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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대단하다. 정말 대단하다. 수준 높다. 정말 수준 높다. 처음에 이 책의 제목이 마음에 안들어 안읽으려 했다. '참치 여자'가 뭐람. 이 책의 원제는 <세상의 중심으로 잠수해 들어간 여자(La mujer que buceó dentro del corazón del mundo)>이고, 프랑스판의 제목은 <나(Moi)>이다. 아마도 원제목으로 하기엔 조금 길어서 독자의 시선을 끌기 어렵다고 본 모양이다. 그래도 그렇지 참치여자는 어감이 참 별로다. 거미여인, 종이여자 등은 그래도 어떤 독특한 의미가 있어보이는데, 먹는 참치라... 남성적 사고로는 먹는(?) 느낌의 이중성 때문에 선정하기 어려웠을건데 이 제목으로 채택한 걸 보니 이 책의 제목 결정권자는 '여성'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그래도 '나'가 붙어 <나, 참치여자>로 제목을 단게 그나마 나아보이지만 별로인건 마찬가지다. 물론 이런 느낌은 나만의 혼자 잡생각이다. 이렇게 심드렁하게 책을 열고 몇장을 읽어나가자 그 내용과 저자의 필력(번역도 참 매끄럽다. 중남미 책 특유의 난독번역에 고생해본 분들은 안다)에 흠뻑 빠지고 만다. 만약 그냥 지나쳤다면 이런 느낌있는 소설을 읽지 못했을거라 생각하니 살짝 멋쩍어진다. 그만큼 잘 쓴 소설이다.
잘 쓴 소설의 의미를 한번 짚어보자. 소설의 내용이 독자의 흥미를 이끌어내고, 그 표현 기법이 신선하여 읽을수록 절로 몰입하게 하는 가운데, 작가의 시대 정신에 공감하고 지향하는 가치에 깊은 울림이 있다면 좋은 소설이요 잘쓴 소설이 아니겠는가! (물론 고전으로 남을려면 여기에 더하여 인간의 도덕성에 연결되는 영혼의 깨침이 있어야 할 것이고...) 이런 잣대가 크게 허물이 없다면 이 책은 잘 쓴 소설에 속한다. 주인공 '카렌'은 자폐아(autistic child)이다. 그냥 이런 주제면 식상하겠지만 영화 '레인 맨'의 더스틴 호프만처럼 한 분야에서 놀라운 능력을 발휘하는 고기능성 자폐증(일명 백치 천재)이기에 일단 흥미로운 캐릭터가 된다. 어린시절 마치 짐승처럼 자라온 카렌은 엄마가 죽고난 후 이모를 만나고서야 사람으로 바뀌어가지만, 그녀의 자폐증에서 발산되는 행동과 시각은 참으로 묘한 매력으로 사람의 마음을 끌어당긴다. 또한 간간히 감정 표현을 이모티콘으로 보조 설명하거나 글자를 그림처럼 나열하는(214쪽) 표현기법은 신선함과 함께 볼거리를 준다.
카렌은 힘들때면 잠수복을 입고 하네스(대형물고기를 매달아두는 장치)에 매달려 있거나 깊은 바닷속에 드러누운채 '존재'를 생각하길 좋아한다. 이게 참 묘하다. 나는 이 두가지 행동에 매료된다. 바닷가에 살다보니 바다 속에서 느끼는 포근함과 든든한 잠수복 속에서 안도하는 자아가 이해가 된다. 잠수복은 갇힌 몸의 상징이며 바닷 속은 엄마의 자궁과 같은 공간이다. 장 도미니크 보비의 <잠수복과 나비>가 생각난다. 이 소설 또한 종국에는 나비처럼 자유로운, 푸른 바다를 마음껏 회유하는 참치처럼, 문명의 구속에서 자유롭고 싶은 인간의 마음을 대변한다.
잠수복을 입고 하네스에 매달린 채 천천히 숨을 쉬면서, 나는 오후 햇살을 받아 금빛으로 반짝이던 바다를 볼 수 있었다. 바다는 순수한 빛으로만 이루어진 세계처럼 보였다. 아니면 빛이 액체로 변하면서 나타난 현상이라고 하는 편이 더 나을까? 그리고 파란 하늘은 거의 하얀색에 가까울 정도로 창백한 빛을 띠고 있었다.(56쪽)
마치 외계인의 시각에서 바라보는 듯한 카렌의 자폐적 공간적 사고와 행동을 통하여 읽는 사람은 자신의 '나'에 대해 미묘하게 흔들리게 된다. 본래의 '나'는 짙푸른 바닷물 속에서 천천히 녹아 사라져 버리고, 본래의 '나'로부터 빠져나온, 본래의 내가 아닌 크고 행복한 나만이 바다에 남아 있었다(181쪽)는 카렌의 말은 오온(五蘊)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참된 자아(眞我)를 일컫는 것 아니겠는가! 울림은 여기에 있다. 애초에 프랑스판 제목이 '나'일때 알아봤어야 했다. 참치천국의 건설이라는 자연환경과의 조화보다 더 깊은 곳에 대승(大乘)의 가르침이 숨어있었음을 읽을 때는 몰랐다. 책을 덮고나서도 그 여운이 남아도니 고전까지 갈 작품은 아니더라도 꽤 잘 쓴 소설임이 틀림없다. 이런 소설을 한 해 마무리하는 시점에 읽을 수 있었던 것은 일종의 행운이다. 자폐의 증상이 아주 자연스러운 인간성의 고찰로 느껴질 때, 스탠더드한 인간과 다른 존재의 '차이'와 진정한 '자유'를 다시 생각한다. 어쩌면, 정말 어쩌면 우리는 말 못할 하나씩의 자폐증상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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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중심으로 잠수해 들어간 여자", <나, 참치여자>의 원제이다. <SF세계에서 안전하게 살아가는 방법>, <불완전한 사람들>에 이어 NFF(NEW FACE OF FICTION) 세 번째 소설이라는데,,, 제목 참 독특하구나. 사실,,, 찰스 유의 <SF세계에서 안전하게 살아가는 방법>부터 호기심을 자극하는 소설을 출간했던 NFF라 <나, 참치여자> 역시 어떤 내용일까 궁금했음이다. 접하기 힘든 멕시코 소설이라는 점도 호기심을 자극했는데,,, 중남미 문학의 소설들은 다소 현실과 환상을 넘나듬과 동시에 사회성 짙은 풍자로 그 매력을 충분히 풍기고 있음이니 말이다.
현대 멕시코 문화예술계를 대표하는 작가 사비나 베르만,,, 극작가, 시인, 각본가, 영화제작자, TV 토크쇼 진행자, 칼럼니스트까지,, 다양한 방면에서 재능을 발산하고 있던 그녀가 2010년, 소설가라는 또 하나의 타이틀을 추가한 작품이 바로 <나, 참치여자>이다. 역시나 중남미 문학의 매력을 충분히 발산하고 있음이었다.
주인공 '카렌 니에토'은 자폐아로 한 분야에서 놀라운 능력을 발휘하는 고기능성 자폐증을 앓고 있는 인물이다. 짐승처럼 내버려진 채 키워진 카렌은 엄마가 죽고 난 뒤 유산을 물려받기 위해 캘리포니아에서 멕시코 마스틀란(멕시코 최대 어항)에 도착한 이사벨 이모를 만나게 된다. 바닷물과 참치 피가 뒤섞인 구역질나는 공장을 지나 집에 도착한 이사벨은 오른쪽 어깨부터 왼쪽 허리까지 커다란 흉터를 갖고 짐승처럼 살고 있는 커다란 눈망울의 소녀를 만나게 된다. 이사벨 이모는 그 아이를 사람답게 만드는 일에 지극한 정성을 바치면서 그녀의 ‘독특한 능력’이 발휘되기 시작한다.
p 21 제일 먼저 이모는 아이에게 말을 가르치려고 무진 애를 썼다. 나. 나. 나. 까까머리였지만 스타킹에 샌들까지, 갖출 건 모두 갖춘 채, 바다를 마주보고 목이 터져라 나를 외쳐대던 나는 1978년 8월 21일, 그렇게 세상에 태어났다.
이모의 등장과 함께 카렌은 ‘나’ 그리고 ‘세상’과 대면하게 된다. 소설에는 유난히 ‘나’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한다. 이런 그녀의 언어습관은 소설 전반에 걸쳐 끊임없이 등장하는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명제에 대한 깊은 반감적 형태로 드러난다. 익히 알고 있던 데카르트의 명언을 이리도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있었던가? 그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생각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기에 생각하다는 것이다. 인간과 언어로 사고하지 못하는 존재들 사이에 그어진, 건널 수 없는 금을 지우려 노력함으로서, 인간과 동물, 인간과 자연이 하나 될 수 있음을 정립시켜 나간다고나 할까? 세상과 단절된 채 살아온 카렌은, 이사벨 이모의 포기하지 않은 부단한 노력으로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나름의 방법을 터득케 된다. 물론 “스탠더드한 사람들”은 여전히 그녀를 독특한 시선으로 바라보지만 말이다. 어찌됐든 성년의 나이가 된 카렌은 지적능력이나 유사한 개념이나 이미지를 서로 연결하는 것, 어떤 이미지에 주관적 세계를 투사하는 능력은 유치원 수준이었지만 공간지각 능력과 사물에 대한 집중력, 주의력 지속성, 공간조직능력에 있어서는 천재적인 능력으로 갖고 있는 그녀를 정확히 파악한 이사벨 이모는 얘기한다.
p 246 네 지능의 90% 정도는 저능아와 백치 사이에 걸쳐 있어. 하지만 나머지 10%의 능력은 최고, 아니 그 이상의 수준이라고 보면 돼.... 지금 화면처럼 네 장애를 표시하는 90%의 빨간 숫자는 앞으로 모두 잊어버리자. 그리고 파란색으로 표시된 10%, 그러니까 네가 지닌 뛰어난 능력에 모든 걸 걸어보자꾸나. 어때?
그렇게 ‘독특한 능력’을 갖고 있는 카렌은 미국 유학을 거쳐 이사벨 이모와 함께 참치회사를 경영하며, 독특한 어획 방식(돌고래에게 해가 되지 않게 참치를 포획하고 인도적으로 도축하는)을 개발하고, 사업가인 굴드를 만나 동업을 통해 성공적으로 기업을 이끌어가며, 그녀만의 독특한, 스탠더드:표준의, 전형적인 인간들과는 다른 방법으로 인생을 살아간다. 어쩌면 카렌은 우리에게 스탠더드한 인간들의 존재에 대한 생각이 잘못돼 있음을 직설적인 어법으로 질타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모든 생각과 모든 존재함은 인간들 위주로만 생각하고, 인간이 우위에 있음이 당연 시 되고 있음을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스탠더드함이 결코 스탠더드함이 아닌 어쩌면,, 가장 독특함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일깨워주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p 362 카렌, 넌 말이다. 이모는 내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힘주어 말했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넌 말하는 동물과 말하지 않는 동물 사이의 가교 역할을 해야 해. 넌 현실과는 또 다른 계약을 이루기 위해 태어난 돌연변이 종이니까 말이야.
흥미롭고 매력적인, 게다가 참치처럼 팔딱이는 신선함과 함께, 환경과 인간의 지배적이면서도 권위적인 시각에 대한 비판과 함께 사회적인 울림을 동시에 전해주고 있는 소설이었다. 사실,, 쉽고 흥미롭게 읽자면 얼마든지, 어렵고도 깊게 사색케 만들자면 얼마든지, 그럴 수 있는 소설이다. 하지만,,, 이것 한 가지! 독특한 능력 그 자체인 카렌 니에토, 그녀가 ‘나’를 찾아가는 동화 같은 이야기의 여운은 [아주 가끔씩, 그것도 꼭 필요할 때만, 아주 느릿느릿 어렵사리] 다가올지도 모를 일이다.
p 357 어쩌면 내 인생에서 가장 길게 느껴졌지만, 또한 가장 조용하게 보내던 그때, 이모와 나는 아주 조심스럽게, 살아가는 데만 전념했다. 살아간다는 것. 내게 있어서 그것은 조급한 마음을 버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긴장을 풀고 심장이 원래의 리듬대로 뛰도록 만들어주어야 한다. 덥다는 생각을 하지 말고, 태양의 열기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한다. 설령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다 해도 배가 고프면 먹어야 한다. 그리고 밤이 오고 온 세상에 어둠에 잠겨 잠이 오면 무조건 몸의 요구에 따라야 한다. 세상 사물들도 어둠 속에서 쉬어야 할 테니까. 다시 태어난 기분으로 이 세상을 살아야 한다. 그런 마음으로 살고, 또 봐야 한다. 내가 이 땅에 살아 있는 동안 모든 걸 있는 그대로 볼 줄 알아야 한다. 당장 내일 이 세상에 없을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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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렌 니에토. 인간의 모습이지만, 마음과 생각은 자연에 속한.. 인간과 자연의 중간 지점이랄까.. 그즈음의 인간. 그리고 바다를 참 많이 닮은 여자..
책을 읽으면서.. 한없이 부족한 나의 상상력을 탓하며, 이건 영화로 만들어지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카렌이 잠수복을 입고서 참치들과 어우러지는 모습은 짧은 내 상상력으로도 충분히 멋지고 아름답기는 했지만, 영화로 그 영상을 볼 수 있다면 더더욱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인어공주>나 <니모를 찾아서>를 보는 것처럼 화려하고 아름다운 영상이 나오지 않을까..
바다에 가고 싶어졌다. 20분만 걸어나가도 볼 수 있는게 바다인데도.. 나는 바다가 왜 이렇게도 멀게만 느껴지는 건지..^;;
p.45 이모는 내게 말했다. 카렌,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명심하기 바란다. 어느 누구도 널 모자란 아이라고 놀리지 못하도록 해야 돼. 넌 절대로 모자란 게 아니야. 넌 다른 아이들과 조금 다를 뿐이란다. 카렌, 무슨 말인지 알겠니?
p.48 나는요, 내게 맞는 작업복이 있는지 알고 싶어요.
p.59 그리고 그들은 결코 냉혹하지도, 잔인하지도 않다. 바닷가재는 여덟 개의 발로 움직이면서, 길 잃은 갈고등어 한 마리를 한입에 집어삼킨다. 하지만 죽음의 공포 앞에서 벌벌 떨고 있는 먹이에게 무자비하게 발길질을 한다거나 비웃거나 하는 짓은 절대로 하지 않는다. 한입에 꿀꺽 삼키고 나면, 조용히 자리를 뜬다.
p.357 다시 태어난 기분으로 이 세상을 살아야 한다. 그런 마음으로 살고, 또 봐야 한다. 내가 이 땅에 살아 있는 동안 모든 걸 있는 그대로 볼 줄 알아야 한다. 당장 내일 이 세상에 없을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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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은 감각의 문제다. 즉 보고, 듣고 만져보고, 혀로 맛보는 것.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행복이다.” 그의 말이 옳다. 가장 소박하면서도 진정한 행복은 우리의 감각으로 느끼는 것, 다시 말해 눈으로 보고, 피부와 혀, 그리고 코와 귀로 느끼면서 생각하는 것이다. [본문 중] 우선, 이 책. 독특한 느낌의 멕시코 소설이라서 반갑다. 그동안 내가 읽어왔던 라틴아메리카 문학들은 환상소설이라 부를 수 있는 것들이 대부분이었고, 사실 그런 주류에 조금은 지쳐있던 차였다. 그런데 이 소설. 과감히 그런 느낌을 탈피하면서도 철학적 사유로 든든하게 무장한, 게다가 환경과 생물의 존엄성까지 따끔하게 건드리고 있는 반성의 장도 마련해준다. 아무튼 여러 가지의 강렬한 재료가 어우러져 환상적인 맛을 내는 멕시코식 살사(salsa,소스)의 느낌이다.
<원제는 La mujer que buceó dentro del corazón del mundo>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주인공은 카렌이라는 여성이다. 어린 시절 지하에 감금되어 마치 동물처럼 학대되어 살아온 그녀는 친엄마가 죽은 뒤 그녀의 이모에 의해 발견되고 그녀가 살았던 곳은 다름 아닌 멕시코의 거대한 참치공장이었다. 그녀의 이모 이사벨은 카렌이 자신의 조카임을 한 눈에 알아보고 그녀에게 손을 내민다. 그것은 진짜 세상으로 그녀를 걸어 나오게 하는 첫 번째 단계였다. 이사벨은 카렌에게 열심히 말을 가르치고 교육을 시키기 시작하고 카렌 또한 그녀 나름대로 세상에 적응해가지만 여전히 세상은 그녀에게 조금은 낯설고 이해하기 어려운 곳이었다. 물론 카렌은 자폐가 있는 ‘특수한 존재’라는 낙인이 따라다니고 있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언어를 배우고 사람들과 소통이라는 걸 하기 시작하면서 오히려 사람들, 그리고 자신이 속한 세계로부터 점점 확연하게 분리되어 버린다. 생각하기에 고로 존재한다는 데카르트의 유명한 존재증명을 거침없이 씹어버리며 날 것 그대로의, 이건 이것이고 저건 저것이라고 정의되기 이전의 자연상태로서의 존재성을 주장하기에 이른다. 즉, 카렌에게는 인간이 이성적인 존재라는 학문적 이해 따위로 지구상의 다른 종으로부터 우월할 수밖에 없고 특별한 존재가 될 수 있다는 오만한 정의, 그리하여 인간이 우선시되기에 다른 종들은 대량학살되고 마음대로 이용당할 수 있다는 그럴싸한 우월감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이다. 바로 이런 독특함 때문에 소설을 읽는 내내 카렌은 우리에게 신비한 존재로까지 기억되는 건지도 모르겠다. 자폐성 뒤에는 천재적인 기억력을 감추고 있고, 전혀 거짓말을 할 줄 모르며 존재하지도 않는 것 때문에 쓸데없는 걱정을 하거나 속을 끓이는 ‘상상’이라는 것을 하지 않는 여자. 가끔씩 아주 필요할 때만 느릿느릿 생각하여 항상 인간들과 그녀 사이에 경계선을 만들고 팽팽한 거리감을 유지하는 바로 이 여자, 카렌. 작가는 그녀의 존재를 통해 우리에게 자아를 인식하는 법, 타인으로부터 날 것 상태의 나를 분리해내는 독특한 방법을 제시한 것처럼 보인다. 수 백 년 전부터 누군가의 입과 사상, 교육을 통해 우리가 어떤 존재라는 것이 기계처럼 아무런 반론 없이 주입된 것이지, 우리 스스로가 존재증명을 해 볼 기회를 박탈당한 것에 대한 저항감이 이 책의 저자가 우리에게 제시한 첫 번째 과제가 아니었는가를 생각해 본다. 참치라는 매개체를 통해 인간과 자연, 환경의 세계를 엿보는 것은 물론, 더 나아가 진짜 자아를 찾아가게 하는 독특한 방법을 알려준 이 책 참 신비롭지 않을 수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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멕시코는 FTA 때문에 특히나 우리 나라에서 아주 유명한 나라가 되었다. 오랜 미국과의 NAFTA로 인해 소득 불균등화는 심해져 전체 멕시코 국민 중 51.3%가 최저생계비에도 못 미치는 소득으로 겨우 연명해 나가고 있는 멕시코. 바로 이런 멕시코가 현재 FTA를 비준한 우리 나라에도 역시 닥쳐 올 미래가 될 우려가 높기에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이럴 때 마침 멕시코의 여류 작가의 소설 한 편이 우리 앞에 도착했다. 카를로스 푸옌테스 이후로 오랜만인데 바로 사비노 베르만의 '나, 참치 여자'라는 작품이다.
제목이 참 특이하다.
언뜻 영화 '타짜'에서 '나 이대나온 여자야'라는 김혜수의 대사가 떠 오른다. 원래 제목은 '세상의 중심으로 잠수해 들어간 여자'였다. 이 소설은 주인공 여성인 카렌의 자전적 기록의 형식을 하고 있는데 소설 말미에 가면 왜 카렌이 자신의 소설 제목을 그렇게 달았는지 이유가 나온다. (그녀는 자신의 기록에 어울릴 만한 제목을 모두 다섯가지 정도 생각했고 그 중 가장 마지막 것을 고른 것이다. 거기 나온 다섯 개의 후보 제목중 가장 첫번째 있는 것이 '나와 참치'인데 카렌은 그 옆에 '나와 참치'가 주인공이니까 가장 적절한 제목이다 라고 써 놓고 있다. 그러니까 한국판 제목은 바로 그것을 살짝 변형한 것이며 '참치 여자'가 된 것은 이 소설이 무엇보다 한 여성 개인의 정체성을 형상화한 작품이기 때문에 그에 걸맞게 변형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까 이건 잠수 얘기가 아니라 참치 얘기인 것이다. 그것도 참치 산업 자체의 얘기인 것이다.
멕시코의 참치 산업은 실제로 유명하다.
멕시코는 현재 세계 제12위의 참치 생산국이다. 바로 그 멕시코의 마사틀린의 참치 공장이 이 작품의 주요 배경이다. 소설은 카렌의 이모가 언니의 죽음으로 인해 유산으로 이 참치 공장을 상속받아 경영을 위해 멕시코로 오는 것으로 부터 시작된다. 거기서 이모는 거의 야생 소녀와 같은 꼴을 하고 말은 하나도 할 줄 모르는 주인공 카렌을 발견한다. 인도에서 발견되었다는 늑대 소녀와도 같은 카렌을. 더구나 그녀에게는 학대받은 흔적까지 있다. 이모는 언니가 밝힐 수 없었던 혈육이 아닐까 싶어 카렌을 거두고 자연의 세계에서 문명의 세계로 편입을 시킨다. 하지만 카렌은 남들과 달랐다. 그러니까 보통 사람들의 사고방식을 가진 아이가 아니었다. 그녀는 보통 사람이 하듯이 사교적 관계를 맺는 것이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아예 사고 자체가 달랐다. 무엇보다 카렌은 스스로의 생각을 전혀 꾸밀 줄 모르는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존재였다. 그러니까 태양과 바다가 그 존재를 드러내는 것 처럼 자연의 정직성을 간직한 존재였다. 말하자면 카렌은 인간에 있어서 하나의 타자인 '자연' 그 자체의 상징이었다. 이모는 이 카렌을 하나의 인간으로 '편입'시키는 한편 참치 공장도 경영해야 했는데 말썽이 생겼다. 바로 미국 때문이었다. 정확히는 미국의 생태주의자들이 참치를 잡을 때 돌고래까지 죽인다고 해서 멕시코에서 수입되는 참치 거부 운동을 일으켰기 때문이었다. 이모는 절대 그런 일이 없었고 또 그렇지 않다는 걸 알리기 위해 '돌고래 안전' 라벨까지 붙여 판매하지만 미국내 멕시코 참치 불매 운동은 사그러들지 않는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보니 이 모든게 다 미국 참치 회사와 생태주의자들이 협력한 음모였다. 그들은 자국의 참치 시장을 멕시코에게 빼앗기지 않으려고 그런 말도 안되는 이유를 붙여 불매를 했던 것이다. 덕분에 이모의 참치 공장은 심각한 타격을 입게되고 할 수 없이 구조조정에 들어가 대량 해고 사태가 일어난다. 그리고 참치 공장이 있던 마사틀란에는 그 해고로 인해 거지들이 속출한다. 그런데 이것은 소설 속 얘기가 아니라 정말로 있었던 현실 속 이야기이도 하다. 즉 사비나가 이 실제 이야기를 소설 속에다 담으려고 한 것은 미국과 멕시코 사이의 불평등 보다 정확히는 '일방적 착취'관계를 나타내기 위해서인 것이다.
바로 이러한 관계가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
일부러 다소 상세하게 앞부분의 줄거리를 소개했다. 이 소설에는 정확히 세 가지 관계가 구조적으로 중첩되어 있다. 가장 큰 범주별로 순서대로 나열해 본다면 자연과 인간의 관계, 그리고 미국과 멕시코의 관계 마지막으로 나와 너의 관계. 이렇게 세 관계가 구조적으로 중첩되어 있는 것이다. '중첩'이란 단순히 포개어짐 뿐만아니라 하나의 이야기로 그 관계적 본질이 어떤지 모두 동일하게 드러난다는 의미로 쓴 말이기도 하다. 그렇게 '나, 참치 여자'란 카렌 자신의 육성으로 진행되는 '나 홀로' 이야기이지만 결국 그녀의 이야기를 통해 인간이 자연에게 어떠한지 미국이 멕시코에게 어떠한지 내가 너에게 어떠한지 그 본질을 한꺼번에 드러내는 것이다. 사비나는 바로 그 세 관계의 본질을 드러냄에 있어서 무엇보다 형식과 내용 두 가지 측면에서 접근한다. 형식면에서는 '말'로써 그리고 내용면에서는 '카렌과 참치'와의 관계를 통해 접근한다. 그리고 그 둘을 통해 관계의 본질을 깨달음으로써 카렌이 궁극적으로 찾아내는 정체성이 바로 '참치-여자'라 할 수 있다.
먼저, 형식면에서 '말'을 살펴보자.
앞서도 카렌은 언어능력이 떨어진다고 말했다. 그것은 무엇보다 자연적 정직성을 가진 그녀가 그냥 생각한 것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지 않고 꾸미거나 돌려서 말해야 하는 것에 어려움을 느끼기 때문이다. 즉 그녀는 '비유'라는 것을 싫어한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예 : 동물들을 죽여서 그걸로, 아니면 그걸 조각내어 팔아서 돈을 버는 방법을 배우는 강좌의 제목은 '축산경제학'이었다. 예 : 호모사피엔스들이 동물들을 죽일 수 있는 권한을 설명하는 수업은 '인간 지능'이었다. (P.117)
즉 카렌이 싫어하는 것이 비유로 말했을 경우 그 진실된 측면이 축소되거나 혹은 다른 것으로 되어 완전히 배제되기 때문이다. 결국 이러한 완곡어법이 가지고 있는 공통점은 모두 그것이 가지고 있는 폭력성을 은폐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것을 습득하는 자로 하여금 또는 그 자체를 운영하는 자로 하여금 스스로 자신을 정당화할 수 있도록 해주기 때문이다. 일례로 가장 잔인한 도축 방법을 만들었던 카렌의 도축과 교수 헌팅턴은 '인도적인 도축 촉진 위원회'가 수여한 '훈장' 을 받은 자였다. 바로 여기의 '인도적'엔 도축시 벌어지는 폭력성이 도덕적 정당성으로 위장되어 은폐되어 있는데 이런 까닭으로 카렌은 '비유'를 혐오하는 것이며 결국 이러한 비유가 그래도 통용되는 것은 오로지 하나의 일방적 관점에서 규정하기 때문이라는 것으로 소설은 나아간다.
바로 데카르트의 사유의 공격을 통해서 말이다.
안 그래도 데카르트는 포스트모더니즘에 와서 공격을 많이 받았던 철학자였는데 사비나 베르만은 아예 카렌의 입을 빌어 데카르트의 모든 책을 불질러 버리자라고 선동까지 하고 있다. 왜냐하면 사비나가 보기에 데카르트야 말로 나와 너의 관계를 철저하게 분리하여 오로지 나만 있고 너는 한낱 대상에 불과한 것으로 만듦으로써 그 무엇보다도 '서로' 사이에 착취적 관계를 낳게끔 근거를 제공한 철학자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이 소설은 인간과 동물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흘러가므로 사비나가 데카르트를 공격한 주 요인 역시 데카르트가 동물을 어떻게 바라보았느냐에 달려있는데 (또한 데카르트의 동물에 대한 사유는 물론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에서 그대로 이어져 온 것이기도 하다.) 그 데카르트가 동물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동물은 기계 혹은 AUTOMATA(자동장치)이며 즐거움이나 아픔 뿐 아니라 그 어떤 것도 경험하지 못하는 존재라고 했었다. 물론 칼로 베면 비명을 지르고 뜨거운 것을 가져다 대면 달아나려고 몸부림 치겠지만 그것은 시계가 태엽으로 돌아가는 것과 같은 원리의 반응일 뿐이다
라고...
바로 여기서 사비나는 데카르트적 사유의 위험성을 보는 것이며 결국 이러한 자기중심적 사유가 말에 있어서 비유를 가지고 온다고 보는 것이다. 왜 자기중심적 사유가 비유를 불러올 수 밖에 없는가에 대해서 사비나는 작중 인물 '야스코'의 목소리를 빌려 이렇게 말한다.
아마 스스로 뭔가에 의해 보호받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닐까? 그냥 내 생각일 뿐이야. 현실은 언제나 두려움을 주니까 (P.331)
비유는 두려움에서 비롯된다.
왜냐하면 자기중심적 사유는 자기를 제외한 모든 대상을 지배하느냐 지배당하느냐의 획일적 시각으로 바라볼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사비나가 보는 데카르트적 주체는 그 앞에 놓인 대상은 그냥 단순한 사물로 보는 주체이며 내가 규정해야 하지 나를 규정할 수는 없다고 여기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즉 상호 이해와 배려에 바탕한 포용의 주체가 아니라 가지느냐 못가지느냐만 존재하는 획득의 주체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기댈 곳이 오로지 자신 밖에 없으므로 그 주체는 당연히 불안에 빠질 수 밖에 없다. 바로 이러한 데카르트적 주체가 작품 속에 과도하게 넘쳐나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자국의 참치 시장을 방어하고자 말도 안되는 이유로 멕시코를 핍박하는 미국이요 도축당하는 동물들이 느끼는 감정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효율성만 추구하는 헌팅턴이요 역시나 이윤만 있다면 타인의 삶이든 윤리든 상관않는 카렌의 동업자 굴드 또한 마찬가지고 마사틀란의 경제적 어려움을 해결해준다는 공약으로 표를 얻어 요직에 올랐으나 오르자마자 나몰라라 하는 멕시코 장관들이 그렇고 또한 카렌 참치 공장의 페냐 역시 마찬가지다. 거기다 이 모든 데카르트적 주체들은 다 남성들이다. 즉 '참치-여자'에서 여자는 바로 이러한 남성으로 상징되는 데카르트적 주체들을 벗어난 존재라는 의미 역시 있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말'에서 구조적으로 중첩된 세가지 관계의 본질이 드러난다. 바로 그것은 '일방적 착취'이다. 하지만 본질은 때로 상황에 따라 그 드러나는 모습이 얼마든지 다를 수 있다. 거기엔 데카르트적 주체들의 마치 타자를 배려한다는 듯한 위선적이며 교묘한 위장과 그로인해 자발적 협력을 이끌어내려는 전략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나타날 수 있는 모습마저 살피는 것이 또한 필요한데 사비나는 그것을 바로 내용면에서 말하는 것이다.
리뷰라는 형식상 길이의 한계로 다 얘기할 수는 없고 중점적되는 것만 말하자면 바로 카렌과 참치와의 관계다. 카렌은 헌팅턴에게서 퇴학을 당한 뒤 이모를 도와 참치공장 경영에 뛰어드는데 거기서 자신이 도축학 수업을 받다가 느낀 문제점을 되도록 수정하기 위하여 참치를 인도적으로 포획하는 방법을 연구하게 된다. 그러다 교활하고 냉혹한 자본가 굴드와 동업하고 나서는 참치의 포획이 아닌 참치 양식으로 나아가게 된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카렌의 과정이 정확히 '카렌과 헌팅턴과의 관계'와 '카렌과 굴드와의 관계'에 대응한다는 것이다.
즉, 대학에서 도축학 수업을 받을 때 헌팅턴이 카렌에게 했던 일방적이며 폭력적인 관계는 그대로 포획으로 이어지는 카렌과 참치와의 관계와 대응되는데 그런 관계임에도 헌팅턴이 '인도적' 훈장을 받았듯이 카렌 역시 그런 칭호를 얻는다. 말하자면 모두 '위선적 관계'인 것이다. 두번째 굴드는 카렌에게 주도권도 주고 그녀가 원하는 대로 마음껏 참치 양식을 하도록 하지만 카렌이 자신이 그어놓은 선을 넘으려 하자 공격적으로 나온다. 즉 굴드가 카렌에게 인정했던 자유는 어디까지나 자신이 인정한 한계 내에서의 자유였던 것이다. 이것은 그대로 카렌의 '참치양식'과 대응한다. '참치양식'은 가장 참치를 배려하고 자유를 허용하는 것이긴 하지만 그것도 어디까지나 잡아먹기 가능한 지점까지의 한계 내에서의 자유인 것이다. 여기에서 보듯이 헌팅턴과 굴드에게 있어 카렌은 카렌에게 있어 참치와 마찬가지인 존재였던 것이다. 그렇게 결국 카렌과 참치는 동일한 존재였고 그렇게 '참치-여자'란 카렌의 정체성 자체를 의미하는 말이기도 한 것이다. 이처럼 카렌은 서로 다른 과정을 거쳤지만 그 모든 과정에 있어 본질은 변한 게 없었다. 카렌은 그토록 동물을 위하고 배려한다고 했지만 그녀 역시 여전히 헌팅턴과 굴드로 대표되는 데카르트적 주체의 본질을 벗어날 수 없었던 것이다. 사비니는 결국 이러한 내용적인 면을 통해서 점진적인 변화는 아무것도 가져다주지 못하며 결국 근본적인 변화 혹은 탈주 만이 그 벗어남을 가능하게 함을 보이고 있다.
이 근본적인 변화 혹은 탈주는 무엇인가
바로 여기서 정체성의 문제가 나오게 된다. 즉 정체성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것, 새롭게 하는 것만이 데카르트적 주체로 부터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카렌의 정체성은 도대체 무엇인가? 그건 이모로 인해 '인간'으로 편입되고 헌팅턴과 굴드에 의해 만들어진 그렇게 '인간 사회' 자체로 부터 규정된 '참치여자'로서의 정체성이었다. 즉 카렌이 이모에 의해 인간의 언어를 배우고 예절이라는 것을 학습할 떼 그녀는 이미 종국에는 벗어나야 할 데카르트적 주체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러므로 그녀가 정체성의 근본적 변화를 이루기 위해선 그 모든 시초이자 '인간'에 편입시킴으로써 데카르트적 주체로 나아가게 했던 그렇게 인간 문명 자체의 상징이기도 한 '이모'의 죽음이 있어야만 했던 것이다. 바로 그 '이모의 죽음'으로 인한 단절을 통하여 카렌은 결국 사실 그 존재였으나 '인간'에 편입됨으로써 타자가 되어버린 '자연'으로 돌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바로 소설의 마지막 장면, 말 그대로 세상의 중심으로 잠수해 들어간 장면의 의미인 것이다.
근본적 변화 혹은 탈주가 소설에서 말하듯 이렇게 근본적 단절을 통해서만 이루어진다면 구조적으로 중첩된 세 관계 역시도 먼저 근본적 단절이 있어야만 새로운 변화가 가능하리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정치적으로 해석한다면 사비니는 멕시코가 새롭게 될 수 있으려면 무엇보다 미국과의 관계를 끊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으로 볼 수 도 있다. 이러한 단절은 무엇보다 이전까지의 내 정체성 자체를 파국적으로 지워 일종의 TABULA RASA, 즉 백지상태로 만드려는 것이니 훗설의 '에포크'와도 같다. 그렇게 지금까지 스스로 규정해 온 나를 버리고, 획일적 진리의 집착 마저 버리고 오로지 열려진, 그렇게 포용하려는 나가 되는 것. 아마도 이것이 새롭게 변화된 '참치여자'(지배의 대상이었던 참치와 역시나 같은 지배의 대상이었던 여자를 스스로의 정체성으로 삼는 것. 그렇게 타자를 자신에게로 받아들이는 것) 의 의미이지 않을까 싶다. 사비니가 주제로 나아가며 보여주는 논리의 전개는 써 온 바와 같이 꽤 정연한 편이다. 하지만 나는 작가가 멕시코인이라서 또한 그 나라가 우리의 미래가 될지도 모를 나라라서 다소 분석적으로만 접근했는데 내 글이 어쩌면 그런 인상을 주었을지 모르지만 그렇게 딱딱하거나 재미없거나 하지는 않다. 이야기가 참신하고 흥미롭게 때문에 그 자체로도 얼마든지 재미를 느낄 수 있는 소설이다. 하지만 행여 그 참신성이 너무 낯설어서 혹시 다가갈 수 없는 분들을 위해 또 그것으로 외면된다면 안타깝기도 해서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주제넘지만 분석해서 도움삼아 두어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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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흥미로운 소설을 한 권 읽었다. 사비나 베르만의 <나, 참치여자>. 좋은 책은 여러번 읽었을 때 그 진가가 나온다고 했던가. 어쩐지 이 책을 읽은 후에 계속해서 여러번 읽어보고 싶은 작품이다. 역자의 후기처럼 이 책은 고기능성 자폐증을 앓고 있는 카렌의 성장기인지 아니면 인간과 동물의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소설인지 경계가 불분명하다. 카렌을 둘러싼 환경, 인물들은 인간군상의 그것처럼 다양한 색채를 띄며 카렌을 보호해 주기도 하고, 그녀를 위협하기도 한다.
카렌이 이사벨 이모를 만나기 전까지는 어린아이의 지능을 가진 자폐아로 태어났다는 이유로 엄마에게 버림받고, 온몸에 상처를 안고 살아갔다면 그녀를 만난 이후로 카렌은 달라진다. 인간으로서의 삶. 사회를 살아가기 위해 그녀는 말하는 법, 먹는 법, 울고 웃는 모습마저도 배워간다. 습득하는 과정이 다른 사람에 비해 늦어도 결코 좌절하지 않고 하나둘씩 배움으로서 그녀는 성장하기 시작한다. 그녀가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며, 자립생활을 할 수 있도록 많은 시간과 돈을 들여 배워가는 동안 그녀는 엉뚱하면서도, 발랄한, 사랑스러운 '특별한' 아가씨로 자라난다. 마치 헬렌켈러가 설리번 선생을 만나는 것처럼 이사벨 이모는 그녀의 가족이자 정신적인 지주였다.
그녀가 글을 알게 시작되면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데카르트의 생각에 심한 반감을 나타낸다. 그의 철학과 다윈의 <종의 기원>에 관한 이야기는 현재 그녀가 앓고 있는 병으로 말미암아 철학적인 사유가 얽혀있어 흥미로우면서도 어려웠다. 그녀가 배를 참치어선을 타고 리카르도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던 장면이나, 학교 기숙사에 들어가 룸메이트와 만나는 장면이 가장 재밌게 읽었던 부분이다. 자폐아 특성이 드러나는 그녀는 점점 사회적인 인간으로 살아가지만 거짓말을 할 줄 모른다는 것, 상상을 하지 않는다는 것, 알고 있는 사실만 알고 있다는 것은 그녀에게 있어 영원히 변하지 않는 사실이다. 특정 이상으로 한 부분에 발달되어 뛰어남에도 현실에서는 이런 부분이 발목을 잡고,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 걸림돌이 되지만 책에서는 카렌의 핸디캡 마저도 유머로 승화된다.
이처럼 나는 그들의 세계와 가까이 있으면서도 그들로부터 먼 곳에 있었다. 지금뿐 아니라 앞으로도 늘 그럴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언제나 인간들 근처에 있으면서도 그들로부터 먼 곳에 있게 되리라. - p.52~53
반면 나는 먼저 존재했고, 그다음에, 그것도 아주 힘들게 생각하는 법을 배웠더는 사실을 지금껏 한 번도 잊은 적이 없다. 이는 내가 매일 부딪히는 현실이다. 먼저 나는 존재한다. 고로 아주 가끔씩, 그것도 꼭 필요할 때만, 아주 느릿느릿 어렵사리 생각한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나와 인간들 사이의 거리이다. - p.54
가장 소박하면서도 진정한 행복은 우리의 감각으로 느끼는 것, 다시 말해 눈으로 보고, 피부와 혀, 그리고 코와 귀로 느끼면서 생각하는 것이다. - p.179
살아간다는 것 내게 있어서 그것은 조급한 마음을 버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긴장을 풀고 심장이 원래의 리듬대로 뛰도록 만들어 주어야 한다. 덥다는 생각을 하지 말고, 태양의 열기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한다. 설령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다 해도 배가 고프면 먹어야 한다. 그리고 밤이 오고 온 세상에 어둠에 잠겨 잠이 오면 무조건 몸의 요구에 따라야한다. 세상 사물들도 어둠 속에서 쉬어야 할 테니까. - p. 357
눈물과 웃음, 재미와 뭉클함이 느껴지는 <나, 참치여자>는 한마디로 이야기할 수 없는 책이다. 조곤조곤한 재미와 책 중간중간 나오는 그림과 스케치는 이 책을 한층 더 사랑스럽고, 뭉클하게 만들어주는 필수 요소다. 물론, 크크크하고 웃음을 주는 요소이기도 하다. 사람과 인간의 차이, 그 사이에 카렌이라는 인물이 들어가 있는지도 모르겠다. 인간이기에 알 수 없는 자연의 삶을 그녀로부터 전해듣고 알기 위해 그녀는 조금은 특별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곤 했다. 멕시코 어딘가에 큰 참치공장이 있고, 바닷가가 있는 마을에 카렌과 이모가 살고 있는 것처럼 소설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현실적이고, 때로는 눈물이 핑그르르돌아 계속해서 영사기가 돌아가는 영화를 보는 느낌이었다.
루이스 세풀베다의 책과 비견될 만한 수작이라는 뒷 표지의 글귀에 동감한다. 언젠가 이 책이 꼭 영화화 되기를 바란다. 많은 것이 담겨져 있어서 한껏 다 흡수 하지 못했지만 그녀의 순수함은 온전히 가슴에 담았다. 배를 부여안고 웃음으로 장식했던 책이 마지막에 눈물을 머금고 끝날줄이야. 깊이를 알 수 없는 사비나 베르만의 <나, 참치여자>는 '스탠더드한 인간'에게 다른 목소리를 내는 한편의 시 같은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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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인류 오스트랄로피테쿠스는 갑자기 떡하니 나타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최초의 인류는 털이 북실북실했을 것이고, 그렇게 오스트랄로피테쿠스는 '처음'이 되었지만 그래도 분명히 자기와는 조금 다른, 홀로 진화에 한 발짝 더 내딛었을 뿐 그 주변에도 분명 자신이 속해있던 공동체가 있지 않았을까. 그 '공동체 생활'을 유지하기 위한 목적에서부터 언어는 발달하기 시작했고, 인간은 언어를 갖추어 조금 더 나은 생활 방식을 모색하며 차츰차츰 발달했다. 그에 따라 상당히 직접적인 의사 표현만 했던 언어 체계 역시 점차 정교해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 시절에는, 사고가 언어에 앞서지는 않았을까. 분명 태어나면서부터 언어는 완벽하지 못했겠지만, 정신을 차려보면 우리는 사고마저 자연스럽게 습득한 모국어를 이용한다. 그렇게 나는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와 비슷하게 '언어가 먼저냐, 사고가 먼저냐'와 같은 알쏭달쏭한 순환의 고리에 빠져들고 만다. 이미 말을 못하던 아기 시절의 내 사고는 어땠는지 기억할 방도가 없기에 뭐 알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내가 가진 세 가지 장점은 무시하지 못할 정도로 중요한 것이다. 1. 나는 거짓말을 할 줄 모른다. 2. 나는 상상을 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존재하지도 않는 것 때문에 쓸데없이 걱정하거나 속을 끓이지 않는다. 3. 그리고 나는 내가 모르는 것은─사실 그게 훨씬 더 많지만─절대로 모른다. 전에도 말한 것처럼, 이는 스탠더드한 인간들에 비해 내가 지닌 커다란 장점이었다._p.44~45 이사벨 이모는 캘리포니아에서 살다가 유산 상속 소식을 듣고 멕시코 마사틀란을 찾아온다. 그녀가 상속할 유산이란 바로 '아투네스 콘수엘로'라는 이름의 참치 가공 공장이었다. 처음 공장을 방문한 그녀는 쉴새없이 참치를 가르고 내장을 꺼내며 그 속에서 흘러나온 피가 바닥에 흥건한 장면을 보며 그 비린내에 바로 토악질을 하고 만다. 게다가 그보다 더 끔찍한 일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으니, 오랜 세월 동안 방치되어온 또 다른 유산인 집은 그야말로 보수가 절실히 필요한 상황이라는 것이다. 거기에 더불어 말도 없이 날뛰며 그 창문을 다 부숴버린 지하실에 갇힌 짐승 한 마리. 카렌과 이사벨 이모의 첫 만남은 그런 것이었다. 인간들과 나 사이의 거리를 이처럼 명료하게 표현해주는 문장은 아마 없을 것이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그 문장을 처음 봤을 때, 나는 한동안 벌어진 입을 다물 수 없었다.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분명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우선 존재하고, 그다음에 다른 것을 한다는 사실쯤은 두 눈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알 것이다._p.53 그러나 이사벨 이모는 꾸준히 인내심을 가지고 카렌에게 언어를 가르치기 시작한다. '나' 그리고 '너'에 대한 구별을 잘 하지 못했던 카렌은 차츰 언어를 익혀가기 시작했고, 비록 조금은 뒤처지는 아이들을 위한 학교에서 공부를 시작했지만 '약간의 자폐증'과 '부족한 능력'뿐 아니라 남들보다 월등히 뛰어난 능력 역시 갖추고 있었기에 대학에서 축산학을 공부하며 자신의 재능을 키워나간다. 어느 자폐증 소녀가 뒤늦게 익힌 언어로 데카르트의 "나는 존재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를 깨부수고 비유가 아닌 오로지 직설적인 대화를 하며 머릿속에서 소용돌이치는 사유(思惟) 그리고 그녀의 재능이 참치 양식과 포획 과정에서의 '인도적 도살' 방법을 개발하며 꽃피워져가는 과정이 그려져 있는 소설이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 그렇게 두 가지로 이야기하기에 이 소설은 너무나도 많은 색채를 띠고 있다. 굳이 큰 두 갈래로 말해보자면 그렇다는 것이다. 나는 존재한다. 고로 [아주 가끔씩, 그것도 꼭 필요할 때만, 아주 느릿느릿 어렵사리] 생각한다. 야, 너 잘 나왔는데. 군살도 없고. 완전 근육질 몸매야. 대체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나는 소리를 질렀다. 빌어먹을, 그건 합성이란 말이야. 망할 놈의 비유를 자꾸 사용하다보면 결국엔 터무니없는 거짓말이 되어버린단 말이야. 그래서 나는 비유를 일절 사용하지 않아. 비유는 현실에 대한 정보를 왜곡시키는 거야. 그런데 사람들은 왜 그 빌어먹을 비유가 없으면 못 살 것처럼 그러는 걸까?_p.331 사비나 베르만이 소설 속에서 그려내고 있는 문장은, 다시 말해 화자 카렌이 쓰고 있는 문장은 그렇기에 상당히 이채롭다. 비유도, 대화를 구별하기 위한 문장부호도 없다. 거짓말이라고는 할 수 없는 그녀는 자신의 감정과 그 감정에서 비롯된 표현은 솔직하고, 상상을 하지 않는 그녀는 존재하지 않는 '신이 살고 있는 세계'와 같이 자신이 모르는 세계에 대한 공상을 펼쳐나가지 않으며, 도면마저 간략한 부호가 아닌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완벽하게 담아낸다. '스탠더드한 인간'은 문득 깨닫는다. 자신의 사고가 견고해질 무렵이면, 언어의 틀에 완벽하게 갇혀진 스스로의 사고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반면 이사벨 이모와의 만남 이전에는 '언어'라는 것과는 담을 쌓고 지냈던 카렌은 처음으로 '나' 그리고 '너'에 대한 인식을 시작으로 언어라는 도구를 이용해 세상을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차츰차츰 축적되어가는 언어이지만 그녀는 그 '언어'라는 감옥에 갇혀 거기에 지배당하고 스스로를 얽매이지 않는다. 그녀는 존재한다. 고로 가끔씩, 아주 가끔씩 필요할 때 느릿느릿 생각하는 것이다. 그렇게 서서히 카렌은 '세상의 중심을 향해 잠수해 들어간다'. 공기총을 쏠 때는 시선을 돌리던 이들이, 지금은 연한 고기 맛을 즐긴다
그러나 공장의 참치 포획 방법에 대해 미국의 동물보호단체에서 이에 대한 이의를 제기하면서 '아투네스 콘수엘로'는 문을 닫을 위기에 처한다. 그로 인해 참치 포획과 가공이 주요한 생계 수단이었던 마사틀란의 주민들은 미국의 횡포로 인해 생계 수단을 잃고 가난에 허덕이기 시작한다. 공장을 살리려고 카렌은 다양한 방법을 물색한다. 그 과정에서 카렌은 많은 사람들의 모습을 만난다. 참치가 죽을 땐 시선을 돌릴 게 분명한 사람들이 참치 뱃살 한 점을 위해 어마어마한 돈을 지불하고, 막상 접시 위에 놓이면 맛있게 먹을 것이면서 그 음식이 되어줄 참치가 죽을 땐 시선을 돌려버리고, 자연산 참치는 돌고래에게 피해를 입히니 잡지 말라고 하지를 않나, 그래서 양식을 하려니 좁은 공간에서 참치가 스트레스를 받는단다. 데카르트 그리고 참치 이참에 비밀 하나 말해줄게. 이모는 내게로 얼굴을 가까이 갖다 대면서 말했다. 인간이 아닌 종들과 비교해보면, 인간은 모두 자폐증 환자란다._p.361 소설은 전반적으로 카렌의 삶과 그에 따른 그녀의 사유를 그녀만의 언어로 그려내고 있다. 그리고 그 안에는 크게 관계가 없을 듯한 참치 도살과 본격적인 사업 그리고 그 주변을 압박해 들어오는 몇몇 세력들이 등장한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카렌의 '조금 다른 언어'는 '스탠더드'에 맞선다는 것. 카렌과 도살당하는 참치와 소와 돼지가 인간과 자본의 다른 얼굴에 맞서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비록 '스탠더드'하지 않더라도, 자신만의 방법으로 말이다. 그렇게 카렌이라는 존재가 '세상의 중심으로 잠수해 들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으로도 충분히 이 소설은 매력적이다. 나 역시 완벽하게 언어로 사고를 하는 틀에 갇혀 있는 이로서, 하필이면 또 이런 시기에 멕시코에서 미국의 거대한 힘에 무자비하게 휩쓸리는 모습을 지켜보며 카렌의 언어와 사고가 데카르트에 맞서고 참치와 함께 하며 DHA를 마음껏 흡수한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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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참치여자>는 그 제목부터 참 독특했다.
하얀 모래 해변, 어린 여자아이 하나가 빨간색 천 위에 앉아 있다.
'멕시코 희곡상'을 네 번이나 수상한 유명 극작가이자, 시인, 각본가, 영화제작자, TV토크쇼 진행자, 칼럼니스트로써 폭넓은 활동을 하고 있는 작가 '사비나 베르만'의 첫번째 장편소설이 바로 <나, 참치여자> 인데, 그 제목이 '참치여자'가 아닌 '나, 참치여자'라는 점을 우리는 절대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캘리포니아에 살다가 유산을 물려받기 위해 멕시코로 돌아오게 된 이사벨. 언니가 살던 할아버지가 물려준 낡은 저택에서였다.
이제 정리를 좀 해보자면 상황은 이렇다. 되면서 비로소 시작되는 이야기. 아이를 사람답게 만드는 일에 지극 정성을 다 바치게 되고, 그 시작이 바로 말을, '나'를 가르치는 일이었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날 이모는 카렌을 특수학교 대신 가정교사에게 배우게 하고, 오전에는 참치공장에 보내기로 결정을 하게 되는데, 참치공장에서 일하게 된 것은 카렌의 삶을 바꾼 계기가 된다. 대형 물고기를 매달아두는 장치인 하네스에 매달린 채 공중에서 즐거워 하는 일, 그리고 훨씬 더 멋진 '잠수하기'.
정말 카렌을 따라 다니다 보면 심심할 겨를이 없는데, 그 중에서도 내 가슴을 '쿵'하고 때렸던 것은 '존재'에 대한 아이의 깨달음 이었다.
인간들은 그런 식으로, 즉 먼저 생각하고, 그리고 존재한다고 믿으면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생각하지 않는 모든 것은 애당초 존재하지도 않는 사고 여긴다. 절대 그 이상은 아니다. 확인이라도 시켜주었단 말인가. 잊은 적이 었다.
소설은 그 제목만큼이나 독특하고 개성이 넘친다. 전하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울부짖던 아이 카렌이 '나'를 찾아가는 과정을 통해 우리 독자들에게 전하는 따뜻하고도 의미있는 선물인 것이다.
<나, 참이여자>는 재미만을 추구한 소설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어렵거나 교훈적이기만한 소설도 결코 아니다. 의 이야기를 통해 예측 불가능한 재미와 더불어 깊은 울림과 여운을 얻게 될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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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 시작하자마자 범상치 않은 책이라고 느꼈다. 자폐아가 어떻게 자신과 세상을 바라보는 지에 대한 자세한 묘사가 인상 깊다. 본능에 충실히 살아가는 동물 같은 삶을 떠나서 인간 세상에 발을 들여놓은 참치 소녀, 카렌의 생활을 그리고 있다. 교육을 전혀 받지 못한 이 소녀는 여러 가지를 배워야 했으므로 존재가 먼저였고 생각은 나중에 생겨난 셈이다.
우리들도 그러지 않았나. 아기 때에는 본능적으로 행동했고 자라면서 교육을 통하여 이성을 갖춘다. 하지만 교육이란 것이 때로는 아무 의심 없이 받아들여져서 우리는 생각있는 행동으로만 사람으로 올바르게 존재하는 줄 알고 있다. 동물과 인간을 구분 짖는 데에는 물론 맞는 말이기도 하다. 참치 소녀는 이러한 말에 일침을 놓는다. 그렇지 않은 인간도 있다는 말이다. 획일적으로 보려는 시선에 도전한다. 이 책은 자폐아들에 대해 새롭게 생각하는 기회가 될 것 같다. 체험판 끝부분 글이 가슴에 머문다. ‘먼저 나는 존재한다. 고로 아주 가끔씩, 그것도 꼭 필요할 때만, 아주 느릿느릿 어렵사리 생각한다.’ 그 다음엔 무슨 얘기가 있을까? 참치 소녀가 느릿느릿 어렵사리 생각하고 행동하는 내용이 기대된다. 원본을 부탁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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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엔 정신이 없어요.
코맥 맥카시의 <로드>처럼 대화엔 따옴표가 없고, 내용은 훨씬 빽빽해요.
하지만 내용에선 헤어나올 수가 없네요.
보통 책을 보면 처음 몇장을 보면 대충 감이 잡히잖아요. 이 책도 그런거 같아요. 그럼에도 단순히 재미만을 추구한게 아니라 뭔가 생각할 꺼리를 던져주네요.
아, 책에 의하면 일단 생각(사유)하기 전에 꺼리가 먼저 존재하겠죠? ㅎㅎ
체험판과 줄거리를 보니, 모자라게 태어나 버림받은 주인공의 성장기인것 같네요.
보통의 성장소설은 일단 청소년기를 다루기 때문에 개인적으로는 너무 극단적이고 감성에만 치우져서 내용자체는 별로 재미가 없었던 기억밖에 없지만, 이 책은 그런 부분도 채워주는 게 있는 것 같아요. 플롯도 좋고, 매끄럽고.
거기다, 제목도 귀엽구요. ㅎㅎ
재밌을 것 같습니당~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