정국 청사 완공식에 행동을 거행하기로 한다. 일이 꼬였으나 어찌 어찌 되었는데, 김옥균이 왕을 볼모로 잡고 나라를 일본에 팔아넘기려 한다는 흉흉한 소문이 돌고, 백성들에겐 이 반란이 벼슬 다툼으로만 보여진다.
작가의 말. 우리보다 먼저 살다 간 이들의 흔적을 보면서, 지금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고 앞으로의 삶도 다 잡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백여 년 전 세 젊은이가 품었던 포부와 빛나는 이상, 실패와 좌절의 신산한 삶까지도 이 책을 통해 느낄 수 있다면, 제게는 보람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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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소영의 ‘갑신년의 세 친구’ 앞부분에 백송 이야기가 나온다. “..젊은 시절 어루만지곤 하던 흰 소나무 줄기의 꺼칠한 감촉이..” 주체는 홍영식(洪英植)이다. 병조참판, 우정국총판 등을 역임한 그는 국왕을 호위하다 청군에게 살해되었다. 모두(冒頭)의 장면은 홍영식이 죽어가며 옛 기억을 떠올리는 부분이다.
갑신년의 세 친구란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을 이른다. 갑신년이란 3일 천하로 끝난 개화파의 무력 혁명인 갑신정변이 일어난 1884년을 이른다. 거사일을 기준으로 갑신정변의 세 친구의 나이를 말하면 김옥균 34세, 홍영식 29세, 박영효 24세였다. 홍영식과 함께 살해당한, 박영효의 형 박영교는 36세였다.
세 친구는 박지원의 손자인 박규수의 북촌 사랑(舍廊)에 자주 모였다. 박영효는 철종의 영혜옹주(숙의 범씨 사이에서 태어난)의 결혼해 부마(금릉위; 錦陵尉)가 되었으나 아내가 석달만에 사망하는 불운을 겪는다.(박영효가 철종 사위가 된 것은 철종 사후다.) 13세의 박영효는 소년 부마였다.(부마는 혼자 되면 재혼할 수 없는 것이 왕가의 법도였다.)
우의정 박규수(1807 - 1877)는 왕의 스승이자 젊은이들의 스승이었다. 또한 어린 고종이 따르고 의지하던 스승이었다. 박영효가 부마가 된 것도 박규수의 천거에 의해서였다. 고종은 아버지의 그늘에서 벗어나 친정(親政)을 하고 고루한 신하들의 반대 때문에 내탕금(內帑金)을 쓰면서까지 김옥균, 유길준 등을 비밀리에 일본 시찰길에 오르게 한다.
통역은 유길준이 맡았다. 두어 달만에 일본어를 익혀 교지에 일본어로 글을 쓴 사람이 우리나라 최초의 일본과 미국 유학생인 유길준이다. 윤치호는 아버지 윤웅렬의 권유로 유학길에 올랐다. 윤치호는 집안의 반대 때문에 애를 먹었던 다른 젊은이들과 달리 서얼 출신의 무관인 아버지 윤웅렬 덕에 편히 유학길에 올랐다.
일본에서 윤치호를 만난 김옥균은 윤치호가 영어를 배우겠다는 뜻을 밝히자 일본이 서양 문물을 받아들인 것 때문에 달라졌다며 잘 생각했다고 격려한다. 김옥균은 일본이 우리나라를 도울 의사가 있는지 알아보는 한편 일본이 자금 원조를 해줄 용의가 있는지 알아보는 것이 급선무였다.
1854년 미국에 의해 개항 당한 일본은 1868년 메이지 유신을 단행하고 같은 방식으로 1874년 우리나라를 개항시켰다. 미국에 당한 지 20년만의 일이다. 일본은 중국이란 호칭 대신 시나라는 호칭을 썼다. 김옥균은 후쿠자와 유키치로부터 조선이 중국의 속국에서 벗어나 개혁을 이루기 위해 일본에 도움을 요청하니 두 나라가 더욱 돈독해질 것이지만 자신에게는 도와줄 여력이 없다고 말한다.
조선에서 그때 임오군란이 일어난다.(1882년) 홍영식은 스물 이전에 과거에 급제했지만 조정 일에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홍영식의 부친 홍순목 대감은 고종이 직접 정치를 하겠다고 한 것도 마땅해 하지 않았다. 노련한 흥선군이 맡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홍순목 대감은 소중화를 자처하던 조선의 젊은이들이 오랑캐 왜인들의 문물을 배우겠다고 시찰단에 나선 것도 불편해했다.
아버지와 아들은 나라 돌아가는 모습을 두고 두루 갈등했다. 홍영식은 밀린 급료를 달라고 요구하는 구식 군사들을 매로 다스리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홍영식은 반년만에 김옥균을 만나 감격의 눈물을 흘린다. 대원군과 조정 대신들은 청나라가 나서서 일본의 무리한 요구를 중재해 주리라 기대했다. 난으로 인해 일본은 공사관이 불타고 자국민들이 죽었다.
청나라는 난리를 빌미로 군대를 앞세우고 들어왔다. 장정(章程)과 조약(條約)의 차이가 있다. 청나라는 나라끼리 맺는 조약이 아닌 지방 정부에게 하듯 장정을 내리겠다고 했다. 금륭위 박영효는 군란으로 입은 피해를 위로하고 사죄하는 수신사로 석달간 일본에 다녀왔다. 수신사로 가기에는 정일픔 부마(駙馬)의 신분은 너무 높았다.
서광범, 김옥균이 동행했다. 박영효는 자신이 일본 숙소에 내걸었던 우리나라 국기를 보여주었다. 청나라는 용이 그려진 제 나라 기를 본떠 우리나라 국기를 만들라고 했었다. 조선은 중국 동쪽의 좌청룡이니 청색 바탕에 용을 그리라 했다. 박영효는 조선이 변화하는 세계에 동참하고 부국강병을 이루는 것은 가까운 일본에 의뢰하는 길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박영효는 이웃 나라가 문명 세계로 나아가지 못한다면 일본도 고립되기에 이를 방해하는 청나라를 미워하고 그래서 조선을 돕겠다는 일본의 논리를 그럴 듯 하다고 생각했다. 명성황후 민씨는 변복으로 궁궐을 탈출, 피신해 장호원 민응식(명성황후의 일족)의 집으로 갔다. 장호원은 지금은 경기도 영역에 속하지만 당시는 충북 충주에 속했었다.
이곳에서 민씨는 무당 박씨를 만났다. 젊어서 남편을 잃은 박씨는 먹고살기 위해 무당이 되었다. 임오군란 당시 민씨는 난자당하기 직전에 몰렸다가 홍재희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졌다. 민씨를 아는 궁녀가 입짓으로 민씨가 탄 가마를 가리키자 군병들이 달려들어 가마 휘장을 찢고 민씨의 머리채를 잡아 땅바닥에 동댕이쳤다. 난자당하기 직전이었다.
그때 군사들 속에 있던 홍재희란 사람이 이 사람은 상궁이 된 자기 누이동생이라며 오해하지 말라고 고함쳤다. 긴가민가하며 머뭇거리는 군사들 사이를 뚫고 홍재희는 민씨를 업고 궐 밖으로 나갔다. 민응식의 집에 신씨라는 여종이 있었다. 이 여자가 박씨의 단골이었다. 여종을 통해 민씨와 박씨의 만남이 이루어졌다. 황후가 자주 국망산에 올라 한양을 바라보았다는 이야기를 들은 박씨는 눈치와 감언이설로 민씨의 환심을 샀다.(신명호 지음 ‘조선왕조 스캔들’ 참고)
(조정의 요청으로) 청나라 군대가 들어와 난리가 진압되고 대원군이 텐진으로 끌려간 뒤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온 듯 했지만 청나라는 조선의 내정에 노골적으로 개입했다.(지난 일이지만 병자호란 당시 인조가 청나라로 끌려갔다면..) 민씨는 청나라에 의지했다. 박영효는 일본에서 돌아와 한달만에 한성부 판윤(오늘날의 서울 시장)이 되었다. 스물 두 살의 젊은 나이였다.
민씨 조카인 민영익은 대단한 기세를 올렸다. 청나라 이홍장의 참모인 묄렌도르프(목대감이라 불린)와 김옥균은 당오전 발행을 두고 왕 앞에서 언성을 높여 싸웠다. 발행하자는 목대감과, 반대하는 김옥균이 싸운 것이다. 고종은 두 사람과 두루 친한 민영익에게 중재를 해보라 명했다. 박영효는 청나라 관리들의 뜻을 거스르지 못하고 광주(廣州) 유수로 좌천되었다.
김옥균은 차관을 들여오고 공채를 발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박규수 대감이 세상을 떠나고 나서 젊은 양반들은 민영익의 사랑에서 자주 모였다. 김옥균은 일본에서 돈을 빌려올 태세였다. 김옥균의 일본행은 세 번째였다. 시찰단, 임오군란 사죄, 차관으로 인한 것 등..김옥균은 왕의 위임장까지 가지고 일본에 돈을 빌리러 갔으나 성과를 올리지 못하고 귀국했다.
김옥균의 별장에 사람들이 모였다. 박영효는 양병에 뜻을 두었다. 하지만 박영효가 광주에서 병사들을 훈련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반대 세력들은 가슴이 서늘해졌다. 왕실 인척이 사사로이 병사를 기르고 있다며 소리 높여 박영효를 규탄했다. 이 일로 박영효는 광주 유수에서도 물러났다. 울분과 실의의 나날이었다.
청나라 군사들(1500명)이 물러났으나 이루어지는 일은 없었다. 김옥균과 벗들이 간절히 원하는 조선의 독립 자주는 청나라에 기대기로 한 조정 대신들과 민씨 관료들에게는 가장 두려운 것이었다. 그들은 독립 자주라는 말을 폭풍우 치는 거센 바다에 조각배를 타고 나아가자는 말처럼 무모하고도 대책 없는 일로 여겼다.
김옥균은 “때가 우리에게 오지 않는다면 우리가 나서서 때를 만들어야겠지.”라 말한다. 청나라 관리들이 조정에서 거들먹거리고 청나라 상인들이 백성들에게 횡포를 부려도 자신들의 지위와 이익이 보장되는 한 조정 대신들과 민씨 관료들은 상황을 바꾸어야 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청에 기운 대신들과 각 군의 영사들을 단번에 없애고 조정과 군대를 우리가 장악해야 하네. 그런 뒤 조정을 우리 사람들로 새로 꾸리고 일대 개혁을 실시해야지.“(김옥균의 말) ”그럼 다들 생각이 같은 것으로 알겠네. 이제 큰 원칙을 정한 만큼 더 이상 궁리할 것도, 다시 돌아볼 것도 없이 앞으로만 나아가세. 시일을 길게 끄는 건 좋지 않으니 구체적인 방안을 빨리 내 오도록 하겠네. 다시 한 번 당부해 두지만 절대 우리 계획이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도록 해야 하네.“(김옥균의 말)
일본은 40만엔을 조선에 되돌리겠다는 자국 황제의 명을 전했다. 임오군란으로 인해 입은 피해를 배상하라며 일본이 요구해 받아간 돈 50만엔에서 40만엔을 돌려준 것이다. 일본은 김옥균과 박영효를 비롯한 젊은이들이 조정을 뒤집고 권력을 잡으려 한다는 첩보를 얻고 조선 주재 일본 다케조에 공사에게 청나라에서 벗어나려는 조선 정부의 움직임을 적극 지원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토 히로부미와 외무경 이노우에 가오루에게서 나온 것이었다. 일본으로서는 성공하면 입지를 넓힐 수 있고 실패하더라도 아쉬울 것이 없는 데다가 길게 보아 부국강병과 자주독립을 꿈꾸는 맹랑한 자들이 쓰러지고 나면 조선은 더욱 호락호락해질 일이었다. 서광범은 김옥균이 일본의 차관을 얻으려 할 때 왕의 위임장이 위조된 것이라며 방해하던 공사가 태도가 달라지자 의아해 했다.
더구나 젊은 그들이 일본에 대한 기대를 접기로 한 상황에서라니..집안 아저씨뻘 되는 서광범을 따라온 서재필도 신경이 날카로운 상태였다. 당시 청나라 군대는 베트남에서 프랑스와 대치하느라 발이 묶인 상태였다. 일본 공사는 공사관 병력을 지원할 수 있다는 말도 넌지시 던졌다. 조선 사람들보다 더 조선의 자주 독립을 외치고 다니는 다케조에 공사는 미덥지 않은 존재였다.
서재필은 실질적인 무력을 맡을 사관생도를 지휘하는 임무를 맡았다. 고종은 김옥균에게 ”네 마음은 내가 잘 알겠다l. 앞으로의 일에 관해 너를 깊이 믿는 바이니 기어이 품은 뜻을 한번 펼쳐 보라.“고 말했다. 정변(政變) 날짜는 12월 4일로 정했다. 홍영식이 총판으로 있는 우정국 청사가 완공되었기에 축하하는 연회를 열고 각 군 영사들과 대신들을 초대해 일을 벌일 작정이었다.
이인종과 행동대원들이 청사 옆 별궁에 불을 질러 소란을 일으키면 그 틈에 조선군 영사들과 대신들을 참(斬)하기로 했다. 그리고 왕을 행궁으로 모시고 가 새로 꾸린 조정에서 정령을 반포하고 대개혁을 실시할 것이었다. 4일은 월 1회 오는 우편선 천세환이 제물포항에 도착하기 전에 일을 벌이기 위해서였다. 우편선을 통해 일본 정부에서 무슨 엉뚱한 다른 소리를 할지 몰라서였다.
물론 목숨을 걸어야 하는 정변을 믿을 수 없는 일본과 도모한다는 것이 참 딱했다. 홍영식은 비장했다. 진정으로 자신의 마지막까지 생각한 것이다. 갑신년 12월 3일 새벽, 거사 하루 전 운명을 알 수 없는 젊은이들 위에 소복소복 흰 눈이 내려오고 있었다. 민영익이 칼에 맞아 위독한 상태가 된다. 예리한 일본도에 귀가 거의 잘렸고 동맥까지 상했다. 알렌이 민영익을 대수술했다.
우정국 옆 별궁에 불을 지르는 것부터 쌓인 눈과 순라군들의 경계로 인해 쉽지 않았다. 별궁에 불을 지르는 것이 뜻대로 되지 않자 청사 북쪽 초가에 불을 질렀다. 왕은 창덕궁 서쪽의 경우궁(景祐宮)으로 향했다. 순조의 생모인 수빈 박씨의 사당인 경우궁은 갑신정변 때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등이 청나라 군대가 난을 일으켰다고 속여 왕과 왕비를 오게 한 뒤 수구파 대신들을 제거한 뒤 혁신 내각을 구성한 곳이다.(경우궁에 모셔졌던 수빈 박씨의 신위는 칠궁으로 옮겨 모셔지고 있다. 칠궁은 왕을 낳은 후궁들 일곱을 모신 사당이다.)
박영효가 일본 공사 다케조에 공사와 함께 일본 병사들을 거느리고 경우궁에 도착했다. 김옥균이 새 정부의 각료 이름을 정리해 고종에게 올리자 고종은 허락했다. 홍영식은 우의정을 맡았다. 박영효는 전후영사를 맡았다. 박영효의 형 박영교는 도승지를 맡았다. 스물 한 살 서재필은 병조참판, 김옥균은 재정담당인 호조참판을 맡았다.
민씨는 왕이 파천해야 할 정도로 큰 변이 났다는데 오빠 민태호와 조카 민영익이 보이지 않는 것을 이상히 여겼다. 고종은 왕명을 어기고 내관 유재현을 벤 것을 용서할 수 없었다. 일개 내관의 입놀림이 두려워 죽이기까지 한 자들을 믿을 수는 없었다. 윤웅렬은 자신이 형조판서에 오른 것을 보고 그들은 결코 성공할 수 없을 것이라 확신했다.
정변 세력들은 무기가 녹이 슬어 쓸 만한 것이 하나도 없는 현실에 직면했다. 다케조에는 일본군을 철수시키겠다고 했다. 조선의 변란 소식을 들은 청의 북양 대신 이홍장은 일본군과 성급히 충돌하지 말고 일단 사태를 지켜보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러나 성미가 급한 위안스카이는 가만히 있지 못했다. 청의 대군이 주둔해 있는 상황에서 감히 소란을 벌인 조선 젊은이들을 용서할 수 없었다.
일본이나 조선 반란군들이 다시는 대국 청나라를 만만히 여기지 못하도록 본때를 보여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결국 공격을 개시했다. 김옥균은 외국 공관이 많은 제물포로 가야겠다고 생각한다. 정변 세력은 다케조에 공사를 따라 일본 공사관으로 피신하기로 했다. 홍영식은 왕을 따르겠다고 선언했다.
홍영식은 ”자네들 이야기가 맞네. 하지만 누군가 한 사람은 남아서 우리가 무엇을 위해 일어났으며 무엇을 하려 했는지 알려야 하네. 비록 우리들의 일은 성공하지 못했지만 우리 뜻만큼은 훗날까지 전해질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네. 전하를 두고 다 떠나 버린다면 우리의 진심을 누가 믿어주겠는가? 나는 끝까지 전하를 따르겠네.“라고 말했다.
이에 박영효의 형 박영교도 끝까지 남겠다고 선언했다. 김옥균과 젊은이들이 왕에게 하직 인사를 올리자 왕은 깜짝 놀라 ”너희들이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가겠다는 것이냐?“고 호통쳤다. 김옥균은 ”신들이 나라와 전하의 두터운 은혜를 입었음은 잘 알고 있사온데 어찌 감히 저버리겠습니까? 오늘 잠시 물러나는 것은 다른 날 다시 한 번 쓰임을 얻기 위한 것이옵니다. 신들의 충정을 잊지 마시옵고 부디 강녕하시옵소서“라고 아뢰었다.
고종은 ”부디 목숨을 보전했다가 후일 과인을 위해 일하라.“고 말했다. 홍영식과 박영교는 왕의 뒤를 따라 묵묵히 북묘로 향했다. 김옥균은 도망치다시피 조선을 떠나 일본에서 10년을 보냈다. 마흔 넷의 나이가 되었다. 정변 뒤 살아남은 사람은 일본으로 건너간 아홉명뿐이었다. 홍영식과 생도들은 그 자리에서 죽임을 당했고 뒤늦게 붙잡힌 사람들은 극형당했다.
김옥균은 일본의 병력을 무턱대고 믿은 것, 청나라 군사가 움직이지 않으리라고 낙관한 것을 가슴을 칠만큼 어리석은 일이라 여겼다. 강렬한 소망이 이성을 압도한 것이 너무 큰 실수였다. 일본은 갑신년 조선 정변으로 잃은 것이 없었다. 막대한 배상금을 받아냈고 조선에 군대를 파견할 권리를 청나라와 동등하게 갖게 되었다.
일본 정부는 일개 망명자에 불과해진 김옥균을 더 이상 상대하려 들지 않았다. 조선 정변에 자신들이 관련되었다는 논란을 차단하기 위한 조치였다. 박영효는 서광범, 서재필 등과 함께 미국으로 다시 망명했다. 박영효는 일본으로 돌아왔다. 김옥균은 조선의 개혁을 포기하지 않았다. 김옥균은 일본 망명 2년이 지나 일본 정부에 의해 서태평양의 섬 오가사와라 제도로 유배를 가기도 했다. 아열대의 섬이었다.
김옥균은 다시 홋카이도로 유배를 가게 되었다. 추운 북쪽 지방이었다. 주변 사람들에게 손을 내밀어야 했던 서글픈 가난, 오랜 유배 생활로 날이 궂을 때마다 온몸이 쑤셔 오는 통증, 지사(志士)인 체해도 해놓은 일이 아무것도 없지 않느냐는 조롱, 그리고 자책..
홍종우는 조선 최초의 프랑스 유학생이다. 김옥균은 상하이 항구 부근의 여관에서 암살당했다. 이홍장을 만날 준비를 하며 읽던 ‘자치통감’을 손에 든 채로였다. 1894년 3월 28일이었다. 박영효는 가장 늦게까지 살았다. 79세인 1939년까지다.
춘원 이광수는 박영효를 만나 뜻을 이루지 못한 연유가 어디에 있다고 보시는지 물었다. 박영효는 실패의 책임을 김옥균에게 돌렸다. 김옥균이 세상을 떠난 지는 이미 삼십년이 넘었을 때였다. 박영효는 홍영식은 정변을 준비했고 자신은 정변을 총지휘했다고 말했다. 1894년 박영효와 조선 망명객들은 귀국할 수 있었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의 힘으로 거저 얻은 결과였다.
1910년 조선이 일본에 강제병합된 후 박영효는 후작 지위를 받고 두루 풍요를 누렸다. 박영효는 한때 혁명가였지만 다시 한 번 세상을 움켜쥐고 사람들의 눈길을 끌고 싶다는 욕망이 남아 있었다.
저자(안소영)는 고종에게 어리석고 무능한 왕이란 일본의 평가가 내려져 그대로 굳은 것을 안타까워 한다. 하지만 고종이 자객을 보내 김옥균을 살해하려 항 사실은 말하지 않았다. 세 친구(김옥균, 홍영식, 박영효)가 주된 인물이기에 고종에 대해서까지 말할 여지는 많지 않았겠지만.. 그럼에도 아쉽다. 물론 긴 글을 쓴 저자에게 감사한다. ”역사를 배우는 청소년들이 두어 줄로 요약된 글귀로만 이들을 대하지 말았으면 좋겠다.“는 글(작가의 말)이 가슴에 와닿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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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 코너에서 만났던 '갑신년의 세 친구'! 읽겠다며 생각한 것이 벌써 2년 전.그러나 '잃어버린 얼굴'이란 공연을 보지 않았다면,여전히 내 기억 속에 숨어 있었을 책이란 생각을 하니,피식 웃음부터 난다.김옥균이 등장하는 순간,그동안 읽어야 겠다고 생각했던 '갑신년의 세 친구'가 떠오른 것이다. 공연 '잃어버린 얼굴' 속에서는 명성황후를 어떻게 바라 보아야 할까?에 대한 물음이 있었다면.'갑신년의 세 친구'는 김옥균,박영효,홍영식 등을 통해 격변의 역사를 바라 보는 시선이라고 하면 될까? 역사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 그 기준은 도대체 무엇이였을까? 공연을 보면서 느꼈던 감정과 책을 통해 우리의 역사를 바라 보는 동안,마음은 한 없이 무겁고 답답하기만 했다. 정치권의 권력다툼이 한 나라의 운명을 결정 지었다고 생각하면 기가 막히다는 생각이 들고,또 당시의 나라 정세가 그럴수 밖에 없었던 것일까 라고 생각하려고 해도,쉬이 이해가 되질 않는다. 역사에,만약이란 없는 것이니까.일어난 일에 대해 받아들이는 과정이 우선이겠고,그와 똑같은 일이 발생하지 않을수 있게 하는 것이 최선일지도 모른다는 조금은 뻔한 결론이 나고 말았다.
청나라에 분노하는 백성들의 마음이 정변을 준비하는 젊은이들에게는 왜 가닿지 않았을까.끼리끼리 찾아다니는 걸음은 분주했지만 정작 백성들에게 진심을 알리고 설득하는 데는 소홀했던 게 아닐까.도성 안 골목마다 괘서 라도 붙여 자신들의 뜻을 알렸더라면..... . 대궐 안 젊은이들이 백성들에게 알린 것이라고는 조정 각료들이 바뀌었다는 방문 뿐이었다.그러니 백성들에게 이 변란은 벼슬 다툼으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벼슬을 탐하는 새파란 젊은이들이 일본을 등에 업고 나라를 팔아넘기려는 것으로 여겼던 것이다./237
무엇이 잘못되었던가.김옥균은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일본의 병력을 무턱대고 믿은 것도 청나라 군사가 움직이지 않으리라 낙관한 것도 가슴을 칠 만큼 어리석은 일이었다.정변을 준비하면서 모든 정황을 엄격하게 헤아리고 대처하려 했으나 어는 순간부터 강렬한 소망이 이성을 압도해 버렸다.벗어나고 싶은 현실의 어려움도 한몫했을 것이나 핑계였다.소망이 이성을 휘어잡고 결과를 낙관하게 만든다면 환상에 불과하거늘 십 년 전 그때는 알지 못했다.수많은 목숨들과 바꾼 뒤에야 다가온 깨달음은 비통했고 현실은 가혹하기만 했다./257
제목이 조금은 말랑말랑(?)한 느낌이 들어, 사건 보다 인물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역사소설일 거라 생각 했다.그러나 기대와 달리 매력적이었다.문학적 몰입도는 조금 아쉬웠지만. 인물을 통해 역사를 풀어내 줌으로써 조금은 친근하게 역사에 다가간 느낌이 들어 좋았고,인물이 중심에 서 있음으로 해서,저마다의 고뇌가 느껴져 성공과 실패를 떠나,변절과 배신을 떠나,시대의 아픔이 한 개인사에 어떻게 물들게 되는 것인지에 대한 아픔까지 오롯하게 전달되어진 기분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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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신년의 세친구> 이 책<갑신년의 세친구>을 읽는 동안 가슴이 답답함을 느끼고 왠지 모를 울분과 서글픔이 가슴 한켠으로 몰려옴을 느껴 봅니다. 학창시절에 빠지지 않고 나왔던 시험문제에 갑신정변에 관한 이야기며 주도했던 인물에 관한 것들이었던 것을 기억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들이 구한말에 급변했던 정세에 개혁을 주도했었고 3일만에 실패로 끝난 역사의 한페이지정도 밖에 기억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역사적 사실을 알지 못하기에 그 어떠한 사실과 관련된 이야기도 알지 못합니다. 박영효가 임금의 사위였고 그가 몇해만에 죽어간 부마였고 개혁에 눈을 뜨고 중심의 축에 있었다는 사실도 또한 우리는 아무도 모르고 시험문제에 나오는 중요한 문구만 외우고 읽었던 기억밖에 없습니다. 외국의 문물을 받아들이려는 주위의 열강들에 흥선대원군은 청나라의 대중화가 밀려나는 것을 두려워하고 또한 대신들과 유생들또한 그들이 받드는 사대정신에 빠져나오지 못한 상황에서 더욱더 굳게 문을 닫고 쇄국정치에 나라의 온힘을 쏟아 부우고 있었는데 지금의 역사가 판단을 하듯이 나라의 운명은 풍전등화속에 조선을 먹이로 삼는 열강들의 전시장이 되고 말았습니다. 너무도 유교사상에 뿌리 깊었기에 시기를 직시하지 못하고 아들이지만 젊은 임금을 믿지 못하고 오로지 자신의 권력과 며느리를 본인이 들였지만 못믿어워서 오랜세월동안 수렴을 하고서도 그자신이 또다시 역사의 수레바퀴에 굴러가고 마는 수십년간 나라를 잃고 마는 빌미를 제공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고종 또한 아버지 이며 라이벌 관계가 되어버린 흥선대원에 맞서 박영효,홍영식, 김옥균과 개혁을 위한 정치를 마련해보았지만 번번히 실패하고 마는 상황에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연암의 손자 박규수에 비로소 집안이 부흥을 이루어 드디어 박영효가 부마가 되어 갑신정변의 주역이 되기까지 좋은 환경과 부와 명예를 모두 영유할 수 있었던 그들이 오로지 이시대를 이끌어나아갈 역사적 영웅이 만들어 질뻔했던 이야기에 가슴한켠이 먹먹해질 뿐입니다. 하지만 중신들이 보기에 유능하고 모든 사람들에게 싫은 소리만 하는 젊은 그들을 보는 눈은 모든 것을 인정하지 못하는 대중화인 청나라에 배반을 하는 소중화인 조선으로서는 받아들이지 못하는 지금의 역사로 보면 한심한 작태를 행하는 철딱서니 없는 젊은 이들로 밖에 여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얼마전에 소개되었던 미국에 사신으로 갔던 조선의 사절들이 대통령앞에 인사를 엎드려서 했던 것이 웃음거리로 기사화했던 것이 기억에 남습니다. 그사건을 겪은 민영익은 죽기까지 문물을 받아들이기 이전에 죽을 만큼 치욕으로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또한 실세중의 실세였던 그가 받은 충격속에 자신과 조상들의 무덤까지 파헤쳐져서 소개되는 이집트나 아프리카처럼 조선의 입장에서는 엄청난 충격속에 개화고 무엇이고 간에 반대를 해서 개화를 주도하고자 했던 박영효, 홍영식, 김옥균에게는 절망에 빠져들고말았던 것 같습니다. 결국 해도 죽고 아니해도 죽고마는 절대절명의 상황에서 임금과도 일본과도 협의가 이루어졌다고 여기고 개혁을 주도했지만 3일만에 처참하게 실패로 끝나버린 상황이 역사의 한페이지속에 조그맣게 속해버리고 그들은 인생의 만로가 비참함에 죽음속으로 들어가버려서 결국은 나라가 없어져버리는 결론으로 되어버려서 한심하기 짝이 없음을 바라봐야하는 독자들도 두손을 놓고 바라보는 심정일 것입니다. 이 책을 읽음으로써 후대의 우리 들은 어떻게 나라를 위하는 모습이 최선일까 생각해봐야할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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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신년의 세 친구 안소영 지음 창비
북촌 세도가 젊은이들이지만 신진문물에 눈을 뜬 홍영식, 김옥균, 박영효 등은 연암 박지원의 손자인 우의정 박규수 대감의 사랑에 모여 청나라와 일본 문물, 그리고 서양문물과 문화들 이야기를 나눈다. 몇 년이 지나고 홍영식 등은 왕의 명령을 받아 비밀리에 일본 사찰단으로 간다. 사찰단으로 다녀온 후, 김옥균도 개인 자격으로 왕의 명령을 받아 조선의 개혁을 일본이 지원해 줄수 있는지 알아보러 간다. 하지만 일본 조정의 형편도 지금 복잡해서 김옥균은 돌아가서 새로운 방도를 마련해야겠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런 고민도 잠시, 김옥균 일행에게 조선에 큰 변란이 일어나 왕이 대원군에게 나랏일을 맡겼다는 소식이 전해지고, 급히 조선으로 되돌아온다. 변란이 있기 며칠 전, 홍영식은 아버지 영의정 대감의 말을 듣고 백성들의 지금의 모습은 굶주리고, 분노하는 모습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결국에는 다시 왕이 권력을 잡고 김옥균과 박영효는 더 열심히 활동한다. 한편 민영익은 미국 보빙사로 다녀온 후, 서양을 안 좋게 생각하게 된다. 차라리 전통이 있는 청나라가 더 낫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처럼 중전과 민씨 집안은 도립자주라는 말을 무모하다고 여겼다. 때문에 독립자주를 외치는 김옥균과 젊은이들을 방해했다. 김옥균은 이 상태로는 안된다고 여기고, 결국 자신과 뜻을 함께하는 이들과 함께 개혁을 실시하고자 정변을 일으킨다. 하지만 정변은 결국 삼일천하로 끝나고, 홍영식은 조선에 남아 죽음을 맞는다. 일본으로 도망친 김옥균은 자객의 총에 맞아 결국 죽음을 맞이한다. 조선 말기의 역사를 볼 때는, 항상 일본처럼 새로운 문물에 눈을 떠서 나라의 문을 일찍 열었다면 지금 우리나라는 분단이 되어있지도 않고 일본을 뛰어넘는 경제대국이 되어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게 된다. 조금은 아픈 역사이지만, 젊은 개혁가들의 희망찬 꿈 이야기를 볼 수 있게 되어서 좋았다. 2012.8.19.(일) 이지우(중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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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소영 작가의 책은 "책만 보는 바보"가 너무 유명한지라 한번 읽어보았는데 너무나 재미있었던 기억이 있다. 그런데 이번 "갑신년의 세 친구"는, 정조 시대보다도 훨씬 스펙터클한 시기를 다룬다. "갑신년"이라는 때는 갑신정변을 말하는 거니까, 조선이 망하고 대한제국이 건설되고 그러기 직전의 얘기다.
나는 학교 때 역사를 그다지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는데, 나라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 모를 위기의 순간이라든가 국제 정세가 호시탐탐 약소국인 조선을 집어삼키려고 하는 모습 같은 것을, 만약에 이 책처럼 생생하게만 알 수 있었다면 역사 과목이나 근현대사 공부에서 '갑신정변'이니 '임오군란'이니 하는 말들도 무심하게 넘기지 않았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요새 엄청 열심히 챙겨 보는 <뿌리깊은나무>에서 한글창제를 다루는 것을 보면, 정말 그 시대에, 한글이 없던 때에 그런 글자를 만들어내겠다는 게 얼마나 엄청나고 대단한 것이었을지 상상이 된다. 그런 점이 재밌다. 이 책에서도 그렇게 상상을 할 수 있게 되어서 좋았다. 역시 문학적 상상력의 힘은 대단한 것 같다.
조선도 기차나 램프 같은 게 있기를 바라는 청년 개혁가들의 모습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이들이 왜 그렇게 조급한 결단을 내렸는지가, 안타깝기도 하지만 이해도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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