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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대에 독일인 목사님이었던 디트리히 본회퍼는 히틀러 암살 시도에 가담한 혐의로 독일 패전을 얼마 앞두지 않은 1945년 4월 9일에 처형 당했다고 한다. 하나님을 제대로 믿는 신앙인은 골방에서 기도만 할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힘을 의지해 두려워하거나 나의 안전만을 추구하지 않고 이웃의 고통을 위해 싸워야 한다는 사실을 본인의 삶으로 증명했다. 그러한 목숨을 건 스펙터클한 삶 속에서 나온 시편들이 절절하고 생생하게 느껴진다. 글은 짤막하고 내용도 어렵지 않지만 살아내기는 무척 어려울 듯해서 두고 두고 꺼내보고 싶은 책이다. "<신앙 고백>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은 몽상가나 헛된 망상가가 아님을 이 세상을 향해 충분히 증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사물을 이미 존재해 온 그대로 무심하게 내버려 두지 않음을, 결단코 우리의 믿음은 불의한 세상 한가운데에서도 만족해 버리고 마는 마약에 취한 상태와 같은 것이 아님을, 우리는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기에 더욱더 끈기 있게 목적을 향하여 이 세상에서 항거하고 있음을, 말과 행동으로 항거하고 있음을.
예전에 엄청난 혁명으로 시작된 기독교가 이제는 모든 시대에 대해 보수적이어야 할까요?
그리스도인은 논란이 될 만한 것도 말하는 위험을 감수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더 중요한 삶의 문제들을 드러내기 위하여." 12-13쪽.
"<이웃>
우리는 분주한 삶 속에서 하던 일을 잠시 멈추는 법 또한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은 매일매일 긴급히 도움을 구하는 사람들을 우리 앞에 보내심으로 우리가 가는 길과 스스로 계획한 일들을 막으실 수도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들어줄 귀를 간절히 찾고 있지만, 그리스도인 가운데서도 듣는 귀를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가만히 귀를 기울여야 할 순간에도 자기 말을 하느라 바쁘기 때문이지요.
오랫동안 인내하며 들어줄 수 없는 사람은 자기 자신도 허공을 치는 말을 하게 될 뿐이며, 그러면서도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합니다.
상대방의 눈을 들여다보며 말하면 그 사람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그 사람이 어떻게 웃는지 살피며, 그 사람이 자기 부모에 대해서 하는 말을 들어주고, 그 사람이 하나님에 대해서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우리에게 가장 큰 비밀은 먼 곳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 바로 가까이에 있는 이웃에게서 찾을 수 있습니다." 78-79쪽.
이 책은 우리나라에서 2011년에 번역, 출간했다. 한창 개신교가 '개독교'로 욕을 먹을 때 신앙의 공공성에 대해 생각해보자는 의도가 아니었을까 추측해본다(책 뒷표지에는 나꼼수 김용민과 한명숙 전 국무총리가 이 책을 추천하고 있어서 재미있다). 나는 본회퍼 목사님의 이름만 알고 있었는데 지난 도서정가제 직전 창고대방출 때 우연히 이 책을 만났다. 원제도 좋지만 제목을 참 잘 번안했다고 생각한다. 한국 기독교인은 유독 사회 참여를 하지 않고 사회적 약자의 고통에 대해 실천하지 않는다는 비난 때문에 대학생 때부터 줄곧 고민해왔다. 기독교 신앙과 정치적으로 보수(혹은 수구)라는 포지션이 꼭 함께 가야하는 게 아닐 텐데 교회 다닌다고 하면 덮어놓고 부당하게 느껴지는 비난을 받아왔다. 거꾸로 교회나 선교단체에서는 정치에 무관심한 분위기나 특정 포지션을 강요하는 분위기가 팽배하다. 이러한 맥락에서 히틀러 정권에 대항해 삶으로 투쟁한 본회퍼 목사님이 어떤 말로 기독교인이 비겁하지 않다고 주장했는지 궁금했다. 이 책의 원제는 "자유로운 삶을 위하여"이다. 다음 시편은 하나님을 믿는다는 신앙인이 실천해야할 자유와 순종의 역설을 명쾌하게 보여준다. "<책임>
책임과 자유는 서로 통하는 개념으로 책임은 자유를 전제로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시간적인 개념에서가 아니라 자유는 오직 책임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의무를 다할 때에만 주어지는 인간의 자유가 바로 책임인 것입니다.
책임 속에서 순종과 자유는 현실이 됩니다. 이 사이에는 긴장이 감돌지만 그 둘을 따로따로 독립시키려 한다면, 책임은 종말을 고하고 맙니다. 그렇기 때문에 책임감 있는 행동은 종속되어 있으면서도 창조적이라 할 수 있지요." 48-49쪽.
이번 방학 동안 이런 저런 교육 서적들을 읽으면서 2014학년도에 교사로서의 내 삶을 반성했다. 2015학년도에는 '기다리고 겪어내는' 교사가 되고 싶다고 생각한다. 아래와 같은 경지에 죽기 전에는 이를 수 있을까. "<사랑>
사랑은 기다릴 수 있고, 오래오래 기다릴 수 있고, 끝까지 기다릴 수 있습니다. 사랑은 절대 조급하지 않으며, 지나치게 서두르지도 강요하지도 않습니다. 사랑은 오랫동안 인내하며 소망 가운데 기다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76쪽.
민중신학 진영에서는 예수님이 지금 여기 살아계시다면 사회적 약자를 위해 싸우셨으리라고 주장한다. 그럴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 때문이며,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이유는 때마다 하나님이 도와주시리라는 믿음 때문이다. 위와 같은 이유로 기독교인일수록 더욱 적극적으로 사회 참여를 하는 게 성경적인 삶의 자세이며 그러한 삶이 가능할 듯한데 한국 개신교인들은 왜 그러한 삶을 살지 못할까. 하나님을 덜 사랑하거나, 하나님께서 도와주시지 않으리라는 불신감 때문일까. 기독교인들이 더 이기적으로 자신의 안전과 욕심을 채우고 싶어하는 모습을 보이며 살 때 하나님은 슬퍼하고 계실 듯하다.
"<안전>
두려움은 우리를 유혹하여 넘어뜨리려 악이 쳐놓은 그물과도 같습니다. 그러므로 두려움에 빠지는 순간 우리는 이미 넘어진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쟁기를 가는 사람은 뒤를 돌아보지도 시야가 닿지 않는 먼 곳을 바라보지도 않으며 그가 내디뎌야 할 다음 발걸음에 주목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곤경에 빠질 때마다 꼭 필요한 만큼 견딜 힘을 주시려 한다고 저는 믿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자신을 의지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도록 그 힘을 미리 주시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이러한 믿음은 미래에 대한 모든 두려움을 극복하도록 도울 것입니다." 86-87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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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인이라면 논란이될 만한 것도 말하는 위험으 감수할 수 있어야 한다. 본회퍼의 삶은 책임 있는 마지막 질문은 난처한 상황을 어떻게 영웅처럼 잘 피해 가느냐가 아니라, 다음 세대가 어떤 삶을 이어가게 되지를 묻는 것이었다. 안전을 추구하는길에는 평화로 가는 길이 없습니다. 평화는 위험을 감수해야하는 엄청난 모험이다. 평화는 안전의 반대말입니다. 약한 자를 무시하는 것은 곧 교회의 죽음을 의미한다. 진심으로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만이 진실로 안전합니다. 내일에 대한 생각은 나를 끝없는 염려의 노예로 만들어 버립니다. 본회퍼의 교수형에 참관하였던 나치 친위대 군의관은, 그 사건 이후 10년이 지나 이렇게 기록하였다. "나는 거의 50년 동안이나 의사로 살면서 수 많은 죽음을 지켜보았지만, 하나님께 그토록 헌신하며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으 본 적이 없었다." 종교란 지배층들이 다수를 자기뜻대로 다스리기 위한 도구라고도 한다. 변질된 종교적 입장을 잘 표현한 말이다. 인간으 누군가에게 이지해야한다 오죽했으면 풍수에서도 배산을 강조하겠는가 의지할 언던 예수의 생애,성경의 출처가 주변민족의 신화를 짜집기했다는 사실이 낱낱이 밝혀지고 있고 예수는 참 구도인중 하나였다는 말에도 공감한다. 부처가 힌두교에 반발해 민중을 위한 불교라는 종교를 만들었듯 예수도 그의 사상을 이어받아 서구사회에 큰 뜻을 전파한 성인이다. 그의 참종교는 콘스탄티누스황제에 의해 변질되고 또 많은 이들에 의해 변질되었지만 우리는 여기서 끝내서는 안된다. 지나간 과거가 역사이면 현재도 역사인 것이다 언제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자의 죽음'을 읽고 뭔지모를 경외감을 느꼈었다. 이번에 파란하루키님의 추천으로 읽게되었다. 그때의 감정이 되살아남과 동시에 감사한 마음도 든다. 인터넷에 들어가서 기독교인이라는 말한마디만해도 사방에서 돌맹이가 날아온다. 지금 성서의 진실과 본회퍼,딕워렌, 문익환목사님 같은 분들의 체험적 성찰을 승화시켜 참종교로써의 기독교개혁운동이 벌어진다면 우리는 허물을 벗듯 하나의 종교적진리를 발견하게 될 것이고 기독교에 염증을 느끼는 이들의 시선도달라지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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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에게 대항하여 그의 목숨까지 내놓았던 본회퍼는 이 땅의 기독교 신자라면 분명 본받고 또 본받아도 부족함이 없는 인물이다. 이 책의 제목과는 전혀 상관없는 본회퍼의 짧은 글들을 엮은 책이다. 그럼에도 제목이 강렬한 인상을 주는 것은 이 땅의 기독교가 비겁하기 때문일 것이다. 기독교를 변명하는 이야기가 필요한가? 오히려 정말 기독교의 정신으로 살아간다면 그런 변명을 할 필요가 없어질 것이다. 그렇다면 본회퍼의 삶을 배워야 한다. 그가 어떻게 생각했는지 읽고 실천해야 한다. 기독교가 욕을 먹어도 그것이 기독교인들의 가식된 삶 때문은 아니었으면 좋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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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런 소중한 책을 김용민 같은 사람의 추천도서로올려 놓았을까? 안타깝고, 답답함을 느껴야 했다. 책을 읽으면서 쭉~~~. 지금의 정부가 나치시대의 히틀러처럼, 카리스마로 꽉차있는 독재정부인가? 자기가 본회퍼로 영혼이입되어서 대신 살고 있다고 착시를 이루면서 환상속에서 살고 있는가? 사막같이 황량한 이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 가득 부어지는 순간은 우리에게 얼마나 행복한 시간일까? 온 세상을 다 사랑할 수 있을 것만 같은 , 새 마음과 새영으로 충만한 그 사건이 영원히 이어지면 좋으련만, 우리는 또다시 사막과 같은 인생길을 걸어가야 함을 잘 알고 있습니다(p.110).
불의한 세상 한가운데서 지치고 목마른 영혼에 디트리히 본회퍼의 글 한편이 한겨울의 혹독한 추위를 이기고 얼어붙은 대지를 녹이는 온화한 봄기운처럼, 기쁨과 소망, 사랑과 감사, 기도와 확신이라는 생수를 선사하리라 기대해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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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에 함께 아파하시는 하느님이라는 표현은 문학적 수사(修辭)로는 의미 있지만 하느님의 전능(全能)과는 양립할 수 없다. 어쩌면 하느님의 전능(全能)이라는 표현 자체가 문학적 수사인지도 모르겠다. 처음으로 하느님을 전능한 존재로 칭한 문서가 사도신경으로 알고 있는데 사도신경은 영지주의자들의 신조(信條)에 대항하는 차원에서 초기 기독교가 만든 것이다. 영혼과 물질을 극단적 2원론(binary opposition)으로 인식한 결과 나온 영지주의자들의 주장 가운데 하나가 도케티즘(docetism)이다.
-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 물질을 사악한 것으로 본 영지주의자들은 하나님의 아들이며 온전한 영혼인 예수가 불완전하고 사악한 육(肉)을 입고 이 세상에 왔을 리 없다는 생각을 가졌었다. 그들의 신념은 예수의 십자가 사건은 단지 그렇게 보였을 뿐인 헛개비 같은 사건 즉 환영(幻影)이었다는 주장으로 이어졌다. 거짓되이 일컫는 지식의 망령되고 허(虛)한 말과 변론을 피하라 이것을 좇는 사람들이 있어 믿음에서 벗어났느니라”는 디모데전서 6장 20절, 21절은 영지주의자들을 겨냥한 구절이다. 나는 영지주의자들이 이단이냐 아니냐를 따지는 것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고 생각한다. 즉 현세(現世)와 물질(철학적 의미의 물질)은 악하고 덧없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는 것은 결과적으로는 영지주의자들의 극단적인 이원론과 다를 게 없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전능한 하느님과 고통받는 하느님 중 하나를 선택하라면 고통받는 하느님을 택할 것이다. "하느님께만 희망을 두고 있는 사람은, 그 하느님이 아무리 나약할지라도, 그 하느님을 향하여 전능하다고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그 길밖에 없습니다."란 말이 생각나는데 내가 이 말을 떠올리는 것은 앞서 말한 하느님의 전능이 문학적 수사인지도 모르겠다는 말과, 함께 아파하는 하느님을 설명해내는 중요한 말이기 때문이다. 함께 아파하는 하느님이라는 문제에 대해 알아보다가 다시 펴본 도로테 죌레의 ‘말해진 것보다 더 많이 말해져야 한다’에서 엘리 뷔젤, 한스 요나스 등이 하느님을 전능한 존재로 생각하는 대신 사랑하는 존재로 인식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요나스는 “신이 우리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신을 구해야 한다”는 말을 하기까지 했다. 도로테 죌레는 본 회퍼(1906 ~ 1945)를 감옥에서 고난받는 하느님에게 가까이 다가간 신학자로 소개했다. 그간 나는 본 회퍼를 칼 바르트에 비해 미미한 존재로 인식했었다. 바르트는 부활을 대다수의 기독교인들의 믿음과 달리 하느님에 의한 우리의 생의 완성을 뜻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본 회퍼 역시 중요한 이슈를 제기한 분이라는 생각이 든다. 본 회퍼가 행동하는 양심을 강조한 것은 하느님을 고통받는 존재로 인식한 결과이다. 물론 본 회퍼의 사상은 그의 짧은 삶 때문에 비체계적이고 단편적이고 상호 모순적이기까지 하다. 앞서 사도신경을 하느님의 전능을 고백한 문서로 소개했고 이 고백이 영지주의자들에 대한 대항 차원에서 생성된 것이라 말했다. 묘한 것은 티모시 프리크와 피터 갠디가 영지주의를 인상적이고 독특하게 다루었다는 사실이다. 이들의 논의는 우리를 다시 영지주의와의 관계로 이끈다. ‘웃고 있는 예수’란 책에서 두 저자가 영지주의자들의 환상(幻想)을 처리한 방식은 특이하고 절묘하다는 느낌이 든다. 저자들은 영지주의 철학자가 하는 일은 사람들을 환상에서 깨어나게 하는 것이라 전제한 뒤 분리(分離)의 환상에서 벗어난다면 우리는 종교에 의해 만들어진 우리 대 그들이라는 적대적 관계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주장을 이끌어냈다. 두 저자의 대안은 영과 육울, 이 세상과 저 세상을 분리적으로 보았던 영지주의가 새롭게 부활했다는 느낌을 주기에 충분하다. 본 회퍼가 거론한 고통 역시 적대적 관계의 산물이다. 나는 히틀러를 암살하려한 본 회퍼의 행동은 목적이 아니라 분리주의를 벗어나기 위한 수단이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더 오래 살아 자신의 신학을 다듬었다면 본 회퍼의 사상은 어떻게 마무리되었을까? ‘정말 기독교는 비겁할까?’는 구조적 불의와 폭력, 그리고 그로 인한 아픔은 물론 현명한 대안을 생각하게 하는 좋은 책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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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근래 한국교회하면 좋은 기억보다 나쁜 기억들이 더 많아보인다. 아는 게 병이라고 식자우환 관점에서 너무 많은 이야기를 들은 거 아닌가 생각도 들지만..
이 책의 저자 본회퍼는 마틴 루터킹과 더불어 10년 전쯤 관심있게 지켜 본 인물이다. 역사를 통한 유익은 현실에 그나물에 그밥인 모습을 타개할 만한 인물을 찾는데 있지않나 본다.
본회퍼에 대한 처음 지배적 인상은 용자였다. 진정한 사나이였다. 괜하게 기웃거리면서 밥이나 구걸하고 자리를 탐하는 교회관계자들과는 사뭇 달라 보였다. 적어도 자기고뇌에 바탕을 둔 자기희생이 감동적이다.
한국교회에서 굳이 다니고 싶지않은 교회들을 꼽으라면 우선, 아들에게 목회세습한 교회 그리고 성(性)과 관계되 세상에 부끄러움 선사한 교회 끝으로 불요불급하지도 않은데 갖가지 명분 붙여서 교회재건축하는 교회를 꼽고싶다. 이 3가지를 벗어난 교회를 주변에서 찾으려니 여간 찾기 힘들지 않은 모양새다.. 내가 너무 엄격한건가 아니면 관대한 것인가?~~ 세상기준으로 보면 너무 관대한 것이고 교회기준에서 보면 너무 엄격하게 대상을 규정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부동산하는 사람들에게 들은 이야기인데 교회가 알박기 비슷한 것 너무 많이 한다는 이야기다. 그 분야는 관심이 없는 관계지만 열변을 토하며 내게 말하는 지인 말을 들을 때 심각한 듯도 보인다.
"주님의 교회 자체보다 교회에 대한 자기 꿈을 더 사랑하는 사람은 비록 그 의도가 정직하고 진실하고 희생적이라할지라도 나중에는 그 교회를 훼손하게 된다." 어떤 목사님 설교 중 메모한 내용인데 이 말의 주인공이 바로 본회퍼라 한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그레샴의 법칙이 한국교계에 만연하다 보는데, 처절하고 뻔한 한국교회에서 저질목사들 보다 본회퍼같은 목사들이 많아져야 한다본다. 이는 선택이 아닌 필수다..
목사아들 돼지 김용민씨의 추천평이 아주 제대로라 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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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줄거리 。。。。。。。
‘독일의 양심’이라고 불리는 디트리히 본회퍼의 글들 중 일부를 뽑아 항목을 나눠 엮은 책이다. 오랫동안 본회퍼의 글을 전문적으로 펴냈던 편집자답게 다양한 저작들로부터 좋은 문장들을 골라냈다.
2. 감상평 。。。。。。。
본회퍼가 속해 있었던 독일 루터파 교회는 독특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 종교개혁자 루터의 고향이자 그의 개혁이 시작되어 결국에 열매를 맺었던 나라인 독일에서 이 신앙형태는 단순히 종교적인 차원에서만 의의를 갖는 게 아니었다. 그것은 당시 로마교황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유럽에 지배력을 발휘하고 있던 신성로마제국의 압제로부터 독일민족의 독립 쟁취하는 데 중심이 되던 사상이기도 했다. 오늘날 독일의 루터파 교회에서 일하는 성직자들이 일종의 공무원처럼 정부로부터 사례를 받으며 그 신분이 보장되는 이유도 (대신 그 자격을 획득하는 게 우리나라처럼 녹록하지 않다) 이런 역사적 이유 때문이다.
하지만 그 이유가 어찌되었든 국가와 교회 사이의 이런 일종의 밀월관계가 형성되기 시작하면 반드시 부작용도 나올 수밖에 없다. 교회의 세속화가 그것인데, 자칫 교회가 정부의 힘과 권위에 의존하려는 태도를 보일 수 있다. 2차 세계대전을 앞두고 히틀러의 출현을 바라보는 독일교회의 태도가 그랬다. 그리고 이런 흐름에 정면으로 반기를 들고 독재자와 싸우다 처형된 이가 바로 디트리히 본회퍼 목사였다.
기본적으로 어떤 사람의 말을 제대로 평가하려면 그 사람의 삶을 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입으로 무슨 좋은 말을 하든, 삶으로 자신의 말에 신뢰감을 더해주지 못한다면 그냥 헛소리일 뿐이다. 이 책에 실린 본회퍼의 평이한 듯한 말들이 결코 가볍게 느껴지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단지 그가 나치에 의해 처형되었기 때문만이 아니라, 자신이 내뱉은 말을 삶으로 옮기려는 오랜 고민과 행동을 해왔던 인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여러 곳에서 이렇게 발췌한 문장들을 읽는 것도 좋지만, 역시 그보단 전체 글 속에서 진주를 발견하는 게 더 재미있는 작업이 아닐까 싶다. 그 정확한 문맥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지나치게 의미가 산란되어 버리는 감이 있으니까. 영양제 안에 아무리 여러 가지 영양소가 모두 담겨 있다고 해도, 직접 음식을 먹는 즐거움 또한 포기할 수는 없으니..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짧아서 살짝 당황했다. 여백을 널찍하게 줘서 사실 담겨 있는 내용도 많지 않고.. (그런데도 정가는 9천원이나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제목에서 제기했던 질문에 대한 대답이 썩 시원하게 되고 있지는 않았던 것 같다. 금방 다 읽고 나서 좀 아쉬움을 느끼게 하는 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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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하고 두권이나 선물도 겸해서 샀는데 백페이지짜리에 내용은 부실하기 그지없습니다. 100페이지 정도에 9천원이라는 가격도 그렇고 겉표지와 제목만 탁월합니다. 다른 책을 구입하시는게 낳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