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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움을 숭배하는 최고의 행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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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으로부터 받은 사진(선생님의 필체까지!)   금각사(깅가쿠지)를 중학생 때 만났다. 여행 좋아하는 담임선생님 덕분에 그가 직접 찍은 사진을 얻었다. 갖고 싶은 사진 두 장을 선택하라고 해서 첫 번째로 고른 사진이 바로 금각사였다. 물론 선생님이 설명해주기 전에는 이름조차 몰랐지만, 묘한 금빛이 일순 나를 사로잡았다. 금빛의 정체가 진짜 금이라니!   미시마 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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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으로부터 받은 사진(선생님의 필체까지!)


  금각사(깅가쿠지)를 중학생 때 만났다. 여행 좋아하는 담임선생님 덕분에 그가 직접 찍은 사진을 얻었다. 갖고 싶은 사진 두 장을 선택하라고 해서 첫 번째로 고른 사진이 바로 금각사였다. 물론 선생님이 설명해주기 전에는 이름조차 몰랐지만, 묘한 금빛이 일순 나를 사로잡았다. 금빛의 정체가 진짜 금이라니!


  미시마 유키오의 대표작 ‘금각사’를 오래전에 구입해두고 펼치지 못했다. 창비세계문학 일본편 ‘이상한 소리’를 읽고서야 먼지 잔뜩 앉은 ‘금각사’에 손을 뻗었다. 은희경 소설집 ‘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의 제목이 되어준 릴케의 ‘두이노의 비가’ 중 “우리가 그토록 아름다움을 숭배하는 것은, 아름다움이 우리를 멸시하기 때문이다”라는 문장이 머릿속에서 거미줄을 만들었다.


  작은 절 주지였던 아버지로부터 금각사야말로 절대적인 아름다움이라고 주입받아온 ‘나’는 처음 본 금각사가 실망스러웠지만 금각사에 도제로 들어가면서 점차 불멸의 아름다움이 된다. 보면 볼수록 아름다움은 견실해진다. 아버지의 죽음과 어머니에 대한 증오로 기댈 데라곤 없던 나는 건축물의 완전성이 믿음이 되어간다.


  허나 함께 생활하는 도제 쯔루가와는 금각사에 대한 동경이 전혀 없음을 눈치 챈다. 머잖아 나는 곧 깨닫는다. 그는 나처럼 못생기지도 말을 더듬지도 않는, 누가 봐도 아름다운 소년이었다. 정맥이 비치는 흰 살결이 금각사의 금빛만큼이나 눈부신.


  내가 너무 오랫동안 깅가쿠를 응시하고 있자, 진력이 난 쯔루가와는 발 밑의 자갈을 집어 투수같이 산뜻한 폼으로 교코 지에 떠 있는 깅가쿠의 그림자를 향해 던졌다. 파문이 수면의 물풀을 밀치고 번져 나가면서 순식간에 아름답고 정교한 건축이 무너져 내렸다.


  어쩌면 그때부터 나는 금각사의 파멸을 꿈꿨는지도 모르겠다. 처음으로 연정을 품은 우이코의 죽음, 빛을 위해서 만들어지고, 빛에만 어울리던 육체 쯔루가와의 죽음은 나의 빛으로의 통로를 차단하고 순간인 인간의 미와 불멸의 금각사의 미가 대립한다.


  인간의 멸망하기 쉬운 모습에서 도리어 영생의 환상이 떠오르고, 깅가쿠의 불멸의 아름다움에서 오히려 멸망의 가능성이 떠올랐다. 인간처럼 필멸(必滅)한 것은 근절시킬 수가 없다. 그러나 깅가쿠와 같이 불멸한 것은 소멸시킬 수가 있다. 어찌하여 사람들은 여기에 눈뜨지 못하는 것일까? 나의 독창성은 의심할 여지도 없었다. 메이지 30년대에 국보로 지정된 깅가쿠를 내가 불태워 버린다면 그것은 순수한 파괴이며, 돌이킬 수 없는 파멸이며, 인간이 만들어낸 아름다움의 모든 것을 확실하게 줄여 버리는 일이 되는 것이다.


  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하기 때문에 그토록 아름다움을 숭배했던 것일까. 내가 아름다웠더라면 금각사를 이처럼 숭배할 수 있었을까. 절대적인 미를 파멸케 하는 행위는 정당성을 갖게 된다.


  소극적인 파멸, 즉 공습으로 금각사가 불타길 바랐으나 교토는 불행하게도 공습 받지 않았다. 어쩔 도리 없이 적극적 파멸, 방화를 선택한다. 불타오르며 미의 절정을 보여주는 금각사와 자살하려는 마음을 접고 살아 있음을 확인하려는 듯 담배를 피우는 나, 둘 사이에 기나긴 대화가 시작되는 듯하다.


  아름다움을 끔찍이 경애하지만 그 아름다움이 파멸되었을 때야 비로소 자유를 느끼는 한 사람의 이야기이다. 연정을 품었던 우이코가 그의 연인으로부터 총을 맞고 쓰러졌을 때 나는 다른 사람들처럼 재빨리 다가가지 않고 깜빡 잠이 든다. 얼핏 눈을 떴을 때는 이미 아무도 없고 새들만이 맑은 소리로 지저귀고 있다. 금각사에 불을 놓고 산에 오른 나는 스르르 잠이 든다. 곧 의식을 회복한 것은 새들의 요란한 소리 덕분. 절대적인 아름다움을 파멸하고서야 새처럼 자유롭게 하늘을 날 수 있었을까. 아름다움을 숭배하는 최고의 행위는 다름 아닌 파멸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뒤미처 다가온다.

 



YES마니아 : 골드 a*****4 2010.02.15. 신고 공감 5 댓글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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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각사를 보면 일본의 '극우주의'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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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위대(自衛隊)여! 궐기하라!"라는 말을 남기고 할복(腹切り)한 "엽기적인 작가", "극우주의적인 작가" 미시미 유키오(三島由紀夫)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마다 껄끄러운 부분이다. 일본의 식민통치의 잔학성을 35년간이나 처험했던 우리 민족에게 미시마의 문학은 단순한 "문학"으로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특히 미시마의 문학적 재능이 성숙기로 접어들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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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위대(自衛隊)여! 궐기하라!"라는 말을 남기고 할복(腹切り)한 "엽기적인 작가", "극우주의적인 작가" 미시미 유키오(三島由紀夫)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마다 껄끄러운 부분이다. 일본의 식민통치의 잔학성을 35년간이나 처험했던 우리 민족에게 미시마의 문학은 단순한 "문학"으로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특히 미시마의 문학적 재능이 성숙기로 접어들면서 극우주의적인 경향은 '남성성의 찬양'으로 더욱 심해지는 경향을 보인다. 한국인이라면 소설의 매력에 흠뻑 빠지기 전에 '민족주의'라는 감정이 앞서는 것은 당연하다고 본다. 미시마의 대표작 <금각사>에서 극우주의적인 경향을 찾아 보기는 어렵다. 약간은 변태적이고 엽기적인(?) "미시마 특유의 미학적 감수성이 드러나는 소설", 이것이 금각사에 대한 대부분의 평가다. 사실 금각사에 대해 주인공인 미조구치가 느끼는 감정, 그리고 성욕, 아름다움과 추함의 대립, 인식과 현실의 대립이 주요 테마로 작용하고 있는 이 소설에서 극우주의적인 경향을 느끼는 사람이 되려 엽기적이고 변태적(?)일런지 모른다. 그러나 이 소설 역시 극우주의적 성향이 매우 강한 소설이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물론 문학을 바라보는 2가지 관점-보편성과 특수성-에 따라서 소설을 가려 읽는 것은 당연하다. 보편성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미시마의 <금각사>는 수작(秀作)이다. 그러나 특수성의 관점에서 보면 일본의 팽창적 극우주의 성향이 짙게 묻어나는 소설임에 틀림없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우선 금각사에 대한 역사적 사실에서 시작해 보자. 금각사를 창건한 인물은 아시카가 요시미츠(足利義光)다. 일본사에 대해서 약간의 지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아시카가 요시미츠가 얼마나 극우주의자들에 의해 욕을 먹는지 알 수 있다. 아시카가 요시미치가 쇼군으로 막부를 통치하던 시기에는 바로 중국의 명(明), 우리나라는 조선(朝鮮) 왕조가 동아시아 세계를 구성하고 있었다. 명나라가 멸망한 요소 중의 하나가 왜구(倭寇)였다는 사실과 조선조 초기에 세종대왕이 '쓰시마'를 정벌했다는 기록에서도 알 수 있듯이 당시 일본은 동아시아 해적들의 소굴이었다. 이에 명나라 조정에서는 일본의 실권자인 무로마치 막부의 쇼군인 아시카가 요시미츠와 연합하여 왜구들을 정벌했다. 이에 명나라의 천자는 아시카가 요시미츠를 일본의 왕으로 봉(封)해 주었고, 이에 요시미츠 자신은 각종 대외 문서에서 일본의 왕이라는 직함을 사용했다. '만세일계'라고 자랑하는 일본의 극우주의자들이 이런 사실을 얼마나 욕했을까는 충분히 알 만하다. 당대의 실권자는 일본 조정의 텐노(天皇)가 아니라, 막부의 쇼군이었고 게다가 아시카가 요시미츠가 쇼군으로 있었을 당시는 바로 무로마치 막부의 전성기였다. 이런 상황에서 요시미츠가 텐노를 염두에 두지 않았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일런지도 모른다. 아무튼 '일본왕'을 자칭한 아시카가 요시미치는 우리 식으로 말하면 '매국노(賣國奴)'와 별반 다를 것이 없다. 동경제국대학 법학과를 들어갔을 정도로, 또 16세에 첫 소설을 썼을 정도로 영명한 미시마가 이런 자국 역사를 몰랐을 리가 없을 것이다. 또한 그의 유년기는 태평양 전쟁 말기로서 일본의 군국주의적 사관이 발악(?)을 하던 시기였다. 결국 매국노에 불과한 아시카가 요시미츠가 건립한 금각사의 '아름다움'은 <사악한 아름다움>이며, 말을 더듬게 할 정도로 '아픈 상처'였음이 틀림없지 않을까? 미시마 유키오에게 금각사의 '아름다움'은 단순한 미(美)였을 것이다. "진정한 미" 서양식으로 말하면 진선미(眞善美)가 하나로 합치된 것, 동양식으로 말하면 '물아일체(物我一體)'된 것을 위해서는, 금각사의 '단순한 미'는 또 아(我)와 일치되지 못한 물(物)의 미(美)는 사라져야 마땅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소설을 분석한 평은 아직 접하지 못했다. 일본어를 배우면서 미시마의 소설도 한일(韓日) 대역본이나 몇몇 요약집을 통해서 접했을 뿐이지만, 미시마의 소설을 미시마의 군국주의 관점에서 접근한 자료는 거의 없는 것 같다. 나의 이런 관점은 상당히 무리수를 두고 있다. 그러나 타당성이 아주 없다고는 보지 않는다. 해석의 가능성은 열려 있고, 그 해석이 나름의 타당성을 가지는 방법은 그 해석을 통해 그 작품이 해독될 수 있는가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닐까? 물론 <금각사>가 문학적 '쓰레기'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충분히 <금각사>는 칭찬받을 가치가 있다. 하지만 그 칭찬에만 매몰된 '탐미주의(耽美主義)'는 위험하다. 인간이 만든 모든 것들은 '해석의 산물'이기 때문이고, 그 해석은 언제나 모종의 '이데올로기'를 깔고 있기 때문이다.
4*******i 2001.10.28. 신고 공감 4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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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과 억누름 사이에서 번민하는 미조구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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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만 들어보았을 뿐, 실제로 읽어본 적은 없으면서도 책을 아는 것처럼 스스로 생각하는 것이 부끄러워졌고, 그러한 책들을 한권씩 직접 읽어보려는 나름대로의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보게 되었다. 작가의 극우적인 성향과 할복자살과 같은 얘기들을 들은 기억이 얼핏 뇌리에는 있었고, 이 소설의 귀결도 또한 들어 알고 있었지만, 줄거리를 듣는 것과 실제로 보는 것 사이에는 간극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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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만 들어보았을 뿐, 실제로 읽어본 적은 없으면서도 책을 아는 것처럼 스스로 생각하는 것이 부끄러워졌고, 그러한 책들을 한권씩 직접 읽어보려는 나름대로의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보게 되었다. 작가의 극우적인 성향과 할복자살과 같은 얘기들을 들은 기억이 얼핏 뇌리에는 있었고, 이 소설의 귀결도 또한 들어 알고 있었지만, 줄거리를 듣는 것과 실제로 보는 것 사이에는 간극이 있을 법도 하여 집어 들었다. 결말을 알고서 소설을 읽어내려가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소설 전체적으로 서사의 진행은 일관되다. 파국으로 향하는 길. 복선들과 암시들로 인해 의식하고 읽지 않더라도 은연중에 미조구치가 결행(決行)할 것이라는 사실을 당연시하고 다만 그 때가 언제인지에 대해 궁금해 하게 된다. 그렇지만, 그 예정된 수순을 곧장 밟지 않고, 달팽이의 나선과도 같이 여유있게 훑어 올라간다. 작품 전체에서 미조구치를 지배하는 두 가지 축은 우이코와 금각이다. 사춘기적 시기에 미조구치는 우이코를 향하여 연정과 욕망을 가슴 속에 품고 있었다. 그렇지만 자신감도 없는 이 말더듬이 미조구치는 망신만 당하고 만다. 이 사건은 일종의 트라우마가 되어 소설 결말에 까지 우이코를 향한 연정과, 그에 대한 집착은 미조구치가 관심을 갖게 되는 모든 여인들에게 우이코의 이미지를 덧씌우게 한다. 출진하는 사관과 임신한 여인의 이별장면에서 틀림없이 죽어있는 우이코가 환생했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또한 그 열망은 동정을 버리고 싶어하는 성욕으로도 분출된다. 한편, 금각은 스님이었던 아버지를 통해 실재를 보기도 전에 관념 속에서 금각의 미에 대해 수도 없이 듣게 되고, 따라서 상상 속에서 어느새 금각은 궁극의 미로서의 이상적 형태가 된다. 처음 금각을 대했을 때에는 상상 속에서 갖고 있던 금각의 모습과 현실의 모습의 차이로 인해 충격을 받지만, 인식의 틀은 강하여 끝내 현실의 금각을 미조구치에게 있어서 지고의 미로 만들어 버렸다. 더욱이, 스스로를 흉하다고 생각하다보니, 동시에 미의 상징인 금각은 더욱 쉽게 이상화될 수 있었다. 금각은 일종의 수퍼에고가 되어 미조구치의 행동을 막는 통제장치로서 기능하고, 덕택에 미조구치가 섹스를 시도할 적마다 무한히 커져 버린 금각의 환영은 이를 불가능하게 막았다. 욕망과 억누름의 이 긴장 관계에서 미조구치는 자신 속에 위치한 금각으로부터, 정확하게 이야기하자면 금각의 통제로부터 벗어나려고 노력하고, ‘언젠간 반드시 금각을 지배하려’ 마음먹는다. 친구 가시와기가 보여주는 새로운 인식의 지평을 통해 미조구치는 지금까지 겪어보지 못했던 악행이 가져다주는 짜릿한 쾌락과 기쁨을 맛보고, 이를 금각의 이미지의 금제(禁制)로부터 벗어나는 실천적인 방안으로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금각 역시 물리적인 형체로 존재하고, 불에 탈 수 있다는 생각에 미조구치는 금각에 대한 방화를 마음먹는다. 미조구치의 심리와 행동에 대한 서술은 대단하다 싶을 정도로 뛰어나며, 글 전체적으로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고 간결한 느낌도 준다. 특히나, 알 듯 말 듯 조금씩 주어지는 앞으로 일어날 일들에 대한 암시는 소설의 진행이 느슨해지지 않고 계속 팽팽한 긴장을 유지할 수 있게 해 주는 역할을 잘 해내고 있는 듯하다. 특히나, 종국에는 범죄로 끝나는 것이 어느정도 예견되어 있기 때문에 저자가 슬며시 깔아놓은 장치들의 공은 더욱 크다 하겠다. 그렇지만, 문화적인 차이에서 오는 이질감은 소설의 내용에 진정코 다가가지 못하도록 하는 극복할 수 없는 장벽이다. 독자는 금각에 대한 묘사를 통해 머릿속 도화지에 인식을 하기위한 붓질을 하는데, 일본 건축양식과 기법들을 모르는 일반 독자들은 금각의 모습을 제대로 형상화내기 어렵고, 이는 아쉬움으로 남는다. “세계를 바꾸는 것은 행위가 아니라 인식”이라던 가시와기로부터 계속 영향을 받아 “행위는 일종의 잉여물에 불과”하다고 여기게 된 미조구치를 보면서 갑자기 생각난 대극(對極)이 있다. ‘지금까지의 철학은 세계를 해석해왔지만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라던 포이에르바흐의 마지막 테제는 실천하는 것 자체가 중요하다고 이야기한다. 책을 덮고 나서 든 이 두 가지의 주장은 모두 일리 있게 다가오기는 하지만, 단순히 인식도 실천도 모두 중요하다는 식의 절충적 타협이 아닌, 제 3의 지점은 없는 것인가 스스로 자문해본다.

[인상깊은구절]
내일이야말로 금각이 불타리라,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는 그 형태가 사라지니라... 그 순간 꼭대기의 봉황은 불사조처럼 되살아나 날아가리라, 그리고 형태에 속박되어 있던 금각은, 가벼운 몸놀림으로 닻에서 벗어나 도처에 모습을 나타내어, 호수 위에도 어두운 바다의 조수 위에도, 희미한 빛을 흩뿌리며 자유로이 떠돌아다니겠지... -도입부 이상한 일이었다. 그 당시에는 조금도 죄의식을 느끼지 않았던 행위, 여자를 밟았다는 그 행위가, 기억 속에서 점차로 빛을 발하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여자가 유산하였다는 결과를 알았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 행위는 사금처럼 내 기억에 침전되어, 언제까지고 눈부신 광채를 발하였다. 악의 광채. 그렇다, 설령 사소한 악이라 하더라도, 악을 범하였다는 명료한 의식은, 어느 틈엔가 나에게 갖추어져 있었다. 훈장처럼, 그것은 내 가슴 안쪽에 매달려 있었다. -전개부 "나는 행위의 일보 직전까지 준비했다."고 나는 중얼거렸다. '행위 그 자체를 완전히 꿈꾸었고, 내가 그 꿈을 완전히 살았던 이상, 더 이상의 행위가 필요한 것일까? 이미 그것은 무의미한 일이 아닐까? 가시와기가 말한 것은 아마도 사실인 듯하다. 세계를 바꾸는 것은 행위가 아니라 인식이라고 그는 말했다. 그리고 최대한으로 행위를 모방하려는 인식도 있다. 내 인식은 그런 종류의 것이었다. 그리고 행위를 완전히 무효로 만드는 것도 그런 종류의 인식인 것이다. 그러고 보니 나의 오랫동안의 주도면밀한 준비는, 오로지, 행위를 하지 않아도 좋다는 최후의 인식 때문이 아니었을까? 잘 보아 두기 바란다. 이제 행위는 나에게 있어서 일종의 잉여물에 불과하다. 그것은 인생에서 넘쳐나와, 별개의 차가운 철제 기계처럼 내 앞에서 시동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행위와 나와는, 마치 아무런 인연도 없는 듯이 보인다. -말미
p*******2 2004.05.30. 신고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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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작가의 대표적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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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시마 유키오는 현대 일본 문학의 대표적인 작가이다. 16세 때 소설 을 문예문황에 연재하였으며, 는 미시마 유키오가 31세 때 라는 잡지에 연재하였던 것으로 요미우리 문학상을 받은 작품이다. 1950년 7월 2일 새벽에 실제로 일어난 금각사 방화사건을 다룬 작품이다. 아름다움의 집합체의 금각사가 불에 타는 장면은 정말로 인상적이다. 마치 그의 인생을 대변하듯 금각사는 불타버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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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시마 유키오는 현대 일본 문학의 대표적인 작가이다. 16세 때 소설 <꽃이 만발한 숲>을 문예문황에 연재하였으며, <금각사>는 미시마 유키오가 31세 때 <신조>라는 잡지에 연재하였던 것으로 요미우리 문학상을 받은 작품이다. 1950년 7월 2일 새벽에 실제로 일어난 금각사 방화사건을 다룬 작품이다. 아름다움의 집합체의 금각사가 불에 타는 장면은 정말로 인상적이다. 마치 그의 인생을 대변하듯 금각사는 불타버린다. 그는 너무나 잘 알려져 있듯이 일본 자위대에 들어가 자위대의 각성과 궐기를 외치며 할복 자살로 자신의 인생을 불태워 버렸다. 상당히 치열하고 정열적으로 살아간 천재 작가이다. 실제로 일본 역량있는 신예작가들은 미시마 유키오의 영향을 받았다고 자랑스레 이야기한다. <금각사>는 그런 미시마 유키오의 대표적 작품으로 꼭 한번 읽어 보길 바란다.

[인상깊은구절]
절들은 언젠가는 반드시 타고야 말았다. 불은 풍부하고 방자했다. 기다리면서 틈만 엿보고 있던 불은 반드시 봉기해서 불과 불끼리 서로 손을 잡고 해치출 것을 해치웠다. 깅가쿠는 참으로 희귀한 우연에 의해서 불을 모면한 것이었다. 불은 자연스럽게 일어났고 멸망과 부정은 예사로웠다. 세워진 가람은 반드시 불탔고 불교의 원리와 법칙은 엄밀하게 지상을 지배하고 있었다. 설혹 방화에 의한 불이었더라도 그것은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불의 힘에 호소했기 때문에, 역사는 아무도 그것을 방화하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y****a 2001.04.22.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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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움을 소유하는 방법-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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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는 소설이 아름다운 이유는 무엇일까? 이 소설은 실제 있었던 금각사 방화 사건을 소재로 하여 한 인간의 미(美)에 대한 집념을 그려내고 있다. 소설을 읽으면서 여기저기 밑줄을 긋는 부분이 많았는데 문체의 매력 때문이기도 했지만, 문장 하나하나에 드러나는 인물의 생각이 지상에 존재할 수 있는 것인가 싶을 정도로 경이로웠기 때문이었다.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소설은 아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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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각사>라는 소설이 아름다운 이유는 무엇일까? 이 소설은 실제 있었던 금각사 방화 사건을 소재로 하여 한 인간의 미(美)에 대한 집념을 그려내고 있다. 소설을 읽으면서 여기저기 밑줄을 긋는 부분이 많았는데 문체의 매력 때문이기도 했지만, 문장 하나하나에 드러나는 인물의 생각이 지상에 존재할 수 있는 것인가 싶을 정도로 경이로웠기 때문이었다.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소설은 아름다움을 박제시키려 했던 한 인간의 내면심리와 극단적인 행동을 통해 이러한 물음표를 던져 준다.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하고... 미조구치라고 하는 소설의 주인공은 과연 정상인과 다른 특이한 사람인가? 인물 스스로 자신은 특별하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사실, 주인공의 비정상적이라고 느껴질 정도의 내면은 '정상인' 이라고 불리는 평범한 사람들에게 아주 생소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인간 내면에 누구나 조금씩은 가지고 있는 심미적인 기질이다. 다만 미조구치는 그러한 기질이 보통 사람들보다 훨씬 많다. 윤리나 관습이나 법규 같은 것, 보통 사람의 내면에 각각 제 영역을 확보하고 있을 만한 그러한 가치의 자리가 미조구치에게는 없는 것이다. 아니, 없다기 보다는 그러한 모든 가치를 좌우할 수 있는 어떠한 신적인 절대성이 그의 내면에는 있는 것이며, 그것이 아름다움인 것이다. 이러한 차이로 인해 그는 일반인들과 동떨어짐을 느끼게 된다. 추한 외모와 말더듬이라는 장애 또한 그의 평범치 않음을 부각시키는 요소이다. 말을 더듬는 행위는 그의 신체적 장애를 넘어서 감정, 사회인식에 대한 어긋남을 상징하기도 한다. 나의 감정에는 말더듬이가 있다. 내 감정은 언제나 타이밍이 맞지 않았다. 주인공은 자신의 말더듬이를 은근히 자랑스러워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는 자신의 감정과 내면이 사회의 그것과 어울리지 못함에 대해 은근히 우월감을 느끼고 있다. 이러한 인물의 내면은 그가 창녀촌에 가서 느끼는 심리에서도 드러난다. 나는 완전히 보편적인 단위의 남자로서 취급되고 있었다. 아무도 나를 그런 식으로 취급하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나로부터 말더듬이가 벗겨지고, 추한 것과 가난히 벗겨지고, 이렇게 탈의한 뒤에도 수없는 탈의가 쌓여 나갔다. 나는 분명히 쾌감을 맛보고 있었으나 그것이 나라고는 믿어지지 않았다. 우월감과 소외감이 공존하고 있는 주인공은 이러한 자신에게 경멸이나 싸늘한 시선을 보내는 존재에게 매력을 느낀다. 그에게 평생 아름다움의 대명사로 기억되는 깅가쿠가 그러하며 우이코, 미군창녀 등 그가 끌리는 태도는 그러한 멸시의 모습들이었다. 주인공을 둘러싼 인간관계에서도 그러한 그의 성격을 느낄 수 있다. 특히 그의 두 친구, 가시와기와 쯔루가와를 비교하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 가시와기는 그와 대단히 닮았으면서도 다른 인물이다. 가시와기는 순간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좀 더 세속적인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가시와기는 어찌 보면 유연해 보이기도 하고 미조구치의 입장에서 보면 타락스럽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한 가시와기의 타락성은 주인공에게 새로운 아름다움의 한 형태로 끌리게 되는 것이다. 쯔루가와와의 관계 역시 주목할 만 한데 쯔루가와는 주인공과 대단히 다른 사람-이라고 주인공은 곧잘 말하곤 한다.-임에도 불구하고 사실, 비슷한 면을 갖고 있는 인물이다. 쯔루가와는 주인공에게 양지의 세계를 연결해주는 다리같은 존재였지만 훗날, 그의 자살 뒤에 드러나는 그의 음지들은 쯔루가와 역시 스스로를 구원하지 못해 방황했던 인물 임을 알려 준다. 주인공이 추하다고 느끼는 인물들-그의 어머니나 노사 등-은 아주 평범한 인물들이다. 평범 뒷 면에 주인공이 경멸하는 태도, 희망을 품고 있다. 미조구치는 희망을 꿈꾸며 현실을 달래가는 어머니의 모습에서 추함을 느끼는 인물이다. 이해하기 어렵게도 주인공에게 있어 아름다움이란 보존되어야 할 것이 아닌 소멸해야 할 것이다. 순간성과 영원성, 그것은 아름다움에 제기할 수 있는 하나의 논제이다. 가시와기와는 달리 주인공은 영원한 아름다움을 꿈꾸며 순간과 영원과의 사이에서 불안감을 느낀다. 깅가쿠 조차도 영원히 불변하지는 않으리라는 불안감, 그리고 그 아름다움을 소유하고 싶은 욕망은 결국 그가 불을 지르도록 만들고야 만다. 절대적 미의 상징이었던 깅가쿠에서조차 주인공은 불안을 느낀다. 그렇다면 그가 꿈꾸고 사랑했던 진정한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불을 지르는 자신의 행위이다. 깅가쿠의 불멸의 아름다움에서 오히려 멸망의 가능성이 떠돌았다. 나의 삶의 의지가 모두 불에 걸려 있다고 한다면 육욕도 그리로 향하는 것이 아닌가? 나의 그런 욕망이 불의 나긋나긋한 자태를 만들고, 불길은 검게 빛나는 기둥을 투사해서 내가 보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고 상냥하게 몸치장을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는 자신의 행위를 사랑했다. 그리고 그 행위로 인해 사람들이 아름다움을 비롯한 인간 세계에 떠돌고 있는 불안을 인정하기를 바란 것이다. 언젠가 공습이 계속되고 있는 상황 속에서도 아무런 흔들림이 없어 보였던 깅가쿠에게 배신감을 느꼈듯이 순간성과 영원성 사이의 불안을 인정하지 않는 행위는 그에게 용납이 되지 않았고 그는 그 사이의 불안한 틈을 인정하도록 만드는 것이 자신의 임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자신이 행위는 불타고 있는 깅가쿠 만큼이나 아름다운 것이다. 곧 순간의 아름다움을 영원한 아름다움으로 박제 시키는 행위, 그 아름다움의 소멸이 그에겐 가장 아름다웠던 것이다. <금각사>에 드러난 아름다움의 문제를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하는 것은 독자들의 자유이다. 그러나 한 가지 중요한 것은 깅가쿠 방화 행위를 보면서 누구나 조금은 이상한 희열감을 느꼈을 것이라는 점이다. 아름다움이란 신이 선물한 인간의 가장 큰 보물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이 맛볼 수는 있지만 분명 천상의 것이라고 믿는다. 인간은 바라볼 수 있을 뿐 소유할 수 없는 것이다. 어떠한 아름다움이든 지상의 것은 유한한 것이므로... 우리는 누구나 한 번쯤 <금각사>의 주인공처럼 그러 유한적인 아름다움을 소멸시킴으로써 영원히 박제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진 않을까?
m********r 2001.07.03.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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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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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각사..예전에 일본에 갔을 때 금각사를 가본 적이 있답니다..예전에 불에 타서 다시 복원시킬때 금으로 입혔답니다.. 금을 최대한 아주 얇게 두드려 펴서 금박을 입힌거죠..두께는 0.1mm정도 된다고 들었었습니다.. 무라카미 류가 어릴 적 이 금각사를 읽고 굉장한 충격을 받았다는 그런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호기심 반 장난 반으로 인터넷에서 책을 사서 이 글을 읽게 되었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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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각사..예전에 일본에 갔을 때 금각사를 가본 적이 있답니다..예전에 불에 타서 다시 복원시킬때 금으로 입혔답니다.. 금을 최대한 아주 얇게 두드려 펴서 금박을 입힌거죠..두께는 0.1mm정도 된다고 들었었습니다.. 무라카미 류가 어릴 적 이 금각사를 읽고 굉장한 충격을 받았다는 그런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호기심 반 장난 반으로 인터넷에서 책을 사서 이 글을 읽게 되었습니다. 금각사는 대체 일본에게 어떤 상징물일까요? 금각사는 읽어 보지 않고선 거기에 대해 논할 수 없습니다. 몇번을 읽어보아도 여기에 대해 정의를 내릴 수 없는 저자신의 미숙함에 부끄럽지만..아주 심오한 내용에 대해선 저같은 범인은 이렇다 저렇다 할 수 없는 건 분명한 사실입니다.. 저는 현대작품보다 고전을 더 사랑합니다.. 고전은 이 시대에서 배울 수 없는 더 현명한 통찰이 들어있습니다.. 여러분께서 꼭 한번 읽어보셨으면 좋겠습니다..
n*******g 2003.12.08.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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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위와 인식, 불타는 금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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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각사를 처음 접할때는 그저 호기심이 앞섰었다. 하지만 한장 한장 넘어가는 책장속에서 나는 빠지지 않을수 없었다. 이 글의 주인공은 타고난 말더듬이다. 어쩌면 이러한 조건이 금각과의 그 특이한 유대관계를 증폭시키는 걸지도 모른다. 그는 말 더듬이라는 제한 조건으로 외부세계로부터 고립되었고, 내면의식 자체에도 장애가 있다고 그 스스로가 밝히고 있다. 다만 그에게 있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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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각사를 처음 접할때는 그저 호기심이 앞섰었다. 하지만 한장 한장 넘어가는 책장속에서 나는 빠지지 않을수 없었다. 이 글의 주인공은 타고난 말더듬이다. 어쩌면 이러한 조건이 금각과의 그 특이한 유대관계를 증폭시키는 걸지도 모른다. 그는 말 더듬이라는 제한 조건으로 외부세계로부터 고립되었고, 내면의식 자체에도 장애가 있다고 그 스스로가 밝히고 있다. 다만 그에게 있어서 세계로 통하는 문이며, 동질감을 느끼게 끔 하는 것이 있었다. 금각...바로 그것이었다. 어릴적부터 아버지의 이야기로만 들어온 상상의 금각은 그가 처음 본 현실의 금각의 모습에 배신감을 느끼지만, 차츰 그는 다시 금각의 아름다움을 느끼고 사랑하게 된다.하지만 그것은 곧 금각의 견고함, 그리고 절대적인 미, 변하지않는 영원성에 부딪혀 소외감으로 바뀌어 간다. 어쩌면 소외란 표현은 맞지 않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 생각 속에 그는 금각을 불태워 버리겠다는 집념을 쌓아간다. 심지어 금각이 세계의 원천이고, 자신은 이를 파괴함으로써 세계를 변모시키겠다는 생각조차 한다. 나도 이 작품의 끝이 설마 이럴줄은 예상치 못 했지만, 결국 주인공은 "행위"를 저지르고 만다. 그의 친구 가시와기의 "행위와 인식"에 대한 이야기와 선친의 친구이셨던 젠카이 스님과의 대화등은 그의 마지막 행위를 망설이게 했지만...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상을 만나면 조상을 죽이고, 나한을 만나면 나한을 죽이고, 친족을 만나면 친족을 죽이고서, 비로소 해탈을 얻을지니라. 사물에 구애받지 않고 투탈이 자재로울 지니라...!" 이 글귀로 인해 주인공은 행위를 결행하는 힘을 얻게 되었고, 금각은 불태워졌으며, 자살 또한 포기하고 살겠다는 다짐을 하며 작품은 끝난다. 이 작품에서 나타나는 미에 대한 의식(주로 금각사...)은 정말 인상이 깊었다. 주인공의 금각에 대한 집착, 또한 나를 더욱 글에 빠져들게 한것이다. 나는 솔직히 이 글을 완전히 이해하진 못한 것 같다. 다만 그 속의 심취적 불교사상과 접목되는 부분..."행위와 인식"등에 대한 것들은 대충 고개만 끄덕여 질 정도다. 글 곳곳에 수식어들 하나하나도 이상하게(?!) 좋았다.. 그렇게 화려하지도 않고, 간결하지도 않은 글귀들이 마음에 와 닿았다. 그리고 또 등장인물들도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 같다. 그의 친구로는 쓰루가와와 가시와기가 등자아는데, 그 둘은 정반대의 면을 가졌으면서도,뒷부분에서 둘이 주고 받은 편지대목을 보면 예상치 못한 혼란 아니 충격을 가져오기도 한다. 하지만 분명 쓰루가와는 솔직하고 진실된 주인공과 세계를 통하는 밝은 문이 된다. 가시와기를 알기 전까진...말이다. 반면 가시와기는 주인공 같은 불구(안짱다리)를 가짐에도 불구하고 확연히 다른 사고 방식을 가진 어둠에 부합되는 면을 가진 친구다. 단지 유감인 건 난 아직도 가시와기의 사고방식이랄까..?! 그런것들이 잘 수긍가진 않는다. 정말 알면 알수록 신비(?!)한 인물이랄까?
b******e 2000.03.28.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