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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을 먹는 글, 렌들의 그라마톨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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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무정한 당신이 끝내 남기고 싶은 것은? ...       다작으로 참 유명한 작가이지만 상대적으로 우리나라에는 소개된 작품이 별로 없는 영국의 여류 작가 루스 렌들은 무엇보다 심리적 묘사로 이름이 높다. 아마도 그녀의 대표작이자 추리 문학에 있어서는 최고의 영예라고 할만한 골든 대거상도 수상했던 '내 눈에도 악마가'란 작품을 읽어보셨다면 이런 내 말이 쉽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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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무정한 당신이 끝내 남기고 싶은 것은? ...

 

 

  다작으로 참 유명한 작가이지만 상대적으로 우리나라에는 소개된 작품이 별로 없는 영국의 여류 작가 루스 렌들은 무엇보다 심리적 묘사로 이름이 높다. 아마도 그녀의 대표작이자 추리 문학에 있어서는 최고의 영예라고 할만한 골든 대거상도 수상했던 '내 눈에도 악마가'란 작품을 읽어보셨다면 이런 내 말이 쉽게 수긍되지 않을까 한다. 이 작품이 그토록 높은 평가를 받게 된 것 역시 그 작품에서 보여준 타인들의 눈을 끔찍할 정도로 신경쓰는 한 소심한 범죄자의 내면에 대한 그 세부에 이르기까지 집요하게 언어로 모조리 담아내는 탁월한 묘사에 있었으니까 말이다.

 

 

  공교롭게도 '내 눈에는 악마가'가 나온 76년 이듬해, 그러니까 77년에 나온 지금 얘기하려는 이 작품 '활자잔혹극'의 범죄자 '유니스' 역시 바로 전작의 범죄자 아서와 많이 닮아있다. 아서와 마찬가지로 끊임없이 주위에서 자신을 어떻게 볼까 신경쓰는 것이다. 나란히 나온 작품들이라 어쩐지 '소심증' 시리즈 연작으로도 보일 지경이다. 소설은 그 이유를 첫 머리에서 단적으로 밝힌다. 유니스, 그녀가 글을 모르기 때문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자신이 글을 모른다는 사실을 남에게 들키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니스는 아서와는 달리 주위의 시선을 신경쓰는 부분이 한정되어 있다. 그러니까 글자를 모른다는 부분에 있어서만 남들의 눈을 신경쓸 뿐 그 외 다른 모든 것에 있어서는 전혀 신경쓰지 않는다. 너무나 신경쓰지 않아서 어떤 이들은 섬뜩하다고까지 말한다. 이 책의 제목이 원래 제목과는 다르게 '활자잔혹극'인 이유도 유니스가 가지는 두려움이 오직 글자에만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작 소설은 유니스가 왜 글을 모른다는 사실을 남들이 알게되는 걸 그토록 두려워하는지 속시원히 밝히지 않는다. 그 때문에 일가족 네 명을 살해하게 되는데도 렌들은 그 이유에 대해 짐짓 모른체 한다. 하긴 '내 눈에도 악마가'에서도 그랬다. 아서가 그토록 소심증을 가지게 된 이유를 밝혀주지 않았다. 그래서 렌들은 내게는 '활자잔혹극'에서 그 어떤 미사여구나 감정이입 없이 마치 할 말만 하는 불친절한 가게의 아줌마처럼 아주 건조하고 무심하게 툭툭 내던지듯 써내려가는 그녀의 문장 만큼이나 무정한 작가로 보인다.

 

 

  내가 그녀에게 "왜 유니스가 이토록 자신이 문맹자라는 사실을 두려워하죠?"하고 묻는다면

렌들은 100% 이렇게 대답할 게 틀림없다. "꼭 이유를 알아야 하나? 그렇게 생겨먹은 걸 어떡하라고... 세상엔 설명되지 않는 것들이 너무나 많아. 유니스도 그런 존재라고 그냥 생각하면 안될까? 그냥 현실로 받아들이라구."

 

 

  건조하고 투박하고 자신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에 대해 아무런 애정마저 없어서 무정한 그녀의 문장 때문에 자꾸만 '킬러들'의 헤밍웨이가 떠오르기도 하는 '활자잔혹극'은 하지만 그 건조하디 건조한 외형에 비해 그 깃든 내용에 있어서는 참으로 이래저래 할 말이 많은, 그 다양한 해석의 이채로움으로 풍성한 작품이다. 

 

 

 

 

  이미 이 책 말미에 달린 해설에서 장정일은 유니스의 '문맹'을 가지고 '문맹이 결과하는 사회기술적 곤란만 아니라, 문맹이 인격적 형성에 미치는피해' 를 얘기하고 1995년 이 소설을 가지고 '의식'이란 제목으로 영화를 만들었던 끌로드 샤브롤 역시 커버데일과 유니스의 관계를 부르조아 계급 대 노동계급의 갈등이란 관점에서 아주 흥미롭게 보여준 바 있다.(사실 처음엔 '활자잔혹극'을 이렇게 유니스의 점증하는 계급의식에 맞추어 쓰려 했으나 끌로드 샤브롤의 영화를 보고 포기했다. 장정일은 해설에서 이 영화가 소설이 가지는 세부적 장점들을 많이 놓치고 있다고 평했으나 그건 소설이 영화로 옮겨올 때 흔히 가지는 일반적 한계에서 오는 보편적 문제일 뿐이고 '계급'적 관점에만 천착해 본다면 영화적 묘사가 소설 보다 훨씬 뛰어나다.) 때문에 이 책에 대해 이미 한 얘기를 하기 보다는 나 자신이 찾아낸 것으로 쓰는 게 혹시나 이 글을 읽으실 분들의 시간 낭비를 막는 길이기도 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물론 이 글이 이 책에 대한 해설 같은 것은 아니지만) 해서 그렇게 나가보려 한다.

 

 

 

   2. 데리다의 그라마톨로지를 자기만의 방식으로 다시 써 보고자 함이었나? ...

 

      '말-중심주의' 에서 '활자-중심주의' 로

 

 

  이 책이 가지는 내용에 있어서의 다양함은 어쩌면 그 출발에 있어서는 단순하지 않을까 싶다. 즉 '유니스의 '문맹'을 어떻게 볼 것인가?' 그것이다. 그렇게 장정일 처럼 '문맹'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 해석할 수도 있고 끌로드 샤브롤 처럼 하나의 은유로 받아들여 부르조아 계급의 이데올로기에 지배받지 않은 노동계급만의 독자적 이데올로기로 바라볼 수도 있다. 그렇담, 나는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나 역시 끌로드 샤브롤 처럼 하나의 은유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그 내포된 의미는 다르다. 그러니까 나는 그것을 데리다가 전통적 서양 형이상학의 토대라고 말했던 '말-중심주의'의 은유로 받아들인다.

 

 

  흥미롭게도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유니스의 '문맹'과 커버데일 일가의 '활자'의 대립이 데리다의 '그라마톨로지'에 나왔던 '말 중심주의'와 '활자 중심주의'의 대립으로도 얼마든지 읽힐 수 있음을 발견했다. 무리일지도 모르지만 나 자신 발견했던 데리다의 '그라마톨로지'적 독법이 설득력을 가진다면 앞서 말했던 '활자잔혹극'에 깃들인 내적인 해석의 풍부함에 대한 충분한 방증이 되지않을까 하여 그것을 위해서라도 한 번 나만의 독법을 시전(始展)해 볼까 한다.

 

 

   짧은 리뷰로 데리다의 논의를 다 담기엔 무리가 있으므로 스케치하듯 간략하게 넘어가는 것에 조금 양해를 먼저 구해두고 싶다. 아무튼 데리다가 전통적 서양 형이상학의 토대에 왜 말 중심주의가 있다고 한 것일까? 그것은 무엇보다도 서양 형이상학이 내내 진리를 추구해왔기 때문이다. 진리란 무엇인가? 단순히 말하자면 '참-실재'이다. 진짜로 존재하는 것. 그렇게 '아르케'의 추구로 부터 기원되는 서양 형이상학은 내내 진리란 이름으로 진짜 존재를 찾아왔었다. 그런데 진짜 존재란 무엇인가? 가상이 아닌 것. 플라톤에 의하자면 우리의 감각이 만들어낸 허상이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허상이 아닌 것이 있을 수 있을까? 그리고 그것을 찾을 수 있을까? 고대인들은 생각했고 그래서 찾았다. 바로 소크라테스가 '다이모니온'이라 불렀던 것. 그렇게 '양심의 소리'였다. 즉 고대인들은 생각했다. 내 양심 혹은 내 내면에 직접 들려오는 소리야 말로 '참-실재'가 아니겠느냐고. 왜냐하면 그 순수 내면에서 이루어지는 '말하고-듣는' 과정에서는 그 어떤 감각적 왜곡이 끼어들 틈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고대인들은 그것을 정초로 '진리'를 그리고 그것을 인식할 수 있는 '이성'을 점차로 구축해 나간다. 그리고 그 결과 이성을 뜻하는 '로고스 중심주의'가 지배하는 전통적 서양 형이상학이 만들어지게 되었다고 데리다는 말하는 것이다. 그렇게 '말-중심주의'는 토대가 된 것이다. 하지만 그라마톨로지에서 데리다는 이 '말-중심주의'를 비판한다. 왜냐하면 자기가 말하고 자기가 듣는 그것으로만 구성된, 그렇게 철저하게 동일성의 바탕 위에만 구성된 형이상학이었기 때문에 그 어디에도 타자가 개입할 틈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전통적 서양 형이상학이 가지는 문제점들이 전방위적으로 검토된 이유는 무엇보다 2차대전이었고 그것을 일으킨 파시즘의 출현이었다. 많은 철학자들은 파시즘이란 전체주의의 출현이 어떤 특정한 역사적 현상이 아니라 애초부터 하나의 존재라는 동일성을 바탕으로 다른 것을 배제함으로써 스스로를 정립시켜왔던 서양 형이상학 자체에 그 씨앗이 배태되어 있음을 깨달았다. 더구나 그것은 중세를 지배했던 기독교의 유일신 신앙으로 더 오래 더 확고하게 자리잡은 것이기도 했다. 그렇게 이성과 신은 2인 3각 게임을 하듯 서로 보조를 맞추어 철저히 타자를 용납하지 않는 오로지 혼자가 전부인 형이상학을 구축한 것이다. 바로 그것을 하이데거는 '동일자의 철학'이라 비판했고 레비나스 역시도 비슷했다. 데리다 역시 거기에 가담한다. 하지만 그는 더 안으로 깊숙이 들어간다. 그러니까 그 '동일자의 철학'을 낳게한 원인을 찾는 것이다. 그리고 결국 훗설이 예비한 길을 따라가다 그 근저에 말-중심주의(혹은 소리-중심주의)가 있음을 찾아낸 것이다.

 

 

  유니스의 '문맹'은 바로 이 '말-중심주의'를 상징한다.

 

  데리다는 '말-중심주의'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나르시스적 자기애' '현재에의 집착' 그리고 '소유욕' 흥미롭게도 루스 렌델은 직접적으로 유니스가 이 모든 특징을 다 가지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나르시스적 자기애'는 오로지 그 자신만 절대이고 완전함을 추구하는 '동일자의 철학'에 있어 당연한 특성이 아닐 수 없다. 유니스 역시 그렇다. 그녀는 자신이 글을 모른다는 사실이 들킬까 염려하는 것 빼고는 전혀 타인에 대해 신경쓰지 않는다. 그녀는 오로지 자신의 문제 감정만이 전부이며 일가족 네명을 다 살해한 뒤에도 유니스는 자신이 받게 될 급료에 대해서만 신경쓴다. 이건 그녀가 아버지를 살해한 까닭에서도 나타난다. 유니스가 자신의 아버지를 살해했던 것은 무엇보다 그가 자꾸 그녀를 다른 이름으로 불렀기 때문이다. 더구나 유니스가 처음과 달리 점점 커버데일가를 경원시하게 되었던 것도 그들이 자꾸만 자신에게 간섭하고 자신의 세계를 바꾸려 들었기 때문이다. 즉 유니스는 그야말로 '천상천하 유아독존'인 것이다. 단 하나 글자에 대한 두려움만 빼고.

 

 

 

   현재에 대한 집착 역시 유니스는 가지고 있다. '말-중심주의'가 현재에 집착하는 까닭은 진리의 집착 때문이다. 단순하게 말해서 진리의 가장 순수한 형태가 바로 현재에 나타난 진리이기 때문이다. 이건 우리의 상식이기도 하다. 지금 눈에 보이는 것이야 말로 절대 진실이라고 종종 우리는 여기지 않는가? 그렇게 전통적 서양 형이상학의 토대를 이루는 '말-중심주의'는 현재성에 집착한다. 그런데 유니스 역시 그렇다. 루스 렌들은 단적으로 이렇게 드러낸다.  

 

  현재에만 발을 딛고 살아가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유니스는 대부분의 사람들과는 상당히 다른 존재였다. 그녀에게는 당장 저녁 식사 오 분 늦는 사태가 십 년 전에 겪은 크나큰 슬픔보다 중요했다. 미래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P.71)

 

 

  소유욕 역시 마찬가지다. 애초에 말은 내 의식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그렇게 이 '나' 즉 그 무엇으로도 대체될 수 없는 고유한 '개성'은 다른 말로 하면 나만이 가진 것, 즉 소유권인 것이다. 즉 사유재산의 바탕이 되는 개인의 소유권은 바로 그 의식을 '나만의 것'이라고 할 수 있는 소유권에서 비롯된 것이었으며 데리다 역시도 철학사에 있어서 언어에 보다 우위성을 두게 된 것은 '있음'에 대한 집착 때문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의 자본주의 또한 '말-중심주의'에 그 연원이 있으며 그 정도로 '말-중심주의'는 '소유욕'과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없는 관계인 것이다. 유니스도 이것을 대놓고 보여준다. 앞서 말한 급료의 집착이 그렇지만 아래 부분에서 보다 직접적으로 드러난다.

 

   유니스 파치먼이란 인간의 흥미로운 특성은 비록 살인이나 협박은 주저하지 않았어도, 물건을 훔치거나 주인의 허락 없이 무언가를 빌린 적이 평생 동안 한 번도 없었다는 사실이다. 사물이란 신생처럼 특정 사람에게 귀속되도록 정해져 있는 것이다. 조지도 사물의 질서가 흐트러지는 모습을 싫어했지만 유니스는 그 이상으로 그런 모습을 싫어했다.(P.79)

 

 

 

   이렇게 그녀는 데리다가 말했던 '말-중심주의'의 특징을 정확히 가지고 있다. 더구나 그녀의 유일한 친구이자 같이 일가족을 살해하는 동반자 조앤 스미스가 광신도라는 사실을 고려하면 더욱 그렇다. 앞서 ''말-중심주의'가 '유일신 신앙'과 보조를 맞춰왔다고 말했는데 유니스와 조앤의 관계는 바로 이것을 그대로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거기다 조앤이 다니는, 그리고 유니스도 나중에 합류하게 되는 '하느님의 강림을 믿는 사람들'이란 교회를 고려하면 이것은 더욱 확고해진다. 이 교회는 특이하게도 오로지 설교와 고백이라는 '말'로서만 이루어지며 아예 교리로 '기도서' 같은 책들을 읽지 못하도록 못박고 있다. 철저히 활자를 배제하는 교회인 것이다. 이렇게 렌들은 조앤과 교회의 존재로써 유니스의 문맹이 바로 '말-중심주의'의 상징임을 보다 분명하게 드러내는 것이다. 이쯤 이르면 왜 유니스가 그토록 뚜렷한 이유도 없이 그리도 활자에 대한 끝없는 두려움을 가지고 있는지도 이해가 되기 시작한다. 바로 데리다가 '그라마톨로지'에서 그러한 현실 역사에 폐해를 가져다 준 '말-중심주의'를 소거하기 위해서 '활자-중심주의'를 요청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유니스가 가지는 두려움은 바로 자신을 소거할 일종의 '적'에 대한 두려움이나 마찬가지였던 셈이다.

 

 

   의도했는지 모르겠지만 루스 렌들은 유니스를 곤경에 빠뜨리고 파국을 가져오는 모든 계기들을 '활자'로 구성한다. 그러니까 결정적으로 조지가 유니스를 비난하게 된 것이 바로 '서류'였다는 것, 유니스가 문맹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알게되는 멜린다가 그것을 알게 된 것이 잡지의 '심리테스트'라는 것. 또한 유니스가 결정적으로 경찰에 체포되게 만들었던 살해 현장이 생생하게 녹음된 '테이프레코더'(행여 여기에서 녹음된 것은 '소리'이지 않느냐고 반문할 것 같아 미리 알려두지만 활자가 소리와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똑같이 재현가능함이다. 그런 의미에서 녹음 역시 일종의 '활자'인 것이다.)라는 것 그리고 그 녹음테잎의 존재를 알리게 된 것 역시 재클린의 메모라는 것 등등에서 말이다. 렌들이 커버데일 일가를 유난한 책벌레들로 설정한 것도 어쩌면 이러한 '활자-중심주의'의 역습을 찍고 싶어서 그랬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렇게 되면 가장 활자에 집착하는 자일스의 존재가 정말 의미심장해 지는데 장정일은 자일스를 '문해'의 극단으로 보았지만 내 경우에는 '활자-중심주의'의 극단을 상징한다. 렌들은 의미심장하게도 유니스가 자일스를 처음 만날 때 유니스가 '그의 얼굴을 거의 보지 못했다.'라고 쓴다. 유니스에게 있어 그는 거의 부재하거나 침묵의 존재이다. 또한 살해할 때도 자일스의 목소리만 녹음에서 들리지 않는다. 이건 왜 이럴까? 대답은 역시 하나뿐이다. 자일스가 '활자-중심주의'의 가장 극단적 상징이기 때문이다. 즉 유니스에게서 가장 멀어진 존재이기에 그녀는 볼 수 없는 것이며 유니스를 끝내 파멸시킬 녹음 자체가 하나의 전체적인 '활자'이기에 자일스는 별도의 목소리를 낼 필요가 없는 것이다. 거기 녹음된 모든 정황이 바로 자일스의 글쓰기와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이는 유니스에게 활자의 두려움을 가장 처음 심어주었던 계기를 생각하면 더욱 확고해진다. 그건 바로 자일스가 달마다 종이에 써서 붙여두던 '이달의 격언'이었다. 또한 이 '이 달의 격언'은 유니스를 둘러싼 커버데일의 일가가 '활자-중심주의'의 세계임을 분명히 드러내는 상징이기도 하다. 그렇게 렌들은 유니스와 자일스의 정교한 대립을 통해 유니스로 상징되는 '말-중심주의'와 자일스로 상징되는 '활자-중심주의'의 대립을 가져온다. 데리다가 '그라마톨로지'에서 했던 그대로...

 

 

  그런데 데리다는 왜 그것의 교정으로써 '활자-중심주의'를 가져오는 것일까? 단순하게 말해 '활자-중심주의'는 자아의 동일성을 허물고 타자성에게로 개방시키기 때문이다. 활자 자체는 외부에 씌여진 기록이며 어떤 것의 흔적이다. 그것은 나 아닌 다른 존재를 늘 추정케 하며 또한 현재의 것이 아니라 과거의 것이다. 때문에 그것은 당당히 진리를 주장할 수 없고 언제나 비판가능한 하나의 담론으로만 존재한다. 그렇게 '씌여진 활자'는 나 아닌 타자를 대면하게 한다. 활자 세계의 커버데일 일가가 유니스와는 다르게 내내 유니스에게 말을 거는 것도 그 때문이다. 단적으로 렌들은 다음과 같은 말들로 이것을 강조한다.

 

  문맹은 일종의 시각장애이다.(P.38)

 

 

 그렇게 유니스 그녀는 타인을 전혀 보지 못한다.

 

  글에 의해 통제되거나 억압되지 않는 본능으로 (P.40)

 

 

  그녀는 전혀 타인에 대한 윤리적 태도를 고려하지 않는다.

 

  물론 렌들은 이러한 커버데일의 유니스에 대한 관심을 부르조아 계급의 위선적 태도에 불과하다고 비아냥거리고 있지만 내 관점은 어디까지나 '말 중심주의' 대 '활자 중심주의'의 대립에 기초함으로 한계가 분명하긴 하지만 이런 식으로 얘기함을 어느정도 양해해주길 부탁드리고 싶다. 이는 또한 유니스에게 가장 인간적으로 대하는 멜린다가 영문학 전공(문학은 타인의 삶을 가장 많이 다루는 활자의 장르가 아닌가)이라는 점에서도 드러난다. 이렇게 렌들은 데리다가 언어가 아니라 활자에 더 우위를 둠으로써 타자에 대해 우리의 눈을 돌리려 했던 것을 그대로 형상화한다. 어쩌면 렌들은 그래서 커버데일 일가는 하필 '돈 지오바니'의 음악을 텔레비젼으로 보고 있을 때 살해당하는 것으로 그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여기서 그 시점이 중요한데 멜린다를 포함하여 커버데일 일가 모두가 유니스와 완전 결별했을 때, 다시말하면 그 때까지 유니스가 안경을 통해 활자 세계에 속한 사람임을 스스로 위장했듯이 커버데일 일가 또한 위선적인 이타적 태도로 그들의 자기애를 위장했던 것이 최종적으로 끝장났을 때 그들 모두가 처형되는 것은 정말 의미심장하다. 렌들은 그 시점의 폭발을 은밀하게 차근차근 준비하는데 그 처음은 자일스의 변화이다. 즉 절대적인 부재와 침묵 속을 떠돌던 그가 점차 사람들과 어울리게 되고 이윽고 종교에 귀의까지 하도록 변하는 것이다. 이것은 커버데일 일가가 유니스로 인해 서서히 활자의 세계에서 빠져나와 언어의 세계로 들어서고 있다는 것의 단적인 상징이 된다. 그렇게 커버데일 일가의 언어 세계로의 점차적 나아감이 끝내 저택 공간 전체를 지배하는 '돈 지오바니'의 오페라로 완성되는 것이다.(또한 그들은 유니스의 상징이기도 한 텔레비젼을 통해 그것을 보고 있음도 상기하라.) 그리고 그렇게 유니스의 세계가 완성되었을 때 그 모든 소리를 제압하는 그래서 죽음의 소리이며 유니스가 이해하고 좋아하는 유일한 소리이기도 한 총소리로 대체되고 활자 세계의 인물들은 모조리 죽음을 당하는 것은 렌들에게선 당연한 수순인 것이다. 렌들은 커버데일 일가의 언어 세계로의 들어섬을 이기심의 확장과 경로를 같이하게 만들어 오히려 활자 세계로의 머무름이 타자에 대한 관심의 유지임을 강조해 보여주려는 것이니까 말이다.

 

 

 

   3.  보다 깊은 그녀의 속내는? ...

 

 

  이러한 렌들의 주제는 그러나 전작 '내 눈에는 악마가'와 비교하면 동전의 양면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전작에서는 오히려 타인에 대한 지나친 관심이 비극을 가져왔기 때문이다. 이러한 차이는 어찌된 연유일까? 뭐, 양 극단은 지양하고 자기애와 타인의 대한 관심을 적절히 조절하자 정도로 편하게 말할수도 있겠지만 렌들이 그런 뻔한 얘기를 하는 것 같지는 않다. 그래서 어쩌면 전작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작품을 써서 렌들 스스로 데리다적 결론에 이르려 했던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보게도 된다. 데리다가 활자에 우위를 두고 '차연(혹은 '차이'라고 부르자는 학자들도 있다.)'를 가져오는 것은 근원적으로는 오로지 하나의 해답만, 근거만, 결론만 가능하다는 전통적 서구 형이상학 대대로 내려온 '아르케'의 집착을 버리게 만들기 위해서이다. 그렇게 데리다는 그 어떤 것도 진리를 주장할 수 없는 하나의 잠정적 담론이 되길 원하며 결론을 내릴 수 없는 과정 자체가 되길 원한다. 그래야 수많은 독자적인 해석들이 왁자지껄 제 목소리로 떠들면서도 한편으론 남들의 얘기에 귀도 기울여가면서 서로 대화할 수 있으니까. 바로 이 '활자잔혹극'에서 장정일과 끌로드 샤브롤 그리고 내가 그랬듯이 말이다. 바로 그래서 렌들 역시 이렇게 전작과 완전히 상반된 주제에다 또한 내용상 다양한 해석의 가능함을 통하여 독자들에게 하나의 해답만을 가지려는 생각을 포기하게 만드려는 것은 아닐까 싶어진다. 그러니까 어딘가 있을 또다른 무언가를 향해 늘 열려진 태도를 유지하는 것. 어쩌면 이것이야 말로 렌들이 궁극적으로 우리들에게 주려고 했던 것이 아닐까? 그러고 보면 루스 렌들의 '내 눈에는 악마가'도 '활자잔혹극'도 그  모두 느닷없는 폭발의 순간을 간직하고 있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아서의 죽음도 유니스의 살해도 아무런 전조도 없이 갑작스레 찾아왔다. 마치 삶이 모조리 예측불가능성으로 가득차 있다고 암시하듯이... 렌들이 권유하는 부단한 재조정 재설정을 위한 열려진 태도는 정말 그 때문인지도 모른다. 데리다는 텍스트를 정의하기를 '차연이 직조해가는 시공간적 차이의 연쇄적 그물망'이라 했다. 이 말은 그대로 삶에게도 통용되지 않는가...

 

 

 

l****1 2012.01.27. 신고 공감 2 댓글 2
리뷰 총점 종이책
활자 잔혹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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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워. 이상할 정도로 자가워. 그게 아니라면 그저 끔찍하게 수줍어하는 걸까?"(p.61)    아이에게 미소짓지도, 몸을 굽히지도 않는  유니스.  여자 남자에 상관없이 아기를 보면 한 번쯤은 눈을 돌리는게 세상의 자연스런 순리가 아닐까 하는데 말이다.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긴했지만 무심히 지나치는 조지, 아마 그는 알았더라도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사십년이 넘는 세월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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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워. 이상할 정도로 자가워. 그게 아니라면 그저 끔찍하게 수줍어하는 걸까?"(p.61) 

 

아이에게 미소짓지도, 몸을 굽히지도 않는  유니스.  여자 남자에 상관없이 아기를 보면 한 번쯤은 눈을 돌리는게 세상의 자연스런 순리가 아닐까 하는데 말이다.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긴했지만 무심히 지나치는 조지, 아마 그는 알았더라도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사십년이 넘는 세월을 활자로 가득 찬 세상을 피하게 되고, 그것을 보여주고자 하는 인간마저 피하다보니 따뜻한 마음, 타인을 향한 애정, 인간적이란 단어가 그녀에겐 사라졌다는 것을 말이다. '문맹' 이라는 우리에겐 단순해 보이는 사실에서 인간이라면 누구나 있을 거라 여기는  동정심, 상상력 또한  활자 공포가 빼앗아 갔다는 말이 유니스의 입장을 따라가다보면 알 듯도 하게된다.  읽고, 쓰고, 거기서 나온 생각들을 나누는 세상이 그녀에겐 가시밭길이 되었을 것이다.

 

"그들의 의도는 나쁘지 않았다."(p.62)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 주려는 선의를 품고 누군가의 일에 끼여드는 가족, 커버데일 가이다.

그런 그들의 모습은 아들 자일즈가 본능적으로 아는 사실, 이기심이란 자신이 원하는 방식대로 살아가는 게 아니라 타인에게 자신의 방식대로 살라고 요구하는 것임을 절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이었기에 이런 끔찍한 일을 불러온 것은 아니었는지.  유니스의 숨기고 싶은 부분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가족들에게 시간이 지날수록 그녀는 분노를 터뜨리게 되지만  고용인인 그녀의 감정보다는 자신들의 위신이 더욱 중요한 그들이다.

 

그들이 가끔씩 보이는 그녀의 차가움이나 집에 드리운 평상시와 다른 기운을 무시할 수 있었던 건 그녀가 고용인이었기 때문일 터이니 그들의 선의가 어디까지 진심이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단지  문맹이라는 사실을 감추기위해    '더 리더'의 한나가  모든 죄를 뒤집어썼던 것처럼 유니스 또한 조금의 주저없이  드러날 지 모른다는 생각에 기꺼이 죄를 저지르지만 또 다시 문맹이었기에 자신의 죄를 감추거나 도망침에서 멀어질수도 없다.

 

"유니스 파치먼은 읽을 줄도 쓸 줄도 몰랐기 때문에 커버데일 일가를 죽였다."(p.5)

책을 펴자마자 나온 사건의 진실, 드러난 범인이지만 그 다음장도, 그 다음장에서도 우린 불안의 그림자를 어디서고 발견하게된다. 소위 활자 중독처럼 마구 읽어대는 자일즈, 문맹이기에 읽을 수 없었던 유니스, 모두가 커버데일가에겐  소통이 안 되는 인물들이지만 정말 유니스가 그랬던 것처럼  문맹일 땐 타인과의 감정적  소통이 두절되고 그러면 우리 역시나  "도덕적 문맹" 이  될까..

 

그녀가 티비를 맨 처음 틀어 보았던 잔혹한 형사물, 그리고  사건이 일어난 날 밤 티비에서 보여주는 오페라를 보여주기 위해 모였던 그들, 그녀와 그들은 어디서부터 다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같고도 다른 이들이지만 결국 사건은 일어나게 된다.

 

하지만 그녀가 조지같은 아버지를 만났더라면.. 그녀가 조지의 딸 멜린다처럼 천방지축이지만 아름다웠더라면, 그녀의 이웃이 조금만 그녀에게 마음을 나눠줬더라면... 많은 그랬었더라면 이라는 생각을 하게 하는 유니스, 그녀에게 누구에겐 당연한 일들중에 하나라도 있었더라면  나쁜 일이 뭔지 알 기회는 있었을 텐데 말이다.

 

문맹이냐는 판사의  질문에 얼굴을 붉히는 그녀가 20세기 여인으로 가장한 유인원이라는 끔찍한 이름이 붙어햐 하는 게 그녀 혼자만의 책임은 아닐것이다. 읽어갈수록 그녀의 반대편에 서서 그녀를 몰아가는 우리의 잔혹한  모습 또한 볼 수 있으니 말이다.

 

" 그 위에 핏자국 말고도 무언가 적혀있었다."(p.214)

...

'그러나, 그녀는 읽지 못한다.'

 

사람의 마음을 읽지 못하는 일 , 그것 또한 얼마나 슬프고도 무서운 일인지 유니스를 보며 우린 알게된다.

s****s 2012.03.20. 신고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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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맹이 사람의 감정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가.
"문맹이 사람의 감정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가." 내용보기
"유니스 파치먼은 읽을 줄도 쓸 줄도 몰랐기 때문에 커버데일 일가를 죽였다."...5p   정말로 강렬한 시작이다. 문맹이란 사실이 누군가를 죽일 정도로 힘든 것이었나. 이전엔 배우지 못해 글을 못 읽는 사람이 많았다. 하지만 이제 적어도 우리나라를 비롯한 선진국에서는 문맹을 찾아보기가 쉽지가 않다. 어린 시절 각종 이유로 배우지 못한 사람들은 이제 많은 경로를 통해 글자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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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니스 파치먼은 읽을 줄도 쓸 줄도 몰랐기 때문에 커버데일 일가를 죽였다."...5p

 

정말로 강렬한 시작이다. 문맹이란 사실이 누군가를 죽일 정도로 힘든 것이었나. 이전엔 배우지 못해 글을 못 읽는 사람이 많았다. 하지만 이제 적어도 우리나라를 비롯한 선진국에서는 문맹을 찾아보기가 쉽지가 않다. 어린 시절 각종 이유로 배우지 못한 사람들은 이제 많은 경로를 통해 글자를 배우고 그런 노력이 사회에서 인정받는 세상이다. 그런데 <<활자 잔혹극>> 속 유니스는 다르다.  유니스는 온갖 수치를 당하고 다른 억울한 일을 당한다 해도 자신이 문맹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는 것 만큼은 받아들일 수가 없다. 어쩌면 바로 이런 유니스만의 자존심이 그녀를 살인자로 몰았을지도 모른다.

 

<<활자잔혹극>>은 미스테리 스릴러 소설이다. 하지만 맨 첫줄부터 범인이 누구인지 알려준다. 그런데도 한 장, 한 장 결국은 마지막 장까지 긴장을 늦출 수가 없다. "왜!"라는 물음이 끝도없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왜 유니스가 그런 행동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 왜 커버데일 일가는 죽을 수밖에 없었는지...

 

"커버데일 가족은 그녀의 과거가 어떠했는지, 이 집에 오는 일에 대해 불안해하고 있는지, 자신들에게 닥친 것과 똑같은 희망과 공포를 그녀도 느꼈는지에 대한 고려는 하지 않았다. 그 시점에서 그들에게 있어 유니스는 기계에 지나지 않았다."...36p

 

어쩌면 이 비극은 너무나 다른 환경에서 살았던 커버데일 일가와 유니스의 차이에서 일어났을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이미 유니스의 입장에서 볼 때이고, 이미 활자가 익숙한 우리에겐 매 순간순간이 활자가 없이는 생활이 불가능할 정도이니 유니스를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아무것도 읽을 줄도, 쓸 줄도 모르는 유니스의 관점에서, 그리고 자신이 문맹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는 것이 자신의 삶 그 무엇보다 중요한 그녀에게 하루하루의 삶이 얼마나 긴장되고 힘든 일이었을지.

 

소설의 뛰어난 점은 그런 유니스의 감정을 묘사하는 데에 있다. 그저 문맹이라는 사실이 주는 창피함 뿐만아니라 활자를 읽지 못하고 그 사실을 숨기고 오직 눈치만으로 삶을 살아오면서 변한 그녀의 마음이다. 감정적으로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게 된 것, 다른 사람과의 소통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 자신만을 바라보고 있다는 점. 그런가하면 작가는 마치 활자 중독에 빠진 듯한 커버데일가의 특성도 놓치지 않는다. 그들 또한 활자에 빠져 지내면서 진정으로 자신과 다른 부류와는 소통하지 않는다는 점.

 

이들의 관계가 일으키는 상황이 무척이나 긴박하다. 언젠가는 일어날 그 비극정 사건이 언제가 될지 마음 졸이며 읽게 된다. 그리고 결국 이 사건은 유니스에게 적절한 벌을 내리며 막을 내린다.

 




 



 



y****s 2012.01.27. 신고 공감 1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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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자 잔혹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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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그대로 ‘잔혹극’이다. 책을 읽기 시작하자마자 한 가족이 몰살당한 이야기부터 시작된다. 이 책을 간추려 말하기는 쉽다. 다른 거 없다. 글을 모르는 유니스가 그 사실을 숨기려다가 오해가 쌓여 자신이 일하고 있는 집의 가족들을 모두 죽이게 되는 이야기니까. 여기에 공범 조앤의 광기가 살짝 더해진다. 그 죽음은 유니스도 생각지 못했던 만큼 우발적인 상황일 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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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그대로 ‘잔혹극’이다. 책을 읽기 시작하자마자 한 가족이 몰살당한 이야기부터 시작된다.

이 책을 간추려 말하기는 쉽다.

다른 거 없다.

글을 모르는 유니스가 그 사실을 숨기려다가 오해가 쌓여 자신이 일하고 있는 집의 가족들을 모두 죽이게 되는 이야기니까. 여기에 공범 조앤의 광기가 살짝 더해진다.

그 죽음은 유니스도 생각지 못했던 만큼 우발적인 상황일 뿐이었다.

하지만 <활자 잔혹극>은 그게 다가 아니다.


책을 읽어나갈수록 이 아무것도 아니었을 단순한 사건에 푹 빠지게 된다.

유니스는 글을 읽을 줄 모른다.

단 한 문장만 말했다면 아무 일도 아니었을 유니스의 이야기는 그 한 문장을 숨김으로 바이러스가 퍼져나가듯 사건이 만들어지고 상황은 돌이킬 수 없는 방향으로 전개되는 것이다.

글을 이어가는 작가의 역량이 놀라웠던 건 이런 점 때문이다.

이미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다 알고 있음에도 책을 덮을 수가 없다.

유니스와 공범이 되어버린 조앤. 조앤은 종교에 대한 광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들이 대체 무슨 일을 벌인 것일까? 지적인 면이나 신분으로 교묘하게 우월함을 드러내고 싶었던 커버데일 부부였지만 유니스의 행동을 자기 식대로 받아들임으로 반대로 웃음거리로 전락하게 되었다.

숨기려했던 범행이 어떻게 만천하에 드러나게 되는지 알고 싶었다. 커버데일 부부는 언제쯤 유니스를 ‘제대로’ 평가할지 궁금했다.

그리고... 결론.

그녀들은 아무것도 안했다

그래서 그들을 죽일 수 밖에 없었다.

커버데일 일가는 아마 몰랐을 것이다. 그들이 죽어야 했던 이유를.

아무것도 안하고... 숨기려고만 했기에 모든 사건이 벌어졌고, 또한 그녀들의 범행이라는 것은 우연이 겹쳐져서 밝혀지게 된 것이다. 어.. 참... 나...

이런 극단적인 결과를 내놓고도 이렇게 어이없을 수가.

그렇지만 분명 흥미로운 이야기임은 틀림없다. 그건 보장.

b****4 2013.02.21. 신고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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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자 잔혹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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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굴욕 중에 가장 큰 굴욕은 '무지함'을 들키는 일 아닐까? 더구나 모두가 아는 뭔가를 나만 모를 때의 그 당혹감이란! 떠올리고 싶지 않은 악몽같은 기억을 하나 꺼내 보자면 몇 년전 가을로 거슬러 올라간다. 영어라고는 헬로우, 하와유, 아임퐈인엔쥬↗ 정도 밖에 모르는 내가 어쩌다 인도인들에게 박물관 안내를 해주게 되었다. 사실 말이 '안내'지 그냥 '보호자' 노릇이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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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굴욕 중에 가장 큰 굴욕은 '무지함'을 들키는 일 아닐까? 더구나 모두가 아는 뭔가를 나만 모를 때의 그 당혹감이란! 떠올리고 싶지 않은 악몽같은 기억을 하나 꺼내 보자면 몇 년전 가을로 거슬러 올라간다. 영어라고는 헬로우, 하와유, 아임퐈인엔쥬↗ 정도 밖에 모르는 내가 어쩌다 인도인들에게 박물관 안내를 해주게 되었다. 사실 말이 '안내'지 그냥 '보호자' 노릇이었지만. 어쨌든 그러한 짧은 인연이 있었기에 다음 날 점심식사 후 마주쳤을 때 괜히 반가웠다. 그래서 그분들에게 식사는 하셨냐는 인사를 건네고 싶어진 나는-여기서부터 매우 불길하다- 최대한 아는 단어를 나름 조합하여 이렇게 물었다.


 
"두 유 인조이 더 런치?" (꺄아아아아아아앜ㅋㅋㅋ)


 
  해맑은(?) 나의 질문에 인도인께서는 밝게 웃으며 "예스"라고 친절히 대답해주었지만, 그 옆에 있던 통역사의 비웃음을 나는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아니 근데, 아무도 안 물어본 치부를 자진납세한 이유가 대체 뭐냐고?  '활자 잔혹극'을 읽은 사람이라면 아마 내가 왜 이런 일화를 굳이 꺼내놓는지 눈치챘을 것이다. 그렇다.
 

 

  유니스 파치먼은 읽을 줄도 쓸 줄도 몰랐기 때문에 커버데일 일가를 죽였다. (p.5)

 

  혹시 괄호 안의 페이지 수를 보고 의아할지도 모르겠다. 당신이 생각하시는 그거, 맞다. 작가가 시작부터 스포일러짓이다. 누가 범인인지, 범행 동기는 무엇인지, 피해자는 누구인지, 이야기의 핵심이자 중요한 사건 경위를 한 줄로 요약해 버렸다. 이 패기넘치는 첫 구절은은 범죄소설계에서도 이미 정평이 나있는 모양이다. (Eunice Parchman killed the Coverdale family because she could not read or write.) 그런데 더욱 가관인건 이야기를 풀어나가는내내 이런식이다.

 


  왜 전화를 걸지 않지요, 재클린? 당장 그 전화번호로 다이얼을 돌려요. 지금 막 애니 콜의 옆집에 사는 젊은 남자가 귀가하면서 계단의 마지막단에 발을 올려놓고 있어요. 전화를 걸면 그가 수화기를 들었을 텐데. 그리고 당신이 미스 파치먼을 찾으면 그런 사람 이름은 들어 본 적도 없다고 말해 줬을거야. (p.27)


 

  비극이 시시각각 다가오는데도 재클린은 파치먼의 '마님'소리에 홀려 상황판단을 제대로 못하고 있다. 작가는 답답한지 몸소 나서서 '왜 제대로 하지 않느냐'고 닥달한다. 글을 읽는 독자마저도 마음을 졸인다. 아니, 근데 이미 결론은 난 거 아닌가? 어쩐지 농락당하는 기분이지만 재밌으니 넘어가주기로 한다.
 
   실은 '누가 죽였느냐?' 보다 '왜 죽일 수밖에 없었느냐'가 화두였던 것.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범죄, 수사, 추리 장르들은 어느 정도 '원죄'를 짊어진채 태어난다. '사람의 죽음'을 차가운 두뇌싸움으로, 화려한 액션으로, 혹은 심심파적거리로 풀어내기 때문이다. 타인의 죽음을 목격하면서도 그것을 한낱 풀어내야 할 수수께끼 쯤으로 여긴다. 소설 속 이야기 뿐만이 아니다. 하루에도 몇 건씩 올라오는 누군가의 사망기사 조차도 쉽게 흥밋거리로 전락한다. 그러니 "(…) 이제 추리소설은 주인공이 이끌어 가는 이야기 이상이어야" 하고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고찰하는 소설"이어야 한다는 작가 루스 렌들의 선언은, 장르소설 속의 사회상 반영이 선택이 아닌 '필수'임을 의미한다.
  
   유니스 파치먼은 한 번도 '배움'의 기회를 얻지 못했다. 글자를 읽을 줄 아는 아버지 밑에서 자랐는데도 말이다. 문맹이라는 감옥에 갇힌 그녀는 나름의 생존방식을 터득한다. 파치먼은 식스센스 수준의 남다른 감각을 지니게 되었는데, 그건 바로 사람들의 치부를 예리하게 포착해내는 능력, 그리고 그걸 적당히 이용할 줄 아는 뻔뻔함이다.  또한 파치먼은 그저 묵묵히 성실하게 일하며, 쓸데없는 허영이나 특별한 야망도 없다. 재클린은 특히나 파치먼의 그런 점을 맘에 들어했다. 철저한 계급의식에 젖어있는 재클린에게 필요한 건 '말 잘 듣는 하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미묘하게 어긋난 파치먼의 어두운 내면을 금방 알아채지 못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재클린의 태도가 현명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공포영화에서 등장인물이 살인마에게 당하는 순간은 반드시 '이상한 낌새'를 '알아차린' 직후이다. 커버데일 가족의 비극은 파치먼의 '치부'를 알아챘기 때문에 벌어졌다.
 
  자신의 세계에서 늘 그래왔던 것처럼, 위기의 순간, 즉 자신이 글을 읽을 줄 모른다는 사실을 누군가에게 들키고만 순간에 유니스 파치먼이 할 수 있었던 일은 그 당사자를 겁박하는 것 뿐이었다. 사실 파치먼에 대한 멜린다의 호의는 '호의'라기 보다는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은근한 우월감의 발로였다. 그러니 파치먼이 그런 멜린다의 '호의'를 '호의'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끝내 그녀를 협박하고만 사실을 누구도 비난하지는 못하리라. 다만, 작가와 함께 안타까워할 뿐이다. 왜 좀더 '현명하게' 대처하지 못했느냐고. 하지만 그 역시 파치먼에게는 무리한 요구다.
 
  작품을 읽는내내, 트루먼 카포티의 <인 콜드 블러드>가 떠올랐다. 그건 아마도 거대한 운명의 수레바퀴 안에서 '완벽한 가족'과 '어딘가 결여된 인물'의 인생이 맞물려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을 만들어냈기 때문이겠지. 지금도 그 운명의 수레바퀴는 돌고있다. 우리의 삶을 어디로 데려갈지 모르는 섬뜩한 그 '우연성'에 오늘 밤도 불안에 떨며 잠들지 못한 채 깨어있을 누군가에게 루스 렌들의 <활자 잔혹극>을 권하는 바이다.
 

c*******4 2012.02.06.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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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자 잔혹극] 루스 렌들┃문맹에 관한 극단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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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자 잔혹극 글쓴이 루스 렌들 옮긴이 이동윤 북스피어     글을 모른다고 사람을 살해할 수 있을까. 읽기 전 가장 큰 물음이었다. 글이야 배우지 못한다면 모를 수 있고 본인에게는 부끄러움을 느낄 수야 있겠지만 그렇다고 사람을 죽이는 이유가 되겠냐는 말이다. 책을 읽는 행위를 좋아하는 이들에게는 그러한 살인이 얼마나 끔찍한 것일까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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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자 잔혹극

글쓴이 루스 렌들

옮긴이 이동윤

북스피어

 

 

글을 모른다고 사람을 살해할 수 있을까.

읽기 전 가장 큰 물음이었다. 글이야 배우지 못한다면 모를 수 있고 본인에게는 부끄러움을 느낄 수야 있겠지만 그렇다고 사람을 죽이는 이유가 되겠냐는 말이다. 책을 읽는 행위를 좋아하는 이들에게는 그러한 살인이 얼마나 끔찍한 것일까 생각이 들었다.

 

 유니스 파치먼은 읽을 줄도 쓸 줄도 몰랐기 때문에 커버데일 일가를 죽였다.

-p.5-

 

  책의 섬뜩한 시작을 알리는 첫 문장이다. ‘유니스 파치먼’은 책에 등장하는 커버데일 일가를 죽인 장본인인 동시에 활자 잔혹극이 일어난 정중앙에 위치한 주요 인물이다. 유니스는 어렸을 때는 사악하지 않았지만, 주변 환경에 의해 ‘글자’를 배우지 못했다. 하지만 그로인한 불편함보다도 자신이 문맹인 것을 알고 남들이 자신을 ‘무시’하는 걸 견디지 못하는 인물로 나온다. 따로 나쁜 짓은 이러한 것이다라는 걸 배운 것은 아니지만 ‘협박’이라는 타인의 약점을 쥐고 남들보다 편하게 사는 방법을 알고있다. 바람 피는 유부녀의 약점을 알고있다던가, 어린 남자아이와 수풀 속에 들어갔다가 나올 때는 바지를 추스르며 나오는 유부남의 행동 혹은 돌아가신 어머니의 연금을 꼬박 꼬박 타내는 집주인의 약점을 잡는다던지 등등.

 

이러한 유니스에게는 무엇보다도 빌어먹을 ‘활자’ 천지인 세상이 문제이고, 가장 두려워하는 대상인 것이다.

 

 아버지가 살아 있는 동안, 그는 많은 점에서 골칫거리이긴 했지만 한가지만큼은 좋았다. 집세나 세금, 각종 청구서를 맡아 처리했고, 서류를 읽고 공란에 기입하는 일 또한 그의 몫이었다. 유니스는 의회 사무실에 들러 현금으로 세금을 냈고, 가스 요금이나 전기 요금 역시 같은 방식으로 처리했다. 하지만 서류를 작성해야 하기 때문에 텔레비전을 빌리거나 할부로 살 수는 없었다. 편지나 광고지가 와도 읽을 수 없었다. *로필드 홀에서 지내면 문제는 해결된다. 로필드 홀은 자신을 받아 주고 자신이 좋아하는 방식대로 영원히 살도록 돌보아 주리라.

-p.45-

*로필드 홀은 커버데일 일가의집

 

  1장의 내용과 마찬가지로, 어쩌면 커버데일 일가가 너무 잘 배운 축에 속해서 이러한 일가족 몰살 사건이 일어난 것일지도 모른다. 그녀에게 나쁜 말을 하거나 못된 행동을 해서 그러한 것이 아닌 단지, 유니스의 앞에서 활자가 적혀진 어떠한 것을 읽는다던가 종이에 그녀가 해야하는 일을 적어놓는다던지의 행동 하나하나가 거슬린 것이다.

 

  그와 동시에  활자로 되어진 걸 많이 읽기 때문에 벌어진 일들은 믿을 수 없는 일이기도하다. 작가는 문맹으로 인해 일어날 수 있는 악한 일에 대해 적었는데, 활자를 모르기 때문에 그것이 씌여져 있는 것이라면 병적일 정도로 싫어하는 유니스의 본질적인 측면에서 나쁜 것인가. 혹은 커버데일 가에서 일하게 됨으로써 즐기게된 텔레비전의 잔인한 수사드라마로 인한 영상 매체로 접한 것이 문제인 것일까에 대한 문제도 슬쩍 내놓는다. ‘문맹’이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을 담담하게 써내려간다. 때로는 유니스의 입장에서, 때로는 멀찍이 떨어져있는 작가의 입장에서 이미 벌어진 일들과 그때의 일들을 비교해가면서. 심지어 작가적인 입장에서이기 때문에 알 수 있는 일을 어떻게 해라고 충고까지 해준다. 물론 등장인물은 그의 외침을 모르지만.

 

  문맹에 대해 일어날 수 있는 극단적인 일을 알 수 있지만, 나에게는 맞지않았던 작품이다. 일가족 학살극을 벌이고도 담담하게 경찰에 신고하고, 그들에게 차(茶)까지 대접한 유니스에 대한 행동은 대단히 끔찍하지만, 반전을 좋아하고 숨겨진 어떠한 장치를 좋아하는 나로써는 ‘그다지’였던 작품이다.

k**********4 2012.01.24.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