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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십년 전의 몇십년 후에 대한 정확한 통찰
"몇십년 전의 몇십년 후에 대한 정확한 통찰" 내용보기
연극을 전공하는 친구가 있다. 고등학교 동창인 이 친구가 연극과로 진로를 선택한 후 나는 이 친구의 공연을 매번 꼭 보러 가리라 다짐했었다. 그러나 포항이라는 지리적 제약은 나의 결심을 쉽지 않게 만들었고, 결국 시간이 지나고 3학년이 되어서야 이 친구의 첫번째 공연을 볼 수 있었다. 그 때 관람했던 작품이 바로 미국의 극작가 ‘아서 밀러’ 의 ‘시련’(The Crucible)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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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을 전공하는 친구가 있다. 고등학교 동창인 이 친구가 연극과로 진로를 선택한 후 나는 이 친구의 공연을 매번 꼭 보러 가리라 다짐했었다. 그러나 포항이라는 지리적 제약은 나의 결심을 쉽지 않게 만들었고, 결국 시간이 지나고 3학년이 되어서야 이 친구의 첫번째 공연을 볼 수 있었다. 그 때 관람했던 작품이 바로 미국의 극작가 ‘아서 밀러’ 의 ‘시련’(The Crucible)이었다. 원작은 1950년 미국 공화당 매카시 상원위원이 반대파를 공산주의로 몰아 이념 공세를 펼쳤던 매카시즘(McCarthyism) 열풍에 대한 비판을 목적으로 쓰여진 작품이었다. 작품의 중심은 결국 강요되는 침묵의 시대에 진실과 존업성을 위해 싸우는 평범한 사람인 주인공 프락터에 맞춰져 있었으며 억압적인 이데올로기들이 얼마나 평범한 사람을 비검하게 만들고 개인의 삶을 얼마나 철저하게 파괴시키는 지에 대해 현대인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큰 작품이었다. 작품이 주는 핵심적인 메시지도 인상적이었지만 그보다는 다른 생각이 그 후로 한참동안이나 내 머리 속을 지배했었다. 당시 연극을 통해 느껴지던 ‘중세’ 라는 배경이 너무나 답답하게 느껴져서 가슴을 턱! 턱! 치면서 혼자 눈물을 흘리며 봤던 기억. 진리가 진리라 통하지 않는 세상이 지구상에 너무나 오래 존재해왔구나, 라는 안타까움. 저들이 믿는 하나님도 내가 믿는 하나님과 다른 분이 아닐진대 명백한 불의를 진리요 하나님의 뜻이라 여기며 믿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은 내 가슴을 정말 먹먹하게 만들었다. 수년이 흐른 지금 내가 보기에 그것은 하나님이 원하는 바도 아니었으며 내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의 기준으로도 명백하게 그른 일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고 나니 자신을 돌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 나 또한 500년 후의 사람의 눈으로 봤을 때 하나님의 이름을 내세우며 명백하게 옳지 않은 가치관들을 갖고 사는 건 아닌지, 내가 판단하고, 지금 내가 속한 한국 교회의 눈으로 바라보는 이 세상은 과연 옳은 것인지, 어쩌면 내가 중세의 사람들을 바라보는 그 답답한 눈길로 미래의 후손들이 나를 바라보는 건 아닐지, 그들처럼 나 또한 어리석다 여겨지는 과거의 사람이 되어 있지는 않을런지에 대한 고민을 하니 가슴이 더욱 답답해졌다. 하나님의 생각에 가장 가까운 생각을 하고, 그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싶은데 내 자신이 아예 틀린 틀 속에 들어있으면 어떻게 하지, 라는 고민. 그 때부터 ‘진리’ 에 대한 갈급함이 생겼고, 삶에 있어서 이루어 나갈 목표는 내가 생각하고 싶은 대로 생각하고 행동하여도 도에 어긋남이 없는 ‘종심소욕불유구(從所心欲不踰矩)’ 의 경지라 설정하게 되었다. (공자님도 70세가 되어서야 이르신 경지를 과연 내가 이를 수 있을 지는 모르겠지만) 하나님의 마음에 가장 가까운 생각을 하고 싶다고 결심하고, 부디 어리석은 조상(?)이 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여러가지 작업에 착수했었다. 이 책을 읽고 나니 그 때 시작해서 지금까지도 이어져 오는 나의 고민들이 떠올랐다. 그리고 연극을 보던 내가 가슴을 턱! 턱! 쳤다면 이 책을 읽는 나는 무릎을 탁! 탁! 쳤다. 현재 교계에서 소위 ‘세속적’ 인 것이고 하나님의 뜻에 위배된다며 무조건 금하고 옳지 않은 것이라 했던 것들, 하지만 그 과정에 하나님의 뜻 안에 있고 우리는 그것이 올바르게 갈 수 있도록 대안을 제시하는 비판적 창조자로서의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는 저자의 명쾌한 논리는 막막했던 나의 고민에 신선한 청량제와도 같았다. 물론 저자가 살고 있는 세상보다는 진일보했을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세속화의 물결에 들어가서 옳고 그름을 판단해 세상이 올바른 방향으로 가게 한다기 보다는 그것들을 두려워하고 무조건 옳지 않은 것으로 간주하여 정죄하며 피하고 있다는 부정할 수 없는 현재 교회의 모습은 중세의 그것과 강도에 있어 약간의 차이가 있을 뿐 기본적으로는 조금도 다를 바가 없었던 것이다. 정작 그리스도께서는 속된 세상에 세상 사람의 몸으로 오셨다는 사실을 모두가 알고 믿는다고 고백하고 있음에도 말이다. 저자가 인용한 문구 중에 교회는 “전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의도를 잠정적으로 보여주는 곳” 이라는 말이 있었는데, 이 말을 듣고 나니 정말 하나님께 부끄러워서, 당신의 의도를 구하기도 전에 먼저 판단하고, 지금까지 있어왔던 기준으로 이것은 옳지 않다고 함부로 말해 버리는 한국 교회가, 그리고 내 자신이 너무 부끄러워서 정말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서 숨어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책이 쓰여진 것이 1965년이다 보니 사실 이 책에서 세속화된 미래 사회에 대해 예견한 모습들을 보며 40년이 흐른 지금의 현실과 맞춰 가면서 읽는 재미가 있었다. 이 과정에서 느낀 것은 저자의 통찰력이 매우 뛰어났다는 사실이다. 물론 일부는 동의할 수 없는 부분도 있었다. 익명성을 단순히 ‘자유’ 로 규정한 저자의 생각에는 동의할 수 없었다. 물론 익명성으로 인해 지연, 혈연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율법으로부터의 자유로워지지 않았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현대에 와서의 지나친 익명성은 인간 소외 현상으로 드러나는 등 오히려 사회 문제로 대두되었으며 이는 단순히 자유와 해방의 개념만으로 바람직하다고 볼 수는 없는 문제인 것 같다. 하지만 이런 약간은 지엽적인 부분을 제외한 전반적인 작가의 논지에는 동의를 보낸다. 혹자는 하비 콕스의 이런 논리가 너무 급진적이고 너무 앞서 나간 것이 아닌가 하는 사람도 있고 그가 의도한 것보다 더 급진적으로 그의 논리를 이해하기도 한다. 그러나 난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의 생각과 논지는 너무나 타성에 젖어 있기에 당연한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했던 교계에 경종을 울렸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군데군데에는 아직도 잘 이해하지 못한 부분이 있지만, 그래도 많이 이해하고, 또 많이 공감하고, 많이 배울 수 있었다. 결국 이 책을 읽으며 내가 느낀 것들은 내가 너무 경건하지 못한 건 아닌가, 나의 생각이 잘못된 것일까, 라는 ‘하나님의 뜻’ 이라는 이름으로 나를 억압했던 심리적 기제들에 대한 돌출구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기독교인으로서 경건해야 하고, 그것만이 옳은 것이라는 심리적 부담감이 많이 해소되었고, 오히려 세상의 일을 판단할 때 기존의 타성에 젖은, 교회에서 판단한 하나님의 기준이라 스스로 부여하는 가치가 아닌, 정말 하나님의 정말로 원하시는 바를 조금씩 알아가야만 할 것 같다는 즐거운 부담감이 생긴다.
w*****u 2005.03.09. 신고 공감 2 댓글 1
리뷰 총점 종이책
세속화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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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속화란 무엇인가?   하비콕스는 그의 책에서 세속신학자 반 페센을 인용하여 말하기를 "세속화란 '첫째는 인간의 이성과 언어를 지배해 오던 종교로부터, 둘째는 형이상학으로부터 " 해방하는 것이라고 했다.   세속화는 세계에 대한 종교적 또는 유사 종교적 이해로부터 세계를 자유롭게 하는 것이며, 모든 폐쇄적 세계관과 모든 초자연적 신화와 거룩한 상징들을 깨뜨려 버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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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속화란 무엇인가?

 

하비콕스는 그의 책에서 세속신학자 반 페센을 인용하여 말하기를

"세속화란 '첫째는 인간의 이성과 언어를 지배해 오던 종교로부터, 둘째는 형이상학으로부터 " 해방하는 것이라고 했다.

 

세속화는 세계에 대한 종교적 또는 유사 종교적 이해로부터 세계를 자유롭게 하는 것이며, 모든 폐쇄적 세계관과 모든 초자연적 신화와 거룩한 상징들을 깨뜨려 버립니다.

 

세속화는 또한 역사의 비운명화이기도 하다. 역사의 비운명화란 인간이 온 세상은 그의 양손에 맡겨졌다는 것과 인간 행위의 결과인 행운이나 진노에 대하여서는 핑계할 수 없이 되었다는 것을 발견함이다.

 

세속화는 인간의 관심을 저 세상으로부터 지금 이 세상으로의 돌림이다.

 

---   하비콕스의 세속도시 p8, 대한기독교서회

 

 

harvey cox

 


The secular city
 

정통적 기독교에서 세속화는 세상을 따라가는 것, 즉 타락하는 것과 상당히 동일시한다. 세상의 죄악된 삶을 교회가 그대로 모방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신신학에서의 세속화는 많이 다르다. 신신학의 세속화는 신의 영역과 사람의 영역을 거부하고 일원화하는 것을 세속화라고 말한다. 이러한 세속화의 근거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건속에서 찾을 수 있으며, 십자사 사건이 세속화의 정점이라고 할수 있을 것이다.

 

세속화는 하나님의 참인간됨이며, 사람의 관점에서 세계를 해석하며, 역사를 창조해 나가는 것이다. 이런의미에서 신신학자들은 세속화를 역사의 비운명화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세속화의 개념은 전적으로 잘못된 것이며, 인간에 대한 철저한 성경적 원리를 거부하기 때문이다. 인간들은 역사를 재창조할 힘을 갖고 있지못하다고 성경은 말한다. 신신학자들은 이것은 역사의 운명화라고 말한다. 특별히 칼빈주의 예정론은 세속화의 정반대의 개념이며 인간을 운명적 존재로 결정하는 비겁한 행동이라고 말한다. 칼빈에 의하면 인간은 자신의 운명을 개척할 힘이 도무지 없는 존재이며, 인간은 자신의 삶에 대하여 책임을 지지 않게 되는 것이다. 세속화는 이런 의미에서 칼빈주의 운명적 예정론을 거부하고 인간의 선택설을 더 선호하게 되는 것이다. 인간에게 모든 자율과 선택권이 있는 것이다. [역사는 인간의 손에]라는 표어가 잘 보여준다.

 

 

세속화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신과 인간의 영역의 파괴로 인하여 귀결되는 하나님의 내재성에 대한 만유신론이다. 결국 세속화의 문제는 다원주의, 상대주의,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이 시대의 정신과 맥을 같이하게 되는 것이다.

 

하비콕스는 "포용력은 세속화가 낳은 산물"(p9)이며, 세속화의 세대는 "전혀 종교가 없는 시대"로 규정한다.(p9)

 

 

콕스는 세속화를 도시와 연결시킴으로 부족사회의 신화속에서 도시의 이성의 시대로 옮겨간다고 주장한다. 도시는 이러한 의미에서 신화를 떠나는 것이며, 종교를 버리는 것이며, 이성과 합리, 과학과 정치의 관계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된다.

 

 

여기서 글을 마쳐야 겠다.

더 많은 것을 이야기 하기엔 좀더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h****i 2008.05.21. 신고 공감 0 댓글 0
리뷰 총점 종이책
하비콕스의 놀라운 통찰력-세속도시화는 타당하다
"하비콕스의 놀라운 통찰력-세속도시화는 타당하다" 내용보기
본회퍼와 고가르텐의 의견을 수용한 하버드의 종교학자 하비콕스의 ‘세속도시’ 는 현재 우리에게(특히 기독교인) 매우 충격적인 메시지를 던진다. 그것은 현재의 세속적 도시적 상황은 우리가 터부시 해야 할 사안이 아니라 성서적 역사적 상황을 배경으로 한 긍정적으로 것이라는 것이다. 세속화 되면서 일어나는 여러가지 문제점들 가령 전통적인 가족 윤리가 무너지고 도시 중심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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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회퍼와 고가르텐의 의견을 수용한 하버드의 종교학자 하비콕스의 ‘세속도시’ 는 현재 우리에게(특히 기독교인) 매우 충격적인 메시지를 던진다. 그것은 현재의 세속적 도시적 상황은 우리가 터부시 해야 할 사안이 아니라 성서적 역사적 상황을 배경으로 한 긍정적으로 것이라는 것이다. 세속화 되면서 일어나는 여러가지 문제점들 가령 전통적인 가족 윤리가 무너지고 도시 중심적인 사회가 되고 하는 등의 상황들은 심각하고 이것은 많은 사람들에게 걱정거리가 되고 있다. 그러나 ‘세속도시’의 저자 하비콕스는 성경과 역사적 배경에서 이것은 바람직한 방안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러한 그의 주장은 뜨거운 감자임에 분명하다. 그가 이러한 그의 의견을 주장하는 데는 나름대로의 증거가 있고, 무엇보다 내게 감동을 주었던 그의 마음이 있다. 그는 우리가 지금 세속도시화 시대를 살면서도 과거의 부족적, 마을적 관습으로 사람들을 판단하고 정죄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판단의 잣대 속에서는 사실 누구도 자유로울 수가 없다. 케케묵은 부족, 마을 시대의 율법은 현재에 끼어 맞추기 힘든 퍼즐이니까 말이다. 그가 이러한 설명에서 말하는 것은 약자를 보호하고 그들을 죄악으로 인한 삶의 포기 상태에서 회복케 하는 것이다. 모두가 율법적 관습에 걸리고 넘어지지만 쉽게 은폐하는 능력이 있는 강자 보다는 약자가 더욱 드러날 것이고 결국 약자들은 그들의 삶에서 더욱 고통을 받을 것이다. 이러한 사회에서 진정 필요한 것은 이미 한계 수위를 넘어 버린 세속화에 대한 거부 보다는 본질적으로 고통 받는 인간에 대한 해방이다. 세속된 사회에서도 율법의 족쇄 때문에 여전히 자유롭지 못한 사람들, 그들에게 희망을 주는 메시지인 것이다. 그러나 하비콕스는 율법으로부터의 해방을 말하는 그의 주장을 발전시키면서 항상 책임을 전제로 둔다. 우리는 세상의 자유를 누리면서 또한 책임 있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하비콕스의 놀라운 통찰력에 먼저 박수를 보낸다. 그러나 그가 세속화와 도시화를 절대적으로 주장한 것과, 상대적인 개념을 많이 사용한 것 등은 쉽게 받아들이기에는 위험하다. 그러나 확대 해석이 결코 아니라면 강조하건대 나는 그의 논지에서 사회적 책임과 의미를 읽었다. 사람들은 정말 모순적이고 자기합리화적인 기질이 강한 것 같다. 그래서 자신 스스로가 충분히 세속적임에도 세속화에 왈가왈부 손가락질을 헤대고 있는 것 같다. 사실 세속화의 개념 중에 보다 중한 세속화와 넘겨 봐 줄만한 세속화가 존재할 리는 만무하다. 그러나 구름으로 몸을 감싸고 있는 종교적인 사람들은 자신들의 들보는 보지 않고 타인의 눈 속의 티만을 끄집어 내어서 율법으로 단죄한다. 이러한 점을 하비콕스는 날카롭게 바라본 듯 하다. 그러나 아직 하비콕스의 의견은 다양한 많은 해석을 받기에 적당하고 시간을 거치면서 재검토 되어져야 한다. 하비콕스의 앞서가는 지성에 발 느린 우리가 수없이 제동을 걸어 지체함을 낳는다 해도 방법은 없다. 그의 놀라운 통찰력에 감탄을 보내면서도 아직은 유보적인 태도로 좀더 고심하는 자세가 우리에겐 필요할 것 같다. 이런 점에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그의 의견에 귀 기울여 보는 것은 필요하겠다.

[인상깊은구절]
신화와 율법의 속박에서 빠져나와 자유를 누린다는 것으로 즐거워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다 자기 자신의 책임을 걸머지는 인격자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