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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책들이 출판된다. 그 책들을 모두 읽을 수 없기에 좋은 책을 선별하고 읽는 건 중요해진다. 다음 학기 논술 팀에서 공부하게 될 책 중에 참 괜찮은 책을 발견했다.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책이지만 우리나라에 이런 글을 쓴 사람이 있다는 것에 감사함을 느낀다. 임진왜란 이후 일본에 건너가 그들에 대한 글을 썼음에도 우리는 왜 일본인을 경계하지 못했을까? 만약 이런 다양한 책을 읽고 대비했더라면 이후 일제강점기란 암울한 시간은 없지 않았을까
유한(1681-1752)이란 이름을 들어본 적 없다. 하지만 신유한은 18세기 전반을 풍미한 문장가이자 시인이라고 한다. 신유한은 통신사행의 일원으로 일본에 건너가 그곳의 아름다운 풍경과 일본인의 습관 그리고 정교한 기술에 대해 서술한다. 또한 임진왜란을 일으킨 일본의 군사 문화에 대해 경계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한 나라의 국민성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1700년대 조선 사람에게 일본인의 모습은 지금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다. 그들의 국민성을 알고 그들에 대해 알았다면 훗날 우리나라의 아픔은 없었을까
이 책을 다 읽고 기억나는 게 몇 가지 있다. 임진왜란 때 포로로 잡혀온 진주 사람들이 모여 사는 진주도 라는 마을, 에도 시대 이전부터 있었던 일본의 남색 풍습, 오사카에서 출간된 조선의 서적들, 우리나라 한글에 대한 일본인의 그 당시 관심, 일본에 인삼 밀매를 했던 통역관의 이야기, 일본의 군사 제도, 일본의 유학자들에 대한 이야기 등. 조선의 문장가가 바라본 일본인의 모습은 지금과 별반 다르지 않다.
무엇보다 일본의 군사제도는 이후 전쟁을 일으킨 원동력이 된 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일본에는 4 종류의 백성이 있으니 무사, 농민, 공인, 상인이 그것이고 선비는 거기에 속하지 못한다. 이중 무사가 가장 편하다고 한다. 상인은 부유하지만 세금을 걷는 법이 엄중하고 공인은 기술을 가졌지만 비싼 값을 받지 못하고 농민은 고되지만 세금을 1년에 한 번 내면 된다. 이들 말고 유학자, 승려, 의사가 있지만 유학자는 그 직급이 낮다고 한다. 일본의 무사는 한번 상하 관계가 정해지면 위아래의 차별이 엄격해지고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공경하고 두렵게 여기고 복종하는 것을 게을리 하거나 소홀히 하지 않는다고 한다. 가장 높은 계급은 무사이고 가장 낮은 계급은 문인이다. 병영의 국가라 할 수 있는 일본은 상당히 효율적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전체주의, 침략주의로 치달을 위험성을 내포한다.
이 당시에 이런 날카로운 지적을 했음에도 우리는 왜 대비하지 않았는지 안타까울 뿐이다. 유명한 책들이 새롭게 출판되어 나오는 것도 좋지만 우리가 알지 못했던, 그러나 꼭 알아야 할 다양한 책들이 나오면 좋겠다. 나는 개인적으로 일본이라는 나라를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일본이란 나라를 무시할 수 없다. 싫어하지만 일본에 대해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일본에 대해 알아야 다시는 일제강점기 같은 아픈 일이 일어나지 않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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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일기(熱河日記)>의 맞수 <해유록(海遊錄)> 수많은 사신들이 중국과 일본을 오가며 기록을 남겼다. 하지만 그 중에서 오래도록 그리고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진 것은 오직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 1737~1805)의 <열하일기(熱河日記)>뿐이다. 왜냐하면 박지원(朴趾源)이 문체반정(文體反正)의 당사자답게 견문을 단순히 날짜순으로 기록하는 기존의 사행문(使行文)에서 벗어나 청(淸)의 풍속, 제도, 문물에 대한 소개와 함께 조선의 제도, 문물에 대한 비판을 풍부한 문학적 감수성으로 감싼, 위대한 기록문학으로 <열하일기(熱河日記)>를 승화시켰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많은 사행록(使行錄) 가운데 <열하일기(熱河日記)>에 비길만한 작품이 없었을까? 우리에게는 낯설게 느껴지지만, 일제강점기의 저명한 국문학자인 김태준(金台俊, 1905~1949)1)이 “박지원의 <열하일기(熱河日記)>와 쌍벽을 이루는 기행문학이라 하며 그 문학성을 높이 평가2)”한 청천(靑泉) 신유한(申維翰, 1681~1752)이 남긴 <해사동유록(海槎東遊錄, 이하 <해유록(海遊錄)>)>이 있다. 편견 없이 적국(敵國)을 바라보다. 신유한(申維翰)이 통신사(通信使)의 일원으로 일본을 향해 떠난 1719년은 일본에 대한 적대감이 아직까지 남아있던 때였다. 임진왜란(壬辰倭亂)으로부터 겨우 100여 년 밖에 지나지 않은 시기로 일본에 대한 적대감이 생생하게 남아있던 때였다. 왜냐하면 소중화(小中華) 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한, 당시 조선 사람들에게 있어서 임진왜란(壬辰倭亂)은 <아Q정전>에서 아Q가 멸시하던 왕(王)털보에게 사소한 시비 끝에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은 것과 마찬가지로 어이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무렵에는 “대부분의 조선 문인들이 임진왜란을 떠올리며 일본을 야만적인 나라라고 얕보고 제대로 알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는)3)” 것이 당연시 되었다. 하지만, <해유록(海遊錄)>의 저자인 신유한(申維翰)은 달랐다. 그저 막연한 적대감으로 상대방을 무시하기 보다는 편견을 최대한 배제하고 관찰을 통해 얻은 정보 속에서 일본 사회와 조선 사회를 비교, 성찰하려고 했다. 덕분에 그의 <해유록(海遊錄)>은 마치 <열하일기(熱河日記)>처럼 일본의 풍속, 제도, 문물에 대한 소개와 함께 조선의 제도, 문물에 대한 반성이 곁들여진 기록문학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는 사물을 관찰, 즉 한 걸음 떨어져서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그의 자세와 공(公)과 사(私)를 구분하는 마음가짐이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18세기 초 조선 문인이 본 일본 17세기 후반에서 18세기 전반까지 화폐 경제의 발달에 따라 오사카[大板], 교토[京都]를 중심으로 상인계급인 조닌[町人]에 의해 겐로쿠[元祿; 1688~1705] 문화가 꽃피웠다. 때문에 신유한(申維翰)도 오사카[大板]의 번영에 “수려한 산천초목이며 즐비한 집들과 번성한 저잣거리며 일본인들의 화려한 의복을 눈으로 보니 과연 천하의 장관4)”이라고 경탄한다. 그뿐 아니라 그는 “일본의 풍속은 음란한 것을 좋아한다5)”고 비판하면서도 일본인의 성풍속(性風俗)을 담담하게 읊는다, 남녀가 욕실에서 알몸으로 함께 목욕하거나 남창(男娼)에 흠뻑 빠진 모습을. 이처럼 18세기 초 일본사회를 엄격한 성리학적 관점에서 첨삭(添削)해서 기록하는 대신, 관찰자적 입장에서 일본의 정치 체제와 제도 등에 대해 예리하게 스케치하듯 그려냈다. 즉, “일본의 풍속은 본래 상하의 위계질서가 없어서 가옥, 가마, 말, 의복, 기물 등을 분수에 맞지 않게 써도 규제가 없다. 그러나 상하 관계가 한번 정해지면 위아래의 차별이 엄격하여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공경하고 두렵게 여기며, 복종하는 것을 게을리하거나 소홀히 하지 않는다. ~ 중략 ~ 이렇듯 인심과 습속이 모두 엄격히 통제된 군사 같았으니 예법과 교화로써 그리 된 것이 아니었다. 관백(關白)과 각 주의 태수가 다스리는 법이 한결같이 군사 제도에서 나왔으므로 백성들이 보고 배운 것 역시 모두 군대의 법도와 같은 것이다.6)”고 하여 질서정연함을 강요 받아 체질화된 병영국가 일본의 문제점을 날카롭게 파헤치고 있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오사카[大板]에 서적이 많은 것을 천하의 장관이라고 감탄하면서도 조선과 일본 사이의 기밀을 기록한,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 1538~1593)의 <해사록((海槎錄)>,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 1542~1607)의 <징비록(懲毖錄)>, 수은(睡隱) 강항(姜沆; 1567~1618)의 <간양록(看羊錄)> 등이 모두 오사카[大板]에서 출판되고 있는 현실을 통탄하기도 한다. 동시에 관직체계나 “첫째 아들을 제외한 천황의 모든 아들은 승려가 되어 칭호를 법친왕(法親王)이라 하고 딸도 비구니가 되게 한다. 그리고 측근의 귀한 신하 가운데 문장과 역사에 관련된 일을 맡은 사람을 법인(法印) 혹은 법안(法眼)7)”이라는 승려의 법명(法名)을 내려주는 현실 등을 통해 명목상 통치자인 천황과 실질적 통치자인 쇼군[將軍]/간바쿠[關白]으로 분리된 이원적 정치체제를 가진 일본사회의 특질을 관찰자적 입장에서 서술하기도 한다. 이처럼 신유한(申維翰)은 <해유록(海遊錄)>을 통해 18세기 초 일본의 민낯을 드러내고 있다. 그렇기에 우리가 국사 수업시간에 수없이 들어 익숙한 “이긍익(李肯翊, 1736~1806), 박지원(朴趾源, 1737~1805), 이덕무(李德懋, 1741~1793), 정약용(丁若鏞, 1762~1836), 이규경(李圭景, 1788~?) 등 조선 시대의 저명한 문인들과 학자들이 일본에 관한 정보를 얻기 위해 <해유록(海遊錄)>을 참고8)”하였던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우리가 아무리 싫다고 해도 우리의 삶에서 중국이나 일본을 배제할 수 없다. 아니, 미워할수록 그들에 대한 제대로 된 이해가 필요하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바둑에서 훈수 두는 사람이 판을 더 잘 보는 것처럼, 한 걸음 떨어져서 살펴보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해유록(海遊錄)>의 저자 신유한(申維翰)처럼. 그리고 이렇게 객관적으로 살펴보다 보면, <열하일기(熱河日記)>의 박지원(朴趾源)이나 <해유록(海遊錄)>의 신유한(申維翰)처럼 자신과 자신이 속한 사회를 위한 성찰이 가능할 수도 있지 않을까? 1) 김태준(金台俊)은 조윤제(趙潤濟), 이희승(李熙昇) 등과 조선어문학회를 결성했던, 일제강점기의 대표적인 사회주의 국문학자다. 그가 비교문학적 관점에서 저술한, 한문학의 역사적 흐름을 처음 체계화한 <조선한문학사>(1931)와 사회경제사적 인식을 바탕으로 문학사를 해석한 <조선소설사>(1933)는 후학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고, 지금까지도 높이 평가 받고 있다고 한다. 2) 신유한(申維翰), <조선 문인의 일본견문록 - 해유록>, 이효원 편역, (돌베개, 2011), p. 199 3) 신유한(申維翰), 앞의 책, p. 218 4) 신유한(申維翰), 앞의 책, p. 45 5) 신유한(申維翰), 앞의 책, p. 54 6) 신유한(申維翰), 앞의 책, pp. 154~155 7) 신유한(申維翰), 앞의 책, p. 138 8) 신유한(申維翰), 앞의 책, p. 19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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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랑비가 내렸다. 아침 일찍 출발했다. 가마 속에 명나라 문학가 박산(博山)의 시집을 두었다. 주렴 바깥에서 들려오는 가을비 소리에 문득 맑은 정취가 느껴졌다.” 조선시대의 통신사(通信使)란 조선에서 일본과의 외교를 위해 정기적으로 파견했던 사절단을 말한다. 통신사는 조선 전기에 8차례, 조선 후기에 12차례 일본에 파견되었다. 임진왜란으로 국교가 단절되기도 했지만 통신사행은 곧 재개되었다. 조선은 통신사 교류를 통해 포로로 끌려간 백성을 송환해 오는 한편 장기적으로는 일본의 침략을 방비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강제 한일 합병을 통한 일제 강점의 역사를 뒤돌아볼 때 조선의 정치 전략의 허점을 돌아보게 한다. 이 당시 일본은 조선 통신사의 방문이 막부(幕府)의 위상을 높여 준다고 생각했다. 일본은 막대한 비용을 들여 통신사 일행을 극진히 접대하면서 자국 내에서는 조선이 일본에 조공(朝貢)을 바치러 온 것이라 선전하였다. 흔히들 일본을 이야기 할 때 ‘가깝고도 먼 나라’라고 한다. 예전에 비해선 마음의 거리가 비교적 가까워졌다고 할지라도 아직은 ‘먼 그대’이다. 한일전 축구 경기라도 열리는 날이면 온 국민의 마음이 똘똘 뭉치게 된다. 시킨다고 할 시대도 아니지만, 누가 시켜서 하는 일도 아니다. 이미 흘러가버린 시간이지만, 조선시대 통신사들의 발걸음과 함께 일본의 이모저모를 들여다보는 것은 그들의 현재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고 있다. 이 책의 저자 청천(靑泉) 신유한(申維翰, 1681~1752)은 18세기 전반기를 풍미한 문장가이자 시인으로 당대에 널리 알려졌던 인물이다. 특히 그가 일본에 다녀와서 지은 이 책 『해유록』은 그의 살아생전에는 물론 현대에 이르기까지 기행문학의 백미로 사람들의 칭송을 받았다. 책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일본을 알기 위해 필요한 다채로운 정보가 가득하다. 일본의 정치, 역사, 지리, 제도, 군사 등에 관한 세밀한 관찰과 치밀한 서술은 일본의 역사와 인물에 대해 알고 싶은 사람에게 역사서에서는 볼 수 없는 풍부하고 생생한 정보를 제공해주고 있다. 지금은 많이 달라졌지만, 영화에서나 그림, 사진을 통해 보면 앉을 때 반드시 무릎을 꿇고 앉는 것이 일본의 풍속이다. 저자는 이러한 모습을 보고 예리한 평을 내리고 있다. 남녀노소와 귀천을 가리지 않고 앉을 때면 반드시 꿇어앉는 이유는 뭘까? 저자의 표현을 빌리면 그들(일본인)의 법도를 살펴보건대 예의를 차리느라 그러는 것이 아닌 듯 하다 고 한다. 그렇다면? “그들이 입는 옷에는 섶(저고리나 두루마기의 깃 아래쪽 부분)이 없고 아래에는 바지나 잠방이가 없다. 그러니 꿇어앉지 않으면 은밀한 곳을 가리기 힘들다. 그래서 부득이하게 꿇어앉는 법도가 생겨났고 그것이 습관처럼 되어 버린 것이니 몹시 우스운 일이라 하겠다.” 이 당시 일본은 우리의 출판문화 현실과 차이가 났었던 모양이다. 오오사카에 들려 서적이 많은 것을 보고 크게 놀란다. 우리나라 명현(名賢)의 문집 가운데 일본 사람들이 가장 존숭(尊崇)하는 것은 『퇴계집(退溪集)』이라고 한다. 나 역시 퇴계의 자성록(自省錄)을 읽고 느끼고 배운바가 적지 않았다. 그러나 참 뜻밖이었다. 이 당시 일본인 집집마다 읽고 외우고 있었다고 하니 과연 그 시점 조선에서는 퇴계 선생에 대한 관심도가 어떠했는지 궁금하다. 일본 문인들이 저자와 필담(일본도 한자를 사용하다보니 필담으로 어느 정도 의사소통이 되었을 것이다)할 때 가장 먼저 묻는 것이 『퇴계집(退溪集)』의 내용에 관한 것이었다고 한다. 도산서원이 어느 군(郡)에 있는지 묻기도 하고 퇴계 선생의 후손이 지금 몇 사람이나 있으며 무슨 벼슬을 하고 있는지 궁금해 했다고 한다. 또 선생께서 평소에 좋아하신 것은 무엇인지 등등 질문이 몹시 많아 이루 다 기록하지 못할 정도였다고 한다. 이 대목에서 문득 드는 생각 하나. 그럼 퇴계 선생이 한류(韓流)의 원조인가? 그저 조선 시대 한 문인의 일본 기행문정도로 가벼이 볼 책은 아니다. 저자 신유한의 올곧음을 볼 수 있는 대목이 있었다. 일개 지방 관리에 불과한 쓰시마 태수가 옛 의례에 의거하여 통신사들을 자신의 관아(官衙)에 초청한 것 까지는 좋았다. 그러나 태수가 관례에 의해 자기한테 절을 해야 한단다. 그러나 신유한은 전례를 그대로 답습하지 않고 이치에 맞게 따지고 있다. 굳이 절을 받겠다 고집을 부리는 그네들에게 그리 할 수 없는 이유를 설명하면서 이렇게 단호히 말을 맺는다. “예(禮)는 공경하는데서 생기고 거만한데서 사라지는 법입니다. 내가 귀국(貴國)을 업신여긴 것이 아니라 귀국이 우리를 업신여기는 것입니다.” 비록 일본인의 입을 나오게는 했지만, 일을 지혜롭게 잘 처리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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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유록 (조선 문인의 일본견문록) / 신유한 (이효원편역) ![]() 고전이라고 하면 손도 대지 못한다. 몇 번 시도했지만 늘 실패했다. 한글문학이라면 어느정도 읽어볼만 하겠지만 한자문학은 어려울 뿐이다. 외국의 고전도 어렵고 우리의 고전도 어렵다. 고전은 원래 어려운 걸까? 고전을 쉽게 풀어서 쓰면 큰일나는 걸까? 나는 낮은 지식으로 인해 고전읽기에 어려움을 늘 느꼈고, 그래서 언제나 포기했다. 그러다가 결국엔 아예 손을 대지도 않게 되었다. 웹서핑을 하다보면 서양 고전에 빠져있는 블로거들을 자주 볼 수 있다. 니체가 어떻고, 플라톤이 어떻고. 나는 그런 블로거들을 보면 눈살을 찌푸린다. 한국사람으로 태어나 한국말을 하면서 우리 고전 놔두고 왜 외국 고전이람. 가만 생각해보니 남에게 뭐라할 처지가 아니다. 나도 우리 철학자에 대해서 잘 모르니까. 우리 고전에 대해서 잘 모르니까. 나 부터 고전을 읽어야 말할 자격이 있겠다 생각이 되었지만 기회를 잡지 못했다. 그러다가 이 책을 만나 고전을 읽을 기회를 잡았다. 이 책은 돌베개의 '우리고전 100선' 15번째 책이다. 어렵게만 느껴저서 독자들이 외면했던 우리 고전을 쉽게 편역하여 읽기 편하게 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지루하거나 어렵다고 느낀 적이 전혀 없었던 걸 보면 돌베개의 의도가 정확하게 반영되었다 할 수 있다. 해유록은 일본에 통신사로 간 신유한이 일본을 다니며 본 것들과 체험한 것들을 쓴 책이다. 300여년전에 쓰여진 책임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일본 문화와 너무도 같았다. 예쁜걸 좋아하고, 항상 무릎을 꿇고 앉는 것은 지금과도 같았다. 예쁜걸 좋아하는 일본인은 남자도 예쁜남자를 좋아해서 남창이 있다는 건 매우 큰 충격이었다. 어떻게 남자가 남자를 좋아할 수 있을까? 바지를 불편하게 질질 끌고다니는 것을 보고 일본의 문화를 정확히 꿰뚫어본 신유한이 대단스러워 보였다. 맨발이 예의인 것도 신기했다. 해유록은 단순한 기록이 아닌 문학작품이라고 한다. 중세 일본을 바라본 신유한의 관찰력과 통찰력은 매우 뛰어나서 해유록은 당대의 필독서라고 할 정도였다고 한다. 풍부하고 아름다운 묘사로 일본을 정확하게 기록한 해유록을 강력하게 추천하고 싶다. 고전, 이젠 우리고전도 읽어야 할 때이다. #nahabook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