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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권으로 읽는 지젝
켈시우드 저 | 박현정 역 인간사랑 | 2018년 3월
‘슬라보예 지젝(이하 지젝)’에 관해서는 대학교 때 한 학기 정도 교양과목으로 배운 적이 있다. 전공과목은 아니었지만 인문학 공부를 하다보면 ‘문사철’이라는 용어를 본의 아니게 더불어 공부해야 하는 경우가 발생한다. 문학, 사학, 철학을 따로 떼어 놓고는 어떤 해석도 불가능하게 만들어버리는 경우를 만나게 될 때가 있기 마련이다. 그것들은 운명적으로 어떻게든 연결고리가 이어진다. 지젝 역시 그런 경우로 인연이 된 인물이다. 이를 인연으로 대학동기들과 독서모임을 이어오면서 지젝의 작품이 가끔씩 토론의 주제가 되기도 하였다. 아직도 내 기억 한켠에 남아 있는 지젝은, 자크 라캉 정신분석학을 기반으로 이론정신분석학에 큰 공을 세운 인물이라는 점이다. 그런 지젝을 다시 만났다. 행복한 조우였다. 떨렸다. 무엇보다 내가 평소에 믿고 찾는 인간사랑 출판사에서 발간한 [한 권으로 읽는 지젝]을 만나게 되어서 기뻤다.
슬로베니아어, 프랑스어, 독일어, 그리고 영어를 포함하는 여러 언어로 수십 권의 책을 펴내고, “유머감각과 영민함 그리고 놀라울 정도의 박식함을 갖춘 지젝은 철학, 존재론, 정치철학, 문학, 영화비평, 생태학, 종교학, 언어철학, 인지철학 등의 분야를 넘나들며 동일성, 세계화, 포스트모더니즘, 프랑스 혁명, 레닌 같은 다양한 주제로 글을 써왔다. 슬라보예 지젝은 의심할 여지없이 앞으로도 계속해서 철학적이고 정신분석학적이며 정치적인, 그리고 문화적인 담론들을 제공할 것(p.13)이라고, 이 책의 저자 켈시우드는 확신에 차 있다.
또한 이 책의 433쪽에서, 지젝은 라캉의 “프로이드로의 회귀”를 명백히 함으로써, 정신분석이 갖는 현재적 적절성을 보여준다. 프로이드 이론에 대한 라캉의 설명은 정신분석의 통찰들을 언어학, 수학 그리고 과학이 20세기에 이룩한 발전에 비추어 정교화한다. 지젝은 라캉이 프로이드 이론을 새로이 고안함으로써 그것을 살아있도록 유지함을 증명하고, 라캉이 어떻게 프로이드는 깨닫지 못했던 함축을 구체화하는지를 보여준다. 나아가 이 책에서 지젝은 그 자신이 어떻게 유사한 방식으로 주류적 라캉 이론과 실천으로부터의 분파적 분열을 수행하는지를 보여주고, 실제의 여성적 성별화의 논리에 대한 라캉 자신의 강조가 어떻게 라캉의 자유주의적 경향들에는 반하게 되는지를 보여준다.
여기에서 지젝은 라캉의 '프로이드로의 회귀'가 프로이드 정신분석의 새로 쓰기임을 지적한다. 라캉의 핵심 개념 대부분이 프로이드 이론에서는 대응 부분들을 갖지 않기 때문이다. 프로이드는 상상계, 상징계, 실제의 삼위관계를 결코 언급하지 않았다. 그는 결코 상징적 타자인 ‘대타자’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았고, ‘주체’가 아니라 ‘자아(ego)에 대해서만 말했다.(p.437) 켈시우드의 [한 권으로 읽는 지젝]은 꼭 철학전공자가 아니더라도,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게 구성되었다. 나처럼 지젝에 관심이 있는 일반인 독자에게도 큰 힘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한 권의 책을 통해서, 지젝의 삶을 통찰할 수 있다면 그보다 더 좋은 독서는 없을 것이다. 이 책이 그렇다. 지젝에 대한 궁금증을 속 시원하게 알고 싶은 독자에게 이 책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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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지젝의 글을 접한 것은 정치나 영화에 대한 짧은 소논문이었다. 글을 읽으면서 놀란 것은 이렇게 재미있게 철학을 이야기하고, 이렇게 날카롭게 철학을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가 동유럽 체코 슬로베니아(지금은 슬로베니아) 출신의 철학자라는 부분에 대해서 더 놀랐다. 그 후 지젝의 책을 읽기 시작하고부터 본격적인 미로에 빠져버렸다. 우선 지젝의 철학은 너무 방대하다. 대부분 번역된 번역서마다 5백 페이지는 기본으로 넘어간다. 분량만 많다면 열심히 읽기만 하면 되지만, 문제는 지젝의 철학이 서구의 온갖 사상을 인용한다는 것이다. 헤겔과 칸트, 마르크스는 기본이고, 유명한 라캉과 같은 심리학자의 사상까지 인용을 한다. 그래 여기까지는 좋다. 이들의 사상까지도 공부하면 되니까. 문제는 이것들을 지젤식으로 비틀어서 해석을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부터는 정말 미로에 빠져서 헤어 나오기가 쉽지 않다. 그럼에도 어떤 때는 그런 미로 속에 있는 것에 대한 이상한 희열을 느낀다. 지젝만이 만들고, 그만이 만들 수 있는 철학의 미로에서 길을 찾다 보면 어느 순간 우리가 속한 세상이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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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라보예 지젝은 80년대 프랑스에서 라캉의 사위이자 수제자 자크-알랭 밀레에게 박사 과정을 밟았다. 비록 지젝은 그와 결별하고 고향으로 슬로베니아로 돌아갔지만, 이미 라캉을 누구 못지않게 통달한 뒤였다. 지젝은 라캉을 철학, 문학, 문화, 정치, 역사, 경제 등 다양한 스펙트럼에서 탁월하게 해석하고, 풀어낼 줄 알았다. 라캉 뿐만 아니라 헤겔의 자양분도 놓치지 않았다.
책에서 다루는 지젝의 저작 목록(24권)은 다음과 같다. 이중 현재 22권이 국내에 번역, 소개돼 있다. 영문명은 저자가 인용에 사용한 판본이다. 일부 영문본이 한국본과 시간차가 나는 것은 이 때문이다. 2.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 (인간사랑 2004) 3. 『삐딱하게 보기』 (시각과 언어 1995) 4. 『당신의 징후를 즐겨라!』 (한나래 1997) 5. 『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물기』 (도서출판비 2007) 6. 『향락의 전이』 (인간사랑 2002) 7. 『나눌 수 없는 잔여』 (도서출판비 2010) 8. 『환상의 돌림병』 (인간사랑 2002) 9. 『까다로운 주체』 (도서출판비 2005) 10. 『우스꽝스러운 숭고의 기술』 (국내 미번역) 11. 『무너지기 쉬운 절대성』 (인간사랑 2004) 12. 『믿음에 대하여』 (동문선 2003) 13. 『진짜 눈물의 공포』 (울력 2004) 14. 『전체주의가 어쨌다구?』 (새물결 2008) 15. 『실재의 사막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자음과모음 2018) 16. 『꼭두각시와 난장이, 기독교의 도착적 핵심』 (『죽은 신을 위하여』, 길 2007) 17. 『신체 없는 기관: 들뢰즈와 결과들에 관하여』 (도서출판비 2006) 18. 『이라크: 빌린 주전자』 (도서출판비 2004) 19. 『How to Read 라캉』 (웅진하우스 2007) 20. 『시차적 관점』 (마티 2009) 21. 『잃어버린 대의를 옹호하며』 (그린비 2009) 22. 『폭력이란 무엇인가』 (난장이 2011) 23. 『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 (창비 2010) 24. 『종말의 시대에 살기』 (국내 미번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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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젝은 한 대중 강연에서 자신의 철학을 공식적으로 밝혔다. 철학에서는 헤겔을, 정신분석에서는 라캉을, 종교에서는 “기독교-유물론” 입장을, 정치에서는 공산주의를 계승한다고 말이다. 즉 그는 두루뭉술한 철학자가 아니다. 철학 하나로도 접근하기 어려운데 그가 논하는 범위가 넓다는 게 더 큰 장애다. 어느 정도 공부가 되어 있지 않은 독자라면 철학적이고 정신분석적이며 정치적이고 문화적인 걸 한꺼번에 담론으로 펼치는 지젝 철학을 따라가기 쉽지 않다. 그는 “철학, 존재론, 정치철학, 문학, 영화비평, 생태학, 종교학, 언어철학, 인지철학 등의 분야를 넘나들며 동일성, 세계화, 포스트모더니즘, 프랑스 혁명, 레닌 같은 다양한 주제로 글을 써왔다.” 이 책은 2012년 전까지 지젝이 발표한 저서와 논문 24편을 가져와 일반 독자들이 지젝 철학에 더 쉽게 참여할 수 있도록 돕는 가이드북이다. 원저 제목이 아예 『Zizek : A Reader' Guide』이다. 지젝에 대해서든 철학에 대해서든 근본적인 어려움은 우리가 언어와 의미 관계의 혼란 속에 있다는 데 있다. 언어 자체의 힘을 강조한 유명론(唯名論)과 반기술주의자(솔 크립키가 대표적), 보편적 본성과 이름에 내포된 의미를 강조한 실재론(實在論)과 기술언어주의자(존 설이 대표적) 모두에게 지젝은 반대한다. 지젝은 라캉 이론을 철학으로 발전시켜 설명한다. “언어는 사적일 수 없으므로 의미는 언제나 상호주관적이다. 그것은 상징적 질서, 라캉적 대타자 안에 존재한다.” 지젝은 앞선 이론들이 ”명명에 함축된 근본적인 우연성을 간과”한다고 주장하며, 고유명사뿐 아니라 일상 언어에서의 모든 이름(기표)들은 ‘순환적이고 자기 지시적이라 독단적 비합리와 동어 반복의 형태’(라캉의 ‘주인 기표’)를 취하게 된다고 말한다. 주인 기표는 “어떤 기의적 내용도 갖지 않는 텅 빈 기표”이며, “용어의 모든 용법은 다른 것들에 맞서 차이를 만들어내는 관계맺음을 통해 규정된다.” 생각해보라. 우리는 부자유 없이 자유를, 불평등 없이 평등을 말할 수 있는가. 우리는 쉽게 민주주의를 절대 가치처럼 말하고 있지만 그 이념이자 체제의 주요 기둥인 자유와 평등은 끝없이 충돌하고 있다. 이 아이러니와 부조리함에 대해 의견은 분분하고 수습하기 바쁘다. 지젝은 이 혼란의 원인을 정확히 꿰뚫어 봤다고 생각한다. ‘불완전함, 비합리성, 비일관성’은 지젝의 변증법적 유물론에서 계속 거론하는 핵심이다. 헤겔 변증법 독해의 기존 방식에 대해서도 지젝은 비판한다. “지젝의 변증법적 유물론은 동시대의 대륙 철학은 물론 후기 분석철학이 얼마나 독일 관념론의 망령에 시달리고 있는지 보여준다.” “한 용어는 오로지 다른 용어들과의 관계 속에서만, 또 용어들이 아닌 요소들(예를 들어 환상이나 이미지)과의 관계 속에서만 의미를 갖는다. 더구나 문제가 되는 관계들은 종종 차이라는 부정적 관계들이다. 요컨대 순수한 자기 동일성이란 없다는 점에서 현실은 변증법적이다. 어떠한 사물, 사건 또는 속성들도 단순히 그것으로만 있지 않다. 사물이 무엇으로 있다는 것(그것의 존재 자체)은 그것이 아닌 것과 연관되어 있다. 이러한 부정성 때문에 대립자들은 더 높은 “종합”에서 결코 조화롭게 중재되지 않는다. 그보다는 그들의 차이가 차이로서 정립되어, 전체가 비일관적인 것으로서 형성된다.” 지젝은 사물들이나 사실들에 대한 우리의 상징적 재현들로부터 “사물들” 또는 “사실들”을 분리해낼 방법이 없다는 입장이고, 불완전성과 비일관성이 제거 불가능하다고 말한다.(“보편적 원근법주의”) 라캉적 ‘행위’를 통해 반복적으로 되돌아와 상징계에 균열을 일으키는 상징적 현실의 방해꾼 대상 a로 인해 주체에게 “객관적 현실”은 영원히 접근 불가능하다. “자기”(self) 도 대상처럼 자기에게 접근할 수 없음으로 구성적이다. 궁극적으로 고정된 불변하는 현실 또는 상징적 의미도 없다. 즉 지젝의 변증법적 유물론은 두 비일관적 관점들 양자를 모두 열어놓음으로써 “시차”를 유지하는 방법론이라 하겠다. 지젝은 헤겔적 변증법이ㅡ개념의 총체성이 자기 완결적 원환을 그린다는 의미에서 “절대적 관념론”이 아니라ㅡ궁극적으로는 본질적인 것을 비본질적인 것으로부터 분리시키는 일이 불가능하다는 걸 드러낸다고 말한다. 지젝은 헤겔을 라캉의 견지에서 다시 쓰며 전통 형이상학(현실에 대한 이론)과 인식론(지식에 대한 이론)을 새로이 고안해냈다. 상상계와 상징계는 한 매듭을 이루는 세 개의 고리처럼 실재와 한 데 묶여 있고, 공유된 상징적 관행들과 상호주관적 언어 체계 안으로 구조화되기를 거절하므로 여하한 ”존재“ 혹은 실존의 개시는 내부에서 파열한다. “라캉과 지젝에게 욕망은 생물의 기능이 아니라, 상상적 투사(환상의 차원) 그리고 대타자가 가장 욕망하는 무엇이든 되려고 하는 시도와 관련되는 한 탈중심적”이다. “실재는 우리가 단순히 가리키거나 매일 경험할 수 있는 어떤 긍정적으로 존재하는 실체, 사건, 또는 속성이 아니다. 실재는 의식으로부터는 억압되는 경향이 있고, 따라서 그것은 단순히 ”객관적“ 사회 현실의 구성 요소가 아니다. 억압된 실재는 외재하지(exist) 않는다. 그것은 내재한다(insist)" 쉽게 말해보자. 상징적인 것으로부터 억압된 박근혜의 아버지 박정희는 징후라는 실재적인 모습으로 되돌아왔다. 박근혜의 아버지와 나의 아버지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 그런데 당신은 이 세상에서 무엇이 같다고 말하는가. 그토록 쉽게. 지젝은 영화 <지젝!>에서 자신의 많은 책 중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1989년 초판 발행), 『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물기: 칸트, 헤겔, 그리고 이데올로기 비판』(1993년 초판 발행), 『까다로운 주체: 정치적 존재론의 부재하는 중심』(1999년 초판 발행), 『시차적 관점』(2006년 초판 발행)을 가장 중요한 것들로 꼽았다.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은 라캉에게 덧입혀진 “구조주의” 해석과 헤겔에게 덧입혀진 “절대적 관념론”을 벗겨낸다. 『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물기』는 국가주의적 정체성은 숭고한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폭로한다. 『까다로운 주체』는 데카르트의 코기토에 대한 전통적 해석들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코기토는 방법적 회의의 기능적 역할이라며 주체가 ‘구성적’임을 보여준다. 『시차적 관점』은 “어떠한 조화로운 개념적 종합도 불가능한 두 사유 양식으로 분리시키는 ‘시차적 간극’을 고찰”한다. 우리에게는 존재론적 차이라는 궁극적인 시차가 있고, 경험과 설명 사이에 놓인 과학적 시차, 사회적 적대로 나뉘는 정치적 시차, 공공의 법과 초자아의 외설적 보충 사이의 시차적 간극, 집단적 사회 행동에서 물러나는 “바틀비적 태도”와 사회 참여라는 시차적 간극 등 두 사유 양식 사이에 끝없이 놓인다. “지젝이 현대적 생활과 문화의 모든 측면들(경제적, 정치적, 예술적, 종교적, 사회적, 성적 그리고 지성적인 측면)을 분석하면서 초점을 맞추는 것은, 극복불가능한 부정성이자 통약불가능성의 실재다.” 전체성이나 완전성은 우리의 환상이다. 그러므로 지젝의 변증법적-정신분석 접근은 지금까지의 모든 진리 개념이 부적절하다고 폭로한다. 지젝은 실재는 실체적 밀도를 갖지 않으며 두 관점 사이의 간극일 뿐이라고 말한다. 이런 의미에서 개별자(주체)와 보편자(공동체)도 양자를 관통하는 분열에 의해 만나고 화해할 가능성을 가진다. 상징적 초자아는 주체의 향유를 규제하고 금지하는 ‘법’이면서 위반하고 즐기라는 ‘외설적 명령’이라는 두 성격을 동시에 지닌다. 지금 시대는 후자와 자본주의가 강력히 엮여 있는 상황이다. “서구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의 반계몽주의적이고 상대주의적인 경향은 우리의 소외를 나타내는 한 징후다.” “포스트모던의 냉소주의는 우리 체계 내의 믿음을 타자에게로 옮기고 따라서 우리가 항복하거나 순응하라는 여하한 압력도 받지 않는다는 환상에 젖은 채 우리가 순응할 수 있도록(무반성적으로 자본주의가 여기 머물 것임을 받아들이도록) 함으로써, 범세계적 이데올로기를 지탱한다. 이것이 민주주의 이데올로기를 특징짓는 물신주의적 부인이다.” 그래서 지젝은 포스트모던을 그토록 비판한다. “물신은 상징적 의미작용의 연결망을 구성하는 내재적인 비일관성과 결여를 감추기 위한 통일성의 환상으로서 작동한다.” “자유민주주의라는 범세계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의 치명적 한계는 그것이 자본이라는 실재의 작동을 직면하는 데 실패한다는 것이다. 자본이라는 실재야말로 우리의 후기자본주의 상징적 질서 안에서 근원적으로 억압된 빈틈이다.” 이 모든 걸 종합하려는 노력이 악화를 더 양산한다. “지젝의 헤겔 독법에 따르면, 변증법의 요점은 적대들을 해소하는 것이 아니라, 두 대립적인 관점들 사이에서 시차적 이동을 실행하는 것이다.” 헤겔 변증법에 내포된 부정성은 ‘환상 가로지르기’이며, 상징적 대타자 안의 ‘결여를 경험하기’라는 라캉의 개념과 상통한다. 지젝은 국가적, 사회적, 공동체적 정체성들 속에서 참되게 보편적인 것은 단독적일 때 가능하다고 말하며 ‘개별적 보편성’을 강조한다. 개별적 보편성은 지젝의 변증법적 유물론적 존재론과 그가 복권을 강조하는 공산주의와 프롤레타리아의 연결고리이다.
헤겔과 라캉으로 변증법적 유물론이란 막강한 창이자 방패를 만든 지젝의 논리에 맞서려면 상대도 헤겔과 라캉 이론에 정통해야 가능하다는 점에서 그의 이론은 잘 만들어진 난공불락의 요새 같다. 지금으로선 나는 그를 독해하기 바쁘다ㅎㄱㅎ; 이 책이 논한 지젝의 저서 이후의 모습을 보여줄 『분명 여기에 뼈 하나가 있다』(2016년)를 읽고 나면 지젝의 빈틈이 더 잘 보일까. 궁극적으로 불완전하고 비합리적이고 비일관적이며 억압되어 있는 실재의 빈틈을 뚫어야 가능한 일이라 생각하니 더 아득하지만 나는 뭔가를 그냥 받아들이는 자는 아닌 개별자여서 이 진리를 향한 투쟁에 계속 관여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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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는 무슨이유인지 읽을때마다 슬라예보 지젝이라고 읽게되는 슬라보예 지젝, "한권으로 읽는 지젝"을 호기있게 펼쳤지만 본문에서 언급한것처럼 지젝을 읽는다는것은 당신의 인생을 풍요롭게 만들며 광범위한 세상이 보일거라는 언급도 있지만 개인적으론 심도있는 철학의 개념과 용어들에대한 물리적 지식이 짧아 쉽지 않았다. 또한 오늘날의 지젝을만든 철학계의 난이도있는 용어와 2중 3중 병치된 난해한 이론, 그리고 자신의 사상적 바탕이 된 헤겔이나 프로이드, F. W. Joseph von Schelling, 바디우, 라캉같은 인물들의 난해하며 부정되고 비정립된 개념들 사이를 넘나들며 포괄적이고 통섭적으로 정돈된 지식을 바탕으로한 이해를 요하는 개념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하나하나의 개념을 어느정도는 파악하면서 전후와 직전 앞뒤의 인과관계를 주관적 플룻이라도 억지로 짜맟추고 넘어가야하는, 좋다고도 또 나쁘다고도 할 수 없는 독서버릇이라서 숫하게 삼천포로 빠지곤해서 책장 넘어가는 속도가 느려도 너무 느렸다. 사족이지만 제문에서 말하는 "라캉의 스캔들"이란 한가지 문장을 이해하는데까지 30여분 이상이 걸렸으니, 간단히 말하면 그의 주창하는 철학적 논리와 삶의 처신에서의 간극이 혼란스러움을 말하는 것일게다. 그런 모습들이 엄밀하게는 어떤 사람의 사상을 말할때는 그가 살아오고 살아가는 방식과 무관할 수 가 없다는 측면에서 결국 키에르케고어적 몸짖이란 개인적인 몸짖, 공공연하게 내놓는 자기 개인의 충실로 이해해달라고하는 함의로 개인적으로는 이해하며, 어찌보면 지금도 라캉의 이해는 상당히 혼란스럽고 기이하다고 할 수 있다. 이해도는 단지 본문속 하나의 문장들을 끊어서 이해하고 알아듣는척 하는것으로 대신하며 책장을 넘길 뿐임을 고백한다. 지젝을 이해하는 중요한 관문이랄수있는 라캉에 대해서도 혹자들은 난잡하다고까지하는 그의 이론들과 저작물들이 같은 의미의 다른표현들로 반복순환하며 얼켜 어렵다는 것이고 지젝도 그러한 부분에서는 결코 뒤지지 않다고 말할수 있기때문에 서평날짜가 정해져서 출판사에게는 미안하지만 1/3은 주르륵으로 넘겼다고밖에 할 수 없다. 슬라예브 지젝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지젝관련 지적하고 있듯이 21세기 현대 철학게의 이단아로, 혹은 가장 인기있는 대중적인 철학자로, 물론 일부는 전혀 인정해주지않는 폄하적인 부분이 존재하는것도 분명함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인기적인 면에서 생각해보면 지젝은 그럴수있는 충분조건을 큰 자산으로 가지고 있다는 생각을 해본다. 난해한 철학의 고전과 더 난잡한 근현대 이론들 등 폭넓은 지식을 바탕으로 구체적으로는 프로이트와 헤겔의 정,반,합 관념철학, 바디우 주체이론, 라캉 정신분석 등 본문에서도 재등장하는 상상계, 상징계, 실재계에 관한 것 등 개념과 사상들이 계속해서 변화했기에 더욱 난해하며 여러가지로 스캔들한 라캉의 정신분석과 마르크스까지 넓고 직간접으로 넘머드는 사유에대한 포괄적인 통찰을, 학계는 물론 대중적으로 제공했다는 평가다. 물론 그의 이론들이 정립되지않은 부분에 대하여는 모두에서 언급한것처럼 지젝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다는것이 보편적인 평ㄱㅏ다. 개인적으로 아마도 지젝도 분명하게 말하자면 생전에 그의 주장과 이론적 사유함이 얼마나 변화하고 포괄할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또한 그의 평가가 높한 또 다른 분명한 이유가 지젝의 날선 비평이 자기를 향해서도 가감없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학자를 보다 높게 평가하는데 있어 이보다 더 큰 자산은 없을것이다. 한편으로 현실적인 문제들, 지구촌의 이슈와 예민한 사안들에대해 거침없는 직접적 사변들을 쏱어내는 지젝의 대중적인 활동을 적극 지지한다. 자신의 철학적 주관들을 현대적 사건과 이슈들에대해 침묵하지 않는다는 것은 독자에게는 크나큰 행운이고 고무적이라 할 수 있다. 그런 부분들에 대해서 대중들은 열광하고 주목하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마치 그의 강연이나 저서한두권 읽는다는것이 지젝을 이해하고 있다는 착각처럼... 보통 학자라하면 자신의 전공내에서 글을 쓰고 연구와 학술적 저작물 발간과 관계한 이들을 한계한 전문적 강의에 머문다. 그래서 특히 학자, 철학자들이 첨예한 현대적 이슈들에대해 방송회수가 전무한 이유가 그것이다. 학자에게 학문적인 강의라는 틀을 벚어나 대중 방송속에서나 대상으로한 라이브 강연을 접한다는 것은 학자로서는 일종의 대모험이다. 그만큼 자신의 학문적 수위에 가시적인 위험과 학자적 생명에대해 지식의 높낮이의 평가를 감행한다는 것인데 그렇기 때문에 안주하는 것이고 차이점이라면 지젝은 과감하게 그렇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것은 지젝 자신의 연구성과에 자신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 가치있고 숭고한 이유인즉슨 그만큼 자신의 학문적 성과가 정체되고 있지 않다는 반증이기도하다. [여러분도 아다시피 이세상 모든과정엔 임계점까지의 시간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그것이 학문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더군다나 평가가 진행형이기는 하지만 난해하다는 헤겔이나 라캉의 학문들을 소화하고 내것으로 만들어 학문적 지평을 넓혀 나아가고 있는 기의 발걸음이 기대되는 지점이 여기에 있다 더군다나 그는 현실적인 과제들에 침묵하지않는다는 것이 우리가 기대하고 있는 21세기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에대한 감사함이다. ㅇ1번에 한권으로 읽는 지젝은 지젝의 관심을 반영한 그래도 쉽게 발간된 몇되지않는 지젝서적으로서 관심을 가지고 읽게된다면 여러분의 지적인 소양과 수준을 한단계 업그레에드 시키기에 충분할것이다.] 여러분에게 지젝을 만날것을 권한다. 이것은 저자도 누차 강조했던 바이다. 나보다는 모두 낳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여러분이라면 쉽게 읽힐것이고 당신의 인생을 보다 풍요롭게 사유할것이라 믿어의심치 않는다...*** #도서출판 인간사랑 [본 리뷰는 yes24의 지원으로 작성하였습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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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사랑 출판사에 직간접적으로 압력(?)을 행사해서 얻은 책. 직접적인 압력은 읽고 싶다는 의사 표현이었고 간접적인 압박은 같은 블로거로서 쌓은 그간의 친분 정도였을 겁니다.
우선 용어 정의가 굉장히 필요한 책입니다. 용어 정의를 마친 후에 읽으면 어느 정도 속도를 낼 수 있지만 용어에서 막히면 읽는 속도가 참 느려집니다. 그래서 불편했냐구요? 네 불편했습니다. 그래도 왠지 뿌듯한 느낌을 갖고 읽었습니다. 독서를 좋아하는 분들에게 이제는 상식인 얘기 한 자락, 쉬운 책만 읽으면 뇌는 쉬운 책에 길들여져서 고전이나 생각을 요구하는 책을 읽기 싫어하 게되고 생각하기를 싫어하는 뇌로 바뀌게 되지요. "한 권으로 읽는 지젝", 이 책은 고전에 준하는 곤란함을 제공함으로써 쉬운 책이 아닌 동시에 자본주의사회에 대해 무력감과 불평등과 구조적 문제를 느끼고 있던 저에게 "이래서 이래! 그래도 가만히 있을래?"라는 주장을 하는 듯이 보입니 다. 그래서 이해가 안 되어도 읽고 이해가 쉽게 되면 반가운 마음에 읽었습니다.
반가웠거나 곤란했던 문장들을 공유해보겠습니다.
마르크스에 대한 일반적 해석에서 "이데올로기적 응시는 사회관계들의 총체성을 간파하는 부분 적 응시다." 그러나 지젝의 라캉적 관점에서 볼 때 이데올로기는 "그 자신의 불가능성의 흔적들을 지우도록 작동하는 하나의 총체성을 가리킨다."(숭고, 49) 이것이 부정성이라는 헤겔적 주제를 다 시 활성화사기 위해 지젝이 라캉의 이론을 어떻게 활용했는가를 보여준다. ...... 단순히 말해 상징 적 현실은 우리를 실재로부터 보호하는 이데올로기적 환상을 통해 구성된 가상이다. 99쪽
만일 우리가 도달할 수 있는 것이 오로지 현상들뿐이라면 현상이 아닌 것이라고는 없는데, 어떻 게 현상과 같은 용어 자체가 의미를 가질 수 있겠는가? 지젝은 이것이 바로 헤겔의 물음이라고 주장 한다. 그리고 그의 헤겔 해석은 모든 완전히 실현된 변증법적 종합을 가로막는 근본적인 부정성의 계기를 강조한다. 198쪽
이런 맥락에서 지젝은, 서구의 목격자들에게 참을 수 없었던 것은 사라예보 거주자들이 몸서리쳐 지는 고통이 아니라 이 사람들이 우리 자신처럼 그저 평범한 시민이라는 생각이었다고 말한다. 바로 이 때문에 서구의 자유민주주의적 주체들은 인종적이고 문화적인 차이들에 주목한 표면적이고 "탈 정치화된" 설명에 빠져, 보스니아 분쟁의 더 깊은 정치적 경제적 원인들을 인식하는 데 완전히 실패 했다. [전이]의 1부에서 지젝은 특히 인종적이고 종교적인 비관용에 주목해 보스니아 분쟁의 원인을 문 화 충돌로 보는 통상적인 걸명들을 반박한다. ...... 참된 원인은 인종적이고 종교적인 긴장 아래, 세 계 시장의 범세계화에 함축적인 권력 투쟁에 놓여있다. 요컨대 폭력은 범세계적 자본주의의 권력 관 계들에서 구조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208쪽 사라예보 사태도 소말리아 내전도 그리고 5.18사태도 생각나게 하는 부분입니다. 범세계적 자본주 의 또는 거대 자본의 이익을 위해 벌어진 또 벌어지고 있는 많은 일들을 실재라고 느끼지 못하고 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한, 그리고 지젝의 주장처럼 사라예보 사람들도 같은 사람들이었고 그들이 겪은 고통이 다시는 발생하면 안 된다는 신념과 구조적 장치가 마련되지 않는한 이런 폭력은 반복될 것이기 때문에 세계시민들은 똑바로 실재를 직시하고 고개들 돌리지 말아야겠습니다.
예를 들어 소말리족은 참된 클라인학파적 분열을 겪어 선하면서도 악한 대상이 된다. 그들은 한편으로 는 선한 대상, 즉 수동적 피해자들, 고통받는 굶주린 아이들과 여자들이 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나쁜 대상, 즉 그들의 권력 혹은 그들의 이데올로기적 목적들을 그들 국민들의 복지보다 더 중시하는 광신 적인 군 지도자가 된다. 선한 타인은 피해자의 익명적이고 수동적인 보편성 속에서만 산다. 우리가 실 재의/능동적인 타자와 마추지는 순간, 비난거리는 얼마든지 찾아낼 수 있다. 그들은 가부장적이나 광 적이고 비관용적일 것이다.([전이]. 215)
프로이드가 사유했던 빅토리아 시대에 초자아가 패권적으로 기능하던 모습과는 대조적으로, 후기 자 본주의 시대 두드러진 초자아의 명령은 부패, 기회의 불공평 그리고 다가오는 생태적 재앙에 대해서는 까맣게 잊고 단순하게 "즐기라!"는 것이다. [까다로운 주제]는 부성적 은유가 쇠락하고 윤리적 정치적 원칙들은 효력을 갖지 못하는 오늘날에도, 범세계적 자본주의의 생산 관계들이 실제로는 항상 새로운 방식의 금지를 통해 균질화된 사회 현실을 구성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참된 공표는 범세계적 자본의 보편성 아래 숨겨진 개별적 내용물이 아니라 오히려, 자본이 실로 맹목 적으로 제 길을 달리는 어떤 익명의 범세계적 기계라는 사실, 실제로는 그것을 움직이는 어떠한 개별적 비밀 요원도 없다는 것에 놓여있다. ...... 오늘날 목소리를 높이는 다문화주의의 문제의식은 그것이 대 립자, 즉 범세계적 체계인 자본주의의 위대한 현존이 현상하는 형식이라는 것이다. 즉 그것은 우리 세 계의 전례 없는 균질화를 증명한다.([까다로운 주체], 218)
지젝의 라캉은 ...... 실재, 상상계, 상징계라는 라캉의 유명한 삼위관계에서의 첫 번째 범주인 실재 를 사유하는 라캉이다. 276쪽
이 변증법적 역동은 대립자들의 역설적 일치로 끝나는데, 이로써 우리는 오늘날 해로운 속성들을 제 거한 제품군들 카페인 없는 커피, 지방 없는 크림, 알코올 없는 맥주 등등이 시장을 가득 채운 모습을 보게 된다. 가상공간은 가상의 섹스, 섹스 없는 섹스를 제공한다. 그리고 디지털 전투 기술은 사상자가 없는 전쟁, 결국 전투 없는 전투를 약속하는 그럴듯한 외양을 제공한다(환영, 11) 370쪽
지젝은 소위 테러와의 전쟁이 실제로는 반세계화 운동을 억누르고 그로부터 주의를 돌리는 하나의 방법일 가능성을 제기한다(이라크 61) 만일 이러한 제안이 편집증적으로 보인다면, 다음을 기억하는 것이 유의미할 것이다. 그렇다면 2002년 12월, 이라크의 대량 살상 무기에 대한 11800페이지짜리 보고서가 안전보장 이사 회에 제출되었을 때, 그 보고서를 미국이 먼저 걸러냈다는 것, 그래서 유엔에 도달하기 전에 미국의 이라크와의 공조를 문서화한 수천 페이지!를 빼돌렸다는 것도 놀라운 일은 아니다(이라크, 65) 430쪽
만일 우리가 그러한 거절의 몸짓에 참여한다면, 우리는 실질적 변화를 이끌어낼 결정적인 정치적 행 위의 가능성을 인식학 될 것이다. 결롸적으로 우리가 연합하여 불가능해 보이는 것을 현실화한다면, 혁명적 주체들의 공종체가 전체 사회정치적 질서의 조직을 변형해낼지 모른다. 그것이 라캉이 강조한 프로이드적 메타심리학의 결정적 통찰이다. 금지의 기능은 천진함이 이전에 누리던 낙원적 안식을 방해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공포를 일으키는 교착상태를 해소하는 것이다. (시차, 89) 457쪽
근본주의자들의 정념은 거짓된 것인 반면 창백한 자유주의적 관용은 부인된 도착적 정념에 근거한 다. 근본주의와 자유주의 간의 구분은 공유된 근본적 특질에 의해 지탱된다. 그들은 모두 분개라는 부 정적 정념에 의해 관통된다.(옹호, 333), 492쪽
지젝의 입장은 철학에서는 헤겔적이고 정신분석에서는 라캉적이며 종교에서는 기독교-유물론적, 정치에서는 공산주의적이다. 571쪽
이 책은 지젝의 대표작 24편을 다룸으로써 지젝의 핵심적인 사유를 밝혀 보여준다. 옮기고 다듬으 면서 파악한 이 책의 미덕은 무엇보다 책 전체에서 저자의 지젝 해석과 지젝 본인의 목소리가 절묘 하게 어우려진다는 데 있다. 한편으로 저자는 각 저서 내부의 흐름을 존중하여 충실히 기술하려 할 뿐, 지나치게 간략한 문구로 그것들을 일목요연하게 비교 정리하려고 들지 않는다. 우리는 어렴풋하 게만 알아들은 내용이 책의 진행에 따른 거듭되는 중복 속에서 보완되고 명표해지는 것을 경험한 다. 607쪽
정말 거듭되는 중복을 느낄 수 있었고 그 중복을 따르다보면 '아 이게 이런 의미였구나.'하는 것을 느 낄 수 있었습니다. 우리 말에 첫 술에 배부르랴라는 말이 있지요. 지하철을 타고 오고가며 읽었는데 어느 파트는 어렵게 어느 파트는 비교적 쉽게 읽을 수 있었지만 상상력을 발휘하거나 상황에 대입해 서 느껴보려하니 쉽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카사블랑카나 "데이비드 린치 감독의 로스트 하이웨이에 대하여 : 우스꽝스러운 숭고의 기술"을 읽으면서 재미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좋은 기회주신 인간사랑님과 예스24와의 인연에 감사드립니다.
이 리뷰는 출판사에서 도서를 증정받아 작성하였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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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슬라보예 지젝을 알게 된 계기는 철학에 있어 변증법에 관심을 가지면서부터였다. 근현대 철학을 배우면서 변증법은 피할 수 없는 사고의 틀이었고, 이런 변증법을 비판적으로 계승한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슬라보예 지젝이기 때문이다. 지젝에 관심을 가지며 그의 글을 검색하여서 읽었는데, 내가 읽었던 글은 영화에 대한 글이었다. 그 글에서 느껴지는 박식한 세계관이 굉장히 매력적이었다. 이후 지젝을 다시 만나게 된 것은 경제학 저서를 뒤지면서였다. 마르크스의 공산주의 이론을 공부하고, 공산주의 사상이 현대에는 어떻게 계승됐고 발전됐는지를 알아보는 과정에서 나는 과거에 만났던 지젝을 다시 마주하게 됐다. 두 번의 만남을 통하여, 나는 지젝의 철학에 궁금증이 생겼지만, 물리적 시간의 한계와 나의 게으름을 핑계로 만남은 쉽게 이뤄지지 않았다. 그러다 최근, 이렇게 개론서를 통하여 지젝의 관념을 처음이자 본격적으로 접하게 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