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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옥에 대해서 관심을 가졌던 게 언제부터인가. 강원도 여행을 갔을때 강릉 선교장을 방문했을 때와 몇 년전 전주 한옥마을에 갔을 때를 기억한다. 그 전에는 그냥 스쳐지나가고, 심한 추위를 타는 내게 한옥이란 '추운 집'이라는 강한 인식하에 별 관심이 없었다. 오히려 더 싫어했다고 볼수 있겠다. 전주 한옥마을을 돌아다니며 고고하게 고요히 서 있는 집들을 보며 이렇게 아름다운 한옥을 나는 왜 싫어했는가. 그때 한옥이 가슴속에 들어 왔다. 고요한 멋을 풍기는 한옥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을 강하게 했다. 아마 그때부터였을것이다. 아이들과 함께 어딘가를 방문하면 옛집이 있는 풍경이면 나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고 집을 바라보았다. 아마도 마음속으로는 많은 사연이 담겨져 있을 옛집에게 말을 건네고 있었다. 한옥 건물과 흙으로 빚어져 담에서 이름모를 풀이 자리하고 있는 그런 옛담들의 모습까지 사진에 담고 있었다.
지금의 소박한 꿈이 하나 있다. 주말이면 시골에 조그만 땅 하나 사서 방 한 칸, 부엌 한 칸 이렇게 조그만 한옥 집을 짓고, 아기자기한 꽃들도 심고, 텃밭에는 우리가 먹을 야채를 기르고 살고 싶어한다. 그런 바람일까. 요즘 자꾸 건축에 대한 게 관심이 많아져 얼마전에는 양진석의 『친절한 건축이야기』를 읽은 적도 있다. 그 책에서는 서양 건축을 다루었지만 정작 내가 좋아하는 건축물은 우리나라 고유의 건물인 한옥이다. 창호지를 바른 방의 문도 정겹고, 닳은 마루바닥도 정겹기만 하다. 유려한 곡선을 자랑하는 지붕의 모습과 햇볕 가림과 비 가림을 위한 처마의 길게 내려앉은 모습까지도.
시를 쓰는 건축가, 건축가가 시를 쓴다는 게 전혀 어울릴것 같지 않지만, 집짓는 시인 함성호가 조선시대 성리학으로 유명한 학자였던 이들의 집을 찾아다니며 그들의 사상과 철학을 얘기하며 그들이 지었던 집을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다.
조선 중종때의 학자이자 정치가였던 회재 이언적의 사랑채인 '독락당'을 보면 북송 때의 사마광의 「독락원기」에 나오는 시를 읽고 자신보다 4백년 앞서 살다 간 사마광의 생애의 자신을 동일시해 자신의 사랑채에 독락당이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다고 한다. 이언적이 가장 불우할때 지은 집이 독락당이고, 다시 복권되어 경상감사를 제수받고 금의환양하며 지은 집이 향단이다. (53페이지) 건축물과 그 주위의 옥계천과 함께 어우러져 있는 독락당의 모습은 아름다운 정원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조선시대를 통틀어 가장 많은 건축물을 남긴 철학자 퇴계 이황의 도산서당. 단순히 집을 소유한 건축주가 아니라 집을 짓는 데 있어 그의 성리학적 세계관을 건축 조영에 적용 시켰고, 직접 설계도를 그리는 등 탁월한 안목을 보여준 퇴계의 도선서당을 소개하고 있다. 퇴계가 가장 큰 스승으로 추종했던 주자의 무이정사를 모범으로 건축되었다고 한다. 동양철학사에 자연의 이성이 만물을 낳는다고 선언하고 그것을 건축이라는 도구를 통해 자연의 이성과 합일하는 인간의 모습을 구현하려 한 퇴계의 도산서당은 동양철학의 정원이라고 불릴만 하다고 말한다.
이외에도 은유와 상징의 집이라고 표현한 이언적의 양동마을과 향단, 남명 조식의 산천재, 해상의 물길을 자유자재로 움직였던 고산 윤선도, 생애 동안 5백여 권에 달하는 방대한 저술을 남긴 강진의 다산초당, 김장생의 임이정, 우암 송시열의 우암고택, 암서재, 윤증고택 등을 소개하고 있다.
삼인행필유아사(세 사람이 길을 가면, 반드시 그 중에는 나의 스승이 있다)라고 했던가. 밥집 노파에서부터 천재 승려, 그리고 유배객을 보고 도망가는 순박한 촌로에 이르기까지. 이들은 모두 다산이라는 한 시대의 사상을 만들어 내기 위해 준비된 스승들이었다. (198페이지 중에서)
건축가가 한옥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아도 조선시대의 성리학자들을 말하는 게 상당히 어려웠을거라고 보는데 저자는 직접 철학을 공부하고 학자들의 옛집을 철학과 연관시켜 우리에게 소개해 주었다. 옛집의 아름다움과 철학이 보기좋게 잘 어우러져있었다. 책을 보는 이로 하여금 그 집을 가보고 싶게 만들고 옛집에 반해 우리 한옥의 아름다움을 일깨워주고 있다.
시를 쓰는 건축가가 철학으로 읽는 옛집으로 우리 독자들에게 말을 건넸듯, 나 또한 자신의 철학을 담은 건축물을 지은 조선의 철학자들과 그들이 지었던 옛집에게 말을 건네는 좋은 시간이었다. 시간을 내어 저자가 소개한 철학자들의 옛집을 방문해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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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성호의 ‘철학으로 읽는 옛집’은 건축에 큰 의미를 부여한 조선의 성리학자들에 대한 기록이다. 부제는 ‘조선의 성리학자들은 왜 건축에 중독되었는가?’이지만 책에 등장하는 성리학자들의 행동을 중독이라 하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인다. 중독되었다고 말하려면 타지마할을 지은 인도 무굴 제국의 황제 샤자한을 들어야 할 것이다. 그는 건축을 하다가 국고를 탕진해 보다 못한 아들에게 강제 폐위를 당하기까지 했다.(104 페이지) 책에 등장하는 성리학자들이란 회재(晦齋) 이언적, 남명(南冥) 조식, 퇴계(退溪) 이황, 고산(孤山) 윤선도, 다산(茶山) 정약용, 사계(沙溪) 김장생, 우암(尤庵) 송시열, 명재(明齋) 윤증 등이다. 흥미로운 점은 많은 성리학자들이 집을 뜻하는 재(齋), 암(庵) 등의 글자를 채택했다는 점이다. ‘철학으로 읽는 옛집’의 저자는 시인이자 건축가이다. 현역 건축가로서의 경험과 안목이 작품 서술에 충분히 반영되었으리라 짐작할 수 있는 상황이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등장 인물들의 사상과 건축이 깊은 연관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가령 조선 유학을 정주계(程朱系: 정호, 정이 형제 및 주희의 학설을 따르는 학파) 성리학 일변도로 만든 원흉으로 꼽히는 이언적은 용(用)자 형태의 집을 지었다. 이는 자생풍수(지형풍수)를 변용한 결과이다.(61 페이지) 지형 풍수는 자생 풍수이고 가택 풍수는 중국 풍수이다.(27 페이지) 이언적이 자생 풍수를 변용해 지은 집이란 향단(香壇)을 말한다. 이언적은 독락당(獨樂堂)도 지었는데 이는 정치적으로 좋지 않은 시기에 지은 집이고 향단은 복원되어 경상감사를 제수받고 금의환향하여 지은 집이다.(53 페이지) 이상한 것은 불우한 시기에 지은 독락당은 너무도 여유롭고 완완(緩緩: 느릿느릿함)한데 화려한 시절의 집은 지극히 폐쇄적이고 우울하다는 점이다. 저자에 의하면 향단은 전체적으로 용(用)자 형국의 집이다.(60 페이지) 용(用)은 일(日)과 월(月)의 합성자이다. 그리고 둘을 나란히 쓰면 일(日) 풀러스 월(月) 즉 명당(明堂)의 그 명(明)자가 된다.(61 페이지) 이(理)가 어떻고 기(氣)가 어떻고 논하던 성리학자들이 아무리 정치 생명, 나아가 목숨을 보존하기 위한 것이라 해도 풍수(風水)에 의존한 것은 좋아 보이지 않는다. 물론 저자는 풍수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풍수는 발복의 수단으로 인식되고 있지만 그것은 말 그대로 바람과 물을 얻는 방법이고 그것을 지킨다는 의미이다. 관건은 나무를 심는 것에 그치지 않고 지속적으로 가꾸고 보살핌으로써 좋은 수세(樹勢)를 얻듯 풍수지리의 의미도 단지 좋은 땅을 선택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좋은 땅을 자자손손 지켜나가는 데 있다.(49 페이지) 명당은 없다.(22 페이지) 저자가 우려하는 것은 풍수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술법(術法)으로만 받아들이는 것이다.(49 페이지) 저자는 술법 풍수도 반대하지만 지세를 의생물화하는 형국론(形局論)도 반대한다.(79 페이지) 저자는 얼마나 많은 조선의 학자들이 학문적 바탕을 숨겨왔는지 전공자들이 더 잘 알 것이라 말한다.(93 페이지) 사상과 집을 이야기했지만 사상과 권력도 깊은 연관이 있다. 이런 구절을 보라. “기(氣)의 움직임만을 인정하는 율곡의 입장으로 볼 때 그의 제자들이 정치적 헤게모니를 쥐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현실적 감각을 중시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도덕 수양의 문제를 탐구하는 퇴계의 제자들이 산림에 근거하여 공부에 전념하는 것도 당연하다. 그래서 선조 이후부터 율곡 문하의 서인은 거의 정국을 주도하는 집권 세력이 된다.”(173 페이지) 율곡은 기(氣)의 움직임만을 인정하고 이황은 리(理)의 움직임만을 인정한다. 그러나 두 사람은 기에 의해서 이가 가려지는 것을 극복하고 리(理)의 순수성으로 돌아가자는 모토를 공유했다.(175 페이지) 서인(西人)은 이율곡의 기호학파에 학문적 기반을 둔 세력이고 남인(南人)은 이황의 영남학파에 학문적 기반을 둔 세력이다.(166 페이지) 그러면 남명 조식은 어떤가. 그는 지리산을 노장(老莊)적 세계를 상징하는 산으로 여겼다.(95 페이지) ‘철학으로 읽는 옛집’의 미덕 가운데 하나는 유교와 불교의 관계를 알 수 있다는 점이다. 요, 순, 우, 문왕, 무왕, 주공, 공자, 맹자로 이어지는 도통론은 부처로부터 이심전심의 비법으로 마지막 혜능에까지 이어진 법통론에 강한 영향을 받은 결과이다.(27 페이지) 성리학은 선진(先秦) 유학이 가지고 있는 형이상학적인 단점을 보완하며 이루어졌고 아무리 성리학이 불교를 배척하며 이루어졌다고 해도 어쩔 수 없이 불교와 도교가 정리해놓은 형이상학에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25 페이지) 윤선도의 호 고산(孤山)은 서울 시절 별서(別墅)를 둔 남양주 수석동이 홍수로 인해 범람하면 사방이 물에 잠기고 퇴매재산만이 물 위에 우뚝 솟아 있는 모습을 보고 지은, 호방함이거나 철없음의 소산이다.(145 페이지) 해옹(海翁)이란 호는 윤선도가 후에(철들었을 때) 보길도 부용동에 살며 유유자적하는 생활을 자위하기 위해 지은 또 다른 호다.(148 페이지) 지천명이라 했지만 퇴계의 경우는 어떤가. 그는 50이 넘어 주자(朱子)를 접했다.(115 페이지) 흥미로운 것은 우리에게 주자가 본격적으로 연구될 때 이미 중국에서는 비판받고 있을 때라는 사실이다.(115 페이지) 다산은 다산초당의 조경 원리를 ‘주역(周易)‘에서 찾았다. 은자(隱者)의 길함을 표상하는 것이다.(201 페이지) 이괘(履卦)에 나오는 유인(幽人)이라야 정(貞)하고 길(吉)하다는 사(辭)이다. 물론 다산초당은 다산이 직접 지은 집이 아니다. 다산의 외가 친척인 윤단이 초옥을 짓고 후학들을 가르치던 곳인데 후에 다산에게 내준 것이다.(다산초당으로 오르는 길 오른편의 묘가 윤단의 묘다.: 200 페이지) ’철학으로 읽는 옛집‘은 사상과 집의 관계, 사상과 정치의 관계는 물론 사상 자체에 대해 숙고하게 하는 장점이 있는 책이다. 가령 성리학이 가진 기본적 정치 입장은 왕권신수설에 반(反)하는 것이라는 점이 그렇다.(209 페이지) 조선은 치열하게 당쟁했지만 (왕을 바꾸기보다) 왕을 내세워 자신들의 지배 체제를 공고히 하는 것이 더 주효하다는 대전제에는 암묵적으로 합의한 듯 하다(209 페이지)는 말을 보라. 이런 모습은 여야(與野)가 치열하게, 아니 진흙탕의 개처럼 싸우다가도 세비(歲費) 인상에 대해서는 일치하는 현 상황을 생각나게 한다. 영남학파는 퇴계의 학문에서 비롯되어 ’심경(心經)‘과 ’의례(儀禮)‘를 중시했고, 기호학파의 예학은 율곡과 구봉(송익필: 宋翼弼)에 의해 계도되었으며 ’소학(小學)‘과 ’주자가례(朱子家禮)‘를 바탕으로 했다.(209, 212 페이지) 예(禮)란 신의 계시를 받고 신을 섬기는 제사 의례 즉 무격신앙(巫覡信仰)에 가까운 개념이다. 그러나 이를 사상으로서 승화시킨 사람은 공자이다. 공자는 시시콜콜하게 예를 따진 사람이다.(216 페이지) 팔일무(八佾舞)란 것이 있다. 공자는 제후인 계손씨(季孫氏)가 천자의 춤인 팔일무를 춘 것을 질책했다. 공자는 계손씨를 보며 (천자가 아님에도 팔일무를 추었으니) 무엇을 차마 하지 못하겠느냐는 말을 했다.(조재모 지음 ’궁궐, 조선을 말하다‘ 33 페이지) 사계(沙溪) 김장생은 임이정(臨履亭)을 지었다. 이는 (두려워하고 조심하기를) 깊은 못에 임(臨)하는 것처럼 하고 엷은 얼음을 밟는 것 같디 하라는 ’시경(詩經)‘의 여림종연(如臨淙淵) 여리박빙(如履薄氷)에서 따온 것이다.(230 페이지) 저자는 우암(尤庵)을 주자(朱子) 탈레반, 사계(沙溪) 예학의 사도(司徒) 바울이라 부른다.(233 페이지) 송시열이 어린 아이처럼 따랐던 스승은 오직 한 사람 주자(朱子)였다.(242, 243 페이지) 송시열은 사계 김장생과 그의 아들 김집으로부터 배웠다. 송시열은 공자가 다시 태어난다 해도 공자와 주희의 말이 다를 경우 주자의 말을 따르겠다고 밝혔다.(249 페이지) 윤선도와 더불어 송시열은 조선 시대를 통틀어 가장 심한 건축 중독자 중 한 명이었다.(257 페이지) 저자는 이황이 툇간을 내면서까지 지키려고 했던 검박(儉薄)한 생활 양식이 17세기에 들어서면서 무너진 것은 왕권에 비해 신하들의 권력이 커진 사회상을 반영한다고 본다.(257 페이지) 이언적이 회재(晦齋)를 주자(朱子)의 호인 회암(晦庵)에서 따온 것처럼 송시열은 주자의 호 회암에서 암(庵)을 따와 우암(尤庵)이라 한 것은 유명하다.(271 페이지) 송시열(1607 – 1689)도 오래 살았지만 그의 정적인 윤증(尹拯: 1629 – 1724)도 오래 살았다. 윤증은 조선 후기 노론과 소론의 분립과정에서 소론의 영수로 활동했던 조선의 문인이다. 파격적이게도 윤증은 81세에 집을 지었다.(295 페이지) 송시열의 주자근본주의에 대항했던 젊은 학자들의 학문적 입장은 양명학(陽明學)이다. 이는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렸다.(299 페이지) 성리학에서 쓰이는 사문난적이란 교리를 어지럽히고 그 사상에 어긋나는 말이나 행동을 하는 사람을 일컫는다. 이 말을 가장 적극적으로 쓴 최초의 인물이 맹자이다. 그는 공자의 도가 아니라고 생각되는 모든 학설을 이단으로 여겨 철저하게 배격했고 공자와 다른 설을 말하는 자가 있으면 단호히 붓을 들어 탄핵했다.(300 페이지) 윤증의 사랑채의 당호는 리은시사(離隱時舍)이다.(318 페이지) 재(齋)나 당(堂)이 아니라 사(舍)를 쓴 것이다. 주역 중천건괘(重天乾卦) 구이(九二: 두번째 양효)는 현룡재전(見龍在田) 이견대인(利見大人)이다. 리은 즉 숨어 있던 곳에서 벗어나는 것이기에 현룡이고 땅 위에 있으므로 밭에 있다고 한 것이다. 사(舍)는 집이라는 의미, 통(通)의 의미가 있는 글자이다. 깊이 생각하고 지은 이름임을 알 수 있다. 리은시사는 용이 숨어 있다가 세상에 나올 때 그냥 나오는 것이 아니라 때를 기다려서 나온다는 의미이다.(322 페이지) 실사구시의 학풍과 양명학자들을 송시열의 칼날에서 비호한 절대 공로자는 윤증이다. 그는 주자학이나 양명학, 어느 것에도 치우치지 않고 서인이나 남인 할 것 없이 두루 교류하며 주자근본주의 시대에 다각적 추론의 장을 열어놓았던 윤증의 집은 비단 학문이나 정치에서뿐 아니라 민중의 삶에서도 그러했다. 흉년이 들면 마을에 공사를 일으켜 그 노임으로 쌀을 지급하고 추수 때는 나락을 길가에 두어 배고픈 마을 사람들이 가져가도 모른 체했다. 그런 윤씨 가문의 가풍 때문에 이 집안은 동학혁명 때도 한국전쟁 때도 아무런 피해가 없었다.(322, 323 페이지) 다 읽고 나니 통쾌한 느낌이 든다. 주자 탈레반 송시열이란 표현 때문이지만 그보다는 윤증의 학문과 삶이 보여준 모범적인 일치 때문일 것이다. 적극 추천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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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만큼 우환이 많은 나라가 있을까? 지리적 위치 탓인가? 아니면 백성들 자체가 심히 까탈스럽고 별날까? 그럼에도 거센 풍파들을 잘 견뎌왔다. 반면 지혜로운 사람들이니깐^^ 시대별 갖가지 고난속에서 꽃 피웠던 학문과 예술, 건축물은 서양과는 또다른 한국적인 미(美)다. 당대의 삶 속에서 고스란히 녹아있는 아름다움이다. 그 아름다움의 중심에 우리네 옛집이 있다. 500여년 훨씬 이전부터 내려온 옛집들을 보면 우리나라만이 표현해낼 수 있는 독특함을 구경할 수 있다. 흥미롭다. 조선의 성리학자들은 왜 건축에 중독되었는가?란 의문을 품고 우리네 선비들이 살았던 시간으로 여행을 떠난다. 책<철학으로 읽는 옛집>을 읽었다.
![]() ▲ 회재 이언적 선생이 낙향해 머물렀던 독락당의 누각인 계정. 고택 내부 건축 구조물과 연결된 독특한 형식의 누각으로 가옥과 자연이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멋스러운 공간을 연출하고 있다.
조선에 뿌리내린 정치적 이념과 학문적 바탕은 성리학이다. 중국으로부터 학문적 사상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성리학 외의 이념과 종교는 뿌리내릴 수 없다. 사상적으로 달리하는 사람들과 계파들을 인정할 수 없다. 조선시대 선비들은 보수적이고 폐쇄적이다. 뭐 지금도 그렇지만.... 당파싸움은 선비들의 출세가도에도 영향을 미친다. 가문이 멸족되기까지 한다. 그런 싸움에서 밀려나거나, 정치적 혐오감을 이유로 자신들만의 세계로 숨어든다. 그 허허로움 마음들 견디기위해 선비들은 자신만의 집을 짓는다. 학문적(사상적) 바탕 위에, 진리를 닦기 위해, 후학의 양성을 위해, 말년의 은둔자로서,.........
지금도 우리는 땅을 사고, 건물을 지을 때 풍수지리를 무한 신뢰한다. 조선시대 선비들도 옛집을 지을 때 풍수를 중요시했다. 앞에는 하천이 흐르고, 뒤에는 산이 병풍처럼 둘러진 곳, 즉 집은 자연의 흐름에 순응해야 한다는 논리. 그들이 자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들여다볼 수 있었다. 그것은 그 옛집들이 많은 전란과 내란, 식민지 시대 속에서도 꿋꿋하게 견뎌온 산 증거들이다. 세월에 마모되고, 낡고, 소실되어졌지만........
한국 건축사는 당대의 지배 이념과 밀접한 관계 속에서 변화해왔다. 한국학의 특수성이라고 하는데... 그래서 한국 건축사는 양식사가 아닌 정신사로 읽어야 한다는 말에 공감했다. 우리 건축은 상식적이지 않다. 한국의 건축은 항상 자연 속에 묻혀 있고 싶어 한다. 조건이 그렇지 못할 때는 일부러 나무를 심어 그렇게 보이도록 하고, 심지어는 돌을 쌓아 그렇게 만들기도 한다. 도시도 마찬가지다. 항상 주변의 산들을 덮고 있어야 안심을 한다. 우리 건축은 건물을 이루고 있는 요소보다 건물과 건물의 관계와 건물과 자연의 관계 속에서 사적 맥락을 짚어야 한다. 과연 대단한 선비들이다. 조선 성리학자들은 자신들의 사상체계를 건축물에 투영한 것이다. 그 건축물과 자연은 불가분의 관계였다. 정치 일선에서 떨어져 나와도 그들은 뼛속까지 선비였다.
성리학과 주자학, 氣vs理, 영남학파vs기호학파, 이언적과 이황, 이이와 윤선도, 김장생과 송시열vs윤증... 다른 사상들을 가진 선비들, 그들의 은신처.... 요즘말로 각기 다른 학문적 스타일에 맞춤 건물들을 투영했다. 와우... 그들이 당대의 내노라하는 건축사들이 아니고 뭐란 말인가? 읽으면서 그들의 배경이 된 학문적 사상들은 완전 이해하지 못해도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그 집들을 지었는지 생각하면 권력의 무상함과 풍진 세월을 모질게도 잘 견뎌왔음을 엿볼 수 있었다. 아울러 그들이 꿈 꾸고 살고자 했던 그들의 나라에 대해서도 많이 아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들의 철학이 머무는 집..... 잘 보살피고 지켜나가야 될 필요성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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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전체적으로 재밌다.
함성호 건축가의 시인라는 이력도 재밌다.
이 며칠 인문학에 푹 빠져있는 시점 읽기에 딱 맞는 책이었다.
유홍준 전 청장의 '나의문화유산답사기'와 같은 느낌이었으며
이용재 건축평론가의 책과도 같은 분위기었다.
전체적으로 읽기 좋다.
건축과 인문학. 두 분야가 전혀 다른 것이 아님을 서서히 깨닫고 있다.
추천.
<철학으로 읽는 옛집. 함성호/유동영/ 열림원> 책 사진 YES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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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출판사에서 제공받은 도서를 읽은 후에 작성되었습니다*
조선의 성리학자들이 건축에 조예가 깊었다는 사실을 이책을 접하기전에는 미처 모르고 있다가 이책에 소개된 건축물들을 따라가면서 비로서 알게되었다. 불혹을 바라보는 시선을 달리 해야한다는것 또한 이책에 시로 지어진 건축에서 이언적에게 정치적 시련이 온 나이 마흔을 설명하는것을 보면서 느끼게된다. 불혹, 우리가 흔히 아는것처럼 흔들림없는 편안한때가 아니라 흔들림없는 편견을 가져야 할 나이라고 해석하는게 더 타당하다는 저자의 말이 설득력있게 다가온다. 예전에는 정치는 단순히 정치가의 몫이라고 생각했지만 주위를 조금만 둘러봐도 우리가 속해있는 사회 어느곳에서도 정치의 영향을 받지않는곳이 없는것같다. 작은 회사라는 조직내에서도 어느 파벌이 있고 누군가의 라인이 있으며 저들의 반대되는 인사들도 존재한다. 그런데 여기서야 정치적인 견해가 다르다고 하더라도 상생의 기회가 주어지겠지만 권력이 들어간 정치권에서는 나와 다른 견해를 가진 인물이 권력의 중심이 된다는것은 바로 내가 설 자리가 없어진다는것과 일맥상통하는것이다.
철학으로 읽는 옛집이라고 하였지만 철학에 대한 깊이가 없는 독자가 읽기에는 많은 무리가 따르는 작품이었다. 다만 조선의 어떤 철학을 가진 성리학자들이 있었고 그들이 철학을 담아 건축한 건물들이 있었다는것을 눈으로 따라갈뿐 한번 읽어서는 그 깊이에 대해서 제대로 파악하기가 힘든 일이었다. 그저 몰랐던 사실들을 하나씩 배워가는 재미로 자연이 녹아든 건축물들을 구경하는 재미로 끝까지 놓지못하고 읽게만들었다. 우리 집의 이름이 사랑채의 이름이 그 당호가 된다는 사실 또한 이번에야 알게 되었다. 회재 이언적이라는 조선시대를 통틀어 가장 독특한 건축가이자 조선 철학을 리중심으로 파악한 선구적 성리학자중 하나인 이언적에게 바로 마흔이라는 나이에 정치적시련이 찾아온다. 승승장구하던 그에게 첫번째 찾아온 시련으로 하여 우리는 그가 만든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을 만날 기회를 얻게된다. 스스로 이름짓기를 독락당이라 이름지은 곳 사람들이 버린곳이 아니라 사람들이 나를 버렸으므로 같이 즐길 이가 없어 홀로 즐길뿐이라고 이름지은 독락당의 대문은 아주 폐쇄적으로 설계되었다. 독락당과 더불어 그가 지은 양진암을 보면 유학의 인과 불가의 자비가 서로 다른것이 아님을 말하고 신분의 구분과는 별도로 학문적입장의 소통과 철학적 문제에 있어서 궁극적합일을 지향하는 공간이라는 의미에서는 하나가 된다. 한국의 전통건축에서 건축은 인공적인 구축물뿐만이 아닌 구축물과 자연을 포함하고 있는 개념이다. 자연을 끌어들여 자연과 어울리는 집, 자연과 하나인 건축
조선시대에 가장 많은 건축물을 남긴 철학자는 뜻밖에도 퇴계 이황이라고 하는데 그는 고향인 온혜리에만 다섯채가 넘는 집을 건축했다고 한다. 단순하게 집을 소유한 건축가가 아니라 성리학적 세계관을 적용시켜 직접 설계도까지 그렸다고 한다. 이렇게 많은 건축을 지었다는 것은 퇴계의 학문적인 추이가 복잡했고 그때마다 일정한 깨달음을 가지고 건축을 했다는것이라는데 솔직히 잘 모르겠다. 저자의 말에 따르면 퇴계의건축은 '리'와 '사람'의 대립을 '리'와 '마음'으로 통합하여 새로운 경지를 개척해 나가는 원칙을 지키는 일탈이 있다고 한다. 조선이라는 나라는 선조이후부터는 왕조중심의 사회에서 사대부중심의 나라였기에 사대부의 학문적입장과 정치적입장은 상당히 긴밀한 것이었다고 한다. 욕망을 긍정하는 주기론은 허균이 유일하지만 제대로 자신의 철학세계를 정립하기전에 대북정권이 이용됨으로써 학파로 성립되지 못했기때문에 주기론은 학파로는 존재하지 않는다.율곡은 기의 움직임만을 인정하고 리의 움직임은 인정하지않지만 이황은 리의 움직임을 인정한다. 보기에는 서로가 달라보이지만 안을 들여다보면 기에 의해서 리가 가려지는 것을 극복하고 리의 순수성으로 돌아가자는 모토는 동일하다는 것이다.
윤선도의 외손이자 [마과회통]을 저술한 의학자이며 거중기를 개발한 엔지니어인 동시에 철학자이며 뛰어난 시인이기도 한 다산이 건축가라는 사실또한 의아함을 자아내지만 수원성이 정약용의 주도아래 이루어졌다는것을 보면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얼마전 읽은 김훈의 [흑산]이란 소설의 주인공이 다산의 형인 정약전의 이야기라는 것을 떠올려보면 다산의 가계도는 경이롭기까지하다. 그런데 약 오백권이 넘는 방대한 저술이 유배기간의 무료함을 달래기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유배지로 내몬 정적들을 끊임없이 의식하며 쓰였다는 사실은 놀라움을 자아낸다.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글에서도 자신의 책이 후세에 전해지지않는다면 후세의 사람들이 자신을 사헌부의 계문과 옥안만을 믿고 평가할것에 대한 두려움을 나타내고 있다. 자신을 비판할수있는것은 오직 역사밖에 없다는 비통한 몸부림이 다산의 글쓰기이다.
독락당, 양동마을과 향단, 산천재,도산서당,다산초당,임이정, 팔괘정,우암고택, 암서재,남간정사,윤증고택등 우리의 철학이 담긴 건축물들이 이것이 다는 아닐것이나 안타깝게도 우리의 건축물들은 주로 목재건축이었고 우리 조선의 역사는 끊임없이 전쟁이라는 시련을 겪어내야 했다. 그와중에 소실된 건축물들 또한 이루 헤아릴수 없이 많았으리라는것을 따로 계산하지않아도 쉽게 추론할수 있다. 철학의 깊이를 잘 모르는 독자로서는 철학이 어떻게 건축물에 녹아들었는지 제대로 이해하기는 힘들었지만 사진으로 보여지는 건축물들에서 아름다움과 멋스러움 그리고 자연속에 어울리는 조화를 느낄수는 있었다.보는 방향과 위치에 따라 얼마든지 다르게 보일수 있는 건축물이라는 우리 한옥에 대해서 조금 더 알수 있는 뜻깊은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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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으로 읽는 옛집 | 함성호 | 열림원
집은 몸이 거하는 공간이다. 몸은 정신이 거하는 공간이다. 따라서 집이란 정신, 즉 철학을 담는 공간이다. 집 짓는 시인 함성호는 이 점에 착안해 한 권의 책 『철학으로 읽는 옛집』에 옛사람들의 마음의 이야기와 정신을 담아냈다. 그는 먼저 역사서를 통해 조선시대 성리학자들이 살았던 시대와 그들이 처했던 환경에 대해 공부하고 사진작가와 함께 그들이 지은 옛집을 답사하여 옛집을 둘러싼 이야기를 확인하고 유추하며 함 시인 특유의 명민한 눈길로 옛집에 얽힌 이야기를 풀어냈다. 시인 저자의 안내를 따라 함께 옛집을 살펴보면, 이언적, 윤선도, 김장생 등 조선 시대 성리학자들이 직접 지은 집엔 그곳에 집을 지어야만 했던 특별한 이유가 있었다. 즉, 옛집엔 단순히 집이 가진 조형적 아름다움만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집이 자리한 위치와 그 집을 짓고 그곳에 거했던 이의 생각과 철학이 녹아있었다. 자신이 직접 설계도를 그릴 정도로 건축에 탁월한 안목을 가졌던 퇴계 이황. 조선시대를 통틀어 가장 많은 건축물을 남긴 퇴계 이황은 자신의 고향에만 다섯 채가 넘는 집을 지었단다. 그는 집을 통해 자신의 성리학적 세계관을 건축에 적용시켰던 것으로, 저자는 퇴계의 건축은 퇴계의 학문과 궤를 같이한다고 말한다. 도산서당을 둘러싼 담은 외부와 내부를 나누는 경계선이 아니다. 그것은 마치 정원의 나무들처럼 심어져 공간을 구획해 풍경을 끌어들이는 구실을 한다. 이것이 곧 보이지 않지만 모든 만물의 작용 원리인 리(理)철학과 맞닿아 있다는 것이다. 이렇듯 퇴계 이황 뿐 아니라 고산 윤선도, 다산 정약용, 회재 이언적, 남명 조식 등 조선의 성리학자들은 자신의 집을 그들의 학문과 사상에 맞추어 건축했다. 집이라는 공간을 단순히 몸을 담는 공간으로 삼은 것이 아니라 자신의 정신을 이룬 학풍과 문학적 감성과 철학을 담는 공간으로 직조해 낸 것이다. 그리하여 먹물이 뚝뚝 흐르는 듯한 싱싱함과 흑백의 조명 속에서 뭔가 비밀스런 꿈을 간직한 듯한 옛집 풍경과 함께 한 권의 역사서, 사상서, 건축 기행서로 폭넓게 읽히는 이 책은 무척 흥미롭게 다가온다. 목차의 제목조차도 옛집의 우물에서 길어 올린 한 모금의 생수처럼 싱그럽다.
시로 지어진 건축 독락당 은유와 상징의 집 양동마을과 향단 빛, 방울 소리 산천재 철학의 정원 도산서당 해상의 도학자 고산 윤선도 이곳에서 노래 부르고, 이곳에서 곡하리라 다산초당 한 현실주의자의 포석 김장생의 임이정 암중모색의 집 팔괘정, 우암고택, 암서재, 남간정사 다각적 추론의 집 윤증고택
옛집의 우물가에 서서 두레박으로 퍼 올린 물 한 바가지 마시는 동안, 시인은 나직한 목소리로 옛집에 얽힌 이야기를 들려준다.
숙종 때의 문신이며 학자였던 송시열은 죽은 왕의 집터를 잘못 잡는 바람에 정계에서 쫓겨나 금사담의 바위 위에 ‘암서재’를 짓고 홀로 은거하게 되었다. 시인은 영혼이 맑아 어느 순간 시공을 뛰어넘는 것일까. 그는 암서재의 빗장을 풀고 옛집으로 들어가 수백 년 전 옛사람 송시열의 마음의 이야기를 유추해 내고 그와 나눈 대화를 독자에게 들려준다. 집을 보려면 어떻게 생겼느냐가 아니라 어디에 위치하고 있느냐를 보아야 한다며 옛집의 문밖에 나가 옛집의 오래된 마음을 들여다보라고 주문한다.
詩로 지은 집, 이언적의 독락당에는 오래된 비밀이 있다. 외삼촌인 우재 손중돈과의 애틋한 정과 일순 정계에서 탁핵으로 밀려나야 했던 세상에 대한 울분이 담겨 있다는 것이다. 그는 독락당의 대문을 솟을대문 없는 중문 두 개로 매우 폐쇄적으로 설계했다. 그리고 사마광의「독락원기」에 나오는 시구에 몰입해 스스로 즐긴다는 뜻의 독락당(獨樂堂)을 지었다.
낚시 드리워 고기 잡고, 소매 걷어 약초 뜯노라. 도랑 치고 꽃에 물 주며, 도끼 들고 대 자른다. 세수하여 땀 식히고, 산에 올라 주위를 바라본다. 이리저리 바람 쐬며 거니니 내 마음이 흡족하다. -사마광의 「독락원기」에서
비록 세상에서 버림받아 독락당에서 홀로 즐겼다지만 이언적의 옛집에서는 그만의 독특한 여유로움이 느껴진다. 세상이 그를 포기해도 결코 스스로를 포기하지 않는 고아한 자존감. 이것은 쉽게 좌절하고 쉽게 포기하는 요즘 세태 사람들이 배워야 할 정신이며 시인의 눈길을 따라 걷는 옛집 답사의 매력이다. 내 마음을 알아챈듯, 시인 저자는 우리 옛집의 건축사를 양식사가 아니라 정신사로 읽어야 한다고 말한다. 옛집은 선현들의 사상과 철학이 완성된 장소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도산서당과 퇴계 이황을, 또는 생애 5백여 권에 달하는 방대한 저술가 정약용과 다산초당을 함께 기억해야 하는 이유도 될 것이다. 과연 조선시대 성리학자들의 옛집은 그네들의 삶과 사상과 철학이 담긴 공간이었다. 좋은 책은 말없는 행간에서 끊임없이 독자의 상상을 자극한다. 이 책 속의 배경인 옛집은 내 창작 무대에도 스토리를 풀어가는 비밀스런 공간으로 되살아날 것 같다. 읽는 재미와 함께 보는 재미도 한 몫하는데 사진이 너무나도 아름답다. 한 편의 시처럼 정갈한 사진이 가슴에 젖어와 한없는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사진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새벽 미명의 고요 속에서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는 듯한 신비로운 환상에 젖게 된다. 먹빛 농담이 뚝뚝 흐르는 듯한 흑백사진이 이토록 무구하고 아름다운 줄 처음 알았다. 『철학으로 읽는 옛집』은 역사서이며 철학서이며 건축 기행서이다. 그리고 먹빛 농담 속에서 도란도란 비밀스런 이야기를 건네 오는, 참으로 아름다운 한 권의 사진집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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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선조가 남긴, 나무와 흙으로 이루어진 자연 그 자체이며 풍수와 지리, 실용과 철학을 담고 있는 것이 우리 한옥이다. 각각의 성리학자들이 자신들의 의지와 철학을 담아 강학(講學) 혹은 생활의 공간으로 한옥을 설계하고 건축해 나름의 의미까지 부여한다.
성리학이란 무엇인가? 중국 송나라때 주희가 집대성한 유학의 한 분파로 조선의 근본 이념으로 삼을 정도로 대단한 학문이 아니던가? 또한 그 성리학을 바탕으로 여러 개의 학파가 생겨나고 정쟁(政爭)에서도 무수히 많은 사화가 일어나지 않았던가!
이런 성리학자들이 수많은 다툼속에서 밀려나 끝없이 몸과 마음을 수양하며 자신들의 사상과 철학을 담아낸 건물들이 한옥이다. 여기에는 역사책에서 이름 꽤나 들어봤을 법한 성리학자라고 할 수 있는 이들이 혼신을 기울여 설계하고 만들었다고 할 수 있는 집들이 나온다.
회재 이언적의 시로 지어진 건축, 독락당 / 은유와 상징의 집, 양동마을과 향단
성리학에 관한한 선구자이며 워낙 유명한 인물들이라 학문에 관해서라면 혹 모르지만 건축을 이 정도로 많이 하였을 거라곤 짐작조차 하지 못했는데 그 안에 담긴 의미 또한 녹록하지 않게 다가온다.
이 수많은 건축물 중 내 눈길을 끈 것은 회재 이언적의 독락당과 향단, 그리고 김장생의 임이정, 윤증고택이었다.
먼저 탄탄대로의 길을 걷던 회재 이언적이 벼슬에서 내쳐져 귀향하여 지었다는 독락당을 그 당시 상황과 연관지어 살펴보면...
[ 독락이라는 말은 유가에서는 부정적인 인식을 갖고 있는 말이다. 그 근거로 맹자 - 양혜왕 '상편'에서 독락(獨樂, 홀로 즐김)은 여인락(與人樂, 여럿이 같이 즐김)보다 못하다고 가치 하위를 재단했다. 그러나 사마광은 세상 사람들이 버린 곳에 가서 얻는 즐거움은 나누고 싶어도 나눌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홀로 즐길 수 밖에 없다고 해명한다.
이언적은 이 말을 자신을 내친 인사들에게 그대로 돌려주고 싶었을 것이다. 단지 '사람들이 버린 곳'이 아니라 '사람들이 나를 버렸으므로' 자연히 같이 즐길 사람이 없으니 홀로 즐길 뿐이라고. ]
사람들이 나를 버렸다니 이 대목에서 저자의 해석이 독특하면서 재밌다. 마치 저자가 이언적의 분신이 되어 살아돌아온 것만 같은 해석이다. 이런 저자의 재치있는 말솜씨는 책 전반에 걸쳐 간간히 등장하는데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그리고 독락당에서 빠트릴 수 없는 게 정자 '계정'인데 하천을 면하고 있어 폐쇄성을 지닌 독락당과 대조적이라 한다. 폐쇄성과 개방성을 두루 갖춘 건물이라니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이언적 그가 지은 또 하나의 건축물, 향단. 그가 경상감사로 한창 잘나가던 시기에 어머니와 동생을 위해 지어준 건물임에도 불구하고 그 폐쇄성은 더욱 짙어진 건물이라 한다. 그는 향단을 단순한 집, 살림을 하는 개념에서 벗어나 그곳을 관청과도 같은 의미를 부여했던 듯하다. 즉 살림집에 관청과도 같은 의미를 부여하고 이 둘을 엄격하게 구분해놓았다는 것이다.
이를 잘 대변해주는 저자의 말을 언급해보면...
[ 길의 흐름상 향단은 관 업무를 위한 행랑채와 부엌의 기능이 하나로 묶이고, 안채를 중심으로 한 길이 존재하며, 사랑채와 관청의 기능이 또 하나로 묶일 수 있는 세가지 길을 갖고 있다. 향단의 안채는 사랑채의 마당으로 드나드는 특이한 집인 것이다. 앞에서 얘기한 행랑채와 안채의 과격한 고저 차는 관 업무를 위한 행랑채의 분주함에서 안채를 보호한다. ]
자못 흥미로운 부분이 아닐 수 없다. 한 집을 제각각의 기능을 위해 고저 차를 두다니... 그 집에서 살았던 이는 이를 어떻게 느꼈을지 궁금해진다.
김장생의 임이정은 정면 세 칸 측면 두 칸으로 강학 공간을 넓게 쓴 풍경이 좋은 집이라 하는데 이 건물은 다른 무엇보다 온돌방의 삼분의 일을 60cm정도 들어올려 또 하나의 마루를 만들어 집 자체를 입체적으로 만듦은 물론 풍경을 조망할 수 있는데다 온돌을 지필 수 있는 아궁이의 공간까지 확보했다니 공간 활용이 정말 뛰어나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이런 점은 윤증고택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 바로 '시스템 도어'라는 것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 가운데에서 미닫이로 열린 문이 양끝에서 다시 여닫이로 활짝 열리는 것이 아닌가? 어떻게 된 일인가 하고 자세히 보았더니 끝의 문짝에 돌쩌귀가 달려있다. 그리고 문틀의 4분이 1이 문짝과 함께 일체화되어 열릴 수 있는 구조로 되어있었다. ]
그 당시 지어진 집으로서는 획기적인 발명(!)이 아니었을까 싶다. 원래 있었던 것이라 해도 정말 놀라움 그 자체다. 한옥과 관련된 혹은 우연히 TV를 보다 보면 여름철 한옥의 문이 위로 들려져 사방이 개방된 모습을 종종 볼 때가 있었다. 그때도 신기해서 감탄을 금치 못했는데 이번 윤증고택의 문도 그저 놀랍고 신기하다.
건축에도 문외한이지만 철학(성리학)도 그리 잘 알지 못했고 한옥도 단편적으로만 알 뿐 깊이 있게 알지 못했는데 책을 덮으면서 든 생각은 이 책 한권으로 성리학자 그들 나름대로의 생애와 가치관, 정치사, 건축사 이 모든 것을 한꺼번에 공부한 것만 같다는 것이다.
특히 성리학에 지나치게 치우치지도, 그렇다고 건축을 어렵게 다루지도 않아 쉬이 볼 수 있었고 성리학과 관련하여서 예송논쟁 등에 대해 좀더 세부적으로 접근할 수 있어서 좋았다. 그리고 성리학도 그렇지만 다른 여러 한옥들, 즉 건축에 대해 보다 더 깊이 알고 싶은 아쉬움을 뒤로 하고 책을 덮으며 여기에 나오는 모든 한옥을 직접 견문해보고 싶은 마음이 물씬 들었다.
해당 서평은 출판사에서 제공받은 도서를 읽고 작성된 서평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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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옥에 대한 책들을 죽 읽고 있었기에 새 책이 나와서 반가왔다. 유명한 고택과 그 고택을 지었던 유학자들의 삶과 사상을 설명하고 있다.
이미 김봉렬님의 책들을 읽었기에 아무래도 그 책들과 비교가 된다. 김봉렬님이 소개한 집들과 조금 겹치기도 하지만 새로 소개된 집들이 많이 있어서 반갑다. (독락당과 향단, 도산서당은 아마도 그 어느 저자도 빼 놓기가 힘들게다.)
다만 배치도가 없어서 너무 아쉬웠다. 도면이나 배치도를 상상하지 않고는 건축관련 책을 읽지 못하는 관계로 인터넷에서 배치도와 도면까지 찾아가며 읽느라고 힘들었다(?). (나는 게으르다.)
내가 김봉렬님 책을 먼저 읽었기 때문인지 이 책이 그 책들보다는쉬운 것 같다. 건축학적 묘사보다는 그 건축물과 관련된 인물들의 생애와 사상에 더 역점을 둔 것 같다. 또한 건축물 자체도 중요하지만 주변 자연에 역점을 두는 저자의 관점이 마음에 든다. 나도 최근에 결국 인간의 건축이란 결국 자연, 지형 속에 작은 점을 찍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러다 이제 풍수까지 손을 댈라...)
흑백사진과 편집이 좋고 특히 표지가 마음에 든다. 없어서 아쉬운 배치도와 평면도는 독자들이 알아서 인터넷에서 검색해보란 뜻인가?
책을 읽으면서 할일 없이 여행 계획을 짜 보기도 한다. 여행이란 계획짤 때가 제일 행복하다. (언제 보길도를 가볼까나...)
시로 지어진 건축 독락당(獨樂堂) -이언적 http://blog.naver.com/ihhjun?Redirect=Log&logNo=101258585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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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연정 http://blog.naver.com/kimq1?Redirect=Log&logNo=60071570755 낙서재 http://dhfodhfo00.blog.me/801381928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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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괘정 http://blog.naver.com/cglee1498?Redirect=Log&logNo=150130179934 암서재 http://blog.naver.com/prothneyi?Redirect=Log&logNo=130122949196 남간정사 http://blog.daum.net/hmg1120/6976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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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이라는 말도 그렇지만 옛집을 읽는다는 것도 어렵다. 그런데 묘하게도 철학으로 읽는 옛집이라고 하니 호기심이 생겨버렸다. 오래 전, 스코트 니어링 자서전을 읽으며 그가 살아가는 삶의 방식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게 되었고 지금 내가 사는 곳과는 환경적인 조건이 다르지만 왠지 스코트 니어링이 자립자족의 삶을 살아가는 과정에서 돌로 만든 집에 대한 글이 마음에 새겨져버렸었다. 그래서 한때는 내 소망중에 하나는 스스로 돌로 만든 자그마한 집을 지어 살아가는 것이 되기도 했었다. 우리의 현실에는 오히려 흙집을 만들겠다는 소망이 더 맞는지도 모르겠지만 내 고향 제주의 아담한 돌담을 떠올리면 돌집도 그리 나쁜것만은 아니지 않을까 라는 생각도 해봤지만 어느새 그런 생각은 현실의 바쁜 생활속에 파묻혀버려 잊혀져가고 있었다.
"빛은 건축의 영혼이다(74) 우리 건축은 사실 양식사적인 구분이 되지 않는다. 다포니, 주심포니, 익공이니, 수서니, 앙서니 하는 양식의 구분은 하고 있지만 엄밀히 말해서 그것들을 양식사로 분류하기에는 일정한 무리가 따르는 게 사실이다. 그것들이 어떤 사회경제사적인 의미를 갖고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심지어는 시대 구분없이 통사적으로 쓰이고 있다. 일정한 양식의 변천과 사회경제사적 의미를 연관시킬 수 없다는 것ㄱ은 서구적인 시각에서는 분명 난점이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한국 건축사뿐만 아니라 한국사, 더 나아가서는 철학을 포함한 한국학의 특수성임을 인식해야 한다. 서구의 시각으로는 도지히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가 있다. (76) 그렇다면 내가 가지고 있는 해답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한국 건축사는 양식사가 아니라 정신사로 읽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한국 건축사는 당대의 지배 이념과 밀접한 관계 속에서 변화한다는 것이다. ... 한국의 건축은 항상 자연 속에 묻혀 있고 싶어 한다. 조건이 그렇지 못하 ㄹ때는 일부러 나무를 심어 그렇게 보이도록 하고, 심지어는 돌을 쌓아 그렇게 만들기도 한다." (77)
해당 서평은 출판사에서 제공받은 도서를 읽고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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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포 자락 휘날리며 신선놀음에 푹 빠져 있던 존재. 양반을 떠올릴 때마다 부정적인 이미지만이 그려진다. 어느 시대에나 위정자들은 그릇된 길을 곧잘 걸었으면서도 역사에 길이 남았다. 결국 그들을 지탱한 건 이름 없는 민초였다. 풍류를 즐기기에 제격인 곳에 이를 데마다 어김없이 양반의 흔적을 만난 것도 내 편견이 강해진 원인이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이 좋은 광경을 홀로 즐긴 죄를 물어 세금을 거하게 물리고 싶다. 최근에는 모든 게 분화됐다. 지극히 문과적인 머리를 타고난 나는 고등학교 때부터 철저히 숫자와는 담을 쌓았다. 대학 진학 후에는 그 정도가 더욱 도드라진 나머지 이러다가 기본적인 셈마저 잊는 게 아닌가 싶을 지경에 이르렀다. 그런 내가 건축 도면을 그리고 해석하는 일을 성공적으로 해내는 건 불가능과도 같다. 그런 일은 전문가에게 맡기는 게 당연하다며 애초부터 뒷걸음질을 칠 게 분명하다. 예전에도 각자의 역할이라는 게 있긴 했다. 타고난 신분이 앞으로 행할 직분을 결정했기에 집을 짓는 일 또한 그들에게 돌아갔을 것이다. 오늘날과 다른 점이 있다면 대량생산 대량소비가 이루어지기 힘들었다는 점 정도일 듯하다. 참으로 비효율적이었지만 대신 좀 더 많은 공을 들일 수 있었다. 그 곳에서 기거할 사람이 원하는 형태를 지닌, 더 나아가 (저자가 주장하듯) 한 개인의 철학이 깃든 공간이 그 시절의 집이었다. 당대를 풍미한 인사들을 만나는 일은 사뭇 긴장됐다. 오늘날의 시선으로는 높은 지위에 오르거나 거한 부를 거머쥐는 게 최고일 테지만, 그 시절엔 모든 게 달랐다. 영의정까지 승진을 거듭하고, 왕의 스승이 되어 학문적 소양을 인정받는 것이야 물론 영예로웠지만, 일부러 높은 자리를 거부한 채 자연에 틀어박혔던 이들도 꽤 존재했다. 그게 과연 자신의 선택이었을까. 입신양명이야말로 대장부로 태어난 이들이라면 이루어야 할 인생의 숙제 즈음이 아니었을까. 그러나 이내 난 이런 나의 생각이 철없음으로부터 비롯된 것일 수도 있겠다는 데까지 생각이 이르렀다. 나의 생각에는 시대에 관한 고려가 빠져 있었다. 책에서 만날 수 있었던 많은 이들의 삶이 걸쳐 있는 시대가 모든 걸 말해주고 있었다. 당쟁은 치열했다. 분명 같은 이상을 꿈꿨던 동지가 어느 시점에는 적으로 돌변해 나를 공격했다. 너무 혼란스럽다면 차라리 한 발 물러나는 게 현명한 태도일 수 있다. 정쟁의 소용돌이에 잘못 휩쓸리면 자신은 물론 일가족 몰살의 비극을 맞이할 수도 있다. 관직에 등용되지 아니 함이 그저 그럼의 상징처럼 여겨질 수도 있을 거 같았는데, 목숨을 보전하려 들었던 선택은 도리어 선비의 고고함을 지키기 위한 노력인양 해석되는 듯도 했다. 책을 읽으면서 공간을 엿보게 될 줄 알았는데, 이 책을 읽는 내내 나는 역사를 엿봤다. 시초부터 왕권과 신권이 치열하게 대결했던 나라가 조선이었다. 왕과 사대부에게 같은/다른 예법을 적용해야 한다는 주장이 목숨을 바쳐 사수해야 할 정도로 중요했다는 사실이 나로서는 이해가 어렵지만, 그건 어쩌면 그들 시대의 법칙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집은 주인과 닮은꼴이었다. 오늘날 집의 경우 구조는 고정적일지라도 내부를 어떻게 꾸미느냐에서만큼은 주인의 성격이 드러난다. 선현들의 경우에는 집의 구조에서부터 스스로 결정할 수 있었다. 취향의 차이일 테지만 내 경우에는 편리함 측면에서 으뜸일 듯한 윤증의 집이 가장 마음에 와 닿았다. 미닫이와 여닫이의 중첩 결과 색다른 매력을 풍길 수 있게 된 그의 집 문은 기회가 닿는다면 직접 경험해 보고 싶기도 했다. 집보다도 어쩌면 집주인 윤증의 열린 사고를 닮고 팠던 것일 수도 있다. 조선 후기는 그야말로 송시열의 독무대였다. 오로지 주자만을 신봉했던 마음이 너무 컸던 송시열은 마치 사이비 종교에 빠진 신도 마냥 주변을 격렬히 배척했다. 그의 공격으로 휘청이다 마침내 세상 밖으로 밀려난 이들이 한둘이 아니다. 심지어 그는 6척 거구였다 하니 그에게 맞서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윤증에게 송시열은 두려움의 대상일 수 없었다. 임금의 눈도 빤히 바라보는 그였다. 그의 학문은 사문난적이 아닌 탈주자학이었다. 좋고와 더 좋고의 차이는 그리 크지 않았다. 책이 다룬 곳 중 어디에 데려다 놓아도 자연과 하나될 수 있을 듯했다. 그나저나 평소에도 그다지 유쾌하게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송시열이라는 인물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이 이번 독서로 조금 더 싹텄다. 스승 김장생의 집 임이정 옆에 팔괘정을 지은 그의 마음이 순수하지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변에 그처럼 자신이 믿고자 하는 것만 보고 듣고 믿는 존재가 있다면 무척이나 숨이 막힐 거 같다. 그래서 다들 숲속에 집을 짓고 파묻혔던 것이려나! |