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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합정에는 조개 우물이란 뜻이 있다. 먼 옛날 이 동네에 있던 처형장에 사형수 머리를 벨 칼을 닦는 우물이 있었단다. 우물 바닥에 조개가 많아 조개 합과 우물 정井을 더해 합정이라 부른 것이다. 우물이 개발로 사라지고 지금은 더할 합合으로 쓴다. 그런데 나는 지난 수년간 합정을 다른 뜻으로 생각해 왔다. 우리처럼 길 잃은 사람들이 걷다가 마주치는, 그러니까 정 情이 고픈 이들이 다른 정과 만나 합合을 이루는 곳. 합정이란 동네를 그리 여겨 온 것이다. 』-본문 중에서
소설은 허구성을 띄는 것이 기본이지만 『코끼리 가면』은 문학이면서도 실화에요. 그래서 매우 화가나고 슬픈 우리들의 이야기입니다.
소설속 '나'는 2호선 합정역과 절두산 성지, 한강을 맨발로 걸으며 망상과 기억 사이를 헤매다가 한강 수면에 비친 코끼리를 만나고 아득한 기억들을 길어올려요. 어릴 적 보호받지 못했던 어린 딸이며 여동생이었던 그녀 자신을 마주하게 되죠. 그녀의 큰 오빠는 그녀를 여러 차례 성폭행 했고, 둘째 오빠는 망을 봐줬어요. 언젠가 그녀가 부모님께 도움을 요청했지만 부모는 진위를 따지거나 아들을 처벌하긴 커녕 그녀가 못된 망상에 빠졌다 생각하고 병원에 입원 시키죠.
"가족이니까 괜찮아" 는 참 무식한 말이에요. 뭐가 괜찮다는 거죠? 가족이니까, 뭘 모르고 호기심이 왕성할 때니까, 언제든 내 몸을 조물거려도 된단 걸까요? 그 기억이 한 사람의 인생 전체를 단단히 졸라매어 불완전한 어른으로 자라기는 커녕 멈춰버렸다면 내가 죽어 사라지는 상상으로 수많은 시간을 허비한다면 좋은 사람들과 기회를 모두 놓쳐버렸다면 그래도 나는 괜찮은 걸까요.
제 생각에 그 부모는 딸의 상처보다 자신의 체면이 중요한 겁쟁이었던 거 같아요. 딸만 입을 다물면 정상적인 가족이 된다 생각했겠죠. 평생 숨어 살아도 모자랄 두 아들은 장성하여 돈을 벌고 친구를 사귀고, 여가를 즐기고, 결혼까지 했건만 딸은 감추려고만 하는 거예요. 딸은 제 잘못도 아닌 일로 평생 값비싼 약을 복용해야하는데 말이죠.
지금도 내 집과 이웃, 옆 자리 친구, 어딘가로 향하는 거리의 사람들, 맛있는 음식 앞에 생기가 도는 얼굴들은 지난 밤 가족으로 포장된 그룹 안에서 성적학대를 학습했을 지도 모릅니다. 한번이든 셀 수 없이든 당했다면 기억은 평생 남아있죠. 아픈 것이 당연한 사람이 "아프지 않아" "괜찮아", "다 지난 일이야" 하며 사는 것은 자신을 소멸시키기 위한 과정이 아닐까요.
아이러니하게도 그녀의 목소리를 들어준 사람은 가족이 아닌 합정역 만두가게에서 만난 '너'입니다. 나를 걱정해주는 사람, 내게 잘못한 사람에게 죄를 인정하고 나에게 사과하라고 소리질러주는 사람, 나를 진정으로 사랑해주는 사람….
작품에서 코끼리는 피할 수 없는 생의 고통에 맞서는 약자의 역설적 강함을 상징하고 있어요. 그녀 자신이죠. 그녀는 수년간 자신을 가둔 우물밖으로 나가고자 이 작품 썼을 것 같아요. 이 용기가 식지 않고 많은 독자에게 위로와 경고를 보내주기를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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