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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 : 9.11 이후 달라진 세계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 리뷰
슬라보예 지젝의 몇 권의 책들을 깊이있게 파헤치는 이현우의 인문학서이다. 서평집이라면 서평집인데 방대한 저자의 지식, 무엇보다 지젝에 대한 아카데믹한 연구와 대중적인 문장력이 결합된 지젝 연구서였다. 지젝의 <실제의 사막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라는 한 권이 주요 저서였지만 천천히 학습하며 읽어야만 했다. 책 두께가 두껍지 않아서 흔쾌히 선택했는데 시작이 어려워서 ‘아차’싶었지만 제1장을 읽고나니 어느 정도 극복할 수 있었고, 이현우만의 글 스타일이 있어서 놓을 수가 없었다. 두 번 이상 읽는다던지, 개념을 완벽히 터득했어야 하는데, 다른 읽을 인문학서의 서브 텍스트로 삼은 책이라 한번 정독하는 것으로 만족했다. 미흡한 리뷰에 양해를. ^^
잘 알려졌듯이 슬라보예 지젝은 라캉의 학문을 계승한 정신분석학자이다. 라캉에 따르면 인간에게는 존재의 현실을 구성하는 세 가지 차원이 있는데 ‘상징계 the symbolic’, ‘상상계 the imaginary’, ‘실재계 the real’ 이렇게 나눈다. 관련 연구자들은 RSI라고 한다. 지젝은 라캉의 RSI를 서양 체스게임으로 비유했다. (이현우는 우리식이라면 장기 말로 생각하라고 한다.) 상징계는 체스의 규칙으로 어떤 말이 어떻게 이동할 수 있는가가 이 규칙에 의해서 정의된다. 즉 상징계는 현실을 관장한다. 상상계는 실제 말의 이름인 기사(knight)가 게이머들에 의해 새롭게 호칭받는 ‘메신저’로 불리게 될 때 작동하는 또 다른 가상적 세계를 일컫는다. 다시 말해, 규칙을 떠나서(무시될 수도 있고) 말이 이렇게 가면 좋겠다고 소망하는 것이 상상계라고 한다. 마지막으로 실재계는 실제로 체스를 둘 때 예측 불가능하지만 현실로 벌어지는 예기치않은 침범이다. 예컨대 장기를 두고 있는 데 갑자기 어린 아가가 다가와 판을 뒤엎었다면 이것이 실재계라고 한다. 이현우가 독해한 지젝에 따르면, 9.11이라는 사건은 그 이전까지 미국과 세계가 자본주의적인 상징계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실재가 침입한 사태라고 한다. 2001년 9월 11일에 미국(과 우방 국들)이 지탱해온 민주주의와 이슬람/테러리즘의 근본주의가 사상 초유의 모습으로 격돌을 하게 된 것이다. 지젝에 대해서 유럽 지식인 사회가 다양한 여러 의견을 개진한 것을 이 책 <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에서 처음 알아서 좋았다. 좀 비판적인 것들이었지만 그동안 한국 학계에서 엄청나게 신봉되고 유행된 슬라보예 지젝의 면모를 다른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됐다. “9.11 희생자들에게 저의 무조건적인 동정을 바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런 말을 안 할 수는 없습니다. 저는 이 범죄에서 정치적으로 무죄인 이는 아무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자크 데리다) 2001년 911 사태를 두고, 벌어진 당시에 주변의 대다수에서 이런 반응을 보였던 것 같다. “미국이 이라크나 아프간에 뭔 짓을 했기에 쟤네(테러리스트)들이 저렇게 극렬한 일을 벌인거냐?”라고. 이현우는 말했다. 우리는 제3세계의 참상에 대해서 그것이 텔레비전 화면상으로나 출현하는, 곧 우리의 사회적 현실과는 무관한 것으로 지각해왔다고. 기껏해야 연예인들의 자원봉사라는 프레임과 선행의 배경이 된 아랍, 중동이었다고 말한다. 이십대 중반을 막 지났던 나는 ‘미국 패권주의에 대한 저항이 장난이 아니구나’ 이 정도의 인식을 지인들과 공유하는 정도였던 것 같다…. 처음 알았는데 저자 이현우는 영화들에 대한 관심도 상당하였고, 그래서 책이 좀 어려울 만 해지면 영화 얘기를 불쑥불쑥 해서 개인적으로 좋았다. 지젝과 연결되면서 거론했기에 마냥 쉽거나 재미있는 것만은 아녔지만. 오랜만에 <지옥의 묵시록>(코폴라 감독) 이야기가 나와서 흥미로웠는데 지젝의 관점을 이현우를 통해 읽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말론 브란도가 연기한 커츠 대령은 베트남 전쟁에 투입된 군인 출신에서 괴물같은 존재가 되어서 미국이 자국 군인임에도 비밀리에 그를 제거하려는 이야기였다. 지젝은 영화를 거론하면서 ‘현실에서라면 미국이 자기 전력을 커츠 대령에게 보냈을 것 같지 않다. 베트콩을 전략적으로 이용해서 커츠 대령을 제거시키고자 했을 것’이라고 했단다. 아, 깜놀했다. 같은 영화를 보고도 그렇게 똑똑한 생각을 하다니... 하긴 지젝이 동유럽에서 최근 배출한 인문학자 중 가장 천재라는 소리를 괜히 듣는게 아니었다. 사상적으로 슬라보예 지젝의 좌표는 라캉주의 좌파라고 한다. 그리고 비교적 혁명가 타입의 정치 이론가에 해당하고 있다. 지젝이 테러리즘에서 떠올린 것은 1970년대 독일의 적군파 테러였다. 그 때 학생운동이 슈퍼마켓 폭파 등 과격한 노선을 걸었던 것은 그렇지 않고서는 대중, 시민들이 관심을 갖지 않기 때문에 그런 행동으로 주장을 펼쳤다. 알카에다와 탈레반 등도 서방세계의 발전 이면에 자기네 국가와 민족이 피해를 당하는 현실을 일깨우기 위한 방식이었음은 인정할 일이라는 것이다. 지젝이 1990년대에 슬로베니아 대선에 출마했다가 낙선한 이력이 있다는 것을 보고 또 놀랐다. 어쨌든 그는 정치 체험 후 본격적으로 이론 드라이브를 걸었고 그 요체는 ‘민주주의에서 프롤레타리아 독재로’, ‘순수정치에서 정치경제학으로’같은 모토로 드러났다. 지젝은 저서들에서 (구)소련의 역사를 많이 거론했고 이현우는 충실히 해석한다. 딴건 몰라도 이현우의 소비에트 소련권 역사에 대한 지식은 정말 해박한 것 같다. ^^ 그 과정에서 알게된 아프가니스탄의 역사는 새삼스레 참 서글프다는 생각이 처음 들었다. 소련과 침략국들과의 전쟁으로 폐허가 되다시피 한 국가가 911 이후 미국의 ‘테러와의 전쟁’으로 또 한번 전화(戰火)를 겪었다. 최근 20년 동안 외세의 개입으로 이렇게 고통을 겪은 국가가 또 있을까 싶어 서글프다. 탈레반의 세력화같은 자국내 복잡한 문제도 한 몫 했지만, 보다 복잡한 중동의 지역학이 있었다. 중동의 대표적인 친미 국가인 사우디 아라비아, 쿠웨이트에는 석유가 있고 냉전이 종식된 90년대 이후 미국이 사우디, 쿠웨이트를 도운 것은 철저한 경제적 계산이 작용했다고 지젝이 밝히고 있었다. 냉정한 논리지만 미국의 석유 정책의 입장에서 사우디,쿠웨이트가 정치적으로 민주화되고 안정되는 것은 바라는 바가 아니었단다. 그렇다고 현대 사회에 더군다나 대놓고 한 국가를 분열시킬수는 없는 노릇이고, 묘한 긴장감 속에서 애먼 주변 국가들의 불안정한 정치상황은 미국의 집중 관리 분야였다. 911의 주동자였던 오사마 빈 라덴이 아프가니스탄-소련 전쟁을 승리로 이끈 전설적인 인물이고 미국이 80년대에 아프가니스탄에서 빈 라덴 세력을 적극적으로 도왔다는 것은 정말 시대 흐름의 아이러니였다. 물론 미국이 자국 내에서조차 테러를 한,두번 겪은 게 아니었으나, 냉전 시대에 나름의 논리와 지능을 살려 육성했던 자가 이렇듯 충격적인 ‘배신’의 주동자로 돌아올 줄은 그 누구도 몰랐다. 9.11 이후 적어도 5,6년간 전세계가 “당신은 부시 편입니까, 빈 라덴 편입니까”라는 질문에 답하도록 시달려야만 했는데 지젝에 따르면 그 질문은 교묘하게 만들어진 것이고 일방적인 거였다. 탈레반을 만든게 CIA이기 때문에 테러와의 전쟁은 ‘피해입은 미국 대 공격한 외부 조직’의 구도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미국이 자생시킨 애초의 시발점을 살펴봐야만 했다. 그래서 슬라보예 지젝이 보기에 애국적인 미국 지식인들은 물론이고 테러리스트를 소탕해야 한다고 격앙되고 동조한 유럽의 많은 지식인들도 한심했다고 한다. 과연 유럽 학자, 저널리스트들이 전부 미국 테러와의 전쟁에 동조했는지는 나로썬 의문시 되지만 어쨌든 사뭇 냉철한 의견을 견지해온 지젝이 놀라운 것만은 사실이다. 아마도 그가 동유럽 슬로베니아 출신의 지성인이라는 점이 테러에 대한 미국의 흥분을 한발짝 멀리 떨어져서 바라보게는 했을 것 같다. 하지만 2005년에 영국 런던에서도 굵직한 테러가 발생했는데 지젝은 그런 일들로부터도 철저히 학자적인 시선을 유지했다는 게 더욱 놀랍기만 하다. 개인적인 어떤 일로 2009년 전후로 하여 미국 위주의 대테러 전쟁에 심각한 회의를 가졌긴 했지만, 지젝이 명쾌하고 너무도 손쉽게, 2001년 9월 이후 장기간을 당신들은 미국과 서방세계의 ‘구라’에 당했다고 하니 어쩐지 허망하기도 했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니고 먹고사니즘이라는 변명으로 별 관심없던 역사 의식을 막상 그가 콕 찌르니 아무렇지 않을 순 없을 거다. <실재의 사막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이하 실재의 사막)에서 뜻밖에 지젝이 헐리우드 영화 <슈렉>을 이론에 끌어들인 대목으로 눈길을 돌려본다. 본 리뷰어가 현재 가장 재미있고 의미도 있는 애니메이션으로 뽑는 <슈렉>에 대한 지젝의 평을 들으니 그의 냉정함이 제대로 드러났다. 슈렉의 주인공들은 실사의 로맨틱 코미디와 달리 선남선녀들이 아니다. 그간 동화를 바탕으로 한 디즈니 작품들처럼 파란 눈에 금발머리 왕자, 공주가 아닌 초록 대두 남주에 날씬하지 않은 평범한 여주가 나온 <슈렉>. 안데르센, 그림 동화를 비롯한 여러 가지 클리세적인 이야깃거리들을 재치있게 뒤집은 수작이라고 생각해 마지 않았었다. 음악들도 주옥같았고 말이다. 그렇지만 지젝의 ‘매의 눈’으로 보기에 슈렉의 ‘전복성’과 ‘포스트 모던’함은 명백한 한계를 지녔다고 한다. 단적으로 말하면 그 모든 패러디와 신선함에도 불구하고 결국에 <슈렉>이 똑같은 낡은 이야기를 반복하고 있다고 한다. 지젝이 분석하기에 <슈렉>의 전략은 오히려 대중들이 보기에 적당히 비꼬음으로써 ‘이게 조롱의 끝이고 재해석의 종결자’라고 은연중에 과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 한편으로는 학자와 비평가란 참 피곤한 삶이겠다는 생각도 필자는 솔직히 했다. 오락거리로 유쾌하자고 만든 <슈렉>같은 작품도 저렇게 일일히 따지다니…. -_- 우리가 또 대다수 세계인들이 최선이라고 믿은 ‘자유민주주의’에는 함정이 반드시 존재한다고 지젝이 말했다. 물론 재벌2세도, 길거리 노숙인도 선거에는 똑같이 1표를 행사한다는 점에서 바람직한 제도이긴 하다. 20세기 이후에는 우리가 본받아야 할 롤 모델이라고 여겼던 미국, 프랑스의 민주주의의 허점을 지적한다. 90년대 루이지애나 주지사 선거에서 전직 KKK단원 출신 후보의 대항마로 나온 민주당원은 부패한 이였으나 뽑아야 했고, 2002년 프랑스 대선에서 극우파 장-마리 르펜을 떨어트리려면 현직 자크 시라크에 투표해야 했다. 자크 시라크는 부패 혐의가 있었는데 르펜 반대주의 진영의 슬로건은 “증오보다는 차라리 사취가 낫다‘였다는 이야기. 이탈리아에서는 시민 운동의 패착으로 베를루스코니가 권좌를 차지하고, 오스트리아에서도 극우파 인물이 자신을 정당화하며 외친 명분은 ‘반 부패’였다니, 어쩌면 2000년대 직전까지도 서구권의 정치도 그리 완전무결하진 못했던 모양이다. 9.11이후 10여년간 미국이 자유를 수호한다는 명분/목적으로 테러와의 전쟁을 감행했지만 역설적이게도 미국 자국민들의 자유는 한껏 축소되었다고 지젝이 밝힌다. 공항에서 알몸 검색대를 지나야 하고, 암암리에 아랍 유색인종에 대한 불안감은 팽배해졌으며, 테러 단체의 뿌리를 뽑기 위해 잡아들인 수상한 사람들에게 고문도 불사한다는 이데올로기가 만들어졌다. 그렇다면, 이런 저런 미국의 과잉 행동과 중동에서의 군사 작전에는 담을 쌓고, 그건 전문가들에게 맡기고 (미국인) 우리들은 자기 삶을 더욱 계발하고 개선해나가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사람들은 또 어떤가? 지젝의 신랄함은 이런 부류들에게도 가차없었다. 즉, 오프라 윈프리 쇼같은 대중적인 미디어 매체에서 매주 쏟아내는 웰빙 정보들, 스스로의 정신과 자아 개발 서적과 프로그램들, 문화와 맞물려 신체를 단련하고 건강에 올인하는 이 모든 것들조차 미국에서는 소비주의적이고 상품화되어 버렸다. 서구 사회에서 개인주의적인 것이 문제시되지 않았으나 탈 미국적인 지젝의 눈높이에서는 심신의 자아 개발에 목매다시피 하는 미국인들의 열렬함에 호의적일 순 없었다. 무엇보다도 갈수록 상품화되어가기 때문에 그때 그때 최신 유행과 흐름이 급변하기도 하고, 사생활을 중시하고 보호한다는 미국의 텔레비전 쇼에서 유명인과 셀리브리티들의 내밀한 비밀이 폭로되고 고백하는 게 인기있는 것은 아이러니였다. 미 합중국의 대테러 전쟁과 관련하여 두 가지 태도는 확실히 구분해야 한다고 지젝은 말하였다. 첫째는 인종차별적인 ‘기독교 근본주의’이고, 둘째는 ‘관용적 자유주의 버전’이라 불리운 것으로써 이슬람 근본주의(과격파)의 위협으로부터 무슬림들 자신을 보호하는 것이다. 2001년 이후 시간이 흐를수록 대테러전 양상은 후자로 옮겨갔다. 지젝은 그러나 이 둘 사이에도 공통점이 있다고 한다. 둘 다 ‘자기 파괴적 변증법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 초유의 빌딩 폭파와 수천명 희생자를 낳은 911 직후에 미국 당국이 삶에 위협적인 모든 것을 통제, 장악하려는 시도가 결국에는 진정한 자유로운(나아가 민주적인) 국민의 삶을 파괴하는 결과를 낳았기 때문이다. 꼭 엄청난 가시적인 피해를, 본토에서 공격당했기 때문만이 아니라, 미국은 이제 탈레반 조직을 완전히 ‘팽’하기로 결정했던 것 같다. 아무튼 엄청난 군사력과 정치적 에너지를 상당 기간 미국이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등지 폭격에 퍼부었다. 상식적으로, 미국의 군사 엘리트들이 작정하고 그것도 대놓고 공격했다면 게임 오버여야 정상이지만, 신기하게도 탈레반은 근절되지 않았던 것 같다. 나는, 또 평범한 우리는 그것을 잘 몰랐지만 애꿎게도 탈레반의 최후의 끈질긴 전투와 저항의 불똥은 알다시피 샘물교회 신도 납치 사건으로 비화되고 말았다. 참으로 비극적인 일이었다. 세계 정세에 물정을 몰랐던 교회 방문단은 너무도 손쉽게 탈레반에 피랍되었고 두 명은 끝내 잔인한 살해를 당해 당시 전국의 여론을 들끓게 했다. 종교적인 민감한 사안을 떠나 볼 때, (이 책에 나와 있는 얘기는 아님) 결국 우리 국민 두 명이 무장조직과 미 군사당국의 줄다리기에서 처참하게 희생된 사건이었던 게 아닐까? 다시 말하면 미국 때문에 한국 국민들이 희생된 사태로, 2002년 미선.효순 사건 이후의 트라우마였다. 미국이 세계에서 거대한 영토를 갖고 있고 의견 결정에 주도적인 국가이긴 하지만, 911 이후 많은 세계인들은 근심스러운 눈으로 대테러 전쟁을 지켜본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분명한 것은 종교, 문명의 충돌을 넘어서 2001년 이후 지젝 말처럼 인류는 ‘인간의 존엄과 자유란 무엇인가’란 주제를 진지하게 다시 떠올리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한 지성 한다는 교수, 작가, 기자들이 많은 매체의 지면에서 치열한 사상의 지평을 펼쳤음을 <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으로 재 확인했다. 911 직후, 1,2년간에 미국 정부와 당국은 긴급 사태였다. 조지 부시 대통령은 공공연하게 미국은 전쟁 상태라 말하길 서슴지 않았고, 럼스펠드 장관은 테러와 직 관련된 용의자들을 고문할 수 있다고 말하고 다녔으며, 유력 잡지(뉴스위크 따위)의 논객들은 고문 문제를 의제화하며 국민들을 멘붕시켰다. 생각해보니 당시 나는 얼떨결에 영자 잡지 타임을 정기구독중이었는데 정말 지긋지긋할 만큼 매 회 테러 관련 기사들이 장식됬던 기억이 난다. 2002년의 한일 월드컵의 즐거운 추억과 대학원 수료 등, 이후 신변이 급변하면서 미국 테러 사건은 그냥 해외 소식 정도로 내게는 자리잡았던 것 같다. (뭐 어떻게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위치도 아니었으므로) 911이나 미국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한국의 영화광으로서 2003년 4월 홍콩배우 장국영의 투신 자살이 사실 충격의 여파는 피부에 와 닿기도 했다. ㅠㅠ 철학자 카를 슈미트(Carl Schmitt)는 이런 말을 남겼다. ‘정치란 친구와 적을 구분하는 일이다.’ 그런데 이 문구를 굉장히 부정적이고 사악하게 해석해 보노라니 나는 이런 결론도 도출할 수 있었다. ‘정치란 적을 만들어 내는 일이다.’ 그러니 명백한 공격을 받은 미국 군사, 정보 당국이, 테러리스트들을 색출하는 데에 명분을 얻는 것에 지장이 있을 이유가 있었을까.. 물론 확실한 범인을 잡아 그들을 법정에 세워 처벌을 받게 하는 것은 당연했을 것이다. 이제 오바마 정부 2기이고 2년전에야 빈 라덴을 생포에는 실패하고 사살하여 아무도 모르는 곳에 수장시킨 지금에는, 이성적이고 국제적인 관점에서 지난 테러와의 전쟁 시기를 정리해야 하는 게 옳다. 참 신기한 것은 그런 역사적인 임무의 최전선에서 영화가 스타트를 끊었다는 것. 얼마전에 <제로 다크 서티>는 비교적 호평 속에 하나의 팩트를 재구성해 보여줬다. 어쩌면 지난 12년 과거에 벌어졌던 미국과 중동에서의 복잡한 히스토리(history)의 해석은 이제 막 시작한 것에 불과하다. <허트 로커>, <그린 존>처럼 영리하긴 하지만 뭔가 미군/백인 남성 위주의 작품 경향에서 이젠 지경을 넓힌 영화가 필요하달까…?! 지젝의 성역없는 비판은 무려 스필버그 감독에게도 가해져서, 아직도 칭송받는 전쟁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는 ‘전쟁이란 무조건 나쁜 거야’라는 인도주의적인 주장을 담은 평범한 영화로 불리기도 했다. (이쯤되면 희대의 독설가 지젝님인게 아닐까 ㅋ) 하긴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마지막 장면은 톰 행크스 후손들이 국립 묘지에서 그를 기리고 성조기가 펄럭였어서 나도 오글거리긴 했다. <실재의 사막> 저서가 2002년 책임을 고려할 때 현재에는 변화한 현실들도 꽤 있다. 가장 커다란 변화는 전쟁광 조지 부시가 퇴임하고 비교적 온건파인 오바마가 그것도 첫 흑인 대통령인 미국의 상황일 거다. 그런데 나는 한가지 의문점이 책의 말미에서 들었다. 지젝도 거론했고 그것을 이현우가 재인용하였는데 2002년 이후 새뮤얼 헌팅턴, 프랜시스 후쿠야마같은 논객들의 분석들이 많은 공감 혹은 논란으로 화제였다고 한다. 다 읽고 보니 슬라보예 지젝도 무시할 수 없는 ‘911’ 논객이었던 것 같은데, 왜 국내에는 유독 헌팅턴의 문명의 충돌 얘기만 회자되고, 미국 행정부의 급변하는 정황들만 보도되었던 걸까? 당시에 이라크 파병 문제가 논란이었기에 중요하진 않은 사안인지 모르겠지만, 지젝이 이렇듯 통렬하지만 의미있는 얘기들을 했는지 거의 전혀 몰랐다. 교수님들이나 기자들은 얼추 아셨는지 모르겠지만 내 기억에 일간지에서 별로 지젝 거론했던 기억이 없는데.. 부디 나의 착각이었다면 정말 다행이고^^ 그게 만약 아니라면, 이런 생각이 하나 든다. 혹시 우왕좌왕 정신없던 미국 만큼이나 그 우방국에 발맞춰 ‘긴급 사태’였던 건가? 아니면 국내 정치 문제 해결만으로도 빠듯했던 건가. 이현우는 ‘세상의 분쟁 사(史)라는게 다 그렇고 그런거지’라는 회의적/양비론적인 태도도 문제가 있다고 했다. ‘뭐 어제 오늘 일인가, 둘 다 잘못 있으니 자기들이 해결해라’라는 자세는 일견 틀린 것 같지 않다. 하지만 뒤에 감추인 본심은 “내가 뭔 죄야?”라는 것이라고 했다. 이젠 그러면 안된다면서, 오히려 “그래 나도 책임에서 면죄되지 않는다”라는 전제를 갖는 것이 진정한 세계 시민적인 태도라고 한다. 한국인들만의 특유한 ‘한국식 허무주의’가 있다는 대목에는 씁쓸한 웃음이 났다. 적잖은 한국인들이 ‘이 놈의 시끄러운 대한민국’이라는 푸념이 일반화되 있고, 무슨 일이 크게 벌어지면 ‘한국이 늘 그렇지, 뭐’라는 엄청 시니컬한 불만을 아무렇지도 않고 누구나 토로한다는 분석이다. ㅎㅎ 얼마전에 북한의 전쟁협박이 2주간 지속됐을 때 서양 언론들에서 분석 기사로 ‘남한인들은 이런 저런 논쟁, 염려를 하면서도 서울 거리의 아침에는 출근, 통학하는 시민들의 평범한 일상이 계속됐다’ 이랬었다. --; 한국에서 한 20년은 살아봐야 이해할 수 있는 ‘경지’니 그들이 알 리가 만무하다. ^^;; 앞서 카를 슈미트의 정치의 정의를 말했는데, 그렇다면 이것을 극복하는 지젝이 제시하는 대안적인 정치란?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그지 말자’로 내겐 들렸다. 비록 근자까지 유럽과 부시정권에서 ‘극우’들의 집권, 세력화 현상이 있었지만, 그래도 진정한 정치를 위한 열정을 가져야 한다고 결론지었다. 강대국들의 정치인들은 갈수록 탈정치화되며 정치란 단순히 복지,안보에 주력하며 사람들의 생활을 관리하는 행정 차원으로 축소하려 할 것이라 지젝은 예언했다. “그러한 제스처가 우파 포퓰리즘으로 나타나는 것이 민주주의의 곤경이다.”(p.207) 이러한 흐름에 대항하는 진보 집단에게 요청되는 것은 급진적 정치행위가 포함된다. 이것은 정치에 많은 것을 걸고 투신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한 것이고 신념과 끈기가 뒷받침되어야 하는데 현대에서 이것은 일종의 ‘광기’라고 했다. 다시 말하면 ‘정치는 미친 짓’인 게 현실이지만 우리가 바로 정의로운 정치 행위에 미쳐야만 한다는 의미로 느껴졌다. 어찌됐든 간에, 거의 단 한 권의 책을 위주로 이렇듯 여러 갈래의 이야기들을 풀어놓은 이현우 저자의 노고에 강하게 매료된 시간이었다. <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은 책이 주제로 삼은 지젝이 매력적이었고, 논의로 삼은 이야깃거리들의 성격과 범위가 확실한 인문서이다. 어려운 부분도 많고 지젝의 용어들을 다 이해하지는 못했다. 저자가 결론에서 밝히듯이 이제 슬라보예 지젝의 세계의 중심에 들어가긴 한 것 같다. :) 2002년에 해외에서 발간한 책을 바탕으로, 2년전에 풀어낸 것을, 나는 너무도 뒤늦게 읽었다는 것이 조금 아쉬웠다. 그래도 이제라도 슬라보예 지젝이 읽어낸 911과 세계 지성사의 흐름을 접했다는 것이 좋았다.
http://blog.yes24.com/bohemian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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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라보예 지젝의 "실재의 사막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라는 책을 번역한 로쟈 이현우의 지젝 읽기다.
난 실재의 사막을 읽으면서 참 어려운 철학서를 읽기 편하게도 번역해놓았구나 생각했는데 그것이 로쟈의 결과물이었다.
우연히 들어간 로쟈의 저공비행 블로그에서 엄청난 책들과 서평, 지식들을 엿보았다.
그의 방대한 철학, 예술, 문학 읽기에 감탄만 연신 하면서 하루에도 몇 번을 들락날락했다.
그런 그의 책이 나왔다.
첫번째 결과물이자 인터넷 블로그에서 연재했던 글을 고쳐서 출간한 것이라고 하는데 그렇다고 하기엔 정말 그 깊이에 놀랄 뿐이다.
이 책은 지젝의 "실재의 사막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와 함께 읽는 것이 좋다.
일단 제목이 "로재와 함께 읽는 지젝"이고 부제가 "9.11 이후 달라진 세계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이기 때문이다.
그 만큼 지젝의 이야기고 그의 책과는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이기 때문이다.
마치 책은 2권이지만 한 세트같이 묶어서 읽어야 한다.
나는 이것저것 관심이 많은 편이지만 그 대신 정말 얕은 지식의 소유자이다.
그래서 이렇게 어떤 한 분야에 대해 깊이 있는 지식과 관점을 가지고 상황을 분석할 수 있는 사람에게 존경심을 느낀다.
지젝의 책을 읽고 그의 철학에 대해 내 나름대로의 해석을 했었다면 이 책을 읽고서는 그 해석을 조정할 필요가 있었음을 알았다.
이 책을 읽는 동안 대학의 강의를 듣는 듯한 기분이었고 뭔가 생각을 하느라 머리가 돌아가고 있음을 느꼈다.
우리는 얼마나 변화를 절실히 원하는가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았다.
변화를 절실히 원하는가? 그런 사람들에게 꼭 권해보고 싶은 책이다.
로쟈의 저공비행 : http://blog.aladin.co.kr/mram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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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와함께읽는 지젝
책 표지에서부터 뭔가 느낌이 있다고 할까? 주목이 되는 책이다. 아마 이책을 읽는 사람은 사고가 깨어 있는 사람들이다. 이 책을 읽을 때에는 자기 자신만의 고집을 갖고 있는 사람이거나, 자신이 이 세상을 다 알고 있다는 사람, 그리고 이 세상이 변화를 원치 않는 사람은 읽지 않아도 될 것이다. 허나, 사람이 틀에 박힌 사고에서 탈피하고자 하는데 그 방법을 모른다면 이 책을 적극 추천한다. 방법론이 아닌, 제대로 생각을 해야 한다는 것을 알려 주는 책이다. 지금까지의 나란 존재보다는 이 책을 읽은 뒤에 있을 새로운 나를 꿈꾸는 사람이라면 꼭 읽기 바란다. 이 책에서는 (실재의 사막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읽고 난 뒤에 더 생각할 수 있는 방법을 소개하는 길잡이와 같은 책이다. 왜 지젝을 읽어야 하는가? 우리는 왜 지젝을 알아야 하는가? 바로 사고하는 힘, 생각하는 힘을 얻을 수 있다. 우리가 아는 것이 부족한 경우에 무지함에 의한 혼동이 오기 때문이다. 내가 아는 것이 너무 없으면, 기득권과 편의주의에 대한 무사안일주의에 빠지게 된다. 내가 아는 게 없기 때문에 당하고만 있다면, 이는 너무 억울하지 않은가? 말 그대로 좋은 게 좋은거지 처럼 그냥 당하고만 있는 것이다. 왜 그런지, 우리가 왜 이렇게 있어야 하는지에 대한 반박조차 할 수 없는 사람이 되어서는 아니 된다. 이 책에서 우리는 계몽할 수 있다. 이성의 힘을 얻을 수 있게 되는 책인데, 현존 질서를 타파하고 사회에 개혁을 일으키기 위해서는 아는 힘이 중요하다. 현존 질서인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에서 성공적인 방향으로 가야 하는데 지금 우리의 시스템은 문제를 하나 둘 씩 보이고 있다. 왜 공산주의를 넘어서는 시스템인데 사회는 문제를 갖고 있는 것인가? 왜인지 궁금하지 않고 당하고만 살 것인가? 그렇다고 공산주의로 가자는 것이 아니다. 새롭게 개정된 주의가 필요한 것이다. 이 책을 읽음으로써 우리는 깊이 읽기와 사고하기를 배울 수 있다. 이 책은 철학 교양 인문서로 생각을 깨운다. 제 1장에서의 제목처럼 우리는 영화 매트릭스와 같다. 빨간 약이냐, 파란 약이냐? 바로 이 책을 읽는 다면 빨간 약을 선택한 것이고, 우리는 현실을 깨닫게 된다. 매트릭스의 네오는 가상현실에서 깨어 다시 본 세상은 황량 그 자체였다. 이 책을 읽음으로써, 실제를 깨닫고 현실을 이해할 수 있는 눈을 갖게 된다면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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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욕으로 물든 금융업계를 규탄하고 고실업, 빈부 격차에 항의하는 ‘월가 점령 시위’가 지구촌 곳곳으로 번져나갔다. 82개국 1000여 개 도시에서 성난 시위대가 물밀듯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고, 이탈리아 로마 등 일부 지역에서는 과격 시위로 비화하기도 했다. 서울에서도 여의도와 서울역 광장 등에 시민 1000여 명이 참여해 ‘1%에 맞선 99%의 힘으로 세상을 바꾸자’ 등의 구호를 외치며 국제연대집회에 동참했다.
이처럼 전 지구적으로 부패한 금융업계를 규탄하던 그 시각 ‘이 시대의 가장 위험한 철학자’ 슬로베니아 출신의 석학 슬라보예 지젝이 뉴욕에서 벌어지고 있는 ‘월가 점령 시위’에 나와 연설을 했다.
“그들은 우리가 모두 루저라고 말한다. 그러나 진정한 루저들은 저곳 월스트리트에 있다. 우리가 낸 돈으로 수십억 달러의 구제금융을 받은 것은 그들이 아닌가. 그들은 우리가 사회주의자라고 말한다. 그러나 부자들을 위한 사회주의는 언제나 존재해왔다. 그들은 우리가 사유재산을 존중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밤낮으로 몇 주 동안 사유재산을 파괴한다고 해도 2008년의 금융시장 붕괴 당시 파괴된 사유재산의 양에는 미치지 못할 것이다.” 지젝의 연설은 유튜브를 통해 전 세계로 퍼졌지만, 현장의 육성은 사람들의 목소리를 통해 확장됐다.
이 책은 슬라보예 지젝의 전문가이며 인터넷 인기 서평꾼으로서 ‘로쟈’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인문학자 이현우 한림대 연구교수가 슬라보예 지젝이 쓴 ‘실재의 사막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를 해설한 책이다. 후기 자본주의 체제의 비판서다. 저자는 “지젝 읽기는 자기 자신의 타성과 기득권과 편의주의와 무사 안일주의에 대한 저항”이라고 했다. 2002년 첫 출간된 ‘실재의 사막’에서 지젝은 9·11 테러를 통해 진정으로 읽어내야 했던 것은 “승자 독식의 안온한 자본주의 체제(지젝은 이것을 매트릭스에 비유했다)의 균열 그 자체”라고 강조한다. 초심자가 접근하기 어려운 내용을 쉽게 풀이한 이 책은 이현우의 지젝 철학에 관한 결과물이라고도 볼 수 있다. 저자는 “이대로는 곤란하다”고 느끼는 사람들에게 ‘지젝 읽기’를 권한다.
저자는 이 책의 서문에서 “자신이 가진 게 많다고 믿는 ‘대한민국 1%’는 지젝을 읽을 필요가 없다. 자신이 세상을 너무도 잘 안다고 생각하는 ‘도인’들도 읽을 필요가 없다. ‘이대로!’가 생활신념이자 정치적 신념인 위인들도 지젝을 읽을 필요가 없다. 읽을 이유도 없다. 하지만 ‘이대로는 곤란하다!’는 절박함에 더하여 ‘제대로 생각을 해야 한다!’는 강박감에까지 시달리며 뭔가 제대로 알고 제대로 살아야겠다는 분들은 한번쯤 지젝을 읽으셔도 좋겠다.”고 말한다. 지젝과 거리를 둬서는, 자기 자신의 타성과 기득권, 편의주의, 무사안일주의 등에 대한 저항인 ‘지젝 읽기’를 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뒤집어 말하면 1%의 독식에 분노하는 99%에 드는 사람이라면 지젝이 건네는 ‘빨간 약’을 삼키고 깨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지젝이란 이 시대의 철학자를 ‘나꼼수’처럼 대중과 눈높이를 맞추는 방식으로 알리는 것이 서평꾼 ‘로쟈’의 역할이라는 이야기다. 소수 지식인이 지젝의 철학을 이해하기보다는 대중이 그의 문제의식을 공유할 때 세상이 바뀐다는 것이다. 슬라보예 지젝, 이 책을 읽는다는 것은 미래를 읽는 것이다. 미래를 준비하는 분들의 일독을 권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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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 9.11 이후 달라진 세계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 슬라보예 지젝, 지금 그를 읽는다는 것은 미래를 읽는 것이다! 지젝 자신이 공언하 바 있지만 그는 계몽주의자이다. 계몽주의에 대한 백과사전의 정의는 이성의 힘과 인류의 무한한 진보를 믿으며 현존 질서를 타파하고 사회를 개혁하려는 데 목적을 두었던 시대적인 사조인데 현존 질서를 타파하고 사회를 개혁하려는 데 목적을 둔 사조정도로 재정의하면 그의 사상에도 부합한다. 지젝이 자주 인용한 베케트의 한 구절이 "다시 시도하라. 또 실패하라. 더 낫게 실패하라" 이기 때문이다. 공산주의, 흔히 말하는 현실 사회주의는 실패했다. 하지마 그래서 결론은 자본주의다가 아니라 다시 시도하라이다. 왜 굳이 다시 시도해야 하는가? 자본주의가 재난적 파국으로 몰고 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우리의 선택지는 종말론적이다. 하지만 나날이 미국을 닮아가는 닮지 못해서 안달인 한국은 어떤가? 이제 걸음을 떼기 전에, 발 딛고 있는 현실이 그렇다. 그러니 미국이 한국이고 한국이 미국이다. 미국이 세계고 세계가 우리다. 이 세계는 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의 표지 이미지를 빌리자면, 지금 추락 중이다. 지젝은 그것이 지난 첫 10년의 교훈이라고 말한다. 어때서 그런 교훈이 도출될 수 밖에 없으며,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지 궁금하지 않은가.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고 시인은 노래했다. 빗대어 말하자면 우리가 스스로를 구제할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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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에 남는 말들이 너무 많아서, 그 말들을 하나하나 음미하다 보니, 정작 숲이 보이지 않았다. 이 책은 지젝의 '실재의 사막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라는 책을 읽고 조금 더 쉽게 풀어서 쓴 책이다. 서평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꼼꼼하고, 요즘 유행하는 고전 다시읽기라고 하기에는, 이 책이 고전인지 의문이고, 게다가 다시 읽었다고 하기에는 뭔가 부족하기에, 그냥, 풀어쓴 책 정도로 해 두었다.
한국이 워낙 지식 수입을 잘 하고, 열정적으로 단기간 소비하는 사회이니, 지젝도 그렇게 될 지 모른다는 생각을 조심스럽게 한다. 다만, 지젝은 뭔가 조금 다른 양상이다. 사람들은 의심한다. '걔! 뭐 별거 없는 데' 안 읽고 이런 말을 하는 경우도 있고, 대충 읽고 이런 말을 하는 경우도 있다. 중요한 것은 이 말이 진실이냐 거짓이냐를 떠나서 아주 광범위하게 횡횡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원인이 무엇일까. 내 생각에는 너무 가볍기 때문이다. 어디 이런 고상한 철학 분야에서 영화니, 소설이니, 신문이니를 꺼내든다는 말인가. 이런 원인의 이면에는 무지도 자리잡는다. 이 사람이 다루고 있는 영역이 너무나 넓어서, 겨우 자기 분야만 지키기에 급급한 지식 수입상들에게는 도저히 감당할 여력이 안 된다.
쓰다보니 조금 감정적으로 쓰는 데, 지젝의 글이 읽어볼 만한 가치가 그리 없지는 않다는 말을 하기위해 이렇게 감정적으로 썼다. 이 책은 지젝에게로 가는 좋은 입문서가 될 수 있다. 지젝의 책 한 권을 쉽게 풀어 설명하면서 생기는 장단점이 있다. 단점은 지젝이 가지는 소소한 매력을 잘 드러내는 것이고, 단점은 전체적인 그림을 그릴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책이 그렇다. 다만, 그 소소한 것들이 주는 매력이 충분히 우리는 지젝에게 잡아 맬 수 있다고 생각한다. 소소하지만, 번뜩인다. 지금 우리의 문제를 이렇게 날카롭게 지적하는 지식인이 얼마나 되랴. 설사, 이것이 상상이라도 이런 상상은 충분히 할 만 하다.
교사로서, 노동조합 조합원으로서, 나름 진보적이라고 자칭하면서 삶을 살고 있다. 주위 사람들이 변해 가는 모습을 본다. 나도 변해 간다. 가끔 뭐가 행복인 지 모르겠다. 굳이 이런 일을 안 하는 사람들도, 인간 관계는 충분히 충만하고 열심히 살고 있다. 내 경조사에 올 사람도 충분한다. 퇴근하고 폼 나게 악기도 배우고, 운동복 쫙 빼 입고 운동도 하고 싶다. 얼마나 안정적이고 멋 있는 삶인가. 가끔 모임에서 술도 마시고, 마시면서도 내일을 생각해서 적당히 쿨하게 조절하고. 얼마나 폼 나느 삶인가. 왜 내가 이 일들을 다 떠 맡아야 하는가. 안 그래도 월급은 꼬박꼬박 나오는데.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라면, 필독해야 할 책이다. 행복이란 무엇일까, 다시 생각해 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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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는 라캉거리고 지젝거리는 사람들의 책에 몰두한 적이 있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관심은 크지만 사는 게 팍팍해서인지 행동으로 옮기진 못하는 것도 사실이다. 책들을 뒤적거리다 눈에 들어와 오랜만에 지젝에 관해서 읽어볼까? 라는 생각에 펼친 ‘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은 “하이브리드총서 일곱 번째 책으로, <실재의 사막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슬라보예 지젝, 자음과모음, 2011)를 읽는 강독서”이기 때문에 아주 힘들게 읽진 않았다. 무슨 말인지 잘 이해가 되지 않을 때는 대충 넘겨버리는 무덤덤함(인지 무관심인지)이 커져서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슬라보예 지젝의 전문가”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인터넷 인기 서평꾼”임에는 분명한 저자이기 때문에 읽기는 게 괴롭진 않게 해준다.
“지젝 철학에 관련된 글을 꾸준히 써왔는데, 이 책은 그 작업을 엮어 만든 첫 결과물로서 의미를 지닌다”지만 첫 결과물이 강독서라는 점에는 아쉬움이 남는다. 다만, “지젝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좀 더 명쾌하게 설명해주고 있다는 점 때문에 좋은 평가를 하게 된다. 그 설명이 맞다는 전제가 필요하겠지만.
하지만 ‘실재의 사막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가 지젝의 저서 중에서 그렇게 중요하게 다뤄야 하는지는 의문이다. 일종의 정세 분석이라 할 수 있는 저서에 대한 강독서가 어떤 의미가 있을지도 의문이고. 그래도 9.11 테러 이후를 어떤 식으로 이해해야 할 것인지를 다룬 내용이라 시대착오적이라고 말할 순 있어도 지금 읽어도 아주 때늦진 않았다고 말하고 싶다.
지금의 국제정세는 결국 9.11 테러 이후라 말할 수 있고(혹은 트럼프나 코로나 19 이후일지도) 어떤 식으로 판이 짜여 있는지 지젝 특유의 방식으로 살펴보고 있어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다.
난해한 혹은 현란한 글쓰기를 보여주는 지젝이지만 저자는 성실하게 그 난해함(혹은 정신없음)을 (되도록)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노력(정리)해주고 있어 힘들지 않게 논의를 따라갈 수 있었다.
조금은 뒤늦게 읽은 책이지만 그래도 적당히 만족하게 됐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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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 이현우 교수가 쉽게 푼 입문서인 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은 슬로베니아 출신으로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철학자라고 불리는 슬라보이 지젝에 관한 책입니다. 슬라보이 지젝은 우리나라에서도 이미 번역서가 30종 가까이 나왔을 정도로 잘 알려진 인물인데 지젝의 생각이 어느정도나 우리에게 알려져 있는걸까요? 지젝의 사상은 현실을 바꾸려는 강력한 메시지를 담고 있기에 지젝과 독자들 사이에 벽을 낮춰 더 많이 공유되도록 노력한 저자의 노력이 돋보이는 책 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은 현실을 바꾸고자 하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기에 다소 어려운 이해의 장벽에 부딪히기도 했지만 제젝에 대한 접근 장벽이 이 책을 읽으므로써 더 많이 낮아진듯한 느낌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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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표지부터 인상적이다. 두 여인이 나란히 팔짱을 끼고 걸어가는 모습은 한가한 모습이다. 그러나 배경이 되는 도시는 온통 종잇조각으로 더럽혀져있고 연기가 가득차 있다.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일까?
이 책의 저자는 로쟈라는 사람이다. 이 시대 가장 위험한 철학가라 평가받는 슬라보예 지젝의 이론 전문가인 사람이다. '로쟈와 함꼐 읽는 지젝'이라는 제목에서 알 수 있다시피 이 책은 지젝의 이론을 쉽게 독자들에게 설명하기 위해 로쟈가 풀어쓴 책인 것이다. 지젝의 다양한 서적들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실재의 사막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의 내용을 중점적으로 해석한다.
가벼운 마음으로 읽어보다가는 금세 책을 접게 된다. 쉽게 풀어썼다고 하지만 철학은 쉽게 표현한다고 해서 쉬운 학문이 아니다. 읽는 독자들도 같이 생각하고 느끼고 저자의 의도가 무엇인지 판단해야만 비로소 책의 가치를 느낄 수 있다. 이 책 역시 그러한 점에서 어렵다고 느껴진다. 개인적으로 책을 3번을 읽고 나서야 지젝이라는 사람, 로쟈가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지젝은 로캉의 정신분석학에 따라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을 실재계, 상상계, 상징계로 나누어 본다. 상징계가 현실을 관장하고 실재계가 이런 상징계를 침범하는 변수가 되고 구멍이 되는 역할을 한다. 즉 이 세상을 방해하는 요인이 되는 것이다. 실재의 사막에 오신것을 환영한다는 말의 뜻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다. 부조리한 세상, 자본주의가 지배하지만 그런 자본주의를 참된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 오히려 자본주의를 변색시켜 살아가는 사람들 등등 이 세상의 가득한 실재계를 비판하는 것이다.
내용을 거슬러 올라가 책표지에 인상적인 사진 역시 그런 실재계를 나타난다. 우리는 상징계를 믿고 잘 살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실제 (실재가 아닌 실제) 현실은 추악하고 어지러운 것이다. 바로 실재계가 넘쳐나는 세상이기 떄문이다. '이래서 위험한 철학자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는 것인가?'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사람들은 지젝을 가까이 하지 않으려 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나 역시 지젝을 만나는 동안 '이 사람은 정말 비관적이고 염세적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로쟈의 해석이 어느정도 이런 생각을 희석시켜주었지만 말이다.
얼마전 지젝이 반월가시위에 나와서 했던 연설 장면이 떠오른다. "1%가 지배하는 미국, 우리는 99%다." 라고 말했던 군중들 속에 당당히 나타나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던 그의 모습이 말이다. 과연 지젝 답구나 라는 생각이 든다.
딱히 그가 바라보는 시각이 맘에 드는 것은 아니지만 그가 우리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것은 생각해봐야 하는 부분이다. 보다 나은 세상, 밝은 세상을 희망한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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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 로쟈라는 사람은 서울대학교 노어노문학과를 졸업하고 현재 한림대학교 연구교수인 이현우라는 사람입니다. 한겨레와 경향 신문등에서 서평과 칼럼을 연재하고 로쟈라는 필명으로 로자의 저공비행이라는 블로그를 꾸리면서 인터넷 서평꾼으로도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로쟈!! 그와 함께 하는 지젝은 어떤 느낌일지 궁금했어요. 얼마전에 실재의 사막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라는 도서를 읽었었는데요.. 그 책의 번역가가 바로 로쟈더라구요.. 철학처럼 깊고 어려운 분야를 좋아하지 않는 하랑천사로서는 쉽게 다가가기다 힘들었지만 로쟈 덕분에 조금은 편안하게 다가갈 수가 있었답니다. 이 책에는 지젝이 출간한 실재의 사막에 오신것을 환영합니다. , 이라크, 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의 책 3권을 읽고 라쟈의 생각을 풀어놓았는데요~ 어떤 사람들은 지젝을 동구권의 기적이라고 소개하기도 하고 ,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철학자로 소개를 하기도 한다고 합니다. 지젝의 책을 접한 사람들의 의견은 다양한데요.. 별거 아니다, 잘 갖다 붙인다 또는 너무 어렵고 이론만 현란하다 등의 다양한 의견들이 있지만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태도는 지젝과 거리두기!! 너무 가까이 다가가지말고, 너무 빠지지 않는 것이라고 합니다. 지젝은 자기 자신의 타성과 기독권과 편의주의와 무사안일주의에 대한 저항 의식을 가지고 있는데요~ 자신이 가진게 많다고 생각하는 대한민국1%는 읽을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로쟈.. 이대로는 곤란하다~ 제대로 생각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은 지젝과 접하면 좋을 것 같다고 말을 합니다. 지젝은 사람들의 의식과 무의식에서 오는 여러가지 감정과 행동들에 대해 상세하기 분석을 하고 풀이를 해놓았습니다. 인간이 추구하는 행복과 인간의 내면에 숨겨진 욕망의 표츌,, 인간 생명에 대한 생각과 혁명.. 인간의 생애 전체를 다루고 있는 포괄적인 내용을 담은 책이라서 가볍게 책 읽기를 원했던 사람이라면 금방 손에서 책을 놓아버릴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인간의 내면과 행동에 대해 심도있게 생각하고 싶은 사람, 자아에 대한 철저한 분석을 원했던 사람이라면 많은 도움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은 책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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