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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은 표지의 끌림이 너무 강렬해서 책을 고를 때가 있다. 나 같은 경우엔 배수아가 그런 경우였다. 사실 개인적으로 별로 안 좋아하는 작가였는데, <북쪽거실>의 표지로 쓰인 Giorgio de chirico의 'The Mystery and Melancholy of a Street'가 너무나 강하게 나를 이끌어 책을 안 읽을 도리가 없었다. 결국은 <북쪽거실>을 읽었고, 매우 만족스러운 독서였던 걸로 기억한다. 그 뒤론 틈날 때마다 배수아의 작품을 찾아 읽고 있구. 뭐랄까... 좋은 표지는 일종의 화룡점정 같은 거라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그려 넣는 눈동자. 때론 그 점 하나 때문에 그림 속 용이 승천하기도 한다. 좋은 표지의 역할이 그런 게 아닐까? 작품의 내용이나 이미지와 잘 부합하고 작품의 내용을 잘 드러내는 표지는, 그 자체로 하나의 독립된 작품이면서, 작가와 작품을 돋보이게 하니깐. 전수찬의 <오래된 빛> 역시 표지으 끌림이 강렬한 책이다. 자, 여기에 한 장의 사진이 있다. 이 사진을 보고 어떤 생각이 드는지. 당신이 느끼는 감정, 당신에게 드는 생각... 그걸 긴 문장으로 풀어낸 것이 바로 전수찬의 <오래된 빛>이다.
사타_SaTARK#08_archival pigment print_80×80cm_2010 printed by Gihl young-hoon
따라서 사실 이 사진 한 장으로도 이 소설의 리뷰는 충분하다. 거기에 이 리뷰의 제목으로 뽑은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까지 더해지면 더 이상의 말이 필요 없다. 그렇지만 이대로 리뷰를 마치면 너무 성의 없어 보일 테니 몇 마디를 사족처럼 붙인다면 다음과 같다. 이 작품은 폭력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그런데 전수찬이 주목하는 것인 그 폭력이라는 것은 가해자와 피해자로 나눠 생각할 수 없는 문제라는 점이다. 비슷한 시기에 한창훈의 <꽃의 나라>와 전수찬의 <오래된 빛>을 함께 읽었는데, 두 작품은 서로 다른 듯 닮았고 닮은 듯 다르다. <꽃의 나라>가 좀더 거시적으로 국가 폭력까지를 아우르고 있는데 반해 전수찬의 <오래된 빛>은 일상의 폭력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결국 둘 다 ‘폭력’의 문제를 다룬다. 가정 폭력, 학교 폭력, 국가 폭력… 그 모두가 기실 ‘폭력’이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우리는 그 모든 폭력에 둔감해졌다. 아비가 어미가 자식을 때리고 부인이 남편이 배우자를 때리고 애인이 사랑하는 남(여)자의 뺨을 때리고 학교나 군대에서 통제를 이유로 ‘줄빠따’가 남발하는 그런 일상화된 폭력들 속에서 우리는 숨을 쉬듯 살고 있다. 마치 폭력이 공기나 되는 것처럼. 아들 창호가 죽은 후로 몸속에 돌을 품고 사는 아내와, 동생이 죽은 후로 무감각한 세월을 보내는 창수, 잃은 아이를 못견뎌하며 낳은 딸 진서와, 아들에 대한 복수의 일념을 가진 영웅적이라기보다는 소심한 남편. 피해자의 가족들이다. 그리고 그 반대편에 가해자의 가족이 있다. 아들에게 언제나 손찌검을 일삼던, 해병대 전우라는 것이 못내 자랑인 아버지와 아들의 사건 이후 마음의 문을 걸어 잠그고 오직 교회에 의존하는 시든 꽃 같은 엄마, 그리고 뚱뚱한 육체를 지니고 사는 남자. 그에게도 가해자라는 낙인 이외의 ‘기환’이라는 본래의 이름이 있다. 일본의 추리소설이나 북유럽의 추리소설에서 자주 다루는 선과 악의 문제, 죄의 문제를 다룬다. 가해자과 피해자의 가족 이야기에 시골 마을의 보수성과 폐쇄성이 더해져 주제는 더욱 심화된다. 예를 들면 폭력의 소극적 동조자들에 대한 문제. 이들을 어떻게 볼 수 있을까? 어쩔 수 없었으니 면죄부를 줘야 할까, 아니면 그들도 가해자일 따름인가? 사실 이런 문제는 생각보다 매우 복잡하다. 예수가 아닌 이상 그 누구도 이런 문제에서 자유롭지 않다. 왜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는 걸까? 그런데 왜 그러면서도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멈추지 못하는 걸까 그 사람들을 부러워하지 않았다. 그 사람들은 미처 불행이 닿지 않은 사람들일 뿐이었다. 불행을 저주하지 않았다. 우리는 그저 그전까지 우리가 모르던 곳으로 갔던 것뿐이었다. (pp. 200-201)
[덧붙임] 1. 한창훈 <꽃의 나라>를 어떻게 정리할까 고민하던 중 이 책을 읽고, 그 작품의 리뷰 제목은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변형해서 붙여야겠다고 생각했다. 2. 사진의 이미지는 http://www.neolook.com/archives/20101213c에서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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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에서 당해온 괴롭힘을 더 이상 견딜 수 없다는 글을 남기고 죽음을 택하는 아이들이 늘고 있어 사회적으로 이슈가 되고 있습니다. 학교에서 혹은 학원에 가는 길에 누군가에게 끌려가 돈을 빼앗기고 얻어맞는 일도 있다고 합니다. 돌이켜 보면 40년도 더 넘은 옛날 지방소도시에 있는 학교에 다닐 적에도 비슷한 일을 당했던 경험이 있습니다. 평소에 잘 다니던 산길이라서 방심했던 결과이고 그 뒤로 다시는 그 길로 다니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전수찬 작가님의 소설 <오래된 빛>은 학교폭력에 관한 사회적 이슈와 맞물려 주목할 만한 작품이라고 하겠습니다. 조금 더 설명하면 학교폭력으로 인하여 두 가족이 무너져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습니다. 물론 작가는 해답까지 내놓지는 않아서 온전히 독자의 몫입니다.
저는 사건의 발단이 가족사회로부터 학교, 사회에 이르기까지 집단에서 소통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한데서 시작한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우선 피해자 가족의 경우 학교에서 맞고 다니던 작은 아들이 부모님께나 혹은 형에게 그 사실을 털어놓지 못하고 혼자서 가슴앓이를 하면서 끌려 다니다가 어느 날 죽음을 맞게 된 것입니다.
예전 같으면 형제 가운데 누가 밖에서 맞고 들어오면 다른 형제들이 쫓아가 따지기라도 하거나 대부분 형들과 같은 학교에 다니기 때문에 그 형들의 후광으로 큰 문제가 없기도 하였습니다. 심지어는 같은 반이라는 집단결속력은 다른 반 아이들의 폭력에 공동대응하는 묵계같은 것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부모는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고 합니다. 그만큼 상처가 커서 잊기 어렵다는 말입니다. 복수는 또 다른 복수를 불러온다는 점을 깨닫게 되면서 범죄에 대한 처벌을 사회적 계약에 따르게 되었다는 것인데, 이 소설에서처럼 죽음에 간접적으로 기여한 경우에는 처벌할 수도 없어 피해자가 느끼는 감정은 쉽게 풀리지 않게 되는 것 같습니다.
이야기를 음미해보면 가해자로 지목된 소년은 아버지의 강압적인 자녀교육방식의 또 다른 피해자인 셈입니다. 체격이 우람해야 한다는 이유로 별별 보양식을 먹여 돼지라는 별명을 들을 정도가 되면서 학교생활에서 문제를 일으켜온 가해학생은 오히려 피해학생과 친하게 지내고 싶은 마음이 역설적으로 폭력을 행사하게 되는데, 그 옛날 관심을 두고 있는 여학생에게 더 짓궂은 장난을 하는 경우와 비슷하다고 하겠습니다.
가해학생의 아버지가 사태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적극적으로 사과하고 용서를 구하였더라면 가해학생의 삶이 왜곡되지는 않았을 것이며, 피해학생의 가정도 피폐해지는 일은 없었을 것 같다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칭찬이 고래도 춤추게 만드는 것처럼 사과는 죽이고 싶을 마음까지도 녹여내는 힘이 있다고 합니다(쿨하게 사과하라; http://blog.yes24.com/document/3698623). 설사 피해학생 가족이 쉽게 용서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진심을 보이면 언젠가 마음이 통하게 되지 않을까요?
또한 피해학생 가정에서도 아내와 남편이 서로의 아픔을 제대로 감싸 안았을까요? “한 해가 지나 창호의 기일이 가까워지자 아내는 집을 나갔다. 그 사흘 동안 아내를 찾지 않았다. 집에 돌아온 아내의 얼굴은 시멘트로 빚어놓은 것 같았고, 그래서 문지르면 가루가 부스스 떨어질 것 같았다. 아내는 집에 돌아와 아기를 갖게 해달라고 매달렸다.(37쪽)” 그리고 정말 여자아이를 낳았습니다. 그 여자 아이가 나머지 가족들의 슬픔과 분노를 녹여주는 존재가 되었을까요?
사필귀정이라 하지 않습니까? 가해학생도 스스로도 용서되지 않는 자신과 자신의 마음을 헤아려주지 못하는 아버지에 대한 원망으로 삶이 흐트러지고 말았는데, 타인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주는 사고를 치지는 않았다고는 하지만 결국은 자신이 속한 사회에서 겉도는 존재가 되어 엉뚱한 사고로 이어지는 결과를 초래하였으니 모든 것은 처음 일이 벌어졌을 때 제대로 마무리를 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결국은 오랜 세월이 지난 다음에 그 일에 대한 결산이 이루어진 것이라고 보겠습니다. 피해학생의 어머니가 담석증으로 수술을 받는 것 또한 예사롭지 않습니다. 마음에 쌓이는 스트레스가 담낭에 엉켜 돌로 만들어진 것은 아닐까요?
기억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가해학생은 피해학생의 책상에 놓인 흰국화꽃을 보면서 그날의 기억을 지우기 위하여 의식적으로 머릿속을 백지처럼 비웠다(127쪽)고 했습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남성들은 나쁜기억을 더 오랫동안 간직한다고 합니다(http://blog.joinsmsn.com/yang412/12538432). 그리고 피해학생의 어머니가 담석증으로 수술을 받는 동안 아버지는 혼란스러운 기억으로 고통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기억은 한 줄기 빛처럼 파고들었다. 죄책감을 남기고 지나갔다. 죄책감은 뿌리가 깊었다.(90쪽)” 결국 작은 아들의 죽음에 대한 죄책감이 마음 한 구석에 뱀처럼 또아리를 틀고 앉아 사라지지 않고 있었던 것입니다. 제목 <오래된 빛>은 바로 그 기억을 이르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 이 리뷰는 이벤트를 통하여 받은 책을 읽고 작성된 것입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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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아이의 죽음 뒤에 남은 두 가족의 이야기.
한 사람이 주인공이라기 보다 두 가족이 각기 주인공이다. 이후에 그 두 가족은 어떤 삶을 살았을까? 두 가족에게 남은 상처와 죄의식은 그 사람들의 삶을 어디로 몰아갔을까? 한 아이의 죽음 뒤에 남은 두 가족의 죄의식을 통해 삶의 불행을 바라보는 인간의 내면을 그렸다. 주인공 창수의 아버지의 고뇌, 그리고 마지막에 그가 걸어가던 장면이 너무나 안타깝다. 배경은 여름이지만 겨울에 읽기에 오히려 좋은 소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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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한 가족이 있다. 대학생인 아들과 초등학생인 딸, 그리고 엄마와 아빠로 이루어진 아주 평범한 가족이다. 하지만 이 가족의 퍼즐에는 영원히 되찾을 수 없는 한 개의 퍼즐 조각이 있다. 그 조각이 사라지고, 많인 시간이 흘렀지만 이들은 그 시간으로부터 온전히 벗어나지 못한 상태이다. 아주 오래전 사라진 빛이 바로 지금 이 순간을 희미하게 만들고 있는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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