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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쉽고 좋은 책이 현재는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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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 자본론, 사회주의, 노동자, 자본주의.  뭐 이런 키워드로 책을 읽고 토론하는 독서모임을 새로 만들었다.  개떡같은 요즘 사회도 사회지만 '왜 세상은 이따위인가'라는 물음에 궁극적인 답을 알고 싶다.    그래서 앞으로 문학 외에 이런 정치, 사상 쪽 책도 꾸준히 서평을 쓸 계획' ㅁ')/  (말이 서평이지... 독서일기 수준ㅠ)      마르크스를 공부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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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르크스, 자본론, 사회주의, 노동자, 자본주의.

 뭐 이런 키워드로 책을 읽고 토론하는 독서모임을 새로 만들었다.

 개떡같은 요즘 사회도 사회지만 '왜 세상은 이따위인가'라는 물음에 궁극적인 답을 알고 싶다.

 

 그래서 앞으로 문학 외에 이런 정치, 사상 쪽 책도 꾸준히 서평을 쓸 계획' ㅁ')/

 (말이 서평이지... 독서일기 수준ㅠ)

 

 

 마르크스를 공부하는데 그 시작을 '청년이여 마르크스를 읽자'로 한 이유는 이게 쉽다고 해서-_-...

 서점 가서 관련 책을 몇 개 찾아봤는데 나오는 단어나 어휘나 책의 두께 등을 고려했을 때

 이 책이 가장 무난해 보였다. 근데 읽어보니까 쉽긴 쉬운데... 내가 생각했던 것만큼 쉽지는 않다.

 그냥 이런 정치/사상 책은 다 어렵나보다 ㅠ

 

 

 간략하게 책에 대해서 소개하자면 일본에 두 교수가 서로 마르크스에 관해서 편지를 통해 생각을 나눈다.

 그 편지를 그대로 책으로 엮은 게 바로 『청년이여 마르크스를 읽자』다.

 서문에서 밝혔다시피 두 교수는 마르크스는 이렇게 멋집니다, 다들 마르크스 사상을 공부해보지 않겠습니까! 라고 말하며

 이 책을 읽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글을 통해서 마르크스 사상에 관심 갖길 바란다.

 결과적으로 마르크스에 대해 지식이 전무한 나는 이 책을 읽고 정말 본격적으로 공부해보고 싶다고 결심했다.

 

 그렇지만 주위에 별로 추천하고 싶은 책은 아니다.

 마르크스에 대해 지식이 전무하다고 하지만 나는 기본적으로

 사회주의, 마르크스, 자본주의 이런 키워드에 관심을 갖고 있던 사람이고

 더군다나 이 쪽으로 아주 지식이 해박한 친구가 독서모임에 이끌었기에

 내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들에 대해 아낌없는 추가 설명을 해줬다.

 그렇게 주위에서 도움을 얻을 조력자가 없다면 이 책만으로 마르크스에 대해 맛을 보기에는 무리가 있는 것 같다.

 

 ...아니면 내가 정말 정치/사상 쪽에 지식이 전무해서... 설명이 필요했을까...

 어쨌든. 그런데 마르크스를 시작하기에는 이만큼 쉬운 책도 없단다 ㅠㅠ

 

 

 내가 주위 사람들한테 이런 독서모임을 추가로 꾸렸고 처음하는 책은 이런 책이다~ 했더니

 어떤 사람이 요즘 시국에 그런걸... 위험하지 않아?, 라는 반응을 보였다.

 지금 시국이 그런가보다. 대학에서 마르크스 자본론을 강의하던 강사가 국정원에 신고를 당하는 세상.

 주부가 『청년이여 마르크스를 읽자』를 읽는 독서모임에 나가면 주위에서 걱정하는 세상.

 지금 대한민국은 학생들이 책을 읽고 토론하는 모임에 빨갱이라는 누명을 씌워 사건을 조작하고

 사람들은 몇 명 이상 모여있을 수 없던 그 시절로 돌아가는 중인 듯...

 

 

 결론' ㅁ'

 이 책은 다른 마르크스 관련 책에 비해 비교적 쉽지만

 그렇다고 혼자 읽고 땡 칠만큼 쉬운 건 아닌데

 더 쉽고 좋은 책이 현재는 없음-_-...

 있으면 공유 좀 해주세용' ㅁ')/

j*****7 2014.01.17. 신고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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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이여, 마르크스를 읽자 – 타노스는 마르크스주의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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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국의 프롤레타리아여, 단결하라! 29세의 마르크스는 『공산당 선언』의 마지막 문장을 이런 선동적(?) 호소로 끝맺고 있습니다. 오랜 세월 대한민국에서 마르크스라고 하면 불온의 대명사처럼 금기시되어 온 탓일지 모르겠지만, 저는 여전히 이 문장이 생경하고 살벌하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레비나스를 사숙하고 프랑스 구조주의의 세례를 받은 우치다 타츠르 선생이 받은 느낌은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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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국의 프롤레타리아여, 단결하라!

 

29세의 마르크스는 공산당 선언의 마지막 문장을 이런 선동적(?) 호소로 끝맺고 있습니다. 오랜 세월 대한민국에서 마르크스라고 하면 불온의 대명사처럼 금기시되어 온 탓일지 모르겠지만, 저는 여전히 이 문장이 생경하고 살벌하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레비나스를 사숙하고 프랑스 구조주의의 세례를 받은 우치다 타츠르 선생이 받은 느낌은 다릅니다.

 

결기타도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지하 조직을 결성하거나 무기를 입수하는 등 품과 시간이 꽤 들 것이고, 무엇보다도 폭력적인 사람에게는 먹히기 어려운 말이겠지요. 하지만 단결이라면 이 책을 덮는 순간부터 가능한 일이에요. 곁에 있는 프롤레타리아에게 손을 내밀어 우리 힘을 냅시다!’ 하면 그만이니까. p.52

 

이 문구가 지극히 전투적인공산당 선언전체를 따뜻하게 마감한다는 우치다 타츠르의 시각이 꽤나 설득적입니다. 저자들이 청년이란 마르크스를 읽는 사람이라는 인식이 상식으로 통했던 시대를 경유했기 때문이겠죠. 물론 단결이란 어휘가 일본에서는 좀 더 부드러운 맥락에서 사용되는 것인 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대한민국에서 단결충성다음으로 군대에서 광범위하게 사용되는 경례 구호일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단결은 단지 함께 힘을 내자는 의미를 넘어서서 일탈을 허용하지 않는 집합적 뉘앙스가 강하죠.

 

여전히 우리에겐 불온하고 여전히 뜨거운 사상가인 마르크스는 올해로 탄생 200주년을 맞습니다. 이런 저런 책들이 많이 출판되는 모양입니다만, 하필 이 책은 제가 미리 사 두었던 우치다 타츠르의 마지막 책이기도 합니다.

 

이 책은 20대의 마르크스가 남겨놓은 저작들 중 자본론 이전의 저작을 간략하게 해제하고 현재에서의 의미를 곱씹고 있습니다. 경제이론가인 이시카와 야스히로가 텍스트 본래의 의미에 집중하여 풀어 놓는다면 우치다 타츠르는 오늘날 이 텍스트들이 갖는 의미가 무엇일까 나름의 개성적인 해석을 내 놓습니다. 책 제목 그대로 마르크스를 읽지 않는 요즘의 젊은이들을 다시 마르크스를 읽게 하기 위해서죠. 그렇다면 왜 아직도 한 세기 이전의 마르크스를 읽어야 하는 걸까요 

 

마르크스주의에 사람들이 매혹당한 가장 큰 동기는 가난한 사람들, 배를 곯는 사람들, 수탈당하는 사람들, 사회적인 불의를 견디는 사람들에 대한 우리 자신의 양심입니다. p.10

 

그렇다면 저자들이 보기에 여전히 우리 사회에는 여전히 가난한 사람들, 배를 곯는 사람들, 수탈당하는 사람들, 사회적인 불의를 견디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전히 우리는 마르크스를 읽어야 합니다.

 

유적 존재와 이기적 유전자론

 

마르크스가 말하는 해방된 인간이란 유적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유적 존재란 현실의 개체적 인간이 추상적인 공민을 자기 안에서 되찾은존재로 이웃이나 공동체를 늘 배려하고, 그런 일을 진심으로 기뻐하는사람을 말하죠. 유적 존재는 당위적인 개념입니다.

 

나는 인간으로 활동하고 있기 때문에 사회적이다. ()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무엇인가를 만든다고 해도 나는 그것을 사회를 위해 만드는 것이며, 나아가 내가 한 사람의 사회적인 존재라는 것을 의식하면서 만든 것이다.”p.155(경제학 철학 수고)

 

제도나 법률을 바꾸는 것은 불의의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한 필수 조건일 것입니다. 그렇더라도 그 제도와 법률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공인으로서 태도와 노력을 갖추지 않는다면 사회는 결코 좋아지지 않겠죠. 이때 태도와 노력은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사고에 의한 것이라기보다 신체에 각인된 전인적인 실천에서 비롯되어야 합니다.

 

타인의 감각이나 정신도 내 자신이 내 것으로 삼는 것이라고 하자. 그렇기 때문에 이들의 직접적인 기관 외에 사회적인 기관들이 사회라는 형태에 입각하여 형성된다. 이를테면 다른 사람들과 직접 공동으로 수행하는 활동 등은 내 삶을 표출하는 하나의 기관이 되고 인간적인 삶을 내 것으로 삼는 방법의 하나가 된다.”p.155(경제학 철학 수고)

 

그러나 사람들이 자신의 이익을 먼저 추구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 아닐까요? 개체의 생존을 최우선으로 하는 것이 신체에 각인된 것이 당연한 인간이 과연 유적 존재로 살아가기에 동참할 수 있을까요? 만약 개체의 생존을 최우선으로 하는 것이 인간의 생물학적 본성이라고 하면 마르크스의 지향은 그저 갈망에 그칠 것 같습니다.

 

그런데, 만약 인간의 생물학적 본성이 상호부조와 호혜성에 있다고 하면 어떨까요? 자칭 다윈주의자로 적자 생존에 경도되었던 헉슬리가 자연이란 이기적인 생명체들이 벌이는 냉혹한 투쟁의 장이라고 홉스와 같은 주장을 했다죠. 뜻밖에도 무정부주의자인 크로포트킨은 이 살벌한 주장에 맞서 상호부조의 이타성이 진화의 산물로 인간을 넘어 모든 종들의 본성에 내재한다는 주장을 폅니다(만물은 서로 돕는다). 도리어 냉혹한 생존 투쟁을 벌이며 자신의 해방만을 부르짖는 사람들이야말로 진화에 의해 선택된 본성을 위반한다고 보는 것이죠.

현대의 이기적 유전자론은 크로포트킨의 손을 들어주는 것 같습니다. 물론 크로포트킨의 주장처럼 상호부조가 모든 생명체의 보편적 특징은 아니지만, 적어도 인류의 상호부조와 협동은 진화의 산물이며 우리 본성에 내재한다는 것입니다.

 

이기적 유전자론에 따르면 개체는 오로지 유전자의 이익을 위해 행동합니다. 유전자가 이기적이기 때문에 때로 자신의 이익을 위해 개체의 이타성을 활용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머니가 자식에게 헌신적인 것은 어머니가 가진 유전자의 이기성 때문이라는 것이죠. 실제 우리 삶에서 중요한 것은 유전자의 이기성이 아니라 그로 인해 개체가 이타적으로 행동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기적 유전자론이 그려내는 상호 부조와 호혜성의 형질이 전적으로 유적 존재의 정당성을 뒷받침해 주지는 못합니다.

 

이처럼 이기적 유전자 이론은 홉스주의의 마수로부터 루소주의를 보호해주지만 전적인 옹호자로 생각하면 착각이다. 왜냐하면 보편적 이타성이 지배하는 극도로 조화로운 세계가 설사 실현된다고 하더라도, 이기주의라는 곰팡이가 언제든지 그 대들보를 갉아먹어 붕괴시킬 수 있다는 것이 이기적 유전자 이론의 예언이기 때문이다. - 매트 리들리. 이타적 유전자. p.37, 8

 

현대 생물학은 인류로부터 이기주의를 완전히 제거하지 못했습니다. 설령 그랬다고 해도 살인적인 경쟁과 인종 차별, 종족 학살과 전쟁에 너무 쉽게 빠져드는 인류의 현실과는 맞지 않은 선언에 그쳤겠죠. 마르크스가 꿈꾸는 해방의 세계란 유토피아에 불과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우리 모두가 유적 존재가 되긴 어려워도 우리 모두가 유적 존재를 지향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고는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우리가 여전히 자기의 이익을 배타적으로 추구하는 인간은 사회적이지 않고 사회적이지 않은 인간은 인간적이지 않다는 마르크스의 말에 강한 긍정과 함께 부끄러움을 느낀다면 말이죠.

 

혁명

 

우치다 타츠르는 해방과 관련된 청년 마르크스의 추론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있습니다.

 

나아가 어떤 특수한 사회적 영역이 사회 전체에 대한 악명 높은 침해로 간주되고, 그래서 이 영역에서의 해방이 보편적인 자기 해방으로 여겨지지 않으면 안 된다. 어떤 하나의 입장이 특별한 의미에서 해방하는 입장이기 위해서는 거꾸로 다른 하나의 입장이 공공연한 억압의 입장이지 않으면 안 된다.” p.99(헤겔 법철학 비판 서문)

 

가령, 악명 높은 침해로 간주되는 영역이 노동자들의 영역이라면, 노동 이외의 다른 영역, 자본가가 구체적으로 억압을 행사한다는 것입니다. 노동자의 해방이 곧 사회 전체의 해방일 수 있다는 것이죠. 그러나 우치다 타츠르는 사회 전체의 왜곡이나 불합리를 특정 집단의 로써 설명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사회의 악은 사회 전체에 좍 퍼져 있어요. 사회 구성원 전체가 각각의 방식으로 사회를 나쁘게 만드는움직임에 가담하고 있는 셈이죠. p.101

 

사회 전체가 가담하고 있다고 하면 사회 전체가 한꺼번에 변혁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청년 마르크스는 하나의 환부를 직시하고 그 환부를 도려내는 것이 사회를 변혁시키는 첩경이라고 생각했을 듯싶습니다.

 

그런 마르크스가 경제학을 배우기 시작하면서 사회 변혁에 대해 막연한 생각을 좀 더 현실적으로 가다듬습니다. 마르크스가 말하는 혁명이란 무엇인가요 

 

마르크스의 혁명론은 먼저 의회를 통해 노동자 계급의 권력을 세우고, 그것을 추진력으로 삼아 노자 관계를 기본으로 한 자본주의적 생산 관계를 바꾸어나가자는 틀을 갖추고 있어요. 다시 말해 그것은 오늘날 회자되는 것처럼 폭력 혁명론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p.137

 

이시카와 야스히로는 마르크스가 물리적 혁명론의 대명사가 된 것이 레닌과 스탈린 탓이라고 짚고 있어요. “저놈만 쓰러뜨리면 세상은 바뀔 거야라고 사회를 단순하게 인식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한편, 경제학-철학 수고에는 노동 소외가 본격적으로 등장하고 있다고도 해요.

 

노동자가 뼈가 부서지도록 일하면 일할수록 자신의 반대편에 만들어내는 소원한 대상적 세계는 그만큼 강대해지고, 그 자신, 즉 그의 내적 세계는 한층 고달파지며 더욱 가난해진다” p.146(경제학 철학 수고)

 

우치다 타츠르는 여기서 마르크스의 빼어난 공감 능력과 상상력을 상찬합니다.

 

마르크스 자신은 부르주아였으니 그가 인용한 가혹한 노동의 경험 같은 것은 안 해봤을 테지요. 하지만 강렬한 공감력과 상상력을 가지고 있었어요. () 마르크스는 우리를 소외된 노동으로부터 해방시키자고 주장한 것이 아니랍니다. “그들을 소외된 노동에서 해방시키는 것은 우리의 임무라고 주장한 것이지요. p.148, 149

 

저는 한 번도 마르크스가 가혹한 노동의 당사자가 아님을 생각해 보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 역시 전태일이나 노회찬처럼 어떤 식으로든 노동을 경험했으려니, 그 경험이 그의 강인하고 천재적인 사상의 밑거름이 되었으려니 막연히 생각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런데 마르크스는 그걸 경험한 우리로서 해방을 이야기한 게 아니라, 그들의 가혹한 노동에 공감한 동지의무로서 해방을 이야기했다고 하네요. 말할 것도 없이 나의 계급을 넘어서 다른 계급에 공감하고 그들의 해방을 지향할 수 있는 존재란 유적 존재일 것입니다.

 

사적 유물론의 윤리 ? 동기보다 실천이 중요하다

 

 

우치다 타츠르는 그렇다고 마르크스의 공감이나 상상력이 자신의 삶과 별개라고 보지는 않습니다.

 

아시다시피 이들의 원고는 이미 정리해놓아 있을지도 모르는 아이디어를 글로 쓱싹 정리한 것이 아닙니다. 몸속 어딘가에 남아 있을지도 모르는 아이디어를 무리하게 쥐어 짜내는 듯한 작업이었으니까요. 자기 자신과 벌인 격투라고도 할 수 있겠지요. 마르크스는 이렇게 쉬지 않고 펜을 움직임으로써 자신의 두뇌를 움직이고자 했던 사람이었어요. p.189

 

마르크스는 왜 그들의 삶에 관해 적당한 거리에서 관조하지 않고 이렇게 고통스럽게 글을 썼던 것일까요? 우치다 타츠르는 누구나 내가 아닌 그들에 관해 주체적으로 그 이야기를 받아들이고 자신의 생활 실천 속에서 그것에 활력을 부여’”해야 그들의 삶이 자신의 삶이 될 수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타인에 대한 공감과 상상력이 구체적인 신체성을 띨 때 비로서 사회적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이죠.

 

그러니까 액자를 어느 곳에 갖다 댈 것인가, 무엇을 액자 안에 넣을 것인가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중요한 일이라는 것을 말하고 싶군요. 액자 안에 있는 것에 대해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저마다 값을 치르고 해석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씀을 드리는 거예요. p.209

 

마르크스는 자신의 액자를 소외된 노동자들의 삶에 갖다 댔습니다. 그저 갖다 대기만 한 게 아니라 고된 값을 치렀죠. 여기서 우치타 타츠르는 그들이 어떤 존재인가 하는 것은 그들의 생산, 즉 그들이 무엇을 생산하고 또 어떻게 생산하는가 하는 것과 일치한다.”는 사적유물론의 기조를 다음과 같은 윤리적 관점으로 읽습니다.

 

아무리 근본이 돼먹지 않았다고 해도 선행을 하면 선인이고 아무리 근본이 선량하다고 해도 나쁜 짓을 하면 악인이라는 것이죠. () 마르크스를 읽어보니까 인간은 어떤 놈인가가 아니라 무엇을 하는가에 의해 결정이 나는 거라고 한마디로 잘라서 이야기를 하잖아요. p.212

 

뜬금없긴 하지만 영화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에 등장하는 역대 최강 빌런타노스를 이야기해볼까 합니다. 타노스가 다른 빌런들과 다른 점은 꽤 설득적인 선의의 동기를 가졌다는 점일 것입니다. 우주 전체의 균형과 평화를 위한다는 진심은 사리사욕을 뛰어넘습니다. 그러나 마르크스의 관점에 따르면 타노스는 어떤 동기를 가졌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하는가에 의해 악인으로 결정됩니다.

 

예를 들어 모든 사악한 것을 근절하기위해서는 이단 심문과 강제수용소와 대량 학살 장치가 필요해요. 반드시 필요하죠. 역사를 되돌아보면, 한꺼번에 전 사회적으로 좋은 것을 실현하고자 하는 프로젝트 가운데 그것에 견줄 제도를 갖추지 못했던 적은 없어요. 다만 사악한 것의 근절이라는 목적 자체는 시비 걸 수 없을 만큼 훌륭하지만, 그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실제로 작용하는 것은 시비 걸 곳 투성이인 살아 있는 인간이지요. p.217

 

남은 사람들이 잘 먹고 잘 살기 위해 다른 사람들의 희생이 수반되는 사회는 궁극적으로 마르크스가 타파하고자 했던 사회입니다. 함께 잘 살지 않으면, 함께 잘 살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잘 사는 것이 아닌 것이죠.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얻는 우주의 평화가 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머릿속으로 아무리 훌륭한 일을 생각해도 몸은 머리를 따라가지 못해요. ‘살아 있는 몸이 허락하는 범위 안에서 가장 좋은 것을 뽑아내서 할 수 있는 것부터 차근차근할 수밖에 없다. 마르크스는 이렇게 생각한 것이 아닐까요? p.218

 

우치다 타츠르가 이 책 전반에 걸쳐서 반복하고 있는 점진적 실천, 이라는 주제는 그다지 새롭지 않습니다. 이런 마르크스 해석이 일반적인 것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우치다 타츠르의 다른 책에서 보았던 대로 이 주제를 통해 마르크스에게서도 성숙한 어른의 모습을 읽어내고 있는 것 같아 보입니다. 그래서인지 적어도 이 책을 읽고 나면 마르크스를 둘러싸고 있던 과격함과 살벌함이라는 편견은 많이 희석되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래도 딱 한 가지 꼬집어 마르크스의 위대함이라고 한다면 그가 가졌던 강렬한 공감 능력과 상상력입니다. 그러고 보니 우리 곁에서 우리를 울렸던 사람들도 그랬던 것 같습니다. 노무현이 그렇고 노회찬이 그렇습니다.

m*******d 2018.08.03.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