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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인간은 싸운다. 지구 어디에선가는 폭동이 일어나고 테러에 눈물지으며 총성이 끊이지 않는다. 동서 냉전에 의한 이데올로기 갈등이 끝나면 다툼이 멈추고 평화의 시대가 도래할련가 기대했지만 한갖 헛된 바램일 뿐이었다. 오늘날 분쟁의 표면적 모양새는 종교적 갈등이다. 유대·기독세력과 이슬람세력간의 충돌은 해당국가의 불행과 공포를 넘어 전세계의 미래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운다. 특히 우리나라같은 수출지향적, 에너지의존적 경제체제를 갖춘 국가는 이래저래 눈칫밥이다.
기독의 뿌리인 유대민족이나 이슬람의 기반인 아랍민족은 같은 유일신(유대의 야훼/여호와, 기독의 하느님/하나님, 이슬람의 알라신은 같은 존재)을 믿으며, '아브라함'이라는 같은 조상의 후손들이건만 이렇게 서로 죽이고 죽여야만 존재할 수 있다면 이곳이 바로 지옥의 풍경이지 뭐란 말인가? (아~ 신은 잔인하도다... 잔인하도다...) 이게 아니라면 인간 본연의 미완성 유전자 때문이겠지만, 이 또한 신의 작품이니 평화와 사랑의 신은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가. (오~ 주여...) 같은 뿌리, 같은 줄기건만 가지(교리)가 다르다하여 적대시하다못해 서로를 죽여 배척해야만 하는 종교 전쟁. 참으로 우울한 지구촌의 자화상이다. 위도 10도! 적도에서 북으로 약 1,126킬로미터까지를 수평으로 이은 띠로, 기독교와 이슬람교 세력의 충돌이 빈번한 전선을 일컫는 시사용어이다. 전 세계 13억 이슬람교 신도 중 절반이, 20억 기독교인 중 60%가 위도 10도에 산다고 한다. 이 책 <위도 10˚ : 종교가 전쟁이 되는 곳>은 이 지역에 사는 아프리카와 아시아 두대륙의 국가들 _ 나이지리아, 수단, 소말리아,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필리핀 등 _ 을 가리킨다. 중동이나 미국이 아닌 이 지역 국가들의 분쟁 실상을 다룬 최초의 기록이라는데, 읽어보니 정말 매스컴을 통해 알고있는 단편적 지식이 부끄러울 정도다. 우리 가까이 있는 이들 나라가 첨예하고 참혹한 문명의 격전지임을 확인하니 그저 놀라운 따름이다. 저자는 미국인인데도 미국의 실체, 즉 미국의 대외정책이 세계 여러 국가의 분쟁과 폭력의 씨앗이었다고 폭로하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시종일관 공정하고 객관적 태도를 유지하여 종교와 이념이란 포장지에 가리워진 진실과 실체를 우리에게 고발하고 있다. 나이지리아에서의 두 세력간 갈등은 '기독교인이 무슬림에게서 해방되리라'는 기치 아래 나이지리아 남동부가 독립한 1960년대말 사건으로 거슬러 올라가고, 쌍방의 살육전은 증오를 남기고 만다. 수단의 경우는 기독교와 이슬람의 평화를 깨뜨린 원흉으로 '영토와 무역로, 그리고 향료 등을 둘러싼 세속적인 경쟁심'을 들고 있다. 북부의 무슬림과 남부의 기독교인 사이에 종파 간의 반목을 야기한 영국과 미국의 복음주의가 낳은 분쟁이 과연 신의 뜻인지 묻고 있다. 소말리아는 1991년 군벌 간의 내전에 미국이 개입하면서 종교적 분쟁으로 발전하고 만다. 그들은 그저 신의 은혜를 그리워할 뿐이다. 세계에서 가장 큰 이슬람 국가 인도네시아는 1998년 수카르노 대통령의 중앙정부가 붕괴하면서 정교연합 세력의 등장하고 종교분쟁이 벌어진다. 쓰나미는 과연 신의 복수일까? 그 물음이 여기에 있다. 말레이지아도 종교분쟁을 겪고있는지 사실 잘 몰랐다. 2009년, 이슬람교 우월성을 보호하는 법을 제정한 후 분쟁이 격화되는 모양이다. 놀랍다. 필리핀. 저자는 '미국은 어디에 있는지' 묻고 있다. 위도 10도를 따라 양분된 사회에서는 신앙을 위해 살고 죽는 것이 종교의 필요조건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그런데 서로의 싸움은 과연 누구를 위한 순교일까? 알라의 무함마드와 하느님의 예수를 따르는 세력들의 영역 확대가 이런 충돌을 가져왔다고 하기엔 너무 이상하지 않은가? 꾸란이나 성경이나 '평화'가 기본 교리아닌가? 신의 탓? 이건 말이 아니다. 야훼와 알라가 다른 신이 아니거늘 정의로운 전쟁(just war)이 무슨 의미인가? 상실의 눈물은 땅을 적시고 절망의 피는 강을 이루어 서로를 증오하는 이 지옥도가 어찌 신의 뜻이련가. 이쯤에서 '히로세 다카시'의 <왜 인간은 전쟁을 하는가> 한 구절을 생각한다. "왜 인간은 전쟁을 하는가.......그 대답은 전쟁을 지향하는 ‘의지’에 있다. 종종 전쟁은 피할 수 없는 '인간의 본성'인 것처럼 말해져왔으나, 아니다. 전쟁은 그렇지 않다... 모든 분쟁의 역사 속에 그것을 꾸민 사람을 찬찬히 살펴보면 호전적인 의지를 가진 인물이 분명 떠오를 것이다. 따라서 제2차 세계대전 후의 분쟁사란, 분쟁 선동사였다고도 말할 수 있다. 전쟁은 결단코 인간의 본성에 의한 결과가 아니다!". 즉, 전쟁은 피할 수 없는 '인간의 본성'이 아니라 호전적인 '인간의 의지'에 의해 일어난다는 것이다. 모든 것이 종교를 빙자한 인간의 오만과 광기가 낳은 자업자득이 아닐련지.... 기독인과 무슬림의 종교적 갈등은 냉엄한 현실이긴 하나 공존의 목소리 또한 없지는 않다. 어찌보면 두 종교세력간 권력의 헤게모니 암투가 펼쳐지기도 하지만, 이런 분쟁보다 더 오랜 시간(약 1500년간)을 공존·공생해 왔다는 사실에 주목하는 종교인들도 많다는게 한줄기 희망이다. '구원과 저주', '선과 악', '우리와 그들'의 이분법적 논리를 초월하려는 이들의 소망이 곧 신의 뜻으로 보이건만 갈 길이 멀어보인다. 우리나라의 경우 그동안 종교간 상생의 모습을 보여왔으나 근래에 보여주고 있는 공격적 선교에서 일말의 불안을 느낀다. 정교분리의 국가에서 대통령이 종교에 무릎꿇는 모습이 매스컴을 타는 우리의 오늘...자기 종교만이 구원의 길이라하여 타 종교를 적대시하는 분은 이 책을 읽어야 한다. 종교전쟁의 결과가 얼마나 비참한 것인지, 진정 신의 뜻인지 내면을 들여다 보아야 한다. 한 뿌리 한 줄기 종교마저 교리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음을 안다면 종교간 차이와 다름을 이해하고 보듬을 수 있을 것이다. 갈등과 분쟁을 야기하는 인간의 오만이 어찌 신의 의지이겠는가. 상대의 입장을 이해하고 갈등을 해소할려는 노력이 계속된다면 이 땅에 웃음과 평화가 함께할 것이고, 이것이 바로 진정한 신의 뜻이 아니겠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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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도 10도는 소위 ‘종교 분쟁’이 가장 격렬하게 일어나는 6 나라(아프라카 3국, 아시아 3국)의 실상을 취재한 르뽀 형식의 글이다. 위도 10도라고 명명한 것은 이 나라들이 북위 10도를 중심으로 위치하고 있다는 것도 있겠지만, 개신교의 세계 복음화 전략의 일환으로 등장한 10/40 창(10/40 window)란 개념에서 착안한 것으로 보인다. 하여간, 이 나라들의 북위 10도 언저리에서는 기독교와 무슬림의 물리적인 충돌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으며 대량 학살과 폭력이 난무하고 있다. 저자는 이 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모습을 자신이 직접 뛰어다니며 취재한 내용을 바탕으로 묘사하고 있다. 저자의 우선적인 관심은 종교 전쟁의 원인이나 구조를 밝히는데 있다기 보다는, 이 분쟁 한 가운데 있는 사람들의 삶의 모습으로 보여주는데 있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종종 내전이나 분쟁의 원인을 분석하기도 하지만, 주로 그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들(현지인, 선교사, 지도자)을 인터뷰하는데 많은 부분 할애하고 있다. 저자의 글을 읽으면서 인간의 어리석음에 참으로 답답함을 느꼈다. 종교는 어찌되었던 개인의 믿음이다. 다른 사람이 나와 다른 종교를 믿는다고 해서, 내 믿음이 침해되거나 방해되는 일은 없다. 그럼에도 무슬림과 기독교인은 서로 적대적으로 대한다. 물론 이런 적대상황은 저자도 잘 지적하고 있듯이, 여러 가지 복합적인 요인들이 얽혀있다. 그 원인들을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권력을 가진 자들이(경제적이든, 정치 군사적이든 혹은 종교적이든)이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종교를 이용하기 때문이다. 이유가 어찌되었건, 분쟁지역의 종교인들의 서로에 대한 적대감은 거의 맹목적이다. 왜 미워해야 하는지, 왜 싸워야 하는지에 대한 합리적인 이유가 없다(그 맹목성은 기독교보다 무슬림이 더 심한 것 같다). 권력자 혹은 지도자들은 백성들의 무지를 이용하여, 분쟁을 더욱 부추긴다. 그러하기에 현상은 분명 종교 분쟁이지만, 그 분쟁에는 참된 종교인들은 거의 참여하고 있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종교라는 이름으로 인권을 유린하고 자유를 억압하며 상대에 대한 적대감을 고취시킨다면, 그것은 이미 종교가 아니기 때문이다. 두 종교인들은 서로 주장하기를 자신들의 종교는 평화를 지향하고 인권은 존중한다고 말하고 있다. 아마도 사실을 것이다. 그렇다면, 위도 10도에서 벌어지고 있는 종교분쟁의 해결책은 역설적이게도 참된 종교 지도자들이 나서서 참된 종교의 길을 가르치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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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가 전쟁이 되는 곳’이라는 부제가 없었더라면 <위도 10°>의 의미가 무엇일까 궁금한 채로 책을 읽기 시작하였을 것입니다. 위도 10도 특히 적도에서 북위 10도에 이르는 1,126킬로미터에 걸치는 지역은 유독 종교갈등이 심각한 나라들이 많이 분포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지역마다 역사적 배경이나 종교갈등을 일으키는 직접적 원인에서 다소 차이가 있다는 것도 엘리자 그리즈월드의 <위도 10°>를 읽고서 알 수 있었습니다.
뉴 아메리카 재단(New American Foundation)의 선임 연구원인 엘리자 그리즈월드는 미국 복음주의 교단의 수장인 프랭클린 그래이엄 목사를 동행하여 아프리카의 나이지리아, 수단, 소말리아, 아시아의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그리고 필리핀 등 이슬람과 개신교의 갈등이 심각한 지역을 직접 방문하여 취재하여 갈등의 원인과 현황 그리고 앞으로의 전망을 정리하고 있습니다. 저자의 취재결에 따르면, 이 지역들에서 일어나고 있는 종교적 갈등은 영토문제, 물과 석유와 같은 자원을 둘러싼 이해의 충돌 그리고 상대종교의 공격적인 포교에 자극을 받아 대응차원의 포교가 진행되면서 충돌하는 경우 등으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지역에서 종교적 갈등의 뿌리는 수백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갈 정도로 오랜 역사를 가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적도에서 북위 10도에 이르는 지역에는 전 세계 13억 무슬림의 절반이 살고 있고, 20억 기독교의 60%가 살고 있는 만큼 역학구도 상 충돌이 촉발될 가능성이 높다고 하겠습니다. 이슬람과 기독교가 타 종교에 대하여 공격적인 경향이 있다고 이해하고 있었습니다만, 이슬람교의 경전에는 다른 종교와 평화롭게 지내라는 구절이 있고, 기독교와 유대교는 같은 성서를 가진 종교로 좋은 관계를 가질 수 있었으면, 중세 에스파냐에서는 이슬람교와 기독교 그리고 유대교가 사이좋게 지낸 바 있었으며, 로마제국 역시 자신의 종교를 인정하는 타 종교에 관대하게 수용하였으며, 불교를 믿었던 제국의 아소카 황제 역시 타 종교를 관용한 바 있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시대에 기독교가 박해를 받았던 것은 로마의 종교를 이교로 규정하여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며, 유대교와 갈등을 빚었던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 유대교가 관련되었다는 성서적 해석으로 인하여 유대교를 박해하기 시작하면서 였다고 합니다. 최근들어서 강화되고 있는 민족의 정체성이 종교와 깊은 연관을 맺게 되면서 지역내 종교간의 갈등이 심각해지는 경향을 띄게 되었다고 보는 것 같습니다.
<세계는 왜 싸우는가?>의 저자 김영미PD님은 인간의 힘으로 통제가 불가능한 기후변화는 사람들로 하여금 종교에 의지하게 만들기 때문에 적도를 중심으로 한 지역이 특히 종교의존적일 수밖에 없는 것은 기후변화로 인하여 삶이 척박한 탓도 있다고 보았습니다. 또한 저자가 복음주의자인 프랭클린 그레이엄과 동행하여 취재를 진행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무슬림과 기독교 어느 편으로도 편향되지 않은 중간자적인 입장에서 인터뷰 당사자들의 주장을 담아내고 있는 점을 높이 평가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서문을 통하여 “나는 무엇보다도 종교적 신념으로 살아가는 지역주민의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31쪽)”고 하였습니다. 저자가 분쟁지역을 돌아보면서 취재한 결과를 읽으면서 이 지역 거주하는 주민들이 자신의 종교를 쉽게 바꾸려 들지 않는 다는 점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지역에서 이슬람교나 기독교 모두 선교활동을 강화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특히 기독교의 경우 유럽과 미국의 선교사들에 의하여 주도되던 선교활동에 우리나라에서 파송되는 선교사의 비중이 크게 늘고 있고, 그런 까닭에 선교지역에서 갈등을 일으키는 사태가 빈번해지는 경향이 있어 외교당국이 개입하여 선교활동에 각별한 주의를 당부하는 사태까지 불러오게 된 것 같습니다.
저자는 분쟁지역의 종교갈등을 역사적 배경으로부터 인종적 요인, 환경적 요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의 자료를 섭렵하여 인용하고 있어 읽는 이로 하여금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나이지리아편에서는 이 지역의 종교 지도자들이 공존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모습을 기록하고 있는 점이 눈에 띕니다. 특히 “사람아, 우리가 한 남녀에서 너희 모두를 창조했고, 서로의 차이를 알 수 있도록 인종과 부족을 나누었노라”는 내용의 쿠란의 사실서(49:13)를 인용하거나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거하게 하시고...”라는 사도행전(17:26)을 인용하고 있어 좋은 결과로 마무리되기를 기원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보면 중세 유럽국가가 주도한 십자군전쟁에 까지 거슬러가지 않더라도 지난 세기 제국주의 국가들의 식민지경영의 후유증이 이 지역에서 종교갈등의 원인으로 남겨져 있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그리고 미국의 복음주의파들의 선교활동 강화가 맥을 이어가고 있다고 보이는 것입니다.
<위도 10°>를 통하여 아프리카와 아시아 지역에서 고조되고 있는 종교갈등의 원인과 현황을 쉽게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지역의 선교에 우리나라에서 파송되는 선교사들의 비중이 늘러 무시하지 못할 정도의 수준에 도달했다는 점에서 특히 피해를 보지 않도록 최선을 다했으면 하는 바람을 세워보았습니다. 지금은 고인이 되었습니다만, 저의 동서도 이 지역 가운데 한 곳에서 선교사로 사역하다가 소천하게 되어 가족들 뿐 아니라 주변사람들이 많이 아쉬워했던 기억도 새롭습니다. 이슬람국가에서 선교활동을 하고 계시거나 준비하고 계신 분들은 꼭 한 번 읽으시면 현지의 분위기를 이해하시는데 크게 도움이 될 책이라 생각합니다. - 이 리뷰는 출판사에서 제공한 책을 읽고 작성된 것입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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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위 10도는 적도에서 북으로 1,126킬로미터까지를 수평으로 이은 띠를 일컫는다. 북위 10도에 걸친 아프리카 내륙 지방에서는 두 세계가 충돌을 하고있다. 그들은 대부분 무슬림이자 아랍의 영향을 받은 북방 민족과 기독교인을 비롯하여 동물이나 대지및 하늘의 정령과 조상신을 숭배하는 남방 아프리카까지 말이다. 그리고 전 세계의 13억 이슬람교 신도 중 절반이, 20억 기독교인 중 60퍼센트가 위도 10도에 살고있다.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일까? 두세계의 충돌? 엘리자 그리즈월드라는 저널리스트는 이야기한다. 그녀가 본 세계를, 그녀가 바라본 사람들을, 그녀가 바라본 종교를 말이다. 중세의 십자군 전쟁이 떠올려 지는 곳. 종교가 전쟁이 되는 곳이라고 명명지어진 곳. 위도 10도. 그곳에서는 무슨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작년에 <망고 한조각>이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다. 예쁜 겉표지에 혹해서 읽었다가, 몇날 몇일을 가슴 앓이했던 책이었는데, 내전을 이야기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내전속에도 종교가 있었다. 하나님의 이름 아래 기득권을 위해서 교황이 유럽의 젊음이들을 전쟁터로 몰아내었던 그 시절과 무엇이 다를까? 참 많은 시간이 흐른뒤에야 그옛날 십자군 전쟁을 다시 보기 시작하고 있다.
그리고 지금, 저자는 또다른 십자군 전쟁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이슬람 문화권에 금발의 매력적인 기자가 어떻게 들어갔을까 싶었다. 분쟁 지역 전문PD인 김영미 PD의 말처럼, 미국인에게 입국비자 조차 주지 않는 에리트레아로 들어가 그 위험하고 어려운 취재를 하면서 젖먹던 힘까지 다했을 그녀는 누구인가? 뉴 아메리카 재단의 선임연구원이란다. 그곳이 무엇을 하는 곳인지는 모른다. 다만, 그녀가 7년 동안 북위10도의 최전방 지역을 취재하고 분석하면서 그녀가 말하는 '21세기 십자군 전쟁'의 실태와 원인을 정면으로 다루었다는 것은 알고 있다.
저자의 시각은 굉장히 중립적이다. 인간을 바라보면서 가슴 아파하기는 하지만, 어느 종교에도 치우지지 않는다. 냉정하다 할 정도로 21세기 십자군 전쟁속에서의 희생자들을 바라본다. 내가 알고 있는 이삭과 이스마엘로 시작되는 기독교와 유대교를, 작가는 아프리카와 아시아를다니면서, 종교가 분쟁과 순교, 착취, 비리, 테로, 내분으로 얼룩진 겨위를 역사와 문화, 인구통계 및 지정학으로 풀어냈다.
더 많은 시간이 지나면 지금의 이 순간을 어떻게 평가하게 될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나의 하나님을 믿고 있고, 저자처럼 아무런 종교없이 그들을 바라볼 수는 없다. 대검으로 아이의 사지가 찢기는 것을 읽으면서, 아니 우리사회의 성직자라는 분들이 행하는 말도안되는 일들을 보면서도 여전히 나는 나의 하나님을 믿는다. 잘못을 종교가, 신이 아닌 사람들이 만들어 내는 것이니까 말이다.
그리고 그녀가 이야기하고 있듯, '구원과 저주', '선과 악', '우리와 그들'이라는 이분법적 논리를 초월하고 있는 , 신의 도움으로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갈지를 알고 있는 사람들을 통해서 나의 하나님이 주시는 그것을 믿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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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는 공산주의냐,민주주의냐 등의 이념보다는 크든 작든 종교,부족,자원전쟁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이는 국가 대 국가,부족과 부족이 각자의 입장과 자존,위력을 내세워 치열한 내전으로 이어지며 애꿎은 군중들만 희생양이 되고 만다.그것은 19세기 서양제국주의가 맹위를 떨치면서 그 제국의 영향을 받은 세력들이 새로운 세력에 대항하는 경우도 있고 종교를 빌미로 석유라는 자원 차지하기 형태를 띠는 경우도 있다.당연히 정치.군사적으로 우위에 있는 국가가 약소국에겐 위협의 되기도 하며 약소국은 앉아서 보고만 있지 않는다.일종의 종교라는 힘을 빌어 국가간 전쟁을 하기도 하며 때로는 9.11테러와 같이 보복성 위협을 가하기도 한다.
저자 엘리자 그리즈월드는 위도 10도에 있는 국가들의 종교,자원,역사,부족 문제 등을 르포형식으로 전해 주고 있다.아프리카의 수단,나이지리아,소말리아를 비롯하여 동남아시아의 인도네시아,말레이시아,필리핀 남부 등을 어렵게 발을 내디디면서 그들이 안고 있는 문제,상황 등을 그 나라의 역사와 함께 현재의 상황까지 구체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위도 10도의 나라들은 대부분이 기후가 고온 다습하며 종교는 무슬림(이슬람교)와 기독교가 혼재하고 있다.
미개국을 개발하고 통치하기 위한 명분으로 19세기 영국 등은 수단,에디오피아 등에 침입하면서 기존의 부족과 이슬람 세력과의 갈등과 반목이 커지면서 국지전과 대량 학살 등이 이어지게 된다.동부 아프리카 국가들은 가난과 헐벗음으로부터 구제해 준다는 명목은 온데 간데 없이 일반인의 삶은 더욱 도탄지고가 되고 희생이 되며 그들이 갖고 있는 부존자원을 마구 침탈해 간다.또한 동남 아시아의 경우는 본래 인도에서 전해져 온 무슬림 인구가 대부분이다 보니 미국 등 서양에서 온 제국주의 및 종기독교 전파자들은 이방인으로 보일 수 밖에 없다.그들의 정신적 지주인 무슬림이 기독교에 모든 것을 빼앗긴다는 것은 전통과 자존의 문제로 봤을 때 결코 용납할 수가 없는 문제이다.
위도 10도의 나라들은 대부분 1940년대 후반 제국으로부터 해방이 되면서 종교의 자유가 인정되고 있지만 그 근본은 이슬람교이다.물론 이슬람교는 수니파니 시아파니 하면서 파벌로 인해 또 하나의 갈등과 반목의 불씨가 있으며 언제 터질지 모르는 내전의 공포로 그들의 삶은 온전치가 못하다는 생각이 든다.예를 들어 필리핀의 경우에는 남부 무슬림과 북부 기독교 세력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남부의 경우는 습지와 부존자원이 많고 무슬림이 우위를 점하고 있는데 그들의 전통과 문화,주체를 상실하지 않으려 일종의 반정부 세력을 키워 아직도 내전에 시달리고 있다.
종교는 신성하다고 생각한다.자신의 취향에 맞게 정신적 지주를 갖고 현실과 내세를 위해 기도하면서 맑은 영혼을 유지하는 것이 원칙일텐데 현실은 정반대로 가고 있다.종교가 정치세력이 되고 정치세력은 이를 빌미로 부족한 자원을 빼앗기 위해 교묘한 술책을 쓴다.비근한 예가 미국과 이라크 전쟁이었다.현대에 있어 겉으론 종교 전쟁으로 보여지지만 그 이면에는 자국의 부족한 자원을 노리는 꼼수가 짙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또한 조상대대로 정신적으로 물려 받은 종교 정신을 봉사라는 종교의 사탕발림으로 기존 종교인을 개종시키려 한다든지 그 종교 세력이 국체에 어긋나는 것으로 보이게 하여 반군,반정부 세력이 커지는 것도 국가 지도자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위도 10도의 나라들의 기본적 정신적 스승은 무슬림이다.그들의 실체와 이념을 존중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국익과 정치적 권력을 앞세워 약소국의 실체와 이념을 짓밟고 갈등과 반목이 있는 것이 냉엄한 현실이지만 과연 진정한 종교의 자유란 무엇이고 정치의 본질은 어디에 있는지를 곰곰히 생각해 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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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도를 기준으로 북위 38도를 지나는 한반도의 중앙을 가로지르는 이 경계선은 단순히 군사작전상의 업무분담을 위해 순전히 타의에 의하여 일시적인 분계선으로 지정되었으나, 남북 분단의 정치적, 이념적 경계선으로 바뀜으로써 우리 민족에게는 헤아릴 수 없는 민족적 비극과 고통을 안겨 준 한 많은 경계선이다. 아직도 우리민족은 이 한계선을 기준으로 남과 북으로 나뉜 채 동족상잔의 아픔을 안고 살고 있다. 우리와는 성격이 다르지만 신의 이름으로 서로를 죽고 죽이는 일들이 적도에서 북위 10도인에 이르는 지역에서 지금도 여전히 벌어지고 있다. 기독교와 이슬람교 세력의 충돌이 빈번히 일어나는 그 곳에 전 세계의 13억 이슬람교 신도 중 절반이, 20억 기독교인 중 60퍼센트가 살고 있다. 그러니 생각해 보면 이들 기독교와 이슬람교 세력의 대결은 불 보듯 뻔한 일 이며 이는, 즉 ‘21세기 십자군 전쟁’이라고 할 만하다.
저자인 엘리자 그리즈월드는 뉴 아메리카 재단의 선임 연구원으로, 7년 동안 기독교와 이슬람교, 두 종교가 충돌하고 있는 최전방 지역을 직접 취재하며 목격한 사실들을 바탕으로 종교의 이름하에 벌어지고 있는 끔찍한 일들을 냉정한 시각으로 바라보고 이 문명의 충돌을 분석한다. 저자는 비록 미국의 유명한 성공회 대주교의 딸이지만 기독교나 이슬람교 어느 한쪽으로 치우침 없이 중립적인 자세를 취한다. 그녀가 전장을 방불케 하는 사선의 현장을 넘나들며 직접 취재 하였으며, 저자가 인터뷰한 몇몇 주요 인사들을 만나기 위해서는 절대적인 인내와 끈기가 필요함은 물론이고 목숨의 위험을 감수해야만 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고 한다. 그런고로 인터뷰 대상 또한 우리가 알만한 거물급 종교 인사들이나 테러 지도자들도 포함되었으며 저자는 그들의 목소리를 왜곡됨 없이 그대로 전달하고자 노력하였다. 진실성이 돋보이는 저자의 글을 읽다보면 기자로서의 사명감과 인간에 대한 따뜻한 애정 어린 시선이 묻어남을 느낄 수 있다.
종교 분쟁의 이면을 깊숙이 들여다보면 영토와 수자원, 석유 및 기타 자원을 둘러싼 갈등 등이 얽히고설켜 복잡한 양상을 나타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실상 먹고 사는 문제가 더 시급한 그들에게 끊임없이 그들의 신앙을 강요당하고 있지만 현지 주민들이 믿는 신은 그가 살고 있는 지역을 둘러싼 복잡한 요인들에 의해 결정된다.
즉, 위도 10도에서의 신앙은 지리적 요인과 역사와 무관하지 않다. 아프리카에서 아랍세력이 이집트를 경유하여 남쪽으로 내려오다 북위 10도 부근에서 더 이상 남진을 할 수 없게 되었으며, 유목생활을 하던 무슬림 또한 사막화에 밀려 남진하던 중 수단의 늪지대 부근에서 수면병 등에 의해 더 이상의 남진을 포기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무슬림과 기독교인으로 살아가던 그들에게 신의 이름을 등에 업고 물질적인 보상이나 의료, 교육들 등의 선심성 선물 공세를 앞세운 현지인들의 개종을 지상 최대의 과업으로 삼은 종교지도자들이나 선교사들에 의한 구원사업은 이슬람과의 갈등을 자초하였으며 2차 대전 후 신생독립국이 된 나라들은 각기 이슬람 아래 서로 뭉쳐 서구세력과 기독교 세력에 맞서 싸우게 되었다. 그런가하면 민족국가로 편입되기를 거부하고 전통적인 삶의 방식대로 살아가기를 원하는 소수민족들도 있어 그야말로 종교의 갈등이 끊이질 않는 곳이 되었다. 하지만 이곳 주민들에게 종교는 삶 자체이다. 저자는 우리가 표면에 드러나는 종교’라는 요인에만 집중하면 이 끔찍한 분쟁의 진짜 이유를 놓치게 된다고 말한다.
나이지리아에서는 기독교인들에 의해 칼로 난자당한 후 팔 다리를 불에 태워진 아홉 살짜리 무슬림 소년의 시체가 발견되었고 인도네시아에서는 이슬람 무장 세력에 의해 10대 기독교소녀들의 목이 잘린 채 죽었으며 그 중 한 소녀의 머리는 검은 비닐 봉투에 담겨 교회 계단에 놓여졌다. 수단에서는 교회를 가려고 아이의 다리를 ‘예수처럼 당해 보라’며 판자에 못 박은 끔찍한 일들이 벌어지기도 했다.불과 몇 달 전에는 노르웨이에서 청소년들에게 총을 난사해서 70명 이상을 죽인 일이 유럽에서 ‘이슬람 세력’을 몰아내기 위해 저질렀다. 이처럼 ‘신의 이름으로’저지러진 살인이 과연 용서 받을 수 있는 행위인지 의문이 아닐 수 없다. 과연 누구를 위한 전쟁이며 무엇을 위해 사람을 죽이는 일도 서슴지 않는단 말인가.
전 세계를 뒤덮고 있는 종교 분쟁의 실태와 원인을 다룬 책들을 읽어 보았지만 이 책만큼 가슴에 와닿는 책도 없었다. 아마도 미국인임에도 불구하고 시종일관 객관적이고 공정한 태도를 유지하며 종교가 폭력을 부추키고 있다는 사실 뿐아니라 미국의 실체를 폭로하고 분쟁 지역 사람들의 ‘삶 자체’ 속으로 뛰어들어 취재한 ‘사실’들을 기록한 책이기 때문일 것이다. 진실은 늘 사람을 감동시키기 마련이다. 오늘날 세계가 직면하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들을 파헤치고 종교, 이념 등에 가려진 이기적인 모습을 과감없이 보여준 저자의 진실된 글을 통해 인간의 욕망과 권력에 종교가 어떻게 교묘하게 이용되고 있으며, 맹목적인 믿음이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낳게 되는지 알 수 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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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저자가 북위 10도 근처에 위치하는 아프리카 3개국과 동남아시아 3개국을 수차례 탐방하고 현지인들과 인터뷰를 한 뒤에 쓴 책이다.[i] 저자는 왜 북위 10도에 주목했는가? 아프리카 대륙의 경우에는 아랍세력이 이집트를 경유해 남진하다가 막힌 곳이 북위 10도 부근이다. 전통적으로 유목민 생활을 하던 무슬림들은 아프리카에서 사막화에 떠밀려 계속해서 남진해갔다. 그러나 예컨대 수단의 늪지대는 수면병 등을 유발했기 때문에 넘어서기 힘든 장애물이었다. 늪지대 남쪽에는 기독교 정주민들이 살았다. 아프리카에서는 유목민의 종교와 정주민의 종교가 사막과 농지의 경계에서 충돌하는 형국이다. 사막화의 진전에는 물론 자연파괴에 따른 기후 변화도 한몫한다. 동남아시아 3개국의 경우는 근현대 민족국가의 형성(저자는 이런 표현은 쓰지 않지만)과 국제적 개입이 종교갈등을 촉진시켰다. 아프리카와 동남아시아 북위 10도 근처에서는 종교갈등이 서방세계에서보다 더욱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다. 이 책의 한글판 부제는 “종교가 전쟁이 되는 곳”이다. 띠지의 소개 문구는 좀더 무겁다. “신의 이름으로 살해되는 사람들! ‘문명의 충돌’은 이미 시작되었다”. 그러나 적어도 내가 이 책에 등장한 인물과 사건들을 통해 받은 인상은 한마디로 ‘삶으로서의 종교’이다. 아니, 이것도 너무 거창하다. 말하자면 그들은 각자 무슬림으로, 기독교인으로 그저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 북위 10도 근처에는 삶의 기회를 찾아 남하하려는 이슬람 유목민과 이를 저지하려는 기독교 정주민이 있고, 정부의 무능력 때문에 종교로부터 정신적, 물질적 지원을 구하는 주민들이 있고, 자신의 종교만이 내세의 구원뿐 아니라 현세에서의 구원도 보장할 수 있다고 믿으며 열심히 구제하고 전도하는 종교인들이 있고, 2차 대전 후 신생독립국의 자치를 확보하기 위해서 이슬람주의로 뭉쳐 싸우는 지역민들이 있고, 민족국가로 편입되기를 거부하고 전통적인 삶의 방식대로 살아가기 위해 분투하는 소수민족이 있고, 서방세계에서 동성애자를 주교로 임명한 데 혀를 차는 독실한 기독교인이 있는가 하면, 갖은 회유와 옥고에도 아랑곳않고 지하드를 계속하겠다고 결의를 다지는 무슬림 청년도 있다. 물론 우리가 ‘종교전쟁’ 하면 의례 떠올릴 만한 근본주의 집단의 지도자들도 등장한다. 이곳에서의 종교갈등은 매스컴에 보도되는 ‘뉴스거리’ 따위가 아니라 사람들의 삶 자체이다. 사망자 수만으로는 표현될 수 없는 그들만의 절절한 사연이 있다. 1990년대 초 대학가에 몰래 유통되어 신입생들을 위한 ‘의식화’ 교재로 쓰였던 책 중에 황석영 선생이 북한을 다녀오고 나서 비합법적으로 펴낸 소책자인 ‘사람이 살고 있었네’가 있었다. 내가 <위도 10도>를 읽으면서 가장 먼저 생각난 것이 20년 전 읽었던 그 책의 제목이었으니, 그 당시 일반 대학생들이 북한에 대해 무지했던 것만큼이나 지금의 나는 아프리카와 동남아시아의 종교에 대해서 무지한 셈이다. 종교갈등을 다룬 많은 책들 중에서도 <위도 10도>는 도드라진다. 예컨대 이전에 읽었던 <벼랑 위에 선 미국>[ii]도 <위도 10>도와 마찬가지로 이슬람과 기독교에 대한 해박한 역사적, 정치적, 문화적 배경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런데 <벼랑에 선 미국>이 미국 보수주의자의 반이슬람 시각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것과는 정반대의 신선한 충격을 <위도 10도>에서 받을 수 있다. 두 책은 내용뿐 아니라 방법론에서도 크게 다르다. <벼랑 위에 서 미국>이 테러리스트를 주로 본다면, <위도 10도>는 일반인들을 주로 본다. 관점도 정반대이다. 예컨대 수단의 하르툼은 두 책에서 각기 다른 사건의 배경으로 등장하는데, <벼랑 위에 선 미국>이 미국에서 하르툼 주민들을 본다면 <위도 10도>는 하루툼 주민들이 미국을 본다. 저자는 비록 미국의 유명한 성공회 대주교의 딸이지만 이 책에서 기독교나 이슬람교 어느 한쪽을 편들 지 않는다. 오히려 그녀는 개인적으로는 기독교에 대해 회의적인 태도를 지니고 있으며, 자신의 목소리가 아니라 인터뷰 대상의 목소리를 전달하는 데 주력한다. 따라서 책이 전하는 메시지에는 신랄함은 없는 대신 진실성이 있다. 인터뷰로 전할 수 없는 배경지식은 저자가 따로 덧붙여주어 독자의 이해를 돕는다. 이 책의 강점은 단연 저자가 발로 뛰면서 얻은 인터뷰들에 있다. 몇몇 주요인사들을 인터뷰하고 나머지는 신문에서 볼 수 있는 기사들을 짜깁기해서 펴낸 그런 부류의 책이 아니다.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과 한 인터뷰와 그에 대한 취재기로 채워져 있는 이 책은 기행문이자 역사서이자 르뽀로 다양하게 읽힐 수 있다. 번역도 꽤 잘 됐다. 다만 다소 낯선 번역방식이 눈에 띈다. 이 책에서는 God을 일관되게 ‘하느님’이라 번역하고 있는데, 천주교나 성공회에서는 ‘하느님’이라고 하지만 개신교에서는 ‘하나님’이라고 한다. 간접인용문에서 ‘하느님’이라고 번역했다면 역자의 신념(?) 때문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개신교 신자나 목사의 직접 인용문에서 God을 ‘하느님’이라고 번역한 것은 오역이라고 할 수 있다.[iii] 마지막으로 덧붙이자면, 번역어 뒤에 영어 원어를 같이 표기한 경우가 지나치게 많다. 어떨 때는 책을 펼쳐 놓으면 빨간색으로 병기된 원어가 두 페이지에 열댓 개나 보여서 눈이 피로할 정도다. 번역서에 원어를 병기하는 경우는 1) 고유명사일 때, 2) 그 용어가 개념적으로 중요해서 독자들이 원어를 알아두는 게 좋다고 생각될 때, 3) 한글 표기만으로는 이해가 쉽지 않을 때, 4) 번역자가 번역에 확신이 없어서 열린 번역으로 남겨 놓고 싶을 때 등이다. 4)의 경우는 말하자면 ‘오픈 소스’ 운동과도 비슷하게 원문을 공개함으로써 독자에게 해석과 판단을 맡기는 셈이다. 그러나 달리 보면 역자가 번역에 자신이 없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 책에서는 4)의 경우가 종종 있어서 번역의 완결성이 떨어지는 듯한 느낌을 준다. 역자와 편집부의 상의를 거친 후 꼭 필요한 경우를 제외하고 병기한 원어를 과감하게 빼버리는 것이 오히려 가독성을 높일 것 같다.[iv] [i] 링크된 지도를 살펴보면 6개국이 어디쯤 위치하는지 확인할 수 있다. http://mappery.com/maps/World-Map-15.gif [ii][ii] 마크 스타인 저, 현승희 역, 2009, 벼랑 위에 선 미국, 인간사랑 [iii] 한글맞춤법 제28항에 의거해서 ‘하느님’이라고 번역했다고 주장할 수도 있겠으나, 종교적 차이를 고려하지 않은 이러한 조항 또한 추후에라도 수정해야 할 듯하다. [iv] 직접 인용문의 번역방식도 지적하고 싶다. 물론 이것은 이 번역가만의 문제는 아니다. 대체로 이런 방식으로 번역하는 걸로 안다. 예컨대 영어에서 직접 인용문은 전형적으로 다음과 같은 형태를 띈다. “I am a boy,” said Tom. “You are a girl.” 이 책에서는 이런 문장을 번역할 때 다음과 같이 항상 영어 문장 어순 그대로 번역했다. “나는 소년이다.”톰이 말했다. “너는 소녀다.” 그런데 내 생각에는 그보다는 “나는 소년이다. 너는 소녀다.”라고 톰이 말했다. 혹은 톰은 “나는 소년이다. 너는 소녀다.”라고 말했다, 라고 번역하는 게 우리말 어법에 더 자연스럽고 매끄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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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가 구원이 되지 못하는 곳 위도 10도 우리나라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 곳은 어디에나 있다. 우리가 기억하는 한 우리에게 종교를 선택하고 믿는 것은 개인 신념의 문제이고 자신의 밖에서 겪게 되는 문제는 가족이나 지인들에게 받는 비난이나 따돌림 정도이다. 그러나 이 지구상에는 선택한 종교에 따라 그들의 삶이 달라지고 심지어 삶과 죽음의 갈림길이 되는 곳이 존재한다.
어쩌면 우리는 우리의 환경이 좋았던 탓에(우리의 할아버지 대와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대는 나름 고난의 시간이었을지 모르지만...) 생존과 죽음에 대해 다소 낭만(?)적으로 보는 것 같다. 이런 시각은 신념 때문에 당하는 고난이나 죽음을 막연히 미화하는 경향을 볼 수 있다. 우리나라는 종교적 신념을 이유로 무엇인가를 거부했다가 죽임을 당하는 경우나 다른 종교인끼리 이단으로 몰아 죽이는 일은 오래 전의 일이다. 물론 일부 종교인들이 종교적인 신념을 이유로 군대에 복무하지 않아 사회적인 불이익을 당하는 경우는 남아있지만 다른 나라에서 이루어지는 문제들에 비할 바가 아니다. 이렇게 안정된 상태이다 보니 타국의 상황을 제3자의 입장에서 극화하여 보는 경향을 보인다.
이슬람이 문제이다.
이슬람, 기독교 간의 갈등으로 대표되는 종교간의 문제들은 신념의 문제 못지 않게 현실적인 문제 때문에 발생하는 경우도 많다. 특히 중세 십자군 전쟁으로 두 종교가 표면적으로 종교전쟁을 시작(사실 이 충돌도 세속적 문제에 기인한다고 보고 있다.) 한 이후 이 두 세력은 서로의 확장에 대해 매우 민감해진다.
두 세력간의 분쟁이 본격화 된 것은 소위 제국주의의 시대로 불리기도 하는 17세기부터 라고 본다. 유럽의 제국주의 세력은 세계 각처에 식민지를 건설하면서 아프리카와 중동에도 손을 데는데 특히 모든 면에서 취약했던 아프리카에서는 문제는 심각했고 그 후유증도 여전하다. 에티오피아 같은 전통적인 기독교 국가를 제외하고는 종교가 각 지역 부족의 특성을 대표하리만큼 수 많은 종교특성이 존재했고 종교가 바로 그들일 만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반면 국가의 통제와 보호에서 소외되어 생존문제에 취약 하였던 그들에게 종교와 함께 제공되는 교육, 의료, 기본생활 지원 등은 매우 절실했다. 이슬람 노예 사냥 군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서방 기독교 선교사의 그늘이 필요했고 지금은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이슬람이 필요한 것이다. 애초부터 그들의 본질은 그 들이 믿는 여러 신들과 밀접하여 그들이 진정으로 기독교나 이슬람 신들을 알고자 하기 보다는 그 날개 아래 보호가 필요했던 것이다. 믿는 다고 하고 기도 자리나 예배 자리에 나가기만 하면 받을 수 있는 선물들이 절실했던 것이다.
이처럼 세속적인 도움을 얻으려는 잠재적인 새(?) 신자들의 욕구와 상대 종교, 심지어 같은 종교내의 다른 종파들과의 경쟁 때문에 어떤 방법으로든 신자 수를 늘려 상대종교, 상대종파와의 숫자 경쟁에서 우위를 차지 하려는 참말로 세속적인 경쟁에서 상대 부족. 상대 종교인을 죽이는 것을 성전으로 미화하고 자신들의 개 죽음을 순교로 치장하고 있다.
지구상에서 소위 문명화 되었다는 지역에서는 아무리 진보적인 종교지도자라도 상대 종교를 원색적으로 비판하지 못한다. 이런 사례는 요 몇 년간 일어났다. 이슬람을 비하한다는 이유로 이슬람 세력으로부터 처형의 위협을 당한 복음주의 목사는 자국민(미국)들에게도 도를 넘지 말라는 지적을 받고 있다. 지구상의 많은 부분에서는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처참하게 살해를 당하거나 상대 교인을 죽인 후 자랑스러워 하지 못한다. 보편적인 인간의 상식에 반하는 반인륜적 파렴치한이나 자신의 종교에 과도하게 빠져 현명한 정신을 잃은 광신자로 불리는 경우가 훨씬 많을 것이다. 이런 상황은 각 종교를 경전의 문자대로 해석하거나 지도자의 말을 문자 그대로 따르는 교조적인 시선에서 보면 사악한 세력에 물든 세상으로 보인다는 점에서 더욱 심각하다. 대부분의 유일신을 모시는 종교에 따르면 다른 종교인과의 평화로운 공존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현대를 살아가는 인류에게 있어 종교는 많은 세상의 일 중에 하나가 되었고 그 정도의 차이일 뿐이지 늘 세속과 성스러움 속에서 오락가락하고 있다. 욕망과 성스러움 속을 저울질 하고 그 저울질 속에서 최선(?)을 찾으면 산다. 그러니 아무리 성전을 외친다 해도 그 동인에 세속적인 욕심이 전혀 개입이 안되었다고 외칠 수 있을까?
어떤 것이 더 가치 있는가 이 책의 저자는 공존에 대해 큰 비중을 두고 마무리를 하고 있다. 하지만 공존이 과연 인류에게 있어서 최선의 가치인지 아니면 그것 역시 허상인지 필자의 입장에서는 여전히 의심스런 부분이다. 누구나 자기의 신념에 따라 살 수 있다. 그것이 세속의 그 어떤 것(그것이 기본적인 생존의 위한 욕구라고 해도 종교의 순수성에서 보면 역시 욕심이라는 필자의 생각이다.) 아무리 핏대를 세워서 자신이 믿는 신의 이름을 외치며 나아가도 세상의 유혹은 너무나 크다. 산속 암자에서 면벽 수도를 하는 선승도 공양을 위해 마을에 내려와야 할 것이다. 세상의 종교는 선교(대부분의 인류의 구원을 위한)을 위해 반드시 세속 인들과 함께 있어야 하고 효율성을 위해 점점 세속화 된다. 여벌의 옷이나 먹을 물 조차 지니지 말라고 했던 예수의 가르침을 따라 빈 몸으로 전도를 다녔던 예수의 제자들에게 효율적인 선교를 위해 큰 성전이 필요하고 새로운 장비를 구입해야 하는 현대의 교회들이 이해가 될까? 박해를 피해 피신해 다니면서도 형제에 대한 용서를 말하던 모하메드가 지하드 라면서 불특정 대상으로 자행되는 학살에 대해 뭐라 할까?
필자는 기독교 신자이기에 조심스런 부분이 있다. 대한민국에서 기독교 신자라 함은 종교문제에 대해서 뭐라 꼬집어 지적 질 할 수 없는 어려움이 있다. 인류의 보편적인 행복을 위해 공존을 생각하는 이 책을 보면서 필자는 공존은 매우 요원한 일이고 과연 공존이 최선의 방법일까 하는 이렇다 할 대안도 없는 의구심만 든다.
마치 이슬람과 기독교 양대 세력의 이념 대립으로 인한 분쟁이라고 세뇌 받아온 것들의 실상이 자원 분쟁이라는 사실이 속속 들어나고 이 책에서도 저자가 알아낸 사실도 이와 다르지 않다. 이런 형국에서 서로에 대한 이해와 배려가 문제의 해결에 도움이 될 지 의심스럽다. 사실 상 공존을 위해 무엇부터 시작해야 할 지 알 수 없는 판이라고 본다. 필자가 앞의 ‘결국 세속적인 문제이다‘ 라는 단락에서 잠깐 언급한 것처럼 눈에 보이는 공존이 사실상 이루어지고 있는 지역들 처럼 ‘위도 10’의 낙후된 지역에 변화가 일어난다면 평화에 가까운 변화가 일어날까? 일어난다고 확정을 한다고 해도 그들의 상황을 우리의 수준(?????)에 이르게 한다는 것은 사실상 꿈 같은 일 아닌가?
저자가 간간이 이야기 했듯이 분쟁은 이슬람과 기독교 간에만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그 본질이 종교적 신념 보다는 탐욕에서 비롯된 것이라 같은 여호와를 신을 믿는 종교들, 또 같은 알라를 믿고 같은 코란을 읽은 이들 사이에도 분쟁이 소지가 충분하다. 간간이 폭발하기는 하지만 잠잠히 수면 아래에 축적된 잠재된 위험성은 아직 알려지지 않았으니 두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현대를 살아가는 인류에게 있어 종교는 많은 세상의 일 중에 하나가 되었고 그 정도의 차이일 뿐이지 늘 세속과 성스러움 속에서 오락가락하고 있다. 욕망과 성스러움 속을 저울질 하고 그 저울질 속에서 최선(?)을 찾으면 산다. 그러니 아무리 성전을 외친다 해도 그 동인에 세속적인 욕심이 전혀 개입이 안되었다고 외칠 수 있을까?
사족 – 그냥 지껄여 보는
유대교와 기독교는 같은 본류를 가진다. 하지만 유대교와 기독교는 오래 전에 갈렸다. 유대교에서 바라보는 예수는 선지자 중에 하나이고 기독교에 대한 반감 때문에 예수는 선지자 이긴 하지만 존경의 대상도 아니다. 예수를 인간으로 보는 시선은 이슬람교와 같다. 하지만 그것이 같다고 해서 그 둘 사이에 어떤 연계성을 찾기는 매우 어려워 보인다. 모하메드가 예수의 삶과 가르침을 공부했던 것은 사실 이었던 것 같다. 또 당시 한참 세력을 확장하던 기독교에 대해서는 호감과 우려감이 교체 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의 가족을 기독교 중에 하나였던 콥트교 국가인 에티오피아에 망명 시키고 아프리카 기독교인들을 해치지 말라고 전한 것으로 보면 이 점에 대해 고민해 볼 만하다.
종교의 순수성에 의심할 여지가 있으니 그것에서 인류의 구원이나 행복을 찾으려는 노력이 헛되다고 말하거나 인류에게는 희망이 없다거나 신 없이 살아가는 것이 인간의 숙명이라며 신념 없이 살아가는 자신을 정당화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현재의 종교라는 이름을 일어나는 반 인류적인 테러나 분쟁은 분명히 사라져야 할 죄악들이다. 또 그것이 종교의 이름을 자행된다는 점에서 종교인들의 각성이 우선되어야 한다. 그러나 비 종교인들이 더욱 주목하여야 하는 점은 바로 그 동인이 바로 세속적인 욕심들에서 기인한다는 것이다. 광적인 집착으로 종교가 변질될 가능성이 크지만 지구상의 어느 누구도 몇 가지 문제로 종교에 함부로 돌을 던질 권리는 없다. 우리가 보편적으로 인지 하고 있듯이 종교가 비 종교보다 더 인류애 적이고 보편 타당한 진리를 따르고 종교가 있어 인류의 삶이 윤택해진 것을 부인 할 수 없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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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 서평은 출판사에서 제공받은 도서를 읽고 작성되었습니다.
해당 서평은 출판사에서 제공받은 도서를 읽고 작성되었습니다.
위도10도. 적도에서 북으로 약 1126킬로미터까지 기독교와 이슬람교도들이 충돌이 빈번하게 일어나는 곳으로 이 곳에는 전 세계의 13억 무슬림중 절반이 20억 기독교인들중 60퍼센트가 산다고 한다. 그래서 지구상의 그 어느곳보다 많은 분쟁이 일어나는 지역으로 알려져 있다.
저자는 금발의 미국 저널리스트로 이슬람교를 믿는 사람들에게는 결코 호의적이지 않을 수 밖에 없는 미국인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 7년간 각종 납치와 암살, 폭탄 테러 등이 벌어지고 있는 적도와 북위10도 사이에 위치한 나이지리아, 수단, 소말리아,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및 필리핀을 직접 취재하면서 관찰한 바를 집필하였다고 한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종교 분쟁 지역은 인도와 스리랑카, 수단, 인도네시아, 팔레스타인 등에서 벌어지고 있는데 이중 인도와 스리랑카를 제외하고 나이지리아,수단, 소말리아,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필리핀 등 종교의 이름으로 자행되고 있는 폭력행위에 대하여 폭력뒤에 숨겨져 있는 현실에 대하여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중동이나 미국이 아닌 위도 10도에 위치한 아프리카와 아시아 국가들의 분쟁의 실상에 대하여 다루어 그동안 몰랐던 것에 대하여 새롭게 알게 된 점이 좋았다. 실제로 본인이 가보았던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가 그런 현실이 있었다는 것, 그동안 막연히 알고 있었던 그 나라들에서 그토록 첨예하고 참혹한 문명의 격전이 벌어지고 있는 줄을 꿈에도 몰랐다.
1991년 중동 평화회의가 이후 전 세계적으로 다시 곳곳에서 폭탄테러와 총격전이 일어나고 있다. 인류는 먼 옛날 부터 분쟁이 있어왔고 약육강식처럼 약한자는 강자에게 먹히기는 것이고 종교는 사상으로서 분쟁의 이유 중 하나에 속한다. 남의 것을 갈취하고 싶어 구실을 삼고 트집을 잡으며 소위 텃세를 부리듯이 하는 경우도 있다.
종교라는 이름으로 벌어지고 있는 이러한 전쟁 들도 결국은 남의 것을 갈취하고 싶어 구실을 삼고 트집을 잡으며 소위 텃세를 부리는 것과 무엇이 다를까.
이 책을 통하여 이러한 지역들에서 벌어지는 분쟁들이 반드시 근본주의 종교나 외세의 개입 등의 외부적 요인으로만 설명되는 것이 아니라 걸음마 단계의 민주주의, 비윤리적이고 무책임한 정부, 부도덕한 자본 세력 등이 이 지역들의 고질적 갈등을 심화시키고 있으며 몇몇 지배자는 부와 행복을 누리지만 시민들은 고통을 받고 있다는 주장에 공감하면서 보다 세계의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귀를 기울이겠다는 생각을 갖게 해준 책이었다.
지금 이 땅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부 종교의 광기와 미숙한 정치 체게, 부의 편중 등으로 일어나는 갈등과 모순이 이 책에서 소개하는 위도 10도 지역내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실과 크게 다를바 없음이 참 씁쓸하게 느껴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