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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내용이 1930년대에 쓰여졌다는 점에 솔직히 경악스럽기까지 하다. 어떻게 이런 상상을 할 수 있었을까? 그 시절 우리나라를 생각해보면.. 마치 외계인이 쓴게 아닐까라는 착각도 들고.. 근데 더 놀라운건 여기 나오는 이야기들이 마냥 허구가 아니라는 점이다. 어쩜 상당부분의 이야기들은 이미 현실로 이루어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신분제도 통제된사회 가족붕괴 저출산 복제인간 세뇌 어찌보면 지금 이 순간에 다 일어나고 있는 모습 아닌가? 마치 예언서처럼 많은 부분이 맞아 떨어진다. 책에서는 극단적으로 묘사되고 있으나 지금 세상을 보면 뭐 크게 놀랍지도 않다. 책에서 말하고 있는것들이 약간의 형태만 다를뿐 이미 다 삶에 어느정도 적용되고 있다. 그래서 멋진 신세계는 아이러니하게 지금의 세상이 아닐런지.. 그게 행복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소설이 아닌 현실이 됐다는 점이 씁쓸하다는 것일뿐..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서처럼 되어 버린 1930년대의 소설 멋진 신세계.. 지금 시대의 사람들에겐 그저 소설로 읽히지만 그 시절 사람들에겐 충격으로 다가올거 같긴 하다. 더 섬뜩한건 점점 더 이 세상이 멋진 신세계에서 말한대로 가고 있다는 점이 아닐런지.. 그래서 그런가 느리게 천천히 사람답게 이 단어가 사라지지 않고 한 켠에 남아 있으면 하는 바램이다. 발전도 좋고 다 좋은데 우린 결국 자연스럽게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사람이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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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범위한 지식뿐 아니라 뛰어나고도 예리한 지성과 우아한 문체에 때로는 오만하고 냉소적인 유머 감각으로 유명한 영국 출신의 소설가이자 비평가. 1894년 7월 26일 서리 지방 고달밍에서 토머스 헉슬리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이튼 칼리지와 옥스퍼드 대학교를 졸업했다. 지적 정보와 함께 재치와 풍자로 가득 찬 다양한 방면의 저술 활동으로 유명한 헉슬리는 20세기 관념소설의 큰 줄기를 이룬 대표적 작가다. 소설가로서 널리 알려지기는 했으나 그 외에도 수필, 전기, 희곡, 시 등 많은 작품을 남겼다. 저자는 오늘날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고 있는 기계문명이 극한까지 발달하고 인간 스스로가 발명한 과학의 성과 앞에 노예로 전락하여, 마침내 모든 인간 가치와 존엄성을 상실하는 지경에 도달하는 비극을 예언한다. 그리고 희생이 뒤따르지 않는 진보는 결코 가능하지 않다는 저자의 주장은 그의 역사관과 문명관의 핵심을 이루면서 기계문명의 발달에 도취된 현대인들을 통렬히 공격한다.올더스 헉슬리는 오늘날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고 있는 기계문명이 극한까지 발달하고 인간 스스로가 발명한 과학의 성과 앞에 노예로 전락하여, 마침내 모든 인간 가치와 존엄성을 상실하는 지경에 도달하는 비극을 예언하고 있다. 그리고 희생이 뒤따르지 않는 진보는 결코 가능하지 않다는 작가 헉슬리의 주장은 그의 역사관과 문명관의 핵심을 이루면서 기계문명의 발달에 도취된 현대인들을 통렬히 공격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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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송 '책을 읽어드립니다'에서 설민석 님이 줄거리를 재미있게 설명하시는 것을 보고 흥미가 생겨서 구매하게 되었습니다. 개인적인 감상이 매우 많이 포함될 수 있습니다. (발췌 위주 리뷰 작성이라서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으니, 스포일러를 원하지 않으시는 분들은 포스트를 읽지 않는 것을 추천드립니다.)
1. 계급예정계가 숫자를 수정계에 전달한다. 2. 수정계는 계급예정계가 요구하는 태아를 보내준다. 3. 시험관(병)이 태아실로 보내진다. ---p.19
시험관(병)은 넓은 태아실을 자동 컨베이어 벨트를 통해 이동한다. 태아는 '복막'이라는 이름의 침대 위에서 성장한다. 태아는 태반 분비물, 감상선 호르몬 등등의 갖가지 분비물을 '섭취한다'. 또한 이 인공적인 방법으로 태어나는 아이들의 성별은 여남 각각 O,T로 표지된다.
그들에게는 한 명의 가임 여성만 있어도 충분하지만 만일의 상황을 대비하여 여성 태아의 30%를 정상으로 발육시키고, 나머지에게는 24M마다 남성 호르몬을 투입한다. (그러면 불임이 된다.)
알파, 베타, 감마, 델타, 엡실론 이들의 계급은 매우 인위적인 방법으로 정해진다. 가장 최하위층인 엡실론(표준이하)을 만들기 위해 일부러 산소포화농도를 낮춘다. 산소가 부족해지면 두뇌는 물론 골격도 성장하지 못한다. 심지어 인위적으로 '티푸스'와 '수면병' 균을 주입하기도 한다.
"바로 그것이 행복과 미덕의 비결이야. 자신이 해야 하는 일을 좋아한다는 것. 모든 조건반사적 단련이 목표하는 것은 바로 그것이야. 자신들의 피할 수 없는 사회적 숙명을 좋아하도록 만드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해." ---p.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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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서 그려지는 사회는 전체주의적 사회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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앉은 자리에서 단숨에 읽어버렸다. 조지오웰의 1984나 마거릿우드의 시녀이야기와는 더 고차원적인 디스토피아 세상을 그린다. 유토피아를 가장하는 디스토피아라니.. 내가 소설속 주인공이라면 1984의 세계가 더욱 살기 어려운 디스토피아의 세상이겠지만, 제 3자의 전지적 시점으로 보기에 멋진 신세계만큼 끔찍한 디스토피아는 없다. 실제 내가 소설속 어느 계급에 소속된 한명의 인격체라면 과연 어떨까 실제 만약 내가 그런 세상에 산다면 과연 불행을 느낄까? 이를 대답하기 어렵다는 것이 이 책이 던지는 화두가 엄청나다고 느껴지게 한다. 인간의 삶으로써 오욕칠정을 다 느끼며 살아간다는 것이 행복한 일인가? 아니면 내가 불행을 느낄 새도 없이 행복만을 주입당하며 사는 삶이 행복한 삶일까? 정말 어려운 문제다 |
멋진 신세계
1984와 함께 비슷한 디스토피아의 소설인거 같아 함께 구매하게 되었어요. 유명한 책이라 집에 한권 있었는데 모르고 중복구매 해버렸네요. 그래도 잘 읽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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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오웰이 감시와 통제의 디스토피아를 보여주었다면 헉슬리는 즐거움과 쾌락에 중독된 채 더 이상 어떤 통제도 필요 없는 방임의 세계이다. '소마'는 우리가 쾌락을 맛보기 위해 매일 보고 듣고 먹는 현대식 즐거움 쾌락거리의 은유일 것이다. 우리 눈에는 완벽해 보이는 세상에 이 세계에 속하지 않는 존재가 잠입하여 들어왔을 때, 그 존재는 고통을 느낀다. 유일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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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스토피아적인 풍자소설의 대표작으로 과학이 모든 것을 지배하게된 미래 사회의 암울한 사회상을 그려낸 명작 중의 명작이라고 할 수 있다. 영화 이퀄리브리엄이나 다른 미래 사회를 투영한 많은 영화들과 그 궤를 같이 하는 것으로 과학이 인류를 풍요롭게 만들었지만, 모든 것이 그렇듯 과한 것은 부족한 것보다 좋지 않은 과유불급의 진리를 느낄 수 있는 책이 아니었나 싶다. 암울한 미래에 대한 풍자적 소설로 강력히 추천하는 바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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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우리는 세계 3대 디스토피아 소설을 예브게니 자먀틴의 우리들 그리고 조지 오웰의 1984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로 뽑고있다 그중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는 세계 3대 디스토피아중에 올더스 헉슬리가 가장 중요하게 신경쓰던 올바르면서 알기 쉽게라는 그의 글쓰기가 두들어지게 나타나고있다 1932년에 발표한 이책을 지금 2023년 시점에와서 읽어 보아도 전혀 이질감이 없었으며 올더스 헉슬리가 상상한 그가 말했던 멋진 신세계인 우리가 살고있는 이 세상은 유토피아일까? 디스토피아일까? 생각하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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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무언가를 강렬히 느끼고 싶습니다. / p.141
어디까지나 취향이겠지만 나의 기준으로 보자면 디스토피아 소설을 좋아하지 않는다. 등장인물이 타락으로 흘러들어가는 이야기나 배경이 누가 봐도 절망감을 느끼게 하는 세계관을 보고 싶지 않으며, 굳이 그것을 찾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기 때문이다. 누가 봐도 그 답답한 세계를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사실 유토피아 세계관을 가지고 있는 소설을 본다면 살고 있는 현대 사회와의 차이로 절망감을 느끼지만 디스토피아 세계관의 이야기를 읽는다고 해서 현대 사회가 더 낫다는 우월감이 들지는 않는다. 그것 또한 참 아이러니하다. 결론적으로 유토피아나 디스토피아나 절망적인 감정을 느낄 때가 많은데 이상하게 디스토피아 소설에는 크게 흥미를 못 느끼고 있다.
이 책은 올더스 헉슬리의 디스토피아 장편 소설이다. 디스토피아 3대 소설 중 하나로 알고 있는 작품인데 그동안 유명한 소설이라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섣불리 손이 가지 않았다. 그러다 10월 이번 독서 모임 도서로 선정이 되었다. 좋은 명작을 읽을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한 기대감과 함께 디스토피아 세계관에서 잘 빠져나올 수 있을지에 대한 두려움이 앞섰다. 혹시나 이 소설을 읽고 괜히 현대 사회와 다를 것이 없다는 사실에 절망감을 느끼지는 않을까 싶었다.
소설은 포드 자동차가 나왔던 시대의 영국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 시대의 인간은 계급에 따라 교육뿐만 아니라 제공되는 영양분이나 모든 것이 정해져 자란다. 결국 신체부터 직종, 생각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제한된 상태로 태어나게 된다. 그뿐만 아니라 모체가 아닌 병에서 자라기 때문에 부모님이라는 언어 자체가 존재하지 않으며, 자유로운 연애와 성관계 등의 쾌락을 즐긴다. 거기에 소마라는 이름의 약을 통해 절망이나 분노 등의 부정적인 감정 또한 제어할 수 있다.
얼핏 보면 부정보다는 긍정에 가까운 삶을 살아갈 것 같은 이 시대의 인간들 중에서 두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첫 번째는 가장 높은 엡실론 등급의 인간이지만 체격은 하위 등급 수준의 버나드라는 인물로, 등급과 신체적인 차이로 어느 등급에도 제대로 끼지 못해 고독감을 느끼고 있다. 심지어 하위 등급의 인간에게는 조롱 아닌 무시까지 받는다는 점에서 주변인이라는 느낌을 준다. 두 번째는 보통 인간들보다 똑똑한 두뇌를 가진 것처럼 보이는 왓슨이라는 인물로, 살고 있는 시대에 의문을 가지고 있지 않는 보통 인간들과 달리 사회에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다. 적극적으로 이상한 짓을 하는 버나드와 반대로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숨기는 편이다.
거기에 한 사람이 더 등장한다. 당시 사회에서 야만인들이 사는 곳으로 떨어진 린다라는 인물의 아들 존이다. 버나드가 멕시코로 여행을 떠나면서 존과 린다를 만나게 되었는데, 각자의 생각을 가지고 영국 런던에 발을 붙이게 된다. 야만인이라고 불리는 존은 런던 인간들의 생각과 행동 하나하나에 큰 충격과 공포를 느낀다. 소설은 이 세 사람을 통해, 그리고 배경을 통해 사회를 날카롭게 비판한다.
처음에는 이성적으로 뭔가 흥미롭게 느껴진 것은 사실이다. 가끔 뉴스나 매체로 어지러우면서도 안타까운 사건들을 접하면서 적어도 나에게 해가 될 수 있는 감정이나 생각들을 제어하는 것에 대해 진지하게 상상했던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소설처럼 국가가 개인의 감정을 통제한다거나 무시하는 등의 위험한 일은 없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입장이어서 약간 불쾌한 기분을 안게 되었다.
후반부로 흘러가면서 흥미로움은 답답함으로 다가왔다. 특히, 총독과 존의 말싸움에 대한 내용을 보면서 '매독과 암에 걸릴 권리, 먹을 것이 떨어지는 권리, 나이를 먹어 추해지는 권리 등 총독이 말하는 불행해질 권리를 인간에게서 빼앗는다면 과연 그 인간들은 영원히 행복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것도 심지어 개인이 원하는 것이 아닌 국가가 전체의 이익을 위해 행한다는 것 또한 머리를 어지럽게 했다. 개인적으로 불안을 가장 경계하는 사람이지만 이렇게 개인을 탄압할 정도의 사회라면 존과 마찬가지로 안락보다는 위험과 자유, 선을 원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면으로 보았을 때 야만인이라고 불리는 존이라는 인물에 가장 공감을 많이 했던 것 같다. 소설에서는 그야말로 야만인이라고 불리지만 지금 사회에서는 가장 보통의 인물이기도 하다. 부모님이라는 언어를 입에 올릴 수 있으며, 사랑하는 린다의 죽음에 누구보다 슬픈 감정을 표출할 수 있다. 그게 너무 자연스러우면서도 일상적으로 느껴졌다. 감정을 통제하는 국가가 존재하지 않는 이상 적어도 민주주의 사회의 국민이라면 존에게 이입이 되지 않을까.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읽는 내내 하나의 소설과 한 편의 드라마가 떠올랐다. 김초엽 작가님의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라는 단편과 드라마 <어쩌다 발견한 하루>였다. 이 소설에서의 왓슨과 리처드가 유토피아라고 느껴질 수 있는 사회를 거부하는 이유를 김초엽 작가님의 순례자들의 이야기에서 찾았다. 그들이 유토피아를 떠나 세계로 나아가는 것과 일맥상통하다고 느껴졌다. 또한, 왓슨과 리처드가 그 사회에서 자신을 찾아가는 과정처럼 보였는데 이는 드라마 어쩌다 발견한 하루의 주인공인 단오와 하루가 만화 세계에서 자아를 찾는 것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보면 소설의 내용과 크게 상관이 없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동안 읽거나 보았던 소설과 드라마에서 개인적으로 느낄 수 있는 공통점들이 보였다.
리처드와 왓슨의 행동을 보면서 사이다를 마시는 듯한 통쾌함을, 존을 보면서 너무나 현실적인 결말에 대한 씁쓸함을 느낄 수 있었다. 현대 사회를 비판하는 소설이기에 더욱 피부로 와닿았을지도 모르겠다. 병에서 인간을 길러 낳는다거나 기본적인 감정인 희노애락과 부정적인 감정을 억제하는 일은 비현실적이겠지만 전체주의 또는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사회와 맞닿아 있는 면이 있기에 마냥 허구의 이야기처럼 느껴지지는 않았다.
독서 모임을 통해 3대 디스토피아 소설 중 하나인 이 소설을 읽을 수 있어서 개인적으로는 참 만족스러웠다. 인상적이었던 내용과 느꼈던 여운을 떠나 디스토피아 소설에서도 이런 매력이 있다는 점을 새롭게 느낄 수 있는 시간이기도 했다. 기회가 된다면 다른 디스토피아 소설에도 도전해 보고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