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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이 아닌 삶을 풀어내다 [아름다운 그늘]
"소설이 아닌 삶을 풀어내다 [아름다운 그늘]" 내용보기
신경숙 작가의 산문집을 펼쳐든 건 순전히 욕심 때문이었다. 무슨 욕심인가하면 그녀의 문체와 생각을 닮고 싶다는 욕심이다. 책을 읽고 글을 쓰는 나에게 신경숙 작가님은 오래 전부터 멀고도 가까운 스승이다. 한번도 그 분을 직접 뵌 적은 없지만 그녀의 소설을 읽으면서 그녀의 문체와 생각이 나의 글에 뼈대가 됐다. 하지만 소설을 읽고 필사를 하면서도 다다를 수 없는 아득함이 불
"소설이 아닌 삶을 풀어내다 [아름다운 그늘]" 내용보기

신경숙 작가의 산문집을 펼쳐든 건 순전히 욕심 때문이었다. 무슨 욕심인가하면 그녀의 문체와 생각을 닮고 싶다는 욕심이다. 책을 읽고 글을 쓰는 나에게 신경숙 작가님은 오래 전부터 멀고도 가까운 스승이다. 한번도 그 분을 직접 뵌 적은 없지만 그녀의 소설을 읽으면서 그녀의 문체와 생각이 나의 글에 뼈대가 됐다. 하지만 소설을 읽고 필사를 하면서도 다다를 수 없는 아득함이 불쑥 느껴져 허탈할 때가 있다. 어떻게 이런 문장을 쓸 수 있는걸까. 어떤 삶을 거쳐 소설가가 될 수 있었던 것일까. 어느 순간부터 나는 그녀의 글솜씨가 아닌 그녀의 삶을 들여다보고 싶다는 욕심이 들었다. 글은 곧 작가 자신이듯, 그녀의 삶을 들여다 볼 수 있다면 나는 조금 더 가깝게 그녀를 이해하고 글 또한 이해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녀의 산문집을 펼쳤다.

 

만약 신경숙 작가의 산문집이라는 말을 못 봤더라면 나는 이것이 또 하나의 소설인 줄 알았을거다. 한 문장 한 문장에 녹아있는 고백체는 그녀가 소설에서 썼던 문체 그대로였다. 그녀는 현실과 소설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있었던 셈이다. 나는 그녀의 삶이 고스란히 드러난 이 책을 읽으며 그녀의 어린시절을 헤매다가 그녀의 청춘과 현재를 오갔다. 소설과 다른 점이 있다면 더더욱 내밀하고 섬세하게 와닿는다는 것이랄까. 역시 어린시절 언젠가, 나의 삶이 있던 한 부분을 쓴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가장 아련하면서 내밀한 것같다.

 

‘나는 아무런 비밀도 없다. 내가 생각하는 것을 사람들도 생각하고, 내가 보는 것들을 사람들도 보고 있다고 느낀다. 돌연한 향기를 발견했다가 놓치고 다시 발견했다가 놓치는 흠투성이로 살아가며 내 소설도 진행시켜나갈 것이다.’

 

그녀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소설가다. 오르고 오를수록 숨기고 싶은 것도 많고, 도리어 진실을 가장한 거짓을 내보이기 쉬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아무런 비밀 없이, 흠투성이로 살아가며 결코 완성될 수 없는 작업에 몰두하겠다고 한다. 나는 아직 멀었구나 한다. 완성을 꿈꾸며 누군가를 쫓아 흠을 메꾸고자 했으니 나는 아직 배울 것도 쫓아야 할 것도 생각해야 할 것도 많은 셈이다.



YES마니아 : 로얄 d***s 2014.05.31. 신고 공감 20 댓글 115
리뷰 총점 종이책
야밤 일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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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신경숙의 글을 읽을 때마다 나는 언제나 '문학'에 대해 생각하곤 한다.  현실이라는 원반 위에 올려진 작은 찻잔처럼 활자어가 갖는 이질감.  붙어있으나 결코 하나가 될 수 없는 그 거리감을 작가는 한순간에 녹이곤 한다.  마그네틱 카드를 주머니에 넣은 채 MRI실에 들어가곤 한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깜박 깜박 잊게 된다는 어느 MRI 기사의 고백처럼 작가가 쓴 활자어는 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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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신경숙의 글을 읽을 때마다 나는 언제나 '문학'에 대해 생각하곤 한다.  현실이라는 원반 위에 올려진 작은 찻잔처럼 활자어가 갖는 이질감.  붙어있으나 결코 하나가 될 수 없는 그 거리감을 작가는 한순간에 녹이곤 한다.  마그네틱 카드를 주머니에 넣은 채 MRI실에 들어가곤 한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깜박 깜박 잊게 된다는 어느 MRI 기사의 고백처럼 작가가 쓴 활자어는 나의 상념을, 익숙함을, 때론 뭉뚱그린 현실을 자석처럼 빨아들인다.  그녀의 글이 일순 현실과 활자어의 괴리를 파고들 때, 친숙함이란 단어로는 뭔가 설명이 미심쩍은 어떤 순간이 올 때, 나는 현실을 조금 밀어내고 활자어 쪽으로 한발 다가서 있음을 느낀다.

 

어제는 책을 빌리러 사무실 근처의 도서관에 들렀다.  조금 늦었다 싶은 저녁을 도서관 식당에서 해결하고는 멀뚱히 앉아 점멸하는 가로등 불빛을 넋놓고 바라보고 있었다.  봄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라흐마니노프의 2번 교향곡이 쓸쓸함을 더하는 식당에는 신학기를 맞은 학생들의 재잘거림이 밤의 고요를 깨고 있었다.  조금 안면이 있는 식당 주인이 인사를 하며 내 앞에 앉기 전까지는.  그는 잡히지 않는 주제의 여러 이야기들을 소반 위의 밀가루처럼 뿌려놓고는 도서관에서 비정규직으로 근무하던 스물아홉 살의 청년이 어제 백혈병으로 쓰러져 죽었다는 소식을 마치 지나가는 시간처럼 툭 하고 던졌다.  밤의 정적을 뚫고 스물아홉의 청년이 죽었다는 소식과, 라흐마니노프의 2번 교향곡과, 커피 한 잔의 간절함과, 무심히 지나가는 일상의 연관성을 생각했다.  모래알처럼 흩어졌던 여러 사건들이 순간이라는 응축된 한 점으로 모여 내 의식으로 밀려들고 있었다.  나는 그때 정신분열 또는 시간분열을 생각했다.  각각의 사건들이 한 순간 약속이나 한 듯 어느 시점에 물방울처럼 모이는 데는 분명 그 까닭이 있을 거라고.

 

신경숙의 산문집 <아름다운 그늘>을 빌려 도서관을 나섰다.

미리 슬픔을 준비하지 못한 이야기들은 내 의식에 들어와 어디로 가야할지 모른 채 잠시 헤매다가 봄비 속으로 스러졌다.  시가 운영하는 도서관에서 비정규직으로 근무하던 스물아홉의 청년은, 그제까지만 해도 생기를 잃지 않았던 건장한 청년은 그를 기억하는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속절없는 슬픔만 남긴 채 연기처럼 사라졌다.  사람이 가고 없어질 때 남기곤 하는 그 부질없는 기억.  두세 쪽 또는 그보다 훨씬 못 미치는 한 줄의 기억만으로도 생생히 되새김질할 수 있을 듯한 어제를 현재에 비춰보면서 터벅터벅 집으로 향했었다. 

 

계절은 개개인의 내면생활과는 상관없이 어김없이 왔다가 머물다가 지나간다.  나라고 제외될 수는 없다.  저 덩치 큰 냉장고를 이끌고 이사를 왔든 아니든 봄이 올 것이다.  지천에 꽃이 필 것이고 향기들은 명랑히 시시덕거리며 대기를 껴안을 것이다.  삼월이면 괜한 사람도 길을 떠나고 싶어진다는데 나는 아예 살던 곳을 옮기게 되었으니 얼마나 행복한 일이야.  피식, 웃음이 나온다.  창 밖으로 개가 한 마리 골목으로 걸어간다.  개는 곧 시야 속에서 사라진다.  시간도 저렇게 지나갈 것이다.  달라진 건 풍경일 뿐이다.  시계탑을 만들고 종을 쳐야지.  이 순간은 다시 오지 않는다.  (P.302)

 

이 순간은 다시 오지 않는다는 작가의 경고.  물 먹은 스웨터처럼 밤이 늦었다.  조금 있으면 새벽이라는 바닥에 닿아 스멀스멀 기어나오는 '해야 할 일'들은 스웨터를 타고 올라 가물거리는 내 의식에 도달할 것이다.  작가는 어둠의 저편 어드메쯤에서 추억의 어장이라도 만난 듯, 이 밤만으로는 모자랄 듯한 이야기를 쏟아내는데 나는 벌써 신새벽을 만나고 있다.

 

작가의 고향은 정읍이라 했다.  위로는 오빠가 셋이나 되고, 여동생이 자신보다 먼저 시집을 갔고, 부부 둘만 남은 부모님은...  작고한 박경리 여사를 만났던 추억과 오정희 작가에 대한 회상.  그리고...  자꾸 멀어지려는 현실과 손을 놓아주지 않는 작가의 활자어가 실랑이를 벌이는 밤에 나는 죽은 듯이 앉아 신경숙 작가의 산문집 <아름다운 그늘>을 읽었다.

이달의 사락 s*****l 2012.03.03. 신고 공감 6 댓글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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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숙 문학의 원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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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변함없는 모습으로 우리곁에 있는 작가, 신경숙. <모르는 여인들>이 출간되고, 인터뷰 장면을 동영상이나 TV 화면을 통해서 여러 번 보게 되었는데, 단아한 그 모습에, 조근조근 말을 이어가는 모습이 언제나 그 자리에 앉아 있었던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익숙하게 다가온다. 22살에 등단하여 지금까지 많은 작품들을 썼다. 내가 가장 먼저 읽은 신경숙의 책이 <풍금이 있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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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변함없는 모습으로 우리곁에 있는 작가, 신경숙.

<모르는 여인들>이 출간되고, 인터뷰 장면을 동영상이나 TV 화면을 통해서 여러 번 보게 되었는데, 단아한 그 모습에, 조근조근 말을 이어가는 모습이 언제나 그 자리에 앉아 있었던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익숙하게 다가온다.

22살에 등단하여 지금까지 많은 작품들을 썼다. 내가 가장 먼저 읽은 신경숙의 책이 <풍금이 있던 자리>인지 <깊은 슬픔>인지, 아니면 <외딴방>인지는 잘 생각나지 않는다.

그중의 어떤 책을 읽고 그 다음부터 신경숙이 책을 펴낼 때마다 따라읽기 시작하여 <모르는 여인들>에 이르렀으니까.

그만큼 나에게는 작가의 이름만으로도 믿음이 가고, 그녀의 작품은 꼭 읽게 된다.

 

 

그런데, <아름다운 그늘>?

이 책을 살 때만해도 신간 산문집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미 오래전에 나온 책의 개정판이다.

그것도 이번에 출간된 책이 3판이다.

1판 1쇄가 1995년에, 2판 1쇄가 2004년에, 그리고 3판1쇄가 2011년 11월.

그렇다면 나는 이 책을 읽었던 것일까? 아니면 지금 처음 접하는 것일까?

신경숙의 소설을 따라 읽기 하다 보니, 이미 그녀의 가족사나 사적인 이야기들은 어느 정도 알고 있다.

최근작의 경우만 해도 <엄마를 부탁해>,<모르는 여인들>의 바탕에는 작가의 가족사나, 사적인 이야기들이 깔려 있기때문이다.

그래서 이미 작가가 걸어온 발자취를 알기에 <아름다운 그늘>과 같은 산문집에서 드러나는  작가의 삶의 자취들이 생소하거나 새롭지는 않다.

그래서 더욱 이 책을 읽은 적이 있는지, 아니면 처음 읽는 책인지 모르겠는 것이다.

아무려면 어떻겠는가?

작가의 글을 읽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니....

 

 

3판 서문에 작가가 쓴 글처럼,

''이 책 속에 세상과 문학을 향한 나의 첫 마음들이 고스란히 들어 있어서 (...)" (p. 5)

작가의 산문집이란 작가의 지나온 날들의 기록과도 같아서 작가와 친근해지고 익숙해지는 과정이지만, 이미 신경숙은 나에겐 너무도 친숙한 작가이기에, 책 속의 글들이 낯설지가 않다.

<잊혀진 샛길> 속의 7살 꼬마가 그를 알게 되어가는 과정에서 아이들의 놀림을 받게 되고, 그들이 벽에 그려 놓은 낙서를 지우다가 지우다가, 결국에는 그가 기찻길옆의 노란 국화를 벽앞에 나란히 심어 놓는 이야기는 작가의 어릴 적 추억이지만, 국화꽃 노랗게 핀 가을날의 나의 추억들도 생각나게 한다.

세 명의 오빠는 신경숙에게는 그 누구보다도 마음의 편안함을 가져다 주는 존재들이기에 그만큼 그녀의 작품 속에 많이 등장했다보다.

" 오빠들과 함께 살았던 정읍에서의 그 한때는 나의 역사이기도 했다." (p. 167)

표제작인 <아름다운 그늘>은 불교 신도도 아니면서 성철 스님의 다비식을 찾는 이야기.

그리고 <사람들>, <실컷 흠모할 분이 계시니>,<사로잡혀 생의 바닥까지 내려가기>등 에는 그녀의 인생에, 문학에 영향을 끼쳤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겨져 있다.

책을 읽던 중에 <모르는 여인들>에서 오랜만에 온 언니이야기가 나오는데, 그녀가 오랫만에 왔기에 며칠 묵고 갔으면 하는 마음에 신고 온 부츠를 눈 속에 숨겨 버리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 이야기는 <완순이 언니의 부츠>라는 글로 이미 이 책 속에 수록된 이야기이다.

그러니, <아름다운 그늘>은 신경숙의 작품 속에 들어가기 위해서 고이고이 보관해 둔 보물 상자와도 같다는 생각이 든다.

" 이제는 조금 아주 조금 알 것 같다. 시간은 되풀이되지 않지만 지나가는 일도 그냥 지나가지 않는다. 사소한 일이라도 그들은 지나가며 생김새와 됨됨이를 새로 갖는다. 나에게 소설은 재생된 새 꼴들을 담아놓을 수 있는 공간이고 시간이다. 내가 어느 지점에서 어떤 모습으로 살았었건 간에 그 지나간 것들은 오늘 여기까지로 오는 길이었으며, 여기 내 앞에 놓여 있는 이 시간  또한 십 년이나 이십 년 뒤 짐작도 못 하겠느 그 시간들로 가는 길이라는, 당연한 사실을 나는 이제야 내 것으로 받아들인다. " (p. 176)

신경숙의 글에서 항상 느낄 수 있는 슬프지만 아름다운 이야기들. 개성이 넘치는 신경숙만의 문체, 서정적인 아름다움, 이 모든 것들이 고스란히 이 한 권의 책에 모두 담겨져 있다.

 

 

그래서 신경숙의 글은 언제나 같은 느낌이지만, 또 새로운 이야기로 우리들을 행복하게 해준다.

 

 

 

 

 


 



n******5 2012.02.22. 신고 공감 2 댓글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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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숙, 그녀의 삶의 이야기를 듣다.
"신경숙, 그녀의 삶의 이야기를 듣다." 내용보기
신경숙의 소설들을 읽으며 이야기속 주변 인물이 다른 이야기속에서는 주인공으로 등장하기도 해서 가끔 왠지 책은 각각 다른 이야기를 하지만 같은 공간적 배경을 가진듯한 신비로운 느낌을 받곤 한다. 그녀에게서 나오는 이야기들이 그렇게 유기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이유를 나는 이제서야 알게 되었다. 이미 오래전에 출간 된 책이었는데 개정판으로 다시 나온 책을 받아들고 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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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숙의 소설들을 읽으며 이야기속 주변 인물이 다른 이야기속에서는 주인공으로 등장하기도 해서

가끔 왠지 책은 각각 다른 이야기를 하지만 같은 공간적 배경을 가진듯한 신비로운 느낌을 받곤 한다.

그녀에게서 나오는 이야기들이 그렇게 유기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이유를 나는 이제서야 알게 되었다.

이미 오래전에 출간 된 책이었는데 개정판으로 다시 나온 책을 받아들고 읽으며

그녀의 궁금했던 이야기를 그녀에게 직접 듣고 있으려니 참 이상한 기분이 들었달까?

 

위로 각각 개성이 다른 세 오빠의 이야기를 하는 어린시절 신경숙 작가는 막내 오빠가 꽁꽁 숨겨둔 책을

기어이 찾아 헛간 같은 공간에서 몰래 읽어낼 정도로 책을 좋아했다는 이야기에 친근함이 느껴진다.

또한 자신을 서울로 데리고 가준 첫째 오빠에 대한 애정 또한 참으로 각별하다고 느끼게 하며

어쩐지 둘째 오빠의 이야기는 꼭 형제 중 하나쯤 말썽꾸러기같은 존재지만 그래도 소중한 가족이라는

그런 느낌을 받게 하는 오빠를 가진 그녀가 오빠는 하나도 없고 동생만 셋인 나는 참 부러울 따름이다.

그치만 때로는 질투의 대상이 되기도, 팔이 안으로 굽기도 하는 여동생에 대한 이야기는 나와 비슷하다.

 

서울에서의 삶을 살면서 처음 만난 친구같은 언니의 자살로 인해 마음의 문을 닫아 버렸던 그녀에게

오랜 짐으로 남아진 대학시절 자신에게 특별했던 친구의 죽음까지 그녀의 소설의 무게감은 아마 그런데서 오는게 아닐까?

[외딴방]에서의 그녀가 결코 입밖으로 내어 말하고 싶지 않았던 참혹한 기억의 한자락을 들으며

정말 안타까운 마음을 가졌던 그때 기억을 떠올리니 지금 이 산문집의 그녀의 이야기가 소설같기만 하다.

 

죽음은 거역할 수도 자신이 선택할 수도 없이 불시에 삶에 끼어 들었다가 휘이 저어놓고는 잠시 숨는다. 어디서 기다리고 있는지를 모르니까 곳곳이 그가 묵고 있는 장소이다. 처처에 도사린 죽음은 자신의 존재를 알림으로써 삶도 기르친다. 언젠가는 죽는다고 생각하면 한없이 가볍게 날아가는 까치도 다시 보아진다. 제자리를 잃은 마음의 불란을 정리해주는 건 죽음이다. 언젠가,,,,,, 언젠가는 죽는다는 것, ---79

 

몽유병 환자 같이 밤이면 자신의 집에 드나들었던 한남자 때문에 더욱 서울을 벗어 나고 싶어 했던 그녀,

그렇게 떠나온 서울의 홀로 남겨진 자신의 집에서조차 바깥의 툭탁이는 소리에 곰포심을 느끼는 그녀,

그녀의 저 심연의 밑바닥에는 진짜 그 끝을 알 수 없는 우물이 존재하고 있는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인간이라면 누구나 알 수 없는 것들에 대해 두려워 하고 겁내 하기 마련이다.

그녀는 그렇게 어디에 숨어 있을지도 모를 미지에 대한 두려움과 죽음에 대한 공포심등을

극복하고 살아가는 방법으로 글로 써내는 일을 택했는지도 모를일이다.

 

이제는 조금 아주 조금 알 것 같다. 시간은 되풀이 되지 않지만 지나가는 일도 그냥 지나가지 않는다. 사소한 일이라도 그들은 지나가며 생김새와 됨됨이를 새로 갖는다. 나에게 소설은 재생된 새꼴을 담아 놓을 수 있는 공간이고 시간이다. ---196

 

신경숙 자가의 산문집이라지만 이 책 또한 '그'라던지 '그녀'라는 인칭을 써서 꼭 소설을 읽는것 같고

그녀의 소설을 여러권 읽은 탓에 어느 소설속에 등장하는 그녀의 가족이나 주변 사람들 이야기는

자꾸 어느 소설을 떠올리게 해 그녀의 소설 그 어디쯤에서 오락 가락하는 기분이 들곤 한다.

그녀의 소설은  꼭 누군가 죽거나 사라지거나 혹은 삼각관계이거나 편집증이 있거나 해서

소설 한권을 끝내고 나면 물을 잔뜩 머금은 솜처럼 무거움을 느끼게 되는데 산문집은 그런 무게감보다는

책의 제목처럼 그녀의 삶의 단면들을 해질무렵 커다란 느티나무 아래에서 듣는듯한 그런 느낌이다.

 

희망 없는 사랑을 해 본 사람, 사랑은 정상이 아니에요, 오죽하면 사랑에 빠진다고 했겠어요, 어느날 정상이 되고 보면 내가 갑자기 당신에게 아무것도 아닌 그냥 여자, 당신도 갑자기 아무것도 아닌 그냥 남자, 그런데도 천국과 지옥이 동시에 왔다가 가고, 깊음 무덤이 되고, 노래가 되고  --p351

 

신경숙 작가의 소설을 읽으면서 가장 안타까웠던 것은 주인공들의 엇갈리는 사랑과 비극적인 운명이다.

분명 아름답고 달콤한 사랑이어야 하는데 그녀의 글속에서의 사랑은 이상하게도 어긋나고 우울하고 슬프다.

비록 슬플지라도 그녀에게도 그것은 그리움이고 아픔이고 사랑이라는 사실만은 인정해 주어야 하지 않을까?

 

남들과는 다르지만 시골에서의 삶이 그녀의 소설속에서 시골의 풍경을 담아내는 이야기를 쓰게 했으며

자신의 가족이나 친구, 이웃집 언니와 낙천이 아저씨와 이름이 등장하지 않는 사랑하는 사람의 이야기는

누구에게나 있을 법한 아름다운 어린시절 한자락의 추억들을 전혀 새로운 글로 써서 많은 독자들에게

읽히게 하는 것은 평범한 나같은 사람들에게는 없는 그녀만의 재주인것은 확실하다.

앞으로는 그녀의 소설이 아름다운 그늘에서 해를 바라보듯 그렇게 포근한 느낌을 준다면 참 좋겠다.

 

 

 



k*******7 2012.01.31.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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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그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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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함부로 살지 않는 일. 그래, 함부로 살지 말자. 할 수 있는데 안 하지는 말자. 이것이 내가 삶에게 보일 수 있는 최고의 적극성이다. 겨우 서른셋. 기어이 잊어야만 하는 일을 벌써 갖지 말자. 왔다가 가버린 것, 저기에서 진이 빠져 마침내 숨을 죽인 것, 여기에서 다시 생기를 줘 살게 하자. 시간에 빼앗기기 전까지 아무것도 잊지 말자. 겉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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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함부로 살지 않는 일. 그래, 함부로 살지 말자.

할 수 있는데 안 하지는 말자. 이것이 내가 삶에게 보일 수 있는 최고의 적극성이다.

겨우 서른셋. 기어이 잊어야만 하는 일을 벌써 갖지 말자.

왔다가 가버린 것, 저기에서 진이 빠져 마침내 숨을 죽인 것,

여기에서 다시 생기를 줘 살게 하자.

시간에 빼앗기기 전까지 아무것도 잊지 말자. 겉도는 주장으로가 아니라,

이 흘러가는 시간의 무상함 속에서 그를 기억하는 직관으로.

 

-아름다운 그늘 p45 / 신경숙

 

 

 

 

 

 

 

 

 



YES마니아 : 로얄 b******2 2014.06.23.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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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고 투명하며 서늘하고 느린 작가의 감수성의 근원에는 이처럼 아름다운 그늘이... 아름다운 그늘
"맑고 투명하며 서늘하고 느린 작가의 감수성의 근원에는 이처럼 아름다운 그늘이... 아름다운 그늘" 내용보기
1995년 출간된 신경숙의 산문집이다. 그 사이 네 번 판을 바꿔 출간되었지만 서문들을 살펴보니 아마도 그 내용에 대한 수정은 없었던 듯하다. 1995년이면 작가가 등단 10년차로, 소설집과 장편 소설 몇 권을 내면서 인기몰이를 하기 시작하는 시점이다. 1995년의 서문을 읽어보면 이르게 산문집을 출간하는 것에 대해 겸연쩍어하는 작가의 풋풋함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이렇게
"맑고 투명하며 서늘하고 느린 작가의 감수성의 근원에는 이처럼 아름다운 그늘이... 아름다운 그늘" 내용보기
  1995년 출간된 신경숙의 산문집이다. 그 사이 네 번 판을 바꿔 출간되었지만 서문들을 살펴보니 아마도 그 내용에 대한 수정은 없었던 듯하다. 1995년이면 작가가 등단 10년차로, 소설집과 장편 소설 몇 권을 내면서 인기몰이를 하기 시작하는 시점이다. 1995년의 서문을 읽어보면 이르게 산문집을 출간하는 것에 대해 겸연쩍어하는 작가의 풋풋함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이렇게 일찍 산문집을 갖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겨우 서른셋에요... 마음속으로 소설이 아닌 다른 책은 제 일생에 한 권만 가져야지, 했습니다. 나중에 아주 나중에 제가 얇아지고 얇아지고 얇아져서 공기 같아졌을 때요... 길게 말고 짧게 말을 줄여서 짧디짧게요. 그런데 저는 저도 모르는 사이 일을 안 하기가 하기보다 더 힘들어졌습니다.” - 1995년 초판 서문 중


  산문집에서 드러나는 작가의 감수성은 그 당시의 신경숙을 떠올리게 한다. 수더분한 인상이지만 그 어딘가에 탁월한 예민함을 품고 있는 작가의 특강을 얼핏 들은 적이 있는데, 들릴듯 말듯 한 목소리가 인상적이었다. 작가는 자신의 후배들을 앞에 두고서도 어딘가로 자꾸 숨어드는 모양새였는데, 내가 왜 이 자리에 서 있지, 하는 어리둥절함이 겸연쩍음을 내보였던 것도 같다.


  “... 사라지고 멀어져버리는데도 사람들은 사랑의 꿈을 버리지 않는다. 사랑이 영원하지 않은 건 사랑의 잘못이 아니라 흘러가는 시간의 위력이다. 시간의 위력 앞에 휘둘리면서도 사람들은 끈질기게 우리들의 내부에 사랑이 숨어살고 있음을 잊지 않고 있다...”


  산문집에는 주로 아직 젊은 작가가 느끼는 여러 일상의 감정들이 숨김없이 담겨져 있다. 서른셋, 아무래도 어딘가 어리숙한 나이이지만, 작가는 자신의 감정들과 마주하고, 주저주저 하면서도 그 마주함으로부터 피하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하고 있다. 동시에 이제 등단 십년차, 자신의 문학관에 대해 조금씩 이야기 함으로써 스스로를 굳히는 작업에 들어가기 시작한 것으로도 보인다. (책을 통하여 새로 알게된 사실인즉슨, 신경숙에게 처음 소설가를 권하였던 선생님은 그녀에게 민중문학을 하기를 원하였다고 한다.)


  “변화로서의 문학보다는 정서적 환기력으로서의 문학을 생각해왔다. 삶 자체를 어떻게 바꿔놓을 수는 없지만, 삶을 다른 각도로 바라볼 수 있는 심미적 체험 속으로 이끄는 것으로서의 문학...”


  하지만 산문집의 내용 중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작가의 고향집 생활, 그리고 어머니와 아버지와 그녀의 여섯 형제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여기에 이른 나이에 서울로 올라와서의 생활 등이 고루 다뤄지고 있다. 하지만 역시 작가가 가장 흥미진진하게, 그리고 달뜬 모양으로 다루는 것은 시골에서의 생활인데, 아래와 같은 장면은 읽으면서 그 때 그 상황이 손에 잡히는 듯 선명하다.


  “... 차례 음식을 마친 밤에 어머니는 마지막으로 큰 솥에 장작불로 물을 데워 커다란 고무 목욕통에 큰오빠부터 한 사람씩 우리 여섯 형제를 씻기곤 하셨는데 엄살부리다가 등에 빨간 손자국 하나씩 얻은 채로 목욕을 마치고서 새로 시친 이불 속으로 들어가면 깃이 너무 빳빳해 목이 아프긴 했어도 뭔가 아련하니 좋았다...”

 

  여기에 박경리 선생이나 오정희 선생, 그리고 박상륭 선생이나 이문구 선생을 비롯한 작가들과의 만남 혹은 그 분들에 대한 자신의 경외감을 드러내는 이야기들 또한 종종 삽입되어 있다. 그리고 그로부터 선배 작가들에 대한 경외감과 동떨어져 있지 않은 자신의 소설 창작론의 일단을 끄집어내어 보여주기도 하는데, 지나온 모든 것들로부터 새롭게 재생된 시간과 공간으로서의 소설이라는 표현이 마음에 든다.


  “이제는 조금 아주 조금 알 것 같다. 시간은 되풀이되지 않지만 지나가는 일도 그냥 지나가지 않는다. 사소한 일이라도 그들은 지나가며 생김새와 됨됨이를 새로 갖는다. 나에게 소설은 재생된 새 꼴들을 담아놓을 수 있는 공간이고 시간이다...”


  비록 오래전에 씌어진 산문집이기는 하지만 현재의 신경숙에게로 이르는 어떤 길을 본 것 같아 흥미롭다. 산문집에 실린 어떤 이야기는 최근의 작가가 발표한 단편으로 다시금 재생되기도 하였으니, 이를 확인하는 즐거움은 덤이었다. 맑고 투명하며 서늘하고 느린 작가의 감수성이 조금 지루하다고 여겨지는 즈음이었는데, 이럴 때 읽는 작가의 오래전 산문들이 나쁘지 않다.

 



YES마니아 : 플래티넘 k******i 2012.03.21. 신고 공감 0 댓글 0
리뷰 총점 종이책
아름다운 그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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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이 버거워질수록 사람들은 지난날을 아름답다 미화하고는 한다. 치열하기로는 1,2위를 다투던 고등학교 시절이 되돌아가볼만한 가치가 있는지 판단이 잘 서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어렸기 때문에 삶이 미완성이기 때문에 무엇이라도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존재했던 그 시절에 대한 향수는 진한 법이다. 특히 나이가 들어 생의 순간이 얼마 남지 않은 이들은 더더욱, 살아갈 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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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이 버거워질수록 사람들은 지난날을 아름답다 미화하고는 한다. 치열하기로는 1,2위를 다투던 고등학교 시절이 되돌아가볼만한 가치가 있는지 판단이 잘 서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어렸기 때문에 삶이 미완성이기 때문에 무엇이라도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존재했던 그 시절에 대한 향수는 진한 법이다. 특히 나이가 들어 생의 순간이 얼마 남지 않은 이들은 더더욱, 살아갈 날이 많은 그 시간을 향한 강한 그리움을 드러내고는 한다. 볕이 뜨거울 때면 언제라도 쉬어갈 수 있는 처마 밑 그늘과 같은 존재. 자신이 간직하고 있는 기억이 그와 같은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것이다.

정읍이라고 하였다. 그 곳엔 작가의 어린 시절이 살아 있었다. 정읍이 ‘시’가 된 만큼 그녀의 삶의 터전이었던 곳이 과거의 고즈넉한 모습을 고스란히 보존되고 있는지 여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적어도 그녀가 털어놓은 이야기 속에는 그녀를 어지간히 예뻐했다던 세 오빠가 아직 어른이 되지 아니한 모습으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머니 역시 그녀의 기억 속에 살아 있었다. 처음부터 어머니였던 것처럼 오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도 그녀의 어머니는 상상할 수 없는 10대, 20대 때의 모습을 그녀에게 보여주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추억은 아름다운 그늘과도 같았다. 비록 지금은 고향에 내려가 익숙한 광경에 기대는 게 집에 홀로 있거나 도심을 거닐며 이 사람 저 사람을 만나는 것보다 불편하다고 고백한 그녀였지만, 부인할 수 있는 고향이 있다는 것도 축복임을 아마 그녀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이야기 속에는 모든 게 담겨 있었다. 아마도 지역의 어귀를 가르고 있었을 듯한 철로는 숱한 사람들이 알게 모르게 생을 마감한 장소가 되었을 것이다. 새끼를 밴 강아지와 먼 친척오빠. 그때마다 그녀의 어머니는 “빨리 집에 가거라!”를 외치며 그녀로부터 죽음의 그림자를 쫓아내려 안간힘을 썼다 하였다. 어른이 되고 뭔지 모를 이끌림에 성철 스님의 마지막을 좇았다던, 죽음을 무작정 피해야 하는 무언가에서 우리 주변에 존재하는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이기까지의 시간을 통해 그녀는 성장하였다. 그 성장은 그녀에겐 축복이었을지 모르나 모두에게 그랬던 건 아닌 듯하다. 그녀를 비판하는 이들이 입에 올리곤 했던 사회참여 의식의 부재. 치열했던 사회와는 달리 그녀의 글은 한없이 유순하고도 보드라운 빛을 띠고 있었으니, 그 점은 이번 작품에서도 변함이 없었다. 자신도 그러한 비판을 잘 알고 있다는 듯 어떠한 거침도 허락되지 않을 듯한 색채에 그녀는 스승과의 이야기도 담았다. 서명까지 했으나 미처 다가갈 수 없었던 어느 날, 그녀를 주춤하게 만든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날카로운 면모를 드러낼지라도 결국에는 영원히 그녀 편에 머물 스승의 존재를 알았기에 행한 외면이 아니었을까. 억지로 심각한 척 굴지 않는, 그녀의 글이 지닌 최고의 무기인 진솔함을 지켜내기 위한?

닮은 듯 다른 그녀와 나의 삶. 그다지 꾸밈없이 있는 그대로를 드러내는 것도 아름다울 수 있음에 눈을 뜬다. 문득 글이 쓰고파졌다. 있는 그대로의 내 삶. 그녀가 이미 보여준 것처럼 자연스레 누군가와 나눌 수 있는 삶의 부분이 나에게도 과연 있을지...

이달의 사락 q*****2 2012.01.24.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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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쁨 뒷면의 슬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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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냐 ……아니요. 얼마쯤 지나 다시 물으신다. 자냐 ……아니요. 그러다 내가 먼저 잠들었으니 그 물음이 언제 끊겼는지 모르겠으나 자냐? 그 고적한 짧은 물음은 찡해오는 코끝을 베갯잇에 묻게 했다. 내가 젊다는 것이 아버지 앞에선 전혀 행복하지 않다. 내가 젊기 때문에 그는 늙은 것이다. 28   내가 젊기 때문에 아버지는 늙은 것이다. 절대적인 젊음과 늙음이 존재하지 않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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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냐 ……아니요. 얼마쯤 지나 다시 물으신다. 자냐 ……아니요. 그러다 내가 먼저 잠들었으니 그 물음이 언제 끊겼는지 모르겠으나 자냐? 그 고적한 짧은 물음은 찡해오는 코끝을 베갯잇에 묻게 했다. 내가 젊다는 것이 아버지 앞에선 전혀 행복하지 않다. 내가 젊기 때문에 그는 늙은 것이다. 28

 

내가 젊기 때문에 아버지는 늙은 것이다. 절대적인 젊음과 늙음이 존재하지 않는,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나의 젊음이 치명적인 아픔이 될 수 있음을, 그리고 그 치명적인 아픔이란 실은 내 안타까움이 묻어난 지극히 개별적인 것임을 말하고 있다. 그렇지. 사랑은 그런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나의 자유가 그의 구속이 될 수 있고, 나의 행복이 그의 불행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 통찰과 사색이야말로 변치 않은 겸허함을 허락해 준다. 사랑하는 마음만이 진실하게 다른 사람의 눈으로 나를 바라볼 수 있는 은총의 가능성을 열어 준다. 어쩌면 이러한 것은 신적인 것일지 모른다. 나를 초월하는 능력을 갖게 하므로. 그렇다면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사람은 먼저 자신의 눈이 아닌, 그와 그녀의 눈으로 자신을 보게 되는 능력을 얻게 될 일이다. 그런 것이 진짜 하나님의 은총이고 능력이 될 것이다. 그런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한 누군가의 탐욕일 것이다. 하나님이 사랑인데, 설마 자기 욕망의 절정을 맛보려 다른 이들을 혹사시키는 짓을 하겠는가. 가장 가까운 타인의 고통을 강요하는 일, 자신의 행복과 안위에 취해 비틀거리느라 가까운 타인의 비애를 외면한다면 그것은 그 자체로 사랑 없는 천박함에 불과할 일이다.

아버지가 떠오른다. 아버지 없이 커야했던 아버지. 제 스스로 목숨을 끊어 서서히 죽어가던 아버지를 자기 눈으로 똑똑히 보아야 했던 아버지. 아버지의 무기력한 죽음을 무력하게 지켜보아야 했던 아버지. 그런 아버지에게 내가 무엇을 요구할 수 있을까. 자기 힘의 근원인 아버지를 허망하게 잃어야 했던 아버지에게 내가 감히 무어라고 알은 체를 할 수 있을까. 아버지가 스러져가는 모습을 다만 안타깝게 지켜봐야만 했던 어린 자식의 심정을 어렴풋하게라도 가늠이나 할 수 있을까? 그의 가슴에 그렇게 푹하니 남겨진 그 깊은 상흔을 내가 조금이라도 안다, 고 할 수 있을까? 멀다. 그의 삶은 나에게는 멀고 아득한 거리에 있다. 그런 삶을 보며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그저 동정하는 것 아닐까. 깊은 동정과 연민만이 그에게 유일한 위로가 되지 않을까? 의문은 더해가고 명료한 답은 애초부터 희미하다. 그래, 그게 내가 답할 수 있는 유일한 대답일지 모르겠다. 어쨌든 나의 아버지는 건강히 살아계시고, 삶을 포기하지 않으셨으며, 내일이면 40이 될 내 곁에 여전히 건재하게 계신다. 그런 내가 아버지의 그 복잡한 속내를 어찌 안다고 할 수 있을까? 모를 일이다. 모를 일이야.

 

이렇게 힘이 잘못 들어가 피투성이가 돼버린 시절이 있었다. 잘못되었다고 느꼈을 땐 이미 잘못된 대로 너무 친숙해져 있어 돌이킬 수가 없었다. 어쩔 수 없었다. 잘못됨을 껴안을 수밖에. 껴안고서 점점 더 잘못되어갈 수밖에. 거기에도 바닥이 있었다. 그 바닥까지 가지 않았으면 돌아올 수 없었을 것이다. 43

 

바닥까지 가보는 것은 잘못됨을 껴안는 것이란 작가의 말이 울림으로 남는다. 잘못됨을 껴안는 건 어찌어찌 나의 의도와는 다르게 도달한 곳에서 겪을 일이다. 흘러가다가, 내 의지와 노력으로도 어떻게 되돌려지거나 주워 담을 수 없는 순간에 도달할 때 구원은 역설적으로, 그런 나의 잘못됨을 말없이 껴안으면서부터 시작되곤 한다. 돌아보면 그렇다. 더 이상의 해답을 찾을 수 없을 것 같은 삶의 막장에서 한번 힘껏 나를 안아주고 났을 때 느껴지는 씁쓸하나 조금은 안도되는 느낌은 그곳까지 가보지 않고서는 겪기 어려운 감정이다. 그런 것, 그런 역설과 모순이 엄연히 펼쳐지는 게 사는 일이다. 나이가 어릴수록 그런 모순은 역겹고 비루하게 보인다. 타협이고 체념이며 낡은 정신으로 간주된다. 비굴함이고 무력함이기에 날선 비평과 비난의 대상이 된다. 그러다가, 그렇게 치기어린 비난을 일삼다가 막상 자기 일상의 삶에서 그 자리에 도착하게 되면 누구나 삶의 엄중하고 냉정한 운명에 무릎을 꿇게 된다. 사는 게 이런 거라고 쉽게 말할 수 없음을 비로소 배운다.

사는 일이란 시간이라는 에누리 없는 비용을 치르면서 배우는 값비싼 과외와 같다. 복습이 가능할리 없는 단 한 번의 과외 말이다. 되돌릴 수 없는 시간이란 비용을 치른 후에야 점점 사람의 기운과 향기를 몸에 배여가게 된다. 사람은 겪을 것을 겪어보고 더 이상의 바닥은 없을 것으로 여겨지는 곳까지 제 발로 가본 후에야 비로소 작은 성공과 유명세에 겸허함의 덕을 놓치지 않는 숙련된 평상심과 심각한 좌절과 실패 앞에서 존엄함을 잃지 않은 농익은 여유를 갖게 된다. 그런 것이 사는 일, 그 중에서도 맨바닥에 떨어져 보는 일이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신적인 선물일 것이다.

 

시간은 둘 중 하나를 선택하지 않는다. 무서워하지 말자. 시간은 잔인하지만 공평하다. 잠들어 있는 것, 깨어 있는 것, 여기에 있는 것, 저기에 있는 것, 모든 것들 위로 흘러간다. 모두에게 어린 시절을 주고 모두에게 청년을 주고 모두에게 노년을 준다. 나와 그를 가리지 않는다. 그러니 무서워하지 말자. 45

 

잔인하지만 공평한 시간. 어쨌거나 시간은 이런저런 일에도 불구하고 제 흐름을 늦추거나 빠르게 하지는 않는다. 그런 면에서 시간은 꽤 정직하고 충실한 축에 속한다. 아니 그보다는 결코 감상적이지 않다고 봐야 옳을 것이다. 그래, 어쨌든, 이렇든 저렇든 시간은 가고 세월은 흐른다. 그런 것이 사는 일이라면 무의식을 포함한 내 속의 진실을 한곳에 모아 빼곡이 담아내는 일이라 말로 후회하지 않을 삶의 선택이 될 것이다. 빼곡하게 담겨진 묵직한 내 진실의 꾸러미들을 보며 눈을 감는 날 느낄 만족스러움을 음미해 본다. 그런 죽음이라면 행복할 것이다. 더 이상의 최선은 없었노라고, 순간순간이 진실이었고, 순간순간이 눈부신 생명이었노라고 말할 수 있는 죽음이라면 기꺼이 그 죽음에 나를 맡길 것이다. 좋다. 생각만 해도 기대되는 죽음이다. 기대되는 죽음을 음미하며 동시에 찰나의 행복감이 전경으로 불쑥 떠오른다. 좋다. 이것도 좋다. 죽음을 생각하며 행복감을 느끼는 나를 보는 순간에 행복감이 느껴진다는 것이 좋다. 적어도 이 순간 죽음에 대해서 생각해보는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여유가 있다는 행복은 누구나 누리는 것이 아니어서 좋다. 나만 맛볼 수 있는 것이어서, 그리고 지금 여기서만 맛볼 수 있는 것이어서 좋다. 좋다는 말이 최상의 표현은 아닐지는 모르지만 그저 좋다고 말하는 것만으로도 좋아서 좋다. 그래, 좋다



YES마니아 : 플래티넘 v******n 2012.10.12.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