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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고'란 고용주의 입장에서 고용인을 그만두게 하는 것을 말한다.
그렇다면 <회사를 해고하다>라는 이 책의 제목은 우리의 통념에 크게 어긋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회사가 회사원을 해고할 수는 있어도, 회사원이 회사를 해고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본래적 의미가 그렇더라도, 직장 생활을 하고 있거나 경험했던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수 차례 '회사를 해고'하고 싶은 마음을 느꼈을 것이다.
최근 귀농이 사람들의 관심사 중 하나로 대두되면서, 그 절차나 방법을 알아보는 이들도 늘어났다고 한다.
서울이나 각 지역에서 이루어지고 잇는 '귀농학교'나 '귀농 프로그램'에는 적지 않은 사람들이 참여하고 있다고도 한다.
그러나 막상 귀농에 도전하는 것은 정말이지 큰 용기와 결단을 필요로 하는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앞으로 귀농에 관심을 두고 있는 사람들에게 저자의 경험은 적지 않은 도움이 되리라 생각된다.
부부와 두 아들까지 모두 4식구의 도시 생활 청산과 연고가 없는 전남 고흥으로의 이주 과정과, 농촌에 정착하기까지의 과정이 담겨있는 책이다.
'도시 바깥에서 시장 너머를 꿈꾸며'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이 책의 저자(명인)는 한때 노찾사에서 노래를 했던 가수이다.
서로 그리 친분이 깊지는 못하지만, 그가 살고 있는 고흥이 순천과 가깝기에 간혹 열리는 행사에서 만나기도 한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는 막연하게 저자가 음악을 하면서, 귀농을 실천하며 살고 있다는 정도의 정보만을 가지고 있었다.
엄기호의 '추천의 말'에 이어, 목차 앞의 한 페이지에 걸쳐 '지기만 하는 싸움을 두려워하지 않는 벗들에게'라는 문장이 쓰여있었다.
어쩌면 우리의 삶은 승리(또는 성공)보다는 실패(또는 패배)의 경험이 더욱 많을 수밖에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살아가면서 부닥친 상황에서 '지는 것'을 두려워한다면, 늘상 좌절감을 맛보면서 살아가야만 할 것이다.
그러나 '지는 것'이 특별한 일이 아니고 그것을 두렵게 생각하지 않는다면, 어떤 일에도 맞설 수 있는 자신감이 솟아날 수 있지 않을까?
농촌살이에 정착하기까지 농촌 사람들을 만나고, 서로를 이해하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도 저자는 몸으로 깨우쳐 주고 있었다.
2013년부터 약 3년에 <말과 활>이라는 잡지에 기고햇던 글을 모아 엮은 책으로, 귀농을 준비하거나 또는 그것을 실천할 용기가 필요한 사람들에게 일독을 권하고 싶다.(차니) * 개인의 독서 기록 공간인 포털사이트 다음의 "책과 더불어(與衆齋)“(https://cafe.daum.net/Allwithbooks)에도 올린 리뷰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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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 삶읽기 350 왜 시골사람으로 살려 하느냐? ― 회사를 해고하다 명인 삼인, 2018.4.1. 우리는 곧잘 ‘귀농인’으로 분류되곤 하지만, 사실 우리 부부는 그 말을 영 어색해한다. 일찍이 고향을 떠나셨던 부모님 밑에서 자라면서 쭉 서울에서만 살아온 우리에게 애초에 고향이란 없었다. (14쪽) 《회사를 해고하다》(명인, 삼인, 2018)는 책이름대로 회사를 해고하고서 서울을 떠나 시골에 깃들어 살아가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회사를 해고하다니, 말이 안 된다고 여길는지 모릅니다만, ‘사표 쓰기’하고 ‘해고하기’는 다를 수 있겠지요. 사표를 쓴다고 할 적에는 돌아갈 틈을 남긴다고 할 테지만, 회사를 해고한다고 밝힐 적에는 돌아갈 틈을 없애며 씩씩하게 나아가겠다는 뜻이 되어요. ‘해고(解雇)’라는 한자말은 ‘내보내다’를 뜻합니다. “회사를 해고한다”고 할 적에는 “회사를 내 삶에서 내보낸다”는 이야기입니다. 회사가 시키는 대로 밤늦도록 회사에 매이지 않겠다는 이야기요, 주말도 없이 일만 하며 살지 않겠다는 이야기예요. 스스로 삶을 찾아서 하루하루 다르며 새롭게 마주하고 싶다는 이야기라 할 수 있습니다. 이제는 해가 길어지고 짧아짐에 따라 ‘철’을 배울 차례구나. 2월의 흙과 3월의 흙은 어떻게 다른지, 3월에 먹을 것과 4월에 먹을 것은 어떻게 다른지, 언제 씨를 뿌리고 언제 거두는지, 철 따라 할 일이 다르고 철 따라 먹을 것이 다르니 (43쪽) 한 자루나 되는 농작물을 다듬을 때도, 해산물을 씻어 손질할 때도 마찬가지다. 나는 그제서야 농사가 기본인 시골집의 정주간이 왜 마루 바깥에 있고 신발을 신고 드나들게 지어졌는지 알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95쪽) 그렇다면 서울을 떠나 시골에 갈 적에 비로소 “회사를 나한테서 내보낼” 수 있을까요? 서울에 살면서도 얼마든지 “회사에 매이지 않는 삶”을 지을 수 있지는 않을까요? 누구는 서울에 그대로 머물며 회사하고 헤어질 수 있어요. 누구는 굳이 서울에 머물기보다는 시골에서 새롭게 살아가는 꿈을 키울 수 있고요. 《회사를 해고하다》는 회사를 내 삶에서 내보내는 데에서 머물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가고 싶은 마음으로 시골길을 고른 이야기도 들려준다고 할 만합니다. 시골살이를 모르면 모르는 대로 부딪히며 배우면 되어요. 처음 서울에서 회사살이를 할 적에 회사가 어떤 곳인지 다 알고서 부딪히지는 않습니다. 하루하루 지내는 동안 틀을 알고, 한 해 두 해 흐르는 사이 저마다 나름대로 몸을 맞추는 길을 찾아요. 시골에서도 이와 같으니, 처음에는 철을 모르면서 살림을 하겠지만, 한두 해나 서너 해를 보내면서 차츰 봄철이며 겨울철을 깨닫습니다. 이윽고 다달이 다른 결을 배우고, 나날이 새로운 바람을 익히지요. 이 모든 일의 시작은 ‘돈 좀 안 벌고 살고 싶어’였지만, 막상 이런 일을 하는 과정에서 나는 조금씩 눈을 떠 간다. (118쪽) 그때 이후 나는 아이들에게 ‘뭐가 되고 싶냐’거나 ‘뭘 하고 살 거냐’는 따위의 질문을 나름대로는 삼가는 편이다. 나는 나이 서른에도 몰랐던 걸 왜 애들은 십대 때 이미 알아야 하나? (191쪽) 회사를 나한테서 내보내고 서울에 머무는 살림이 나쁘지 않습니다. 다만 여러모로 익숙한 곳에 머물 적에는 새롭게 눈을 뜨기 어려울 수 있어요. 아주 낯선 곳에서 밑바닥부터 다시 허우적거리다 보면, 그동안 느끼거나 알지 못하던 삶을 마주할 수 있어요. 처음으로 마주하면서 배우는 삶이 있어요. 굳이 서둘러야 하지 않으니, 차근차근 배우는 길을 걷습니다. 아이를 돌보는 어버이로 돌아보자면 서른 살에 스스로 깨닫지 못한 삶을 고작 열 몇 살 아이한테 묻거나 따질 수 없는 줄 배우기도 합니다. 그리고 어버이자 어른으로서 마흔 줄에 접어들었어도 여태 몰랐던 시골살림이나 흙살림이라면, 아이들더러 시골이나 흙이나 숲을 좋아하거나 아끼거나 사랑하라고 섣불리 말할 수 없기도 하겠지요. 다 같이 첫걸음을 떼는 삶이요, 다 함께 모두 새로 배우는 하루이니까요. 도시에 살 땐 성평등지수에서 대한민국 남성 중 상위 5퍼센트 안에 드는 남자 소리를 듣던 사람이 외지인으로 농촌사회에 빨리 안착하기 위해서 가장 먼저 익혀야 하는 것이 ‘가부장성’이라는 건 오래 곱씹어야 할 숙제다. (200쪽) 《회사를 해고하다》를 쓴 분은 전남 고흥에 보금자리를 마련하려고 힘씁니다. 처음부터 보금자리를 마련하고서 고흥에 깃들지 않았습니다. 처음에는 ‘시골에 머물 자리’를 찾아서 깃들었고, 요즈막에는 ‘손수 지어서 살아갈 보금자리’를 차근차근 짓는다고 해요. 이동안 여러 가지를 느끼고 배운다고 합니다. 서울살림이 얼마나 엉성했는가를 느끼면서 배우고, 서울하고 사뭇 다른 시골 성평등지수를 느끼면서 배운다고 합니다. 저도 늘 느끼는데, 시골에서는 아직도 ‘사내가 부엌에 들어가서 손에 물을 묻힐라’치면 다들 손사래를 칩니다. 사내는 얌전히 앉아서 가시내가 바치는 밥을 먹기만 하면 될 뿐이라고 여긴달까요. 이 낡은 틀을 깨자면 멀었달까요. 같이 짓고 같이 나누고 같이 누리는 길은 아직 시골에서는 아득하달까요. 그러나 한참 먼 길은 아니라고 여깁니다. 회사를 나한테서 내보낼 줄 아는 분들이 하나둘 시골에 깃들어 이 낡은 틀을 맞닥뜨리면서 천천히 손보거나 고치거나 바꾸어 내리라 느껴요. 서울에서도 시골에서도 사내랑 가시내가 함께 밥살림이며 옷살림이며 집살림을 새롭게 가꾸는 길을 열리라 생각합니다. 이 길을 열려면, 우리는 먼저 ‘낡은 틀을 나한테서 내보내기’부터 해야겠지요. 2018.5.4.쇠.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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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를 해고하다>라는 제목만 보고는 지긋지긋한 회사에서 온갖 고생을 하다가 내가 확신하던 모든 것들 앞에서 늘 멈칫거린다. 아니, 이제는 멈칫거림이 없는 모든 확신들을 의심한다. 흔들리는 것보다는 굳어진 것들이 더 두렵다. - 서문 내가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전혀 당연하지 않다는 것을 하나둘 깨달아 가면서 우리는 행복한가? 따위의 질문은 사치였다. 대신 우리는 '이게 사는 건가?' 묻곤 했다. 이런 의심이 한번 떠오르자 둘 중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끊임없이 질문이 이어졌다. 그래서 질문으로 시작된 대화는 대개 질문으로 끝나곤 했다. "우린 대체 먹고살기 위해 일하냐? 일하기 위해 먹고사냐?" ... "이게 임금노예지, 당당한 노동자야?" "대체, 신성한 노동이 뭔데?" "핵발전소 새로 짓는 일에 밤낮 없이 몸 바치고 인터넷에선 핵발전소 반대에 서명하는 거?" - 21쪽 저자와 그 남편은 자신들의 삶에 대해 계속 질문을 던진 끝에 '돈을 안 벌고, 혹은 적게 벌고 신념대로 사는 삶'을 택하기로 했다. 임금을 받는 노동자로 사는 한, 신념과 이율배반적인 일을 억지로 해야 하는 상황에 계속 부딪칠 테니. 부부는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아이들은 다니던 학교를 그만두고 전격 고흥으로 내려간다. 우리는 직장을 '해고'했고, 아이들은 학교를 '해고'했다. - 24쪽 '직장을 해고한다'라는 발상이 통쾌했다. 제 발로 회사를 그만두고 나와도 왠지 패배자가 된 듯해 주눅들지 않나. 하지만 내가 직장을 해고했다고 생각하면 상황이 180도 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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