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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스토이와 더불어 우리에게 대중적으로 잘 알려진 러시아의 대문호라 한다면 도스토옙스키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그의 많은 작품들이 이미 우리에게도 소개되었기에 그에 대하여 꽤 친숙한 느낌을 갖게 된 터라 그를 주인공으로 한 J. M. 쿳시의 [페테르부르크의 대가]에 대한 관심은 자연스러운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이야기의 시작이 1869년 러시아의 페테르부르크에서 사망한 의붓아들의 소식을 듣고 귀국한다는 설정이니 흥미를 갖지 않을 수 없다. 러시아의 대문호로 알려져 있는 도스토옙스키가 쿳시에 의하여 새롭게, 그것도 초반부에는 미스터리 장르의 주인공처럼 아들의 죽음에 대한 비밀을 파헤치는 역할로 새롭게 그려지고 있으니 그럴만도 하다. 쿳시에 의하여 그려지는 도스토옙스키의 모습은 과연 어떤 것일까?
(이 리뷰는 예스24 리뷰어클럽을 통해 제작사로부터 상품을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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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그런 일이 일어나는 순간에도, 자신이 이 대목을 잊지 않고 있다가
어느 날 작품에 써먹으리라는 걸 알고 있다. 수치심이 그를 훑고 지나간다. 그러나 그것은 피상적이고 일시적인 느낌일 뿐이다. 처음에는 글에서, 지금은 그의 인생에서, 수치심이 그 힘을 잃어버리고 도덕관념도 없이
텅 빈, 끝없이 수축하는 수동성이 그 자리를 차지해버린 것 같다.
1869년 러시아 페테르부르크, 도스토옙스키는
의붓 아들 파벨이 자살했다는 소식을 듣고, 아들이 묵던 하숙집을 찾아 온다. 파벨이 사용하던 소지품도 그대로 남아 있는 방에서 희미하게 나는 아들의 냄새를 맡으며 도스토옙스키는 슬픔에
잠긴다. 그는 아들의 하얀 양복을 무릎 위에 놓고 생각에 잠겨, 아직
그곳에서 떠나지 않고 있을 영혼을 부르려 한다. 하숙집 주인 여자 안나와 그녀의 딸 마트료나에게 생전의
파벨에 대해서 묻고, 경찰이 가져간 파벨의 물건을 찾으러 경찰서에 간다. 그리고 경찰이 발견한 서류에 의해 아들이 급진적인 혁명 모임에 가담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아들의 동료들로부터 그의 죽음이 타살이라는 얘기를 듣게 되는데, 과연
겨진 음모의 진실은 무엇일까.
쿳시는 아들의 죽음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일련의 일들을 '소설'에 대한 문학론으로 그려내고 있다. 바로 '작가는 글을 쓰기 위해 모든 사람의 삶을 팔고, 영혼을 팔아먹는
존재'라는 것이다. 아들의 죽음으로 슬픔에 잠겨 있는 순간에도, 언젠가 이 순간을 잊지 않고 작품에 써먹으리라는 걸 스스로 느낀다는 걸 극중 도스토옙스키는 수치스럽다고 느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할 수만 있다면, 글쓰기를 위해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을 팔고도 남을 거라는 걸 알고 있다. 그렇게 쿳시는 러시아의 대문호 도스토옙스키와 그의
작품 <악령>을 변주하며 소설 쓰기의 근원적 욕구와
작가의 숙명에 대해 치열하게 사유하고 있다.
나는 내 인생을 팔고 내 주변 사람들의 인생을 판다. 모든 사람을
판다. 야코블레프식으로 인생을 거래한다. 예수가 아니라 유다라고
했던 핀란드 여자의 말은 결국 맞는 말이다. 당신을 팔고, 당신의
딸을 팔고,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을 팔 것이다. 파벨을 산
채로 팔았고, 할 수만 있다면 지금이라도 내 안에 있는 파벨을 팔 것이다.
사실 도스토옙스키의 의붓아들 파벨은 소설에서 그려지는 네차예프 사건과는 아무 관련이 없으며, 자살로 생을 마감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도스토옙스키가 1869년에 페테르부르크에 간 일도 없다. 하지만 이 소설의 배경이
된 1869년은 도스토옙스키가 작가로서 창작의 절정에 이른 시기였고,
그해 ‘네차예프 사건’이 러시아를 휩쓸었고, 이 사건은 도스토옙스키가 <악령>을 집필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도스토옙스키는 아내의
남동생이자 네차예프가 만들었던 비밀결사조직에 속해 있다 살해된 이바노프의 친구에게 사건의 전말을 전해 들었고, 세기의
역작 <악령>이 탄생하게 되었다. 쿳시는 도스토옙스키와 그의 작품 <악령>을 자신만의 스타일로 변주해 <페테르부르크의 대가>라는 새로운 작품을 그렸다.
이상하게도 이 책을 읽는 내내 슬프기도 하고, 씁쓸한 기분도 들었는데, 알고 보니 실제로 쿳시가 아들을 자살로 잃었다고 한다. 극중 죽은
아들에게 가까이 다가가고자 그 흔적들을 쫓는 도스토옙스키의 모습에서, 아들을 잃은 쿳시의 모습이 엿보이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렇게 이 이야기는 실제 역사와 허구의 상상력이 더해져서, 도스토옙스키라는 인물을 주인공으로 설정해야만 했던 이유에 대해 보여준다. 그리고
끊임없이 작가가 어떤 과정을 거쳐 창작을 하게 되는지, 글을 쓰기 위해서라면 그 어떤 행동도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해 사유하고 있다. 아들과 아버지와의 관계, 그리고
창작과 관련된 윤리의 문제에 관한 이야기도 시선을 뗄 수 없을 정도로 흥미로웠지만, 과연 작가가 글을
쓰기 위해서 파우스트처럼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도 되는 것일까에 대한 문제도 너무 매혹적으로 읽히는 작품이었다. 소설이라는
창작 활동, 그리고 작가의 사생활이 미치는 영향, 죽은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슬픔과 도스토옙스키가 세기의 역작을 탄생시키는 과정이 어우러진 이 작품은 존 쿳시라는 작가의 새로운 발견이라 할만큼 너무 훌륭했다. 물론 이미 두 차례의 부커상과 노벨문학상 등으로 최고의 자리에 올라 있는 쿳시이기에, 작품에 대한 평가를 하는 건 의미가 없을 지도 모르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이 작품이 가장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다.
* 이 리뷰는 예스24 리뷰어클럽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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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읽은 <빌리 베스게이트>, <소년이 온다> 그리고 <페테르부르크의 대가>. 배경도 시대도 장소도 다르지만 세 권의 책이 자꾸 겹쳐진다. '글의 힘'에 대한 질문이다. 글에는 어떤 힘이 있기에 긴 시간이 지나고 다른 삶을 살고 있는 이들에게 메시지를 던질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또 하나는 이 세 권 모두 실제 사건이 모티브가 되고 있다는 점에서 사건을 바라보는 작가의 자세에 대해서, 작가는 어떻게 그 사건을 표현해야하는가? 시대를 보는 눈, 그리고 그 시대에서 해야하는 일은 무엇인가? 하는 생각을 계속하는 책들이었다.
<페테르부르크의 대가>는 한 작가에게 두 번 주지 않는다는 관례를 깨고 두 차례나 맨부커 상을 수상했을 정도로 대단한 작가 J.M 쿳시의 작품이다. 대가의 작품속에 또 러시아의 대작가 도스토옙스키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이런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흥미롭고 관심이 가는 작품이다. 작품을 읽는 동안 소설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 들 정도로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초반 부는 자살로 죽은 것으로 추정되는 아들의 죽음을 애통해하는 아버지의 모습이 그려진다. 절절한 부정에 같이 마음이 아려온다.
p. 31. 아들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뒤로, 견고하다고 생각했던 그의 몸밖으로 무엇인가가 빠져나가고 있다. 그는 생각한다. 죽은 건 나야. 나는 죽었지만 내 죽음은 도착하지 않았어.
계속 죽은 아들을 마음 속에서 떠나 보내지 못하고 그의 영혼을 찾아 헤매는 듯한 모습을 보인다. 여기까지는 한 개인의 가족사 이야기 같은 사연이다. 하지만, 자살한 아이의 유품 서류를 받으러 경찰서에 가면서 이야기의 흐름이 달라진다. 아들의 유품 서류를 받으러 왔다며 '이사예프'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는 도스토옙스키다. 친아들이 죽은 것이 아니라 의붓아들이 죽은 것이다. 서류를 간단히 받기 위해 죽은 의붓 아들의 친아버지 이름을 말한 것이었다.
막스모프 고문관과의 대화가 시작되면서 아들 파벨의 죽음은 단순히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이 소설의 배경이 되고 있는 1869년 러시아와 연관이 있음을 알려준다. 더이상 이 소설은 개인의 아픔에 대한 이야기가 아닌 그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에 대한 이야기임을 알려준다.
옮긴이의 말 중 p.363 1869년 네차예프 사건은 도스토옙스키의 <악령>집필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사건이다. 네차예프 사건이란 당시 모스크바의 페트롭스키 대학에 다니던 네차예프가 5인조 비밀결사조직을 만들어 기존 사회질서를 전복하려는 과정에서 그 조직원의 일원이었던 이바노프가 조직에서 빠저나가려 하자, 당국에 밀고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그를 살해한 사건을 가리킨다. 이 사건은 <악령>에서 벌어지는 질풍노도와 같은 인간 드라마에 결정적인 불씨를 제공해준 중요한 사건이었다.
이 소설의 정점은 도스토옙스키와 네차예프의 설전이다.
p.268 (네차예프)"헛소리를 하시는군요. 당신은 코페르니쿠스가 아닙니다." (도스토옙스키)"맞소, 나는 코페르니쿠스가 아니오. 하늘을 보면 우리가 태어났을 때도 우리를 내려다봤고 죽을 때도 우리를 내려다볼 별들만 보일 뿐이오. 그 별들은 우리가 어떻게 변장을 하든, 우리가 숨어 있는 지하실이 얼마나 깊든 그런 것과 상관없이 우리를 내려다 볼 것이오." (네)"나는 숨어 있는 게 아닙니다. 이 도시의 보이지 않는 민중과 나를 만들어낸 조건들에 어우러져 있을뿐입니다. 당신은 그런 조건들을 보지 못할 뿐이지요." (도)"솔직히 말해도 되겠소? 당신 이야기는 말이 안 되는 것이오. 내가 하늘에 있는 선이나 숫자를 볼 수 없을지는 몰라도 눈이 멀지는 않았소." (네)"보지 않으려 하는 자보다 더 눈이 먼 사람은 없습니다! 당신은 지하실에서 굶어 죽어가는 어린아이들을 보았습니다. 하지만 그런 삶의 조건을 결정하는 것은 보지 않으려 합니다. 어떻게 그걸 본다고 말할 수 있죠?"
이 소설은 여러가지로 흥미로웠다. 작가를 꿈꾸는 이들이라면 한 번 쯤 꼭 읽기를 추천한다. 작가로서의 숙명을 느낄 수도 있기에 공감될 것 같다. 시간에 쫓겨서 한 번 밖에 못 읽고 이리 서평을 쓰는 것이 아쉬울 정도로 곧 다시 한 번 읽어보고 싶은 책이다.
* 이
리뷰는 예스24 리뷰어클럽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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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덮고 돌이켜 보면 꽤 많은 이야기거리와 사건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책을 읽을 때는 아무 사건도 없이 다만 두서없는 사유와 관념의 세계에서만 있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실제 인물이었던 도스토예프스키의 시점에서 전개되는 내용이므로 도스토예프스키의 실존적 사유에 근접한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실제 인물의 역사적 동선과 사건들이 정확하게 일치하지는 않으므로 전적으로 인물과 시대, 그리고 역사를 허구적 장치에 차용한 소설임을 알 수 있다. 주요 등장인물인 네차예프 역시 비슷한 시기의 러시아 역사에 실제했던 인물이고 실제 네차예프 사건을 작중 인물의 죽음과 연결시킬 수 있지만, 실제로 도스토예프스키의 아들이 네차예프 사건과 연루된 적도 없고, 도스토예프스키 생전 죽지도 네차예프와 관렌하지도 않았으므로 역사의 재현을 다루는 역사 소설과는 거리가 있다. 오히려 작가 쿳시가 겪은 개인적 불행을 바탕으로 조심스레 예측해본다면, 아마도 도스토예프스키에게서 시대와 이름, 그리고 러시아의 문호로서 당대 그가 처했던 위치, 그가 살았던 격변의 러시아 사회, 도박과 빚 그리고 간질로 점철된 그의 개인적 고통 등을 차용하여, 결국은 자기 자신의 이야기를 했을 거라는 쪽으로 기운다. 내 삶은 글을 쓰기 위해 내가 지불해야 하는 값이오. (322) 그는 몇 번이라도 되풀이한다. 아들이 죽어 방문한 페테르부르크에서 도스토예프스키는 하루하루 일정을 미룬다. 아들을 잃은 부모가 애도 말고 또 어떤 감정을 더 소모할 수 있을까. 대화와 생각들은 두서없고 논리적이지 않다. 의붓 아들이라 하더라도 슬픔의 감정은 이해할 수있으나 때로 그가 하는 말들과 행동은 과잉된 듯한 느낌도 드는데 그러한 감정이 바로 하숙집 주인을 향한 욕망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가 아들의 죽음을 확인한 후에도 제 때 돌아가지 못하고 아들이 묵었던 하숙집에서 아들의 생전 지인들을 만나고 특히 네차예프와 여러 사건들에 연루되는 이유는 거의 끝까지 가서야 욕망의 본질을 드러낸다. ‘나도 값을 지불하고 팝니다.’ 그렇다. 그는 소설가였던 것이다. 그는 스스로의 인생을 팔고, 주변 사람들의 인생을 판다. 마지막에 가서야 밝혀지는 그의 본질적 욕망과 존재의 이유가 그의 독백으로 반복된다. 나는 모든 사람을 판다… 당신을 팔고, 당신의 딸을 팔고,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을 팔 것이다. 파벨을 산 채로 팔았고, 할 수만 있다면 지금이라도 내 안에 있는 파벨을 팔 것이다….명예가 없는 삶, 제한이 없는 배반, 끝이 없는 고백 322 독일의 드레스덴에 살고 있는 도스토예프스키는 어느날 의붓 아들 파벨의 갑작스런 사망 소식을 듣고 페테르부르크에 소환되어 아들이 살았던 하숙집, 그가 묵었던 방에서 지내게 된다.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감정은 도스토예프스키가 한 아이의 아버지로서 죽은 아들에게 느끼는 애도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어느 시대 어느 사회 속에서도 힘들다. 아들의 죽음에 대한 아버지의 비탄은 순간 순간을 비탄에 가두어 힘겹게 만들지만 아들의 흔적을 마주 대할 수록 아들에게 자신의 존재는 사랑과 정겨움과는 거리가 먼 배반과 원망과 증오였음을 알아가면서 더욱 상처받는다. 경찰은 파벨의 죽음을 자살로 여기고 사건을 종결시켰는데 도스토예프스키는 그가 그 격변의 러시아에서 혁명의 소모품으로 어떤 편에서든 의도적으로 희생되었다고 의심하는데 누가 그랬는지는 끝까지 밝혀지지 않는다. 당대 혁명의 급진파 당수였던 네차예프와의 관계와 유품 속에 있던 암살 대상자 명단은 이 소설이 파벨의 죽음과 관련된 미스터리를 푸는 여정임을 어느정도 암시하지만 이야기는 미수터리 자체에 집중하기 보다는 파벨의 죽음을 다루는 주변인들의 심리에 집중한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아들의 유품을 찾기 위해 만연된 관료주의의 끝없는 기다림과 반복적 요구를 인내하면서 경찰과 접촉하는데 당연히 유품에서 수배중인 네차예프와 연루 증거가 발견되면서 유품 회수는 계속 연기되고 짧게 머무르려던 애초 그의 계획은 어긋나 파벨의 하숙집에 계속 머물게 되는데 파벨과 가족처럼 지냈던 하숙집에서 하숙집 딸 마트료나를 통해 파벨의 모습을 쫓는 한편 하숙집 주인인 안나를 향한 욕정에 시달린다. 그러는 동안 거지 행색을 한 사복경찰이 거리에서 자신을 감시하고 있음을 알아차리고 그를 데려다 먹이고 재워주는데 다음 날 살해되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그리고 네차예프와의 만남과 긴 언쟁과 갈등이 시작되는데 그것은 세상을 전복하려는 목적을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는 혁명세력과 거기에 동조하지 않은 기성세력과의 언쟁이다. ‘우리는 과거만 바라보고 있을 수 없습니다. 불길을 댕기려면 그의 죽음을 이용해야 해요.. 그는 당신의 분노를 좋은 일에 쓰라고 권할 것입니다.’(259) 네차예프는 경찰이 쫓는 인물이고 경찰은 파밸과 내차예프와의 연루에 주목하고 있기에 네차예프가 도스토예프스키를 만나는 일은 분명 목숨을 건 위험을 무릅쓰는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계속해서 도스토예프스키의 앞에 나타나고 그를 괴롭히는데 결국 자신이 그의 목적에 이용당하고 있음을 알아차린 때는 이미 그의 계략에 넘어간 후이다. 네차예프가 자신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파벨을 통해 들은 단편적인 지식으로 터무니없는 모함에 불과하지만 놀랍게도 그의 작가로서의 본질을 정확하게 꿰뚫고 있다. 무엇이든 그가 느끼는 것은 글로 작품으로 예술로 소모될 것이라는 거다. 그렇게 비실체적인 것에 관한 글을 쓰지 말고 인민을 위해 인민이 행동하게 될 글을 성명서를 쓰라는 것이다. 집에 가만히 앉아서 억압받는 사람들에 관한 글을 쓰고 돈을 받아 그 돈을 세는 대신, 그들의 삶을 공유할 때가 되지 않았나요? 또 안절부절 못하시는군요. 이 지하실과 아이들을 잊어버리기 전에 빨리 집에 가서 공책에 적어놓고 싶겠죠(259) 관념적 사유가 지배적인 이 책은 읽기가 그닥 재미있지가 않았다. 문체가 짧고 단순했지만 생각의 가닥이 명료하지가 않고 때로는 두 사람의 대화 조차도 맥락이 끊기는 느낌이 들었는데 이는 다분히 도스토예프스키의 불안한 심리를 말해주는 장치일 수도 있겠지만 뭔뜻인지 모르고 읽는 부분이 많다. 한 번 더 읽으면 조금 더 이해가 갈 것 같다. 현재형 시제를 개인적으로 선호하지 않는데 완결되지 않은 시제가 모호한 시적 분위기를 자아내기는 하지만 뭔가 답답한 느낌이 들기도 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한 번 더 읽게 될지는 두고 봐야 알 것 같다. 결론은 작품적으로는 내가 이해하기에 너무 고차원적. * 이 리뷰는 예스24 리뷰어클럽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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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 타기도 어렵다는 맨 부커 상을 무려 두 번이나 수상하고 노벨 문학상까지 받은 존 쿳시. 그의 소설, '페테르부루크의 대가'는 도스토예프스키가 주인공이다. 그러나 실제 도스토예프스키의 삶은 아니다. 여기에 존 쿳시는 아들을 잃어버린 자신의 마음을 도스토예프스키에게 살짝 투영하고 있다. 소설이 시작하면 도스토예프스키가 빚쟁이를 피해 달아났던 드레스덴에서 페테르부르크로 돌아온다. 그의 양아들이 네차예프 주의자에게 본보기로 살해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양아들이 하숙했던 집을 찾아온다. 소설 대부분의 사건은 바로 그 집에서 벌어진다. 30대로 보이는 여주인 안나와 그의 딸 마트료나가 그를 맞는다. 그러면서 친부가 오지 않고 양부가 온 것을 의아해한다. 아들의 살인 사건을 수사하던 경찰도 마찬가지다. 처음엔 그를 양아들 파벨의 친부로 오인한다. 그는 그럴 때마다 꼬박꼬박 자신이 양부라고 정정해준다. 실제 도스토예프스키의 삶에서 양아들은 죽지 않았다. 네차예프 그룹에 의해 살해당한 학생은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네차예프를 직접 만난 일도 없다. 그러나 소설에서는 만나고 토론까지 벌인다. 이 네차예프는 도스토예프스키가 '악령'을 쓰도록 영감을 준 존재다. 그런데 소설에서는 네차예프가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에 영감을 받아 혁명을 일으키려 한다. 일의 선후가 반대다. '완벽주의자' 존 쿳시가 이런 설정을 허투루 할 리 없다. 이것이 소설을 읽으며 가장 먼저 든 의문이었다. 양부의 증명과 거꾸로 된 네차예프와 문학의 관계.
그런데 작가에게 자기가 쓴 소설이란 사실 의붓아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작가가 자신의 소설을 자식에 비유하는 건 흔한 일이다. 그러나 자세히 따져 보면 친부 보다 양부에 가깝다. 친부라는 것은 아들이 아버지에게 전적으로 귀속된다는 걸 뜻한다. 이것은 쉽게 말해 작품의 모든 의미를 작가가 전적으로 주관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현재의 비평은 그러한 작가의 전권을 인정하지 않는다. 아무리 작가가 '나는 이렇게 썼어!'라고 주장해도 비평이 '사실 그건 이렇게 해석되거든!'하고 설득력 있게 주장한다면 그 역시 의미 있는 해석으로 존중받는다. 때에 따라선 작가의 진의 보다 더 권위 있는 해석이 되기도 한다. 자신의 손에서 나왔지만 온전히 제 자식이라고 주장할 수 없는, 어쩌면 저자가 작품이 권리로 허락받는 건 자신의 이름으로 나오는 것밖에 없는, 그러한 느슨한 관계이기에 비유해 보자면 '양부'가 아닐까 하는 생각에 미치는 것이다. 왜 이런 얘기를 시시콜콜 하느냐고? 내겐 '페테르부르크의 대가'가 글쓰기에 대한 어떤 비유 혹은 작가의 절망이 흠뻑 배인 작품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이렇게 볼 수도 있다는 얘기다. 아들인 파벨을 문학의 비유로 말이다. 그 아들은 네차예프 사람에게 변절자로 찍혀 살해당했다. 그런데 그 네차예프는 도스토예프스키의 문학에 영향을 받아 그 문학을 현실에다 실현시키려 한다. 이는 파벨의 흰 양복 사건에서 했던 것과 그대로다. 마을의 한 여자가 몽상처럼 지어낸 약혼자의 이야기를 파벨은 자신이 직접 그 약혼자가 되는 것으로 실현시켜 주었던 것이다. 그렇게 네차예프와 파벨은 문학이 문학에만 머무르지 않고 현실에 영향을 미치는 것을 강하게 상징한다. 네차예프가 파벨의 흰 양복을 받게 되는 것도 그걸 더욱 확증한다. 그러나 파벨은 네차예프에게 살해당했다. 파벨이 회심했기 때문이다. 문학이 현실로 나아가려 하지 않고 문학 그대로 머무르려 했기에 그렇다. 도스토예프스키고 네차예프가 찾아와 토론을 벌였을 때, 그런 파벨과 똑같은 모습으로 항변한다. 현실에 복무하라는 문학에 대한 강한 요구가 있다. 그것이 바로 네차예프다. 그러나 그런 것에서 자유롭고 싶은 문학의 열망이 있다. 그것이 변절한 파펠이요, 도스토예프스키다. 그렇게 소설엔 강한 전선이 형성되고 그 치열한 싸움 속에서 자기 구원을 위한 개인적 글쓰기에만 머무르고 싶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저항이 계속된다. '자신이 쓴 것이 세상에 널리 유포된다고 해서 꼭 사회적 책임까지 짊어져야 할까?' 그는 묻고 항변한다. 이러한 항변은 말로 그치지 않는다. 어쩌면 독자의 눈을 찌푸리게 할 지도 모르는, 도스토예프스키가 안나의 어린 딸 마트료나에게 욕정을 느끼는 것이나 안나와 동침하는 것은 사실 다 그런 항변이 몸으로 표현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애욕과 애정만큼 개인적인 것이 또 있을까? 그것도 사회가 용납하지 못하는 관계라면 더욱 그렇다. 다시 말해 하숙집에서 벌어지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엇나간 욕망과 사랑은 사실 문학을 개인적 영역에 묶어두고 싶은 욕망의 다른 표현인 것이다. 현명한 존 쿳시는 정답을 알려주지 않는다. 이건 쉽게 해결할 수 없는 문제이고 늘 치열한 고민이 수반되어야 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다만 아들을 잃고, 그 순간에서조차 사회 혹은 대중이 원하는 글쓰기를 해야 했을 존 쿳시의 아픔과 절망만은 오롯이 느껴진다. 양부임을 몇 번이고 말하는 것이나 네차예프 앞에서의 곤혹 등등에서. 그렇다고 독자에게 혼란만 가져다 주고 무책임하게 나 몰라라 하면서 내뺀 것은 아니다. 마지막에 도스토예프스키가 아들의 내면을 상상하며 쓴 글이 명확하진 않지만 존 쿳시의 답을 어느 정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거기서 도스토예프스키는 아들이 된다. 그걸 보면서 우리는 들뢰즈의 다음과 같은 말을 떠올린다. 글을 쓴다는 것은 타자가 되는 행위라고 했던 그의 말을. 그는 한 대담에서 이렇게 말했다. 사실 글쓰기는 내부에 어떤 목적을 갖지 않습니다. 삶이 개인적인 어떤 것이 아니라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말입니다. 오히려 글쓰기의 목적은 삶을 비개인적인 역량의 상태로 실어나르는 것입니다. 이로써 글쓰기는 모든 영토, 자신 안에 있는 모든 목적을 포기합니다. 글이, 문학이 이상한 것은 나를 위해 쓰지만 결국은 다른 사람이 되어버리는 것에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글은 탈주다. 그것은 세상의 중력과 다른 방향으로 움직인다. 세상의 중력은 의미를 가질 것을 고집한다. 고착된 의미가 되어 쓸모가 있으라고 명령한다. 하지만 쓸 때마다 카멜레온처럼 변하는 게 숙명인 글쓰기에게 있어 그건 가당치 않은 주문이다. 글엔 목적이 없고 종착지가 없다. 그러기에 고정된 의미도 있을 수 없다. 모든 건 과정이고 거기서 의미는 어느 날엔 세워졌다 또 어느 날엔 허물어진다. '무엇이 되라, 어디에 속해라'고 하기 전에 글쓰기를, 문학을 생성 중인 과정 자체로 봐줄 수는 없을까? 흰 양복의 이야기처럼 누군가 그것을 의미 있다 믿으면 그만인 것을. 어째서 꼭 문학을 이런 저런 진영에 집어 넣고 부검을 해야 할까? 이런 쿳시의 항변이 은근히 느껴진다. 나만 그런지도 모르겠지만. 횡설수설하고 있다고 여기신다면, 딱 이 말만 하고 글을 끝맺으려 한다. '페테르부르크의 대가'는 문학의 자율성에 대한 변호라고, 그것도 아주 호소력 넘치는! * 이 리뷰는 예스24 리뷰어클럽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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쿳시는 제게 특이한 이력의 작가로 기억에 남습니다. 한 번도 받기 힘든 부커상을 전례를 깨고 두 번이나 받았기 때문입니다. 줌파 라히리가 단편집으로 부커상을 받고 이름을 바꾼 로맹 가리가 공쿠르 상을 두 번 받은 것처럼 높은 완성도로 문학적 성취를 이뤄 낸 작가들은 제 자신에게 질투와 경외를 오랜동안 품게 만들기 때문에 잊기가 어렵습니다. 이 소설은 굉장한 인물을 주인공으로 내세웠습니다. 문학의 마스터피스이자 소설가들의 소설가라 할 수 있는, 바로바로 러시아의 대문호 도스트옙스키이기 때문입니다.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죄와 벌>, <악령>, <백치>... 등등. 발표한 작품마다 묵직한 문제의식으로 똘똘 뭉친, 가공할 위력의 소설들의 주인인 도스트옙스키. 과연, 그를 주인공으로 또 한명의 위대한 작가인 쿳시는 어떻게 이야기를 꾸려 나갈지 궁금한 마음에 책을 부리나케 읽기 시작했습니다. 1869년 10월의 어느 날, 한 남자를 태운 마차가 센나야 광장 근처의 아파트 앞에 그를 내려주면서 이야기는 시작합니다. 그의 이름은 바로 도스트옙스키, 아들의 자살 소식에 독일에서의 생활을 접고 페테르부르크로 돌아온 것입니다. 아들이 묵었던 하숙집에 자신 또한 머물면서 아들에 대한 기억을 하나씩 꺼내보는 대작가는 새삼스러운 감정에 휩싸입니다. 하숙집 여주인과 그의 딸과의 교류를 통해 살아생전 아들의 모습에 가깝게 다가갈 수 있었던 대작가는, 아들이 급진적인 혁명 모임과 어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일련의 다른 사실들을 통해 아들의 죽음이 자살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문을 갖기 시작합니다. 빚에 쫓겨 다른 나라에서 망명 생활을 하다가 다시 찾은 고향의 모습은 격동의 현장 그 자체입니다. 작가가 관공서의 관료와 마찰을 빚는 장면이나 먹고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몸을 파는 나이어린 아이들의 거처를 방문하는데 이는 마치 기득권층의 부패와 비참한 삶을 영위하는 하류층의 단면을 대조적으로 보여주는 듯 보입니다. 이러한 불안하고 비극적인 현실 앞에서도 대작가가 꼭 찾아야만 하는 무언가가 있습니다. 아들의 유품인 동시에 앞으로 자신의 소설 창작에 큰 원동력을 줄 수 있는 어떤 서류. 어쩌면 그가 이곳에 온 진짜 목적일지도 모르는 분위기가 연출되면서 작가는 독자에게 어떤 물음을 던져줍니다. 바로 소설 쓰기의 근원적 욕구에 대한 물음이죠. 도스트옙스키는 마치 악마와 거래를 하듯 자신에게 묻고 또 묻고 사유하고 실천하는 일을 멈추지 않습니다. 그럴수록 소설의 결은 훨씬 더 매끄러워지고 마침내 악마적인 걸작 탄생을 예고하는 듯 보입니다. 무척이나 인상적인 책이었습니다. 대작가 도스트옙스키의 뜨거운 가슴 한복판에 들어갔다 나온 느낌입니다. 소설이 탄생하는 고통스런 과정과 글쓰기의 욕구가 어떻게 탄생되는지 알고 싶은 독자에겐 깊이 추천하는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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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러시아 소설에는 익숙하지 못한데 그 이유중에 하나는 이름이 친숙해지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그런 관계로 러시아 작가들도 정말 유명한 대문호 몇몇을 빼고는 잘 알지 못한다. 이 책을 쓴 쿳시라는 작가도 맨부커상을 두번이나 타고 노벨문학상까지 수상한 유명 작가였지만 내게는 생소하게 다가올 뿐이였다. 허나 이 소설의 주인공은 달랐다. 이름만으로도 유명한 도스토옙스키!! 대작이라는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시도도 못해봤고 읽어본 그의 책이라고는 죄와 벌 뿐이지만 이름은 이미 너무 친숙한 그 분!! 가뿐한 마음으로 표지를 넘겼다. 그런데 내용이 가볍지가 않았다. 의붓아들의 죽음과 1869년 러시아의 시대적 불안함과 비극, 도스토옙스키 자신의 욕망 등 개인적이고 시대적인 온갖 갈등과 번뇌, 절망으로 가득차 있었다. 주인공은 고통스러워했고 치열했다. 그리고는 씁쓸한 쓸개맛으로 마무리를 지었다. 이는 어쩌면 이 책을 쓴 쿳시의 모습이 아닐까 생각했다. 책 한권을 쓰기위한 흔히 말하는 창작의 산고를 그리고 자신의 딜레마와 고통을 도스토옙스키에 투영한 것은 아닐까. 실제로 쿳시의 아들은 자살했다고 한다. 그 이야기를 듣고나니 어쩌면 쿳시는 진짜 자신의 이야기를 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 인물을 대상으로 한 소설이다보니 역사소설을 볼때 느끼는 것과같이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부터를 허구로 볼 것인가 하는 고민이 읽기 전부터 들었었다. 사실에 많이 근거하고 있을수록 항상 이것이 진실같은 기분이 든다. 이 소설처럼. 그렇지만 작가 자신을 투영한 작품이라고 생각하고 읽다보니 그 부분이 크게 고민 되지는 않았다. 사실 책 자체가 쉽게 읽히거나 하는 책은 아니다. 어쩌면 무거운 느낌이 드는 책이어서 그럴지도 모르겠고 내가 사전지식이 없기 때문일수도 있겠지만 한번 읽은 것으로는 그 의미를 반절정도 밖에 소화시키지 못한 것 같았다. 한가지 확실한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고두고 여러번 읽어 볼만한 책이라는 것이다.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읽기 전에 악령부터 읽어봐야겠다. 그리고서 도스토옙스키의 생에에 관해서도 좀 찾아보고 후에 페테르부르크의 대가를 다시 한번 읽어봐야지. * 이 리뷰는 예스24 리뷰어클럽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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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가(大家). 대가(代價)
추적추적 내리는 비. 잿빛 하늘. 암울한 붉은색. 죽음. 우울. 허무.
내게 있어 러시아 문학의 이미지는 왠지 이렇다. 그래서인지 난 그다지 러시아 문학을 좋아하지 않는다. 물론 남들처럼 이름이 너무 길어서 읽다보면 헷갈린다는 것도 이유 중 하나지만. 어쨌든 다른 나라에서도 저런 이미지의 작품이 없는 건 아니지만, 러시아 문학은 책을 덮을 때마다 왠지 모르는 더 깊은 씁쓸함을 가져오곤 했다.
그래서 딱히 이 책, <페테르부르크의 대가>도 큰 기대없이 잡았다. 오히려 띠지의 문구가 시선을 끌었다.
도스토옙스키.
아무리 문학에 대해 모르는 사람이라도 이 이름을 들어보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러시아 문학을 대표한다고도 할 수 있을 만한 러시아 문학계의 대가.
그는 어떻게 세기의 역작을 탄생시켰는가? 란 문구에 자전소설 느낌인가? 라는 생각을 갖고 첫 페이지를 열었다.
1869년 10월 페테르부르크. 의붓아들 파벨의 죽음으로 명성에도 불구하고 노름빚에 쫓겨 숨어있던 주인공이 비밀리에 돌아왔다. 그리고 아들의 죽음과 그가 혁명 모임에 가담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는 것에서 시작된 이야기는 하숙집 여주인과 딸, 무정부주의자 등 온갖 사람들이 얽혀 있는 상황뿐만 아니라 죄책감, 욕망 등 온갖 감정에도 휘말려들고 이를 글로 써내려가는 주인공의 모습을 그려냈다.
아. 이 책을 처음 접하는 사람은 읽기 전에 뒤 쪽의 옮긴이의 말부터 읽으면 좋을 것 같다. 읽다보니 뭔가가 생각 날 듯 말 듯 했는데 옮긴이의 말을 읽고 그게 무언인지 떠올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악령>이었다.
이제는 가물가물해졌지만, 도스토옙스키 작품이라는 이유로 읽었던 몇 권의 책 중 하나였던 <악령>이 여기저기서 겹쳤던 것이다. 그리고 정말 그는 이렇게 그 글을 쓴 건 아닐까라는 근거 없는(?) 현실감을 가지는 데 도움이 되었다.
어쨌든 그는 글을 썼다.
"당신을 팔고, 당신의 딸을 팔고, 사랑하는 모든 사람을 팔 것이다. 파벨을 산 채로 팔았고, 할 수만 있다면 지금이라도 내 안에 있는 파벨을 팔 것이다"
그렇게 그는 모든 걸 배반하며 글을 썼다. 온갖 다양한 현실과 감정, 욕망 등을 끌어안는 듯하면서. 그리고 그는 이를 대가라고 했다. 사람들이 책을 쓰라고 많은 돈을 준다는 한 아이의 말을 떠올리면서.
하지만 그건 결코 희열이 아니었다. 악마와의 계약으로 소원을 이루었다고 마냥 행복할 수 없듯이. 이 글도 그렇게 마무리 되었다. 이는 씁쓸한 쓸개맛이라고.
격동의 19세기 러시아. 선악의 판단조차 쉽지 않았던 현실 속에서 이 책의 그도, 도스토옙스키도 그렇게 글을 썼다.
정말 대단했다. 그렇기에 그들은(?) 대가(大家)가 될 수 있었겠지.
하지만 이런 생각도 들었다.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만큼의 대가(大家)가 되기 위한 대가(代價)가 너무 가혹한 건 아닐까란.
그러면서 어디선가 들은 작가는 말을 수집하는 사람이라는 말을 떠올렸다. 이 책을 읽고나니 오히려 삶의 이면까지 수집, 아니 버려야만 하는 게 작가가 아닐까란 생각이 든다.
솔직히 쉬운 글은 아니었다. 아니 제대로 이해한 게 맞는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글이었다. (아. 그리고 생각보다 처음은 조금 지루한 부분도 없지 않았다. 물론 갈수록 그렇진 않았지만)
하지만 적어도 한 편의 글을 쓰기 위해 작가는 치열한 고민을 한다는 것을 느끼게 하는 글이었다. 그리고 SNS 등의 발달로 쉽게 쉽게 글을 쓰는 거에 익숙해진 현실에 그렇지 않음을 깨닫게 하기 위해 이 책을 쓴 건 아닐까란 의문을 갖게 해준 글이었다.
뿐만 아니라 난 한 분야의 대가(大家)가 되기 위해 어떠한 대가(代價)까지 치를 수 있을까란 고민을 안겨준 글이었다.
* 이 리뷰는 예스24 리뷰어클럽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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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차를 타고 다리를 건너던 톨스토이가 거지를 발견했다. 그는 헐벗은 거지에게 다가가 구걸이 아니라 스스로를 일으켜 세우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리고는 자리를 떴다. 얼마 뒤 바로 그 자리를 도스토옙스키가 지나가게 되었다. 도스토옙스키는 헐벗은 거지에게 다가가더니 곧바로 자신이 입고 있던 외투를 벗어서 건넸다. 그리고는 자리를 떴다. 오래 전 선배로부터 전해 들은 이야기이다. 선배도 누군가로부터 전해 들은 이야기였을 것이다.
ps. 소설을 읽는 동안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한국으로 유학을 왔고, 아카이브를 동생 대신 운영 중인 제냐로부터 도와달라는 톡이 날아왔다. 공황의 증세를 보이며 어디로 가야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알 수 없다는 그녀는 강릉에서 서울로 올라오는 중이었다. 그녀를 만나 동생네로 인계했다. 그녀는 오랜 시간을 동생네서 잤고 자신의 집으로 갔다.하지만 다음날 다시 도와달라는 톡을 보냈다. 그녀는 심한 향수병을 앓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럼에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가고 싶어하지는 않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