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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 강요하는 사회
“ ‘나는 내가 갈 길을 알고 있어.’ 이것이 꿈의 매력이다” [p. 19] 하지만 모든 사람이 꿈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다 보니 “자신은 꿈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죄책감을 느끼며 자기도 모르게 “죄송합니다. 제가 꿈이 없어서”라는 말로 자기 소개를 시작한다.” [p. 18]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꿈을 가진 사람이 이 험한 세상을 더 잘 살아가고, 버티는 것은 맞다. 그렇다고 해서 꿈을 갖고 있지 않다고 죄책감까지 느껴야 하나 이건 마치 꿈을 강요하는 것 같다. 그러다 보니 “아주 일찍 꿈을 정하고 진로를 준비하는 사람들은 훗날 자신을 더 행복하게 만들어 줄 무언가를 만나게 되었을 때, 자신도 모르게 스스로를 속인다.” [p. 21] 그리고 이런 자신을 의식하지 않고, 다른 이에게도 자연스럽게 꿈을 가지라고 강요한다. 이렇게 “주변에서 ‘뭐라도 좋으니 꿈을 가져!’라고 외치는 나날이 계속된다면, 겁에 질린 소년 소녀는 결국 무언가를 쥐게 된다. 물에 빠진 사람이 흔히 그렇듯, ‘아무거나 일단’ 잡게 된다는 것이 문제일 뿐.” [p. 21]
왜 항상 고난을 정면으로 이겨내야 하나
저자는 고백한다. “알고 보니 나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아주 오랜 기간 동안 계속해서 이 말을 듣고 살아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도망가지 말고, 정면으로 이겨내라.” ” [p. 28]
분명히 문제를 외면하지 않고 정면으로 돌파하는 것도 필요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무조건 정면 승부를 하는 것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람리 선 전투에서 일본군 1,000여 명이 영국군을 상대로 소위 ‘반자이[萬歲] 돌격’을 하다가 바다악어 서식지인 늪에서 400여 명이 악어에 잡아 먹힌 일과 다를 바 없다. 이런 멍청한 일을 피하려면, 때로는 도망가는 것도 고려해야 한다. 쉬운 일이 아니다. 저자가 앞에서 고백했던 것처럼, 우리는 문제를 정면돌파 해야 한다고 여기고 있으니까. 어쩌면 우리는 주입된 선택 외에 다른 선택을 하는 것에 대해 두려워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선택에는 기본적으로 두려움이 전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 두려움은 ‘돌이킬 수 없다’는 전제에서 나온다. (하지만) 진짜 일상 속에서는 그렇게 돌이킬 수 없는 중대한 선택이 생각보다 많지 않다.” [pp. 50~51] 그렇다면 저자의 말처럼 행동하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일 것이다. 어차피 내 상처, 내 고통에 대해 누군가 점수를 매기고 평가해야 한다면, 그 주체는 ‘나’일 수 밖에 없으니까.
게다가 저자가 말하는 ‘도망’은 현실을 외면하고 회피하는 것이 아니니까. 오히려 문제를 똑바로 보고 극복하기 위해 ‘재정비’하는 것에 가깝다. 이런 재정비 없이 계속 달리라고만 채찍질한다면 누구도 오래 버티지 못하고 쓰러질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기에 “정말로 힘들 때는 잠깐 숨자. (그래서) 나중에 내가 다시 직면할 수 있을 만큼 상처에 딱지가 앉을 때까지, 피가 멈출 때까지 잠시만 숨어 있고 피해 있고, 외면하고 도망가자” [p. 32]는 저자의 말은 애잔하다.
도망, 어쩌면 ‘본래의 나’로 있을 공간 찾기
“이영도의 작가의 멋진 소설, <드래곤 라자>에는 영원의 숲이라는 장소가 나온다. 그곳에서는 어떠한 기준이 충족될 때마다 자신이 분열하여 여러 명이 된다. 특히 그 중에서도 모퉁이에서 돌아 나오는 ‘나’를 만나는 순간 이런 나와 저런 내가 극도의 공포심과 공격성을 발휘하여 서로 죽이려고 달려드는 장면은 이 땅의 젊은이들이 반드시 거치게 되는 한 시기를 담아낸 멋진 메타포다.” [p. 85] 굳이 영원의 숲이 저자가 말하는 무엇의 메타포인지 알 필요는 없다. 어차피 우리는 자라면서 점차 ‘본래의 나’를 버리고 ‘되어야 하는 나’로 살아가니까.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에 늘 누군가와의 관계 속에서 살아간다. 누군가의 아들, 누군가의 딸, 누군가의 아빠, 누군가의 엄마, 누군가의 상사, 누군가의 부하, 누군가의 친구 등등. 어떻게 보면 우리의 삶이란 수많은 ‘본래의 나’가 충돌할 때 ‘되어야 하는 나’를 남기고 죽이는 행위를 반복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 수많은 살해 속에서 팽팽해진 긴장을 풀 수 있는 공간과 시간이 없다면 어느 순간 펑 터질 수 밖에 없다.
그렇기에 저자도 매우 지치면 기꺼이 도망치라면서, ‘되어야 하는 나’가 아닌 ‘본래의 나’로 서 있을 공간이 있기를 기원하는 것이 아닐까. “늘 무언가를 잘해야만 하는 사람에겐 못해도 되는 장소, 타인의 시선이 중요한 사람에겐 아무도 나를 발견할 수 없는 어딘가. 항상 강한 모습을 보여줘야만 하는 이에게는 괜찮은 척 하지 않아도 될 곳. 우리는 언제나 반드시 되어야만 하는 모습을 겹겹이 입은 채 살아간다. 사원이었다가 아빠가 되고, 직업인이었다가 누군가의 아들이 된다. 그 중 어느 모습도 될 필요가 없는 장소. 강한 나를 만들어 줄 수 있는, 약해도 되는 어딘가. 당신에겐 있을까. 진심으로 있었으면 좋겠다.” [p. 1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