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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는 아름답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다. 글을 쓴다는 것은 신(神)에 대한 응답이다." 북리뷰에서 이 인용문을 읽고, 이처럼 도통한 듯한 사람이 쓰는 예술론은 과연 어떨까 궁금해서 이 책을 보게 되었다. 과연 예술을 통해 도(道)를 깨치려는 태도가 나타난 글. 그러나 그것은 이미 깨달았노라 자신하는 사람이 "이것은 이것, 저것은 저것"하며 단칼에 선악미추(善惡美醜)를 판결해 놓은 기록은 아니었다. 저자는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대상에 다가가, 겸허한 자세로 대상의 참 존재를 구함으로써 차차 도에 접근해 나가는 과정을 잔잔하게 기술하고 있다.
글 첫머리부터 처음 경주를 접할 때는 수학여행단의 일원으로서 별로 흥미를 갖고 그 도시를 대하지 않았다는 그는 한 번 두 번 경주를 찾는 횟수가 늘면서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게 되고, 자신의 안목이 조금씩 나아지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경주에 자리를 잡고 수십년이 흐른 지금에 이르러서도 "매일같이 새로운 경주를 발견하며, 새로운 미에 즐거워한다"고 고백한다.
그는 여러 대상에 대해서 "처음에는 이리 보았으나, 다시 보니 이렇게 여겨졌다", "원래는 이렇게 주장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리 보지 않는다"등의 말을 많이 한다. 어쩌면 독자들은 우왕좌왕하지 말고 "석굴암은 이것이다", "모나리자는 저것이다"하고 명쾌히 말해 주는 예의 대가들의 설명을 더 바랄 지도 모르겠지만, 예술품을 논리적 파악과 추상적 분석의 대상으로 여기기보다 감상자와 예술품 사이의 끝없는 상호작용을 중시하는 그의 자세에 더 넉넉하고 편안한 느낌을 갖게 되는 것은 나 역시 한국인이기 때문일까.
그래서인지 몰라도 분석 방법론에 있어서 특별히 새로운 시각은 보이지 않았다. 다만, 황룔사 금당 치미에 새겨진 웃는 인물상이나 조선의 분청사기에 그려진 '대충 그린 듯한 그림'에서 우리의 전통미가 민중적, 해학적인 요소를 그 핵심에 함유하고 있다고 주장한 것은 매우 흥미롭다. 우리 전통예술에서는 '고급' 예술과 '대중" 예술 사이에 격차가 크지 않고 서로 혼교되어 있다는 것이며, 가령 일본의 섬세미와는 전혀 다르고, '억지로 꾸민 소박함'인 야스시(やつし)와도 다른 미의 세계가 펼쳐져 있다는 것이다.
불만이 아주 없지는 않다. 일단 책의 편집에서, 아마도 필자가 여기 저기에 발표한 글들을 묶어서 하나의 책으로 펴낸 듯한데, 때문에 내용이 중복되는 경우가 많다. 그럴 바에는 글의 말미마다 언제 어디에 발표한 글임을 밝혀주든가, 하나의 체제를 갖춘 책으로 내는 이상 내용을 가감하며 통일성을 갖추는 작업을 하든가 했어야 하지 않나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또 책의 말미에 포함된 중국, 일본 예술론은 아예 따로 떼어서, 좀더 보강하여 다른 책으로 엮는 편이 나았을 것 같다.
지나치게 분석적 방법론을 결여하고 주관에 의존할 경우 보편적 설득력이 떨어지게 된다. 그는 "우리나라 민족문화의 모든 원형이 경주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민족문화의 고향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라는 주장을 하는데, 여기에 그가 경주에서 보낸 수십년의 체험이 선입견으로 작용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는지, 백제나 고구려의 미술을 중시하는 사람에게는 과연 수긍될 것인지 의문이다. 또 모든 예술이 카타르시스 작용을 한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을까? 가령 고야의 [검은 그림]처럼, 인간의 숨겨진 암흑면을 파헤치고 잔혹한 진실에 눈뜨게 하는 예술은 어떤가?
아무튼, 예술론이든, 정치론이든, 경제론이든 온통 남의 땅에서 자라난 남의 담론만이 넘치는 가운데, 우리 땅에서 풍기는 흙냄새에 흠뻑 젖어 그 속에서 뒹굴며 자연스럽게 자아낸 담론을 대할 때는 즐겁지 않을 수 없다. 그런 글을 읽는다는 것은 나 자신의 본질에 대한 응답이다. [인상깊은구절] 참된 예술가는 여느 종교인처럼 천국과 내세 혹은 윤회를 생각지 않는다. 아마도 죽음이 적멸이라는 것은 믿을 것이다. 이 주어진 삶이 모든 것이기에, 그것이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것이기에, 한 자루의 초처럼 자신을 불태우며 산다. 예술가는 그것을 알기에 활화산처럼 자신의 내부에 잠재해 있는 힘을 표출하며 자유롭기 위해 삶을 처절히 영위한다. 그런 의미에서 예술가는 종교에서 말하는 창조의 개념과는 다른 차원에서의 창조자이다....예술가의 혼이 깃든 작품을 읽거나 보거나 만져 보면 문자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깊은 감동이나 카타르시스를 체험할 수 있다. 카타르시스란 바로 마음의 정화이다. 그러한 카타르시스를 체험하고 나면, 나 자신이 다른 나로 변하고, 그때 세상은 전에 보았던 그 세계가 아니라 다른 새로운 모습으로 내 앞에 펼쳐지게 된다. 반 고흐의 그림이나 마리노 마리니의 조각이나 만해의 노래를 대하는 동안 여러 체험을 하나하나 축적해 가며 나를 형성해 가고 세계를 형성해 간다. 그래서 나는 '아름다움을 통해 성스러움을 체험할 수 있고, 성스러움을 통해 아름다움을 체험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 즉 미(美)와 성(聖)은 둘이 아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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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에서 깨달은 사람만이 깨달은 사람을 알아볼 수 있다고 하듯이, 예술에서도 현상계에 눈을 뜬 어떤 그 나름의 차원에 도달한 자만이 좋은 시를, 좋은 미술품을 이해할 수 있으리라. 저자는 종교적 체험과 예술적 체험은 동질의 것이라고 말한다.
저자는 단지 창작자에게만 그것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요즘 유행하는 무슨 무슨 답사기니... 단 숨에 조선예술을 훑어주마 하고 으시대는 듯한 한 권으로 보는 씨리즈 같은 책들 사이에서 저자 강우방은 예술작품, 문화유산과의 일대일의 깊이있는 대화를 권유한다. 종교적 체험이 단박에 이뤄질 수 없는 것이듯이, 작품 앞에서 겸손해지고 작품과 진득한 만남을 성실히 추구할 때에라야만 진정한 감상이 가능해진다.
가벼움과 손쉬움을 쫓는 경박한 풍토 속에서 진중한 태도를 잃지 말라는 저자의 전언은 비단 예술감상에만 적용되는 이야기는 아니리라. 성급하게 모든 것을 규정지으려는 조급함 대신 하나 하나 성실히 만나고 성실히 궁구하는 노력이 어느 때 보다도 필요한 시기이다... [인상깊은구절] 전통문화를 철저하게 눈과 마음으로 대해야 하는 것인데 (문화학교 등의 요즘에 유행하는 고고미술강좌들은) 오히려 학생들로부터 눈과 마음을 빼앗는 과정임을 알고 탄식할 때가 적지 않다. ...사람들은 여전히 안목이 낮고 사려가 깊지 않다. 가옥의 설계나 집안의 치장, 더 나아가 자연경관을 무자비하게 잠식해 가며 무분별하게 짓는 고층아파트들로 둘러싸인 전국 도시의 미관을 보면 절망할 때가 많다. 전통문화에 대한 관심은 점점 높아 가는 듯한데 왜 삶의 질은 오히려 천박해지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